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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74. 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by 자한형 2022.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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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에 대한 노래를/ 임만빈

다리를 건넌다. 내를 건너면 대웅전이다. 다리 밑을 흐르는 물은 발뒤꿈치를 들고 걷듯 조용조용 흐른다. 검고 투박한 듯한 겨울의 인상이 몸에 투영되어 그렇게 정중하고 무거운 듯한 걸음걸이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골짜기 위쪽에는 얼음이 아직 물 위를 덮고 있고 소() 중앙에는 얼음들이 녹아 봄빛을 맞으려는 듯 가만히 가슴을 열고 있다.

물속에는 몇 마리의 산천어들이 유영하는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추우면 얼음은 산천어를 보호하기 위하여 두께를 더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날씨가 풀리니, ()가 몸을 풀고 산천어들에게 바깥구경을 시켜주고 있는 듯하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보듬고 안고 간다는 것, 약하게 보이면 보듬어 안고 강한 듯 설치면 버릇없음을 탓하듯 한 번씩 꾸지람을 준다는 것, 결국 내 아픔도 매를 들어 나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수술을 받고 침대에 누워 괴로워할 때 아내가 이야기했었다. 꿈이라고, 지나고 나면 꿈처럼 느껴질 것이니 참으라고, 아픔이 다 그렇지 않던가. 한순간은 계속 될 듯이 겁을 주다가 어느 순간 문득 사라지는 것, 회복하고 나면, 아픔을 벗어나고 나면 정말로 내가 언제 그렇게 아팠느냐고 꿈이야기를 하듯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 그런 것이 아니던가.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서니 몸을 비틀고 서 있는 향나무가 있다. 보호수라는 팻말이 붙어 있듯이 수령이 오래된 듯 자태가 우람하고 귀한 모습이다. 가지를 자른 자리가 동물의 속살을 베어낸 듯 붉다. 저 붉은 살, 설익은 스테이크를 칼로 잘랐을 때 보이는 듯한 저 색, 입가로는 육즙을 흘리며 씹어 삼키는 타자의 단백질, 약자는 강자에게 먹혀야 된다는 원시적 삶에서부터의 죄의식, 그래서 제사 때 향나무의 살점 같은 붉은 조각을 베어내어 향불을 피우면서 인간들은 원죄의 죄를 조상 앞에서 빌고 무릎을 꿇는지도 모른다.

향나무를 보면 또한 숙모의 절규와 어릴 적 사라져간 사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숙모는 여러 명의 사촌들을 낳았지만 하나같이 모두 어릴 적에 죽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인(死因)이 논가에 돌로 쌓아 만든 비위생적인 우물물을 식수로 사용했기 때문에 생긴 장내 세균에 의한 설사와 탈수로 생각되지만, 그 시절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조상의 물건을 건드려서 생긴 동티로 간주했었다. 그래서였는지 어린 사촌이 숨을 거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울긋불긋한 옷들이 입혀진, 짚으로 만든 인형들이 우물 옆의 향나무에 여러 개 걸려 있곤 했다.

아내는 저만치 대웅전 앞을 서성이고 있다. 부처님에게 내 병의 회복을 감사하고 앞으로의 안위를 빌고 있는 듯도 하다. 나는 주위 풍경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장을 담근 단지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장의 재료가 된 콩과 장 담그는 과정을 상상해 본다.

콩은 오랫동안 뜨거운 태양 빛과 온화한 저녁 달빛과 차가운 새벽 별빛을 하나하나 가슴에 담아 몸피를 키우다가 꼬투리를 트고 밖으로 튀어 나왔을 것이다. 다음에는 물에 씻겨 솥에 넣어지고 낙엽과 장작불로 데워졌을 것이다. 솥 안에 열이 가득 차면 콩의 영혼은 스르르 빠져나와 솟아오르는 김으로 탈바꿈하여 자신의 굳은 몸을 부드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망가져야 새로움이 탄생한다고 그들은 서로 엉키고 으깨져 외형을 바꾸어 매주로 변해서 저 단지들에 담기어 짜디짠 간장의 졸임을 가슴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단지 속에서 솔잎들의 속삭임과 개울물의 조잘거림을 얼마간 듣다가 맑은 태양빛으로 짠맛의 강도를 높이고자 단지 뚜껑을 열어 놓는 날 낮에는 수분을 날려 보내 졸임의 강도를 높였을 것이고 보름밤에는 만월의 달빛으로 몸을 씻어 청아함을 유지했을 것이며 초승달과 그믐달의 밤에는 부족함의 미덕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한 인고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마침내 머리를 깎고 속세의 먼지를 털고자 밤새워 고뇌하는 자들의 배고픔을 채워주게 되었을 것이다.

망념(妄念)에 빠져있는 중에 갑자기 기침이 난다. 수술 받은 가슴이 결린다. 가슴을 움켜쥔다. 괴롭다. 세 번이나 가슴을 열고 드러낸 덩어리, 성장이 남달리 빠르다고 움켜쥐어 뜯어낸 붉은 살, 암이라는 덩어리는 정말로 꽃이 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로 암 덩어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옆구리에 길게 그어진 사선의 상처는 내 가슴속 아픔이 드나들었던 길일 것이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그 상처는 한 번씩 경고의 붉은 등을 켤 수도 있으며 내 삶이 이것 뿐인가 하는 아쉬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의 안도감, 평화로움을 줄 수도 있다. 끝이 보이지 않아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던 삶의 경계점이 저만치일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도 한다.

어찌 하겠는가. 삶이란 유한(有限)한 것이 아닌가. 유한함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무한(無限)한 것처럼 사는 것이 우리네가 아닌가. 갑자기 한순간 한순간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어쩌면 찬란하기까지 하다. 죽음을 선고 받았다가 생명을 다시 받은 기분, 산사의 경내로 비쳐드는 삼월의 햇빛을 그냥 주어버리는 것이 아깝고 아쉽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하루하루 살아있음이 왜 이리 황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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