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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75. 섬

by 자한형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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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창옥

장 그르니에가 말한 비밀스러운 삶, 조용한 삶을 나도 살고 싶다. 데카르트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문명의 편리함을 충분히 누리며, 사람들 속에 섞여 떠들어대면서도 비밀스럽게 살았다고 한다. 장 그르니에는 또 자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곧 이라고도 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 없는 단순한 생활, 그 생활을 거리낌 없이 공개함으로써 오히려 정신만은 고요히 지켜내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찌 가능하다는 건가.

뽀얗게 흐린 창밖을 내다보다가 우산을 찾아들었다. 시장에 갈 생각이다. 다리를 건너면 시장이다. 다리 중간쯤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본다. 물이 깨끗하다. 시장부근이라 더러울 때가 많은데 오늘은 맑게 흐른다. 우산을 접고 비를 맞는다. 보슬비를 맞는 것이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 몰랐다. 정수리에, 블라우스에, 얼굴에 비가 닿는다. 비가 내 속으로 스며든다. 시원하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 않다. 비를 맞거나말거나, 머리에 꽃을 꽃든가말든가 무슨 상관이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건 또 무슨 배짱인가 싶어서 혼자 웃는다.

아주머니들이, 아저씨들이, 할머니들이 과일을, 그릇을, 옷가지를, 생선을 팔고 있다. 상점과 상점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대개는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후미진 곳도 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발밑이 질퍽하다. 얇은 운동화에 빗물이 스며든다. 이 또한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의 삶, 그 이면까지 가늠할 순 없지만 그들에게서 건강하고 치열한 생활인의 모습을 본다.

손질해서 주실래요?”

, -”시원스레 대답하며 아주머니는 고등어를 도마 위에 내려치듯이 놓고는 머리를 탁 친다. 시퍼런 비날 앞치마에 핏물이 튄다. 잘리자마자 고무함지박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고등어대가리와 도마 위에 널브러진 내용물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인가. 검정비닐봉지에 고등어 두 마리를 담아서 내게 건네고 지폐를 받아 얖주머니에 밀어 넣고 거스름돈을 내주기까지 그녀의 동작은 거침이 없다.

배가 고프다. 투명비닐로 칸을 지른 간이식당에서 밀수제비를 시켜놓고 앉아 있다. 탁자가 두 개, 동그랗고 빨간 플라스틱 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맞은편에서 먼저 온 남자가 칼국수를 먹고 있다. 발치에 놓은 고등어봉지에서 새어나오는 비린내가 좀 미안하지만 시침을 뗀다. 빗질이 안 된 반백의 머리칼에 주름살이 깊게 팬 검붉은 얼굴의 남자, 그의 거친 입술이 부드러운 국수를 후루룩후루룩 빨아 당긴다. 국수그릇과 깍두기종지 사이를 그의 젓가락이 규칙적으로 오갈 때, 낡은 줄무늬 티셔츠 위에 걸친 주머니가 많이 달린 빨간색 조끼도 좌우상하로 움직인다.

수제비가 나와서 나도 먹기 시작했다. 그와 내가 겸상처럼 마주 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남자와 나에게 오찬을 마련해준 아주머니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밖을 내다본다. 익명의 세 사람이 투명한 실내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과 밖이 서로 훤히 보인다. 그게 조금도 불편하지가 않다.

고등어봉지를 들고 식당을 나서면서 나는 장 그르니에를, 데카르트를 생각한다. 그들이 고요한 생활을 향유한 것은 도심 속에서도 익명성을 확보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드러내고 떠들어대서 어떤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도록 선수를 쳤기 때문일까. 둘 다일 게다. 나는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된다이다.

일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사람들이 들고난다. 그들에게 나는 애정을 느낀다. 진심이다. 천직이라 여기며 30년을 보냈다. 이 생활은 어쩌면 데카르트가 누린 비밀스러운 삶에 비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상적이고, 공개된 생활이란 측면에서 그렇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그들이 내 정신세계를 비집고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거나 괴롭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순하고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마음은 늘 소란스럽고 정신은 맑지 않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게 도무지 되지가 않는다. 비밀스럽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대체 왜? 나는 너무 많은 일들에 에워싸여 있다. 가야할 곳이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으며 가져야 할 것이 많다. 많고도 많은 그것들이 근심을 낳고 낳아서 나를 시끄럽게 한다. 무엇보다 난감한 것은 그 많은 것들을 내가 조금도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여 장 그르니에의 차원을 달리하는 이 아니라 설령 무인도에 간다 해도 나는 결코 단순하고 조용하게 살아갈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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