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風景畵) 속의 자전거 길
유재용
중학교 이 학년을 겨우 수료하고 할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둬야 했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몸부림치며 눈물 꽤나 흘렸었다. 그래서 내 딴에는 제법 인생의 쓴맛을 맛본 걸로 치부하고 있었지만, 생각하면 그때만 해도 나는 세상사를 풍경화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나를 그 풍경화 속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년쯤 쉬었을 때 아버지가 나를 조용히 불러 앉혔다.
"까짓 학교 공부를 많이 해봤자 소용없느니라. 뭐니뭐니 해도 일찌감치 돈 버는 기술 배우는 게 제일이야."
아버지는 홍 만도라는 사람을 그 예로 들었다. 흥 만도씨는 겨우 국민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일찌감치 장사하는 기술을 배워 지금은 커다란 문구 도매상의 주인이 되어 가지고 대학 나온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처지라고 했다. 나더러 그 양반 밑에 들어가 일하면서 돈 버는 기술을 배우라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만도문구사)로 갔다.
아버지는 가게 문지방을 넘어서면서부터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가게 안으로 몸을 다 들여놓기까지 아타 열 두 번은 절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서 홍 만도씨를 바라보았다. 만나본 일은 없었지만 아버지가 절을 하고 있는 상대가 곧바로 흥 만도씨일 테니까 말이다
헌데 흥 만도씨는 아버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손님인 듯한 사람에게 마치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러듯 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만도문구사) 안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홍 만도씨에게 흥 만도씨는 손님에게, 두 사람은 마치 절하는 인형처럼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손님이 가게를 나갔다. 흥 만도씨의 가슴이 지체없이 펴졌다. 그 펴지는 가슴을 향해 아버지가 또 한번 절을 했다.
내 눈에 아버지의 큰 키가 그때처럼 멋없어 보인 적은 없었다. 아버지와 흥 만도씨가 서로 키를 바꾼다면 얼마나 제격일 것인가. 아버지는 키 작은 흥 만도씨를 내려다보기가 죄송스러워서 자꾸만 허리를 굽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 번영상회 오씨가 말하던 애를 데리구 오셨구먼. 맡기구 가시우."
홍 만도씨가 그 눈꼬리처럼 꼬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씨렇게 해서 아버지는 풍경화 속으로 나를 밀어 넣어 놓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밤 여덟 시가 되니까 배달 나갔던 애들이 자전거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왔다. 세 명이었는데 나와 같거나 나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우선 각자 들고 들어온 손가방을 사장님 (흥 만도씨) 앞에다 차례로 풀어놓았다. 돈이었다. 배달한 물건과 수금한 돈의 액수를 맞춰보는 것 같았다. 계산이 끝나자 아이들은 가게 안쪽 간막이 뒤의 수도간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옆에 붙은 골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저녁밥이 날라져 와 아이들을 따라 들어갔다.
사장님이 나를 데리고 가서 끼워 넣으며 소개를 했다.
"새루 들어온 애다. 처음이라 잘 모르니 너희들이 데리구 가르쳐 줘라."
보는 둥 마는 둥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 틈에 어색하게 끼어 앉아 나도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난 아이들이 다시 가게로 나가서, 그날 공장에서 새로 들어온 물건을 풀어 정리하고 밖에서 주문 받아 온 물건을 대충 뽑아놓고 나니 그럭저럭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오늘 일은 이걸루 끝이다. 자, 그럼 어서 변소에를 다녀와라."
사장님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채근했다.
"전 별루 변소 가구 싶은 생각 없는데요."
"잔소리 말구 하라는 대루 해. 저 모퉁이 공중변소, 너 낮에 가봐서 알지? 억지루라두 똥오줌 짜내구 오란말야. "
사장님 언성이 높아졌다. 나는 휴지를 구겨 쥐고 공중변소로 갔다. 먼저 온 아이들이 변소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너 이름 뭐니?"
한 아이가 물었다.
"장 일석."
"니 동생은 이석이니?"
"아니."
"그럼 삼석이?"
나는 대답을 않고 변소간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등뒤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캄캄한 속에 쭈그리고 앉아 끙끙 힘을 주어 보았지만, 똥은 한사코 나오지를 않고 오줌만 찔끔찔끔 지릴 뿐이었다.
"일석이, 너 정말 똥 누니? 목 매달려 죽은 귀신 나오는 변소니까 정신 똑똑히 차려라. "
아이들은 담배를 다 태웠는지 허튼 수작을 하고는 키들키들 웃으며 멀어져 갔다. 나는 좀더 쭈그리고 앉아 힘을 주다가 가게로 돌아왔다.
"임마,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너 하라는 짓은 안 하구 담배 태우다 왔구나?"
사장님이 눈에 모를 세우며 말했다.
"전 담배 못 피워요."
"거짓말 말어. 너 밤에 가게 안에서 담배 피우면 당장 쫓아버릴 거야. 장난 말구 곧바루 자구 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중 말은 아이들 모두에게 한 것이었다.
"사장님. 안녕히 들어가세요."
아이들이 인사를 하자 셔터문이 달달달달 쓰르륵 비걱------하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차츰 내려오는 속도가 발라지더니 이윽고 그 끝이 덜컹하고 바닥에 닿으며 멎었다, 셔터문 아래쪽으로는 타원형의 통풍구들이 쪼르르 뚫려 있었다. 가게의 불이 꺼지고 아이들은 유행가 가락을 뽑으며 골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는 뭔가 호기심이 동해서 엎드려 눈을 구멍으로 가져갔다. 서늘한 바람이 구멍으로 밀려들어와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가게에도 문이 닫혔지만 달빛인지 외등불빛인지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 셔터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눈을 구멍에 가져다 댔다. 누군가가 셔터문에 달라붙다시피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살펴보았다. 그 사람은 셔터문에 자물쇠를 잠그는 중이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더니 그 사람은 몸을 일으켜 떠나가 버렸다. 나는 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지 셔터문에 자물쇠를 채운 것 같은데."
나는 깜짝 놀랄 소식이라는 듯 말했다.
"너두 오래잖아 익숙해질 거다."
한 아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밤중에 밖에 나가야 할 일이라두 생기면 어떻게 하지? 뒷문두 없잖아?"
"밤중에 밖에 나갈 일이란 게 똥 오줌 누는 일밖에 더 있니? 자. 이제 똥 오줌두 누구 왔겠다. 잠이나 자자구나. 맨 나중에 드러눕는 사람 불끄기!"
아이들은 맨바닥 위에 깔린 얇은 이불 속으로 쑤시고 들어가며 킬킬거렸다.
이튿날 아침 일곱 시경 사장님이 와서 자물쇠를 벗기고서야 셔터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맑은 바람이 밀려들어와 가게 안에 고였던 냄새를 몰아냈다.
"오늘 집에 도배장판을 하는데 장농을 옮겨 놔야겠다. 빌석이는 남아서 가게 청소하구 나머지는 집에 들어갔다 나와."
사장님이 아이들을 들여보내고 나서 혼자 남은 나를 곁으로 불렀다
"너 자전거 탈 줄 알지?"
"네."
"너는 우선 자전거를 타구 배달 나가는 아이들을 따라댕겨라. 그러노라면 물건을 배달하구 주문 받아오는 일이 어떻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일을 배우는 대루 너두 한 구역을 맡아서 추문을 받아 오구 물건을 배달하구 해야 할테니 말이야. 허지만 우선 내가 너한테 특별히 맬길 것은 아이들을 감시하는 일이야. 아이들이 가게 물건을 몰래 집어다가 팔아먹는 눈치거든. 그러니까 아이들을 따라댕기면서 잘 살펴보란 얘기야. 아이들이 주문두 받지 않은 물건을 소매가게에 내놓구 사라구 한다던가 하는 짓거리들 하거든 나한테 슬그머니 알려라, 알겠니?"
사장님은 말을 마치고 내 어깨를 투덕거려 주었다. 수도간에서 마포를 빨아다가 가게를 훔쳐내고 비로 가게 앞을 쓸고 나니 아이들이 돌아왔다.
"자, 그럼 오늘 배달할 물건 챙기자."
사장님이 책상 서랍에서 계산서를 꺼내들며 말했다. 아이들은 배달용 대광주리를 하나씩 들고 사장님 앞에 가 섰다. 사장님이 계산서를 들여다보며 물건 이름과 수량을 부르면, -은어젯밤 뽑아 내놓은 물건 가운데서 그 물건을 집어들고 사장님한테 수량을 확인 받은 후 대광주리 속에 차곡차곡 집어넣곤 했다. 이럭저럭 세 아이의 대광주리가 차 올랐고. 그 중 삼식이라는 아이는 하나만으로 모자라 대광주리를 하나 더 가져다가 물건을 담아야 했다. 물건 챙기는 일이 끝났을 때 사장님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놈들아, 왼종일 싸돌아 댕기면서 주문 받은 게 겨우 요거야? 이거 가지군 느덜 월급은 커녕 밥값두 나오기 힘들겠다. 내가 느덜 자전거 타구 바람 쏘이러 다니라구 데려다 둔 줄 아니? 밥값을 하구 월급값을 해. 느덜 일 가르치면서 밥 멕이무 월급 주구 하는 내 처지두 생각해 주란 얘기야. 좀 더 악착같이 매달려 봐. 그래두 삼식이 녀석은 요즘 많이 나아졌다. 귀동이 순복이 느이 두 녀석두 좀더 바짝 달라붙어. 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두 주문을 늘쿼보란 말이야. 알겠냐?"
사장님이 아이들을 돌아보며 물었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모양이어서 곧 다음 말을 꺼내놓았다,
"칠석이는 얼마동안 삼식이 짐 덜어 싣구 삼식이 따라 댕기면서 일 배워라."
"야. 살았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
삼식이가 손바닥으로 제 엉덩이를 철썩 때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드디어 나는 자전거에 삼식이 짐을 나눠 싣고 삼식이를 따라나섰다. 삼식이는 차들이 내닫는 복잡한 거리에서 짐실은 자전거를 겁 없이 몰아나갔다. 때로는 달리는 차들의 틈바귀를 날쌔게 헤쳐 나가기도 하는 삼식이를 따라잡느라고 나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변두리 쪽으로 삼십 분쯤 달렸을까, 이윽고 어느 국민학교 앞에 이르렀다. 학교 앞에는 문방구 소매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삼식이는 첫 번째 문방구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는 물건을 골라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박 상식이가 돌아왔습니다."
삼식이가 가게 문지방을 넘어서면서부터 마치 무대 위에서 -원맨쇼)라도 하듯 지껄였다.
"시끄러 임마. "
문방구 주인아저씨가 밉지 않다는 눈길로 짐짓 삼식이를 흘겨보며 말했다.
"금번에 저희 회사에서 개발한 새로운 상품을 가지고 귀댁을 찾아뵈었사온데."
"이 광대 똘만이 같은 놈아, 시끄러!"
"그러면 인사말은 이만 줄이고 상품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삼식이는 물건과 함께 계산서를 주인 앞에 내밀었다.
"앤 누구니?"
문방구 주인이 계산서를 받아들며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내 조수예요."
"승진했구나, 너. 헌데 느네 집은 왜 이렇게 계속 고물가정책을 밀구 나가니? 칠성 문구사나 홍익 문구사보다 비싸단 말야. 느덜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거래 끊을 거야."
문방구 주인이 계산서를 들여다보며 심허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저씨두 참. 협정가격인데 비싸구 싸구가 어딨어요? "
"임마 그래두 칠성 문구사나 홍익 문구사 애들은 즈이덜이 알아서 적당히 깎아준단 말이야."
"원 아저씨두. 잘 나가치다가 삐뚤어지시네. 빨리 물건값 주시구 주문이나 많이 하세요."
"그럼 얼마 깎아 주는 거냐?"
"아직까지 해드린 대루지요 뭐. "
"만원에 삼백 원, 3부라구? 임마, 다른데 애들은 5부 깎아주더라."
"3부두 우리 사장텀 모르게 깎아드리는 거예요. "
"임마, 그런 일은 배달원이 알아서 처리하는 거구, 사장두 모른척 눈감아 주는 거야. 그렇게 해서 주문 많이 받아가면 나두 좋구, 너두 좋구, 느이 사장두 좋구, 서루서루 좋은 일 아니냐?"
"서루 좋은 거 좋아하시네요. 아저씨야 좋을 테구, 우리 사장님한테두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중간에서 뽕빠진다구요. 아저씨한테 3부 깎아드리는 거 사장님이 눈감아 주는 줄 아세요? 어림두 업어요. 3부 깎은 거 꼬박꼬박 내 월급으루 채워 넣어야 돼요."
"군소리 말구 5부 깎아."
"절대루 안 돼요, 아저씨. 그 대신 내가 좋은 물건 하나 싸게 드릴께요."
"뭔데?"
“점포 정리하는 데서 볼펜 12그로스(열두 다스) 사온 게 있는데 5부가 아니구 2할 깎아드리죠."
"좋아, 내가 양보하지."
삼식이는 물건값과 주문을 받아가지고 다음 가게로 옮겨갔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박 삼식이가 돌아왔습니다."
삼식이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성대묘사도 하고, 온갖 어릿광대짓을 하면서 문방구에서 문방구로 옮겨다녔다, 학교 앞에서, 주택가의 상점으로, 시장으로, 거기서 또 다른 학교 앞으로, 이렇게 옮겨다니느라면 아무리 어릿광대짓을 해보여도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오게 되는 가게도 부지기수였다. 허지만 삼긱 이는 줄기차게 찾아다녔고, 그때마다 가게안에서 어릿광대가 되곤 했다. 그 동안 삼식이는 고급 연필 한 그로스를 또 싼값에 팔았다. 점심때가 되자 어느 문방구점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삼식이는 나를 데리고 음식점으로 갔다.
"너 술 한 잔 할래?"
삼식이가 물었다.
"술 못 해."
"그럼 곰탕이나 한 그릇씩 먹자. 계산이 맞으면 너한테 푸임한거 먹여줄려고 마음먹었는데, 오늘은 계산이 잘 안 맞는 것 같애, "
삼식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음식이 나을 때까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릿광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음식이 나오자 삼식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릇을 비웠다.
“천천히 먹어라. 먹으면서 내 얘기 들어. 탁 터 놓구 얘기하마."
삼식이는 보리차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2년 전, 내가 만도 문구사에 들어오니까 사장님이 따루 부르더니 경택이 뒤를 따라댕기면서 물건 빼다 팔아먹지 않나 감시하라구 하더라. 경택이는 그때 이쪽으루 배달 나오던 애였어, 난 사장님이 시킨대루 경택이를 따라 댕기며 눈에 불을 켜구 지켜봤지. 아무리 지켜봐두 경택이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헌데 한 두 달 따라댕기면서 알구 보니 경택이 사정이 이만저만 딱한 게 아니더구나. 너 아까 소매점 주인들 하는거 봤지? 물건값 깎아주지 않으면 거래 끊겠다구 으름장을 놓지 않든? 그 사람들 말대루 다른 문구 도매상 배달원들은 5부는 아니더라두 2. 3부 깎아 주는 게 사실이란 말이야. 헌데 우리 사장님은 고집불통이거든. 한 푼두 깎아줄 수가 없다는 거야. 게다가 너 아침에 사장님하는 얘기 들었지 ? 그거는 약과다. 주문받아 오지 못하면 밥두 먹지 말라구 소리소리 지르기 일쑤야. 경택이는 사장님과 소매점 주인들 틈새에 끼어서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물건값 깎아주는 데 다 찔러넣다가 기어이 그만둬 버리더라. 경택이 뒤를 이어 내가 그쪽을 맡았지. 그게 일년쯤 전 일이야.나두 처음 몇 달은 경택이가 하듯 내 월급을 대신 찔러 넣었어, 월급 삼만 원이 양말 한 켤레 사 신은 일두 없는데 일 원 한푼 남지 않더구나, 이 월급 가지구는 모자랄 지경이었어. 경택이처럼 그만두든가 수를 쓰든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형편이었어. 허지만 그만두구 나가봤자 별수 있니 그깐 물건을 몰래 빼내다 팔기 시작했어. 그 돈으루 장갑 한 켤레 사 낀 일두 없다. 그 돈은 소매상들과 거래를 트기 위해서 주문을 조금이라두 더 받기 위해서 물건값 깎아 주는데 남김없이 찔러 넣었다. 일석이 너 생각좀 해봐라. 우리가 월급 탄 돈마저 찔러 넣으면서 일할 것까지는 없는 것 아니니7우리가 뭐 사랑의 종이냐? 도매이익이 1발 이상이니까 3부쯤 깎아줘두 물건만 계속 많이 팔 수 있다면 사장은 돈을 버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사장이나 우리 배달원 서로를 위해서, 다시 말해 만도 문구사를 위해 물건 값을 3부 깎아주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장님 돈으로 깎아주는게 옳다는 얘기야. 알아듣겠니?"
점심을 먹고 나자 다시 문방구 소매점을 찾아 자전거를 몰았다.
"너두 언젠가는 혼자서 어떤 구역을 맡아 배달을 하구 주문을 받아가구 하게 될 텐데, 그때 가면 오늘 내가 한 말이 진짜 옮았구나 하는 사실을 뼛속으로 깨닫게 될 거다. 그밖에는 배겨날 방법이 없거든. 일을 배운다는 건 물건 이름과 그 값을 외우는 것 이상이야. 일이라는 건 물건을 주문 받아다가 배달하는 것 그 이상이란 말이야,"
삼식이의 솔직한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삼식이와 나는 고개를 넘어 경기도 땅에까지 들어가 문방구 소매점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날이 어두운 다음에야 가게로 돌아왔다. 수금한 돈을 사장님 앞에서 계산하고. 몸을 씻고. 저녁을 먹고, 공장에서 새로 들어온 물건을 풀어 정리하고 주문받아온 물건을 골라 뽑아놓고, 이럭저럭하니 열 시가 넘었다.
"자, 그럼 어서 변소에들 다녀와라."
사장님이 말했다. 아이들이 앞을 다투듯 빠져나가는 뒤 꽁무니를 나도 따라나갔다. 아이들은 오줌만 누고 담배를 피워 물었지만 나는 휴지를 구겨쥐고 캄캄한 변소간에 쭈구리고 앉아 힘을 주었다. 자기 전에 똥 오줌 누는 습관을 붙여라. 사장님의 지시였다.
"장난 말구 곧바루 불끄구 자거라,"
변소에서 돌아오자 사장님이 가게를 나서며 말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사장님. "
아이들이 인사를 하자 셔터문이 달달달달 쓰르륵 리걱,,,,,,내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셔터문이 내려지고 밖으로 자물쇠가 걸리고. 이윽고 아이들은 다시 갇힌 몸이 되었다.
삼식이가 언제 어떻게 물건을 빼내서 대광주리 속에 집어넣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시하려는 생각을 가지기에 앞서서 내 눈길이 삼식이가 움직이는 것을, 손 놀리는 것을 따라다니며 살피곤 했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삼식이의 숨은 동작을 찾아내 보고 싶은 생각이었다. 허지만 그 장면을 찾아내지 못한 채 삼식이를 따라 배달을 떠나게 되곤 했다. 오늘은 물건을 빼내오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해 보면서. 그런데 삼식이는 어느 틈에 대광주리 속에 물건을 집어넣었는지 소매점에다 물건을 한두 가지씩 싼값으로 팔곤 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빼내오지 못하는 날도 있긴 했지만, 열흘이면 일고여덟 번은 집어 내오는 것 같았다.
"아저씨 싼 물건 좀 놓으실래요?"
삼식이는 어릿광대 짓을 나다가 은근슬쩍 수작을 걸었다. 어떻게 된 물건이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점포정리 하는 데서 헐값으로 사왔다던가, 외상값을 도무지 주지를 않아서 그 대신 달래가지고 온 것이라던가, 꾸꿔준 돈 대신 받은 것이라던가, 이것저것 그럴듯하게 둘러대곤 했다. 그것은 삼식이 자기의 변명 같기도 했고, 사는 사람을 위한 변명 같기도 대서, 뭔가 좀 아리숭하게 들렸다. 삼식이가 말을 꺼내기 앞서 저편에서 먼저 싼 물건 구해온 것 좀 없냐고 물을 때도 있었던 것이다. 몰래 집어 내오는 물건은 볼펜. 연필. 그림물감 샤프펜슬 같은 비교적 부피가 작으면서도 값이 나가는 것들이었는데 삼식이는 중간에 한두 번씩 계산을 맞추어보곤 했다. 할 인해 준 물건값을 귀 맞추어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계산을 끝낸 삼식이는 (오늘은 돈이 좀 남겠는데.)하기도 했고, (오늘은 모자라겠는데.) 하기도 했다. 돈이 남는 날은 점심을 좀 나은 것으로 사먹기도 했다, 사장님이 허락한 점심값은 삼백 원이었다
"야, 삼백 원이면 기껏 간짜장이나 울면이나 짬뽕 한 그룻 값인데, 긴긴 해에 그걸 먹구 어떻게 배겨내라는 거니? 가끔 가다가 사장님 돈으루 점심 한번 기름지게 사먹었대서 죄될 건 없어."
삼식이는 이렇게 말했다, 허지만 짜장면이나 울면만으로 점심을 때워야 하는 날이 더 많았고, 그런 날은 배가 고팠다. 돈이 모자라는 날은 그렇다고 해서 점심마저 굶을 수는 없으니까 삼식이는 가짜 외상장부를 만들었다, (xx문방구, 외상금액 얼마, 이렇게 적어 가지고 돌아가서 계산할 때 사장님한테 보였다가 다음 번 돈 남을 때에 채워 넣고 장부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월급 삼만 원 타먹으려면 온갖 재주 다 부려야 한다. 그게 얼마나 우스운 얘기니? 아마 사장님이 이 재주 배우라구 너를 딸려 보내는 모양이야."
삼식이는 쿡쿡 웃고는,
"사장님을 위해서 사장님을 속여야 하는 내 처지를 세상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거다. 허지만 요새 세상에 나만큼 양심적인 사람두 드물 거야. 그러면서두 나쁜 짓 하는 거 없이 무슨 큰 죄나 짓는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면서 남모르게 숨어서 손발을 움직여야 하거든. 내 원 기막혀서."
"사장님한테 터 놓구 얘길 해보지 그래?"
"그 말이 통할 사람 같으면 애초에 이 짓을 시작하지 않았어. 그런 얘기한 애들이 없는 줄 아니 ? 사장님 얘기는 3부를 깎아 주게 되면 그 다음엔 5부를 깎아 줘야 하게 되구, 또 그 다음엔 7부를 깎아 줘야 될 거라는 거야. 그러니까 애초부터 깎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거야. 깎아 줘야만 물건을 놓겠다는 소매점에는 물건을 팔지 말라는 거야. 그러면서두 주문은 그전대루 많이 받아오라구 야단이거든. 너 우리가 한 얘기 모르는 결에라두 사장님한테 말하지 말어."
삼식이는 웬만한 비밀이나 속마음은 내 앞에 털어놓는 것 같았다. 허지만 물건을 언제 빼어오는가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특별한 비밀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쏠렸고, 가게에 있을 때면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숨은 그림을 기어코 찾아내려는 듯, 내 눈길은 애써 삼식이 뒤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침 사장님과 나 둘만이 가게에 있게 되었을 때 사장님이 곁으로 나를 불렀다.
"삼식이 녀석 이상한 짓 하지 않든?"
"네?"
"삼식이 녀석이 주문 받지두 않은 물건을 팔아먹는 걸 봤을 것 아니냐 말야?"
"잘 모르겠던데요."
"이놈, 너두 삼식이 놈하구 한 통속이 됐구나."
사장님 음성이 별안간 커지며 가게 안을 찌릉 울렸다.
"너 삼식이한테 돈 받구 눈감아 주기로 했지 ?"
"아, 아니에요. 전 자전거 지키느라구 가게 바깥에 서 있군 하는 걸요."
내 입에서 얼결에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이런 멍충이 같은 녀석."
사장님은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음성을 줄여가지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건이 천여 만원어치나 쌓여 있으니까 몇 가지씩 빼내가두 자리 안나겠다 내가 모르는 줄 알지? 허지만 난 어떤 물건이 없어지는 줄 알구 있단말야. 볼펜, 샤프, 연필, 그림물감 이런 따위들이야. 내 너한테 얘기하마. 밤에 느덜이 변소에 갔을 때 그런 물건 수자를 세어 본 다음 일부러 삐뚤삐뚤 흐트러 놓거든. 이튿날 아침 느덜이 배달 떠난 다음에 세어 보면 영락없이 몇 가지가 빈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시키는 일은 물건이 없어지나 안 없어지나 알려구 하는 게 아니야. 어떤 녀석이 어떻게 물건을 훔쳐내 가는지 그 증거를 잡으라는 얘기야, 알겠니?"
"네."
"이 녀석아. 자전거를 지킨다고 밖에 서 있는 바보가 어딨어? 따라 들어가. 그리구 밤에 문닫은 다음에두 애들이 하는 짓을 유심히 살펴보란 말이야, 그것두 일 배우는 거야. 이담에 니가 가게를 차리게 되구 아이들을 부리게 될 때를 위해서 꼭 배워둬야 할 일이란 말이야. 알겠니? 오늘부터는."
그때 아이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놈아, 여기 온지 한 달이 가까와 오는데 물건값 하나 제대루 못 외워? 명청이 같으니라구. 물건 배달하군 주문 받고 할 적마다 물건이름 물건값을 자꾸 외운란 말야. 그럼 가봐!"
사장님은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나를 놓아주었다. 사장님한테 야단을 맞아서 그랬는지 그날 아침은 내 눈길이 삼식이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살피기에 바빴다. 허지만 아이들이 물건을 슬쩍 빼내는 장면은 여전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사장님 말마따나 언제 어떻게 물건을 빼내가는 것일까. 밤이면 밖으로 문이 잠기겠다, 아침이면 사장님이 일일이 검사를 하겠다. 그럴 틈이 있다는 것일까. 있다면 사장님이 검사를 마친 후 배달 떠나기 전까지의 사이인데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펴보아도 낌새 하나 찾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그날도 삼식이는 샤프펜슬 두 다스를 싼값에 팔았다. 헌데 점심 때 음식점에 마주앉게 되었을 때 나를 보는 삼식이 눈빛이 전과 달랐다.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있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아침에 사장님하구 무슨 얘기했니?"
"일 빨리 못 배운다구 야단치더라."
"사장님이 아이들을 감시하라구 그러든?"
"아니."
"아침에 보니까 니 눈이 아이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구 바쁘더라."
"그건, 그건 사장님이 일 못 배웠다구 야단을 치니까 느덜 일하는 거 보느라구 그랬지."
"정말이냐?"
"거짓말이면 금방 빵구가 날 것 아냐? 두구봐."
"좋아 그럼 두구보자."
그제서야 삼식이 눈길이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속으로 숨을 내 쉬었다.
그 며칠 뒤 밤이었다. 셔터문이 내려진 후, 아이들은 느닷없이 골방에다 술자리를 펼쳐 놓았다. 언제. 마련해 왔는지 소주에다 고기통조림에 말린 생선에 과자에 안주도 그런대로 풍성했다. 아이들은 둘러앉았고. 순복이가 이빨로 병마개를 따 가지고 네 개의 종이컵에 술을 따랐다.
"좀 늦었지만 일석이를 환영하는 뜻에서 간단하게 술자리를 마련한 거야."
삼식이가 인사말 하듯 입믈 메었다.
"변변치 못하지만 양해해라. 며칠 후 월급 타 가지구 다시 한턱 쓸 께."
귀동이가 말을 받았다.
"그래, 일석이를 환영한다."
순복이가 술잔을 집어 번쩍 치켜들었다. 삼식이도 귀동이도 술잔을 치켜들었다. 주저주저하다가 나도 술잔을 엉거주춤 들어올렸다.
"인사는 내가 먼저 차려야 할텐데. 고마워."
내가 답사(?)를 하자 아이들은 치켜들었던 술잔을 입으로 끌어가다 단 숨에 쭉 비웠다. 할 수 없이 나도 눈 딱 감고 술잔을 비웠다.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일석이두 술 잘하는구나."
아이들이 웃었다.
이렇게 환영회는 화기애애한 속에서 시작된 셈이었는데 내가, 두 번째의 술잔을 마다하면서부터 흥이 깨지기 시작했다,
"너를 환영하는 술이야. 우리의 우정을 무시하기냐? 어서 술 받어."
"가슴이 답답해서 그래. 못 하겠어."
"사내새끼가 술 한잔 가지구 윌 이렇게 찔찔 매?"
"먹을 줄 모르는 걸 어떻게 해? 사정 좀 봐줘."
"사장이 술을 따라주면 당장 죽는대두 받아 마실걸."
"일석이, 너 사장 스파이라는 소문이 있더니 과연 그렇구나?"
순복이었다. 순복이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삐딱하게 물고는 거칠게 성냥을 그어 불을 당기고 나서 연기를 빨아 내 얼굴로 내뿜었다.
"무슨 홍두깨 같은 소리야? 섭섭한 소리하지 말어."
나는 맞받으며, 문득 이 자리가 나를 환영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닥달질하려고 마련한 자리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린 너하구 원수지구 싶지 않아. 너하구 우리 사이에 원수질 까닭이 없잖아?"
"옳아, 그건 나두 하구 싶은 말이야, "
"물촌 그것이 뜬소문이기를 바래. 허지만 그것이 뜬소문이라는 것을 일석이 니가 증명해 보여줘야 해."
귀동이가 말했다.
"어떻게 중명하라는 거지."
"우선 내 술두 한잔 받구 삼식이 술두 한 잔 받어."
나는 술 두 잔을 받아 마셨다. 목 줄기를 타고 내리던 뜨거운 기운이 뱃속에서 화끈 퍼져나가면서 머릿속이 어찔했다.
"이렇게 하면 됐니?"
"우리들의 우정을 받아 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일석이 니가 우리한테 우정을 보여 줘."
"좋아, 내 술 한잔씩 따라주지."
"니 돈으로 산 술을 따라줘야지."
"좋아. 월급 타거든 술 살께."
"그게 아니야. 니 손으로 물건을 몰래 빼내다 팔아 가지구 그 돈으로 술을 사 줘."
순복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세 아이들을 서너 번 둘러보다가 눈길이 삼식이한테서 멎었다. 내 눈이 둥그레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놀랄 것두 겁낼 것두 없어. 별루 대단한 일이 아니니까. 단지 새루 들어온 아이들이 입단식 하듯 한번씩 치루고 지나가야 할 일일 뿐이야. 먼저 있던 아이들은 새루 들어온 애를 환영해주구, 새루 들어온 애는 먼저 있던 애들한테 우정을 맹세하구, 그에 따라 먼저 있던 애들이 새루 온 애한테 비밀을 털어놓구. 일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구. 그렇게 해서 서로가 한마음이 돼 보자는 거야."
삼식이가 구슬리듯 말했다.
"알아들었거든 행동으로 옮겨봐."
귀동이가 떠밀듯 말했다. 세 아이들의 여섯 눈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건지를 알아야 말이지."
되도록 이 궁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이런 말로 되어 나왔다. 내 마음 저 밑바닥에 숨은 그림 찾기에 대한 호기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 아이들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귀동이의 손에는 어느 틈에 플래시가 들려 있었다.
"따라 나와."
아이들은 방을 나갔다. 플래시의 긴 빛줄기가 캄캄한 가게 안을 헤치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이들은 배달하려고 골라놓은 물건이 있는 데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일석이 너 샤프펜슬 한 다스 꺼내와."
순복이가 말하자 귀동이의 플래시가 빛줄기를 길게 내뻗쳤다. 나는 빛줄기를 따라 어둠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았다. 아이들은 묵념이라도 하듯 말이 없었다. 정적과 어둠 속에서 긴장한 듯 빛줄기가 파르르 떨곤 했다. 몽롱한 기운이 내 몸과 마음을 휩싸고 있었다. 나는 무슨 힘에 이끌리듯 걸음을 옮겨갔다. 이윽고 빛줄기가 가 닿은 곳에서 멈춰 섰다. 샤프펜슬을 담은 곽들이 어지럽게 헝클어져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사장이 아이들을 덫으로 유인하기 위해 뿌려놓은 덫밥이었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덫이 내 손을 후려쳐 묶어놓을 것 같았다. 내미는 손이 떨렸다. 사장님이 기억해 두었을 수자 중에서 하나를 배내어 무슨 의식이라도 행하듯 두 손에 받쳐들고, 온 길을 되돌아갔다. 빛줄기가 내 발 앞을 비추며 인도해 갔다.
"여기 필통곽에서 필통을 모조리 꺼내놔."
내가 아이들 곁으로 돌아오자 순복이가 말했다. 플래시가 필통곽을 비췄다. 그 곽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제의 필통을 꺼내 놓았다.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그 샤프 펜슬을 필통곽 속에 집어 넣구 필통으로 덮어."
그렇게 하니까 필통 두개가 못 들어간 채 시침을 떼듯 필통곽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남은 필통 두 개는 속에 든 연필 지우개를 부러뜨려 가지구. 공장에 반품할 물건 쌓아 논 더미 속에 찔러 넣어."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건 물건을 빼내가는 몇 가지 기술 중에 하나야. 앞으루 다른 기술두 가르쳐 줄께."
아이들은 차례로 나한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아이들한테 손을 잡히면서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너희들한테 강요당했을 뿐이야.> 01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물건을 몰래 빼내 간다는 사실을 사장님이 알고 있단 말이야.>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눌러 삼켰다.
몇 번 더 밤이면 아이들한테 불려나가 그 짓을 했다. 그 짓을 끝내고 나면 <강요당했을 뿐이야.>하고 마음속으로 뇌이곤 했다. 그러한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어느 날 밤 순복이가 말했다.
"너는 마치 우리가 협박이라도 해서 마지못해 끌려가는 것처럼 움직이는데 말야. 너만 깨끗한 척하지 말어. 우린 나른 짓을 하는 게 아냐. 양심에 거리낄 것 하나두 없어. 설혹 우리가 하는 일이 나쁜 일이라구 하더라두 그건 사장이 시켜서 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모든 책임은 사장한테 있다는 얘기야. 오늘은 너 혼자 자발적으루 해봐."
나는 플래시를 들고 혼자 가게로 나가 그 짓을 하고 돌아와서는 여보란 듯 아이들한테 웃어주었다. 마음속으로 (강요당했을 뿐이야.) 하고 뇌이면서.
사장님이 어느 날 아침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서 나를 곁으로 부를 것이다,
사장님은 그런 기회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어느 때건 갑자기 사장님 곁에 불려가 서게 될 것이었다. 나는 그때를 위해 대답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
"잘 모르겠던데요. 눈을 부릅뜨구 지켜보지만 언제 어떻게 물건을 빼내가는지 또 어떤 물건이 몰래 빼내온 건지 가려낼 수가 있어야지요7"
하지만 사장님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를 곁으로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장님이 한 말은 단지 넘겨 짚어본 것이란 말인가.
어느 날 아침 배달할 물건을 대광주리에 챙기고 난 후 사장님은 다시 잔소리를 시작했다. 헌데 사장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침마다 하는 잔소리가 아니었다. 대번에 귀라 번쩍 띄었다,
"요새 물건이 자꾸 없어진다. 아무래두 이상해서 밤에 들어갈 때 몇 가지 물건을 세어서 수자를 수첩에다 적어 놓곤 했다. 헌데 아침에 나와서 맞춰보면 수자가 비더란 말이야.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냐? 밤새 물건이 어디루 숨어버리느냐 이 말이야? 낼 아침부터는 느덜 부랄 밑까지 들춰볼테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날 밤 아이들은 물건을 빼내 숨기지 않았다. 부랄 밑까지 들춰볼 지경이면 물건도 속속들이 뒤져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아침 사장님은 말한 대로 아이들을 부랄 밑까지 더듬어보고, 짐작했던 대로 배달할 물건을 일일이 까발겨 보다시피 했다.
"오늘은 내 수첩에 적힌 물건 숫자가 비지 않는구나."
사장님이 아이들을 의미심장한 눈길로 둘러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사장님 몰래 찡끗해 보이며 배달을 떠났다,
"말하자면 계엄령이 선포된 거야. 허지만 사장이 우리 부랄 밑을 들춰보는 건 며칠간일 테지. 기껏해야 일주일?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그 동안 밀린 잠이나 자두는 거야, "
삼식이가 말했다. 삼식이는 가짜 외상 장부를 많이 만들었다, 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다. 거의 매일 아침 사장님은 아이들 부랄 밑까지 더듬어 보곤 했다.
삼식이가 도망을 친 것은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날 점심때 어는 문방구 소매점 앞에 자전거를 맡겨 놓고 중국집에 들어가, 나와 마주앉아 이백 오십 원 짜리 짬뽕을 시켜 먹고 난 후 변소에 다녀오겠다고 간 삼식이가 돌아오지를 않았다. 자전거와 못 다 배달한 물건과 그날 수금한 돈은 고스란히 남겨 둔 채였다.
"그 동안 물건 없어진 것이 삼식이 놈의 짓이었구나. 내 그럴 줄 알았다. 나쁜 놈의 새끼 같으니라구. 일석이 너는 이놈아 뭘 했어? 허수아비냐?"
그래도 사장님은 앓던 이나 빼낸 듯 시원한 표정이었다.
이튿날부터 삼식이가 맡아하던 구역을 내가 맡아하게 되었고 계엄령도 해제되었다,
"느덜 하루종일 싸돌아댕기면서 주문 받아 온 게 겨우 요거냐? 이래 가지군 느덜 월급은 커녕 밥값두 안 나오겠다. 부지런히 뛰어. 바짝 달라붙여. 밥값을 하란 말이야."
아침이면 사장님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고, 밤이면 아이들도 다시 물건을 빼내 숨겼다. 나는 유혹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윽고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물건을 빼내어 숨겨나간 날 밤, 배달에서 돌아와 보니 낯선 아이가 하나 와 있었다. 내 나이 또래였다.
"새루 들어온 아이다, 처음이라 잘 모르니 느덜이 데리구 잘 가르헉 줘라."
사장님이 말했다. 새로 들어온 아이의 이름은 방 판석이었다.
이튿날 아침 배달할 물건을 챙기고 난 후 사장님이 말했다
"판석이는 얼마 동안 순복이 짐 덜어 싣구 순복이 따라댕기면서 일 배워."
아이들은 이윽고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떠났다. 갈라지는 길목에서 순복이는 나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판석이가 순복이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인(下人) 유재용
옥 귀두씨는 내가 지금까지 주인으로 섬겨온 가지각색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색다른 사람이었다.
옥 귀두씨를 만나기 바로 전, 나는 ‘사찰’이란 직함으로 교회 일을 보고 있었다. 사찰이란 교회당을 지키며 궂은 일을 맡아보는. 일테면 교회의 하인이었다. 목사님네 개를 훔치려다가 실수해서 오히려 내가 잡혔는데, 목사님은 나를 경찰서로 보내지 않고 용서를 해줌과 동시에 일자리마저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목사님 은혜에 보답하느라고 정성껏 교회 일을 보았고, 열심히 예배에도 참석했다. 교회 신도들도 개도둑이었다가 회개한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허지만 그 자리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너무 심심한 자리였다. 기껏 새벽종이나 치고, 청소나 하고, 어쩌다 목사님 심부름이나 다니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참이었는데 마침 이 교회 신도 가운데 내 자리를 노리는 자가 있다는 낌새를 알아냈다. 자식이 여섯이나 줄레줄레 매달린 가난에 찌들고 찌들은 오십 살의 후줄그레한 사나이였는데. 목사님을 찾아다니며 내 자리를 뺏어달라고 끈질기게 청을 넣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목사님한테 사표를 냈다. 목사님은 젊은 사람이 좀더 힘들고 보람있는 일을 맡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사표를 수리하고는 대신 소개장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또 다른 목사님께로 가는 소개장이었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큰 교회의 목사님인데 그 교회 신도 가운데는 큰 기업체를 경영하는 사장님들도 많으니까 좋은 자리 하나 마련해 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소개장을 들고 터덜터덜 큰 교회 목사님을 찾아갔다. 내 손에서 소개장을 받아 든 큰 교회 목사님은
"허, 김 목사 퍽이나 소개장 쓰기 좋아하네."
투덜거리며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화통을 끌어당겼다. 몇 군데 정중하고 화기애애하게 통화를 해보고 나서 소개장을 내 손에 되돌려주며 아무 데 아무 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된 사람이 다름 아닌 옥 귀두씨였다.
옥 귀두씨는 중키에 마흔 살이 가까워 보였는데, 몸이 약하다는 것 이외에는 사람의 됨됨이가 한눈에 짐작되지는 않았다. 옥 귀두씨는 내가 내놓은 목사님의 소개장을 차근차근 읽어보더니
“이 만보씨라구요? 사람을 하나 쓰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 오셨군요. 그러면 얘기를 해보고 서로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함께 일을 합시다."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힘껏 일하겠습니다."
내 조건은 단지 하나 나에게 일을 시켜주는 것이었다.
"올해 몇이시지요?"
"서른 한 살입니다."
"학교는 어디를 나오셨나요?"
“S고등학교에서 급사 노릇을 하면서 그 학교 야간부를 졸업했습니다."
"그러고는 군대에 갔다 오셨을 테고. "
“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나온 얘기를 어느 선에서 짤라내야 할 것인가. 옥 귀두씨의 차분하고 깊은 시선이 안경 속에서 내 마음을 뚫어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데라 모르겠다. 있는 대로 털어 놔 보자.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못해본 일이 없을 지경입니다. 미장이 시다, 목공소 제자, 공사판 막일 눌을 비롯해서 화물트럭 조수, 상점 점원, 여관 조바, 술집 유객원을 거쳐, 깡패 졸개, 소매치기 연락원, 개도둑 하수인 노릇도 해왔고. 흥신소 탐정의 끄나풀. 경찰 보조원 노릇에서 대학교 수위, 부자집 하인, 교회당지리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경력 이 다채로우시구먼."
옥 귀두씨는 비웃음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를 했다. 나는 열적어 씩 웃었다.
“전에는 기독교신자가 아니었었구먼요. 어쨌든 이 만보씨는 이제 참으로 회개하고 여기 소개장에 씌어 있는 대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 사실인가요?"
옥 귀두씨는 미심쩍다는 듯 물었다.
"단지 노력했을 뿐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저를 고용한 목사님께 충실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제가 깡패나 소매치기나 개도둑의 하인이었을 때는 깡패. 소매치기, 개도둑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부자나 경찰관의 하인이었을 때는 부자나 경찰에게 충실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옥 귀두씨가 어떻게 알아듣건 내가 한 말은 진실이었다.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주인으로 섬겨오는 동안 나는 팔려간 개가 전 주인을 물어야만 되는 딱한 처지에 놓인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허지만 그런 일도 몇 차례 되풀이하다보니 기계처럼 무감각해질 수가 있었다. 그가 누구든 그 일이 어떤 것이든 나를 고용한 사람의 조정과 지시에 우선적으로 충실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만보씨 얘기가 틀림없는 사실인가요?"
옥 귀두씨의 눈에는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사실이구 말구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거 참 재미있는데. 허지만 난 아무래두 믿어지지가 않는걸. 가만 있자, 그러면 이 만보씨 얘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한번 증명해 보여줄 수 있나요?"
"있습니다. 어떤 일을 보여드릴까요?"
"가령 소매치기 하인이었다가 경찰관 하인이 되어 전 주인인 소매치기를 배신한 일이라든가, 부자집 하인이었다가 도둑의 하인이 되어 전 주인인 부자를,,,,,,."
"알겠습니다. 그러면 김 목사님을 배신해 보여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김 목사님을? 당신한테 정성스럽게 소개장을 써 준 그 목사님 말이요?"
"그렇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배신하겠다 이 말이오? "
"제가 선생님께 한 얘기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드리기 위해섭니다."
"그래요? 허지만 내가 이 만보씨한테 김 목사님을 배신해 보라고 지시한 건 아니오."
"이 일은 제가 스스로 하는 일입니다. 저는 새 주인을 맞을 때면, 새 주인에 대한 충성과 제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한 차례씩 자의적인 행동을 하곤 합니다. 새 주인들은 대개 그러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새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저는 자의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 얘기도 무척 재미있는 걸. 그럼 나도 이 만보씨의 충성과 능력을 시험해 봅시다. 자, 어떤 방법으로 김 목사님을 배신하겠오?"
"김 목사님댁 개를 훔치겠습니다. 그 개는 김 목사님과 친한 미국인 목사한테서 강아지쩍에 선물 받았다는 것으로, 독일 순종 뭐라든가 하는 족보까지 있는 개랍니다. 개 대학교까지 졸업한 학사개인데 황소 한 마리 값과 맞먹는다면서 김 목사님이 애지중지하는 개입니다."
"이 만보씨는 혹시 그 개에 대해 악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오?"
"절대로 아닙니다. 김 목사님이 사랑하는 그 개를 저도 무척 사랑했습니다."
나는 튼튼한 개 줄을 하나 샀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옥 귀두씨와 함께 목사님네 개를 훔치러 갔다. 내가 개를 훔치는 것을 직접 보고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옥 귀두씨가 나를 따라나선 것이다. 목사님네 개를 훔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선물한 미국 사람의 성을 따서 '크라크'라고 이름 붙인 그 개는 나와 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목사님은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러 교회에 나갈 때면 크라크를 데리고 갔다. 크라크는 설교단 옆에 붙은 회의실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기도회가 끝나면 목사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와 옥 귀두씨는 나를 이어 교회당지기가 된 그 후줄그레한 사내가 울리는 새벽 종소리가 다 울리기로 전에 교회 정문이 바라보이는 길 모퉁이에 닿았다. 잠시 후 교회 정문의 외등불빛 아래로 목사님의 모습이 나타났고, 어김없이 크라크가 따르고 있었다. 크라크는 목사님을 따라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길모퉁이에서 좀더 기다렸다. 이윽고 교회 안에서 찬송가소리가 울려 나오자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교회 문 안으오 스며들어 갔다. 크라크는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가져간 개 줄을 크라크의 가죽 목둘레에 채워 가지고 기도하는 시간을 틈타 조용히 끌고 나왔다.
"이 개를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나와 함께 걸음을 옳기며 옥 귀두씨가 물었다.
"저는 개 장물아비를 알고 있습니다."
옥 귀두씨는 개 장물아비네 집까지도 나와 동행했다. 나는 개를 이만 원에 팔았다.
"선생님과 이 돈을 반씩 나누었으면 합니다만, 받으실는지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경우 노획물을 동행자와 나누어 갖는 것이 관례였다.
"난 필요 없으니 혼자 가지시오. 헌데 그 돈을 어디다 쓸 작정이오?"
옥 귀두씨는 호기심이 잔뜩 서린 음성으로 물었다.
"변변한 옷이 없으니 옷을 사 입을까 합니다=
"그 옷을 입을 때마다 김 목사한테 죄스러운 생각이 우러나지 않을까? "
"그럴 까닭이 없습니다. 제가 김 목사님네 개를 훔친 것은 사적으로 김 목사님께 원한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니니까요. 제 행위는 어디까지나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적인 임무? 그래도 이런 일이 적발되면 당신 자신이 벌을 받게 될 텐데."
"벌을 받지요. 하지만 그것도 공적 임무수행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벌을 받겠습니다."
"아, 부러운데. 허지만 두려운 생각도 드는구먼."
옥 귀두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잠자코 옥 귀두씨의 옆을 따라 걸었다.
"결국 이 만보씨는 내가 찾던 사람인 것 같소."
옥 귀두씨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 만보씨가 할 역할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손발이 돼주는 거요. 손 발이란 다시 말하면 행동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 아니겠오?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것을 이 만보씨가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얘기요."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선생님 말씀이 어려워서,,,,,,"
"가령 내가 구두닦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했다고 치잔 말 이오. 난 도저히 구두닦이가 되어 볼 수가 없거든. 이런 때 이 만보씨가 내 생각을 행동으로 을겨서 나 대신 구두닦이가 돼 보이는 거요. 알겠오?"
"네. 무슨 일이든 맡겨 주시면 힘껏 하겠읍니다."
옥 귀두씨는 걸음을 멈추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그 손을 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함께 일해 봅시다."
옥 귀두써가 말했다.
옥 귀두씨의 하인이 되고 나서 내가 맡은 첫 번째 일은 거지에게 동전 한 닢을 주는 행위였다. 옥 귀두씨는 나를 데리고 거리로 산보 같은 것을 나갔는데. 육교를 건너다가 거지를 만났다. 거지는 육교 위 바로 층계가 끝나는 곳에 자리잡고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가 옥 귀두씨는 걸음을 멈췄다. 짓수그린 얼굴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빼내고, 또 넣었다 빼내고, 그러다가 단념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걸음을 몇 발자욱 옮기는가 하더니 아무래도 미련이 남는다는 듯 다시 돌아서서 눈살을 찌푸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내곤 했다.
"뭐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하도 답답해서 쭈삣거리며 물으려니까 그제서야 옥 귀두씩는 툭뚝 털고 일어서듯
"아니야, 아니야, 가자구."
하면서 나를 앞질러 걸음을 또 지나치게 성큼성큼 옮겨 놓았다. 허지만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걸음을 늦추더니 내가 따라오기를기다리듯 힐끗 뒤들아 보았다. 나는 대뜸 옥 귀두씨 옆으로 다가섰다.
"자네 지금 봤지? 그게 바로 날레. 난 처음에 우리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억만금의 재산을 쪼개서 거지들을 구제하는데 쓰겠다고 마음먹었었네. 그래서 이런 저런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워 봤다네. 헌데 난 어쩐 노릇인지 그런 생각을 실천할 수가 없었어. 아아 계획을 너무 크게 세웠나 보다 생각하고는 실천하기 쉽도록 계획을 축소하기 시작했지. 한꺼번에 백 사람의 거지를 구제할 생각을 말고 우선 열 사람의 거지부터. 아니 열 사람의 거지보다는 손쉽게 다섯 사람의 거지를. 아니 한 사람의 거지부터 시작해 보자. 이렇게 해서 차츰 축소된 계획이 우선 손벌리는 거지에게 동전 한 닢 던져주는 일부터 실천하자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네. 그런데 자네가 방금 보았다시피 나는 그 하찮은 일도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단 말이네. 나는 자신을 혐오하다가 절망하고 그 절망을 딛고 나를 채찍질하며 다시 잘 하려고 하고....., 하지만 거지에게 동전 한 닢 주고 싶다는 내 뜻은 번번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만단 말일세, "
"제가 해볼까요?"
나는 뛰어들 듯 말했다.
"자네가? 그래 한번 해보겠나?"
옥 귀두씨가 십 원 짜리 동전 한푼을 건네주었다. 나는 동전을 받아들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옥 귀두씨의 시선을 등뒤에 느끼며 거지 앞을 그냥 지나쳐, 좀 전에 딛고 올라온 층계를 끝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밟고 올라와 거지 앞을 지나면서 동전을 던져주었다, 옥 귀두씨 옆으로 돌아오니 옥귀두씨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네는 창의력을 발휘할 줄 아는구먼. 층계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행위는 자네에게 창의력이 있다는 증거야."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가끔 거지한테 동전을 던져주나?"
옥 귀두씨가 어조를 바꾸어 물었다.
"그래본 적이 한번도 없는데요."
"저렇게 손벌리는 거지를 만날 때, 동정이나 괴로움이나 갈등 같은 거 느끼지 않나?"
"전혀 못 느낍니다. 전 거지따윈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관심이 없으니까요. 어쩌다 거지를 대하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멸시뿐입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멸시라구?"
옥 귀두씨가 내 말을 되받아 물었을 때, 얼핏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옥 귀두씨가 나를 고용한 것은 거지들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하라고 하신다면 저는 거지를 업어 줄 수도 있습니다."
"업어 줄 필요 없어."
옥 귀두씨는 내 말을 가로채듯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난 말이야, 거리에서 거지를 만나 동전을 주려는 시도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가 실패하고 나면 거꾸로 거지에 대한 멸시감과 증오감이 억제할 수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곤 하네. 하지만 동전 한푼 던져주는 일도 못하는 내가 한 걸음 더 나가 거지에게 모욕 주는 일을 해낼 수가 있느냐 말이야. 나는 상상 속에서 그 일을 하다가 지쳐버리고 말지."
"제가 해볼까요?"
나는 다시 뛰어들 듯 말했다.
"자네가? 그래 한번 해보겠나?"
지하도 입구에 장님거지가 하나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나는 휴지 대용으로 넣고 다니는 신문지조각을 꺼내 지폐 크기만금 잘라 가지고 장님거지의 손에 놓아주었다.
"가엾어라. 설렁탕이나 한 그릇 사 잡수시우."
"아이구 고마우셔라, 복 많이 받으십쇼."
그러나 신문지조각을 더듬거리던 장님거지의 표정이 뚝 굳어졌다.
"장난이 너무 심하시구먼."
장님거지는 신문지조각을 꾸겨 던지며 중얼거렸다. 나는 장님거지의 손에 다시 계란 만한 돌멩이를 놓아주었다.
"계란이나 한 알 드시우."
나는 말하고 몸을 살짝 피했다.
"천벌을 받을 놈 같으니라구. 너나 쳐 먹어라. 이 마른 벼락을 맞아 뒈질 놈아!"
장님거지는 흰자위만 있는 눈을 되번득이며 돌멩이를 내가 서 있던 쪽으로 내던졌다. 돌멩이는 날아서 신문을 팔고 앉아 있는 영감님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아이쿠!"
나는 재빨리 몸을 퍼해 복작거리는 골목길로 빠져 들어갔다.
"자네는 마치 연습이라도 해뒀던 것처럼 척척 해치우는군."
한참만에 내 옆으로 다가선 옥 귀두씨가 말했다.
"쉬운 일을 맡겨주셨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부러운 노릇이야. 나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자네는 쉽사리 해치워 버리거든."
옥 귀두씨는 손바닥으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옥 귀두씨는 일요일이면 빠짐없이 교회에 나갔다. 뿐만 아니라 나도 반드시 그를 동행하게 했다. 옥 귀두씨는 일찍 나가서 앞자리에 자리잡고 앉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예배시작 종이 울린 후에도 좀더 지체하다가 뒤늦게야 나가서 맨 뒷자리하고도 구석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끼어 앉았다가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옥 귀두씨가 원했다면 '장로'라는 직위도 얻고 남았을 것이다. 허지만 옥귀두씨는 직위를 줄까봐 겁내는 평신도였다. 아직도 해마다 한두 번씩은 '집사' 직위를 맡아달라는 간곡한 청을 사양하느라고 진땀을 빼곤 한다는 것이다. 끝내는 집사'를 떠맡긴다면 다른 교회로 옮겨가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겨우 위기를 모면한다고 했다.
"집사가 되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배시간에 앞에 나가서 대표로 기도하랠까 봐 겁이 나서 그러네.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소리내어 기도를 하라고 한다면 나는 한 마디도 못하고 쩔쩔매게 될 걸쎄."
이렇게 대답했다. 따라서 옥 귀두씨는 신도들과의 접촉도 되도록 줄이는 눈치였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부랴부랴 교회당을 빠져 나오곤 했다.
“내가 교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은 말하자면 습관 같은 것일 거야."
언젠가 교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면서 옥 귀두씨가 줄 알이었다, 옥 귀두씨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이 교회를 설립할 때 물심양면으로 한 몫을 담당한, 일테면 이 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다. 헌데 세상에 태어난 옥 귀두씨는 몸이 몹시 쇠약했다. 여섯 살 때까지 걸음을 걷지 못했을 정도였다. 일곱 살 때부터 걸음을 배우기 시작해 여덟 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지만 일년이면 삼분의 일은 병석에 누워 있다시피 해 국민학교를 팔 년 만에 졸업했고, 중학교, 고등학교도 그런 식으로 다니다가 중도에 포기해 버려야 했다. 윽 귀두씨의 부모님은 이 가엾은 외아들로 인해 더욱 깊은 신앙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한편 신앙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교회에 바치는 헌금 말고는 먹는 것도 아껴가며 아들에게 편안한 장래를 마련해 주려고 억만금의 재산을 모아놓 고 돌아갔다. 부모님은 돌아가기 전까지 세상없이도 교회에만은 아들을 데리고 참석했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친구가 없었다네. 주일학교 중고등 학생부, 찬양 대, 난 얼마나 그 속에 함께 어울려 들어가고 싶었는지 모르네. 특히 크리스마스 때 성탄절 준비를 하느라 축제 기분에 들떠 어우러지곤 하는 젊은 남녀 신도들의 모습에서 나는 얼마나 부러움을 느꼈는지 모르네. 허지만 내 보잘 것 없는 몸뚱이가 도무지 밤샘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았네. 그 무렵부터 나는 따로 떨어져 공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지. 나는 공상 속에서 내 생을 살아가기 시작했어, 타인과의 모든 만남이 공상 속에서만 이루어졌네.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같은 해에 세상을 뜨시더구먼. 헌데 그 충격이 내 몸뚱이에는 오히려 좋은 효과를 주었는지 건강이 차츰 좋아지기 시작하데.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서 차츰 깨어나 내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보니 지나온 삼십평생이 도무지 헛살아 온 것 같이 느껴지더군.
꿈속에서 세월을 보낸 것 같았어. 이제부터 사는가 싶게 살아봐야지. 이렇게 생각하고는 서두르기 시작했지. 허지만 난 어느새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네. 뭔가 내 손발을 묶고 있는 기반으로부터 풀려나려고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번번이 헛수고였어. 교회건, 음악회건. 운동구경이건, 극장이건, 그 어느 곳을 가더라도 나는 그 이면의 핵심에 접해보지 못하고 문 밖에서만 어정거리다가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란 말일세."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결혼을 하십시오."
나는 정중하게 조언했다, 나는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옥 귀두씨의 이야기에 대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내 병이 고쳐질 거란 말이지?"
"경험 많은 어른들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육년 전, 그러니까 내가 서른 두 살 때 결혼을 했었다네, 자네가 말하듯 결혼을 해야 된다고 야단들을 해서, 우리 교회 목사님 소개로 다른 교회 장로님 따님과 선을 보고 정혼했지. 아름답고 똑똑한 여자였어. 헌데 결혼 날짜를 정하고부터 나는 큰 근심이 생겼지. 첫날밤을 어떻게 겪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네. 여자의 옷을 어떻게 벗겨야 할 것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재수 좋게 옷이 저절로 벗겨졌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몸뚱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아득하고 막막해만 지더군. 근심걱정 때문에 잠이 다 안을 지경이었어. 궁리궁리 끝에 창녀를 찾아가 볼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나? 그래 결심을 단단히 하고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려 창녀촌 근처를 어정거렸지. 미끼를 채가는 물고기처럼 여자가 나를 채가더군.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고 끌려가지 않았겠나? 창녀의 옷은 벗겨주지 않아도 되었어, 제 손으로 훌훌 벗더니 날더러도 옷을 벗으라고 성화질이었어. 하도 재촉질이 심해서 주저할 사이도 없이 옷을 벗고 다가갔지. 한데 난 내 물건을 창녀의 물건 위에 얹어 놓은 채 창녀의 배 위로 엉거주춤 엎드려 있기만 했어. 난 그렇게 얹어 놓고만 있으면 여자의 것이 남자의 것을 빨아 들여가는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 한참 그러고 있으니까
여자가 쳐다보면서
"왜 그러구 있지?"
하고 묻더군 난 대답한 말이 없었어. 여자의 물건이 어서 내 것을 빨아들여 갈 때만 기다리며 엉거주춤 엎드려 있기만 했지.
"왜 그러구 있어. 난 바쁘단 말야. 빨리 해."
여자가 짜증을 냈어.
"왜 그래? 이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도 맞받아 짜증을 냈지. 그랬더니 여자가 나를 왈칵 떠밀며 발딱 일어나 앉는 거야.
"이 멍청아, 나이는 어디루 먹었니? 개한테 가서 배워 가지구 와, 숫캐가 암캐한테 어떻게 하나 견학 좀 하구 오라구!"
여자는 침을 튀기며 암캐처럼 짖어대더너 콧방귀를 힝하소 뀌더군.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허겁지겁 옷을 줏어 입고는 도망쳐 나왔네. 이윽고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밤을 맞았지. 헌
데 내가 의무감을 가지고 떨리는 손으로 벗겨 놓은 내 신부의 몸뚱이는 창녀의 몸뚱이와 다를 것이 없었어. 나는 창녀가 하던 말을 생각하면서 열심히 숫캐 흉내를 내기 시작했네. 허지만 결합은 이루어지지가 않았어. 그 여자는 숫처녀인 채로 나와 헤어졌지. 일년 동안 함께 살면서 그 여자는 나를 정상적인 남성으로 회복시켜보려고 퍽이나 애태우며 정성을 쏟았지만 헛수고였어. 마침내 그 여자는 헤어지자는 내 제의에 응하더구먼."
옥 귀두씨는 마치 둘도 없는 친구한테 은밀한 속사정 얘기를 털어놓듯 말했다. 허지만 옥 귀두씨는 행동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노라고 했듯 나는 인정 따위에는 감동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옥 귀두씨의 이야기는 좀 더 계속되었다. 옥 귀두씨는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 예상외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충격 때문에 옥 귀두씨는 꽤 오랫동안 좌절감과 무력감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다는 것이다. 허지만 세월은 흘렀다. 차츰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옥 귀두씨는 실패한 결혼생활을 반성해보았다. 자신의 육체에는 결함이 없었다. 헌데 왜 정상적
인 결혼생활을 영위해 갈 수가 없었던 것일까. 옥 귀두씨는 다시금 공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신과 싸우며 결혼생활이 실패하게 된 까닭을 차근차근 따져 보았다. 그것은 마치 파도타기처럼 공상의 물결 속에 묻혔다. 떠오르고 또 묻혔다 떠오르며 엎치락뒤치락 이어갔다. 이윽고 기진맥진해져서 공상의 바다 속으로 가라앉게 되었을 즈음 참 알맞게도 전에 단골로 다니던 의사와 만나게 되었다. 옥 귀두씨는 용기를 내어 의사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의사는 그 방면의 전문가를 추천해 주었다. 퍽 여러 차례의 면담을 거쳐 전문의사가 내린 진단은 이랬다,
"옥 선생께서는 병석에 누워 지내느라고 마음껏 뛰놀지 못했던 소년 시절 과정에 대한 미련과 동경을 풀리지 않은 덩어리인 채로 의식 속에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 결과 옥 선생의 생각은 그냥 청소년시절에 묶여 있는 형편이고 따라서 아직도 옥 선생의 정신은 청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미숙성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우 결혼생활이란 청소년시절에 대한 미련과 동경을 짓밟아버리는 장애물로서 저항을 받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옥선생께서는 양가집 규수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신(神)에 대한 불성실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옥 선생께서는 불우한 여성, 일테면 불구자라든가 창녀 같은 여자와 결혼함므로써 여자를 구제하고 동시에 옥 선생 자신도 신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일종의 종교적 소명감이 덩어리가 되어 의식 속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도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의사가 가르쳐 준 처방이란 사회에 유익한 사업을 하면서, 한편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의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고, 또 되도록 옥 귀두씨의 소년시절, 청년시절을 함께 보낸 여자와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의사의 말은 그럴 듯하기도 했고, 엉터리 같기도 했어. 어쨌든 나는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를 해보려고 애를 샜지만 실행하지 못하고 말았어. 나는 다시 공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지. 공상도 하나의 치료법이야. 나는 공상 속에서 이런 저런 결혼생활을 수없이 되풀이해 보았다네. 그래 그런지 나는 실제로 결혼생활을 열 번이나 경험한 것 같아서 결혼생활 따위는 도 무지 흥미가 없다는 느낌이야. 헌데 말일쎄, 요즘 내 마음속에서는 속임수, 공갈, 협박, 완력 따위의 야비한 방법으로 조건 없이 거리낌없이 유희 삼아 뭇 여자를 정복해 보고 싶은 충동이 스물거린다네. 헌데 이상하게도 별로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 충동을 느낄 때면 내 가슴은 기대로 설레이고, 내 저 밑바닥에서 잠들어 있던 근원적 생명력이 출렁이며 거센 물결을 일으켜 놓는 느낌이 들거든. 허지만 나는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 충동을 행동으로 옮길 능력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못해. 부득이 또 공상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데, 그 싱싱한 충동을 또다시 허망한 공상 속에서 시들게 하기가 자꾸만 아까운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래서 퍽 안타깝다네."
옥 귀두씨의 긴 이야기의 결론을 결국은 이렇게 내렸다. 나는 옥 귀두씨가 나에게 행동을 지시한 것이라고 재랄리 알아차렸다. 그것이 옥 귀두씨가 지시를 내리는 방식이었다. 옥 귀두씨는 곧바로 지시해도 될 일을 빙 둘러 암시하곤 했다. 어쨌든 나는 옥 귀두씨가 흘리는 암시를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포착해 올리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다.
"제가 해볼까요?"
나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나섰다.
"자네가?"
옥 귀두씨는 자기의 이야기에 취했다가 깨어난 듯 생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자네가? 그래 한번 해보겠나?"
지극히 담담하게 말했다.
여자를 속임수나 폭력으로 야비하게 정복해버리는 일이란 내게는 별로 어렵게 생각되는 것은 아니었다. 깡패 하인 시절에 나는 그런 짓을 몇 차례 해보았던 것이다. 더우기 옥 귀두씨처럼 군자금이 넉넉한데다 최신형의 늘씬한 자가용 승용차까지 있고 본다면 여자의 등급을 꼭대기까치 높인대도 별 어려운 사업이 못될 것이었다.
돌아온 일요일, 교회에 다녀와 점심을 먹고 나서, 나는 자가용 뒷자리에 옥 귀두씨를 앉히고는 차를 몰고 나갔다.
"자네 면허증 있나?"
"없는데요. 그래도 운전 실력은 일륩니다."
화물트럭 조수노릇을 일년쯤 하는 동안 나는 운전 실력을 충분히 연마해 놓았던 것이다.
"문제는 면허증이지 운전 실력이 아니거든. 괜찮나?"
"괜찮을 겁니다. 재수가 없더라도 기껏 벌금이겠죠."
"벌금은 무면허운전사에게 뿐 아니라 차주에게도 해당될걸"
"걱정되십니까?"
"물론이지. 허지만 한편으로는 이 범법을 즐기고 싶기도 하네."
"이것이 제 명함입니다."
"주식회사 삼풍물산 총무과장 이 만보라."
"이번 일을 치르기 위해서 박았습니다."
교외에 있는 고급 유원지에 닿기까지 면허증을 제시해야 될 상황은 조성되지 않았다. 유원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나는 여자 사냥을 나섰다. 쌍쌍이 남자와 함께 온 여자도 많았지만, 여자끼리, 여자 혼자인 경우도 많았다. 찾아 다녀야 하기는커녕 골라야 될 형편이었다.
"누구를 기다리십니까?"
드디어 나는 나무 밑 벤치에 혼자 앉아있는 아름다운 아가씨한테 수작을 걸었다.
"별로."
나는 아가씨 옆에 앉아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가씨도 심심한 참이었는지 내 거짓말을 재미있게 받아주었다. 어느 정도 친근감이 생겼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명함을 건네주었고. 내가 총각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늘어 놓으면서도 굳이 아가씨와 현주소는 캐묻지 않았다. 아가씨가 대학을 갓나오고, 돈이 궁해서가 아니라 사회 경험을 하려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은 아가씨 자신이었다. 옥 귀두씨는 내 주위를 서성거리며 내가 하는 거짓말을 즐겼을 것이다.
"자네 거짓말 실력 대단하던데."
나중에 옥 귀두씨가 한 말이었다.
나는 옥 귀두씨를 친척 형님이라고 소개하고는 아가씨를 차에 동승시켜 시내까기 데려다 주었다.
그후 아가씨를 두 번 더 만나고 나서 나는 옥 귀두씨에게 아가씨를 정복해 보일테니 장소를 정하라고 말했다. 옥 귀두씨의 아담한 별장이 청평 호반에 있었다. 다시 돌아온 일요일, 교회에 다녀온 후 나는 아가씨를 운전석 옆자리에 태우고 청평 호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옥 귀두씨가 엿볼 수 있도록 마련된 방 침대 위에 아가씨를 우악스럽게 쓰러뜨렸다. 아가씨는 낚시에 잡혀 올라온 월척의 물고기처럼 퍼들쩍거리다가 잠잠해졌다.
"미안해. 난 사실은 부자집 자가용 운전사에 불과해. 허지만 난 아가씨를 본 순간 미쳐버렸어. 가능하다면 나하고 결혼해 줘."
나는 아가씨를 정복하고 나서 짐짓 애원하듯 말했다. 아가씨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아가씨는 증오와 멸시의 눈으로 나를 노려보더니 내 얼굴에 침을 탁 뱉었다. 나는 말없이 손수건을 꺼내 침을 닦았다. 아가씨는 별수 없이 옷매무새를 고치더니 휑하니 집을 나가버렸다. 아가씨는 도도하고도 초라한 모습으로 멀리 사라져갔다.
"자네는 마치 연극배우가 연극을 까는 것 같구먼. 훌륭한 연극을 본 기분이야."
옥 귀두씨가 홍조를 떤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후로 두 여자를 더 범했다. 하나는 이혼한 여자였고. 하나는 유부녀였다.
"하나 더 할까요?"
"재미있나?"
옥 귀두씨가 짓궂게 반문했다.
"저는 선생님의 수족이고 기계입니다."
"자네는 생각하는 기계야. 자네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앞질러가며 행동하고 있거든. 물온 자네의 앞질러 가는 행동에 나는 갈등을 금치 못하고 있어. 자네의 행동은 내 머릿속의 구상을 자네를 통해 행동으로 옮겨간다는 정도를 지나쳐 마치 나 자신의 분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주거든. "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헌데 말일쎄, 나는 자네를 통해서 참으로 생각 밖의 체험을 하고 있다네. 내가 자네를 통해서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죄를 저지를 적마다 오히려 신(神)앞으로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 들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성된 경지에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 들거든.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허지만 난 죄를 범하고 난 다음 주일날이면 습관이 아니라 진실로 신을 만나고 싶은 목마름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고 내 참 생명의 불꽃으로 신께 기도하고 찬성할 수 있게 된다네. 그렇다면 뭘까? 부도덕이나 죄악 같은 어두운 세력에 유혹을 당할 때 가슴이 설레이고 마음과 몸 저 밑바닥에서 생명의 근원적인 물결이 힘차게 출렁이는 듯 느끼게 되는 것은 뭔가 말이야. 죄악에의 충동은 동시에 구원에의 충동이란 이야긴가? 나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 위대한 성인들이 살인자, 강도, 좀도둑, 뚜쟁이, 창녀, 사기꾼 같은 악하고 부도덕한 무리들과 즐겨 어울린 것은 그들을 죄악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인류를 구원하는데 필요한 원동력을, 근원적 생명력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대두.
나 같은 소인이 지니고 있는 이 작지 않은 모순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 것인가? 나는 신께 내 영혼을 구해달라고 기도하면서 한편 온갖 부도덕과 죄악을 남김없이 범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네, 아니 신께 올리는 내 기도를 생명을 태우는 영혼의 참 언어로 만들기 위해 나는 온갖 범죄와 부도덕을 차례로 남김없이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뜨겁게 느끼고 있다네. 피 행동할 수 없는 자의 가련한 충동이여!"
"제가 해볼까요?"
"자네가? 자네가 그런 일들을 다 해낼 수 있겠나?"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옥 귀두씨의 시야 속에서 죄악과 부도덕을 앞질러갔다. 소매치기를 비롯해서 들치기, 날치기, 바꿔치기, 절도. 강도, 속임수. 사기, 공갈협박, 폭력, 위조, 파렴치,,,,, 헌데 이런 것들을 실수 없이 또 멋지게 행하려면 결단력과 사고(思考)의 집중화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 위에 예술적 형상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도덕한 행위나 범죄행위에 예술적이란 어휘를 사용한다고 코웃음치겠지만 그것은 잘 모르는 소리다. 무미건조한 단도직입적인 행위는 범죄자들의 세계에서도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다. 가령 소매치기의 경우를 보더라도 만원 버스 속에서 짓눌리는 사람의 주머니를 뽑아내는 것보다는 그리 만원이 아닌 버스 속에서 기교를 발휘해 의젓하게 서있는 사람의 주머니 속이나 가방 속을 뽑아내는 행위가 평가를 받는 것이다. 내가 아는 소매치기 하나는 자신의 성기를 활용하는 수법을 개발했는데, 버스간에서 남자건 여자건 대상을 찾아내면 그 뒤로 다가가 성기를 대상의 엉덩이에 슬그머니 갖다댄다. 그의 성기는 차츰 발기하면서 대상의 엉덩이를 압박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이 여자인 경우는 치한으로 알고, 남자인 경우는 남색가, 동성연애자로 알고는 이상한 자의 팽창한 성기에 압박을 받고 있는 자신의 엉덩이에 주의를 집중해 간다. 그는 대상의 주의력이 최고도로 그곳에 집중하는 순간을 재빨리 포착해서 주머니 속이나 핸드백 속을 뽑아내는 것이다. 두 놈이 버스에 올라 그 중 한 놈이 여자를 노골적으로 희롱하든가 운전사에게 싸움을 걸어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방어심을 해이하게 만드는 수법도 있다. 또 가령 개도둑의 경우도 그렇다. 오징어다리에다 독약이나 발라 던지는 따위 수법은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놈 하나는 올가미를 던지는 기술이 기막혔고, 또 한 놈은 먼저 발정한 암캐를 훔쳐 가지고 그것을 끌고 다니는 기발한 수법을 써서 수캐들을 한번에 여남은 마리씩이나 제 발로 걸어오게 했다. 허지만 이런 것은 단순한 예에 지나지 않았다. 고도로 기교화하고 정상화한 그리고 묵직한 내용의 범죄행위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훌륭한 영화나 연극이나 소설을 감상할 때처럼 감동에 잠기게 되고 이윽고는 감정의 순화와 그 극치감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도 저렇게 범죄예술의 걸작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생각에 부러움을 금치 못하게 되곤 했다.
옥 귀두씨는 내가 만들어 가는 범죄작품들을 대할 적마다 훌륭한 예술을 감상하는 기분이라고 극찬하곤 했지만 그것은 옥 귀두씨가 범죄예술을 감상하는 눈이 아직 높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류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이류 아니 삼류나 될까말까 한 것이다, 허지만 나는 옥 귀두씨의 칭찬을 들을 때면 보람을 느꼈고, 옥 귀두씨가 내 행위를 통해 더욱 진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가는 데 대해서도 보람을 느꼈다. 그것은 어쨌든 내 행위가 주인에게 받아들여진다는 증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더 완성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망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 앨 수 있는 온갖 부도덕과 범죄를 다 써먹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새로운 부도덕. 새로운 범죄가 떠오르지를 않았다. 이렇게 되면 옥 귀두씨 밑에서의 내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옥 귀두씨가 다른 일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옥 귀두씨는 여전히 새롭고 색다른 부도덕과 범죄행위를 하라고 암시하곤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전에 했던 것을 되풀이해야 했다.
어느 날 옥 귀두씨가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
"요즘 자네는 재탕만 하는구먼. "
옥 귀두씨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하필이면 가을이 시작되는 마당에 일자리를 잃게 되는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옥 귀두씨가 나를 해고하려는가 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추위가 느껴졌다. 이미 십이월에 들어선 날씨가 간간히 눈발을 뿌려 놓고 있었다.
"자네 신문 안 보나? 자, 그럼 멋진 것 하나 생각해 보게. 기대해보겠네. 그럼 나가보게."
나는 옥 귀두씨의 방을 나왔다. 옥 귀두씨는 나를 해고하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마루를 건너 내 방으로 오다가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보았다. 나는 신문을 집어들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신문을 펼쳐들었다.
-유괴되었던 5세 소년 시체로 발견-
사회면에 이런 기사가 나 있었다. 나는 활로를 찾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 동안 내 머릿속에 유괴나 살인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이상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유괴나 살인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유괴살인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내 가슴은 의욕으로 충만해졌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보리라. 기어코 걸작을 만들어 놓으리라. 나는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비작업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옥 귀두씨에게 어서 속히 작품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나는 대상을 선택했다. 옥 귀두씨를 따라 일요일마다 나가곤 하던 교회 장로님의 네 살 난 손자였다. 나는 그 집 근처를 이틀동안 서성거리다가 드디어 기회를 잡을 수가 있었다. 나는 꼬마를 청평 호반으로 데려가서 옥 귀두씨의 별장 지하실에 가두었다. 물론 꼬마가 바로 죽기라도 하면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는 틀린 것이니까, 꼬마가 출지 않도록 난로를 피우고, 침대를 들여놓고 물과 먹을 것을 충분히 마련해 주었고, 나는 서울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했다. 장로님 댁에 몇 차례 협박전화를 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돌아온 일요일에 옥 귀두씨를 따라 교회에 나갔더니 교회 안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되어 있었다. 모든 신도들의 화제가 장로님의 실종된 손자에 관한 것이었다. 설교도 기도도 찬송도 장로님의 실종된 손자를 위한 것이었다. 헌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어느 결에 집사가 된 옥귀두씨가 설교단 앞에 나가 서서 큰소리로 열렬하게 기도를 올린 것이다,
옥 귀두씨는 실종된 장로님의 손자가 무사히 부모와 조부모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교회 전체가 비통에 잠기고, 더우기 옥 귀두씨에게 변화가 온 것을 보고 내 작품이 성공해 가는 증거라 생각하며 마음이 흐뭇했다. 나는 이제 내 작품이 절정에 도달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예배가 끝난 후 신도들이 줄지어 꼬마의 부모와 꼬마의 조부인 장로님께 유감의 뜻을 표하는 자리에 끼어 옥 귀두씨와 나도 정중하게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로부터 삼십 분 후 나는 버스로 청평을 향해 달리며 오늘밤에는 꼬마를 살해해 가지고 미리 마련해 둔 산 속 땅 구덩이 안에 묻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옥 귀두씨는 나에게서 꼬마 살해의 소식을 듣고는 성탄절을 맞을 것이다. 옥 귀두씨에데는 가장 성스러운 성탄절이 될지도 모르지.
내가 청평 호반의 별장에 닿았을 때 나는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우연히 별장 앞을 지나던 사람이 꼬마의 비정상적인 울음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노릇인가. 허지만 그 당시는 내 작품이 실패로 끝났다는 생각에 서운함을 금치 못했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옥 귀두씨가 면회를 왔었다.
"나는 변함없이 자네를 내 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옥 귀두씨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변함없이 선생님을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난 요즘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해보고 싶은 충동을 받고 있다네. 하지만 그 충동을 실천에 옳길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안타깝게 하네."
"제가 해볼까요 ? "
"자네가? 그래. 자네가 내 몫까지 해보려나?"
"네, 재주는 없지만 힘껏 해 보겠습니다."
"자네가 나오면 할 일이 많다네."
옥 귀두씨는 정답게 웃어주고 돌아갔다.
옥 귀두씨가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깊은 산 속의 기도원으로 들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옥고를 치르고 나온 지금도 옥 귀두씨는 내 주인이고, 나는 옥 귀두씨의 충실한 하인이만을 것이다. 옥 귀두씨는 기도원에 들어가기 직전에 교도소로 다시 한번 면회를 왔었다.
"난 며칠 안에 기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네. 형기를 마치고 나오거든 앞으로는 밝은 생활, 독립된 생활을 하도록 하게. 자네가 앞으로 영위해 갈 밝은 생활, 독립된 생활을 위해 자네 앞으로 조그마한 집 한 채와 예금통장을 남겨놓고 가네, 출옥하거든 김 목사님을 찾아가게. 그럼 잘 있게."
"안녕히 가십시오."
옥 귀두씨가 훌륭한 주인이었다고 회상한다. 하인에게는 끊임없이 일거리를 마련해주고 그에 대한 충분한 보수를 주는 사람이 훌륭한 주인인 것이다. 나는 지금 옥 귀두씨가 주고 간 집에서 살고 있고, 옥 귀두씨가 주고 간 예금통장에는 상당한 예금액이 기재되어 있다. 허지만 나는 다시 새로운 주인을 찾아 나설 생각이다. 나는 하인의 역할 속에서 생의 진미를 더욱 깊게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유재용(柳在用: 1936- )
강원도 금화 출생. 1948년 월남. 환일고교 중퇴.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童話) 당선. 1968년 문공부 제정 신인 예술상에 <손 이야기>가 입선되어 등단. 현대 문학상, 이상 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주요 작품으로는 <꼬리 달린 사람>, <성하>와 장편 <성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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