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사 람 들 -이근영
겨울내내 눈 한 닢 비 한방을 떨어지지 않고 강추위만 계속하다가. 며칠 전 눈이 한자 가량이나 쌓이게 되고 바로 비가 이틀 동안이나 주룩주룩 퍼부었다. 그렇잖아도 병자년 흉년보다 더 지독한 해를 겪은 그들은 눈만 뜨면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 졸이는 것이 그날 그날의 일처럼 되었다. 이렇게 초조한 그들이 눈과 비를 흠뻑 받았으니 집집마다 경사나 치른 듯이 웃음결이 떠올랐다. 눈 쌓인 위에 비가 와서 길이란 길은 발목까지 폭폭 빠지건만 사람들은 밖에 나오는 것이 하늘에 대한 인사나 되는 듯이 골목마다 사람으로 붐비었다.
허 참판네 집 머슴사랑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방문을 열면 인사하는 것보다도 흙물에 빠진 버선이나 양말을 벗는다. 방 윗목에는 줄을 매어놓고 양말과 버선이 죽 널려 있다. 그 아래에는 떨어지는 물을 받느라고 짚이 제법 두툼하게 깔려 있다.
「어, 땅도 지독허게 질다. 날이 추웠으면 얼기나 허지.」
점쇠는 맨발로 들어서더니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풀어 물기를 닦고서는 수건을 줄에 넌다,
「점쇠가 어째 오늘밤은 늦었어?」
아랫목에 앉았던 봉갑이가 인사 대신 이렇게 말하자 모두가 점쇠를 돌아본다.
「젠장, 허고헌 대낮을 두고 하필 밤중에 닭을 잡으라고 혀서 늦었구먼. 자긴 첩네집에 가 자고 보신약은 큰마누라 집에 와 먹구.,,,., -그러니 큰마누라 속은 얼마나 뒤집히겠는가베.」
하고 점쇠는 사람 틈을 비벼 뚫고 화롯가에 앉는다.
일이 없는 사람은 화롯가에 뺑 둘러앉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뒤켠에 자리를 잡고 짚세기를 삼거나 새끼를 꼬거나 삼태미를 겯거나 한다. 유 생원만 통나무 목침을 베고 -조자룡전-을 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에 띈다.
「유 생원, 이야기책은 왜 속으로만 보슈?」
점쇠가 묻는 말에 그는 목쉰 소리로 겨우 알아들을 만하게,
「목이 잔뜩 쟁겨서 그러네.」
하고 미안하단 의미로 소리 없이 웃는다. 다른 때 같으면 유 생원을 화롯가 일등 석으로 모셔놓고 육자배기조와 단가조를 번갈아 가며 멋들어지게 읽는 이야기 소리에 방안은 찍 오리 없을 것이언만 이날 밤은 혼자 보는 이야기책이라 유 생원이 소용없게 되었다.
화롯가에서는 모두가 이 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석만이만 잠자코 무엇을 생각하는 체하더니 벌떡 일어나 윗목으로 간다.
「하두 좁아서 가슴이 죄드니 거 잘됐다.」
하며 봉갑이가 석만이 나간 자리까지 차지하고 화로에 바싹 당겨 앉는다.
석만이는 줄에 널린 양말을 걷어 한번 힘들여 짜 가지고 먼젓자리로 돌아온다,
「봉갑이 이 사람아. 좀 비키소.」
「난 아주 가는 줄 알구 잘됐다 혔드니 또 왔네그려.」
석만이는 아무 말도 없이 봉갑이의 옆자리에 간신히 뚫고 앉자 양말을 말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지금 정신머리가 있나? 없나 ? 자네 발목 고린내는 예편네도 맡기 싫을 거네. 우리보고 대신 맡으라는가.」
석만이는 들은 체도 않고 양말을 말린다. 제법 발간 깜불(깜부기불) 기운으로 양말에서는 하얀 김이 모롱모롱 올라온다.
「그놈의 양말 좀 치워버려. 사람이 채신머리가 있어야지.」
누구 하나가 갑자기 대쪽 깨는 소리를 지르자 석만이는 눈을 힐끔 뜨고 그를 쳐다본다.
「쳐다보면 어쩔 텐가. 남이 싫다면 싫은 줄 알어야지.」
「싫을 건 마 있단 말인가. 있는 불에 좀 말리면 어쩌간디그려?」
「어따 그 사람, 멀 잘 히였다구 입을 까고 있는 거여? 나 같으면 염치 없어서라도 죽은 듯이 있겠구먼.」
이번은 봉갑이가 고개를 홱 돌려 석만이를 쏘아본다.
석만이는 형세가 험해질 것을 알고 실무시(슬며시) 궁둥이를 빼어 양말을 줄에 넌 다음 유생원 옆에 가 드러눕는다.
석만이는 머슴사랑방에 오는 사람치곤 누구에게서나 미움을 받았다. 그는 머슴사랑방에서 잔뼈가 굵어졌건만 공의 덕으로 헌 인력거를 얻어 끌게 된 후부터는 양반이나 된 듯 머슴사랑엔 일절로 발을 끊었다. 그러다가 이번 비로 자기 집 천장에서 물이 새게 됨서부터 다시 머슴사랑을 찾아왔다. 그러니 여러 사람의 평시 가졌던 미움은 더 한층 커지게 된 것이다.
「여봐들, 곰개재에도 빨간 말뚝을 박었는데 거 뭐라는가?」
봉갑이가 언뜻 생각난 것처럼 묻자 다른 사람들도,
「참, 거 뭐라는 거여?」
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입을 쳐다본다.
「자동차 길이 난대여. 그래 우리 집 주인아들은 곰개다가 땅을 산다구 오늘 갔지.」
점쇠가 큰 것이나 알아 가지고 온 것처럼 목들 가다듬은 다음 자신 있게 말을 하였다.
「아 그리어 ? 그것 참 미상불 편리허게 되었네그려.」
석만이가 누운 채로 반갑게 응수를 한다
「멋이 어찌구 어찌어 ? 너는 행길 나면 인력거 품을 팔어서 네조(좋아)하겠지만 우린 큰일이다 큰일이여. 인젠 화물자동차가 부리나케 들락거려 일년 두구 우리 등으로 져내던 숯 짐을 몇 차로 족쳐낼 테니 등짐 품팔이도 못히어 먹게 됐어.」
좌중에서 나이 많기론 유 생원 다음 가는 홍 생원이 빨끈해 가지고 석만의 말을 눌러 버린다.
「흥. 자넨 신작로 나면 자네 인력거가 뽐낼 줄 아는가. 지랄두 틀렸어. 누가 자동차 타고 댕기지 다 찌그러진 자네 인력거를 탈 성 부른가.」
봉갑이가 또 깃달고 나서 석만이를 핀잔준다.
「왜들 석만이만 가지구 올려주어 ? 노상이 석만이 말이 틀린 것두 아닌데. 행길 나면 일거리 없어지는 사람두 있지만 편리한 것두 많을 건 사실이지 뭐. 그런 말 모두 집어치구 우리 존 수가 하나 있어.」
화롯불에 담배를 피고 있던 점쇠가 나섰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밤 이진사댁 큰 제사가 있다닝게 단자(單子)를 보내 한 잔 먹지.」
점쇠 말이 떨어지자 그것 좋다고 모두가 야단법석이다. 편지지는 조선 글 깨친다고 말없이 공부만 하고 있는 칠성의 공책을 뜯어서 쓰고 봉투는 말을 내논 점쇠 돈 일전으로 사왔다. 단자 사연은 유생원이 유식한 한문으로 쓴다는 것을 점쇠가,
「참 유생원두, 고리타분하게 한문으로 쓸 건 뭐 있어유? 제가 술병 하나 큼직하게 그려서 보냅시다. 기럼 술은 많이 보내겠지라우.」
점쇠의 이 말에 좌중이 찬성하자 그는 공책 한 장에 술병 하나를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 내놓는 것을 보고,
「야, 점쇠 꼴불견이구나. 곧잘 그렸는데.」
하고 여러 사람이 놀란다.
「이래 보여두 보통학굘 다닐 때 도화룬 내가 제일이었다네. 복이 없어 이리 됐지.」
점쇠는 이렇게 자랑 반절 한탄 반절 늘어놓고선 두고두고 하는 이야기를 또 내 놓았다. 그것은 그와 함께 사 학년까지 다니고 성적은 항상 자기 밑에 놀던 사람이 지금은 판임관이 되었건만 자기는 중도에 퇴학한 후부터 품을 팔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 저놈의 이야긴 어떻게 여러 번 들었는지 꿈에도 생각나드라.」
봉갑의 이 말을 따라 모두 한바탕 웃어 제킨다.
단자를 .보내고 술상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잡동사니 이야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나왔다. 함경도 탄광에로 품팔이 갔다가 돌아온 사람한테서 들었다는 이야기, 요전 장날 다목 농장 사무원이 설탕을 많이 사려고 장꾼들을 시켜 한 근씩 모은 것이 삼십여 원어치나 되었다는 이야기, 재민구제사업으로 개천을 파는 데서 은숟갈 한 개가 퉁겨 나오자 인부끼리 자기 곡괭이 뿌리로 파냈다고 다투다가 쌈이 일어나 대가리가 터졌다는 이야기, 경상북도에선 어떤 사람이 한 배에 네 쌍둥이를 순산했다는 이야기, 누구 한사람의 말이 끝나기만 하면 서로 이야기를 먼저 내려고 경쟁하는 형편이다.
「유 생원, 그 이야기책에선 돈이 쏟아지는 게유? 고만 내말 좀 들으시오. 아, 올에는 용이 열두 마리라 놔서 서로 비들 미루는 통에 또 가물겠다니, 그럼 큰 일 아닌가유.」
하고 홍 생원이 남의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글쎄, 책력에는 일일득신에 십이용치수라고는 하였지만 열두 마리가 짝 맞으면 서로 샘을 내니라고 비를 더 줄는지도 모르지!」
「그럼 홍수가 나서 어체피 흉년 들긴 마찬가지게유?」
유생원 말을 점쇠가 받았다.
「야, 흥없다. 말이라두 흉년 소린 마라.」
「허긴 하늘이 사람 일도 모르는 게고 사람이 하늘 일도 모르는 것이라네. 풍년 흉년을 무슨 재조로 미리 안단 말인가. 이번 눈이 많이 왔으니 보리 풍년은 간 데 없을 게고, 비가 또한 많이 내렸으니 나락 농사도 순조로울 게 아닌가. 이렇게들만 믿어두게. 그럼 맘이라도 편할 테지.」
유 생원의 여덟 마지기 소작 논이 작년에 말짱하게 타죽은 것을 모두 아는지라 그의 이런 말소리가 이상히도 여러 사람의 뱃속을 울리었다,
「그저 올에는 꼭 풍년이 들어야지. 젠-장.」
봉갑의 이 말소리가 그대로 깔앉는 것같이 방 속은 갑자기 침통해졌다, 그들은 작년 흉년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안정되지 않았다. 누가 연사 이야기만 내면 죽은 자식 말을 내든 것 같아서 콧등과 가슴이 찌르르 울리었다. 다시 흉년을 만날까보아 전율을 느끼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술상을 기다리다 못해 유 생원과 석만이가 잠들었을 때 비로소 가져왔다. 이진사댁 머슴에게 은근히 부탁한 대로 안주보다도 술을 많이 놓았다. 유 생원만 깨고 석만이는 자는 대로 둔 채 술상을 둘러 앉았노라니 석만이가 부시시 일어나던 멀로(길로) 눈을 비벼가며 한몫 낀다.
「술안주가 정말 건데, 원체 인심 좋은 댁이라 이 흉년에도 다르구먼.」
홍 생원이 제육 한 점을 집으면서 말했다. 술상은 제육을 비롯해서 생선전과 누르미, 파적, 산적, 탕, 그리고 김치와 약과, 밤, 대추, 곶감까지 상 위를 가뜩 덮었다. 이러고도 김치가 모자랄 것 같으매 송 참판 머슴을 시켜 안에 가서 김치를 한 대접 가져오게 하였다. 술잔을 유 생원과 송 생원에게 차례로 권한 다음은 단 자 심부름 한 사람과 술상 가지고 온 이 진사 머슴에게 먼저 돌렸다. 그 다음 차례가 발언을 했다는 공으로 점쇠가 잔을 받았고 약속한 일도 없건만 맨 나중 돌아간 사람은 석만이었다.
「점쇠, 내 자네게 꼭 부탁이 있네. 꼭 들어주려는가.」
홍 생원이 술잔을 점쇠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들을 일이면 듣구 말구요.」
「물론 들을 수 있는 일이지. 다른 게 아니라 말일세, 자네 그 이야기 좀 꼭 해주게.」
무슨 긴한 부탁이 나올까 하고 모두가 궁금히 여기는데 이 말이 나오자 와그르 웃었다. 그 이야기란 점쇠가 대판을 몹시 가고 싶은데 도항증은 도저히 낼 수 없고, 생각다 못해 궤짝 속에 들어앉은 채 하물로 부쳤던 것이 바다를 감쪽같이 건너기는 했으나, 저편 소창역 이란 데서 발각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문에 났다고 동리가 모두 알긴 하지만 자기들 눈으로 직접 신문을 본 것도 아니고, 또 보았다는 사람 말을 들으면 자상하지도 못하거니와 이야기가 사람마다 달라서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흥생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자의 점쇠한테 자세한 말을 듣고 싶었으나 입을 절대로 열진 않았다. 점쇠를 짐으로 부쳐 가지고 간 사람은 한번 건너가서 다니러 오지도 않고, 산 속에서 점쇠를 궤 속에 넣어 가지고 정진장까지 짊어지고 갔다는 봉갑만은 자세한 이야길 점쇠한테 들어서 알겠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럴수록 그들은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여보게. 오늘밤은 정말 이야기 좀 허소.」
「별소릴 다 허십니다. 홍 생원두 참. 심심하시면 술이나 자시기라우.」
하고 점쇠는 받은 잔을 홍 생원에게 돌린다. 점쇠는 겉으론 태연한 기색을 띠었으나 이 말만 내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도록 무안쩍고 후회가 갔다. 그때 무슨 환장을 했기에 궤짝 속에 들어갔던가 하고 자기로도 믿을 수 없었다. 하긴 궤짝 속에 들어갈까말까 하고 이틀이나 꼬박 굶은 괄에 결심했던 것이 무슨 옛날이야기나 되는 듯이 까마득하기도 하다.
「이 사람이 술을 더 좀 취해야 이야길 할랑가부네.」
하더니 홍 생원은 다시 점쇠게로 술잔을 권한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눈짓을 하여 그를 권하게 하매 술잔은 자연 점쇠에게로 몰리게 된다. 한사 사양하건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달래가며 술잔은 에누리 없이 달리우고 만다, 본시 주량이 없는지라 얼마 안 가서 점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차차 떠들게 된다.
「그런데 제일 애탄 때가 정거장에서 차에 싣기 전이었지, 그것 참!」
점쇠는 무슨 말끝에 이런 말을 엉겁결에 내놓았다. 여러 사람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음 말을 재촉한다. 역시 점쇠는 입을 다물려 했으나, 한번 내논 말을 중판 메면 죽어서 구렁이가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을 섞어가며 치근치근 매달리는 통에 할 수 없이 다음을 계속했다.
「궤짝에 공기 구멍을 내느라고 양편에다 큰 밤만하게 두개를 뚫었지. 그 구멍으로 내다보니까 역부가 뵈잖겠다구? 아 이놈이 꼭 나를 보구선 좇아오는 것만 같은데 그땐 정말이지 간이 콩만해지데. 그러다가 화물차에다 덜커덩 하고 실어노닝게 어떻게 반갑던지. 미여 (메어) 내붙이는 통에 머리통이 웽하고 울렸지만, 인자 됐다는 생각이 실무시나데.」
어떤 사람은 배를 쥐고서 웃느라고 화로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한다.
「먹을 것은 물까지 넣어 가지고 갔드람서?」
「음, 그렸지.」
「연락선 탈 때는 어떻든가?」
홍 생원은 남의 말을 일쑤 앞서서 물었다.
「바다 위를 가는지 어쩐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쑥 올라갔단 쑥 내려오구 할 때가 연락선 탔을 때든가봐.」
「어떤 때가 그 중 아프든가.」
홍생원이 또 묻자마자,
「압다 흥생원두, 궤짝을 타구 가시구 싶어서 대구 물으시는그라우?」
하고 봉갑이가 말을 쑥 내밀었다.
「미친 사람.」
홍생원은 이렇게 말하고 퍼섹 웃긴 했으나 얼굴이 단번 화끈해지며 수그러진다. 사실 그는 손재주도 있으니, 동경 대판에만 가면 공장 같은 데 가서 돈을 잘 벌 것만 같았다. 갖은 힘을 글 써가며 도항증을 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점쇠의 부린 꾀가 그럴 듯도 생각되었다. 점쇠가 바다까지 건너가서 실패하게 된 것만 잘 때울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상책일 것 같아서 자세한 걸 묻고 싶었던 것이다.
점쇠는 죽자 하고 이야기를 더 계속하지 않았다. 점쇠가 궤짝 속에 든 채 바다를 건너가려고까지 하게 된 동기는 홍 생원처럼 돈 벌겠다는 욕심만은 아니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만으로는 늙도록 가야 집 한 칸 생길 것 같지 않으니, 달리 변통하자매 조선을 뜨는 것이 술 것 같았다. 그리고 삼 년 전에 그와 정이 들었던 화선이가 대판 조선 술집으로 팔려간 후부터는 항상 고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이었다. 애초 갈 때는 이년 기간을 맺었었는데, 삼 년이 되도록 그저 있다. 더구나 대판 간 후 안부 편지 한 장이 있은 후론 아무리 편지를 띄워도 답장까지 없다. 혹시 죽기나 했나 하고 화선네 집에 알아보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니 점쇠는 더욱 몸이 달았다. 경관에게 잘 보여 도항증이나 얻을 맘으로 공일도 많이 해주고 부역 때도 맨 끝까지 일을 하기도 했으나 경관은 으레,
「점쇠의 맘씨와 부지런한 것은 다시 없지만 국가의 방침이니까 할 수 없어. 그 정성을 가지고 조선에서 노동하면 돈도 잘 벌 텐데 그래!」
이런 말로 점쇠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점쇠는 바다까지 건너가지고 발각된 것이 몹시도 원통하였다. 그 놈의 공기 구멍으로 자기 머리가 내다뵌 것이 발각된 실마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숨이 막히더라도 공기 구멍을 바늘귀만하게 뚫었을 것인데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후퇴한다. 어떤 때는 잠결에 벌떡 일어나 무의식중에 무릎을 탁 치며 실심하는 때도 이따금 있다.
이튿날이었다. 점쇠가 주인 첩집에 심부름 가느라고 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 김 주사와 마주쳤다. 그 사람은 아직 갓 서른밖에 못된 젊은 사람이지만 맘씨가 고맙다서 일꾼들 층에선 그를 존경하는 의미로 -김주사-라고 불렀다. 자기보다 차이가 많은 동료 직원들에겐 주사 소릴 않는데 자기에게만 하는 것이 민망쩍을 뿐 아니라 그 말이 귀에 어울리지도 않아서 여러 번 말리기도 했으나, 그들은 일상
「우리들의 주사 양반은 한 분뿐이닝게」
하며 더한층 따르는 형편이다. 면장과 구장이 명령해서 안 되는 일이라도 김 주사란 사람이 나가면 거개 소리 없이 시행된다.
「점쇠, 어델 이렇게 급히 걸어가는 거여?」
「작은집 엘 좀 가는구만운.」
「점쇠가 작은집을 두었지.」
그는 점쇠가 심부름 가는 줄을 알면서 이렇게 농담으로 받고 둘이 웃었다.
「그런데 내지 안 가고 싶은가.」
이 말 한마디가 점쇠는 머릿속에 모닥불을 일으킨 듯 화끈하였다.
「아니, 무슨 말씀을,,, 거 정말잉가유?」
「정말이구말구 고런데 점쇠가 가고 싶어하는 대판은 아니지만 북해도란 곳이지. 대판도 지나구 동경도 지나서 아주 북쪽에 붙은 땅인데, 거게 석탄광에서 인부를 모집하러 왔어.」
하루 품삯이 이원부터 오 원까지고 기한은 이 년이란 것까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북해도두 이쁜 색시가 얼마구 있으니 가보라구. 하루 일 원씩만 저금한대도 이 년이면 칠백 원이 아닌가. 그리두 한번 팔려가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화선이만 생각하면 무슨 수가 나나?」
사실은 이 사람이 내지 시찰단에 끼어서 대판에 들렸을 때 화선이 있는 술집을 찾아갔다. 색시가 열 명이나 득세기고 상술집으론 상당히 컸다. 화선이가 그를 만나자 고향사람이래서 반가워하긴 했으나 이편에서 점쇠 이야길 내놓았어도 그리 달갑게 여기니 않았다.
「전 이런 데서 늙든지 천향(천행)으로 돈 있는 은인이나 만나서 호강할 수 있다면 좋지요. 소원이란 이 것뿐예요. 지긋지긋한 놈의 가난이 꿈에라도 따라올까 무서워요.」
하고 술을 사양하지도 않고 마시는 품이 점쇠를 잊은 지는 오래인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하면 점쇠의 실망이 너무도 클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화선이 만났다는 이야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첨엔 북해도까지 가는 여비를 각자가 담당해얀다기에, 그럼 모집해줄 수도 없고, 설령 간다는 사람이 있대도 못 가도록 붙들겠다구 막 벋댔지. 그래 결국은 회사에서 여비까지 당해주기로 히었으니 몸뚱이만 빠져나가면 되는 거여.」
점쇠는 면사무원이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답게 말하는 것이 몹시 고마웠다. 모두가 자기를 생각해서 하는 말 같았다.
점쇠는 주인 첩집에 가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머릿속은 몹시도 뒤숭숭해졌다. 대판-화선이-탄광-돈-이런 생각이 어지럽게 떠올랐다간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고 했다. 장작은 제대로 두고 모탕을 몇 번이나 헛찍기까지 했다.
「웬 장작을 괜다고 부시레기만 자꾸 내는 거여?」
이 소리에 점쇠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인 첩이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앓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젠장맞을 것, 한달 전까지도 술집계집년이든 게 반말을 탕탕 허구. 나이로도 내가 훨씬 위고 제가 사내를 안 때보다 내가 계집 안 때도 훨씬 먼절 텐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여자를 옆눈질로 흘겨보았으나 그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점쇠는 그전부터 아니꼽던 생각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모탕을 내동댕이치고 나와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건성건성 일을 마치었다. 그는 주인 첩집을 나오던 길로 곧 봉갑이 집을 찾아갔다. 보리밭에 거름을 주러 갔다기에 삼 마장이나 되는 데를 달음질쳐갔다. 마침 봉갑이가 빈 오줌동이를 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봉갑이 존 수가 생겼네. 우리 북해도 가지 안 할라나?」
「북해도가 어덴데?」
「내지 땅이지.」
「거긴 멀 허러 간단 말인가.」
점쇠는 면서기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럼 자넨 가기로 하였는가 ?」
「내가 가닝게 자네보구 가자지.」
점쇠는 부모 형제도 없고 일가라곤 재당숙 하나뿐인데, 고나마 이십 리 밖 촌에서 사는지라 일 년이면 두 번 만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이렇게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래 봉갑이와 단짝으로 친한 정도는 갈수록 더하였다. 두 사람이 하루 만 못 만나도 공연히 마음이 쓰이고 불안한 것이다. 이런 봉갑이와 함께 북해도를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를 끌려 하는 것이었다.
「하루 일원씩만 저금하여두 이년 후면 칠백 원은 넘을 게 아닌가. 자넨 이 년 후 그 돈을 한몫 가지고 오면 살림이 좀 퍼겠는가베. 그리구 여보소, 나는 말이 네, 이 년만 고스란히 있다가 돌아올 땐 말여 대판에 가 떨어져 버릴라네.」
「북해돌 가는 것도 화선이 만날려구 그러느만?」
「화선이두 만나구 돈두 뫼구.」
점쇠는 돈을 벌어서 장래 살림 밑천을 삼겠다는 생각도 물론 있으나 이년 후 대판에 떨어져서 거기서 돈도 벌고 화선이 만나는 것이 희망이다. 두 가지를 저울로 달아보면 화선이 편이 좀 처질 것 같았다.
「어쩔라는가? 다소 뭣하드라도 내 청으로 함께 가자꾸나.」
「가만 있게. 집에서 아버지랑 성님이랑 상의히여 보야겠네. 될 수만 있다면야 자네허구 떨어지겠는가. 자네가 못 가든지 내가 가든지 양단간 양단은 날 테 지.」
밤에 만나기로 하고 두 사람은 동리까지 함께 와서 갈렸다. 점쇠는 그 길로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김주사 어른 계서유?」
하고 점쇠가 물었더니,
「김주산 왜 그려 ? 지금 공사장엘 나가구 없어.」
하고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늙수룩한 호적계 서기가 멋퉁이나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대답한다. 점쇠는 다소 불쾌하긴 했으나 그대로 나왔다. 공사장까지는 이 마장이 짱짱하다. 동리 앞 평야 한복판을 흐르는 내가 장마지면 넘치기 쉽고, 가물면 마르기 쉬워서 한해구제공사를 기회로 개수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냇바닥을 훨씬 깊이 파고 언덕을 단단하게 하기로 되었다. 한동안은 나무뿌리와 흙덩이로 뱃속을 채우던 것을 이 공사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좁쌀로라도 배를 돌보게 되었고, 또 하천 공사만 완성되면 장마지나 가무나 흉년을 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내가 이상스럽게도 귀엽고 믿음직했다. 공사장의 십장이나 감독이 까다로운 사람이건만 불평을 말하지 않고 일이 착착 진척되는 것도 이 내를 위하는 그들의 심정의 관계도 많았다. 점되는 면서기를 꼭 만나야 할 일도 없지만 그는 무엇이든 보고를 하여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점쇠 잘 왔네.」
면서기는 이렇게 말하고 점쇠 온 것을 반가워하더니,
「북해도 갈 사람을 우리 면에서 삼십 명은 꼭 모집하야겠는데 이 많은 사람 중에 단 둘뿐이어. 석만이허구 판술이허구.」
하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점쇠가 열 명은 모집히여 주야겠어.」
점쇠는 아직 봉갑이가 갈지 말지 하는 판에 보기 싫은 석만이가 맨 먼저 결정되었다는 것이 -이것 마수 없는 징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흙을 파서 높직이 쌓아올린 데에 서서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단단히 얼어서 얼마동안 일을 중지했다가 해동과 함께 낄 을 또 시작한 지 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들은 신을 내서 흙을 파고 져내고 누구나 열심이었다. 며칠전의 그 고마운 비와 눈이 아직도 차갑게 쏘는지라 일 하기가 곤란하겠다 생각하매 점쇠는 자기가 높직이 올라서서 구경하는 것이 민망스러워서 어느 결에 내려서고 말았다. 이 사람이면 되겠지 하고 제일 먼저 눈 에 띈 것이 언복이었다. 천복이는 소고(小鼓)의 명수다. 소고 잡이를 발견했으니, 징을 칠 사람이 없는가 하고 물색했다. 하루 밤새도록 징을 쳐도 무겁다 하는 일 없이 한번도 비지 않고 잘 치는 최 서방이 흙 짐을 지고 가다가,
「점쇠 왔는가.」
하고 알은 체를 한다. 그러나 최 서방은 보통학교 졸업한 큰아들이 허 참판 농장 급사로 들어가서, 제가 똑똑하니까 장부 적발까지 하여 논도 여러 마지기 얻게 되고, 매월 잔돈푼도 들어오는 형편이라 집을 떠나갈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그래 징 칠 사람이 또 없는가 둘러보았다. 삽질을 부산나게 하고 있는 판암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징을 잘 치는 편은 못되나 남이 치는 것을 억지로 뺏어 치기가 일쑨데 별로 리는 일은 없다, 점쇠는 무엇보다도 소고잡이와 징잡이를 점 찍어둔 것이 몹시도 반가웠다. 아까 봉갑이를 만났을 적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이만하면 풍장(농악) 한패는 훌륭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은 것이다. 동리에서 꽹과리로 봉갑이, 장고로는 점쇠가 맨 으뜸이다. 붕갑이 꽹과리와 점쇠 장고는 어쩌다가 하나가 리더라도 감쪽같이 둘러맞추어 진 가락이 그대로 맞아 넘어갈 수 있도록 그들은 손이 척척 맞았다. 점쇠는 봉갑이, 천복이, 판암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데리고만 가고 싶었다. 농악 한 벌도 기어이 마련해 가지고 가리라 하였다. 점쇠는 천복이, 판암이 외에도 선달이 둘째 아들과 다른 다섯 사람을 맘으로 잡아두었다. 면서기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쉬라는 호각소리가 기다랗게 세 번 났다. 모두 일제히 일을 멈추고 삽. 곡괭이 .지게 등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가지고 언덕 위로 나온다. 점쇠와 눈인사만 했던 사람들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서 말을 건네는 등 점쇠가 안 가면 점쇠 있는 곳으로 일부러 와서 알은 체를 하는 등, 제법 시끄러웠다. 남의 머슴살이를 하는 점쇠가 뜻밖에 공사장에 나타나자 허 참판집에서 쫓겨 나와 일자리를 보러 왔는가 하고 누구나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 걱정스런 낯빛과 목소리로 말을 걸면,
「아녀, 이년만에 만석궁이가 될 수 있는 곳이 생겼는데 나 혼자 가기가 서운해서 함께 가자구 왔어,」
「아따, 우리도 벌써 알었단다. 점쇠가 궤짝을 타고도 일본 내지를 못 가더니 인제 봐란 듯키 가볼랴구 그러능가.」
「왜 일본을 못 가긴 ? 가긴 갔었지만 벤토 한 그릇만 얻어먹고 쫓겨왔지.」
「화선일 만날랴면 대판으로 가야지, 북해도로 가면 화선이가 거까지 따러올까.」
이미 면서기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그들은 이런 말로 점쇠를 구슬리고서는 서로 웃었다.
점쇠는 천복이와 판암이를 멀찍이 떨어진 데로 데리고 가서 담배 한 개씩 나누어주고 말을 꺼냈다. 구변 있는 대로는 모두 털어놓고 끝으로 힘을 들여 다시 말했다.
「여기서 뼈빠지게 일하구. 하루 잘 벌어야 일원 이십 전이 아닌가. 거기 가면 못 벌어도 이원 이상은 벌 수 있고, 또 남서부터 백 리 밖을 못 가본 우리가 공짜로 내지 구경을 할 수 있고 또 그뿐인가. 이년만 지나면 돌아오는 길에, 대판이나 동경에서 실쩍 내리면 누가 아나? 뒤떨어져 가지고 일터만 잘 잡으면 하루 오 원도 벌구 십 원도 벌구. 이 말은 아무 보구두 하지 말게. 이렇게라도 허야 우리도 한세상 볼똥말똥 허잖겠는가. 그러고 말여, 봉갑이도 간다구 히였으닝게 자네 둘만 가면 북해도 가서도 풍장을 치구 심심할 것 없이 지낼 수 있단 말일세. 폐일언허구 꼭 가세. 김 주사 어른이 우질 생각허구 권하는 게지 괜시리 가라겠는가, 이 사람들아.」
이 말이 면서기의 위엄 있는 말보다 훨씬 맘속을 두드렸다. 천복이와 판암이는 즉석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선달이 둘째 아들과 다른 사람 하나까지 해서 점쇠가 네 사람을 모집한 것이다.
「인저 면서기 자리를 점쇠게로 주야겠네. 나는 아까부터 와서 단 두 사람만 승낙 맡었는데, 점쇠는 잠깐 동안에 네 사람이나, 북해도 가서도 그런 식으로만 허면 돈을 남의 배는 벌겠네.」
면서기가 점쇠에게 담배를 권하며 이렇게 말할 때는 아닌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몸이 둥둥 뜨는 것도 같았다.
동리로 돌아올 때는 면서기와 함께 걸었다. 점쇠는 주인집 대문 앞에 이르자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으나 허 참판의 악머구리 소리의 호령이 전처럼 겁나지는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두엄을 져낸 것이 거의 반나절 일을 단숨에 끝낸 듯하다.
맘이 들떠서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봉갑이를 발리 만나서 작정된 것을 속히 듣고 싶어 소죽을 아무렇게나 주어버리고 나오려 하는데, 사랑에서 주인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쳇, 무슨 일을 시킬랴구 그러는고?」
하고 점쇠는 중얼거리며 사랑으로 나갔다.
「낮엣때는 어델 갔었간디 그렇게 불러도 소리가 없었단 말인가. 작은댁 도야지란 놈이 떨어져 기걸 잡을랴다가 복숭아 나무, 매화 나무가 모다 쓰러졌다니 어이 가서 일으켜 노소.」
이 말을 들으니 점쇠는 봉갑이 만날 것이 자꾸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점쇠는 북해도 가는 일에 비하면 꽃나무 몇 개 쓰러진 거야 바람에 재티 날려간 일 푼수밖에는 안되었다. 그는 주인 첩네집과는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쇠.」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앞을 보니 어둑한 초저녁 어둠 속에서 누구 하나가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또 한번 부를 적에야 봉갑의 목소린 줄 알았다.
「겅충겅충 걸어오는 것을 보구 자넨 줄 알었지.」
「그런 말은 천천이 허구, 대관절 어떻게 되었는가.」
「어따 그사람, 난리가 쳐들어오는가 부다. 가기로 히였으닝게 인전 맘놓고 지나소. 우리 집 일은 성님허구 동생이 맡기루 히였네. 예편네보고는 지금 다섯 달 된 것을 잘 나서 키워노면 세 살되는 해 모자 , 양복 구두를 사가지고 와 입혀서 안어주마구 그랬지. 그리고 그때 또 하나 만들어야 터도 알맞게 잘 것 아닌가.」
봉갑이는 점쇠의 어깨를 치며 함께 웃어댔다.
「봉갑이 미안하네.」
「미친 놈.」
늦장가든지 일곱 달밖에 안 되는 봉갑이를 아내와 떼 놓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 점쇠는 몹시도 미안하였다.
「자네는 각시를 잘 두어서 아무 때구 잘살고 말 것이네. 얼굴 이쁘고 맘 곱구, 그리고 말이네, 시집온 지 겨우 일곱 달이고 애기까지 뱄는데 떨어지려는 것이 여간한 여자가 아니거던.」
점쇠는 봉갑이 아내를 이렇게 추켜 주면서 화선이를 또 생각했다. 얼굴이야 봉갑이 아내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지만 맘씨가 그만할는지가 걱정되었다. 이 까닭인지 이날 밤 화선이 꿈을 꾸었다. 화선의 사진을 잃어버리고 애써 찾는 것을 또 꿈꾸었던 것이다. 이따금 꾸는 것이지만 이날 밤 꿈에는 더 몸을 달았다. 점쇠는 화선이가 떠날 때 주고 간 명함만한 사진을 뻣뻣한 종이로 싸서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이 재미였다. 작년 봄 일하다가 쉬느라고 못 가에 앉아 그는 곧 화선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 무릎 위에 놓고 담배 한 개를 태워 물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만 사진이 날아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물이 차가운 것을 알면서도 점쇠는 발가벗고 들어가는 도리 밖에는 별수 없었다. 물 속에 들어가자 단번 숨이 딱 막히며 입이 벌려졌다. 그러나 이것도 순간이었고 그는 헤엄쳐서 사진을 건져 가지고 나왔다. 볕에 말리는 동안 마음이 쓰여서 일이 잘 되지도 않았다. 사진이 바람에 날린 것도 가벼운 까닭이고, 지니고 다니는데 구겨지기 쉽다 하여, 그는 과자 갑을 오려서 사진 뒤에 붙이었다. 그런데 봉갑이가 장가들 때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뛰놀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사진이 빠진 것을 알고 맘 집히는 곳은 모두 찾아보았으나 종시 발견하지 못했다. 가벼워 바람에 날아갈까 봐서 무겁게 만들었던 것이 되려 화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가벼운 대로 두었더라면 저절로 빠질 리는 없을 텐데 하고 후회도 했었다. 하긴 이때가 궤짝을 타고 가려는 결심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실행하진 못하고 화선이 사진을 잃은 것이 대판도 못 가고 영영 화선이를 만 나지 못할 징조로만 생각되었다. 그래 일년 동안을 두고 맘만 조이다가 실행한 것이 실패하자, 그는 오랫동안 맥이 풀려 손에 일이 잡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예정 인원인 삼십 명은 별 지장 없이 모집되었다. 북해도 간다는 데에 점쇠에게 못지 않을 만큼 희망을 가진 사람으론 홍 생원과 석만이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홍 생원은 면서기와 점쇠의 노력도 소용없이 나이가 너무 많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떨어지고 말았다. 석만이는 공의 인력거를 끌게 된 것이 큰 벼슬이나 한 것같이 뽐냈으나 왕진을 갈 때마다 공으로 끌어주는 것이 대부분이고, 자기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전같이 기차 정거장까지 자동차가 안 다닌다면 인력거에 목을 매고 지낼 수도 있지만. 인젠 자동차의 운전 횟수를 더 늘린다니 돈 구경은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래 인력거를 공의에게 돌려주는 대신 그 동안 끌어주었다는 사례금으로 주는 이십 원을 받아서 살림을 처리하고 아내는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의 속 계산으론 이년간 모은 돈을 가지면 세 식구 목구멍은 유지해나갈 수 있는 밑천을 얻을 것도 같았다. 석만의 이런 이야기가 동리에 퍼지자 동료들은 그를 전같이 미워하던 맘이 차차 사라지고 도리어 동정하게 되었다.
출발하기로 된 전날 밤 면사무소 발기로 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서 떠나는 사람 삼십 명과 농군층의 선배격인 사람 십여 명을 모아놓고 송별연회를 열었다. 술은 막걸린데 맘껏 먹으라고 석유통으로 셋이나 가져왔다. 안주로는 명태를 찢어서 고추장을 찍어먹게 하고 난로 뚜껑을 벗기고선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고 짠 김치와 깍두기에 도야지 고기를 넣어서 찌개로 만들었다. 이것도 김 주사란 사람이 서둘러 부잣집에서 몇 원씩 거둔 것으로 만든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고마운 생각이 한층 더 벼에 배었다, 면장이 인사말로 조선사람 노동자의 체면을 생각해 서라도 일을 잘하고 한푼이라도 많이 벌어 가지고 이 년 후 무사히 돌아오라고 부탁하고서는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곧 가버렸다. 다음 북해도 탄광회사에서 온 키는 작고 똥똥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 회사의 탄광 일은 조금도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고 가자는 뜻으로 말을 하고, 김 서기가 나와 주의 사항을 말하였다. 답사는 보통 학교를 졸업한 진수라는 사람이 그중 유식하다 하여 그가 하였다.
「우리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신 것도 한없이 고마운데 이렇게 잔치까지 히여주시니 참말로 고맙습니다. 저만은 한 몸뚱입니 다만 다른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처자를 두고 떠나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노상이 말하면 누구를 물론 하고 고향을 떠나 낯선 데로 품 팔퍼 가는 것은 참말이지 슬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돈을 벌러 갑니다. 힘껏 일을 하여서 돈을 잔뜩 벌어 가지고 와서 잘 살겠습니다. 하누님이 무심치 않으니 꼭 기리 될 것입니다. 여기 오신 여러 어른네들은 저들이 올 때까지 부데 평안히 계시고 농사를 잘 지십시요. 올에는 꼭 풍년이 들 것입니다. 말리 타향에 있는 우리들은 고먕에 풍년이 들게 하여달라고 항시 축원허겠습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목이 메는 것 같어서 그만두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누구나 울상을 하고 있다. 봉갑이와 석만이는 느껴 울기까지 하고 있다. 나란히 앉아서 고개를 맞대고 울던 봉갑이와 석만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집안 식구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었다.
「석만이, 그 동안 섭섭히 지낸 것을 아주 잊어버리세. 만리 타향으로 고생하러 가는 우리가 서로 위하고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할 게 아닌가.」
석만이에게 이 말을 내기는 봉갑이가 처음이었으나 평시 그와 거칠게 지낸 사람은 모두 말하고 풀었다.
어떤 사람은 김 서기를 붙들고 울다가는 술을 권하고 다시 울기도 하였다. 김 서기도 술이 농창하게 취했다. 누구 할 것 없이 취기가 돌았을 때 봉갑이가 꽹과리를 뚜드리며 나서자 점쇠 ,천복이, 판암이가 제각기 한가지씩 들고 나섰다. 동리 사람들이 특별히 생각하여 두 벌이던 농악물을 한 벌 가지고 가라고 나누어 주었다. 다만 꽹과리가 너무 깨져서 점쇠 돈으로 새로 산 것이다.
「자, 마주막으로 한바탕 멋지데 쳐보자.」
판암이가 소고를 두드리며 소리치고 나선다.
「마주막은, 죽으러 간단 말인가. 어이들 치기나 잘 허게들. 난 춤을 추겠네.」
유 생원은 아직도 터지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농악소리는 자지 러지게 울린다. 어떤 사람들은 궁둥이를 그대로 붙이고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기도 하고 서로 붙들고 사설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대개는 일어서서 담뱃대 문 채 혹은 든 채로 춤을 너울너을 춘다. 농악소리, 웃음소리, 말 소리, 어느 것이나 척척 어울린다. 탄광 회사에서 온 사람은 처음은 어리둥절하고 보고만 있더니 차차 흥이 나는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어 궁장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동리에 대한 인사나 하는 듯이 농악을 따라 동리 골목을 한 번 돌았다.
장터 광고판 앞에서 모두 헤어지려 할 때,
「우리 성황당에 가서 한번 치고 갈기세. 자들, 날만 따러오소들.」
하고 석만이가 맨 앞서서 춤을 추며 가자 모두 그 뒤를 대어선다. 석만이는 농악 앞을 지성스럽게 따라다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기뻐서 날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목을 껴안고 울기도 하고, 실썽한 사람같이 보였다.
성황당은 동리에서 반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행길가에 있다. 제법 높은 고갯길이라 동리 사람들은 여기 당도하기만 하면 돌을 한 개씩 던져 주는 일이 많다.
이날 밤만 새고 나면 고들은 화물자동차를 타고 성황당 앞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북해도에 가서 무사한 몸으로 돈 많이 벌게 빼달라는 기도가 성황당에 당도하기 전부터 용솟음친다.
석만이는 성황당이 아직 멀었건만 길가에서 큰 돌 한 개를 발견하자 두 손으로 받쳐들고 겅충겅충 뛰어 누구보다도 먼저 당도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감속을 조용히 가다듬고,
「성황님네 그저 우리 집 식구들을 잘 좀 살게 히여 주십시요. 식구가 각분 동서하는 판이니 이년 후면 모두 성한 몸으로 돌아오고 살어 나갈 걱정은 없게 히여주소서.」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빌었다. 누가 옆에 있으면 넉넉히 알아들을 !있도록 소리내어 빌었다. 농악이 당도하자 그는 굵다란 눈물을 손등으로 씻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춤을 추기 시작한다. 농악은 늦은 가락으로 고치어 치기 시작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유 생원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성황당 앞에 섰다. 점쇠는 농악을 치고 유생원 뒤를 지나가며,
「내 소원 좀 잘 빌어주슈.」
하고 그를 찌뻑거린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점쇠는 다시 한번 돌아 성황당 앞을 지날 때,
「그저 대판을 꼭 가게만 하여 주십시요.」
하고 장고 가락이 삘까보아 이 한마디만 빌었다. 그래도 장고 가락은 삐고 말았다.
「화선이 생각을 허나?」
장고 빈 것을 책하는 듯 봉갑이가 점쇠를 한번 흘겨보고는 꽹과리를 잠깐 멈추었다가 잦은가락으로 고쳤다.
성황당 옆 동리 아이들 한패가 소리를 지르며 구경하러 달음질쳐오고 있다,
이근영(李根榮: 1910- ? )
전북 옥구 출생. 보성 전문 법과 졸업.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역임.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 1935년 단편 <금송아지>를 <신가정(新家)>에 발표하여 등단. 그는 일제 식민지하의 빈곤과 외부적 세력에 의해 수탈되는 농촌 현실을 주로 다루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과자 상자>, <제3 노예>, <이발사>, <장날>, <흙의 풍속>, <고구마>,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이 있다.
(이해와 감상)
1933년 11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
김기진(金基鎭)의 회고에 의하면 연재 마지막 35회, 36회분은 작가의 구속으로 김기진 자신이 대신 쓴 것이라 한다. <카프> 계열에서 쓰여진 농민 소설의 대표작으로서 노동 쟁의, 소작 쟁의 등의 경제 투쟁, 농민 운동을 강조하는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한, 신경향 소설의 경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론의 시각, 현실 반영의 시각, 그리고 이데올로기 실천의 시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도식성(圖式性), 작위성(作爲性)이 드러난다.
(줄거리)
무더위 속에서 농사일로 비오듯 땀 흘리는 '인동이' 모자(母子)의 모습과, 시원한 마루의 등의자에서 한가하게 부채질하는 마름[地主] '안승학'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두 모습은 식민지 통치로 더욱 가난해진 농민 계층과 경제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계층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들의 갈등과 해소가 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일본 유학생 김희준이 등장하여 가난한 농민의 구심점이 된다. 지식인 유학생은 농민소설이라면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영웅적, 이상적 존재이지만, 김희준은 실패한 유학생으로 초라하게 등장하여 점차 자기 희생적 지도자로 변모하고 있다. 그는 두레를 결성하여 농민 의식을 변화시키며, 마름의 횡포에 맞서서 농민의 힘을 집결시켜 마침내 뜻을 이루고 만다.
가난의 문제, 계층 갈등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제시해서는 프로 문학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1930년대 초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실적 묘사와 생활 감각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 작품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쓰여진 최고의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브나로드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왔지만, 브나로드 주창자들과는 달리 문화 운동으로서의 농민 계몽이 아니라 경제 투쟁으로서의 농민 운동을 강조한다. 이른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노동 쟁의 양상․소작 쟁의 양상, 그리고 양자(兩者)의 결합 양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모든 문제는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투쟁에 의해서만 해결되고 있다. 이와 같이, <카프>에서 요구하는 도식에 맞추기 위하여 많은 작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김희준과 안갑숙의 만남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둘만의 개인적 애정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적 동지애(同志愛)가 중요하다는 관념적 원칙을 내세워 역시 프로 문학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악덕 마름의 딸 안갑숙의 공장 노동자로의 변모, 그리고 소작인들의 집단 쟁의가 벌어졌을 때 그녀의 행동 등은 너무 이상화되어 있다.
(핵심정리)
갈래 : 장편소설, 농민소설
배경 : 시간 - 1920년대 말 공간 - 농촌(원터 마을)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경향 : 카프 계열, 사회주의 리얼리즘
의의 : 농민 중심의 대표적 농민소설.
제재 : 식민 통치로 점점 피폐해지는 농촌 생활
주제 :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농민들의 의식의 성장.
(등장 인물)
김희준 : 주인공. 동경 유학생 출신. 농민 공동체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농촌 운동가. 농민 을 결속시켜 안승학과 대결한다.
안승학 : 서울 민 판서 집의 마름. 새롭게 부상(浮上)한 신흥 세력가. 농민 착취의 전형적 인물.
권상철 : 상인. 고리 대금업자
안갑숙 : 마름 안승학의 딸. 아버지와는 달리 제사 공장에 가명(라옥희)으로 위장 취업하 여 농민을 돕는 농촌 운동가. 김희준에 대한 사랑을 동지애로 승화시킨다.
(구성)
발단 : 농민과 마름의 대립. 여러 인물 소개.
전개 : 청년회의 충돌, 갑숙의 가출, 두레 조직, 갑숙과 경호의 공장 취직
위기 : 수재를 당함. 경호․갑숙의 갈등
절정 : 소작료 삭감 투쟁
결말 : 동트는 새벽, 장래의 희망과 동지애
(줄거리)
1920년대 말 원터 마을, 동경 유학생이던 김희준이 학자금난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소작인으로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농민 봉사, 계몽 활동을 통하여 농민 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힌다. 그를 중심으로 한 소작인들은 동네 마름인 안승학과 대결해 나간다.
마름 안승학은 그의 본부인을 서울로 보내 자식들을 교육시키도록 하고 자신은 첩 '숙자'와 함께 산다. 안승학과 '숙자'는 딸 '갑숙'이를 이씨 문중으로 시집보내려 하다가 '갑숙'과 '경호'와의 관계를 알고 앓아 눕는다. 왜냐 하면, '경호'는 읍내의 상인인 권상필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구장집 머슴 곽 첨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갑숙'이는 가출하여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한다. 그녀는 '옥희'라는 가명을 쓴다.
풍년이 들었으나 소작료와 빚진 것을 제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다. '갑숙'이와 친했던 '경호'는 집을 나와 생부를 찾고 역시 공장에 취직한다.
수재(水災)가 나서 집이 무너지고 농사를 망친다. 김희준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은 마름 안승학에게 소작료를 감면해 줄 것을 요구하나, 안승학은 이를 거절한다. 이때 공장에서도 '갑숙'(옥희)을 지도자로 한 노동 쟁의가 벌어지며, 김희준은 이를 돕는다. '갑숙'이는 소작인을 괴롭히는 아버지에 반대하여 김희준과 힘을 합친다. 김희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끝내 안승학의 양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김희준과 갑숙이는 이성간의 애정을 초월하여 동지로서의 사랑을 확인한다.
겨울내내 눈 한 닢 비 한방을 떨어지지 않고 강추위만 계속하다가. 며칠 전 눈이 한자 가량이나 쌓이게 되고 바로 비가 이틀 동안이나 주룩주룩 퍼부었다. 그렇잖아도 병자년 흉년보다 더 지독한 해를 겪은 그들은 눈만 뜨면 하늘을 바라보고 마음 졸이는 것이 그날 그날의 일처럼 되었다. 이렇게 초조한 그들이 눈과 비를 흠뻑 받았으니 집집마다 경사나 치른 듯이 웃음결이 떠올랐다. 눈 쌓인 위에 비가 와서 길이란 길은 발목까지 폭폭 빠지건만 사람들은 밖에 나오는 것이 하늘에 대한 인사나 되는 듯이 골목마다 사람으로 붐비었다.
허 참판네 집 머슴사랑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방문을 열면 인사하는 것보다도 흙물에 빠진 버선이나 양말을 벗는다. 방 윗목에는 줄을 매어놓고 양말과 버선이 죽 널려 있다. 그 아래에는 떨어지는 물을 받느라고 짚이 제법 두툼하게 깔려 있다.
「어, 땅도 지독허게 질다. 날이 추웠으면 얼기나 허지.」
점쇠는 맨발로 들어서더니 머리에 동였던 수건을 풀어 물기를 닦고서는 수건을 줄에 넌다,
「점쇠가 어째 오늘밤은 늦었어?」
아랫목에 앉았던 봉갑이가 인사 대신 이렇게 말하자 모두가 점쇠를 돌아본다.
「젠장, 허고헌 대낮을 두고 하필 밤중에 닭을 잡으라고 혀서 늦었구먼. 자긴 첩네집에 가 자고 보신약은 큰마누라 집에 와 먹구.,,,., -그러니 큰마누라 속은 얼마나 뒤집히겠는가베.」
하고 점쇠는 사람 틈을 비벼 뚫고 화롯가에 앉는다.
일이 없는 사람은 화롯가에 뺑 둘러앉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뒤켠에 자리를 잡고 짚세기를 삼거나 새끼를 꼬거나 삼태미를 겯거나 한다. 유 생원만 통나무 목침을 베고 -조자룡전-을 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에 띈다.
「유 생원, 이야기책은 왜 속으로만 보슈?」
점쇠가 묻는 말에 그는 목쉰 소리로 겨우 알아들을 만하게,
「목이 잔뜩 쟁겨서 그러네.」
하고 미안하단 의미로 소리 없이 웃는다. 다른 때 같으면 유 생원을 화롯가 일등 석으로 모셔놓고 육자배기조와 단가조를 번갈아 가며 멋들어지게 읽는 이야기 소리에 방안은 찍 오리 없을 것이언만 이날 밤은 혼자 보는 이야기책이라 유 생원이 소용없게 되었다.
화롯가에서는 모두가 이 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석만이만 잠자코 무엇을 생각하는 체하더니 벌떡 일어나 윗목으로 간다.
「하두 좁아서 가슴이 죄드니 거 잘됐다.」
하며 봉갑이가 석만이 나간 자리까지 차지하고 화로에 바싹 당겨 앉는다.
석만이는 줄에 널린 양말을 걷어 한번 힘들여 짜 가지고 먼젓자리로 돌아온다,
「봉갑이 이 사람아. 좀 비키소.」
「난 아주 가는 줄 알구 잘됐다 혔드니 또 왔네그려.」
석만이는 아무 말도 없이 봉갑이의 옆자리에 간신히 뚫고 앉자 양말을 말리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지금 정신머리가 있나? 없나 ? 자네 발목 고린내는 예편네도 맡기 싫을 거네. 우리보고 대신 맡으라는가.」
석만이는 들은 체도 않고 양말을 말린다. 제법 발간 깜불(깜부기불) 기운으로 양말에서는 하얀 김이 모롱모롱 올라온다.
「그놈의 양말 좀 치워버려. 사람이 채신머리가 있어야지.」
누구 하나가 갑자기 대쪽 깨는 소리를 지르자 석만이는 눈을 힐끔 뜨고 그를 쳐다본다.
「쳐다보면 어쩔 텐가. 남이 싫다면 싫은 줄 알어야지.」
「싫을 건 마 있단 말인가. 있는 불에 좀 말리면 어쩌간디그려?」
「어따 그 사람, 멀 잘 히였다구 입을 까고 있는 거여? 나 같으면 염치 없어서라도 죽은 듯이 있겠구먼.」
이번은 봉갑이가 고개를 홱 돌려 석만이를 쏘아본다.
석만이는 형세가 험해질 것을 알고 실무시(슬며시) 궁둥이를 빼어 양말을 줄에 넌 다음 유생원 옆에 가 드러눕는다.
석만이는 머슴사랑방에 오는 사람치곤 누구에게서나 미움을 받았다. 그는 머슴사랑방에서 잔뼈가 굵어졌건만 공의 덕으로 헌 인력거를 얻어 끌게 된 후부터는 양반이나 된 듯 머슴사랑엔 일절로 발을 끊었다. 그러다가 이번 비로 자기 집 천장에서 물이 새게 됨서부터 다시 머슴사랑을 찾아왔다. 그러니 여러 사람의 평시 가졌던 미움은 더 한층 커지게 된 것이다.
「여봐들, 곰개재에도 빨간 말뚝을 박었는데 거 뭐라는가?」
봉갑이가 언뜻 생각난 것처럼 묻자 다른 사람들도,
「참, 거 뭐라는 거여?」
하고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입을 쳐다본다.
「자동차 길이 난대여. 그래 우리 집 주인아들은 곰개다가 땅을 산다구 오늘 갔지.」
점쇠가 큰 것이나 알아 가지고 온 것처럼 목들 가다듬은 다음 자신 있게 말을 하였다.
「아 그리어 ? 그것 참 미상불 편리허게 되었네그려.」
석만이가 누운 채로 반갑게 응수를 한다
「멋이 어찌구 어찌어 ? 너는 행길 나면 인력거 품을 팔어서 네조(좋아)하겠지만 우린 큰일이다 큰일이여. 인젠 화물자동차가 부리나케 들락거려 일년 두구 우리 등으로 져내던 숯 짐을 몇 차로 족쳐낼 테니 등짐 품팔이도 못히어 먹게 됐어.」
좌중에서 나이 많기론 유 생원 다음 가는 홍 생원이 빨끈해 가지고 석만의 말을 눌러 버린다.
「흥. 자넨 신작로 나면 자네 인력거가 뽐낼 줄 아는가. 지랄두 틀렸어. 누가 자동차 타고 댕기지 다 찌그러진 자네 인력거를 탈 성 부른가.」
봉갑이가 또 깃달고 나서 석만이를 핀잔준다.
「왜들 석만이만 가지구 올려주어 ? 노상이 석만이 말이 틀린 것두 아닌데. 행길 나면 일거리 없어지는 사람두 있지만 편리한 것두 많을 건 사실이지 뭐. 그런 말 모두 집어치구 우리 존 수가 하나 있어.」
화롯불에 담배를 피고 있던 점쇠가 나섰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밤 이진사댁 큰 제사가 있다닝게 단자(單子)를 보내 한 잔 먹지.」
점쇠 말이 떨어지자 그것 좋다고 모두가 야단법석이다. 편지지는 조선 글 깨친다고 말없이 공부만 하고 있는 칠성의 공책을 뜯어서 쓰고 봉투는 말을 내논 점쇠 돈 일전으로 사왔다. 단자 사연은 유생원이 유식한 한문으로 쓴다는 것을 점쇠가,
「참 유생원두, 고리타분하게 한문으로 쓸 건 뭐 있어유? 제가 술병 하나 큼직하게 그려서 보냅시다. 기럼 술은 많이 보내겠지라우.」
점쇠의 이 말에 좌중이 찬성하자 그는 공책 한 장에 술병 하나를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 내놓는 것을 보고,
「야, 점쇠 꼴불견이구나. 곧잘 그렸는데.」
하고 여러 사람이 놀란다.
「이래 보여두 보통학굘 다닐 때 도화룬 내가 제일이었다네. 복이 없어 이리 됐지.」
점쇠는 이렇게 자랑 반절 한탄 반절 늘어놓고선 두고두고 하는 이야기를 또 내 놓았다. 그것은 그와 함께 사 학년까지 다니고 성적은 항상 자기 밑에 놀던 사람이 지금은 판임관이 되었건만 자기는 중도에 퇴학한 후부터 품을 팔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내 저놈의 이야긴 어떻게 여러 번 들었는지 꿈에도 생각나드라.」
봉갑의 이 말을 따라 모두 한바탕 웃어 제킨다.
단자를 .보내고 술상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가지 잡동사니 이야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나왔다. 함경도 탄광에로 품팔이 갔다가 돌아온 사람한테서 들었다는 이야기, 요전 장날 다목 농장 사무원이 설탕을 많이 사려고 장꾼들을 시켜 한 근씩 모은 것이 삼십여 원어치나 되었다는 이야기, 재민구제사업으로 개천을 파는 데서 은숟갈 한 개가 퉁겨 나오자 인부끼리 자기 곡괭이 뿌리로 파냈다고 다투다가 쌈이 일어나 대가리가 터졌다는 이야기, 경상북도에선 어떤 사람이 한 배에 네 쌍둥이를 순산했다는 이야기, 누구 한사람의 말이 끝나기만 하면 서로 이야기를 먼저 내려고 경쟁하는 형편이다.
「유 생원, 그 이야기책에선 돈이 쏟아지는 게유? 고만 내말 좀 들으시오. 아, 올에는 용이 열두 마리라 놔서 서로 비들 미루는 통에 또 가물겠다니, 그럼 큰 일 아닌가유.」
하고 홍 생원이 남의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글쎄, 책력에는 일일득신에 십이용치수라고는 하였지만 열두 마리가 짝 맞으면 서로 샘을 내니라고 비를 더 줄는지도 모르지!」
「그럼 홍수가 나서 어체피 흉년 들긴 마찬가지게유?」
유생원 말을 점쇠가 받았다.
「야, 흥없다. 말이라두 흉년 소린 마라.」
「허긴 하늘이 사람 일도 모르는 게고 사람이 하늘 일도 모르는 것이라네. 풍년 흉년을 무슨 재조로 미리 안단 말인가. 이번 눈이 많이 왔으니 보리 풍년은 간 데 없을 게고, 비가 또한 많이 내렸으니 나락 농사도 순조로울 게 아닌가. 이렇게들만 믿어두게. 그럼 맘이라도 편할 테지.」
유 생원의 여덟 마지기 소작 논이 작년에 말짱하게 타죽은 것을 모두 아는지라 그의 이런 말소리가 이상히도 여러 사람의 뱃속을 울리었다,
「그저 올에는 꼭 풍년이 들어야지. 젠-장.」
봉갑의 이 말소리가 그대로 깔앉는 것같이 방 속은 갑자기 침통해졌다, 그들은 작년 흉년에 놀란 가슴이 아직도 안정되지 않았다. 누가 연사 이야기만 내면 죽은 자식 말을 내든 것 같아서 콧등과 가슴이 찌르르 울리었다. 다시 흉년을 만날까보아 전율을 느끼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술상을 기다리다 못해 유 생원과 석만이가 잠들었을 때 비로소 가져왔다. 이진사댁 머슴에게 은근히 부탁한 대로 안주보다도 술을 많이 놓았다. 유 생원만 깨고 석만이는 자는 대로 둔 채 술상을 둘러 앉았노라니 석만이가 부시시 일어나던 멀로(길로) 눈을 비벼가며 한몫 낀다.
「술안주가 정말 건데, 원체 인심 좋은 댁이라 이 흉년에도 다르구먼.」
홍 생원이 제육 한 점을 집으면서 말했다. 술상은 제육을 비롯해서 생선전과 누르미, 파적, 산적, 탕, 그리고 김치와 약과, 밤, 대추, 곶감까지 상 위를 가뜩 덮었다. 이러고도 김치가 모자랄 것 같으매 송 참판 머슴을 시켜 안에 가서 김치를 한 대접 가져오게 하였다. 술잔을 유 생원과 송 생원에게 차례로 권한 다음은 단 자 심부름 한 사람과 술상 가지고 온 이 진사 머슴에게 먼저 돌렸다. 그 다음 차례가 발언을 했다는 공으로 점쇠가 잔을 받았고 약속한 일도 없건만 맨 나중 돌아간 사람은 석만이었다.
「점쇠, 내 자네게 꼭 부탁이 있네. 꼭 들어주려는가.」
홍 생원이 술잔을 점쇠에게 건네면서 물었다.
「들을 일이면 듣구 말구요.」
「물론 들을 수 있는 일이지. 다른 게 아니라 말일세, 자네 그 이야기 좀 꼭 해주게.」
무슨 긴한 부탁이 나올까 하고 모두가 궁금히 여기는데 이 말이 나오자 와그르 웃었다. 그 이야기란 점쇠가 대판을 몹시 가고 싶은데 도항증은 도저히 낼 수 없고, 생각다 못해 궤짝 속에 들어앉은 채 하물로 부쳤던 것이 바다를 감쪽같이 건너기는 했으나, 저편 소창역 이란 데서 발각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문에 났다고 동리가 모두 알긴 하지만 자기들 눈으로 직접 신문을 본 것도 아니고, 또 보았다는 사람 말을 들으면 자상하지도 못하거니와 이야기가 사람마다 달라서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흥생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자의 점쇠한테 자세한 말을 듣고 싶었으나 입을 절대로 열진 않았다. 점쇠를 짐으로 부쳐 가지고 간 사람은 한번 건너가서 다니러 오지도 않고, 산 속에서 점쇠를 궤 속에 넣어 가지고 정진장까지 짊어지고 갔다는 봉갑만은 자세한 이야길 점쇠한테 들어서 알겠지만, 그 역시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럴수록 그들은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여보게. 오늘밤은 정말 이야기 좀 허소.」
「별소릴 다 허십니다. 홍 생원두 참. 심심하시면 술이나 자시기라우.」
하고 점쇠는 받은 잔을 홍 생원에게 돌린다. 점쇠는 겉으론 태연한 기색을 띠었으나 이 말만 내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도록 무안쩍고 후회가 갔다. 그때 무슨 환장을 했기에 궤짝 속에 들어갔던가 하고 자기로도 믿을 수 없었다. 하긴 궤짝 속에 들어갈까말까 하고 이틀이나 꼬박 굶은 괄에 결심했던 것이 무슨 옛날이야기나 되는 듯이 까마득하기도 하다.
「이 사람이 술을 더 좀 취해야 이야길 할랑가부네.」
하더니 홍 생원은 다시 점쇠게로 술잔을 권한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눈짓을 하여 그를 권하게 하매 술잔은 자연 점쇠에게로 몰리게 된다. 한사 사양하건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달래가며 술잔은 에누리 없이 달리우고 만다, 본시 주량이 없는지라 얼마 안 가서 점쇠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차차 떠들게 된다.
「그런데 제일 애탄 때가 정거장에서 차에 싣기 전이었지, 그것 참!」
점쇠는 무슨 말끝에 이런 말을 엉겁결에 내놓았다. 여러 사람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다음 말을 재촉한다. 역시 점쇠는 입을 다물려 했으나, 한번 내논 말을 중판 메면 죽어서 구렁이가 된다는 등의 우스운 말을 섞어가며 치근치근 매달리는 통에 할 수 없이 다음을 계속했다.
「궤짝에 공기 구멍을 내느라고 양편에다 큰 밤만하게 두개를 뚫었지. 그 구멍으로 내다보니까 역부가 뵈잖겠다구? 아 이놈이 꼭 나를 보구선 좇아오는 것만 같은데 그땐 정말이지 간이 콩만해지데. 그러다가 화물차에다 덜커덩 하고 실어노닝게 어떻게 반갑던지. 미여 (메어) 내붙이는 통에 머리통이 웽하고 울렸지만, 인자 됐다는 생각이 실무시나데.」
어떤 사람은 배를 쥐고서 웃느라고 화로에 이마를 부딪치기까지 한다.
「먹을 것은 물까지 넣어 가지고 갔드람서?」
「음, 그렸지.」
「연락선 탈 때는 어떻든가?」
홍 생원은 남의 말을 일쑤 앞서서 물었다.
「바다 위를 가는지 어쩐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쑥 올라갔단 쑥 내려오구 할 때가 연락선 탔을 때든가봐.」
「어떤 때가 그 중 아프든가.」
홍생원이 또 묻자마자,
「압다 흥생원두, 궤짝을 타구 가시구 싶어서 대구 물으시는그라우?」
하고 봉갑이가 말을 쑥 내밀었다.
「미친 사람.」
홍생원은 이렇게 말하고 퍼섹 웃긴 했으나 얼굴이 단번 화끈해지며 수그러진다. 사실 그는 손재주도 있으니, 동경 대판에만 가면 공장 같은 데 가서 돈을 잘 벌 것만 같았다. 갖은 힘을 글 써가며 도항증을 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점쇠의 부린 꾀가 그럴 듯도 생각되었다. 점쇠가 바다까지 건너가서 실패하게 된 것만 잘 때울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상책일 것 같아서 자세한 걸 묻고 싶었던 것이다.
점쇠는 죽자 하고 이야기를 더 계속하지 않았다. 점쇠가 궤짝 속에 든 채 바다를 건너가려고까지 하게 된 동기는 홍 생원처럼 돈 벌겠다는 욕심만은 아니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만으로는 늙도록 가야 집 한 칸 생길 것 같지 않으니, 달리 변통하자매 조선을 뜨는 것이 술 것 같았다. 그리고 삼 년 전에 그와 정이 들었던 화선이가 대판 조선 술집으로 팔려간 후부터는 항상 고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이었다. 애초 갈 때는 이년 기간을 맺었었는데, 삼 년이 되도록 그저 있다. 더구나 대판 간 후 안부 편지 한 장이 있은 후론 아무리 편지를 띄워도 답장까지 없다. 혹시 죽기나 했나 하고 화선네 집에 알아보면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니 점쇠는 더욱 몸이 달았다. 경관에게 잘 보여 도항증이나 얻을 맘으로 공일도 많이 해주고 부역 때도 맨 끝까지 일을 하기도 했으나 경관은 으레,
「점쇠의 맘씨와 부지런한 것은 다시 없지만 국가의 방침이니까 할 수 없어. 그 정성을 가지고 조선에서 노동하면 돈도 잘 벌 텐데 그래!」
이런 말로 점쇠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점쇠는 바다까지 건너가지고 발각된 것이 몹시도 원통하였다. 그 놈의 공기 구멍으로 자기 머리가 내다뵌 것이 발각된 실마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숨이 막히더라도 공기 구멍을 바늘귀만하게 뚫었을 것인데 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후퇴한다. 어떤 때는 잠결에 벌떡 일어나 무의식중에 무릎을 탁 치며 실심하는 때도 이따금 있다.
이튿날이었다. 점쇠가 주인 첩집에 심부름 가느라고 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 김 주사와 마주쳤다. 그 사람은 아직 갓 서른밖에 못된 젊은 사람이지만 맘씨가 고맙다서 일꾼들 층에선 그를 존경하는 의미로 -김주사-라고 불렀다. 자기보다 차이가 많은 동료 직원들에겐 주사 소릴 않는데 자기에게만 하는 것이 민망쩍을 뿐 아니라 그 말이 귀에 어울리지도 않아서 여러 번 말리기도 했으나, 그들은 일상
「우리들의 주사 양반은 한 분뿐이닝게」
하며 더한층 따르는 형편이다. 면장과 구장이 명령해서 안 되는 일이라도 김 주사란 사람이 나가면 거개 소리 없이 시행된다.
「점쇠, 어델 이렇게 급히 걸어가는 거여?」
「작은집 엘 좀 가는구만운.」
「점쇠가 작은집을 두었지.」
그는 점쇠가 심부름 가는 줄을 알면서 이렇게 농담으로 받고 둘이 웃었다.
「그런데 내지 안 가고 싶은가.」
이 말 한마디가 점쇠는 머릿속에 모닥불을 일으킨 듯 화끈하였다.
「아니, 무슨 말씀을,,, 거 정말잉가유?」
「정말이구말구 고런데 점쇠가 가고 싶어하는 대판은 아니지만 북해도란 곳이지. 대판도 지나구 동경도 지나서 아주 북쪽에 붙은 땅인데, 거게 석탄광에서 인부를 모집하러 왔어.」
하루 품삯이 이원부터 오 원까지고 기한은 이 년이란 것까지 자세히 말해주었다.
「북해도두 이쁜 색시가 얼마구 있으니 가보라구. 하루 일 원씩만 저금한대도 이 년이면 칠백 원이 아닌가. 그리두 한번 팔려가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화선이만 생각하면 무슨 수가 나나?」
사실은 이 사람이 내지 시찰단에 끼어서 대판에 들렸을 때 화선이 있는 술집을 찾아갔다. 색시가 열 명이나 득세기고 상술집으론 상당히 컸다. 화선이가 그를 만나자 고향사람이래서 반가워하긴 했으나 이편에서 점쇠 이야길 내놓았어도 그리 달갑게 여기니 않았다.
「전 이런 데서 늙든지 천향(천행)으로 돈 있는 은인이나 만나서 호강할 수 있다면 좋지요. 소원이란 이 것뿐예요. 지긋지긋한 놈의 가난이 꿈에라도 따라올까 무서워요.」
하고 술을 사양하지도 않고 마시는 품이 점쇠를 잊은 지는 오래인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하면 점쇠의 실망이 너무도 클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화선이 만났다는 이야긴 하지 않았던 것이다.
「첨엔 북해도까지 가는 여비를 각자가 담당해얀다기에, 그럼 모집해줄 수도 없고, 설령 간다는 사람이 있대도 못 가도록 붙들겠다구 막 벋댔지. 그래 결국은 회사에서 여비까지 당해주기로 히었으니 몸뚱이만 빠져나가면 되는 거여.」
점쇠는 면사무원이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정답게 말하는 것이 몹시 고마웠다. 모두가 자기를 생각해서 하는 말 같았다.
점쇠는 주인 첩집에 가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일하는 동안 머릿속은 몹시도 뒤숭숭해졌다. 대판-화선이-탄광-돈-이런 생각이 어지럽게 떠올랐다간 사라지고 다시 떠오르고 했다. 장작은 제대로 두고 모탕을 몇 번이나 헛찍기까지 했다.
「웬 장작을 괜다고 부시레기만 자꾸 내는 거여?」
이 소리에 점쇠가 정신을 차려보니 주인 첩이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앓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젠장맞을 것, 한달 전까지도 술집계집년이든 게 반말을 탕탕 허구. 나이로도 내가 훨씬 위고 제가 사내를 안 때보다 내가 계집 안 때도 훨씬 먼절 텐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여자를 옆눈질로 흘겨보았으나 그는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점쇠는 그전부터 아니꼽던 생각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모탕을 내동댕이치고 나와버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건성건성 일을 마치었다. 그는 주인 첩집을 나오던 길로 곧 봉갑이 집을 찾아갔다. 보리밭에 거름을 주러 갔다기에 삼 마장이나 되는 데를 달음질쳐갔다. 마침 봉갑이가 빈 오줌동이를 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봉갑이 존 수가 생겼네. 우리 북해도 가지 안 할라나?」
「북해도가 어덴데?」
「내지 땅이지.」
「거긴 멀 허러 간단 말인가.」
점쇠는 면서기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럼 자넨 가기로 하였는가 ?」
「내가 가닝게 자네보구 가자지.」
점쇠는 부모 형제도 없고 일가라곤 재당숙 하나뿐인데, 고나마 이십 리 밖 촌에서 사는지라 일 년이면 두 번 만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는 이렇게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래 봉갑이와 단짝으로 친한 정도는 갈수록 더하였다. 두 사람이 하루 만 못 만나도 공연히 마음이 쓰이고 불안한 것이다. 이런 봉갑이와 함께 북해도를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를 끌려 하는 것이었다.
「하루 일원씩만 저금하여두 이년 후면 칠백 원은 넘을 게 아닌가. 자넨 이 년 후 그 돈을 한몫 가지고 오면 살림이 좀 퍼겠는가베. 그리구 여보소, 나는 말이 네, 이 년만 고스란히 있다가 돌아올 땐 말여 대판에 가 떨어져 버릴라네.」
「북해돌 가는 것도 화선이 만날려구 그러느만?」
「화선이두 만나구 돈두 뫼구.」
점쇠는 돈을 벌어서 장래 살림 밑천을 삼겠다는 생각도 물론 있으나 이년 후 대판에 떨어져서 거기서 돈도 벌고 화선이 만나는 것이 희망이다. 두 가지를 저울로 달아보면 화선이 편이 좀 처질 것 같았다.
「어쩔라는가? 다소 뭣하드라도 내 청으로 함께 가자꾸나.」
「가만 있게. 집에서 아버지랑 성님이랑 상의히여 보야겠네. 될 수만 있다면야 자네허구 떨어지겠는가. 자네가 못 가든지 내가 가든지 양단간 양단은 날 테 지.」
밤에 만나기로 하고 두 사람은 동리까지 함께 와서 갈렸다. 점쇠는 그 길로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김주사 어른 계서유?」
하고 점쇠가 물었더니,
「김주산 왜 그려 ? 지금 공사장엘 나가구 없어.」
하고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늙수룩한 호적계 서기가 멋퉁이나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대답한다. 점쇠는 다소 불쾌하긴 했으나 그대로 나왔다. 공사장까지는 이 마장이 짱짱하다. 동리 앞 평야 한복판을 흐르는 내가 장마지면 넘치기 쉽고, 가물면 마르기 쉬워서 한해구제공사를 기회로 개수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냇바닥을 훨씬 깊이 파고 언덕을 단단하게 하기로 되었다. 한동안은 나무뿌리와 흙덩이로 뱃속을 채우던 것을 이 공사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좁쌀로라도 배를 돌보게 되었고, 또 하천 공사만 완성되면 장마지나 가무나 흉년을 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내가 이상스럽게도 귀엽고 믿음직했다. 공사장의 십장이나 감독이 까다로운 사람이건만 불평을 말하지 않고 일이 착착 진척되는 것도 이 내를 위하는 그들의 심정의 관계도 많았다. 점되는 면서기를 꼭 만나야 할 일도 없지만 그는 무엇이든 보고를 하여야만 할 것 같았다.
「마침 점쇠 잘 왔네.」
면서기는 이렇게 말하고 점쇠 온 것을 반가워하더니,
「북해도 갈 사람을 우리 면에서 삼십 명은 꼭 모집하야겠는데 이 많은 사람 중에 단 둘뿐이어. 석만이허구 판술이허구.」
하고 다시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점쇠가 열 명은 모집히여 주야겠어.」
점쇠는 아직 봉갑이가 갈지 말지 하는 판에 보기 싫은 석만이가 맨 먼저 결정되었다는 것이 -이것 마수 없는 징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그는 흙을 파서 높직이 쌓아올린 데에 서서 한창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땅이 단단히 얼어서 얼마동안 일을 중지했다가 해동과 함께 낄 을 또 시작한 지 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들은 신을 내서 흙을 파고 져내고 누구나 열심이었다. 며칠전의 그 고마운 비와 눈이 아직도 차갑게 쏘는지라 일 하기가 곤란하겠다 생각하매 점쇠는 자기가 높직이 올라서서 구경하는 것이 민망스러워서 어느 결에 내려서고 말았다. 이 사람이면 되겠지 하고 제일 먼저 눈 에 띈 것이 언복이었다. 천복이는 소고(小鼓)의 명수다. 소고 잡이를 발견했으니, 징을 칠 사람이 없는가 하고 물색했다. 하루 밤새도록 징을 쳐도 무겁다 하는 일 없이 한번도 비지 않고 잘 치는 최 서방이 흙 짐을 지고 가다가,
「점쇠 왔는가.」
하고 알은 체를 한다. 그러나 최 서방은 보통학교 졸업한 큰아들이 허 참판 농장 급사로 들어가서, 제가 똑똑하니까 장부 적발까지 하여 논도 여러 마지기 얻게 되고, 매월 잔돈푼도 들어오는 형편이라 집을 떠나갈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그래 징 칠 사람이 또 없는가 둘러보았다. 삽질을 부산나게 하고 있는 판암이가 눈에 띄었다. 그는 징을 잘 치는 편은 못되나 남이 치는 것을 억지로 뺏어 치기가 일쑨데 별로 리는 일은 없다, 점쇠는 무엇보다도 소고잡이와 징잡이를 점 찍어둔 것이 몹시도 반가웠다. 아까 봉갑이를 만났을 적엔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제 비로소 -이만하면 풍장(농악) 한패는 훌륭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은 것이다. 동리에서 꽹과리로 봉갑이, 장고로는 점쇠가 맨 으뜸이다. 붕갑이 꽹과리와 점쇠 장고는 어쩌다가 하나가 리더라도 감쪽같이 둘러맞추어 진 가락이 그대로 맞아 넘어갈 수 있도록 그들은 손이 척척 맞았다. 점쇠는 봉갑이, 천복이, 판암이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데리고만 가고 싶었다. 농악 한 벌도 기어이 마련해 가지고 가리라 하였다. 점쇠는 천복이, 판암이 외에도 선달이 둘째 아들과 다른 다섯 사람을 맘으로 잡아두었다. 면서기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니, 쉬라는 호각소리가 기다랗게 세 번 났다. 모두 일제히 일을 멈추고 삽. 곡괭이 .지게 등 자기 물건은 자기가 가지고 언덕 위로 나온다. 점쇠와 눈인사만 했던 사람들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서 말을 건네는 등 점쇠가 안 가면 점쇠 있는 곳으로 일부러 와서 알은 체를 하는 등, 제법 시끄러웠다. 남의 머슴살이를 하는 점쇠가 뜻밖에 공사장에 나타나자 허 참판집에서 쫓겨 나와 일자리를 보러 왔는가 하고 누구나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 걱정스런 낯빛과 목소리로 말을 걸면,
「아녀, 이년만에 만석궁이가 될 수 있는 곳이 생겼는데 나 혼자 가기가 서운해서 함께 가자구 왔어,」
「아따, 우리도 벌써 알었단다. 점쇠가 궤짝을 타고도 일본 내지를 못 가더니 인제 봐란 듯키 가볼랴구 그러능가.」
「왜 일본을 못 가긴 ? 가긴 갔었지만 벤토 한 그릇만 얻어먹고 쫓겨왔지.」
「화선일 만날랴면 대판으로 가야지, 북해도로 가면 화선이가 거까지 따러올까.」
이미 면서기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그들은 이런 말로 점쇠를 구슬리고서는 서로 웃었다.
점쇠는 천복이와 판암이를 멀찍이 떨어진 데로 데리고 가서 담배 한 개씩 나누어주고 말을 꺼냈다. 구변 있는 대로는 모두 털어놓고 끝으로 힘을 들여 다시 말했다.
「여기서 뼈빠지게 일하구. 하루 잘 벌어야 일원 이십 전이 아닌가. 거기 가면 못 벌어도 이원 이상은 벌 수 있고, 또 남서부터 백 리 밖을 못 가본 우리가 공짜로 내지 구경을 할 수 있고 또 그뿐인가. 이년만 지나면 돌아오는 길에, 대판이나 동경에서 실쩍 내리면 누가 아나? 뒤떨어져 가지고 일터만 잘 잡으면 하루 오 원도 벌구 십 원도 벌구. 이 말은 아무 보구두 하지 말게. 이렇게라도 허야 우리도 한세상 볼똥말똥 허잖겠는가. 그러고 말여, 봉갑이도 간다구 히였으닝게 자네 둘만 가면 북해도 가서도 풍장을 치구 심심할 것 없이 지낼 수 있단 말일세. 폐일언허구 꼭 가세. 김 주사 어른이 우질 생각허구 권하는 게지 괜시리 가라겠는가, 이 사람들아.」
이 말이 면서기의 위엄 있는 말보다 훨씬 맘속을 두드렸다. 천복이와 판암이는 즉석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선달이 둘째 아들과 다른 사람 하나까지 해서 점쇠가 네 사람을 모집한 것이다.
「인저 면서기 자리를 점쇠게로 주야겠네. 나는 아까부터 와서 단 두 사람만 승낙 맡었는데, 점쇠는 잠깐 동안에 네 사람이나, 북해도 가서도 그런 식으로만 허면 돈을 남의 배는 벌겠네.」
면서기가 점쇠에게 담배를 권하며 이렇게 말할 때는 아닌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몸이 둥둥 뜨는 것도 같았다.
동리로 돌아올 때는 면서기와 함께 걸었다. 점쇠는 주인집 대문 앞에 이르자 미안한 생각이 들긴 했으나 허 참판의 악머구리 소리의 호령이 전처럼 겁나지는 않았다. 그는 부지런히 두엄을 져낸 것이 거의 반나절 일을 단숨에 끝낸 듯하다.
맘이 들떠서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봉갑이를 발리 만나서 작정된 것을 속히 듣고 싶어 소죽을 아무렇게나 주어버리고 나오려 하는데, 사랑에서 주인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쳇, 무슨 일을 시킬랴구 그러는고?」
하고 점쇠는 중얼거리며 사랑으로 나갔다.
「낮엣때는 어델 갔었간디 그렇게 불러도 소리가 없었단 말인가. 작은댁 도야지란 놈이 떨어져 기걸 잡을랴다가 복숭아 나무, 매화 나무가 모다 쓰러졌다니 어이 가서 일으켜 노소.」
이 말을 들으니 점쇠는 봉갑이 만날 것이 자꾸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점쇠는 북해도 가는 일에 비하면 꽃나무 몇 개 쓰러진 거야 바람에 재티 날려간 일 푼수밖에는 안되었다. 그는 주인 첩네집과는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쇠.」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앞을 보니 어둑한 초저녁 어둠 속에서 누구 하나가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또 한번 부를 적에야 봉갑의 목소린 줄 알았다.
「겅충겅충 걸어오는 것을 보구 자넨 줄 알었지.」
「그런 말은 천천이 허구, 대관절 어떻게 되었는가.」
「어따 그사람, 난리가 쳐들어오는가 부다. 가기로 히였으닝게 인전 맘놓고 지나소. 우리 집 일은 성님허구 동생이 맡기루 히였네. 예편네보고는 지금 다섯 달 된 것을 잘 나서 키워노면 세 살되는 해 모자 , 양복 구두를 사가지고 와 입혀서 안어주마구 그랬지. 그리고 그때 또 하나 만들어야 터도 알맞게 잘 것 아닌가.」
봉갑이는 점쇠의 어깨를 치며 함께 웃어댔다.
「봉갑이 미안하네.」
「미친 놈.」
늦장가든지 일곱 달밖에 안 되는 봉갑이를 아내와 떼 놓는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 점쇠는 몹시도 미안하였다.
「자네는 각시를 잘 두어서 아무 때구 잘살고 말 것이네. 얼굴 이쁘고 맘 곱구, 그리고 말이네, 시집온 지 겨우 일곱 달이고 애기까지 뱄는데 떨어지려는 것이 여간한 여자가 아니거던.」
점쇠는 봉갑이 아내를 이렇게 추켜 주면서 화선이를 또 생각했다. 얼굴이야 봉갑이 아내보다 오히려 나은 편이지만 맘씨가 그만할는지가 걱정되었다. 이 까닭인지 이날 밤 화선이 꿈을 꾸었다. 화선의 사진을 잃어버리고 애써 찾는 것을 또 꿈꾸었던 것이다. 이따금 꾸는 것이지만 이날 밤 꿈에는 더 몸을 달았다. 점쇠는 화선이가 떠날 때 주고 간 명함만한 사진을 뻣뻣한 종이로 싸서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생각날 때마다 펴보는 것이 재미였다. 작년 봄 일하다가 쉬느라고 못 가에 앉아 그는 곧 화선의 사진을 꺼내어 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 무릎 위에 놓고 담배 한 개를 태워 물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만 사진이 날아 못 가운데에 떨어졌다. 물이 차가운 것을 알면서도 점쇠는 발가벗고 들어가는 도리 밖에는 별수 없었다. 물 속에 들어가자 단번 숨이 딱 막히며 입이 벌려졌다. 그러나 이것도 순간이었고 그는 헤엄쳐서 사진을 건져 가지고 나왔다. 볕에 말리는 동안 마음이 쓰여서 일이 잘 되지도 않았다. 사진이 바람에 날린 것도 가벼운 까닭이고, 지니고 다니는데 구겨지기 쉽다 하여, 그는 과자 갑을 오려서 사진 뒤에 붙이었다. 그런데 봉갑이가 장가들 때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뛰놀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사진이 빠진 것을 알고 맘 집히는 곳은 모두 찾아보았으나 종시 발견하지 못했다. 가벼워 바람에 날아갈까 봐서 무겁게 만들었던 것이 되려 화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가벼운 대로 두었더라면 저절로 빠질 리는 없을 텐데 하고 후회도 했었다. 하긴 이때가 궤짝을 타고 가려는 결심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차마 실행하진 못하고 화선이 사진을 잃은 것이 대판도 못 가고 영영 화선이를 만 나지 못할 징조로만 생각되었다. 그래 일년 동안을 두고 맘만 조이다가 실행한 것이 실패하자, 그는 오랫동안 맥이 풀려 손에 일이 잡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예정 인원인 삼십 명은 별 지장 없이 모집되었다. 북해도 간다는 데에 점쇠에게 못지 않을 만큼 희망을 가진 사람으론 홍 생원과 석만이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홍 생원은 면서기와 점쇠의 노력도 소용없이 나이가 너무 많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떨어지고 말았다. 석만이는 공의 인력거를 끌게 된 것이 큰 벼슬이나 한 것같이 뽐냈으나 왕진을 갈 때마다 공으로 끌어주는 것이 대부분이고, 자기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전같이 기차 정거장까지 자동차가 안 다닌다면 인력거에 목을 매고 지낼 수도 있지만. 인젠 자동차의 운전 횟수를 더 늘린다니 돈 구경은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래 인력거를 공의에게 돌려주는 대신 그 동안 끌어주었다는 사례금으로 주는 이십 원을 받아서 살림을 처리하고 아내는 다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 식모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의 속 계산으론 이년간 모은 돈을 가지면 세 식구 목구멍은 유지해나갈 수 있는 밑천을 얻을 것도 같았다. 석만의 이런 이야기가 동리에 퍼지자 동료들은 그를 전같이 미워하던 맘이 차차 사라지고 도리어 동정하게 되었다.
출발하기로 된 전날 밤 면사무소 발기로 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서 떠나는 사람 삼십 명과 농군층의 선배격인 사람 십여 명을 모아놓고 송별연회를 열었다. 술은 막걸린데 맘껏 먹으라고 석유통으로 셋이나 가져왔다. 안주로는 명태를 찢어서 고추장을 찍어먹게 하고 난로 뚜껑을 벗기고선 커다란 냄비를 올려놓고 짠 김치와 깍두기에 도야지 고기를 넣어서 찌개로 만들었다. 이것도 김 주사란 사람이 서둘러 부잣집에서 몇 원씩 거둔 것으로 만든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고마운 생각이 한층 더 벼에 배었다, 면장이 인사말로 조선사람 노동자의 체면을 생각해 서라도 일을 잘하고 한푼이라도 많이 벌어 가지고 이 년 후 무사히 돌아오라고 부탁하고서는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곧 가버렸다. 다음 북해도 탄광회사에서 온 키는 작고 똥똥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 회사의 탄광 일은 조금도 위험이 없으니 안심하고 가자는 뜻으로 말을 하고, 김 서기가 나와 주의 사항을 말하였다. 답사는 보통 학교를 졸업한 진수라는 사람이 그중 유식하다 하여 그가 하였다.
「우리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신 것도 한없이 고마운데 이렇게 잔치까지 히여주시니 참말로 고맙습니다. 저만은 한 몸뚱입니 다만 다른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처자를 두고 떠나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노상이 말하면 누구를 물론 하고 고향을 떠나 낯선 데로 품 팔퍼 가는 것은 참말이지 슬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돈을 벌러 갑니다. 힘껏 일을 하여서 돈을 잔뜩 벌어 가지고 와서 잘 살겠습니다. 하누님이 무심치 않으니 꼭 기리 될 것입니다. 여기 오신 여러 어른네들은 저들이 올 때까지 부데 평안히 계시고 농사를 잘 지십시요. 올에는 꼭 풍년이 들 것입니다. 말리 타향에 있는 우리들은 고먕에 풍년이 들게 하여달라고 항시 축원허겠습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목이 메는 것 같어서 그만두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누구나 울상을 하고 있다. 봉갑이와 석만이는 느껴 울기까지 하고 있다. 나란히 앉아서 고개를 맞대고 울던 봉갑이와 석만이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집안 식구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다는 말을 되뇌었다.
「석만이, 그 동안 섭섭히 지낸 것을 아주 잊어버리세. 만리 타향으로 고생하러 가는 우리가 서로 위하고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할 게 아닌가.」
석만이에게 이 말을 내기는 봉갑이가 처음이었으나 평시 그와 거칠게 지낸 사람은 모두 말하고 풀었다.
어떤 사람은 김 서기를 붙들고 울다가는 술을 권하고 다시 울기도 하였다. 김 서기도 술이 농창하게 취했다. 누구 할 것 없이 취기가 돌았을 때 봉갑이가 꽹과리를 뚜드리며 나서자 점쇠 ,천복이, 판암이가 제각기 한가지씩 들고 나섰다. 동리 사람들이 특별히 생각하여 두 벌이던 농악물을 한 벌 가지고 가라고 나누어 주었다. 다만 꽹과리가 너무 깨져서 점쇠 돈으로 새로 산 것이다.
「자, 마주막으로 한바탕 멋지데 쳐보자.」
판암이가 소고를 두드리며 소리치고 나선다.
「마주막은, 죽으러 간단 말인가. 어이들 치기나 잘 허게들. 난 춤을 추겠네.」
유 생원은 아직도 터지지 않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농악소리는 자지 러지게 울린다. 어떤 사람들은 궁둥이를 그대로 붙이고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기도 하고 서로 붙들고 사설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대개는 일어서서 담뱃대 문 채 혹은 든 채로 춤을 너울너을 춘다. 농악소리, 웃음소리, 말 소리, 어느 것이나 척척 어울린다. 탄광 회사에서 온 사람은 처음은 어리둥절하고 보고만 있더니 차차 흥이 나는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어 궁장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동리에 대한 인사나 하는 듯이 농악을 따라 동리 골목을 한 번 돌았다.
장터 광고판 앞에서 모두 헤어지려 할 때,
「우리 성황당에 가서 한번 치고 갈기세. 자들, 날만 따러오소들.」
하고 석만이가 맨 앞서서 춤을 추며 가자 모두 그 뒤를 대어선다. 석만이는 농악 앞을 지성스럽게 따라다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기뻐서 날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목을 껴안고 울기도 하고, 실썽한 사람같이 보였다.
성황당은 동리에서 반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행길가에 있다. 제법 높은 고갯길이라 동리 사람들은 여기 당도하기만 하면 돌을 한 개씩 던져 주는 일이 많다.
이날 밤만 새고 나면 고들은 화물자동차를 타고 성황당 앞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누구나 북해도에 가서 무사한 몸으로 돈 많이 벌게 빼달라는 기도가 성황당에 당도하기 전부터 용솟음친다.
석만이는 성황당이 아직 멀었건만 길가에서 큰 돌 한 개를 발견하자 두 손으로 받쳐들고 겅충겅충 뛰어 누구보다도 먼저 당도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감속을 조용히 가다듬고,
「성황님네 그저 우리 집 식구들을 잘 좀 살게 히여 주십시요. 식구가 각분 동서하는 판이니 이년 후면 모두 성한 몸으로 돌아오고 살어 나갈 걱정은 없게 히여주소서.」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 이렇게 빌었다. 누가 옆에 있으면 넉넉히 알아들을 !있도록 소리내어 빌었다. 농악이 당도하자 그는 굵다란 눈물을 손등으로 씻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춤을 추기 시작한다. 농악은 늦은 가락으로 고치어 치기 시작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건만 유 생원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성황당 앞에 섰다. 점쇠는 농악을 치고 유생원 뒤를 지나가며,
「내 소원 좀 잘 빌어주슈.」
하고 그를 찌뻑거린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점쇠는 다시 한번 돌아 성황당 앞을 지날 때,
「그저 대판을 꼭 가게만 하여 주십시요.」
하고 장고 가락이 삘까보아 이 한마디만 빌었다. 그래도 장고 가락은 삐고 말았다.
「화선이 생각을 허나?」
장고 빈 것을 책하는 듯 봉갑이가 점쇠를 한번 흘겨보고는 꽹과리를 잠깐 멈추었다가 잦은가락으로 고쳤다.
성황당 옆 동리 아이들 한패가 소리를 지르며 구경하러 달음질쳐오고 있다,
이근영(李根榮: 1910- ? )
전북 옥구 출생. 보성 전문 법과 졸업.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역임. 해방 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 1935년 단편 <금송아지>를 <신가정(新家)>에 발표하여 등단. 그는 일제 식민지하의 빈곤과 외부적 세력에 의해 수탈되는 농촌 현실을 주로 다루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과자 상자>, <제3 노예>, <이발사>, <장날>, <흙의 풍속>, <고구마>, <탁류 속을 가는 박 교수> 등이 있다.
(이해와 감상)
1933년 11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
김기진(金基鎭)의 회고에 의하면 연재 마지막 35회, 36회분은 작가의 구속으로 김기진 자신이 대신 쓴 것이라 한다. <카프> 계열에서 쓰여진 농민 소설의 대표작으로서 노동 쟁의, 소작 쟁의 등의 경제 투쟁, 농민 운동을 강조하는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한, 신경향 소설의 경향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또,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론의 시각, 현실 반영의 시각, 그리고 이데올로기 실천의 시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많은 도식성(圖式性), 작위성(作爲性)이 드러난다.
(줄거리)
무더위 속에서 농사일로 비오듯 땀 흘리는 '인동이' 모자(母子)의 모습과, 시원한 마루의 등의자에서 한가하게 부채질하는 마름[地主] '안승학'의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이 두 모습은 식민지 통치로 더욱 가난해진 농민 계층과 경제적으로 새롭게 부상하는 계층을 대표하고 있으며, 이들의 갈등과 해소가 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일본 유학생 김희준이 등장하여 가난한 농민의 구심점이 된다. 지식인 유학생은 농민소설이라면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영웅적, 이상적 존재이지만, 김희준은 실패한 유학생으로 초라하게 등장하여 점차 자기 희생적 지도자로 변모하고 있다. 그는 두레를 결성하여 농민 의식을 변화시키며, 마름의 횡포에 맞서서 농민의 힘을 집결시켜 마침내 뜻을 이루고 만다.
가난의 문제, 계층 갈등의 문제를 단편적으로 제시해서는 프로 문학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1930년대 초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실적 묘사와 생활 감각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 작품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쓰여진 최고의 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브나로드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나왔지만, 브나로드 주창자들과는 달리 문화 운동으로서의 농민 계몽이 아니라 경제 투쟁으로서의 농민 운동을 강조한다. 이른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깔고 노동 쟁의 양상․소작 쟁의 양상, 그리고 양자(兩者)의 결합 양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도자상을 보여주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모든 문제는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투쟁에 의해서만 해결되고 있다. 이와 같이, <카프>에서 요구하는 도식에 맞추기 위하여 많은 작위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김희준과 안갑숙의 만남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둘만의 개인적 애정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적 동지애(同志愛)가 중요하다는 관념적 원칙을 내세워 역시 프로 문학다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악덕 마름의 딸 안갑숙의 공장 노동자로의 변모, 그리고 소작인들의 집단 쟁의가 벌어졌을 때 그녀의 행동 등은 너무 이상화되어 있다.
(핵심정리)
갈래 : 장편소설, 농민소설
배경 : 시간 - 1920년대 말 공간 - 농촌(원터 마을)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경향 : 카프 계열, 사회주의 리얼리즘
의의 : 농민 중심의 대표적 농민소설.
제재 : 식민 통치로 점점 피폐해지는 농촌 생활
주제 : 난관을 극복해 나가는 농민들의 의식의 성장.
(등장 인물)
김희준 : 주인공. 동경 유학생 출신. 농민 공동체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농촌 운동가. 농민 을 결속시켜 안승학과 대결한다.
안승학 : 서울 민 판서 집의 마름. 새롭게 부상(浮上)한 신흥 세력가. 농민 착취의 전형적 인물.
권상철 : 상인. 고리 대금업자
안갑숙 : 마름 안승학의 딸. 아버지와는 달리 제사 공장에 가명(라옥희)으로 위장 취업하 여 농민을 돕는 농촌 운동가. 김희준에 대한 사랑을 동지애로 승화시킨다.
(구성)
발단 : 농민과 마름의 대립. 여러 인물 소개.
전개 : 청년회의 충돌, 갑숙의 가출, 두레 조직, 갑숙과 경호의 공장 취직
위기 : 수재를 당함. 경호․갑숙의 갈등
절정 : 소작료 삭감 투쟁
결말 : 동트는 새벽, 장래의 희망과 동지애
(줄거리)
1920년대 말 원터 마을, 동경 유학생이던 김희준이 학자금난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소작인으로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농민 봉사, 계몽 활동을 통하여 농민 지도자로서 위치를 굳힌다. 그를 중심으로 한 소작인들은 동네 마름인 안승학과 대결해 나간다.
마름 안승학은 그의 본부인을 서울로 보내 자식들을 교육시키도록 하고 자신은 첩 '숙자'와 함께 산다. 안승학과 '숙자'는 딸 '갑숙'이를 이씨 문중으로 시집보내려 하다가 '갑숙'과 '경호'와의 관계를 알고 앓아 눕는다. 왜냐 하면, '경호'는 읍내의 상인인 권상필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구장집 머슴 곽 첨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갑숙'이는 가출하여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한다. 그녀는 '옥희'라는 가명을 쓴다.
풍년이 들었으나 소작료와 빚진 것을 제하면 농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다. '갑숙'이와 친했던 '경호'는 집을 나와 생부를 찾고 역시 공장에 취직한다.
수재(水災)가 나서 집이 무너지고 농사를 망친다. 김희준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은 마름 안승학에게 소작료를 감면해 줄 것을 요구하나, 안승학은 이를 거절한다. 이때 공장에서도 '갑숙'(옥희)을 지도자로 한 노동 쟁의가 벌어지며, 김희준은 이를 돕는다. '갑숙'이는 소작인을 괴롭히는 아버지에 반대하여 김희준과 힘을 합친다. 김희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끝내 안승학의 양보를 얻어낸다. 그리고 김희준과 갑숙이는 이성간의 애정을 초월하여 동지로서의 사랑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