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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24. 황혼의 집

by 자한형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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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黃昏)의 집 -윤흥길

 

우리가 마악 길을 건너려는 순간에 모퉁이 저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으므로 나는 얼른 계집애의 손을 놓아버렸다. 볏단을 잔뜩 싣고 느릿느릿 구르던 달구지 한 대가 길옆에 가까스로 비켜설 만큼의 여유를 두고 노랗게 쌍불을 켠 트럭의 행렬이 질주해왔다. 달구지를 뒤따르며 길바닥에 흘린 나락을 쪼아먹고 있던 한 떼의 병아리가 날개를 파드락 거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내장산 일대의 공비들과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의 토벌대였다.

우리는 곧 구름 같은 먼지 속에 휩싸였다. 먼지를 몰아씌우는 회오리바람과 티끌 속에서 나는 실눈을 뜨고 트럭 위의 군인들을 향하여 손을 높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처 잠에서 덜 깬 듯이 흐리덩덩한 시선을 짧게 던질 뿐, 나의 환영에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철모와 어깨 위에 아직도 나뭇가지 위장을 그대로 달고 있는 그들 모두의 얼굴엔 한 꺼풀의 먼지가 누렇게 덮여 있었다. 붕대로 이마를 친친 동인 얼굴 하나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별안간 입을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괴상야릇한 표정이 나에 대한 답례의 안간힘이었음을 나는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떫은 웃음을 태운 그 트럭은 이미 먼지에 가려 안 보이고, 다음 트럭이 우리 앞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나는 손을 흔들다 말고 문득 옆을 돌아다보았다. 계집애는 손을 흔들고 있지 않았다. 그 애는 지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트럭의 행렬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묻은 손으로 꿀이 가득 담긴 자그만 병을 소중스레 감싸안은 채로였다. 그것은 조금 전에 내가 부엌 찬장 속에서 어머니 모르게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당장 군인들을 향하여 경주가 손을 흔들지 않는 것은 어느 정도 그 꿀병 탓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손이 다 쉬고 있을 경우에도 계집애가 제무시(트럭을 우리는 이런 이름으로 불렀다)를 향하여 손을 흔드는 걸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이윽고 제무시의 행렬이 끝나, 모든 것이 먼지 속에서 본래의 제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길가에서 쉬던 달구지가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기우뚱거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병아리 한 마리가 땅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털빛의 하얀 바탕을 가로지르고 지나간 자동차의 육중한 바퀴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고, 납작 짓눌린 뱃속에서는 일부러 도려낸 듯이 내장이 고스란히 흘러나와 있었다. 계집애는 걸음을 멈추고 그 위에다 침을 탁 뱉었다.

간선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 집과 엇비슷이 마주선 그 벽돌집은 담쟁이의 마른 덩굴에 덮여 있어서 어떻게 보면 꼭 낡은 그물을 씌워 놓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우리는 오후 시간의 대부분을 그 집에서 보내곤 했다. 우리의 주된 놀이터는 무쇠를 달구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화덕이었다. 그 위에 올라서고 고개를 들면 물건을 끌어올리는 녹슨 도르레와 서너 겹의 쇠사슬을 무겁게 늘어뜨린 튼튼한 대들보가, 그리고 그보다 더 위로는 거미줄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 커다란 고깔 모양의 천장이 까마득히 올려다 보였다. 지붕의 복판을 뚫어 만든 유리창에서는 한 줄기의 네모진 광선이 마치 어둠 속에 우뚝 선 찬란한 기둥처럼 쏟아져 내려와 공중에 떠다니는 무수한 먼지 알 하나 하나를 밝게 비추었다. 화덕의 맨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터앉아서 계집애는 헐고 진물이 나는 양쪽 입아귀에 연방 꿀을 찍어 바르고 있었다. 나는 바로 곁에서 점점 줄어드는 병 속의 꿀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것은 어머니 모르게 병째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계집애도 그 점을 다소 생각해주는 듯했으나 한번 맛을 본 뒤로는 나의 염려를 아주 무시해버렸다. 약으로 바르는 꿀을 그렇게 빨아먹으면 상처가 낫지 않는다고 넌지시 일렀지만, 계집애는 병이 절반이나 빈 뒤에야 돌려주었다.

"저기 저 큰 기둥나무 보이지?"

계집애는 기다란 회초리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저기서 우리 큰언니가 목매달고 죽었단다."

계집애는 회초리를 휘둘러 머리 위의 쇠사슬을 힘껏 후려갈겼다. 계집애가 가진 좋지 않은 버릇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계집애가 들려주는 음산한 얘기와 우리들 머리 위를 시계추처럼 천천히 왔다갔다하면서 쇠사슬들이 서로 맞부딪쳐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함께 듣는 때가 많았고, 그럴 때면 꼭 살구라도 씹은 듯이 벌레 먹은 어금니가 시려서 얌전히 앉아 있질 못했다.

"엄마랑 밤새껏 싸우다가 집을 나갔단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저기 저 기둥나무에 매달려 있잖아. 혓바닥을 이렇게 빼물고는 대룽대룽……"

계집애는 내 팔꿈치를 꼬집으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 얘기를 잠자코 들어주는 일이 내게는 굉장한 고역이었다. 어쩌자고 이애는 만날 죽은 제 언니의 얘기만 지껄이는 것일까. 언짢은 그 얘기를 이미 여러 차례 들려줘 놓고도 경주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마치 방금 들어온 소문을 전하기나 하는 투로 종알거리며 혼자서 시시덕거리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의 몇 밤 동안은 가위눌리는 꿈에 자주 시달리면서 내 머리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탈없이 붙어 있는가를 손으로 만져 확인해봐야만 했다. 사람이 스스로 제 숨통을 조른다는 건 당시의 나로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질긴 끄나풀이 꽉 졸라맬 때 경주네 언니의 목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누구에게나, 제발 부드러운 끈을 사용하라고 충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밉광스럽게도 경주는 큰언니의 죽음을 더욱 자세히 설명하면서, 보통 때의 갑절이나 되게 생똥을 갈겨 놨더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오늘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님을 상기시켜주기로 마음을 굳게 가졌다. 그러자 계집애는 다시 쇠사슬을 후려갈겼다. 겨우 좀 잦아들던 쇳소리가 무섭게 되살아나 쩔그렁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왼쪽 볼을 불룩하게 만들어 혀끝으로 충치를 누르며 진득이 참아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난리가 났었단다. 정말 굉장했어. 사람들이 뛰어와서 언니가 죽었다고 소릴 지르고, 징을 치면서 동네를 돌아다니고…… 그런데도 울 엄만 무서워서 밖에 나가질 못했어. 꼼짝못하고 방안에만 있다가 사람들이 언닐 산에다 묻고 내려오니까 그때서야 엉엉 우는 거야. 날을 새면서 울고, 다음날 저녁때까지 울고……"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쌍둥이아저씨가 말야, 아참, 넌 그게 누군지 모르겠구나. 그 아저씬 말이지, 네가 일로 이사오기 전까지 여기서......"

철공소를 경영하던 사람인데, 경주가 말하는 건 동생 쌍둥이었다.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경주한테 이미 여러 차례 들어서 나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형과 동생이 함께 대장장이 일을 하다가 형은 일찍 군대에 들어가 전사하고, 나중엔 동생 혼자서 망치질을 했다. 그는 매일 경주네 주막에서 술을 마셨는데 그날도 너무 취해서 경주네 언니가 화덕 위에 올라가는 것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잤고, 공동묘지에서 산역(山役)을 거들 때까지도 몸에서 술 냄새를 펑펑 풍겼고, 경주네 언니가 목을 매단 지 얼마 안 되어 도끼머리를 다듬다가 쇠망치로 자기 복숭아뼈를 잘못 때려서 발병신이 되었고, 또 얼마 안 되어 철공소에 불이 나서 재산이 거의 다 타버리자 어디론지 멀리 떠나버렸고...... 그래서 그 벽돌집은 아직도 빈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 집엔 마가 붙었대. 쌍둥이아저씨가 그렇게 말했어. , 마가 뭔 줄 알아? 모르지?"

내가 고개를 모로 흔드는 걸 보고 계집애는 한층 신명이 났다.

"그건 말이야, 마라는 건 말이지, 변소에서 쓰는 빗자루에 사람 피가 묻어서 된 도깨비야."

말을 마치고 계집애는 기운 좋게 회초리를 휘둘렀다. 쇠사슬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면서 아픈 비명을 올렸다. 나는 경주의 나쁜 기억력을 상기시켜주는 기회를 또 놓치고 말았다.

"큰언니가 불쌍해 죽겠어. 어른들이 그러는데 언니는 엄마 때문에 죽었대. 엄마가 죽인 거나 다름없대. 날마다 술만 먹고 울기만 하니까 큰언니는 엄마를 죽이려 했어. 하지만 엄마를 죽일 수 없으니까 언니가 먼저 죽은 거야. 나도 어떤 때는 엄마를 죽여버리고 싶단다. 가끔 그래, 어느 땐가 나는 엄마를 죽이고 말 거야."

그늘 속에서 빛나는 경주의 두 눈알은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나는 경주가 제 엄마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애는 능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아이였다. 언젠가도 그 애는 생쥐를 사로잡아서 등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생쥐는 불덩이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입을 쩍 벌리며 금방 죽고 말았지만, 경주는 눈을 흡뜨고 살려고 몸부림치는 짧은 순간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고함질렀다.

"겨우 한 걸음밖에 못 갔어! 난 적어도 다섯 걸음은 갈 줄 알았는데."

뿐만이 아니었다. 산 채로 참새의 털을 뜯기도 했다. 경주는 발가숭이가 된 참새의 한쪽 날개와 두 다리를 뚝뚝 부러뜨려 놓아주고는, 바보같이 도망칠 줄도 모른다고 발을 구르며 화를 냈었다.

"또 입이 아파."

한참을 지껄이고 나서 경주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꿀병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면서 이맛살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약을 발라야겠어."

계집애는 나보다 세 살 위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나머지 꿀 전부를 내주고 말았다.

우리가 정읍(井邑)으로 이사를 간 것은 사건이 지난 지 이미 오래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경주네 집에 얽힌 일과 새로운 소문을 놓고 왕배야 덕배야 떠들며 한창 열을 올리던 때였다. 동네 아낙들이 집에 놀러와서 어머니와 사귀는 데 경주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정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유리창이 많고 지붕의 경사가 급한 일본식 구조의 기와집에서 살게 되었다. 단출한 식구수에 비하면 집이 너무 크고 정원과 뒤란이 넓었다. 그 집에서 시작된 정읍에서의 새로운 생활 중 나에게 시비를 걸어온 최초의 적은 손톱이 긴 악마였다. 나이는 위였지만 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고, 옷차림이 항상 추저분했다. 계집애는 울타리 사이나 전봇대 뒤에 숨어서 문 밖을 나서는 나를 불시에 습격했고, 어딜 가나 짓궂게 따라다니며 마구 할퀴려 들었다. 그리고 욕설을 퍼부어 대는 것이었다. 삵괭이처럼 몸이 빠르고, 못생긴 얼굴에서 번쩍이는 두 눈은 그 애가 나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도둑놈, 도둑놈 자식! 뒈져라, 뒈져라, 도둑놈 자식!"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외는 이 불명예스러운 욕설로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자초지종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아낙네들의 설명을 듣고 우리는 곧 계집애가 그처럼 나를 적대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나 한번 어두워진 어머니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 애하고는 가까이도 말고 상대하지도 마라......"

우리가 산 그 집은 원래 경주네 소유였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어떤 낯선 사람이 나타나 부당한 방법으로 경주네를 내쫓고 집을 차지해버렸다. 철공소 옆에 오두막을 짓고 경주네 어머니가 술장사를 시작한 뒤로 그 집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그런데,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운 경주네 어머니는 주인이 바뀌는 것에 상관없이 그 집에 들어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똑같은 사람으로 알고 끝없는 저주를 퍼붓는다. 어머니와 아낙네들 사이에 오가는, 대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나는 기회를 봐서 경주의 오해를 풀어줄 결심을 했다. 어느 날, 나는 궁지에 몰리면서도 달아나지 않았다. 경주의 팔이 미치지 못할 멀찍한 거리에서 나는 되도록 빠른 말씨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며, 정당한 값을 치르고 집을 샀다는 말을 알기 쉽게 전하려고 재주를 다해서 혀를 놀렸다. 그러나 열 개의 손가락을 오그려 갈퀴처럼 만들고 기회만 노리는 경주의 면전에서 나는 갈수록 말을 더듬었고, 결국 쉽게는커녕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아리송하게 되어버렸다. 경주는 말을 다 마치도록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계집애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갈퀴를 휘둘렀다. 그러나 살점을 뜨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손을 거두더니, 피식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하리만큼 관대한 표정을 지었다. 경주는 내 말을 이해했을까? 아마 이해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가 선량한 사람인 줄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다면, 그것은 나의 서툰 설득 덕분이 아니라 더듬고 허둥대며 땀 흘리는 나의 우스꽝스런 노력이 그 애의 눈에 너무도 가상스럽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아주 친해졌고, 경주는 나의 친절과 복종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 가끔 붉은색이 도는 빳빳한 채권(債券)을 한 장씩 훔쳐다주게 되었다.

경주네 큰언니의 죽음을 기억에서 지울 수만 있다면, 불에 그을어 거의 폐허가 된 철공소의 내부는 그런 대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쇠붙이들이 재 속에 묻혀 있어서 그럴 마음만 있다면 동생 쌍동이가 망치질을 하다 만 그대로 날이 덜 다듬어진 도끼머리를 찾아낼 수 있고, 발로 헤집기만 하면 크고 작은 저울추들이나 암수 쌍이 맞는 돌쩌귀, 끝이 뭉뚝한 왜낫이며 식칼 그리고 말굽쇠 같은 것들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고, 일단 찾아낸 그것들을 우리는 대개 다음날을 위하여 전과는 다른 장소에 각각 묻어두는 또 하나의 재미를 즐겼다. 화덕의 아궁이 앞에는 질긴 쇠가죽을 대어 만든 커다란 풀무가 내박혀져 있었다. 그것은 몸체를 이루는 송판이 삭고 가죽에 불구멍이 생겨서 손잡이를 밀면 바람 대신 노인의 한숨처럼 들리는 괴상한 소리가 나는, 아주 고물단지였다. 반쯤 불에 탄 고무래가 있어서 우리는 이것으로 산처럼 재를 긁어모으다가 흔히 깜장이가 되곤 했다. 지나가던 바람이 깨진 유리창을 흔들며 들어와 한동안 잊고 있던 눅진한 곰팡내를 어렴풋이 느끼게 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둥 모양의 네모진 광선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우리들 발 밑으로 벋어와서 어둡고 습기에 찬 내부를 비슴히 꿰뚫어 비추었다. 마침내 해가 기울어, 들에서 돌아온 참새떼들이 철공소 지붕 위를 날며 서로 쫓고 쫓기는 소리, 연약한 부리로 처마 밑에 달린 홈통을 콕콕 쪼아대는 소리가 환히 들렸다. 그것들은 날개를 치면서 담쟁이덩굴을 타고 벽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여름에도 그랬지만, 가을이 되자 낡은 그물을 씌운 듯한 담쟁이덩굴은 더욱 앙상해 보였다. 전에는 무성한 잎으로 벽돌집을 온통 푸르게 감쌌었다는데, 불이 났을 때 타죽어 버렸는지 봄이 와도 잎사귀가 돋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했다.

언제나 해질녘---그것은 몹시 두려우면서도 끈적거리는 흥분과 호기심에 싸여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때때로 나는 저녁놀에 붉게 타는 경주네 주막집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점점 헤어날 수 없는 기괴한 환상에 잠기곤 하였다. 어떤 근거에서 그랬는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그 집 주위에 감도는 뭔가 음습하고 특이한 냄새의 분위기를 대뜸 느꼈던 것이고, 아낙네들의 귀띔에 의하여 나의 이렇듯 막연한 헤아림이 확인된 뒤로는, 내 몸뚱이를 둘둘 말아 올리는 듯한 어떤 신비한 기운의 부축을 받으며 내 두뇌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떤 엽기적인 사건이 다시 한번 그 속에서 일어나기를 은연중에 기대하는 버릇이 생겼다. 철공소 벽에 잇대어 흙벽돌과 함석으로 지은 허술한 집 모양에 비하면 놀빛에 빛나는 경주네 유리창은 너무 동떨어지게 호사스러워 보였다. 그걸 바라볼 때마다 나는 벽돌집 벽에 끔하니 흔적만 남아 있는 창틀 자리와 연관하여 경주네한테는 무척 미안한 상상을 했는데, 훗날 경주의 입을 통하여 내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른들 키가 무사히 들어가자면 허리를 잔뜩 꺾어야 되는 출입구의 위쪽 절반을 까맣게 손때가 묻은 광목천의 포렴(布簾)이 옹색하게 차지했고, 거기에 막걸리나 약주, 그리고 두어 종류의 변변찮은 음식 이름들이 퍽 조잡한 필쳬로 적혀 있었다. 언제 보아도 주막은 한산한 편이었고, 장날 먼 데서 온 장꾼이나 그 집 속내를 모르는 타관 사람들이 어쩌다 잠깐씩 들를 뿐, 읍내의 모주장이들은 거의가 경주네 술을 마시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들 취했다. 손님이 있을 때면 경주네 주막에서는 부꾸미와 빈대떡 부치는 구수한 냄새가 하얀 김과 함께 포렴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러나 유달리 손님이 안 오는 한적한 저녁이면 유리창 안쪽에서 멀거니 바깥 하늘만 쳐다보는 경주네 엄마의 희끄무레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것은 곧 울음소리가 시작될 거라는 전조였다. 경주네 엄마는 어머니라기보다 차라리 할머니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로 흰머리가 많고 쪼글쪼글 시든 얼굴이었다. , 사람들은 실제로 그녀를 할멈이라고 불렀다. 할멈의 우는 시간은 딱 정해져 있었다. 사흘 아니면 나흘만에, 어떤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며칠을 계속해서, 언제나 집채를 사를 듯한 붉은 햇살이 주막 창문에 번득이기 시작하면 할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처참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여우의 목청마냥 길고 날카로운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그 울음은 누구의 도움을 받을 욕심으로 일부러 그처럼 엄살을 피우는 것같이 들렸고, 누구의 잘못을 호되게 나무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참을 수 없는 아픔을 아무에게나 호소할 때 사람의 입에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그런 무시무시한 비명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이 울음 소리가 들리면 나는 벌레 먹은 어금니 하나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 나는 할멈의 얼굴이 항상 붉은 이유가 늘 마시는 술 때문인 줄로 알았었다. 그러나 차차로 그것은 기우는 햇살과 유리창에 번득이는 저녁놀이 얼굴에 묻어 지워지지 않는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또 시작이구먼, 쯧쯧......"

울음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혀를 찼다. 아낙네들로부터 우는 이유를 들을 때도 어머니는 혀를 찼었다. 경주네와 관계되는 모든 일에 그처럼 혀를 차는 것이었다. 쯧쯧...... 들은 얘기에 의하면, 할멈은 산()사람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 아들 때문에 그렇게 울었고 어머니의 외아들에 대한 분별없는 사랑이 자식을 빨갱이로 만들었다. 또한 큰딸은 그놈의 울음소리 때문에 어머니를 죽도로 미워했고, 그녀가 목을 매단 것은 동생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단편적인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어떤 맥락과 당위성이 개재해 있는지 그 점은 바로 깨닫지 못했으나, 경주네 큰언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설명을 나는 퍽 의미심장하게 들었다. 큰딸은 산사람이 된 동생에게 자수의 길을 터 주려고 힘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그만 어떤 협잡꾼한테 걸려 속옷을 안 입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음날 새벽에 화덕 위에 올라섰다.

큰딸이 죽기 전후의 이렇듯 복잡한 경주네 집안 사정은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었다. 경주는 집안 일에 관해서 항상 많은 것을 지껄이면서도 어찌 된 셈인지 오빠에 대한 이야기만은 한마디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빨치산 한 명이 어둠을 타서 가족을 만나보려고 읍내로 잠입해 들어오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다리에 총을 맞고 다시 산으로 달아난 적이 있는데 그가 바로 경주네 오빠였었다는 소문까지도 알고 있었다.

경주는 또 작은언니 경옥이에 대해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서양 사람처럼 키가 홀쭉하고 얼굴 생김이나 몸 맨두리가 고운 여자였다. 그녀는 집안 일이야 어떻게 되든 조금도 상관 않고 날마다 남자와 어울려 외출이 심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는 베짱이였다. 그녀의 기름이라도 친 듯한 맑고 매끄러운 웃음은 많은 사람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자기를 슬금슬금 엿보며 쑤군거리면 그녀는 마치 숨을 고르려고 물 속에 잠긴 머리를 솟구치듯 고개를 한껏 위로 향하고 살찐 궁둥이를 더욱 팽팽하게 흔들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남자의 얼굴은 거의 매일같이 바뀌었다. 경주네 작은언니를 가리켜 아낙네들은 은근짜라고 불렀다. 뒤꼭지에 대고 암캐 같은 잡년이라고 손가락질도 했다. 어머니는 슬그머니 외면하면서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녀가 남자와 헤어지는 장소는 대개 우리 집 측백나무 울타리 그늘이었다. 한밤중에도 울타리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잠을 깰 만큼 나는 잠귀가 밝았다. 무척 드문 예이긴 하지만, 경주네 작은언니는 밤길을 혼자서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으레 취해서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이었다. 호젓한 거리를 혼자 걸어오면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라도 별다른 높낮이의 변화 없이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담담한 곡조였다. 길을 걷다가 나와 마주치면 그녀는 손가락으로 양 볼에 연지곤지를 찍거나 긴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한번도 말을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독특하고 비밀스런 방법으로 접촉하고 야합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혼자서 돌아오는 날, 문턱 위에 서 있는 나를 보면 그녀는 손바닥에 입을 맞추어 울타리 너머로 홱 뿌리는 시늉을 하면서 깔깔 웃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나는 경주네 작은언니를 보았다. 그녀는 어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나는 그 아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고, 꿈속의 그 아이가 경주네 작은언니를 누나라고 부르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였다.

추석을 하루 앞두고 경주네 작은 언니 경욱이는 집을 나가버렸다.

주막은 문을 닫았다. 경주는 추석날 아침을 우리 집에서 먹었다. 명절인데도 경주네는 밥을 안 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떡과 밥이 담긴 이바지를 경주네 어머니한테 갖다주어야 했다. 아침나절만 해도 동네 아낙들은 경주네 집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점심 때 두 번째의 이바지를 나르는 나를 보지 못했더라면 그네들은 다음 다음날까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좀 심상찮은 기미를 채고 아낙네들은 차츰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경주를 붙잡고 웬일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경주 앞에 먹음직스런 한 접시의 송편이 미끼로 던져졌다. 경주가 망설인 시간은 극히 짧았다. 계집애는 하치 않은 유혹에 쉽게 손을 들었다. 궁금증을 푼 아낙네들은 의당 그렇게 되었어야 옳을 그 일을 그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들의 불찰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진작부터 그럴 줄 알았다느니, 그년이 그예 얼굴값을 했다느니, 하고 집을 나간 여자를 재판하는 동안 계집애는 집안의 비밀과 맞바꾼 차진 송편을 걸신들린 듯 더금더금 집어먹고 있었다.

경주네 어머니는 두 끼를 내리 굶었다. 내가 점심을 넣어주려고 방문을 열었을 때, 아침에 갖다놓은 이바짓상이 보자기에 덮인 채 처음 놓았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얼마 후에 다시 가보니까 두 무더기의 이바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는 할멈이 벽 쪽을 향하고 아랫목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걸 보면서 경주가 무슨 말이든지 한마디 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경주는 심통 사납게도 방문을 꽝 닫아버렸다. 안에서 할멈이 모을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경옥이냐?"

오후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경주는 큼직한 화경(火鏡)을 들고 나와서 개미를 태워 죽이는 장난을 즐겼다. 잡초가 우북한 철공소 부근 빈터에 가을볕이 제법 쨍쨍 비치고 있었다. 별로 하는 일도 없으면서 몹시 바쁜 체를 하며 시는 풀잎 사이를 분주히 돌아다니던 개미들은 경주의 겨냥에 걸려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타 죽어갔다. 죽은 개미의 수가 자꾸 불어날 때마다 경주의 입가에는 잔미운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운 장난에 끼어 들기를 처음엔 나는 무척 꺼렸다. 그러나 불행한 개미들이 끈덕지게 뒤쫓는 화경의 초점을 벗어나려고 허겁지겁 풀잎 사이로 숨고 정신없이 내빼다가 끝내는 잘쑥한 허리를 배배 꼬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붙이며 우습게 죽고 마는 그 모양에 차츰 어떤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화경 속에 확대되어 비칠 때 개미는 배추벌레만큼 커 보였고, 기름기가 흐르는 흑갈색의 통통한 배는 물로 씻어낸 듯이 싱싱해 보였고, 배보다 작은 가슴은 부드러운 잔털에 싸여 있었다. 화경을 들이대면 주위가 갑자기 환해지고, 그러면 개미는 어리둥절해서 제자리에 서버린다. 헤싱헤싱하게 퍼져 있던 빛무리가 점점 오므라들어 쌀알만 해지면 그놈은 화다닥 놀라 혼줄이 빠지게 달아난다. 침착하게, 아주 침착하게 경주는 한번 모은 초점이 흩어지지 않도록 화경의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슬슬 몰고 다닌다. 어느덧 나는 공범자가 되어 있었다. 나는 내 쪽에서 자진하여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먼저 경주가 살생의 대상을 지적해주면 나는 그 둘레에 얼른 쟁반만한 원을 그렸다. 원 밖으로 빠져나가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조건이지만, 여간해서 경주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거만한 눈으로 다음 대상을 물색하는 동안 나는 죽은 개미를 집어내어 한 군데다 모았다. 경주의 콧잔등엔 어느새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고, 나 역시 소맷부리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우리는 개미굴을 찾아내어 그것을 짓부수기도 했다. 곰실곰실 기어 나오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나는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듯 우쭐한 기분을 맛보았다. 모양이 다 똑같은 여러 마리의 개미 가운데서 특별히 미운 놈을 골라내기란 어렵고 귀찮은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희생물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골라졌다. 우리들 눈에 한번 정해진 희생물은 아무리 바둥거려도 여지없이 죽고 말았다. 햇살이 기울어 초점을 맞추기 어려울 때까지 우리는 죽이고 또 죽였다. 이때 만약 경주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마 하느님 노릇을 더 길게 하기 위하여 화경이 아닌 다른 방법까지 썼을지도 모른다.

벌써 해질녘이었다. 할멈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던 우리에게 어느새 하루가 다 갔음을, 그리고 낮과는 다른 또 하나의 어둡고 끈적끈적한 세계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음을 퍼뜩 일깨워주었다. 길 건너 맞은 바래기에 있는 우리 집 지붕 위로 붉게 물든 한 덩어리의 구름이 서서히 미끄러져 가는 모양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주가 별안간 화경을 팽개쳤다.

"죽여버려야지, 죽여버려야지……" 하고 뇌면서 경주는 쏜살같이 내닫기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뛰었다. 뛰면서 생각해보니 경주는 맨손이었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경주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까지 나는 경주가 제 어머니를 죽일 수 있다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애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아이니까. 하지만, 경주네 어머니는 어른이다. 늙었다곤 해도 맨손 가지고는 아무래도 좀 어려울 것 같았다. 그 점이 불안해서 나는 속으로 안달을 했다. 끄나풀! 나는 줄곧 부드러운 끈만을 생각하면서 헐떡헐떡 뛰었다. 아버지가 쓰던 헌 명주넥타이라면 아주 안성맞춤이리라. 거의 주막 앞에까지 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경주를 불러 세웠다. 나의 숨가쁜 설명을 듣고 경주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칼날 같은 손톱이 나의 눈두덩을 할퀴고 쥐어뜯었다. 먼저 나부터 죽일 작정으로 계집애는 눈을 휘번득이며 길길이 뛰는 것이었다. 천만뜻밖이었다. 계집애가 그렇게 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오후 내내 경주와 나 사이를 그토록 밀착시켜준 나의 공범 의식 속에는 뭔가 분명히 잘못된 점이 있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문턱을 밟고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보면 경주네 주막집 유리창이 환히 보였다. 까치발을 디디면 경주의 자그만 몸뚱이가 길 쪽으로 난 그 유리창을 닫아버리려고 끄응끙 기를 쓰는 광경이 더욱 잘 보였다. 할멈의 앙상한 팔 하나가 벽과 창문 사이 좁은 틈바귀에 꽉 물려 추욱 늘어져 있었다. 경주는 그 팔이 차지한 공간마저 아주 지워버리려고 허리를 꾸부정히 하고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창문을 밀어붙이는 것이었고, 그 동안에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할멈의 모습은 전연 안 보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미 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막집 유리창 속에는 다른 또 하나의 태양이 아직도 남아 삽시에 집채를 불사를 듯이 세찬 빛살을 사방에 함부로 번득이고 있었다.

"죽어버려! 죽어버려!"라고 째지는 소리를 지르며 경주는 더욱 힘주어 밀어붙였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처럼 앙상한 팔뚝을 악착같이 물고 흔드는 악마의 주둥이 같은 시커먼 공간은 한 치도 더 좁아들지 않았고, 높고 길고 날카롭게 울리는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도 여전했다. 그걸 듣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살구라도 씹은 듯이 벌레 먹은 어금니가 시려서 견딜 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귀를 막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죽일 테야!"

완전히 저녁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어둠에 녹아 까맣게 사라질 때까지 두 모녀의 실랑이는 그치지 않았다. 할멈의 울음은 긴 여운을 끌며 깜깜한 하늘로 끝없이 퍼져나갔다. 드디어는 경주도 제 분을 못 이겨 땅바닥에 퍼질러 앉으며 할멈과 비슷한 소리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점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처음은 경주네 어머니가 하늘이 붉게 물드는 게 슬퍼서 큰 소리로 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창문이 닫히고 경주 어머니의 모습이 유리창 저편에 가려진 뒤로는 덩굴의 한 부분 같은 팔뚝 하나가 틈바귀에 남아서 아프다고 소리쳐 운다. 얼마 후면 놀빛에 번쩍이는 유리창이 째지는 소리로 울고, 나중에는 두 마리의 짐승이 서로 상처를 핥아줘 가며 사람보다 훨씬 크고 긴 목청을 어둡도록 뽑는다. 이쯤 되면 그 소리는 조금도 서럽지 않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정한 가락과 장단에 맞추어 주기적으로 즐기는 기쁨의 노래 같이도 생각되었다.

졸음에 못 이겨 얼핏 잠이 들었었나보다. 새벽녘에 눈을 뜨자마자 나는 주막집 동정부터 살폈다. 잠잠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나는 곧장 주막으로 달렸다. 안개가 자욱했다. 주막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밤사이에 몰려온 안개가 경주네 주막을 칙칙하게 감싸고 있었다. 어쩐지 으스스한 풍경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깥문을 살며시 밀었다.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츰 높아지는 심장의 고동을 뚜렷이 느끼면서 살림방 쪽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러나 닫힌 방안에서 들리는 소리 역시 쿵쿵 울리는 내 심장의 고동 소리뿐이었다. 나는 좁디좁은 술청을 돌아 발소리를 죽이며 방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자 발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내 발부리에 챈 주전자가 빙그르르 굴러갔다. 술청 바닥에는 깨진 그릇과 사기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경옥이냐?"

방안에서 목쉰 소리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그 순간, 나는 엉겁결에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할멈은 철사처럼 뻣뻣한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 헤뜨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문설주에 의지하고 서 있었다. 나는 할멈의 추악한 몰골에 질려 몸서리를 쳤다. 고름이 떨어져 달아나 뻐끔히 벌어진 저고리 섶 새로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유방이 보였고, 흰지 검은지 모를 치마는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얀데 여기저기 할퀸 자국이 끔찍했고, 눈두덩은 퉁퉁 부어 있고, 눈꼽에 싸인 빨간 눈알은 말라붙은 눈물의 흔적 위에 새롭게 비어져 나오는 눈물로 입안에서 녹아버린 사탕처럼 질척거렸다. 그런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할멈은 별안간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아아, 돌아왔구나!"

하고 외치면서 할멈은 양팔을 벌려 나를 반갑게 맞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네가 정말 돌아왔구나. 고맙다, 경옥아. 어서 들어오너라. 에미가 잘못했다. 자아, 어서 들어와."

할멈이 팔을 벌린 채 술청으로 내려서는 걸 보고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했다. 할멈은 연방 히죽히죽 웃어가며 아첨하는 목소리로 떠들었다. 입에서 시큼한 술 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 동안 에미가 잘못했다. 인제 다시는 안 울게. 제발 나가지 마. 경옥아, 제발 이 에미를 용서해라."

어둠침침한 방안에서 경주가 총알같이 뛰어나왔다. 경주는 어머니를 밀치고 밖으로 빠져 나오려 했다. 그때까지 비틀거리며 걸음조차 제대로 못 하던 할멈이 갑자기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날랜 동작으로 딸의 머리채를 나꾸었다. 그리고 역시 믿어지지 않는 무서운 힘으로 딸의 몸뚱이를 번쩍 안아 올려 방구석에 처박았다. 경주는 재차 뛰어나왔다. 그러나 다시 붙잡혔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 경주는 네 차례 뛰어나왔고, 모두 네 차례 방구석에 던져졌다. 나는 재빨리 문밖에 나와 죽을힘을 다하여 집으로 도망쳐왔다. 할멈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등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어딜 가, 에미를 놔두고 어딜 가, 이년!"

이튿날 오후 늦게부터 날씨가 흐리기 시작했다. 찌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버지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농사일을 걱정했다. 가을장마가 닥치면 일껏 베어놓은 나락을 거둬들이는 데 지장이 많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뼘의 농사도 짓지 않았으므로 아버지의 때 이른 장마 걱정은 자연히 심각한 얼굴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게 들렸다. 공연한 얘기 끝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경주네 주막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두 분은 경주네 모녀에 대해 얘길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두 손을 맞잡고 싹싹 비비대며 아버지는, 어떻게 무슨 수를 써야 될 텐데, 하고 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머니는 말끝마다 그저 혀만 쯧쯧 차고 있었다. 경주네 집 근처엔 얼씬도 말라고 어머니는 내게 신신부탁을 했다.

날씨가 흐린 탓으로 주막집 유리창을 불태우던 빨간 햇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할멈의 울음소리도 안 들렸다. 경주네 굴뚝은 벌써 사흘째나 연기를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할멈과 경주는 사흘 동안이나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나는 아무소리도 안 들리는 주막집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할멈과 경주가 서로 지금 상대방을 잡아먹고 있을 거라는 끔찍스런 상상을 했고, 끝내는 이 터무니없는 상상에 이끌려 어머니의 당부를 어기고 말았다.

사람이 들어온 걸 알고 방문을 열어보기 전에 할멈은 또

"경옥이냐?"

라고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나를 알아보았다.

"기와집 자식, 기와집 자식……"

하고 중얼거리며 할멈이 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얼른 되돌아 나오고 싶었지만 경주가 궁금해서 나는 머뭇거렸다. 경주가 안 보였다. 내가 방안을 기웃거리는 걸 보더니 갑자기 할멈의 태도가 달라졌다.

"들어와서 같이 놀아라. 경주는 병이 나서 누워 있단다."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에서 비켜서며 일부러 꾸며낸 달콤한 소리로 할멈이 속삭였다. 할멈은 잠시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내 손을 꽉 붙잡아버렸다. 나는 경주가 누워 있는 아랫목까지 질질 끌려갔다. 호롱불이 어수선한 방안 풍경을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다. 할멈이 호롱의 심지를 돋우자 방안이 환해졌다. 경주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나는 한때 유리창에서 사라진 놀빛을 경주의 두 뺨에서 보았다. 경주의 얼굴은 발갛게 꽃물이 배어 있고, 바싹 마른 입술엔 검게 검게 딱지가 늘어붙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는 간장을 달이는 냄새가 풍겼다. 나는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치받쳐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 벌써 갈라고?"

딸그락, 하고 문고리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할멈의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내 앞에서 교활하게 웃고 있었다.

"천천히 놀다 가거라."

하면서 할멈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비죽비죽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나는 할멈의 놀랍도록 억센 힘에 의하여 경주 머리맡에 다시 주저앉혀졌다. 할멈은 낡은 장롱을 뒤져 깊숙이 감추어둔 문갑(文匣)을 꺼내었다. 꽃무늬의 자개가 박힌 예쁜 상자였다. 그 속에는 채권 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할멈은 매우 아깝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인 다음 그 가운데서 한 장을 집어주었다.

"돈이다. 받아라."

그것이 꼭 돈인 줄만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 경주한테서 처음으로 채권을 받았을 때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러주었다. 그건 돈이 아니라고. 일본 사람들이 있을 때는 제법 돈 구실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라고. 그래서 휴지나 매일반임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받지 않았다. 더욱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할멈은 두 장을 쥐어주었다.

"뭐든지 살 수 있단다. 이건 정말 돈이다. 자아, 어서 받아라."

나는 받지 않았다. 할멈은 신경질을 부렸다. 내 앞에 쌓인 채권이 한 장 한 장 불어났다. 나는 좀더 울었다. 아까운 줄 모르고 듬뿍듬뿍 집어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문갑 속에 든 채권 전부가 내 손에 쥐어졌다.

언제부터인지 빗방울이 후둑후둑 함석지붕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채권에 만족하지 않았다. 할멈은 다시 장롱을 뒤져 갖가지 물건들을 내 앞에 늘어놓았다. 그 중엔 사진첩도 있었다. 누렇게 색이 바랜 가족사진 속의 남자를 가리키며 할멈이 일러주었다. 그게 경주네 아버지라고. 그는 긴 칼을 옆구리에 차고 콧수염을 기르고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젊고 예뻐 보이는 어떤 여자의 사진을 짚었다. 그러자 할멈이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며 흐흐 웃었다.

"그게 바로 나란다."

할멈은 다른 사진을 꺼내어 그보다 더 젊은 여자를 보여주었다.

"잘 봐둬라. 이것도 내 사진이다."

그리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귀부인처럼 우아한 미소를 흉내내었다.

경주네 큰언니의 사진과 얼굴이 거의 비슷했다. 나는 할멈의 주름 투성이 얼굴과 사진 속의 여자를 번갈아 비교해보았다. 어쩐지 할멈이 거짓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경주네 오빠의 얼굴을 나는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세일러복 차림의 조그마한 소년이었고, 그때의 경주는 거의 젖먹이였다.

빗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함석지붕이 마치 질화로에 얹은 마른 콩 냄비처럼 심하게 복대기치고 있었다. 피 묻은 빗자루가 붙어 있는 빈 철공소의 창문과 홈통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나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동안 경주는 한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와 있는 줄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집에 가고 싶어서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이제 방안에서 나의 환심을 살 만한 물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할멈은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두려고 안절부절을 못 했다. 갑자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할멈은 술독 밑바닥을 닥닥 긁어 막걸리를 대접에 가득 담아왔다.

"마셔, 마셔, 마셔!"

나는 입을 꽉 다물고 머리를 이리저리 돌래 대접을 피하면서 한사코 마시지 않으려 했으나 할멈이 코를 틀어쥐는 바람에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할멈은 한 대접을 같은 방법으로 또 들이부었다. 올챙이처럼 배가 불러 숨이 벅차고 온몸이 단박 불처럼 달아올랐다.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땅속으로 쑤욱 꺼져들고 다시 솟구치기를 거듭하면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네를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창가를 불러, 창가를 불러!"

하고 할멈이 꽥꽥 소리쳤다.

경주가 눈을 뜨고 방안을 두리번거리자 할멈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창가를, 경주가 잠이 깨게 창가를 불러! 경주가 웃게 창가를 불러! 불러!"

그날 밤 난생 처음 모주망태가 되어 나는 별의별 추태를 다 벌였다. 할멈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생각나는 대로 죄 불렀고, 자진하여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고, 마지막엔 할멈의 부축을 받으며 요강에다 왝왝 토물을 쏟았다. 다음 일은 전혀 기억에 없다. 나는 아버지가 방문을 때려부수고 들어와서 할멈과 싸우는 것도 모르고 쿨쿨 곯아 떨어져버렸다.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 내 곁에 누워 있는 경주를 보았다. 어머니가 경주의 이마에 찬 물수건을 갈아 올리고 있었다. 경주는 몸이 불덩이 같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할 때면 간장을 달이는 냄새가 났다. 박은 아직도 어둑했다. 빗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에 섞여 목쉰 외침이 간간이 들려왔다. 아마 대문 밖일 것이었다.

"내놔! 내놔! 내놔!"

그 소리에 애써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는 담배를 뻑뻑 빨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몹시 화가 난 태도였고, 밤새 한잠도 못 잔 듯 눈이 부석부석했다. 어머니도 매한가지였다. 어머니가 나를 꾸짖는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나는 일의 대강을 짐작했다. 그것은 할멈이, 도둑질해간 자기 딸을 내놓으라고 밤새도록 외치는 소리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고마한 기세를 유지해가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경주는 아침에 의사가 다녀간 뒤로 미음을 몇 모금 넘겼다. 아직 마음을 놓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간밤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아낙네들이 와서 아버지가 경주를 데려온 데 대해 입을 모아 치하를 했다. 매우 장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어머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날이 밝기 전에 할멈이 어디론지 사라져버렸으므로 마을은 조용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할멈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자 우리 집 대문 앞은 모여드는 구경꾼들로 장을 이루었다. 할멈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썩은 새끼로 또아리를 틀어 머리에 얹고는 깨진 손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까닭 없이 실죽벌죽 웃었다. 옷은 깨끗한 걸로 갈아입어 제법 단정해 보였으나 흰 머리칼은 비에 흠씬 젖어 엉망이었고, 더욱이 맨발이었다. 할멈은 허연 눈알을 굴려 사람들을 노려보며 뭐라고 쉴새없이 중얼거리기도 했다. 동네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뱅뱅 돌면서 장난을 쳤다. 할멈의 품안에서 빳빳한 채권 한 장이 나왔다. 할멈은 춤이라도 추듯이 맵시 있는 손놀림으로 그것을 공중에 휙 날렸다. 아이들이 서로 줍겠다고 밀고 다투었다. 할멈은 깔깔 웃으며 또 한 장을 날렸다. 계속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함께 웃어가며 구경을 했다. 요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며 '제무시'의 행렬이 나타났다. '제무시'에 탄 군인들이 고개를 빼고 할멈의 거동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비켜서자 가득가득 군인을 태운 '제무시'들이 내장산 쪽을 향하여 차례로 지나갔다. 할멈은 벌떼같이 달라붙는 아이들에게 한 장 한 장 맵시 있게 채권을 뿌려주고 나서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마을의 유명한 개구쟁이가 할멈의 품속에 손을 넣었다. 인기라는 아이였다. 그 애가 채권 뭉치를 빼내려 하자 방안에 누워 있는 줄만 알았던 경주가 별안간 사람들 틈에서 튀어나왔다. 경주는 대뜸 인기를 껴안고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할멈의 품에서 쏟아져 나온 채권들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경주와 인기도 삽시에 진흙강아지가 되어 채권이 깔린 땅바닥을 이리저리 뒹굴면서 서로 할퀴고 때리고 물어뜯었다. 구경꾼들 뒷전에서 어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가만 놔두면 저 애는 죽고 만다고 어머니가 소릴 질렀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할멈은 싸우는 두 아이의 몸뚱이 위에 남아 있는 채권을 마저 뿌리면서 허리를 잡고 웃었다. 아픈 몸으로 경주가 평상시 같으면 상대도 안 될 인기를 이기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경주는 이겨놓고도 일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경주를 멀뚱멀뚱 내려다보고만 있는 할멈에게, 당신 딸이라고 큰 소리로 일러주었다. 그러자 할멈이 훌쩍훌쩍 울면서 경주를 안아 올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가랑비에 흠뻑 젖은 옷을 털면서 하늘을 보고 투덜거렸다. 모두들 비에 젖어 있었다.

 

내가 경주와 할멈을 마지막으로 본 그날 저녁은 쿵쿵 울리는 대포 소리와 함께 저물었다. 가까운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이따금 어둠을 찢는 팽팽한 굉음을 지르며 유탄이 날아들었고, 우리는 등화관제 속에서 온 밤을 뜬눈으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밤중에 나는 이불 속에서 무엇이 한꺼번에 무너져 앉는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보니까 경주네 주막집이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와 무너진 집터를 파고 정리하는 동안, 나는 방안에 갇혀 꼼짝을 못했다. 어린애는 보면 안 된다면서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경주와 할멈의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들 두 사람이 어떤 청년을 따라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가 버렸다고 일러주었다. 그날 밤 할멈의 아들을 동네 어귀에서 본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들리고, 그에게 담뱃불을 빌려준 사람까지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나는 섭섭한 대로 어머니가 일러준 주막집 모녀의 행방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젠 주막집 유리창에 번득이던 저녁놀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이듬해 봄이 되자 불에 타죽은 줄 알았던 담쟁이덩굴이 한 해 동안의 긴 몸살에서 일어나 나를 놀라게 하였다. 벽돌집 전체가 무성한 잎에 싸여 온통 푸르게 보이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오래도록 사사건건에 말썽을 부려온 왼쪽 충치를 뽑아버렸고, 그것을 지붕 위에 던졌다. 그 뒤로도 마을 아낙네들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으나 새삼스럽게 경주네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새 이빨을, 까치가 물어다 줄 건강한 이빨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와 아낙네들은 어느새 이웃에 새로 이사온 어떤 새댁의 나쁜 행실에 관해서 열심히들 수군거리고 있었다. [現代文學, 1970.3]

 

 

윤흥길(尹興吉: 1942- )

 

전북 정읍 출생. 전주 사범대학 수학.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68<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등과 민족적 의식의 저변에 위치한 삶의 풍속도를 예리하게 파헤치는 솜씨를 지닌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서는 <황혼의 집>, <장마>, <묵시의 바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완장>, <꿈꾸는 자의 나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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