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초상(肖像) -최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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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유독 최 노인의 모습이 내 시선을 끌게 되었는가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른 봄 모처럼 좋은 날씨로 고궁은 가족을 동반한 사람들로 발 디밀 틈조차 없이 가득가득 차 있었다.
마침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고궁 측에서는 늦은 밤까지 밤 벚꽃놀이를 연장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사람들은 가족을 이끌고 고궁으로 몰려들었다.
그 지리했던 겨울 끝에 어김없이 다가온 봄은 두터운 내의를 벗게 하고 사람들을 답답하고 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있지 못하게 들쑤셔대고 있었다
건강한 젊은이들은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찾아가거나 모처럼 휴일을 맞은 젊은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극장 앞에 줄을 서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겨우내 굳게 닫힌 방안에서 하루 종일 뛰어 놀던 아이들의 시달림을 받고 하품을 하면서 고궁으로 고궁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어른들의 가슴에 안긴 아이들이나, 첫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 손에는 으레 풍선이 하나씩 매달려 있었고, 여기저기 벚꽃 아래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행복한 미소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긴 겨울 동안 실내 우리에 갇혀 있던 동물들도 날이 풀리자 제 철장을 찾아 새로 이사를 했으며, 원숭이 똥구멍이 진짜 빨간색이라는 것을 확인한 아이들은 원숭이 우리 앞에서 떠나려 들지 않았다.
새들도 날개를 펴고 파드득거리며 날아다니며, 물위로 갓 솟아오른 물개의 콧잔등 위에서 이른 봄날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좋은 봄 날의 휴일이었다.
도심지 한복판에 적어도 이런 산책을 즐길 만한 고궁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고궁으로 들어가는 원남동 입구는 아예 인파로 뒤덮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핥는 꼬마들도, 고궁 측에서 대여한 바퀴 의자에 앉아 어머니가 미는 대로 끌려가는 애기들도, 아예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온 사람들도. 사진기를 메고 기회만 있으면 찰칵찰칵 셔터를 눌러 대는 어른들도, 장롱 속에 깊이 들어 있던 봄옷을 꺼내 입고 나선 여인의 옷에서 풍겨 오는 나프탈린 냄새도, 행여 길을 잃을세라 손자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 나선 할머니도, 모두모두 좋은 봄날의 따스한 햇살 속에 활짝 웃음을 담고 있었다.
사람뿐 아니었다.
철책 속에 갇혀 있던 동물들도 그 두터운 털가죽 속에 갓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와 근질근질한 욕정, 모처럼 되찾은 야성의 거센 광기로 이빨을 보이면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와 행복한 지껄임이 새 소리처럼 넘칠 흐르고, 활짝 만개한 벚꽃은 바람도 없는데 흐트러져서 난분분 난분분 흩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벚나무 밑 그늘 아래 앉아서 오랜 동안 저희들에게만 통하는 밀어를 속삭이는 철은 연인들 어깨 위에는 눈과 같은 벚꽃의 낙화가 견장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 위에 어깨 위에 떨어진 벚꽃의 세설(細雪)을 이른 아침 싸리비로 집 앞의 눈을 쓸 듯 털어 버리며 상대편 눈썹에 떨어진 벚꽃 꽃잎이 하얗게 세월을 뛰어넘어 눈썹을 바래게 한 것인 양 서로 웃고 그리고 털어 주었다.
애써 땅 위에 떨어진 하얀 꽃잎들을 쓸어모을 필요는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는데, 오후쯤부터는 벚꽃나무 밑 산책로는 아예 흰 융단을 간 긴 회랑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을 태운 목마(木馬)가, 열대어 같은 비행기가. 치차(齒車) 소리를 내며 굴러가고 있었다. 목마가 속력을 내자 간신히 말의 잔등에 매달려 있던 꼬마들이 와아 와아 소리를 지르거나 어떤 아이들은 겁이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벚꽃나무 밑 산책로와 놀이터 중간쯤 잔디밭에서 그 최 노인을 만났었다.
나는 흔자서 고궁에 나왔었다. 모처럼의 화창한 봄날에 빈 아파트에서 홀로 낮잠을 자거나 텔레비젼을 켜고 재방송되는 영화를 졸면서 보는 것도 따분한 일이었다. 그래서 몇 군데 전화를 걸었는데 한결같이 부재중이었다. 당연한 일로 이 좋은 날에 집에 갇혀 있는 녀석이란 산에 올라갔다 다리가 부러져 기브스를 하고 있는 녀석들뿐이었다. 경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짐작대로 집에 붙어 있질 않았다. 별수 없이 혼자서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왕 나선 김에 할 일 없이 방심한 마음으로 소일만 할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사진기를 들고 휴일의 풍경을 담아 보리라는 직업의식이 발동되었으므로 나는 집 앞 로터리에서 필름을 다섯 통이나 샀다.
나는 사진 찍는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다, 잡지사에 근무한 일도 있었고, 신문사에도 있었지만, 잡지사에서는 신춘 모드랍시고 도저히 실용가치가 없는 희한한 디자인의 옷을 입은 모델 사진 찍는 데 넌덜머리가 나 있었고, 신문사에서는 정치가, 기업인, 혹은 살인범 따위의 얼굴만 찍는 일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지난 겨울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예 스튜디오를 차렸던 것이다.
나는 프리랜서를 자처하고 있었다. 간혹 광고용 사진 부탁도 들어오고 캘린더용 사진 부탁에 작은 잡지사의 촬영을 청부 맡는 일 이외로 평소에 내가 하고 싶었던 사진을 찍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소위 예술 사진을 찍는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목적이 있어서 고궁 뒷담에 모델들을 세워 놓고 쪘거나 흑은 갓 구워낸 요리를 찍거나 비행기 트랩을 막 내리는 외국 정치가를 찍는 일이 아닌, 전혀 낯설고 돌연한 피사체를 파인더 안으로 포착해서 들여다보면 비로소 내가 살아 있는 풍경을 찍고 있다는 만족감이 셔터를 누르는 손끝에 팽팽히 긴장되어 떨리고 있었다.
살아 있는 풍경, 움직이는 피사체는 어디든 있었다. 우리의 눈은 얼마나 부정 화한가.
가령 아파트 앞 광장에 갓 피어난 봄꽃들 위로 갑자기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와 꽃잎마다 날개 접고 쉬는 것을 카메라의 파인더 안으로 들여다보면 풍경은 가지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자연 사라져, 단지 내가 필요로 하는 피사체만 집약되어 초점에 모인 뜨거운 햇빛처럼 생생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망원 렌즈를 사용해서 초점을 맞추면 나비만 특별하게 드러나고 한 뼘 떨어진 꽃잎조차도 흐릿하게 멀어져 보여 정확히 맞추려는 손마저 수전증에 걸린 듯 떨리고,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는 조바심으로 숨이 가빠 어떤 때는 우물쭈물 찍으려 하는 사물의 정지된 찰라를 놓치기 일쑤였다.
지난 겨울 나는 얼어붙은 한강변을 헤맸었다. 말로만 들은 철새들이 멀리는 낙동강 하구로 가까이는 인천 앞 갯벌로 몰린다는 것만 알았을 뿐 철새들이 바로 한강변에도 날아든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한강변 아파트 사이로 철새들이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겨울 내내 그 새들을 찍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우거진 갈대 숲 사이로 떠오르는 철새보다는 여름 내내 모래 채취한 웅덩이 위에 납색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으며 여기저기 채취선의 거대한 철제 탱크가 우뚝우뚝 서 있고 아파트 창문이 반짝거리는 도시의 복판으로 날아드는 철새들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이중 의미까지 형상화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스튜디오 암실에서 네가 필름을 한 장 한 장 인화하면 생명감이 넘쳐흐르고 새떼들이 아파트 건물 사이에서 날개짓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구태여 촬영을 위해 멀리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소재는 어디에건 있었다.
가능하면 봄 중에 그 동안 잭은 사진들을 모아 작은 전람회라도 마련해 보리라는 생각까지 들어 나는 휴일에라도 좀이 쑤셔 시간을 할 일 없이 낭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진기를 들고 고궁으로 찾아간 길이었다.
사진을 찍다 보면 뭐니뭐니 해도 인물 사진이 가장 쉬우면서 힘든 소재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물 사진 중에서도 가장 백미가 여인의 누드 사진으로, 여인의 나체는 아무리 벗겨도 양파처럼 그 끝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신이 창조한 물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물건은 뭐니뭐니 해도 여인의 나체일 것이다.
한 여인의 나체 사진을 수백 장 찍는다 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중복되는 모습은 없으며, 빛의 조명 놓인 자세 각도, 분위기. 그런 사소한 기미가 여인의 나체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누드 사진 다음으로 좋은 소재는. 어린이와 노인들의 사진이었다.
이들은 표정이 풍부하며 천진하고 그만큼 자연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사체가 톤이 튀거나 부분으로 드러나 보이는 경우는 어딘지 생경하나, 자연에 가까워 주위 환경에 녹아 있는 경우일 때는 사진은 정지되어 있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한꺼번에 담고 움직이며 팽팽한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것이었다
고궁에서 나는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일광은 풍부해서 조명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사방 어디에건 동물과 꽃과 나무가 배경으로 인물들을 든든히 받쳐 주고 있었다. 더구나 사람들마다 애써 웃기려 하지 않아도 절로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런 미소를 행복하게 넘쳐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학대하였다. 한 바퀴 돌고 놀이터 부근으로 왔을 때 나는 잔디밭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을 보았다.
순간 이것은 물건이 되겠구나 하는 육감이 불꽃처럼 튀었다. 한눈에도 노인을 중심으로 그 배경이 직사각형의 파인더 안 풍경으로 집약되었다.
노인 주위에만 유독 벚꽃이 만개해 있었고 연신 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 호숫가로 햇빛이 찰랑찰랑 부서지고 있었고 인파가 가득 넘치고 있었다,
그들과 격리된 노인의 모습이 내 창작욕에 불을 댕겼다.
나는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망원 렌즈의 조리개를 조이자 노인의 모습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가슴이 뛰었다. 눈짐작보다 아주 근사한 구도였다. 나무랄 데 없는 스냅이었다. 나는 셔터를 누르려고 호흡을 멈추었다
그때였다.
나는 왠지 그 노인네가 눈으로 봤을 때보다 막상 파인더 안으로 당겨 가까이 접근시켜 보았을 때 어딘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바위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뿐인가. 어딘지 이상할 정도로 울긋불긋한 새 한복에 새 모자 새 고무신을 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동도 하지 않았으므로 노인은 마치 옮겨 놓은 이삿짐처럼 보이고 있었다. 사진관에서 사진 쩍을 때처럼 정지되어 있는 노인네의 모습은 그렇다면 이처럼 멀리 떨어져 몰래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웃다가도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근엄해지거나 딱딱하게 굳어 버리곤 하는데 노인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아무리 근사한 구도라고 찰지라도 피사체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내리고 한참 동안 노인을 지켜보았다.
나는 저만큼 나이 든 노인네가 혼자서 이 고궁에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며느리나 손자들과 함께 고궁으로 왔으며, 아마도 그들은 근처 가게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거나 아니면 손자가 쉬이를 하고 있어 며느리가 공중변소로 데리고 간 사이에 그들이 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꼼짝 말고 계세요, 아버님. 걸어다니시다간 길을 잃어요.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아시겠어요. 저 노인은 필경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좀 오래 걸리지만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였으므로 노인네는 늙은이다운 질긴 인내심으로 잔디밭에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노인네를 잠시 방치해 둔 가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탈 때까지 기다려 노인을 보았으나 여전히 노인네는 혼자였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공중변소에 갔던 손주 녀석이 원숭이 우리 앞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모양이 라고.
그렇다면 아까온 시간을 저 노인을 지켜보며 함께 기다리는 것으로 보낼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린이 놀이터로 다가가 사진을 마구 찍었다. 아이들은 언제나 즐거운 소재들이었다. 한 바퀴 돌았던 고궁을 나는 또 다시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사진 찍는 일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다. 시장기가 몰려왔지만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는 것으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나는 햄버거를 사서 휴지로 감아 들고 순식간에 걸어다니며 먹어 치웠다.
해는 머리 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봄날의 휴일은 차츰차츰 저물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몰려들었던 인파는 벌써부터 조금씩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나가는 사람이 더 많아 오전보다는 다소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준비해 왔던 필름 다섯 통이 어느새 바닥이 나서 나는 DP점에서 필름 두 통을 더 샀다. 두 통만 더 찍고 고궁을 나가리라 마음먹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세 바퀴 째 고궁을 돌기 시작했다.
마악 어린이 놀이터 쪽으로 접어들려다가 나는 놀랍게도 두 시간 전에 만난 노인네가 아직 그 잔디밭 위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더위도 느끼지 않는지 모자를 그대로 쓴 채 한복 단추 하나도 풀어뜨리지 않고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어찌된 일일까. 두 시간도 전부터 노인은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굳어져 있다. 아니 내가 발견한 훨씬 전부터 노인네는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이라면 함께 동반한 가족들이 이미 돌아오고도 남았어야 할 시간이 아니겠는가.
점심 시간도 지났다. 그런데도 꼼짝없이 앓아 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는가.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천천히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정물처럼 앉아 있었다. 새 한복의 깃은 하얗게 빛나고 한복 단추가 햇빛에 번득이었다, 모자와 횐 고무신은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정갈한 성미를 가진 노인네가 애써 깨끗이 복장에 신경을 썼다라기보다는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한 분위기가 있었다. 마치 녹을 갑자기 벗겨 내고 새로 도금을 한 것과 같은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갓 죽은 시체에 다린 옷을 입히고 억지로 화장을 한 것 같은 기묘한 성장(盛裝)이었다.
시체의 부패한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서 기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린다든가. 노인네의 모습에는 본인의 의사가 아닌 타인에 의해서 곱게 꾸며진 듯한 이상스런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일어서서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나는 가만히 불러 보았다.
노인은 그러나 나를 보지 않았다. 고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입은 약간 벌려져 있었고 어딘지 탈을 쓴 백치의 표정이었다. 악 웃으려 하는 표정인지 아니면 막 웃음을 끝낸 표정인지 어쨌든 분간할 수 없는 기묘한 미소가 노인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할아버지."
나는 어쩌면 노인네가 가는 귀가 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므로 크게 소리질렀다. 노인은 가까이서 보자 생각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마도 여든 살은 넘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
나는 재차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노인은 내게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노인의 시선이 어디만큼 가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노인의 시선을 좇아가 보니 그의 눈은 난분분 난분분 어지러이 낙화하는 벚꽃나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노인네가 그 꽃을 보고 있었다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인의 눈은 실상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외부를 향해 눈은 분명 열려져 있었지만 그저 그곳에 고정되어 있을 뿐 그것을 인식 안으로 받아들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이 노인네가 눈을 뜨고 자는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이 노인네가 눈을 뜬 채 봄날의 나른한 백일몽에 잠겨 있는 것일까. 고렇담 깨워야지.
나는 노인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었다.
"할아버지."
그제서야 느릿느릿 노인의 얼굴이 나를 보았다.
"어어."
불확실하게 노인은 이상한 대답을 하면서 나를 보았다. 그 얼굴이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 누구와 같이 오셨나요."
"미, 미안합니다."
노인은 불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굴 기다리세요, 할아버지."
"어, 어, 미, 미안합니다."
나는 난처했다.
"여기 누구하고 오셨어요, 할아버지."
"배, 배가 고파요."
노인네는 말했다.
"밥, 밥 좀 주세요."
나는 그제서야 노인네가 노망이 들린 것을 알았다. 그렇다. 노인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노망에 들려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이 노인이 노망이 들었다면 뭣 때문에 고궁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누군가 바람을 쐬어 주기 위해 데리고 나왔다면 어째서 이처럼 오랫동안 한 자리에 앉혀 놓고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어쩌면 노인네가 길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있으라고 한 자리에 있지 않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다 이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노인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가족들은 한창 정신없이 노인을 찾으러 다닐지도 모른다.
고궁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자주 들었다. 한꺼번에 몰린 인파로 복잡했는지 가끔 관리실에서 화성기로 안내 방송이 있곤 했었다. 즉, 엄마를 잃고 미아가 되어 버린 아이가 약수동에서 오신 철이 엄마를 찾는다는 안내 방송이 있었으며, 그와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자꾸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런 것이다.
아이들은 고리 풀린 망아지처럼 이 모처럼의 해방감을 어머니의 손아귀에 맡긴 채 구속될 수는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닥치는 대로 쏘다니다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은 어머니를 잃어버릴 것이며, 어머니도 역시 아이를 시야에서 잃어버릴 것이다.
이 노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옷차림으로 보아 아주 궁색한 집안의 노인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 추측은 틀릴지도 모른다. 고궁에 나설 때면 누구든 한껏 새 옷으로 갈아입고 멋을 부리는 편이니까.
어쨌든 노인은 가족을 잃었으며 가족 역시 노인을 잃어버린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노인네를 고냥 내버려두고 자리를 피해 버릴 것인가. 그리하여 성급하게 뛰어다니며 노인을 찾는 가족의 눈에 마침내 띄어버릴 것만을 기대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고 필름은 아직 두 통이나 남아 있다. 곧 해는 충분치 못한 빛과 양으로 떨어질 것이다, 감도가 좋지 않은 사진은 찍으나마나 한 휴지에 불과하다.
나는 짜증이 났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인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일어나세요, 할아버지."
"선생님."
노인은 웃었다. 영원히 웃고 있는 탈을 쓴 광대처럼.
"미, 미안합니다."
나는 노인의 어깨를 부축해서 몸을 일으켰다. 의외로 노인의 몸은 무거웠다, 세워 놓고 보니 풍채도 좋았고 뼈도 굵었다.
"걸으실 수 있겠죠."
“네"
"그럼 따라오세요."
"예. 선생님, 고맙습니다."
노인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노인을 데리고 관리실 쪽으로 걸어갔다.
관리실은 고궁 입구 바로 옆에 있었다.
"오줌이 마렵습니다. 선생님."
왠지 남 보기에 창피해서 서너 발자국 앞서 걷던 나는 노인이 엉거주춤 제 자리에 선 채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다시 되돌아 다가가자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기랄 나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따라오세요."
마침 눈앞에 공중변소가 있었다. 노인은 얌전하게 나를 따라왔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변소에서도 노인은 한복 바지를 벗으려 들지 않았다.
"변을 보세요. 여기가 변소입니다. "
사람들이 나를 흘깃흘깃 보았다. 가만 있자. 어쩌면 이 사람들은 나를 나이 든 아버지를 모시고 온 아들쯤으로 봐줄 것이 아니겠는가.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어쨌든 노인에게 싹싹하게 보일 필요는 있었다.
나는 낯을 붉히며 노인의 허리띠를 풀어 주었다.
노인은 오줌을 쌌다.
나는 허리띠를 들고 기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나는 노인이 오줌을 싸는 동안 부리나케 도망가 버리고 싶었다. 오줌 싸기를 기다려 허리띠를 주자 노인은 정성 들여 그것을 맸다. 나는 노인을 이끌고 관리실로 들어갔다.
관리실엔 울고 있는 두 아이와 관리인이 앉아 있었다.
"뭡니까?"
제복을 입은 관리인이 나를 보았다.
"저 노인 때문에 왔는데요."
"그런데요."
"아무래도 가족을 잃은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좀 해 주었으면 하구요."
관리인은 흘깃 노인을 보았다.
"보아하니."
관리인은 침을 퉤 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족을 잃은 노인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요."
"일부러 버린 노인 같습니다."
"뭐라구요?"
나는 믿어지지 않아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시끄러워. "
관리인은 내게 대답하려 들지 않고 긴 의자에 앉아 앙앙 울고 있는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아이들은 그러나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 아이들 좀 보세요."
관리인은 나를 보았다.
"저 아이들도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처럼 보입니까."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럼요."
"아닙니다. 일부러 버린 아이들입니다."
"버리다니요."
“키우지 못할 사정이 있는 아이들을 마지막 구경 가자고 꾀서 이곳까지 데리고 와 아이스크림 하나 사 주고는 도망가 버린 부모들에게서 버려진 아이들이란 말입니다."
나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너무 울어 목이 쉬어 있고 얼굴은 지저분하게 더러워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십니까."
"이 보세요."
관리인은 맥없이 대답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저런 아이들이 생겨납니다. 방송을 해 봐도 절대로 찾아가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방송은 했습니까."
"목이 쉬어라고 했습니다."
사내는 신경질을 부렸다.
"젠장 갖다 버릴라면 아예 낳지나 말 것이지."
사내는 귓가에 꽃아 두었던 담배꽁초를 피워 물었다.
"버려지는 아이들은 모두 특징이 있습니다,"
"특징이요."
"모두 새 옷을 입히는 것이죠."
"그야 나들이 가는데 새 옷을 입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저 애들 좀 보세요. 신발도, 양말도, 모두 새 겁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한번 벗겨 보세요. 런닝셔쓰도 빤쓰도 새 겁니다. 우린 옷차림만 봐도 압니다."
"하루에도 서너 명씩 있다구요, 버려지는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새 옷을 입히고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거죠. 주머니를 뒤져보면 이런 편지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잘 있거라. 이 아이의 이름은 김 순철입니다. 돈도 몇 푼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밤까지 부모가 찾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린 일단 미아보호소로 넘깁니다. 거기서 한 달 정도 있다가 그래도 소식이 없으면 고아원이나 그런 데로 보내는데 십중팔구 저 애들도 고아원 행입니다. 다행히 오늘은 애기들이 없습니다. 평소엔 강보에 싸인 애기들이 젖병을 문 채 이곳에 옵니다. 그런 때면 우린 기저귀까지 갈아 줘야 합니다."
나는 입구에 엉거주춤 서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저 노인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집니다. 버려진 겁니다. 옛날, 아시쟌습니까. 나이 든 노인네들을 산 속에 갖다 버렸쟌습니까. 돌아오지 못하게 떠날 때는 눈 내리는 밤에 떠났다고 합니다. 심산계곡에 갖다 버리고 돌아오면 발자국이 눈에 묻혀 지워지죠. 천하없는 노인네라도 빈 산을 헤매다 들짐승들에 잡혀 죽기 십상입니다. 고려장이죠. 아마, 바로 그겁니다, 요즈음엔 이런 고궁에 갖다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애써 산 속에 갖다 버릴 필요도 없이 이렇게 버리면 얼마나 쉬워요. 신판 고려장입니다. 보세요. 저 옷차림을 보세요. 왠지 전부 새것 아닙니까. 옷을 벗기면 아까 말했던 대로 런닝도 빤쓰도 모두 새것일 테니까요. 두고 보세요."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 화가 솟았다. 아는 허락된다면 관리인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일단 방송은 해 봐야죠."
"물론입니다."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요즈음엔 버려지는 노인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어쩌자는 것인지 통 모르겠습니다. 허기야 늙어 갈수록 애가 되어 노인이건 애건 둘 다 어리긴 마찬가집니다만."
관리인은 일어섰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노인은 주춤주춤 다가왔다.
"제 말 들려요. 할아버지."
"예. 잘 들립니다."
"할아버지. 집이 어디에요."
노인은 연신 종이 먹는 양처럼 얌전하게 웃고 있었다.
"배가 고파요. 배가 아주 고픕니다."
관리인은 투털거렸다.
"돌은 노인이로군. 노망들었습니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할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요."
"할아버지 이름말이에요."
"최 순돌입니다,"
"누구하고 여기 왔어요."
"미안합니다."
노인은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야 물론입죠.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을라구요."
관리인에겐 노인의 엉터리 대답을 어느 정도 즐기려는 낌새가 묻어 있었다.
"어쨌든."
나는 말을 거들었다.
"일단 방송이라도 해 보십시다,"
"물론이죠."
사내는 비양거리듯 대답했다. 탁자 귀에 놓인 기계의 스위치를 올리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사내는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마이크 실험입니다. 하나, 둘, 셋, 잘 들립니까. 잘 들립니까."
"잘 들리는데요."
나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이 오신 보호자를 찾습니다. 할아버지 이름은 최 순돌입니다. 최 순돌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 보호자 되는 분은 관리소로 급히 연락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오신 보호자를 찾습니다. 할아버지 이름은 최 순돌. 최 순돌입니다,,,,,,"
방송은 서너 번 되풀이되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앙앙, 잠시 그쳤던 울음을 계속하고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한 아이는 또 딴 계집애였고 딴 애는 사내아이였다. 둘 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겨우 말 몇 마디 할 정도의 어린아이들이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 버려진 것일까. 아예 갓 태어난 어린애라면 모른다. 그런 이야기는 왕왕 들었었다.
새벽녘에 대문간에서 고양이 울음 같은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 나가 보면 강보에 싸인 핏덩어리가 앙앙 출고 있다는 이야기. 으레 잘 키워 주세요 라는 따위의 편지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 미리 아이 없는 집을 물색해서 버려진 아기는 다행히도 고 집에서 맡아 키우게 되었는데 몇십 년이 지나 아기를 버린 엄마가 나타나 키운 정이 깊으냐 낳은 정이 깊으냐 서로 갈등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고 본 신파조의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띠처럼 멀쩡히 제 앞가림할 정도로 키워 가지고 버릴 만한 사정은 도대체 어떤 사정들일까.
하기야 해방이 되었을 무렵 도망가던 일본 사람들이 아이들을 길거리에 버리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 전쟁터에서, 혹은 야밤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38선을 넘을 때면 으레 갓난아이는 강변에 버려지거나 물 속에 머리째 처박혀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언제라도 깨어나 울음소리를 낼지 모르는 아이는 수 없이 강변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또 낳을 수 있잖소, 여보."
버려진 아이를 생각하며 나룻배에 고개 숙이고 손등을 피가 맺히도록 깨물며 숨죽여 우는 아내의 귓가에 남편들은 그렇게 속삭이곤 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이는 원하면 또 다시 낳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목숨을 안전히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일본인이 버리고 간 아이들은 어머니가 주고 간 요오깡을 깨물며 북만주 벌판에서 얼어 죽었고 굶주린 늑대의 밥이 되었다. 전쟁터에 버려진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모두의 양해를 얻어 간신히 버려지지 않고 나룻배에 올라탄 아이도 잠시 수상한 울음을 터뜨리려는 기척이 보이면 가차없이 물 속에 처넣기로 약속한 뒤에야 겨우 허락되었는데 대부분 아이들은 달빛이 부서지는 강물에 조용히 던져질 수밖에 없었다.
긴박한 공포 속에서 아무도 그 야비한 살상과 수장(水葬)을 말릴 수는 없었다.
마치 풍랑 첸 바다 속에 사 가지고 온 처녀를 던져 해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는 어부들처럼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아이들을 물 속에 제물로 던져 버리곤 했었다.
어쩌다 강변에 도착할 때까지 신통하게도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이가 하나 있어 다들 무사히 강 이편에 도착하고 나서야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면 으레 어머니의 손에 입을 틀어 막힌 채 질식해서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행여 아이가 울세라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숨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버려졌으며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와는 전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저와 같이 이 도시의 한복판에 버려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관리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직 살아 있는 노인을 저처럼 버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맥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미 새로 산 두 통의 필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유리창 밖 고궁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관리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맞다니요."
"보세요. 아무도 저 노인네를 찾으러 오지 않지 않습니까."
"을 겁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좀더 기다려 봅시다. 아직 시간은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소."
"기다려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관리인은 기지개를 켰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한번 더 방송해 보시오."
"소용없다니까요."
"해 봐요."
나는 강요했다.
"이 보세요."
그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만약 노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면 방송하지 않아도 이미 관리실로 뛰어왔을 건 분명한 일입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만약,"
나는 그를 보았다.
"오늘밤 안으로 저 노인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모릅니다. 우린 경찰서로 넘겨 버리면 그만입니다. 아마 모르긴 합니다만 양로원 같은 데로 넘겨질 겁니다."
그는 일어서서 책상 위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뒤져보았다. 책상 위에는 우산과 시계, 트랜지스터 라디오, 신발, 지갑 따위들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아마도 고궁에 떨어진 분실물들인 모양이었다.
"저 노인네들은 이 물건보다 못한 신세죠. 이 물건은 언젠가는 찾아가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허지만 저 노인은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을 겁니다. 살아 있는 목숨보다 우산이 더 소중한 세상입니다. 젠장."
그는 의미 없이 우산을 좌악 펼쳐 보았다. 유리창 바깥으로 햇살은 완전히 기울어 사라지고 어둠이 뿌려지고 있었다. 종일토록 붐비던 사람들도 많이 줄어 있었다, 간혹 밤 벚꽃을 즐기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을 뿐 고궁은 내리는 어둠과 함께 쓸쓸하게 파장되고 있었다. 어느 틈에 여기 저기서 수은등이 켜졌고 칙칙한 검은 나무숲 속에서 벚꽃이 하얗게 눈을 흘기고 있었다.
나는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더 이상 이곳에 기다리고 앉아 있을 필요는 없다. 이만큼 성의를 보인 것만 해도 내 할 일은 다했다.
나는 일어섰다.
긴 의자에 앉아 있던 두 아이도 이미 울음에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가겠소. "
나는 힘없이 사내를 보았다. 노인의 눈이 나를 좇고 있었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느끼지 못하는 백치 상태 속에서 노인은 자신의 입장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고 연신 웃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는 노인 앞에 섰다,
"난 갑니다. "
"고맙습니다."
노인은 입을 벌리고 웃었다. 행복한 미소가 얼굴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어이하여 이 노인네는 울음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제 겨우 세 살 먹은 아이들도 울 줄 알고 있거늘. 웃음을 흘리는 입은 이빨이 몇 개밖에 없어 마치 검은 구멍 위에 돋아난 불규칙한 버섯 같아 보였다.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칼이 주름진 이마 위를 듬성듬성 덮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
노인은 웃으며 자신의 나무등걸 같은 딱딱한 손을 내밀었다.
"난 가겠습니다. 할아버지."
그 손에 내 손을 내어 밀자 노인은 고맙기라도 한 듯이 내 손을 마주 잡았다.
"배가 고픕니다. 밥 좀 주십시오."
관리인은 묵묵히 나와 노인이 벌이는 기묘한 대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보기엔 댁한테 그새 정이 든 모양입니다."
관리인은 웃지 않았다,
나는 벌레를 피하기라도 하는 듯이 노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다. 순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을 찢었다
이 자식아.
나는 내 자신에게 엄중히 꾸중했다.
최소한 노인네에게 저녁 한끼라도 베풀어 줘야 할 것이 아니냐.
하지만.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건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잖는가. 이건 귀찮은 일이다. 공연한 센티멘탈리즘에 스스로 빠져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돌아섰다,
"이 노인네를 내가 데려가겠소."
"네?"
관리인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는지 얼핏 실감이 오지 않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 노인네를 내가 데려가겠소. 저녁 한끼 대접하겠소. 그래도 괜찮지요."
"글쎄요."
차내는 시선을 피했다.
"일단 우리 책임이긴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대신 연락처만 가르쳐 주길 바랍니다. 흑 연락이 오더라도 우린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나는 내 아파트의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나는 서둘러 관리실을 나섰다. 나는 값싼 유희를 벌이는 듯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노인은 총총히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금속의 수은 불빛이 노인의 얼굴을 납색으로 울들이고 있었다.
어쨌든 이 고궁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궁을 벗어났을 때 벌써 나는 나의 경솔한 행동을 후회했다. 노인은 이미 내게 크나 큰 짐으로 다가왔다. 나는 허락된다면 재빨리 도망가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겨우 겨우 짜증을 인내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노인은 내게 무거운 돌의 무게와 같은 부담이었다.
그것은 일테면 이런 느낌이었다. 지난 여름 나는 돌에 미친 친구 녀석에게 이끌려 단양으로 자연석 채취를 하러 한 번 따라갔던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의 서재에 수많은 돌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녀석이 채취한 돌은 예삿돌이 아니었다.
함부로 굴러다니는 돌들은 그러나 수백 년을 두고 흘러내리는 물에 의해 각(角)을 잃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돌들은 하나같이 성난 모서리를 잃어버리고 분노의 각을 상실하고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지층의 밑바닥에서 엄청난 무게에 짓밟히고 억눌린 흙이, 안으로 딱딱하게 응결된 분노와 고통으로 마침내 변화를 보여 시퍼런 적의를 보이며 생성된 돌들은 그러나 이미 자연이 주는 비와 바람, 세월과 물, 그런 집요한 애무의 혀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비와 바람, 울. 그런 자연의 애무는 돌을 갖가지 형상으로 이룩하고 있었다. 참으로 위대한 창조였었다.
산의 모양을 닳은 돌. 폭포의 모양을 닳은 자연석. 동물의 모습과 흡사한 돌. 꽃무늬의 아름다운 모양을 표면에 노출시킨 돌. 남녀의 성기를 닮은 돌.
녀석의 방에 가득 찬 돌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좋은 돌일수록 자연과 닳아 있다."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사이 좋은 부부가 어딘가 닳아 있듯."
그 다음 주말 나는 녀석을 따라 수석 채취를 나갔었다, 돌의 명산지로 꼽히는 단양 지방으로 나갔었다. 마침 가뭄이 겹치고 있었으므로 웬만큼 깊은 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정강이 이상까지 물이 차 올라오지 않았다.
우리는 웃통을 벗고 따가운 여름 햇살을 받아 가며 돌과 씨름을 했었다.
나는 오후 내내 하나의 돌도 발견해 낼 루 없었다. 유리처럼 맑은 물 속에 가라앉은 돌들을 그럴 듯하다 싶어 문득 뽑아 보면 돌은 물 속에서 얼핏 보았을 때 느낀 그 최초의 빛깔을 상실하거나 최초의 환상을 지워 버리고 있었다.
저것이다 싶어 마악 뛰어가 돌을 꺼내 보면 이미 돌은 순결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검은 때를 보이거나, 탈색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막연히 돌들의 모습에서 내가 늘상 보는 사물의 형태를 찾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선입견을 버려라."
내가 집어 올린 돌을 마구 첨벙첨벙 물 속에 던져 버리자 녀석은 그렇게 타일렀다.
"좋은 돌이란 흔치 않아. 평생 좋은 돌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거의 매일마다 이곳에서 수석 채취하는 사람들이 깡그리 훑어 내려가도 매번 같은 돌이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눈이란 교활하기 때문이야. 좋은 돌은 절대 숨어 있지 않아. 네 발 밑에 있어. 바로 네 발 밑을 봐라. 그곳에 있어. 미리 마음을 정하지 마라. 미리 무의 있는 돌, 미리 사람과 같이 생긴 돌을 찾아야지, 혹은 미리 기막힌 돌을 찾아야겠다고 선입견을 가지고 돌을 보면 좋은 돌이 라도 추한 노파의 모습으로 둔갑한다구. 좋은 돌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조차도 물처럼 담담해지지 않으면 안 돼요. 네 자신이 물이 되어라. 마음을 미리 정하지 말고 돌의 마음이 되면 좋은 돌이 보인다구."
"젠장 어렵군. "
나는 침을 퉤퉤 뱉었었다.
그날 오전 내내 친구녀석은 청개구리상의 돌 하나와 꽃 모양의 돌 하나를 채취하였다. 그 동안 하나도 채취하지 못한 내가 가엾었던지 녀석은 도시락을 먹으며 오후에는 무조건 네 차례다라고 약속을 했었다.
과연 햇살이 기울 무렵 돌 하나가 발견되기는 했었다.
"과히 좋지는 않다만 이만하면 좋은 돌이라고 할 수도 있다,"
녀석은 물 속에 들어 있는 검은 돌을 가리켰다. 나는 녀석이 가리키는 돌을 들여다보았다. 그 돌은 물 속에 잠긴 채 들짐승처럼 누워 있었다.
"이게 뭐냐."
한참을 들여다봐도 도저히 그 녀석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아. 이건 암석이 아니냐."
"봐라, 돌을 이렇게 자른다고 가정하면 산수(山水)형의 자연석이 되지 않니. 제법 좋은 돌 같다, 이건 주봉(主峰)이 되겠고, 이건 작은 산봉우리가 되겠지. 어떠냐, 가질 테냐."
"좋았어,"
"그럼 돌 뿌리를 캐 봐라."
나는 녀석이 내어 주는 삽을 들고 물밑에 일부만 고개를 내민 돌의 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금세 뿌리를 캐리라 생각했던 나는 그러나 굉장히 저항하는 돌의 뿌리에 구슬땀을 흘렸다. 마침내 캐고 보니 돌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간신히 들 수 있는 무게였었다.
"가져가겠냐?"
“그러지 뭐."
"공연히 욕심 부리지는 마라. 들은 생각보다 무거워.
"그래두 왔던 본전을 빼야 할 게 아니냐."
"그렇담 포기하고 딴 것을 찾기로 하자. 이건 너무 무거워 뵌다."
"가지고 가겠어."
나는 고집을 부렸다. 배낭 속에 돌을 집어넣자 그 돌 하나로 배낭은 가득 차 올랐다. 우리는 해가 기우는 냇가를 떠났다. 제천까지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으면서 나는 호기를 부렸던 만용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돌은 무겁고 둔중했다.
등에 멘 돌이 걸을수록 무게를 더해 갔다.
내가 필요로 하는 극히 일부분의 돌을 위해 뿌리째 한 덩어리의 돌을 메고 가야 한다는 자신의 어리석음이 곧 한숨을 불러일으켰다. 제천까지 용케 메고 왔던 들을 나는 선술집 입구 화단에 팽개치고 떠나왔다.
"봐라. 욕심 부리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친구녀석은 별로 심한 꾸중을 하지 않으며 자신이 채취한 청개구리상의 돌을 대신 내 배낭 속에 넣어 주었다.
"넌 아직 멀었다. 돌을 수집하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먹지 알았다. 원칙으로 말한다면 네가 메고 온 돌을 여기에 버려서는 안 된다. 정 버리고 싶다면 물 속에 넣어 줘야 판다. 마치 초파일날 물고기를 사서 냇가에 방생(放生)해 주듯 돌이라도 제 자리를 찾아 주는 게 예의다. 아예 자신 없는 돌은 그래서 우리들은 가져오지도 않는다. "
사르비아 깨꽃이 가득 피어난 선술집 꽃밭 사이에 돌을 내려놓고 나는 소주병 속에 남은 술을 퍼부었다.
"웬수놈의 돌멩이야 잘 있거라. 우라질."
마찬가지였다.
별 심각한 의무감도 느끼지 못한 채 최 노인을 덥썩 맡아 데리고 나오는 내 자신의 꼬락서니는 마치 무거운 돌을 메고 냇가를 떠나오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었다.
나는 바보다. 택시 속에서 나는 참담한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물 속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돌의 형태와 아주 닮아 있었다. 그렇다. 노인은 돌 그 자체였다. 저 노인이 한때 가졌던 새파란 젊음과 끓어오르는 피는 싸늘히 식어 비와, 바람,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진 돌의 침묵을 닳고 있었다.
사람 역시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자연을 닳아 가며 식물(植物)을 닳아 가다가 마침내는 무생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나는 고궁에서 돌 하나를 채취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아주 무겁고 전혀 쓸모 없는 돌덩어리 하나를. 친구 말대로라면 나는 아예 그 돌을 들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린 것이다.
그렇다고 제천 선술집 꽃밭에 돌을 버렸듯이 노인을 아무 데나 버리고 떠나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택시는 내가 사는 아파트 광장에 멎었다. 나는 노인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노인은 충실히 사육된 짐승처럼 내 뒤를 꾸준히 따라오고 있었다.
2
분명히 외출할 때는 닫고 간 아파트 창문이 열려 있었고 불까지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가 내가 없는 새 들어와 방안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경희는 열쇠를 또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불쑥 이 노인을 데리고 돌아온다면 경희는 어떤 표정을 보일 것인가. 어쩌면 징그러운 털 많은 짐승을 보았을 때처럼 호들갑을 떨며 비명을 지를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노인은 말 업이 따라왔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멎더니 한 여인이 올라탔다, 여인은 손에 정구채를 들고 있었다. 자주 엘리베이터 속에서 만나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흥미 있다는 듯 나와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여인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 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소리가 났다.
"문은 열려 있어요. 들어오세요."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노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나는 마치 잘못 찾아온 손님에게 말하듯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백치처럼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어딜 갔다 오시는 거예요. 벌써 한참 되었어요. 밥도 해 놨다구요."
얼굴을 내다 밀지 않고 경희는 부엌에서 소리질렀다.
"나와 봐."
나는 퉁퉁 부은 발에서 신발을 빼내며 소리질렀다.
"손님이 왔어."
"손님이요?"
"그래. 나와 봐."
경희는 부엌에서 나타났다. 빈 욕실에서 목욕까지 했는지 머리를 길게 틀어 올리고 있었다.
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있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을 보자 경희는 멈칫거렸다.
"인사 드려. 시골 큰아버지야. 방금 서울역에서 모시고 오는 길이야."
나는 경희를 놀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경희와 나는 결혼할 계획이고 언젠가 한번은 시골에 계신 친척들과 어머니를 만나 뵙고 인사 드려야만 진짜 아내 후보 감이 될 수 있다고 경희는 믿고 있었다. 경희는 평소 내 행동으로 보아 내가 자기를 심심풀이 말 상대로나 아니면 단순허 욕정을 채우기 위한 도구 정도로만 취급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경희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당신은 어째서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는 건가요."
"식이 무슨 소용이야. 우린 어차피 부부인데."
“그래두 안 그래요. 난 떳떳이 아기를 가지고 싶단 말이에요."
지난 겨울 경희는 아기를 지웠다.
"나 애기를 가졌어요."
아주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경희는 침대 속에서 그렇게 고백을 했었다.
"어떻게 하죠."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침묵을 지키며 어떤 분명한 결론이라도 내려 주기를 바랐던 경희는 자기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을까요, 아니면,,,, "
"아니면."
"시치미 떼지 마세요. 아니면 지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지우지 뭐."
잠시 긴 침묵이 왔다. 자존심이 강한 경희는 입술을 깨물며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그 등이 쿨럭이고 있었다.
"당신은 무책임한 사람이에요. 난 노리개 감이 아니에요."
"누가 경희를 노리개 감이라고 했나,"
"나 애기를 낳고 싶어요. 내년이면 스물 여덟이 돼요. 이제 이 생활도 지긋지긋해요. 눈만 뜨면 환자의 신음 소리. 주사 놓는 일. 피 묻은 상처. 소독가제로 닦아주는 일. 밤 당번. 이젠 정말 지겨워요."
나는 밤새도록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아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숨이 막힌다, 다음날 경희는 혼자 뱃속의 아기를 지웠다.
경희가 내가 데리고 온 노인네를 친척이라고 소개하자 당황했던 것은 그녀의 평소 마음가짐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공연히 노인네를 데리고 이곳까지 온 짜증스런 부담감을 경희에게 어느 정도 떠맡기고 싶었다, 그녀를 놀리는 것으로써.
경희는 찬찬히 고무장갑을 벗었다.
"아, 안녕하세요. "
경희는 노인네에게 큰절을 했다.
"큰아버지."
나는 일부러 노인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인사 받으세요. 큰아버지. 내 처 될 사람입니다."
"고, 고맙습니다."
꾸벅 인사를 받으며 노인이 상냥하게 손을 모았다.
"나는 오, 오줌이 마렵습니다. 변소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약간 어리등절해 있는 경회를 보며 명령을 했다.
"이봐 경희. 큰아버지가 오줌이 마려우시대. 변소 좀 안내해 드려."
무어라고 한 마디 하려는 듯 입을 종긋거리다가 그러나 곧 얌전해져서 경희는 달려가 노인을 부축했다. 경희는 노인을 부축하고 변소로 다가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옷을 벗었다. 러닝샤쓰까지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TV의 스위치를 올렸다. TV에서는 쇼를 하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훈훈하고 감미로운 초봄의 봄바람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변소에 안내하고 돌아온 경희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그러나 목소리를 죽여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내버려둬."
나는 킬킬대며 웃었다. 도저히 웃음이 홍수처럼 터져 나와서 견딜 수 없었다.
"웃지 마세요, 들려요. 그리구 옷 입으세요. 어쩌려구 이러는 거예요."
"괜찮아. 상관없어."
나는 대답했다.
"우리하구 상관없는 노인네야. 거리에서 줏어 왔다구. 줏어 온 노인네라구."
"뭐라구요?"
"미안해, 속여서. 약간 돌아 버린 노인네야. 노망 들렸나 봐. 허지만 뭐 어때, 아주 얌전한 노인네야, 사람이라기보다는 식물에 가까워. 나두 어떤 노인인지 몰라."
"나를, 나를,,,,,,"
갑자기 경희가 눈을 부라렸다.
"놀리셨군요."
날카로운 손톱이 내 벗은 어깨를 힘차게 쥐어뜯었다. 나는 비명 소리를 질렀다, 아픔은 곧 근질근질한 쾌감이 돼서 나를 즐겁게 했다. 나는 거품을 홀리듯 웃었다.
"속았다구. 경희가 감쪽같이 속았어,"
"나빠요. 사기꾼. 거짓말장이. 강도. 엉터리 사기꾼."
경희는 소파에 놓였던 방석을 들어 내게 던졌다. 나는 소리쳤다.
"항보옥. 항보옥."
나는 대충 오늘 고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경희는 별로 즐거워하지 않는 눈치로 내 말을 끝까지 들었다.
"어쩌자구."
다 듣고 나자 경희는 긴 한숨을 쉬었다.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어쩔 거예요."
"글쎄, 나두 잘 모르겠어. 내가 도대체 왜 데려왔는지 모르겠어. 밥 한 끼만 먹이고 보내지 뭐. 배가 고프대, 밥 좀 달래."
"밥을 주고 나서 그럼 어디로 보내죠."
"글쎄."
나는 생각했다. 참으로 막막한 느낌이었다. 그래 밥은 먹인다고 치자 밥을 먹이고 나서 어쩔 것인가.
"노인네 집으로 보내지 뭐."
"집은 알아요?"
"몰라. 물어보면 되겠지."
"이봐요. 저 노인은 노망이 들렸어요. 아무 것도 몰라요. 당신은 몰라요. 우린 노인네들을 자주 다뤄 봐서 안다구요. 노망은 정신질환 중의 하나예요. 뇌 세포가 파괴돼서 살아 있는 송장과 다름없는 거예요. 저 노인은 눈만 떴을 뿐 송장이라구요."
"어쩌면 기억이 살아날지도 모르잖아."
"그럴 수는 없어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럼 버리면 될 게 아냐."
"어디다요."
"쓰레기통에 버리지 뭐,
나는 웃었다.
"새벽녘에 쓰레기 인부들이 수거해서 트럭에 싣고 교외 변두리 쓰레기 매립장에 버릴 거야, 그럼 잘 됐지. 무덤으로 직행하는 거니까 말야. 쓰레기 무덤."
"남의 말하듯 하진 마세요."
"잠깐. 그건 그렇구. 왜 이렇게 조용해."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깜박 정신이 들었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노인은 변소에 틀어박혀 인기척이 없었다.
"어떵게 된 거 아냐."
나는 일어서서 달려가 욕실 문을 열었다. 노인은 욕실 타일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고 몸짓이 심상치가 않았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경희가 그저 변소 문 앞에까지만 안내해 주고 돌아왔기 때문에 옷 입은 채 용변을 본 모양이었다. 고궁에서 노인이 오줌이 마렵다고 했을 때, 나는 노인의 허리끈을 풀어 줬잖은가. 내 예상은 적중하였다. 노인을 일으켜 세우자 역겨운 냄새가 확 코를 찔렀다.
"젠장, 우라질 노친네같으니라구."
나는 되는 대로 소리질렀다.
"이봐 경희, 이 영감태기가 똥을 쌌어. 오줌도 쌌구."
"미 미안합니다."
노인은 불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금붕어의 물을 갈아 줘야 합니다."
"금붕어?"
나는 무슨 말인지 실감이 오지 않아서 노인네가 가리키는 손끝을 보았다. 노인은 경희가 목욕하다. 남긴 욕조 안의 반쯤 찬 미지근한 물을 가리켰다.
"금붕어가 어디 있는데."
"여기 있습니다."
노인은 물 속을 가리켰다.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금붕어들이 죽어 버립니다."
"우라질."
나는 혹시 노인 말대로 욕조 속에 황어 새끼 한 마리가 들어 있지 않나 들여다보았다. 긴 머리칼 두어 개가 물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좀 해 줘, 경희."
"몰라요."
고소하다는 듯 경희가 욕탕 안에 서서 시치미를 메고 있었다.
"아휴 이 냄새. 똥두 싸구 오줌도 쌌다구. 이걸 어떻게 좀 해 줘. 옷 좀 벗겨 봐,"
"난 몰라요. 큰아버지라면서요."
"농담할 때가 아냐. 경흰 이런 일 많이 했을 거 아냐. 와서 옷 좀 벗기고. 몸도 좀 씻겨 줘야겠어, 제발 보구만 있지 말어."
"백살 먹은 할아버지라두 남자는 남자예요. 외간 남자 벗은 몸을 내가 뭣 때문에 씻겨 드려요. 내 할아범도 아닌데."
"미 미안합니다. 금붕어가."
"입 닥쳐 영감태기야."
나는 소리를 빽 질렀다.
"이발을 뽑아 버리기 전에 주둥이나 좀 놀리지 마."
나는 분이 치밀어 올랐다. 노인의 몸에 묻은 오물이 내 손끝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말 조심하세요."
보다 못해 경희가 끼어 들었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라두 아직 사람이에요. 당신두 얼마 안 가 이렇게 된다구요."
"걱정 마. 이렇게 되기 전에 죽어 버리면 돼,"
아무래도 간호원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경희는 나보다 훨씬 나았다. 목숨을 다루는 시급한 경우에도 침착해야 하는 훈련에 익숙해 있는 경희로서 똥 오줌 정도야 눈 깜짝하지 않아도 좋을 사태였다.
"똥은 당신도 싸요."
"나는 싸지만 남의 신세는 안 져."
경희는 노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 얘기구 당신도 어렸을 때는 기저귀 찼을 거예요. 당신도 언젠가는 이렇게 돼요."
나는 우울하게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씻고 또 씻어, 내렸다. 아무리 씻어 내려도 불쾌감은 씻어지지 않았다,
경희는 침착하게 노인의 옷을 모조리 벗겨 버렸다. 백의의 천사로군.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옷을 벗기자 관목처럼 마른 앙상한 피부가 드러났다. 몸은 한때의 싱싱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삭아 버린 재에 불과하였다. 뼈마디가 아른아른 드러났다. 마치 생물실에 걸린 플래스틱으로 만든 모조 인체 골격 표본 같았다. 그저 한때 당당하고 굵은 체격을 가졌었다는 흔적이 겨우 보일 뿐 고분 발굴 현장에서 흙더미를 헤치고 발견한 돌 촉의 파편 같은 뼈마디들이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피부는 뼈 위에 비틀리며 발라져 있었다. 바지를 벗기자 노인의 성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가늘고 메마른 두 다리 사이에 성기는 오그라져 매달려 있었다. 전성기 때의 그 생식기관 속에 넘쳐흐르던 청춘과 힘, 활력, 여인을 괴롭히던 무분별한 욕정, 심신의 날을 갉는 쾌감, 그 모든 것을 상실하고 성기는 간신히 그곳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시들어 바진 마른 낙엽가지처럼 보였다. 음모는 송두리째 빠져 있었다.
"뭘 봐요."
신경질을 부리며 경희가 소리쳤다.
"나가요. 서 있지 말고."
"구경 좀 하구. 참 한심하군. 기껏 저 정돈가. 저렇게 형편없이 쭈그러지나. 비참하군."
"남의 일처럼 얘기하지 마세요. 잘난 체하지 말아요."
"발기시켜 봐,"
나는 진지하게 경희를 보았다
"발기가 되면 경희가 하룻밤 자선사업 좀 해 줘. 그게 바로 충효(忠孝)라는 거야."
잠자코 경희가 슬쩍 그 성기를 건드려 보았다. 노인은 중얼거렸다.
"금붕어가 죽습니다. 물을 갈아 줘야 삽니다. "
"무슨 소리에요."
"금붕어 가 죽는대."
"금붕어가 어디 있는데?"
"성기를 말하나 봐. 성기가 죽으니까 물을 갈아 줘야 한다는군. 프로이드가 따로 있나, 뭐."
"잔소리 말구 욕조의 물 좀 빼구 더운 물 좀 받아줘요."
나는 시키는 대로 욕조의 마개를 뺐다. 더러운 물이 입맛을 다시며 빠져 달아났다. 나는 더운 물을 받았다.
"이젠 나가세요. 목욕시키는 동안 식탁에 식사 준비를 해 놓으세요. 내가 준비를 다 해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배가 고프다는 노인인데 목욕을 하고 나면 허기져 죽을지도 몰라요."
"젠장, 알겠다구. "
나는 욕실을 나섰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은 채 켜 둔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따라서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식탁에 식사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식사는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저 그릇에 퍼담아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면 그만이었다.
욕실 쪽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자장.
꽃같이 어여쁜 우리 아가야
귀여운 너 잠잘 적에
하느적 하느적 나비 춤춘다.
나는 잠자코 그 노래 소리를 들었다.
열린 창문에서 스산한 바람이 몇 점 들어와 신문지를 날리우고 커튼을 들쳐 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했다. 그 고즈녁한 밤의 적막을 뚫고 경희의 노래 소리가 가늘게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한때 지운. 낳지도 못한 아기를 잠재우려는 자장가 소리처럼 들려 왔다. 나는 숨을 죽였다. 몇 살쯤 되었을까. 거진 백 살에 가까운 노인의 몸을 씻으면서 경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노인네를 낳지도 못하고 지워 버린 아기로 착
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새들도 아가양도 다들 자는데
달빛은 영창으로 은구슬 금 구슬을
보내는 이 밤
잘 자라 우리 아가,
나는 뜨거운 침을 삼켰다. 발소리를 죽이며 욕탕으로 다가가 보았다. 열린 문 안에서 경희는 노인에게 몸을 씻어 주고 있었다.
수증기가 뽀얗게 욕탕을 채우고 있었다.
더운 물 속에 노인을 풍덩 집어넣고서 경희는 부드럽게 노인의 몸을 구석구석 씻어 내리고 비누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벌써 머리까지 감기웠는지 잘 빗긴 횐 머리는 경희의 머리핀이 가리마를 타 꽂혀져 있었고, 해수욕장에서 사용하는 고무 튜우브에 바람을 넣어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는 순간 노인네가 오줌, 똥만 함부로 싸지 않는다면 며칠쯤 같이 있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기묘한 목욕 행위를 지켜보았다
나는 저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장면을 찍는다면 아주 근사한 장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발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아름다운 목욕 행위를.
목욕이 끝날 때까지 나는 소과에 앉아 텔레비젼을 보았다. 텔레비젼에서는 쇼 프로가 끝나고 수사물이 계속 방영되고.
때르릉 때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상대편이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여보세요. 아파트죠."
또 그 여자다. 나는 생각했다.
"거기 김 영근씨 계신가요."
"안 계십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화를 나타내지 않으려고 참으며 대답했다. 이 여인은 이 아파트로 이사 와서 반 년 동안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는 여인이었다. 이제는 목소리가 낯이 익어 수화기만 들어도 누군지 분간이 될 정도였다.
"어디 나가셨나요?"
"이 보세요. 몇 번이나 얘기하면 알아들으시겠어요. 우린 이 아파트에 새로 이사 왔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계발 전화 좀 걸지 마세요."
나는 수화기를 털썩 놓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여인일까. 매일마다 되풀이되는 이 문답을 여인은 전화를 끊는 순간에 벌써 잊어버리는 것인가.
저 여인은 처음 이사 왔을 때부터 전화를 걸어온 여인이었다. 빈 방에서 때르릉 때르릉 저 혼자 벨이 울고 있었다. 받고 보니 저 여인이었다. 내가 사는 방은 오래 전부터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턱 빈 방에서 전화벨이 혼자 울었을 것이다.
집 주인은 따로 있었고, 그는 세를 놓고 다달이 돈을 받는 사람이었다.
"전화는 있으니까요."
남보다 최소한 이십만 원을 더 받아야 되겠다는 집 주인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전화였다.
이삿짐을 가져오자 아파트는 텅 비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비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방금 떠나간 훈기마저 없었다. 그저 냉랭했다. 깨끗이 청소한 방들은 가구도 벽걸이도 일체 없이 그저 횐 벽뿐이었다. 욕탕엔 쓰다 남은 칫솔 두 개만 덩그라니 내팽개쳐져 있었다. 커튼도 없었으므로 햇볕은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방이라기보다는 채양 밝은 온실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빈 방에서 간단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물론 받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내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 그 말은 틀렸다. 나는 처음부터 그 방의 전화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 주인에게 전화가 있다는 말은 들었었는데도 그만 전화 번호 묻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더 많은 집세를 지불했었으면서도. 그러니 그 전화가 나를 찾는 전화가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처음엔 그저 내버려두면 울릴 만큼 전화벨이 울리다 제풀에 끊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전화벨은 계속 오랫동안 울었다.
귀를 틀어막아도 전화벨 소리는 들려와 신경전을 벌이더라도 피곤해진 내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을 만큼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받으면 안 돼,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전화를 받으면 발각된다. 버들은 계속 이 방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과연 빈 방인가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전화를 받으면 방에 누군가 침입하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곧이어 누군가 방을 두드릴 것이다.
문을 열면 문 밖엔 한 떼의 사람들이 서 있을 것이다.
"체포하러 왔소."
그들은 번쩍이는 수갑을 내밀 것이다.
"갑시다."
나는 눈을 가리울 것이다. 캄캄한 안대로 눈을 가린 경주용 말처럼.
마침내 나는 수용소에 갇힐 것이다.
그리하여 내 살은 각을 떠서 비늘로 변해 버리겠지.
참다 못해 전화를 받으니 기다렸다는 듯 숨가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었다.
"어머 계셨군요. 잘 됐어요. 좀 와 주세요. 이리로 와 주세요. 안 오시면 전 죽을지 몰라요. 부탁이에요."
그 여인의 전화는 그로부터 반 년간 매일처럼 걸려 오고 있었다,
매번 당신이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찾는 김 영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새로 이사 온 사람입니다.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어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절박한 여인의 숨가쁜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여인의 안 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협박이 사실이라면 벌써 죽었어도 수십 번 고쳐 죽었어야 옳았다.
"또 그 여인이로군요."
수화기를 쾅 내려놓자 욕실에서 경희가 나타났다. 노인을 앞세우고. 노인은 내 침실용 가운을 의젓하게 걸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누구 맘대로 그 옷을 입혔어."
"고럼 어떻게 해요. 옷이 없는데요. 이 사람 옷은 빨았어요. 하루 있어야 마르니 참아 주세요."
"젠장. 그러다가 또 똥을 싸면 어떡하구."
"그러진 않을 거예요. 봐요. 예쁘죠."
경희는 자랑스럽게 노인의 몸을 가리켰다. 나는 멍하니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희극배우 같아 보였다. 물론 헹군 머리칼은 얌전히 꽂혀 있었다.
"어때요. 예쁘죠."
"예쁘긴, 삶은 호박 같아."
"미, 미안합니다."
노인은 기분 좋게 나를 보고 웃었다.
"비마 오면 지붕이 샙니다."
"뭐라는 거야."
"비가 오면 지붕이 샌대요."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당신은 몰라요. 이만큼 얌전한 노인도 드물다구요. 미쳐도 이처럼 얌전히 미친 노인은 아주 양반이라구요. 우리 병원에 한 노인네가 와 있는데요. 동리 어린아이를 괴롭히다 붙잡혀 왔었어요. 여섯 살 난 아이를 글쎄 손가락으로,,,,,"
"시끄러워,"
나는 일어섰다.
"밥이나 먹자, 이거 배고파 살 수 있어야지."
"배가 고픕니다. 밥을 주세요."
"영감태기. 밥 달라는 말만은 멀쩡한 정신으로 하는군."
"앉으세요. 아이 착하지."
"고, 고맙습니다."
노인은 가만히 의자에 앉았다.
"봐요, 얼마나 착한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요."
"그럼 베란다에서 떨어져 보라구 해."
"아서요. 퉁명스럽기는."
경희는 내프킨을 노인의 턱에 둘러 주었다. 노인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놀라운 속도였다, 저처럼 양순하고 저처럼 무기력하던 노인네의 어디에서 저런 탐욕스런 식욕이 불붙고 있는 것일까.
구멍 같은 입에 몇 개 낚아 있지 않은 이발로 밥을 퍼먹고는 별반 씹지도 않고 물처럼 들이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우울하게 이 식물인간이 행하는 저작 행위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렇다. 먹는 것은 얼마나 추한 인간의 본능인가.
"천천히 먹으라고 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노인은 밥을 입가에 흥건히 흘려 묻히고는 내 고함 소리에 놀란 듯 눈을 멀뚱히 뜨고 나를 보았다. 어쩌면 자기의 이 즐거운 기쁨을 강하게 제지하려는 동물적인 불길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노인은 갑자기 풀이 죽어 내 눈치를 보면서 급히 밥을 삼켰다. 목젖이 꿈틀거렸다.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면서 행여 이 무서운 사내가 자기의 밥그릇을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동물적인 공포로 개처럼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맥이 풀렸다.
"천천히 먹으라구 해. 체할지도 모르잖아."
"체하진 않아요. "
경희는 모른 척 생선의 살을 발라 내고 가시를 골라 내서 노인의 밥숟갈 위에 가만 띄어 올렸다.
"노인들이 체하는 건 드물어요. 아이 착하지. 먹어요. 아, 아, 하고."
노인은 그제서야 용기를 되찾았다. 적어도 자기편이 하나 있다는 안도감을 되찾아 노인은 코를 처박고 먹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에 한 그릇이 비어졌다. 몇 개 남아 있는 밥알을 노인은 숟갈 소리를 내면서 긁어먹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묻은 밥알을 손가락으로 떼내어 우물우물 입가로 가져가 삼켜 버렸다.
"밥을 더 주세요."
노인은 아이처럼 칭얼댔다.
"배가 많이 고픕니다."
잠자코 경희는 밥그릇을 들고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가서 가득 담아 가지고 왔다.
노인은 또 다시 코를 박고 밥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종일토록 굶은 모양이에요. 가엾어라. 당신은 가엾지 않으세요."
나는 이미 입맛을 잃고 있었다. 대충 배를 채우고 소파에 옮겨 앉아 가만히 노인의 무자비한 탐욕을 지켜보았다,
저 모습이 내 미래의 투영도일까? 나는 참담했다.
인간은 나서 강보에 싸여 젖을 먹고 키워지면 어느 날 디뚱디뚱 걷게 된다. 연한 잇몸에 이발도 돋아나고 닥치는 대로 깨물려고 덤빈다, 어른의 입을 유심히 봐 두었다 흉내내서 아주 간단한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엄마.
아빠, 맘마. 어느 날엔 빠르게 걸으며 뛰고 할퀴고 욕심을 부리는 본능도 깨우치게 되며 학교에 들어가 구구단을 외게 된다. 마침내는 온몸에 발모가 시작되어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렇다. 야심이 팽배하기 시작한다. 남을 디디고 밟지 않으면 자신이 쓰러진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송곳니가 발달되기 시작한다. 보다 큰 부(富) 보다 큰 야망, 보다 큰 명예, 보다 큰 숫놈으로서의 정욕, 보다 안락한 생활에의 야망, 고런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리고는 애를 낳고 서서히 늙어 간다. 이빨이 빠지고 머리가 세기 시작한다. 눈이 안 보이며 귀가 어두워진다. 간혹 터무니없이 죽어 버린다. 차에 치기도 하고 심장마비로. 흑은 불치의 암으로 죽어 간다. 그리고는 점점 갓 태어난 아기로 되돌아간다, 점점 식물이 되어 간다.
마치 무비카메라를 거꾸로 돌려보면 필름 속에서 쓰러졌던 사람이 일어서고 깨어진 유리창이 되돌아서 말짱해지듯이 인간은 어느 정점에서 점점 아이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저 것인가.
나는 우울하게 노인의 탐욕스런 저작 행위를 보며 생각했다.
저처럼 속되고 더러운 동물의 본능 세계가 내가 꿈꾸는 미래의 안락한 복지 생활이란 말인가.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낙관하고 있었다. 감상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겐 은퇴한 노인으로서, 회상하는 추억마다 깃들인 아름다운 회색의 그림자를 간직하면서 적당히 늙어 가고 적당히 축
을 자신만큼은 있었다. 적어도 남에게 신세지지 않으며, 적어도 남에게 부축 받지 않으며 늙어 갈 자신이 있었다.
그런 욕망 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수레바퀴처럼 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벌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모으고, 열심히 저축하는 그 이유는 말하자면 최소한의 행복을 움켜쥐기 위한 노동이 아닌가.
한 시간이라도 더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욕망이 고작 저것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분명한 느낌을 받았다.
저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분명히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안락사(安樂死)일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하는 것일까로 의견을 다투고 있었다. 심장의 박동의 정지로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 당연한가, 아니면 신체의 경직으로 죽음을 선고할 것인가, 아니면 뇌파의 정지로 죽었음을 선고할 것인가, 의견이 불분명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한데 모여 결론을 내렸었다.
오직 뇌파의 작동이 정지되었을 때만이 죽었다는 증거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이 어찌 뇌파의 정지뿐이겠는가. 심장이 멎었으면 그는 이미 둑은 것이며, 비단 저처럼 살기 위해 밥을 먹고 똥을 싸고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이미 죽어 있는 시체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인간이 인정을 가진 동물이라면 의견을 대립함이 엄이 주사바늘을 들어야 할 것이다. 저 노인에게 인슐린 주사를 놔 주어서 거추장스럽기만 한 "외출한 영혼"에 종지부를 쪘어 주어야 할 것이다.
노쇠한 동물을 위해 우리는 총을 들어 발사한다. 마찬가지로 저 노인에게 살아 있는 우리가 최대한 베풀어 줄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은 죽음을 맞게 하는 일뿐이다.
죽여라.
저 노인에게 행복한 죽음을 맞게 하라.
“뭘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식사를 끝내자 경희는 노인을 소파에 앉히고 TV화면을 노인에게 잘 보이도록 방향을 바꿔 준 뒤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모르겠어. "
나는 경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자 이젠 저 영감을 어떻게 한다."
"담배 한 대 주세요."
경희는 내 입에 물린 담배를 빼서 자기 입에 물었다.
"최선의 방법은 말야, 경희가 말야, 병원에서 주사기에다 인슐린을 한가득 넣어 가지고 말야, 잠든 새에 죽여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아.”
"겨우 생각한다는 게 고작 그것이었나요. "
"음."
나는 신음했다.
"이제 보니 아주 잔인한 사람이군요. 당신은 머릿속으로 살인할 걸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니."
"살인. 저 노인을 죽이는 것도 살인인가. 시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주는 게 당연한데두."
"대학 다닐 때요, 한때 양로원에 나가서 실습한 적이 있었어요.”
경희는 눈을 지그시 내리 감고 내 어깨 위에 머리를 기개 왔다.
"간호원들은 누구나 자기 환자를 예쁘게 꾸미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들 머리에 리봉을 매단다, 입술에 루즈를 칠한다, 야단했었는데 노인 둘이서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었더란 말이에요. 원래 노인들은, 특히 여자 노파들은 어느 정도 동성애로 빠지기 쉬운데요, 이상하다 싶어 귀를 기울여 보니 통 이가 맞지 않는 대화를 하루 종일 나누고 있더군요. 한 노파가 그래서 말이유, 우리 큰애가 말이유, 하고 말을 하면 다른 노파는 우리 영감이 살아 있을 땐데 말이유, 하고 영 동문서답하는 거예요. 그래도 하루 종일 서로 말을 하고 있었어요."
"소위 대화의 단절이로군. "
"그러다 한 노인이 죽었는데 말이에요. 그 다음날에도 노인은 나와 앉아서 빈 툇마루에 그 노인이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구요. 그래서 말이유, 우리 큰애가 말에유, 하면서 말이에요."
"자, 그러니 저 노인을 어떻게 한다?"
"하룻밤을 재워요. 그리구 나서 생각해 봐요."
"값싼 동정은 하지 마."
"애초부터 값싼 동정으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사람은 누군데요."
"그야 물론 나긴 하지,"
차는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허기야 어쩌자구 저렇게 노인을 버릴 수가 있을까?"
"버리긴요. 아마 길을 잃은 노인네일 거예요. 잘 하면 두둑히 사례를 받을지도 몰라요. 신문에두 모범 시민으로 기사가 날지도 모르구요."
"징그러운 소리 말어."
나는 눈을 흘겼다,
"고궁 관리인이 분명 버려진 사람이라는 거야. 그런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는 거야."
"아이들은 많이 있지만 노인을 뭣 땜에 버려요. 보아 하니 천한 노인도 아닌 것 같은데."
"신판 고려장이지 뭐. 그런 사정이 있었을 거야. 재혼하려는 여인이 사별한 남편의 아버지인 시아버지를 마지못해 모시고 있다 막상 결혼하게 되니까 마지막으로 좋은 옷 입혀서 아버님, 우리 창경원이나 갈까요 하고 나와 잔디밭 위에 앉혀 놓고 뺑소니쳐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상상력이 풍부하신 편이에요, 당신은. "
"그렇담 도대체 왜 창경원에 앉아 있는 거야. 길을 잃었담 길거리에 서 있거나 옷도 평상복이어야 맞을 텐데."
"노망은 어느 날 갑자기 와요. 충격을 받으면 갑자기 돌아 버린다구요. "
"어쨌든, 저 작자를 어떻게 한다."
"모시고 살까요. 당신같이 막되어먹은 사람은 미래의 거울 하나쯤 갖고 사는 것도 괜찮아."
"이봐. 저러다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곡(哭)하면 되죠, 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갑자기 경희가 큰 소리로 청승맞게 곡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봐 이거 왜 이래. 재수 나르게."
나는 벌떡 몸을 세웠다.
"가만있어 봐. 아주 미쳐 버린 영감은 아닌 것 같아. 아까 고궁에서두 이름이 뭐냐구 물으니까 최 순돌이라고 대답하더군. 그러니 몇 마디 물어보면 의외로 집 주소를 기억해 낼지도 몰라. 그런 경우도 있지 않을까."
"있긴 있어요. 노망 들린 노인네두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또릿또릿 기억하고 있다구요."
"그럼 물어봐. 어쩌다 사는 동네라두 알아두면 최소한 편리할 게 아냐. 정 안 되면 경찰서에 넘겨줘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텔레비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경희가 노인을 불렀다,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노인은 우리를 보았다
"할아버지 이름이 뭐예요."
"최 순돌입니다,"
"몇 살이지오."
경희는 마치 노래자랑에 나온 아동을 상대로 한 아나운서처럼 상냥하게 물었다.
"열, 열두 살입니다."
까르르 경희가 웃었다.
"열두 살이래요. 이 할아버지 아주 귀여운 데가 있어."
경희가 웃자 노인도 따라 웃었다. 자기가 누구를 웃겼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는 듯 벙글벙글 웃었다. 그 웃음엔 나한테는 보여 주지 않던 친절하고 재롱스런 데가 있었다. 노인은 경희를 신뢰하고 있다. 마치 강아지도 자기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 본능적인 애정을 느끼듯.
"할아버지 집이 어디에요."
"열, 열두 살입니다."
한 번 웃음을 보인 경희에게 자신감을 느꼈는지 똑같은 대답을 하고 나서 노인은 분명 경희가 웃으리라 기대하고 자신이 먼저 웃었다.
"열두 살입니다."
노인은 벙글벙글 웃었다.
"오늘 말이에요. 할아버지 창경원에 갔었지요."
"열두 살입니다."
"이봐. "
나는 소리를 질렀다. 화가 나서가 아니까 어느 정도 노인에게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부러 얼굴을 무섭게 찡그렸다.
"할아범. 오늘 창경원에 갔었지. 누구하고 갔었어?"
"미, 미안합니다."
갑자기 꼬리를 감추는 강아지처럼 노인은 눈을 휘둘렀다. 그는 나를 무서워했다.
"나는 배가 고픕니다. 밥을 좀 주세요.
"이런 젠장. 얘기가 통해야 말이지.”
"가만있어 봐요."
경희가 가만히 노인 쪽으로 다가갔다. 경희는 노인의 손을 살그머니 쥐었다. 그리고 어린애 잠재우듯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할아버지. 지금 몇 살이지요."
"열. 열두 살입니다."
그러나 노인은 한 번 혼이 났으므로 웃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내 눈치를 살폈다.
경회가 일부러 웃었다. 그러나 공허한 느낌이었다.
"누구하고 창경원에 갔었지요. "
"원숭이하구 갔습니다,"
"아주 돈 노인은 아니에요."
경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창경원에서 원숭이를 연상해 냈잖아요. 가만있어 보세요."
경희는 노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할머니는 어디 있어요."
"할머니는 죽었습니다."
노인은 또릿또릿 대답했다.
"내일 모레 죽었습니다. "
"술 하세요 할아버지. 술 마실 줄 아세요."
"할머니는 죽었습니다,"
"당신 술 좀 가져오세요."
경희는 나를 보았다. 나는 냉장고 위에서 위스키를 두 잔 따라 왔다. 한 잔은 경희를 주었다.
"술 마시게 해도 괜찮을까."
"오히려 좋아요. 너무 긴장하고 있어요. 그건 당신 때문이에요. 여보 불좀 끄세요. "
나는 스위치를 내렸다. 스탠드의 불만 꺼졌으므로 실내는 은은하게 밝아졌다.
"마셔 봐요, 할아버지."
경희는 노인의 입가에 술잔을 가져갔다,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무서운 게 아니에요. 자 먹어 보세요."
노인은 한 모금 술을 마셨다. 그리고 잊어버렸던 감미로운 술맛의 향기를 기억해 낸 것일까? 연거푸 술을 마셔 잔을 비웠다.
"할머니는 어디 있나요? 할아버지."
노인은 딸꾹질을 했다. 이내 취기가 달아올랐는지 노인은 몸을 소파에 기대었다. 갓 목욕한 뒤였으므로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할머니는 죽었습니다."
"언제요."
"내일 모레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디 살지요."
경희는 교묘하게 유도해 나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땅 속에 삽니다."
"아니 땅 속에 말구요. 그 전엔 어디 살았었는데요."
"내일 모레 죽었어요."
"고향이 어디에요, 할아버지."
"물 마시면 됩니다."
"애들은 몇 낳았어요."
"허리가 아픕니다."
"하나 둘 셀 줄 아세요."
"알고 있습니다."
금방 술기운이 올랐는지 노인은 한결 기분이 좋아져 많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그럼 세어 보세요. 하나 둘 세엣 ,,,,,,"
겅희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고 있었다. .
노인도 따라서 손가락을 하나색 세어 보았다.
"하나, 두울, 세엣, 네엣, 다섯, 여섯, 일곱, 아홉, 열."
"일곱 다음엔 여덟이지요. "
"다시 세어 보세요."
"다시 세어 보세요."
갑자기 노인네가 경희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해프닝이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그러나 소리를 질러 이 되어먹지 않은 대화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무언가 처절하고 절실한 비애감이 가슴속에 물처럼 스며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술을 질금질금 마셨다
우리의 대화는 실상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하면 어떻게 해요."
"따라하면 어떻게 해요."
"나 죽겠네, 할아버지 몇 살이죠."
"열두 살입니다."
즐겁게 노인은 크게 대답했다. 경희는 아주 유쾌한 듯 웃었다.
"할아버지 애들은 몇 낳았어요."
"할머니가 낳았습니다."
"그래요, 할머니가 아기를 몇 낳았는데요."
"네 마리."
노인은 손가락을 다섯 개 펴 들었다.
"그건 다섯인데요."
"다섯 마리."
"집이 어디에요, 할아버지."
"창경원입니다."
"창경원."
경희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노인도 손뼉을 따라 쳤다. 경희가 까르르 웃었다. 노인도 히물히물 웃었다.
"집이 어디에요. 생각해 보세요, 할아버지. 이건 중요한 거예요. 할아버지 한번 생각해봐요.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여긴 할아버지 집이 아니에요. 집으로 가야잖아요."
"창녕원입니다."
노인은 손뼉을 쳤다. 할 수 없이 경희도 손뼉을 쳤다. 노인은 히물히물 웃었다. 할 수 없이 경희도 까르르 웃었다.
"할아버지. 집이 어디에요. 할아버지 댁이 어디세요. 이걸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 않으면요. 매일매일 더 잊어버려요. 지금 기억해 내지 않으면 영영 못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구요. 할아버지 생각해 보세요.”
“아아.”
노인은 기지개를 켰다.
그는 행복하게 소파에 머리를 기대었다. 하품을 계속했다. 노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
참다못해 경희가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인은 귀찮다는 듯 눈을 떴다 감으며 아예 돌아누워 버렸다.
"잠들었어."
보다 못해 내가 거들었다.
"차라리 자도록 내버려둬. "
"조금만 조금만 더 물었으면 캐낼 수도 있었는데."
경희가 일어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아,"
나도 기지개를 켰다.
"저 영감을 어디서 재운다."
"침대에서 재워야 해요. 노인들은 저항력이 약해서 한데다 재우면 병에 걸려요. 감기나 도지면 폐렴이 될지도 몰라요.
"그럼 우린 어떡하구."
"소과얘서 자죠 뭐."
"원 젠장. 효부 효자 났구먼."
나는 경희를 껴안았다.
"이상한 휴일이야. 내참 더러워서. 이럴 줄 알았다면 아예 데리고 오지도 않는 건데. 자 하룻밤 재워서 내일은 어떻게 한다?”
"내일은 내일 생각하세요."
"난 내일 일찍 출근해야 돼.”
"난 내일 이브닝 당번이에요. 당신 돌아올 시간에 나갈 수 있어요. 그 동안 저 노인은 내가 돌볼께요."
"아니 내일도 이 집에서 재울 작정이야. 난 못 해. 난 못 하겠어 도루 창경원에 돌려 주든지 경찰서에 보내 버리든지 해야지. 난 못 참겠어 이 집은 양로원이 아냐."
"밥을 지어 놓구 나갈 테니 당신이 밥만 차려 주면 돼요. 일찍 돌아오겠어요. 열한 시 퇴근이지만 눈치 봐서 열 시쯤 돌아올께요. 요샌 내가 고참이 돼놔서 어느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어요."
"자, 그럼 저 노인을 침대로 갖다 뉘든지 베란다에서 밀어 떨어뜨리든지 해야 발 텐데."
"당신이 좀 옮기세요."
"아, 아, 미쳤어. 내가 미쳤어. 경희도 미치구, 우린 둘 다 미쳤어.
"한 사람 더 있어요. 저 할아버지까지 미쳤으니까요."
나는 노인을 안았다. 놀랍게도 가벼웠다. 마치 내부에 가득 바람이 든 풍선을 안은 기분이었다. 노인은 행복하게 잠들어 있었다.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우리는 노인을 침실 침대에 뉘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가만히 잠든 노인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평온하고 너무나 평화롭게 잠들어 있어서 저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다면 애써 달리 어떻게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밤에 오줌 싸면 어떻게 해. 가운은 고사하고 침대가 버릴 텐데."
"내가 밤중에 일어나서 오줌을 한 번 누일께요."
"이러지 마. 정성이 뻗쳤어."
"그럽 기저귀를 채우면 돼요=
"기저귀가 어디 있어."
"가만있어 보세요."
경희가 잠깐 방을 비웠다가 허드레 타월 한 장을 가져왔다. 늘 해 온 작업이었으므로 아주 익숙하게 접어 잠든 노인의 가운을 들쳤다. 그대로 맨몸이 드러났다. 경희는 노인의 가랑이에 타월을 끼웠다. 그리고 단단히 가운을 덮고 그 위에 이불을 씌웠다
"냄새가 나나 봐,"
"노인 냄새예요."
"노인에게서 냄새가 나나. "
"그게 바로 사람 냄새란 거예요."
"아닐 게야."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 냄새가 아니라 실은 어딘가 썩어 가고 있는 부패의 냄샐 거야."
"썩긴, 우리도 썩어 가고 있는데요."
"자 나가지."
"쉬잇."
경희가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내 말을 막았다.
"가만히 봐요."
경희는 조용히 속삭였다.
"예쁘지 않아요. 잠자는 모습이 아주 어린애 같아요."
나는 노인을 보았다. 애써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자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군."
"나가요. "
우리는 발끝으로 걸어 거실로 나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닫았다. 텔레비젼까지 끄자 정적이 다가왔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누웠다. 몸은 그 동안의 노인 치닥거리만으로 솜처럼 피로했다. 그러나 정신은 맑다.
"참 우스워요."
밑도 끝도 없이 경희가 천정을 보며 중얼거렸다.
“뭐가”
"산다는 것이요."
"공연히 수선떨지 말아. 아직 우린 젊어."
"난 스물 여덟이에요. 그런데도 폭삭 늙어 버린 것만 같아요."
"좋아하네, 할망구 같은 소리 하구 있네."
"그 노인은 자기가 열두 살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럼 우린 이미 송장이에요."
"자 가까이 다가와. "
나는 경희의 몸을 껴안았다,
"아서요."
가만히 경희는 내 손을 밀었다.
"왜 이래."
"뽀뽀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에요. "
"난 뽀뽀하고 싶은 심정이야."
나는 다소 무리하게 경희의 몸 위에 손을 얹었다. 잠옷 속으로 손을 넣어 젖가슴을 쥐었다. 젖꼭지가 딱딱하게 수축해 있었다,
가만히 입을 가져다 그 젖꼭지를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혀로 한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마요. 저 방에 노인이 자구 있어요."
"알게 뭐야. 자구 있는데. 설혹 깨었다구 해두 산 송장이야. 상관없어."
"당신은 이제 보니 변태로군요."
경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나는 변태다.
바로 곁에 한 사람이 죽음의 문 바로 앞에 서 있으므로 욕망은 더욱 불붙고 있다.
아니 욕망이 불붙어서 이런 정사를 꾀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난 늙지 않았다. 난 아직 젊다. 애를 만들 수도 있다. 낳지는 않더라도. 내 피는 아직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다. 우린 살아 있다. 질긴 칡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우린 젊다.
나는 미친 듯이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급하고 초조해서 아랫바지를 벗기려고 하자 경희는 별로 달아오른 기색도 없이 스스로 바지를 내렸다. 그러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냉랭했다.
나는 무안 당한 사람처럼 경희의 얼굴을 살아보았다.
"왜 그래,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
"이봐. 우린 아직 젊어. 그리구 살아 있다구. 좋아. 경희 말대로 언젠가는 영감태기처럼 늙어 버린다고 하자. 그건 다음 문제야. 설혹 그렇게 늙어 버린다구 하더라도 그 추한 미래 때문에 오늘을 미리 절망할 필요는 없는 거야. 자 경축하자구. 살아 있음을 경축하자구."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의 남은 술을 입 안에 가득 넣었다.
그리고 경회의 입을 막았다. 입이 벌어졌다. 나는 독한 술을 경희의 입 안에 피처럼 집어넣었다.
그 순간 경희의 얼굴이 젖어 가는 것을 느꼈다. 가만히 입술을 눈가에 대어 보자 눈가가 흥건히 젖어 있음을 보았다.
"왜 이래."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경희는 손가락을 펴서 얼굴을 가렸다. 경희는 숨 죽여서 울기 시작했다
3
다음날 새벽 일찍 나는 집을 나섰다. 소파에서 곤히 잠든 경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살금살금 발돋움하고 걸어 욕실에서 수염을 깎고 세수를 하고 나서 배달된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노라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경희가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서두르세요."
"미안해."
나는 사과의 말을 했다.
"오늘 아침엔 빨리 인화해서 거래처에 사진을 넘겨 저야 하기 때문에 일쪘 출근해야 해."
"식사 차려 드릴까요."
"괜찮아. 우유를 한 병 마셨어.
"그것 가지구 되겠어요."
"그럼. 괜찮구 말구. 자요."
나는 코우트를 입었다.
"난 오늘 이브닝이에요. 다섯 시 출근에 열한 시면 끝나요. 어떻게 사정을 봐서 열 시쯤 돌아올께요."
"그래두 괜찮아? 이틀 동안 외박해두."
"나야 쇈찮아요. 왜요, 계가 있는 게 싫으신가요."
'아니."
나는 웃으며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경희의 볼을 쥐어뜯었다.
"내가없으면 안될 게 아니에요. 저 노인네를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구. 당신이 저 노인의 똥, 오줌을 받아 내시겠어요."
"젠장. "
나는 투덜거렸다.
"저 영감을 이젠 어떻게 한다."
"일단 출근하세요. 다섯 시까지는 내가 돌볼 수 있으니까요. 차라리 잘됐죠. 당신 출근하고 나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장난감이라도 하나 있는 셈이니까요. 좀 징그럽긴 하지만."
"가만 있자. 그 영감이 뭘 하구 있는가 좀 보구 가야겠군.
"내버려두세요. "
경희가 내 코우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깨어 있을 거예요. 노인들은 잠이 부족한 편이니까요. 내버려두세요. 난 실컷 자야겠어요. 공연히 일으켜서 시달리긴 싫어요. 그냥 가세요."
"그럼 자요."
나는 시계를 보았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경희의 입술 위에 다시 한번 키스를 퍼붓고 방문을 열고 나왔다.
회사에서 나는 바쁜 일에 쫓기느라 한 번도 집 일을 생각하지 않았고, 오전 내내 거래처에서 부탁한 모델 광고용 사진을 확대 인화해서 납품하느라고 뛰어 간신히 정한 시간 직전까지 신용을 지킬 수 있었다. 인근 음식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와서는 암실에 틀어박혀서 어제 고궁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보았다.
사진들은 생각보다는 훨씬 훌륭한 작품들인 것처럼 보여졌다. 다섯 통 필름을 모두 인화해 보았는데 하나도 지루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절로 신이 나서 휘파람을 불며 작업을 했다.
오후 4시쯤 경희에게 전화가 왔다
"나 지금 출근해요. "
경희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밥솥에 식사 준비를 끝내 놨어요. 반찬은 냉장고 속에 있구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오실 때 슈퍼마켓에서 직접 사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옷이 말라 당신 가운 벗기고 노인의 옷 갈아 입혔어요."
"설마 가운에 똥을 싸진 않았겠지."
"후훗, 안 했어요. 걱정하실 건 없어요. 내가 변기에 앉혀 놓고 똥두 뉘었어요. 걱정하실 건 없어요. 오셔서 저녁 밥만 먹이세요. 내 되는 대로 일찍 올 테니까요."
"어쩔 셈이야. 그럼 그 영감태기를 계속 데리고 있을 셈이야. 설마 경회는 그 영감태기를 시아버지나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그럼 어떻게 해요. 달리 어쩔 수도 없잖아요. 적당한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는 일단 우리가 키우는 게 어때요. 강아지나 새처럼. 그렇잖아요. 남들은 개도. 고양이도 키우는 판인데, 동물보다는 훨씬 낫지요. 말도 하고 웃고 울고 거기에다 애교도 있어요. 오늘 얼마나 웃겼는 줄 아세요. 글쎄 대낮에 아파트 광장에 데리고 나갔었는데 혼났어요. 어찌나 보채는지 아이 스크림을 다섯 개나 사 주었다구요."
"정성도 뻗쳤군."
나는 빈정거렸다.
"지금 출근하면 어떻게 한단 말이야, 나 빨라야 여섯 시 퇴근이야. 두 시간 동안 미친 노인한테 어떻게 집을 맡기고 간단 말이야, 그 동안 집안을 돌아다니며 성냥 장난을 할지도 몰라. 불이나 나면 어떻게 해."
"지금 막 잠이 들었어요. 가만히 안아 들고 자장가를 불러 주니 이내 코를 골았어요. 내처 두 시간은 잘 거예요. 걱정 마세요. 문을 잠그고 나갈께요."
"알겠어. 우라질."
나는 전화기를 놓았다.
사진들은 갓 약품 용액에서 건져내 왔기 때문에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전열기로 말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하룻밤 새에 노인이 어느 틈에 우리 생활 속에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아지조차 키을 수 없는 아파트 속에 나는 애완 동물을 사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빈 방을 이 동물이 혼자 지키고 있을 것이다. 잘 훈련된 충실한 강아지처럼.
여섯 시 나는 퇴근을 했다. 화창했던 봄날은 저녁 무렵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서 잔뜩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째 꽃을 시샘하는 비라도 뿌릴 것처럼 음산한 회색 구름이 도시의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동네 수퍼마킷에서 성게 젓 한 병과 알 배추 한 덩어리를 사 가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으로 올라가면서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왠지 어제 고궁에서 데리고 올 때의 그 안이했던 생각에서 나는 왜 많이 진전해 깊숙이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아, 아.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간다면 미친 영감이 민물고기처럼 빙글빙글 웃으며 앉아 있을 것이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 빈 집에서 홀로 목욕을 하고 홀로 음악을 듣고 흘로 담배를 피우며 창문을 열어 놓고 소파에 앉자 술을 찔금찔금 마시면서 홀로 석간 신문을 보는 그 소중한 자유가 무단히 침입한 이방인에 의해서 박탈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전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전혀 엉뚱한 무생물에 가까운 늙은 짐승 때문에 내가 만든 조그만 자유가 무력하게 깨어져 버린다는 사실에 나는 화가 났다.
어쩌자는 거야.
나는 소이 내어 신경질을 부렸다.
경희는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늙은일 화초처럼 때맞춰 물주고, 가지치고, 햇빛 쬐고 키우려 든다면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언젠가 경희는 한 쌍의 십자매를 사 가지고 아파트에 온 일이 있었다.
"십자매는 웬만하면 죽지 않아요, 당신 같은 게으름뱅이도 키울 수가 있어요. 한번 베란다에 놓고 키워 보세요."
쿨, 배추 조각과 메조를 모이 그릇에 놓아 줄 때마다 나는 이 울지도 못하는 칙칙한 한 쌍의 새가 아예 닫힌 문틈으로 잽싸게 빠져나가 도망해 버리기를 기대하는 편이었다. 그런대로 어느 날 아침 새장 안을 들여다보니 바둑알만한 새알이 서너 개 구르고 있었고, 암놈이 그 알을 품고 있어 잘 하면 새끼 새 몇 마리쯤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동안 정도 들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알은 부화되지 않고 마침내 썩어 버렸다.
"십자매는요 사육용 새로 키워졌기 때문에 절대 스스로 새끼를 부화시키지 못하는 법이라구요."
평소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는 물론 새도 금붕어도 싫어하는 나는 이 강제적으로 떠맡겨진 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 것은 당연했었다. 그런데도 십자매라는 새가 처음부터 야성이 퇴화되었고 아예 완상용 새로 키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갑자기 그 동안 가지고 있던 한 가닥의 정마저 뚝 사라져 버릴 정도였다.
알도 못 까는 새가 무슨 말라 죽은 새일 것이냐.
더구나 어느 날 마침내 내가 기대했던 대로 먹이를 주는 동안에 숫놈새 한 마리가 우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미리 잡을 새도 없이 베란다를 한 바퀴 돌더니 아파트에서 떨어져 내렸다.
섭섭한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럴 바엔 남은 새도 도망가라는 심정으로 새장 문을 열어 놓고 있었는데도 암놈 새는 나갈 생각도 없이 그저 횃대에 올라앉아서 청승맞게 끽끽 끽끽 울부짖고만 있을 뿐이었다.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새에게 열린 문은 무의미한 출구일 뿐이었다.
밤새도록 암놈 새는 귀가 따갑도록 울더니 새벽녘엔 조용해서 무심코 들여다보았는데 새는 모이통에 부리를 틀어박고 죽어 있었다. 나는 새의 시체를 쓰레기통 속에 버렸다. 쓰레기통은 복도 끝에 붙어져 있어 버리기만 하면 저절로 아래층까지 곤두박질쳐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그날 저녁 회사에서 일찍 돌아와 아파트 광장에서 바람을 쐬고 있노라니 동네 아이들이 와아와아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아이들이 무엇을 저리도 요란스럽게 쫓아다니고 있는가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새 한 마리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새는 그저 파드득 날개짓을 할 때마다 겨우겨우 한 마장쯤 날아갔다. 제풀에 뚝뚝 떨어져 앉을 뿐이었지 시원스레 창공을 차고 올라 이 아파트의 숲을 뛰어넘어 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자연 아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새는 그 중 다른 아이의 손에 잡힐 수밖에 없었다.
"새다. 새야. "
손에 새를 쥔 소년이 신이 나서 소리질렀다.
"십자매다. 십자매."
나는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어서 소년에게 다가갔다.
"뭐니?"
"새예요."
새를 잡은 소년이 자랑스레 소리질렀다. 새는 가엾게도 무자비한 손바닥에 결박되어 머리만 내놓고 겁에 질려 있었다, 새의 눈이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새가 어제 도망간 숫놈 십자매인 것을 알았다.
"어디서 봤니 ?"
"저기 굴뚝 밑에서요."
"예쁘구나. 이걸 어떻게 할 써니."
"기를래요. 내가 기를래요."
나는 소년들이 떼지어서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 애들을 막아 세우고 그 새를 내 것이라고 말한 다음 빼앗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새는 도망쳐 나갔으면서도 기껏해야 아파트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에 의해서 길들여진 새라 할지라도 일단 새장 밖으로 도망해 나갔다면 더 멀리, 더 많이, 더 높이 날아가 봄 직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며칠 뒤 찾아온 경희는 빈 새장을 보고 물었다
"새들이 다 어디 갔어요."
"도망갔어, "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이를 주려고 문을 열었는데 그 틈에 도망가 버렸어, "
"쫓아 버린 거예요, 당신은. 난 알아요."
한숨을 쉬면서 경희는 대답했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당신은."
"왜 ?"
"난 당신이 지난 겨울 줄곧 한강변에서 철새 사진을 찍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 당신은 신이 나 있었구. 저 새들을 봐라. 하면서 감탄했었어요. 그런데 왜 기르는 새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새들은 자연이었고 풍경이었어. 허지만 경희가 갖다 준 새들은 자연이 아냐. 그것은 말야, 마치 만든 조화(造花)만 같아서 생명이 없어 보였어."
엘리베이터 속에서 숫자판이 반짝 켜질 때마다 나는 게양대 위의 국기를 바라보듯이 우러러보며 생각했다.
이 귀찮은 영감태기야.
진실로 네가 인간이라면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문은 열려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도망가 버려라. 제발 빌고 비노니 도망가 버려. 내가 방문을 열어 보면 없어져 있을지어다.
어쩌자는 생각 없이 일단 데려다 놓고 골치를 썩고 있는 내게도 해방의 기쁨을 느끼케 해 줄지어다. 아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나는 아파트 방문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문을 열려는데 문이 힘없이 스르르 저 혼자 열려졌다. 문은 열려져 있었다.
다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생각이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행복한 기대감이 가슴에 저며 들었다
봐라. 문이 열려 있지 않은가. 경희 말대로라면 문은 잠그고 나갔을 테고 그런데도 문이 열려 있다면 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까.
내 짐작은 맞았다.
방 안 어디에도 노인은 없었다.
"할아버지. "
나는 술래잡이하듯 소리지르며 방안이란 방안은 모두 뒤져보았다. 노인은 없었다, 믿어지지 않아서 옷장도, 캐비닛 속도, 욕조 안도, 냉장고 안도 모두 들여다보았다. 노인은 분명 없었다.
나는 행여 이 기쁨이 옷장 속에 들어 있을 노인의 비명 소리로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마조마하면서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노인은 오,오, 사랑스럽게 부재중이었다.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갔다. 노인은 떠나 버렸다. 얼마나 근사한 노인이냐. 미친 예언자처럼 불쑥 나타났다 사라진 노인에겐 어쩌면 빛나는 예지가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나는 무엇인가 거실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달려가 마룻바닥을 쳐다보았다. 갓 배달된 저녁 신문이 싹둑싹둑 오려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손으로 찢은 흔적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금속제품으로 한꺼번에 자른 듯이 종이 조각들은 베어져 있었다. 마치 공작 시간에 가위로 색종이를 베어낸 조각처럼 보였다. 그 속에 다른 횐 종이 조각도 베어져 뒤섞여 있었다. 나는 횐 종이를 주워 조각을 맞춰 보았다.
그것은 경희가 내게 주고 간 메모지였다. 거기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열 시에 돌아올께요. 밥은 다 해 놨어요. 그 동안 노인 아저씨와 재미있게 노세요.'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때였다.
나는 수많은 물건들이 마룻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화분의 꽃이 모가지가 베어져 방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그뿐이냐. 닥치는 대로 베어 뿌려져 온 방 안은 외국에서 우승하고 돌아오는 운동선수의 카아 퍼레이드가 지나간 아스팔트 위에 하얗게 떨어진 축하 테이프처럼 어지러져 있었다. 꽃이. 종이가. 경희의 원피스 옷이. 식탁보가. 인형의 모가지가 잘려져 방바닥에 하얗게 깔려 있었다. 새로 맞춰 아끼느라고 별로 자주 입지 않은 경희의 원피스가 재단사가 가위질해 놓듯 싹둑싹둑 잘려져 있었다.
우라질.
나는 문을 닫았다
이 미친 영감태기가 어디선가 가위를 찾아내어서 무턱대고 온 방 안의 물건을 싹둑싹둑 잘라 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적의라든가 잔인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단순히 가위질하는 일에 쾌감을 느껴 신문지를 오리는 것에 열중하듯 그저 빈 시간을 즐기기 위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가위질해 대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온몸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죽인다. 죽여 버리고 말 테다. 이놈의 영감쟁이 만나면 가위로 모가지를 베어 놓고 말 테다.
그때였다.
문 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짤막하게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나는 문을 열어 보았다. 문 밖엔 한 메의 아파트 주민들이 서 있었다.
"안녕 하세요."
문 앞에 서 있던 여인이 앙칼진 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그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어제 노인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 만난 아래층의 정구채를 든 여인이었다.
"웬일입니까."
나는 물었다.
"저 노인양반 아시죠."
여인은 맨 뒤쪽에 서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비켜섰다. 나는 맨 뒤에 서 있는 노인을 보았다. 나는 절망했다.
"글쎄요."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히 댁께서는 어제 저 노인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셨잖아요."
"그, 그렇습니다, "
달리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일단 수긍하기로 했다.
"친척이신가요."
다른 사람이 물었다
"글쎄요. "
나는 대답했다.
"그런 셈입니다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보세요."
여인은 뒷짐졌던 손을 내밀었다. 여인의 손엔 노오란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저 노인네가요, 이 꽃을 잘랐다구요. 온 복도의 꽃들을 다 자랐어요. 물 주려고 복도에 내놓은 꽃들 모가지를 다 잘라 놨다구요. 이건 선인장 꽃이에요. 우리 애기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꽃이에요. 오 년마다 한 번씩 피는 꽃인데."
"미, 미안합니다. "
나는 대뜸 무슨 일이 일어났었던가를 짐작했다. 그들의 분노를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어쨌든 사과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용서해 주십시요.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뭐 어쩌자는 것은 아니에요. 이웃끼리니까."
다른 여인이 상냥하게 말을 붙였다.
"첨엔 화가 났지만 노인네에게 집이 어디냐구 물어도 이상한 말만 하쟐아요. 그래서 일단 댁으로 모시고 온 것뿐이에요."
"미, 미안합니다,"
나는 어제 줄곧 맹목적으로 되풀이하던 노인의 말을 그대로 흥내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누군가 노인을 보고 간호원처럼 말을 건네었다.
"이젠 그만 주착을 부리세요. 할아버지, 자 들어가세요.
"아이 다행이네. 우린 집 잃은 노인넨 줄만 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얼른 노인의 팔을 잡아끌어 창 안으로 들여밀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제서야 그 동안 참았던 분노가 터졌다.
"이 미친놈."
나는 노인을 향해 소리질렀다.
노인은 소파에 기대서서 나를 두릿두릿 얼빠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똥만 싸는 미친 영감태기."
어, 어 불확실한 소리를 내며 노인이 뒷걸음질쳐 베란다 쪽으로 밀려갔다. 그러다 제풀에 주저앉았다.
나는 다가가 영감의 턱을 손바닥으로 받쳐들었다. 노인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생각 같아서는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손이 나가지 않았다. 나는 땅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과 꽃 한 송이를 주워 들었다.
"먹어. 이 자식아. 이걸 먹어."
나는 구멍과 같은 입을 강제로 벌리고 그 안에 종이 조각을 털어 넣었다. 노인은 우물우물 종이를 씹기 시작했다. 종이 먹는 양처럼.
"이것두 먹어라."
나는 꽃을 노인의 입 안에 처넣었다. 꽃은 부스러져 한 잎 한 잎 흩어졌다.
노인은 울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투명한 눈물이 깊게 패인 주름의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 비온 뒤 빛나는 거미줄에 매달린 빗방울처럼 번져 나갔다.
나는 노인의 손에서 가위를 빼앗았다. 노친의 눈물을 보자 기분이 언짢아져서 화를 달래기 위해 더 이상 사나운 짓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낭패한 기분이 들어 거푸 담배를 두어 대 갈아 피웠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막연했다.
간단하게 먹은 점심 때문에 허기가 다가왔지만 밥을 찾아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갑자기 친구의 말이 머리를 때렸다.
'돌은 캐어 냈던 자리에 도루 갖다 두는 게 원칙이야.'
공연한 객기로 무거운 돌을 제천 선술집까지 지고 왔다가 술김에 선술집 화단 속에 부려 놓고 나을 때 녀석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
어제 노인을 데리고 나을 때 나는 어쩜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노인을 데리고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면, 노인이 내게 무거운 돌이라면 최소한 캐 가지고 나왔던 자리에 되돌려 놓아주고 오면 뒬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노인을 내가 데리고 왔던 잔디밭 위에 갖다 놓고 오면 그만이다. 그러면 마음의 짐까지도 벗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둑어둑한 저녁. 아무리 밤 벚꽃놀이를 밤 열 시까지 한다고 하더라도 이 밤중에 창경원에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무서운 복수의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무서운 음모의 강렬한 쾌감으로 몸을 떨었다. 전갈의 독(毒)이 내 핏속으로 수혈되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노인을 아무 곳에나 버리면 그만이다, 왜 진작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아니다. 그 생각은 어제부터 문득문득 자주 들곤 했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악마의 유혹을 애써 모른 체 덮어두고 지워 버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지금이 노인을 버릴 최선의 기회이다. 몸도 마음도 죄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노인은 버려져 있었지 아니한가. 그 누군가에 의해서 마지막 따스한 말, 마지막의 새 옷으로 갈아 입혀진 후 손에 이끌려 마지막 산책길에 나서서 마침내 버려진 노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나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나는 밥을 먹였으며 목욕을 시켰으며, 재웠으며, 술까지 먹였다. 나는 표창 받는 모범선행 아동처럼 행동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내가 취할 행동은 분명해진다. 나도 그 노인에게 그 누군가의 사람이 베풀어주었던 대로 고려장을 베풀어주면 그만이다.
나는 자칫 시간을 끌면 변해질지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노려보며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밥을 차려 먹일 것인가.
안돼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밥 먹는 탐욕스럽고 추한 노인의 행동을 보는 것으로 어쩌면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면 안 된다. 그보다도 경희가 일찍 돌아온다면 어쩔 것인가. 그럴 리가 없겠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겔 대고 일찌감치 돌아올지도 모른다.
자. 이때다. 기회는 이때다, 방은 비었고, 아파트 주민들은 모두 저녁을 먹거나 TV를 보는 가장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이다. 이 틈을 타야 한다. 나는 이미 서너 명의 아파트 주민들에게 이 노인과 나는 결코 무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었다, 어쩌면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속에서, 광장에서 들킬지도 모른다. 그러니 망설일 틈도 없다.
나는 옷걸이에서 코우트를 입었다.
"할아버지."
나는 땅바닥에 앉아서 아직도 꽃잎을 우물우물 삼키고 있는 노인을 다정하게 불렀다, 노인은 본능적으로 눈을 휘번득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일어나세요."
내가 의외로 상냥하게 말을 꺼내자 노인의 얼굴에는 금방 천진하고 가벼운 웃음이 피어 올랐다.
"가십시다, 할아버지."
"고, 고맙습니다."
노인은 벙글벙글 웃었다.
"몇 살이세요?"
"열두 살입니다."
나는 웃었다. 노인도 웃었다. 나는 크게 웃었다. 노인도 크게 웃었다.
"창경원에 가십시다. 할아버지 집으로 사십시다."
"원숭입니다. 코끼리도 호랑이도 있습니다."
"하마도 있구 공작도 있구 물개도 있어요."
우리는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다행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는 십오 층 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십삼 층에서 한 번 멎었다.
나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안 된다. 십삼 층에서 한 번 멎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타고 있을 것이다. 고뿐인가. 내려가는 길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탈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내 비위 행위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발각될 것이다.
나는 아파트 주민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시행하는 비상 대피훈련 때 사용했던 비상 계단을 생각해 냈다,
나는 노인을 데리고 복도 끝까지 갔다. 다행히 철문은 열려 있었다.
우리는 옥외 비상 계단에 섰다,
거대한 아파트 외벽에 매달린 계단은 거미의 발처럼 위태롭게 이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불도 없었고 통로도 좁았다.
비상 훈련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한 손으로는 노인의 손을 떨칠세라 꼬옥 움켜쥐고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와 머리칼을 함부로 ◎날렸다
우리는 한없이 긴 좁은 난간을 내려갔다,
우리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다행히 아파트 광장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발리 이 아파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먼 곳에 버릴 것, 그리하여 절대로 찾아오지 못하게 할 것.
아파트 지구에서 벗어나자 그대로 벌판이었다. 아직 신개척지인 강남 지구는 곳곳에 광활한 벌판이 전개되어 있었다. 한때는 논이나 밭에 불과하던 농경지 아니면 서울에서 매일같이 산더미같이 버려지는 쓰레기를 매립한 땅들이었다. 아무리 아파트가 서고 새로운 주택이 건설되지만 곳곳에는 빈터가 무작정 벋쳐 있었다. 잘 정리된 구획 구획 사이로는 넓은 아스팔트가 곧장 뻗어 나가고 있었다.
간혹 속력 빠른 자동차들이 핑핑 지나갈 분 주위는 어둡고 삭막하였다.
가로등조차 없는 거대한 공터는 언제나 진흙이 질퍽질퍽 습기에 젖어 있었고 채 베어내지 못한 미류나무들이 신주마냥 우뚝우뚝 서 있었다.
"오줌이 마렵습니다."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던 노인이 등뒤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노인의 허리띠를 끌러 투었다. 노인은 벌판에 서서 소변을 보았다.
하늘은 어두워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스산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날씨가 흐린 것으로 보아 곧 봄비가 뿌릴 것만 같았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다 버릴 것인가.
나는 생각했다.
저 노인을 어디다 버릴 것인가.
문득 지난 겨울을 사진을 찍던 한강변의 모래사장이 떠올랐다. 아직 지난 겨울의 얼음에 늘어진 다리 교각 사이에 살점처럼 남아 있는 한강 모래사장에 노인을 버려 두고 도망쳐 버릴 것인가. 그렇게 한다면 노인은 새벽녘에 어쩌면 어두운 백사장을 배회하다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든지 아니면 모래를 파낸 거대한 물구덩이 속에 빠져 익사체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모래를 파고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노인을 무덤 가까이에 버려서는 안 된다. 비록 무책임하게 버린다고 할지라도 어쩌면 다른 마음 착한 사람에게 구원되어질 수 있는 그러한 장소에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밤중에 한강 백사장에 버린다면 그것은 아무에게도 구원될 수 없는 사각(斜角)지대 쪽에 던져 버리는 일이다.
그럴 수는 없다.
노인은 소변을 끝내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노인의 바지를 추켜 올리고 허리띠를 졸라 매 주었다. 쿨럭쿨럭 노인은 바튼 기침을 했다.
우리는 다시 캄캄한 빈터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로 찬란한 서울의 야경이 불타고 있었고, 검은 강물 위에 야경의 불빛이 거꾸로 번져 흐르고 있었다.
남산 위에 조명등이 붉은 별처럼 불 밝혀 있었다. 가까이로는 내부의 불을 모두 밝힌 아파트들의 거대한 모습이 공룡처럼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먼 도시의 풍요하고 찬란한 밤의 광기와 쾌락에 젖어 밤에 더욱 빛나는 요염한 네온이 밤하늘 위로 탐조등의 불빛처럼 뻗쳐 오르고 있었다. 초파일날 맑은 강물에 머리를 씻어 내리듯 온 도시는 밤하늘 위로 빛나는 모발을 흩날리고 있었다. 그래서 온 도시는 조명 속에 번쩍이는 야회복 차림의 여인처럼 빛의 갑옷을 입고 타오르고 있었다. 도시는 폭죽을 터뜨리면서 불꽃놀이로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인을 남의 눈에서 떨어진 한강변이나 이 신시가지의 벌판 속네 버릴 것이 아니라 저 반짝이는 도시의 한복판에 버리고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곳이야말로 미로이며, 정글이며, 늪이며, 숲이며, 계곡이 아닌가.
그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노인들이 귀가 어둡고 이빨이 빠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눈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겨울은 지난해에 거둔 음식을 쥐처럼 갉아 먹으며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지내야 되는 길고 긴 계절이었다. 식구(食口)는 하나라도 더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다.
갓 아이를 낳아 젖이 퉁퉁 부은 아낙네의 젖무덤을 아기는 젖혀놓고 서방이 대신 빨아먹어 아기는 백일도 되기 전에 굶어 죽었지만 대신 남편은 젖살이 올라 온몸이 부옇게 살찌곤 했다. 백일도 되기 전에 죽은 아이의 시체는 얼어붙은 앞 강변에 버렸지만. 비리고 작은 고기라서 굶주린 끝에 밤마다 인가까지 내려온 늑대들도 갉아먹지 않았다.
산천에 눈 벌레가 흩날리기 시작해서 죽은 아이 시체 위에 하얀 옷을 입힐 무렵이면 노인들의 이빨은 으레 두서너 개씩 빠지기 시작했고 그럴 때면 아내의 젖무덤을 파먹느라고 살찌고 기운 오른 아들 녀석은 지게 위에 노인들을 거꾸로 태우고 산골로 찾아 들어가곤 했었다.
얕은 산골이라면 노인은 늑대와 한 떼가 되어 돌아올지도 몰라 기운찬 아들 녀석은 산 속으로 산 속으로 계속 들어가 이윽고 뻗은 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돌더미가 발을 쩐는 산 속 계곡에 노인을 버리고 돌아오기 마련인데, 돌아올 때면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보라는 기숭을 뻐 떨치기 시작해서, 돌아오는 사내의 발자국을 이내 이내 지워 버리기 마련이었다.
올 때는 절대로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내는 바람처럼 산 계곡을 뛰어 내리고 냇물을 뛰어 넘어 숨이 턱에 닿을 때까지 뛰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 밤부터 여러 날은 문풍지를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도 소스라쳐 놀라 귀를 기울이고 휘영청 밝은 달빛이 문 창호지를 찢을 때 얼핏 바라보면 뜰 앞 싸리나무 그림자가 머리 풀어헤친 노인의 그림자인 것만 같아 숨죽이고 노려보는 것이었다.
아부지. 할무니 왔다.
귀 밝은 아들 녀석이 벌써 잠이 깨서 행여 문풍지 두드리는 소리가 못내 그리운 할머니 소리인가 애비를 깨우면 애비는 아내의 젖꼭지를 만지며 마른 젖을 파 먹다 말고 고개를 흔들곤 했었다.
아니다. 바람 소리다.
할머니가 입던 옷가지를 껴입은 아낙네 역시 잠귀가 밝아 한밤중에 눈 뜨고 남편을 깨울 때가 있었다.
어무니 소리 아닌가.
아니다, 싸락눈 쌓이는 소리다.
겨울 내내 내리는 눈은 창호문을 손톱으로 싸락싸락 긁어내려 어쩌면 할머니 피 마른 등허리 긁어 주던 손톱 소리인 것만 팥아 손주 녀석이 어쩌다 문을 열라치면 애비는 소리를 지르며 윽박지른다.
문 열지 마라, 귀신 들어온다.
언젠가 게으른 사내 하나가 아주 얕은 앞 산골에 노인을 버리고 온 뒤 다음날 밤에 떨며 우는 문풍지 소리에 나가 보니 갖다 버린 노인네가 돌아와 있고, 노인은 눈을 뜨고 얼어 죽어 있어, 몇 년간 그 귀신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곡소리 내어서 울며불며 동냥질하며 다녔었는데, 착한 마음에 문을 열면 들어올 생각 않고 손만 들이밀고 사람의 이발 하나섹만 뽑아내는 통에 마을 사람들은 다시는 문 열어 주지 않는 버릇이 생겼으며, 산 마을에 밤마다 배고파 울던 늑대 소리도 노인을 갖다 버린 며칠까지는 조용히 물러가고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내가 노인을 버리려 한다면 애써 한적한 곳을 찾을 것이 아니라 저 도시의 숲 속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눈은 내리고 있지 않으나 네온은 요염히 타올라 내 도망쳐 온 발자국을 이내 지워버릴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고 노인을 태웠다. 운전 기사에게 명동으로 나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도시는 버릴 곳이 너무나도 많이 산재되어 있었다, 조금만 머리를 쓰면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버릴 장소는 어디든 깔려 있었다.
어쩌면 극장 표를 두 장 사 가지고 들어가 영화를 구경하다가 슬그머니 변소라도 가는 체 나가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극장 문을 나오는 순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극장 종업원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우체국의 복도도 좋을 것이다. 편지라도 띄울 것처럼 행동하다 슬며시 나가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아니면 병원 대기실의 의자는 어떨까.
이것도 저것도 번거로우면 그저 길거리에 세워 놓고 그냥 뒤돌아보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차는 도심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의 불빛이 요염하게 타오르고 쇼우윈도우에 물건들은 가득 차 있었다.
"이 이상은 못 들어갑니다, "
운전사는 명동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나는 노인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파도처럼 넘치는 인파는 함부로 어깨를 부딪고 지나가고 있었다. 술집마다 껄껄거리며 잔을 부딪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며, 별로 할 질 없이 몰려든 젊은이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무턱대고 거리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백화점 계단에서 누가 굴러떨어졌는데,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낄낄대며 웃었다.
나는 택시 속에서 노인을 어디다 버릴 것인지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해 놓고 있었다.
어쨌든 명동 성당까지는 가 보자고 결정했다. 명동 성당 부근에는 종합 병원과 성당 앞에 벤치가 있어 많은 사람이 바람을 쐬며 산책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일단 그곳에 가서 형편이 닿는 대로 병원에 버리거나 아니면 성당 앞에 버리고 돌아오면 그만이 아니냐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병원과 성당 그 두 가지 중 어느 곳도 나쁜 곳은 아니었다.
병원은 어쨋든 춥고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눌 의무가 있는 곳이며, 성당 역시 그런 곳이잖은가. 그곳에 버린다면 일단 마음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병원에선 히포크라테스의 손길이, 성당에선 성 모 마리아의 손길이 이 가엾은 노인을 돌봐 줄 것이다. 찬미 예수.
우리는 인파를 헤치고 언덕길을 올라 성당 입구로 들어섰다, 노인은 얌전히 내 뒤를 믿음이 지극한 군병(軍兵)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성당 입구에 서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망설였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히포크라테스보다는 예수가 더 자비심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쨌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므로 그 누구의 고통도, 그 누구의 아픔도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질 것이며,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자비롭다면 이 아흔 아홉 마리에서 홀로 떨어진 길 잃은 늙은 양 한 마리를 푸른 초원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찬미 예수.
나는 노인을 대리고 성당 앞으로 올라갔다, 여기저기 번화한 거리에서 벗어나 둘만의 장소를 찾아 헤맨 쌍쌍의 연인들이 그늘진 곳마다 모여 시험에 들떠 있었다. 나는 노인을 벤치 위에 앉혔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나는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찬송가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난 가겠습니다. 날 원망하지는 마세요."
노인은 이유도 없이 천진하게 웃었다.
"미, 미안합니다."
노인은 대답했다.
"난 배, 배가 고픕니다. 밥을 주십시요."
"좀 기다리세요. 저 사람들이 줄 겁니다."
나는 불 밝힌 성당의 첨탑을 가리켰다. 그곳엔 십자가가 매달려 있었다.
"누구든 할아버지를 합 먹여 줄 것입니다."
나는 모자를 노인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노인은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층에서 놀면 안 됩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주의하세요."
노친은 하얗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고맙습니다. "
나는 확실하게 대답했다. 헤어지는 마당에까지 매정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럼 가겠어요."
나는 돌아서려고 몸을 세웠다.
그때였다. 앉아 있던 노인네가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놀라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왜 노인네가 손을 내밀었을까. 무엇인가 쏨 달라는 손짓이었을까. 아니면 악수라도 하자는 손짓이었을까.
나는 어리둥절해서 노인의 경직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보았다. 내 손을 노인의 손이 마주 잡았다. 생각보다는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져 손을 뺐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노인은 연신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손짓은 얼굴의 표정과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으로 나는 느껴졌었다.
노인의 저런 천진스런 백치의 표정은 어쩌면 위장된 표정이며, 저 종잡을 수 없는 대화들 역시 꾸민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때렸다.
노인은 어쩌면 분명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단지 그것을 살아오면서 습득한 현명한 지혜로 위장하고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시 한번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이미 내게서 관심이 떠나 있었다.
흐린 눈으로 발아래 찬란히 타오르고 있는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쳐서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멀어졌다 생각되자 단숨에 이를 악물고 뛰어서 언덕길을 곤두박질쳐 내렸다.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중얼거렸다. 긴장이 풀려 온 손에 부쩍 땀이 솟아 있었다.
가슴이 풀무질하듯 부풀어 오르고 마음은 급해서 까무라칠 것만 같았다.
달아나는 내 등뒤에서 무언가 더 빠른 속도로 달려서 내 몸뚱이를 잡아챌 것만 같은 공포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명동을 뛰었다.
이제는 안심이 되겠지 하면서도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마지막 헤어질 무렵 내밀던 노인의 손 하나가 내 도망가는 속도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부터 흐린 눅눅한 하늘에서 봄비는 운무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나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는 몇 번이고 잠긴 문을 확인하였다.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씻어 내기 위해 나는 세면대에 가득 물을 받아 서너 번 씻어 내었다. 그래도 손에 묻은 노인의 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나는 식탁 위에 합을 차릴 겨를도 업이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식사를 해치웠다.
연거푸 담배를 대여섯 대 갈아 피우고 TV를 켜고 소파에 앉아 술을 마구 들이켰다. 그제서야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모처럼 되찾은 해방감으로 나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베란다에 나가 봄비를 맞았다.
나는 꺼릴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마음을 달랬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남은 술을 들이켠 후 나는 욕탕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온몸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인간의 더러운 냄새를 씻어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나는 머리에 가득 흘러 넘치는 비누 거품을 문지르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누굴까?
나는 숨을 죽였다.
갑자기 내가 버린 노인이 내 뒤를 밟아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낄낄대며 웃었다. 그럴 리가 있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초인종이 두세 번 계속 물렸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문을 노려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문이 비틀리는 것을 보았다
경희다.
흘낏 거실 밖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아홉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까마득히 경희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잠시라도 불안해 했던 자신의 유약함에 혀를 내보이며 웃었다.
문이 열렸다.
경희가 종이봉지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당신, 있었군요."
“그래."
나는 머리칼을 세차게 비비며 대답했다.
"그런데도 대답이 없으시구."
"보면 몰라. 머리 감고 있었어, "
"식사는 하셨어요."
경희는 빗방울이 맺힌 코우트를 벗으며 식탁 위에 사온 봉지에서 물건을 꺼내 쏟았다.
"먹었어."
"아아."
경희가 내게로 다가오며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요. 피곤해 죽겠어요."
"목욕해. 물이 더워. 그리구 때를 밀어 주는 게 어때."
"어디 갔어요."
"누구 말야."
나는 짐짓 모른 체하고 더운 물을 몸 위에 뒤집어썼다.
"할아버지 말이에요."
"찾아봐."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희는 사라졌다,
온몸에 상쾌한 더운 피가 끓어오르고 참월한 욕망이 혀를 보였다.
"없어요."
한참만에 경희가 나타나서 노래하듯 소리질렀다,
"할아버지가 없어졌어요."
“그래."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 갔어요."
"본대로야."
"뭐라구요."
"본 대로라니까. 없어졌다구."
"없어지다니요."
"나두 모르겠어."
넓은 타월로 대충 몸을 닦은 후 거실로 나서며 나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회사에서 돌아오니까 행방불명이야. 그 대신 방바닥에 저런 선물이 놓여 있더군."
경희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
"그 영감쟁이가 가위 가지구 저렇게 닥치는 대로 잘라 논 거야. 경희 원피스도 잘라 놨어. 미친 영감태기야. 참 한심해."
"아니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나한테 신경질 내지 마. 시아버지처럼 잘해 준 것은 경희 쪽이었으니까."
나는 선풍기를 틀어 머리를 말리면서 딴전을 부렸다.
"차라리 잘 줬지 뭐. 어차피 버리려던 노인네 아니었어. 제발로 나가 준 노인네야말로 예쁘고 착한 노인네지, 안 그래."
"당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경희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숨기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세요. "
"숨기 긴."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숨기긴 뭘 숨긴다구 그래,"
"시치미떼지 말구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경희는 앙칼지게 내 눈을 쏘아보았다. 나는 그 눈을 마주보았다.
"난 알아요. 당신이 뭘 했는지 알아요."
"알다니. 이거 왜 이래, 생사람 잡지 마."
"그 할아버지가 제 발로 걸어 나갔을 리는 없어요.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
"허지만 사실인 걸 어떻게 해."
"사실이라구요?"
어처구니없다는 듯 경희는 혀를 찼다.
"노망 들린 노인네가 제 발로 나가는 경우는 드물어요. 당신 분명히 대답하세요. 내다 버렸죠. 그렇죠. 버리셨죠."
“……"
나는 선풍기의 스위치를 껐다.
"대답하세요. 왜 사실을 말 못 하시는 거예요. 내 눈을 보구 대답해 보세요. 내 말이 맞죠, 내다 버리셨죠."
"귀찮게 굴지 마."
나는 이빨을 보였다.
"이거 왜 야단이야, 여긴 내 집이야. 양로원이 아니야."
"더러운 사람."
경희는 침이라도 뱉을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구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말 다했어."
내 말은 그러나 알맹이가 없이 공허했다.
"어디다 버리셨어요. 말하세요."
"몰라. 잊어버렸어."
"창 밖을 봐요. 비가 내리고 있어요."
"나하군 상관없어."
"이건 아주 무서운 일이에요. 어째서 우리하구 상관없다는 거예요. 우린 살인을 한 거예요."
"어차피 내다 버릴 영감태기였어. 그 영감태기 가족두 버렸다구. 우린 할만치 했어. 천당 갈 자격증은 얻어 놓은 거야. 가족두 아닌 우리가 데려다 밥 먹이구 재우구 똥 오줌 받아 주구 목욕시키구 술까지 먹이구, 꽃 자르구 원피스 자르는 것까지 다 용써해 줬다구. 그것이면 됐지 뭘 그래. 어쩌자는 거야. 그럼 죽을 때까지 데리구 살 작정이었나. 어차피 헤어질 것은 미리 헤어지는 게 현명한 거야. 너무 나한테만 야단하지 말어."
"일어나세요."
차갑게 경희는 명령했다.
"시간이 없어요. 일어나세요."
"일어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찾아 나가요. 그 할아버지를 찾아 나서요."
"난 못해."
"정말이세요."
"정말이쟌구."
"좋아요. 그럼 어디다 버렸는지 그것만이라두 얘기하세요. 제가 찾아 나서겠어요."
나는 경희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자, 잊어버리자구, 경희. 우린 젊어. 젊은 만큼 젊음을 누릴 권리가 있다구. 자 잊어버리자구."
"비켜요. 그 더러운 손."
경회는 내 손을 벌레라도 되는 것처럼 획 뿌리쳤다. 나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왜 이래. 뭐가 야단난 거야. 이러지 마."
"어디다 버렸어요."
"몰라."
"쓰레기장에 버렸나요."
"천만에."
"어디에요."
"정말 근사한 데 버렸어.
"시낸가요."
"시내 한복판이야."
"명동인가요."
"바로 맞았어."
"됐어요. 그럼."
경희는 벌떡 일어나 코우트를 주섬주섬 입었다.
"어딜 가려고 그래?"
"찾아 나갈 테에요."
"이봐, 명동 어딘지나 알아. 명동은 넓어. 손바닥이 아냐."
"상관 마세요."
경희는 구두를 신었다. 나는 별수 없이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기다려. 이봐, 경희."
쾅 문을 닫고 빠르게 경희는 나가 버렸다. 나는 코우트를 걸치고 경희의 뒤를 좇았다. 아파트 광장에서 경희를 잡을 수 있었다. 빗발은 제법 굵어져 있었다.
우리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빈 차를 기다렸다
택시 속에서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차가 명동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혼잡하던 명동 거리는 이제 늦은 시간이었고 세찬 빗발로 일찌감치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는지 어느 정도 비어 있었다.
비닐 우산 하나를 살 겨를도 없이 경희는 좁은 거리를 뛰기 시작했다, 나는 비를 맞으며 그녀의 뒤를 좇았다.
엉망진창이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이 뜀박질에 겨드랑이 밑이 간질간질하여서 금방이라도 배를 잡고 웃어버릴 것만 같았다. 코미디다.
이것은 저급한 코미디다.
어쩌자는 것이냐, 버린 노인을 또다시 찾으러 가는 이 기묘한 토막극은.
버린 노인을 되찾아 껴안고 나서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엎드려 빌어야 한단 말이냐.
"어디에요."
성당 입구에 서서 경희는 나를 노려보았다.
"저쪽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성당 위쪽을 가리켰다.
"성당 앞 벤치에요."
"그래."
"됐어요. 여기 계세요. 따라오지 마세요."
차갑게 경희는 나를 막아 세웠다.
"나 혼자 올라가겠어요."
나는 홀로 떨어져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꼭 비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오한이 뼈 속 깊이 스며들고 있었다.
밤 깊은 거리는 점점 시들어져 가고 차가운 불빛만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떨고 또 떨었다
그러나 경희는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내 자신 볼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 그렇게 할 자격이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급하게 마신 술이 머리를 뒤죽박죽 혼란시키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참회하는 마음은 일지 않았다. 죄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은 그저 담담했다.
왜 안 올까?
그제서야 헤어질 무렵 내게 손을 내밀던 노인의 그 천진하던 웃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용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돌의 침묵으로 내밀던 노인의 딱딱하게 굳은 그 손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노라는 의미의 손짓이 아니었을까.
나는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갔다.
벤치에 경희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갔어요."
경희는 흐느끼며 내게 외쳤다.
"없어요. 할아버지는 가 버린 거예요."
비 맞은 경희의 머리칼이 함부로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우린 죄를 지었어요. 우린 나쁜 사람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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