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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61. 다시 만날때까지

by 자한형 2022.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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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 만 날 때 까 지

최인호

 

1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가 그 비행기를 탔던 것은 인도적인 의무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카고까지 가는 비행기 값을 싸게 할인하여 여행하여 보자는 속셈 때문이었다. 서울서부터 미국 시카고까지 1,400불 정도의 비행기 값은 내게 크나큰 부담이었다. 400불만 내면 갈 수 있다는 친구녀석의 말은 내게 귀가 번쩍 뜨이는 빅 뉴우스였다. 1,000불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 일이 설혹 내게 마약을 운반해 달라는 부탁이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00불이 아니라 단 10불만 절약해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약을 운반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내겐 그런 식의 도덕감 따위는 아예 결여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돈 1,000불을 절약할 수 있고 그 엄청난 고액에 보상하는 일이 단지 미국으로 운송되는 고아 세 명을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일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역시 미국 녀석들이란 좀 괴상한 녀석들이로군 하고 빈정댔었다.

한국 고아를 미국 관계 부처에 넘겨주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친구 녀석은 내게 그 환상의 비행 티켓을 권유하면서 자기 기관의 상관 미국인을 만났을 때는 단 두 가지만은 엄수해 줄 것을 부탁하였었다.

그것은 내가 독신이 아닌 기혼자라는 거짓말을 해 줄 것과 또 하나는 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친구 녀석의 이야기는 기혼자라면 아이의 기저귀쯤 갈아주었을 테고 우유 병쯤 물려 본 경험이 있을 테니까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철저한 무신론자인 내가 그들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거짓말을 한다면 그들의 관계 부처가 기독교 계통의 자선 사회단체이므로 일단은 그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친구녀석은 이야기했다.

"신청자가 아주 많이 있으니까 말야."

어쨌든 나는 녀석의 말대로 약속된 시간에 S연맹이라는 기관에 나가 그가 시킨 대로 거짓말을 하였다. 거짓말 따위는 내게 익숙해 있었으므로 좀 순진한 편인 미국인을 속이기는 손바닥을 펴고 접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다. 만약 친구 녀석이 내게 미국인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을 권유하였다면 나는 눈물까지 흘려 보일 참이었으니까.

파이프 담배를 피워 대던 미국인은 내게 물었었다.

"건강하세요?"

나는 대답했다.

"건강하구말구요."

물론 내 대답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 서른 두 살 독신인 주제에 결혼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며, 믿지도 않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거짓말을 하였지만 그가 물은 건강하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맹세코 건강했으니까. 단 발가락 사이에 피어오른 무좀 하나만 빼어 놓는다면.

"좋습니다."

그는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했다.

"닷새 후 비행기 출발 세 시간 전까지 이곳으로 와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나는 털이 부엇부엇한 그의 손을 잡고 그리고 흔들었다. 마치 내 어렸을 때 국민학교 마당에서 나눠주던 거대한 우유 통 밖에 그려졌던 미국과 한국이 악수를 나누는 상징적 그림과 같이

그때 우리는 얼마나 그 우유에 탐닉하였던가. 어머니가 만들어 준 종이 봉지를 싸들고 그 우유 통 앞에 일렬로 서면, 우리 주름치마의 예쁜 여담임 교사는 차례차례 우유통 속에 가득 찬 횐 우유를 듬뿍듬뿍 떠서 우리의 종이 봉지에 넣어 주었었다. 그날은 우리 어린이들에게 축제의 날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 곳곳에 앉아 종이 봉지 속에 코를 처박고 기름도 뽑지 않은 날 우유가루를 얼굴이 하얘져라 먹고 또 먹고 그리고 또 먹었다. 그래서 시간이 끝나 수업 시간에 들어서면 다들 곡마단의 어릿광대들처럼 흰 분가루를 얼굴에 하얗게 칠하고 있었으며, 텅 빈 마당엔 횐 우유가루들이 드문드문 화장한 뼛가루처럼 산재해 있었다. 마치 전쟁통에 죽어 돌아온 형의 유골과 같은 우유 가루들이.

다음날이면 우리 반 아이 중에 몇몇 가량은 학교에 출석도 못 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밤새 퍼먹은 그 기름 뽑지 않은 우유 가루에 배탈이 났으므로.

미국인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이제 돈 1,000불을 절약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외국인 거리를 빠져 나오면서 나는 그러나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나는 외국인 앞에만 서면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공연히 쓸데없는 긴장에 휩싸이게만 된다. 입으로는 맛있으나 함부로 퍼먹으면 채 소화시키지도 못하고 밤새 설사를 하는 우유가루처럼, 그들과 이야기를 하노라면 왠지 속이 거북스럽고 편도선이 부어 오른다.

그래서 이번 형 회사 일로 부탁을 받고, 실은 상담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으면서도 나는 별로 외국을 떠나는 흥분으로 잠 못 자는 바보짓을 해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이번이 첫번째 여행은 아니었다. 불과 일년 전 이맘때쯤 나는 미국에 다녀왔었다, 마찬가지로 형의 부탁으로 다녀온 미국 여행이었었다. 처음엔 한 달 예정으로 떠났었다, 일은 불과 사흘 정도면 끝낼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이를테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미국을 여행하면 으레 들러 사진을 찍는 자유의 여신상이라든가, 마천루, 유엔 빌딩, 나이애가라 폭포, 디즈닐랜드 그곳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십여 년 전에 이민을 떠난 누이의 집에 들러 온다는 여행길이었다.

여권의 비자 기간은 두 달이었으므로 돈을 아껴 쓰고 재미있다면 한 달 예정을 두 배로 늦춰 미국 여행을 즐길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달 예정의 미국 여행을 보름으로 단축하고 돌아왔다. 도대체가 미국이 외국이라는 프낌이나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외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남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의 확대판이었다.

내가 태어난 해방된 해 이후부터 우리 나라는 본의건 본의 아니건 미국의 영향을 받아 왔으므로 그들의 종교,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노래. 그들의 음식, 그들의 주택, 그들의 영화, 그들의 책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단지 (걸리버의 여행기)처럼 소인국에서 대인국으로 파견된 사람에 불과하였었다. 차라리 뉴욕의 마천루는 내가 사는 서울의 고전(古典)이었다.

삼일 빌딩을 서너 배 확대하여 놓은 건물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흑인들의 노래는 명동 레코오드 점에서 들려 오는 노래와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뉴욕의 지하철을 탔을 때 차창에 부옇게 떠오른 키 작은 내 얼굴이 누런 황인종이라는 사실이 차라리 놀라와서 나는 내가 동양인 그 중에서도 몽고 인종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몇 번이고 차창에 스치는 내 얼굴을 마주보았었다.

그렇다. 내 머리는 미국인이었으며, 내 얼굴은 동양인이었다.

나는 호텔 방에 틀어박혀 남은 사흘을 내내 텔레비젼만 보고 지냈었다. 뉴욕에 오면 전화 걸기로-하고 적어 두었던 동창녀석들의 전화 번호 메모지를 들쳐 보려 하지도 않은 채 온종일 방영되는 텔레비젼을 보며 저녁이면 번화가에 나가 한 번에 두 편씩 보여 주는 섹스 영화만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미국에 섹스 영화나 텔레비젼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찾아온 용무는 사흘만에 끝났으므로 미리 호텔에 예약한 일주일의 나머지 기간을 뉴욕 관광으로 보내야만 옳았다,

하지만 맨 처음 찾아간 유엔 빌딩 앞에서부터 나는 피로하고 그리고 권태로웠다. 허드슨강 연변에 우뚝 솟은 유엔 빌딩을 찾아가 사진을 보며 상상한 규모보다는 훨씬 큰 빌딩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빌딩이 왠지 연극 세트의 무대인 것과 같아 눈을 비비며 몇 번이고 확인했었다.

유엔 빌딩의 꼭대기 푸른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으므로 유엔 빌딩은 무너질 것처럼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유엔 빌딩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빌딩 옆 잔디밭 위에 소련에서 기증한 낫을 든 노동자상 앞에 앉아, 나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뒤는 얼기설기 못질한 각목과 조잡한 나무판자로 이어진 연극 세트와 같은, 상징적 의미로만의 자유, 상징적 의미만의 평화, 겉으로는 웃으나 실상 속으로는 칼을 빼어 드는 국제적인 쇼우윈도우, 국제적인 사기꾼들이 모이는 로비, 유엔 빌딩을 바라보며 몇 번이고 구역질 을 했었다.

그날 돌아보기로 하였던 몇 가지의 관광 코오스를 포기하고 나는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 나는 뉴욕의 5번 가에서 살아 있는 여인의 성기를 보았다. 조그만 구멍 속에 25센트를 넣으면 구멍 속의 커어튼이 열렸다, 나는 그 구멍 속에 눈을 들이대었다. 유리창엔 조그만 침대가 있었고 그 침대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금발의 미녀가 발가벗고 누워 있었고, 여인은 구멍에 눈을 들이대고 있는 나를 포함한 흑인 두어 명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벌려 보여 주었다. 보는 사람이나 보여 주는 사람이나 뜨거운 호기심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성기를 보여주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 여인의 성기를 보는 동안 내 내부에서 불처럼 뜨거운 정욕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녀와 나를 가로막은 두꺼운 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어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였다면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 여인의 행동은 그저 표본실의 알코올 속에 담겨진 토끼의 내장을 보여 주는 생물 교사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텔레비젼을 보면서 몇 번이고 그 여인을 상기하며 억지로라도 흥분을 불러일으켜 수음을 해 보려고 시도했었다.

나는 눈을 꼬옥 감고 그 침대와 그 여인을 떠올리고 내 머릿속에서 그 침대를 빙글빙글 돌려 보이기 위해 머리를 모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여인은 살아 있는 내가 본 실체가 아니라 서울의 명동 골목에서 살 수 있는 외설 잡지에서 야비하게 웃고 있던 외국 여인일 뿐이었다.

나는 뉴욕의 사흘간을 텔리비젼과 섹스 영화를 보는 것으로 소일하였다. 빈 시간이면 호텔의 창문을 열고 네온이 번뜩이는 뉴욕의 야경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었다, 건너편 건물 벽에서는 '말보로' 담배를 선전하는 거대한 사내의 얼굴이 밤이건 낮이건 담배 연기를 뿜어 대고 있었다.

로스앤젤리스로 건너와 누이를 만났을 때도 나는 처음 며칠간은 기쁨에 차 있었지만 곧 권태와 무위에 빠져 버렸다. 십 년만에 만나는 다 자란 조카애들과 식탁에 앉아 김치와 꼬리곰탕을 먹으며 큰 소리로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고 유난히 긴 장발의 조카애가 기타아를 치며 부르는 (선샤인)이란 노래를 들으며 박수를 치면서 나는 왠지 마음이 공허했다.

밤이면 조카애들은 한 아이는 주유소로, 한 아이는 피자 집으로 아르바이트를 나갔고, 매형은 가게를 지키기 위해 차를 타고 나가고, 누이와 나만 단둘이 남아 털 스웨터를 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이는 미국에 간 이후로 알레르기성 재채기에 걸려 있어 자주자주 재채기를 하고는 눈을 비비며 코를 풀었었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는 일년 내내 추운 곳이 아니고 언제든 여름인데도 왜 두꺼운 털 스웨터를 짜고 있느냐고 묻자 누이는 웃었다,

"그냥 짜는 거지 뭐. 그냥 짜는 거란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누이는 매해 겨울이면 내 스웨터를 짜 주었었다. 그런데도 누이는 미국에 와서도 스웨터를 짜고 있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내내. 그 동안 쉬지 않고 스웨터를 짰다면 누이는 수많은 스웨터와 장갑을 짰을 것이다. 하지만 누이는 단 한 벌의 스웨터조차 짜지 않았으며, 또 한 개의 장갑조차 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스웨터가 완성될 만하면 또다시 풀었으니까. 풀린 털실로 또다시 아무에게도 입혀 줄 수 없는 스웨터를 짜고 다시 풀었으니까.

잠이 들면 한밤중에 조카애들이 돌아오곤 했다. 주유소에 다녀온 큰 녀석의 몸에선 기름 냄새가 났고, 피자 집에서 접시를 닦고 온 작은 녀석의 몸에서는 음식 냄새가 났으므로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누가 돌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큰조카녀석은 돌아와서도 밤이 깊을 때까지 공부를 하고 잠이 들곤 했는데, 녀석의 희망은 빨리 올A학점으로 대학교를 나와 집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한국적 맏아들의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의 책상 머리맡에는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내겐 그 태극기와 눈에 드러나는 한국적 맏아들의 비장한 사명감이 못내 안스러웠다. 나는 그 책상에서 태극기를 치워버려 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그곳에 성조기를 붙여 놓아라, 이 녀석아, 여긴 아메리카다. 여긴 한국이 아니다. 여긴 아메리카다.

한 달 예정의 미국 여행을 보름도 채 못돼 돌아오자 한 녀석은 내게 미국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물었다.

"어때, 미국 년 엉덩이 괜찮데. 백말이 낫니, 흑말이 낫니."

그러니까 이번의 여행은 두 번째의 여행길이었다. 처음 비행기 탔을 때의 가슴 설레는 긴장감도 없었으며, 제주도쯤 가는 기분으로 여권을 받았다.

닷새 후 내가 타는 비행기, 노오드 웨스트가 12시쯤 출발할 예정이었으므로 나는 전날 외국인이 말했던 대로 오전 9시쯤 S연맹으로 나갔다. 나는 9시에 나가고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친구인가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번에 미국으로 입양되는 고아는 도합 열 다섯 명인데. 그 고아들을 미국 시카고까지 데리고 가는 사람은 다섯 명으로 한국인인 나 하나만 빼놓고는 전부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런 일에 두어 번 이상 경험이 있는 모양이었는지 9시 집합 시간에 나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겨우 9시 반 가량 되어서야 한 남자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타났고, 열 시가 가까워서야 또 한 사람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아예 오지도 않고 직접 비행장으로 나오겠다는 전갈이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와 준 사람이 무리들 다섯 명의 리더격인 헨더슨이라는 미국 사람으로 이번 일까지 도합 여섯 번째의 경험을 가진 사내였다.

"안녕 하세요."

그는 서투른 한국말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이번이 처음이십니까."

"."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정각 열 시부터 우리는 S연맹 부속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다. 우리와 함께 떠날 고아들은 보모의 손에 안기거나 좀 큰 놈들은 걸어서 나란히 예배를 보았다. 대부분 첫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이었으므로 보모의 손에 안기었으나, 서너 명의 꼬마들은 대여섯 살은 훨씬 넘어 보였으며. 가장 나이 든 아이는 국민학교 삼 학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나는 유심히 우리와 함께 떠날 아이들을 살펴보았다. 아직 배정 받지는 못했지만 저들 열 다섯 명 중에 내게 할당되는 아이는 아마도 세 명일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빛깔과 같은 모양의 옷들을 해 입고 있었다. 아마 보모 중의 누군가가 일괄적으로 시장에 나가 옷을 산 모양이었다. 아직 겨울이었으므로 추위를 막기 위해서 있는 대로 옷들을 껴입고 있었다. 대부분 몸보다 옷이 컸으므로 다들 형의 옷을 빌어 입은 막내동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린애들은 발리 크는 법이란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옷을 사줄 때도 어머니는 내게 이야기하곤 했었다. 피난 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할 때도 어머니는 내게 두어 배나 큰 옷을 사 주셨었다. 그 옷을 입으면 바지는 서너 겹 걷어야 했고, 팔 소매도 서너 겹 걷어야 했으며. 모자를 쓰면 모자챙이 눈을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나이에도 참을 줄 알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방 크니까. 옷이 커야만 오래 입을 수 있으므로.

부속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부터 벌써 보모들의 품에 안긴 아이들은 기를 쓰고 울기 시작했다. 반사작용으로 모든 아이들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마치 한 마리의 개가 짖으면 모두 따라 울부짖는 사육장에 매인 개들처럼,

원래 나는 형 집에 더부살이하는 편이라 가끔 어린 조카들의 울음소리에 익숙해져 있긴 했지만 열 명 이상의 꼬마들이 한꺼번에 터뜨린 울음소리는 지독스레 요란했다.

일단 기독교도 행세를 한 이상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며 나는 시카고까지 마는 여행길에 제발 순한 녀석이 걸려 주든지 아니면 아예 울지도 못하는 백치가 걸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우린 찬송가를 합창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우리 서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나는 그 찬송가를 몰랐으므로 입만 중얼중얼 따라 하였다, 아이들은 우리들이 찬송가를 합창하자 더욱더 울었다. 외국인들과 보모들은 그 아이들 울음소리에 대항하듯이 더 목소리를 높여 노래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항께 계셔,

주의 크신 사랑 안에 지켜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우리 서로 만날 때,

다시 만날 그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아멘.

 

예배가 끝난 후 우리는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우린 일반 승객과 달리 일종의 화물 책임을 진 보호자였으므로 일반인들보다 먼저 짐과 수속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시겠지만,,,, "

차 속에서 우리들의 리더인 헨더슨이 입을 열었다. 그는 특히 나를 쳐다보며 말을 했다.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한심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시카고까지 이십 시간 남짓 걸리는 여정인데, 그 동안 눈 한 번 붙여 보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형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그것이 1,000불의 대가라면 이십 시간 잠을 못 자는 것은 고사하고 내리 캉캉 춤이라도 추라면 출 판이었으니까.

비행 수속을 끝마치고 대합실로 나서자 핸더슨은 내게 석 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그것은 내가 운반할 세 명의 아이에 대한 신상 명세서였으며, 일테면 비로소 내가 책임질 세 명의 아이를 할당받은 것이었다.

내게 할당된 아이는 생후 7개월의 쌍동이 두 여자아이와 열 다섯 명의 고아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9살의 소년이었다. 배 연석은 9살 난 소년이었는데, 미국식 이름으로는 토마스 배라고 씌어져 있었으며, 생후 7개월의 쌍동이는 이 인순, 이 인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영문 이름은 아직 없었다.

시간이 되어 비행 대기실로 들어갈 때가 되자 보모들이 각자 자기들이 보호하던 아이들을 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배 연석은 묻지 않아도 내가 알 수 있었으므로 잠자코 녀석의 손을 잡아 이끌었더니, 녀석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네가 배 연석이냐."

"

퉁명스럽게 소년은 대답했다.

"내가 너하고 시카고까지 같이 가게 됐다."

나는 서양식 제스처로 소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소년은 내 손을 받지 않았다. 나는 무안해서 허락된다면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생님이 최 선생님이신가요?"

누군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젊은 여인이었다. 양손에 어린애들을 하나씩 껴안고 있었다. 선입견이 없더라도 쌍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 도로 닮아 있었으며,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

나는 대답했다.

"아이, 잘됐군요."

여신은 크게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이 보호하게 되어서 다행이로군요."

여인은 아이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엉겹결에 아이를 받았다.

애들이 순해요. 젖만 제때 주구, 기저귀만 제때 갈아준다면 절대로 울지 않는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대상도 뚜렷지 않은 인사를 하고 아이를 치켜들었다. 도대체가 아이를 안아 본 것은 아마도 내 생전 처음일 것이다. 때문에 나는 당황했다.

갑자기 여인이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이긴 했지만 며칠 새에 정이 든 것일까. 아니면 그냥 낯선 땅으로 떠나는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갓난아이에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험난한 운명이 절로 슬펐기 때문일까. 여인은 울었다.

"인순아."

여인은 울면서 내 오른쪽 옆구리에 낀 아이에게 달려들어 잠자는 애기의 얼굴을 비볐다

"예쁜 새끼. 잘 가라."

여인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복조리를 꺼내 어린애의 옷밖에 매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왼쪽 옆구리에 낀 아이에게도 복조리를 매어 주었다. 나는 딱해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여인을 울리게 한 책임이 내게 있기라도 한 듯이, 나는 마치 그 여인과 간통해서 낳은 사생아를 들고 떠나는 파렴치범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우케이."

헨더슨이 한 애를 무등태우고, 한 애는 안고, 한 애는 완강하게 도망칠세라 혁대를 꽉 잡고는 먼저 출입구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렛츠 고우."

우리는 주춤주춤 그의 뒤를 따랐다. 연석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내 옆을 열심히 따라오고 있었다. 소년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땅만 내려보고 걷고 있었다. 하기야 돌아보았다 한들 아무도 그를 배웅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의 등뒤에 손짓하는 것이란 그를 낳았다가 버린 고의 부모와 그를 태어나게 한 땅뿐일 터이니까.

내게 쌍동이를 넘겨 준 여인은 줄곧 울고만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들과 헤어져 빠져 나왔다.

벌써부터 피로해 있었으므로 차라리 비행기에 타고 나서야 나는 마음이 놓였다. 떠들썩한 이별의 말, 눈물, 헤어지는 이별의 슬픔 따위는 내겐 무관한 것들이었다. 나와 무관한 이상 빨리 헤어지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우리들 이십여 명은 비행기 안 뒤편 좌석에 안내되었다. 하기야 싼 요금으로 비행기를 거의 공짜다 싶게 얻어 탄 신세이므로 비행 소음이 제일 잘 들리는 시끄L러운 뒷좌석을 탓할 수는 없었다.

나는 좌석에 앉자마자 연석을 가장자리로 앉게 하고 벨트를 왁 매어 주었다. 그것은 떠나기 전부터 생각해 온 내 속셈이었다. 물론 비행기가 떠날 무렵에는 붉은 표시등이 반짝 하며 켜지면서 '벨트를 매시오,’ '담배를 피우지 마시오'라는 엄중한 경고의 문구가 밝아지데 마련이다. 비행 출발의 충격에서 보호하려는 것이 그 목적인데, 나는 아예 녀석의 벨트를 시카고에 도착할 때까지 풀어 주지 않을 배짱이었다. 이를테면 우송되는 소포가 풀어지지 않게 잘 포장하듯이 녀석의 몸을 결박하여 도착할 때까지 깨지지 않게 보호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곤히 잠들어 있는 이상 영원히 잠들어 다오를 기도하면서 일단 좌석에 꼼짝없이 매어 둘 요량이었다. 아이들의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손을 들자 왼쪽 손목에 명찰이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마치 기성복 뒤에 붙어 있는 가격 표시처럼.

이 인순. 오른쪽에 누워 있는 아이의 팔뚝엔 그런 스카치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으며, 왼쪽에 누워 있는 사이의 팔뚝엔 이 인자라는 명찰이 붙여져 있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딴 파트의 아이들은 벌써 울기 시작했고, 어떤 애는 벌써 똥을 싸 갓뎀을 연발하며, 한 외국인은 아이를 번쩍 안아 비행기 맨 뒤에 마련된 조그만 대 위에 올려 놓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헨더슨은 막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리고 있었다. 다행히 승객은 별로 없었고, 또 있어도 모두 앞좌석 쪽에만 있었으므로 뒷부분은 우리를 빼놓고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이 일이 도대체 왜 1,000불의 가치가 있는 여행인가 의문이 갈 정도였다. 연석은 벨트에 완강히 매어졌으며, 그래서 얌전히 앉아 있었으며, 기차 길 옆 옥수수가 잘도 크듯이 우리 두 쌍동이는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곤히 빠져 있었다.

아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나는 공짜의 비행기 여행을 하는 것이다.

비행기가 출발 시간이 되었는지 활주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비행 소리가 윙윙거리다 행여 아이들을 깨울까봐 조심스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아이들은 깨지 않았다. 연석만이 내게 큰 소리로 벨트를 풀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도 않고 그저 완강하게 고개만 흔들어 보였다.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빼어 그가 떠나는, 이젠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그를 낳게 한 땅을 돌아보았다. 소년은 조그만 유리창 너머의 김포 공항을 기웃거리며 내다보았다.

돌아보지 마라.

나는 생각했다.

절대로 돌아보지 마라, 차라리 잊어버려라. 네 이름이 토마스 배라면 이젠 배 연석이란 이름을 잊어버려라, 조카의 책상 위에 붙여져 있던 태극 깃발을 떼어버리기를 기원하였던 내 바람을 너는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을 잊어버려라.

활주로 끝에 비행기는 섰다. 잠시 호흡을 가늠하더니 맹렬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느 틈엔가 비행기는 떴다. 차창 밖으로 재빠르게 김포 공항이, 서울이 뒷걸음질쳐 사라졌다. 그리고는 이내 구름이었고 그리고 파란 창공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으로 아이들을 주의 깊게 내려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잠든 아이의 귓속에 솜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아이들은 두어 번 칭얼대더니 또 잠잠했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년석은 자기 혼자서 벨트를 풀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한 소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댑싸리, 소쿠리, 유리항아리."

그러자 연석이가 따라 노래 불렀다.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은 노가리 ,아가리 ,종아리 ,머저리 우리 대가리."

딴 좌석에서는 난장판이었다. 우는 놈, 칭얼대는 놈, 의자에서 거꾸러 떨어지는 놈, 걸어다니면서 노래 부르는 놈. 네 명의 외국 호송인들은 잘 훈련된 응급 처치반원처럼 쉴새 없이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먹이고 그리고 갓뎀을 연발하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들은 완전한 평화였다, 켄터키 옛집이었다. 옥수수는 벌써 익었으며 여름철 검둥이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검둥이 시절은 이제 곧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는 불길한 평화에 불과하였었다, 그러나 그렇다손치더라도 동경에 일단 도착할 때까지는 평온하고 무사무사하였다.

 

2

 

비행기가 동경에 도착하고 손님들이 모두 비행장으로 일단 내렸어도 우린 그냥 기내에 머물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체류하고 떠날 때까지도 아무 일은 없었다. 일이 벌어진 것은 비행기가 시애틀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출발한 직후부터였다.

그 동안은 줄곧 연석과 이야기를 나눈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나는 사실 무료했다. 가져온 몇 권의 책은 이미 따로 부친 백 속에 들어 있었고, 가져온 것은 세면 도구가 든 조그만 백뿐으로 시간을 보낼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심코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술을 한 잔 말라고 했다가 나는 거절당했었다. 그녀는 내가 고아들을 호송하는 책임을 맡은 이상 술은 줄 수 없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젠장, 나는 신경질이 났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피우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정 피우지 않고 못 배길 때에는 일어서서 변소 쪽으로 가 황급히 몇 모금 빨고 돌아와야만 했었다. 따로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든 자주 변소 앞에 쭈그리고 서서 담배를 피웠다. 그럴 때마다 스튜어드들은 내가 혹시 비행기 납치라도 시도할 녀석인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쏘아보는 것이어서 왠지 기분이 언짢았다. 담배는 그렇다 치더라도 술을 못 먹게 되어 있는 규정은 되어먹지 않은 규율이었다. 도대체가 비행기 내에서 싼 값에 한 잔씩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양주의 맛을 고아 때문에 포기하라니.

별수 없이 나는 연석을 불러 세워 되지 못한 질문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녀석은 아홉 살임에도 나이보다 두어 배는 조숙해 있었다. 조숙하다는 표현은 점잖은 표현이고 한마디로 발랑 까져 있다는 편이 맞는 표현이었다.

소년에겐 고아들 특유의 가면을 쓴 것 같은 무표정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늘 이마의 주름을 찌푸리고 못 마땅한 자세로 주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의에 불타고 있는 눈빛은 날짐승의 그것처럼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엄청난 변화를 보이곤 해서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것도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한 노래를.

-짱우 아버지 짱꾸. 짱꾸 엄마 짱꾸. 짱꾸 아들 짱꾸. 짱꾸 대가리 짱구."

가끔 스튜어디스들이 먹을 것을 갖다 주면 소년은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탐욕스럽게 두어 주먹씩 쥐어 들고는 앞좌석 주머니에 불룩하게 저장해 두곤 했었다. 그는 먹고 또 먹고 또 먹었다. 나중에는 스튜어디스가 지날 때면 큰 소리로

"아줌마 배고파. 더 쥐. 더 쥐."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곤 했다. 그럴 때면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스튜어디스는 내게 눈이 둥그래져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고, 나는 할 수 없이 배가 고파 그런다고 통역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스튜어디스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먹을 것을 갖다 주었으며, 그는 그것을 모두 먹어 치우곤 했었다. 그의 작은 몸뚱이의 어디에 그 많은 양의 음식을 저장해 두는 곳이 있을까 싶게도 그는 그저 먹을 것만 찾았다. 지난 몇 년간의 굶주림을 한꺼번에 채우려는 듯이.

하기야 나 역시 그러하였다. 퍼난 시절 나도 미군 지프차가 지날 때면 달려가 목이 멘 소리로

 

"기브 미 츄잉검. 기브 미 쵸콜릿"

을 소리지르곤 했었다.

"헬로. 헬로. 먹던 것도 좋아요."

헬로 헬로. 씹던 것도 좋아요."

 

내가 살던 피난민촌 언덕길을 올라가면 미군 부대가 있었는데, 우리는 철조망 보초병의 교대 시간을 환히 알고 있었다.

가령 검둥이 조오는 인심이 나빠 철조망을 아무리 맴돌아도 껌 하나 주지 않는다든지, 흰둥이 톰은 마음이 좋아 우리가 나타나면 주머니에 든 먹이를 뿌려 준다는 사실을 환히 알고 있어서 콤이 보초를 교대할 시간이면 우리 조무래기들은 보다 빨리 그를 만나러 언덕길을 물방개처럼 달려가곤 했었다. 흰둥이 톰은 우리가 달려오면 새에게 모이를 주듯 준비한 과자를 던져 주곤 했었다. 우리는 와아하고 흩어져서 그것을 줄고 그리고 갈대 숲이 우거진 바닷가 절벽 위에서 그것을 아껴 먹었다. 빨리 없어질까 조바심하면서 비스킷을 쥐처럼 갉아먹었다.

"오래 씹어라."

같이 달려간 작은누이는 내게 늘 말하곤 했었다.

동산에 봄이 오면 누이와 나는 진달래 꽂잎을 따먹으러 산과 들을 헤매었는데, 하루 종일 진달래를 먹다 보면 침이 피처럼 붉게 되었었다.

"오래 씹어 먹어라. 꼭꼭 씹어 먹어라."

무엇을 먹을 때마다 누이는 내게 말했었다.

연석의 탐욕적인 식욕은 이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같아 나는 그의 게걸스런 저작을 볼 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졌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면 소년은 한 바퀴 기내를 휘 둘러보고 돌아오곤 했었다.

"고향이 어디냐."

무료한 끝에 말벗이나 해야겠다고 나란히 내 옆에 앉히고 나는 물었었다.

"몰라요."

소년은 대답했다.

"아빠 엄마 생각나니."

"몰라요."

그는 또 대답했다.

"너 어디 가는 줄 아니.

"알아요."

"어딘데."

"1미국."

"좋으냐."

소년은 머뭇거렸다. 그는 앞좌석에 저장해 둔 사탕을 입 안에 처넣었다. 와드득 사탕을 깨물었다.

좋아요."

"토마스 배란 이름은 누가 지어 주었어."

"양아버지가요."

"만났었니."

"작년에 만났었어요."

"어디서."

"고아원에서요."

소년은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은 노가리 ,아가리 ,머저리 ,우리 대가리. 우리 대갈통."

서울서부터 동경까지는 텅 비었던 뒷좌석이 동경에서부터는 새로 탑승한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공기는 혼탁해졌으며 시끄러워졌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하자 돌연 쌍동이 중의 한 애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죽은 듯이 조용하던 아이는 지금까지의 조용함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당황해져서 그 아이의 울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각하였다. 기저귀가 젖었는가 만져 보았더니 놀랍게도 똥과 오줌을 한꺼번에 싸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뒤쪽으로 달려가 차곡차곡 개어 놓은 기저귀 중에서 하나를 꺼내 젖은 기저귀를 버리고 새로 갈아주었다, 쌍동이의 신경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또 한 아이도 갑작스레 울기 시작해서 나는 한 애는 우유 병을 물리고 한 애는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정신없이 해치웠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분명 떠나기 전 내가 배운 육아 기초 상식으로는 몸이 불편하지 않은 이상 어린애는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젖거나 둘 중에 하나의 이유로 울게 마련이라는 상식을 쌍동이들은 깨뜨리고 있었다. 기저귀를 갈아주어도 아기는 울었으며, 우유병 을 물리고 거의 한 병을 다 먹어도 또 울었다.

겨우 울음이 멈췄다 싶으면 한참 기어다닐 때라 아이들은 용트림하여 좁은 좌석을 벗어나 기내 카페트가 깔린 통로로 기어나가려 했다. 그것을 말리면 또 울었다. 그뿐이랴.

지금까지 낯선 풍경에 주눅이 들어 있던 연석은 이미 익숙해 만만해져 버린 기내를 함부로 돌아다니다 스튜디어스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끌려왔었으나 잠시 한눈을 팔았다 싶으면 금방 어디론가 행방불명되어 버렸었다.

한번 깬 아이들은 잠시도 나만 있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생후 7개월이면 이제 마악 운동 신경이 발달할 때이며, 닥치는 대로 만지고 찢고 기어다니고 똥을 싸고 먹어대는 한창때이므로 얌전히 좌석에 앉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전혀 무리였었다. 원칙대로 한다면 아이들은 제멋대로 기내 통로를 기어다니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쌍동이는 필사적이었다. 안으면 안는 대로, 쥐면 쥔 대로, 잡으면 잡은 대로 손가락을 벗어나려는 산 생선의 요동처럼 발악하며 그리고 울었다. 내 앞 옆에서. 마치 내 몸 양쪽에 돋아난 지느러미처럼.

나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웃통을 벗어버리고 필사적으로 한 아이 입에는 우유 병을 물리고 한 아이는 기저귀를 잘아 주기 위해 통로를 비상 걸린 훈련병처럼 뛰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서울을 떠난 지 다섯 시간이 넘었으므로 내 몸 역시 솜처럼 피곤할 무렵이었다. 비행기는 태평양을 넘어가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려다보면 망망한 바다 위에 태양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무심한 바다 그 수천 피트 상공 위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어느 잡지에선가 본 만화가 떠올랐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한 어른이 노래를 불러도 춤을 추어도 어린애는 계속 울었다. 마침내 어른이 엉엉 울어 버리니까 아이가 방실방실 웃었다는 내용의 만화였다.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보았다. 도리도리 짝짜꿍에서부터 잼잼잼, 카쿵카쿵. 혓바닥을 내밀기도 하고. 그러나 아이들은 더 울었다. 내 낯선 얼굴에 낯가림을 하던 차에 내가 행하는 기괴한 재롱이 더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을까. 그들은 초대된 두엣 쌍동이 가수처럼 나란히 울었다.

나는 헨더슨에게 얻은 공갈 젖꼭지를 물려 보기도 하고 딸랑이 장난감을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울었다. 겁을 주기 위해 눈을 치켜 떴다. 더욱 울었다. 결국엔 나 자신이 울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만화의 어른처럼.

어느 틈에 창 밖은 어두워 가고 앞쪽 스크린엔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다. 개가 인간을 구했다는 무용담의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잠시 눈앞을 스쳐 가는 스크린을 쳐다보느라고 조용하다가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악을 쓰고 울었다.

놀라운 것은 옆에 탄 승객들이었다. 그들은 절대 아이들의 울음을 시끄러워하거나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쳐 빠지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위스키."

스쳐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나는 애원하듯 소리를 질렀다.

스튜어디스는 웃었다.

"노우."

스튜어디스는 대답했다.

"술은 안 됩니다."

"딱 한 잔만."

"아엠 쏘리."

스튜어디스는 사라졌다. 나는 헐떡이며 내 얼굴을 할퀴는 쌍동이의 엉덩이를 세차게 꼬집어 뜯었다. 아이는 불에 덴 듯 울었다.

연석은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라. 웃기지 마라. 내 앞에서 웃기지 마라. 살살 웃기는 고 바람에 신세 조진 사나이가. 못 먹는 술 먹여 놓고 살살 웃기는 그 바람에 그 많은 재산 다 팔아 조지고 신세 조진 사나이다."

"시끄러워, 이 자식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연석은 나를 흘깃 보았다. 그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노래를 불렀다.

"돌리지 마라. 돌리지 마라. 내 앞에서 돌리지 마라. 살살 돌리는 그 바람에 신세 조진 사나이다."

나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따라와."

나는 비행기 통로를 걸어갔다. 돌아보니 소년은 엉거주춤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변소 문을 열고 소년을 그 안에 밀어 던져 버렸다.

나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곳에서 단숨에 그가 노래한 대로 그의 '대가리'를 쥐어박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외국인의 눈이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내가 만약 그곳에서 한 대 쥐어박는다면 그들은 나를 유아 학대하는 야만인 취급을 할 테니까.

소년은 나를 마주 노려보았다.

"이 자식아."

나는 속삭였다.

"한 번만 더 입을 나발거리다간 가만두지 않겠어. 알겠어."

소년은 잠자코 서 있었다.

"대답해,"

소년은 바지를 끌렀다. 그리고 내 앞에서 그의 성디를 꺼내어 들었다. 그는 오줌을 갈기기 시작했다. 오줌은 수천 퍼트의 창공을 낙하하여 태평양 바다 위에 떨어질 것이다.

나는 먼저 변소를 나와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자리에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하얗게 머리가 센 외국인 할머니가 어린애들을 어르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자 할머니는 어린애를 내 손에 안겨 주었다. 아이들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헐떡이며 떠날 때 김포 비행장에서 받은 신상 명세서를 펼쳐 보았다

 

이름 : 이 인순.

생년월일 : 1976626.

몸무게 : 6.2kg,

성격 : 온순한 편. 우유만 제때에 주고, 잠만 잘 재워 주고, 기저귀만 잘 갈아 주면 울 지 않음. D P T, 예방 접종 완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 마라. 성격이 양순한 편이라고, 어째서 이 자식의 성격이 양순한가. 다시 타이프 하라. 솔직히 써라.

성격 : 걷잡을 수 없음. 우유를 먹여 줘도 울고, 기저귀 갈아 줘도 울음. 악질적임. 주크 (gook)의 표본임.

연석은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은 노가리 ,아가리 ,종아리 ,머저리 ,우리 대가리. 창 밖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영화도 끝나고 식사도 끝났으므로 하나 둘 좌석을 쓰러뜨리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스튜어디스가 준 담요를 둘둘 감고서. 그러나 사투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기내의 혼탁한 공기 때문일까. 아이들은 보채고 울고 내 얼굴을 할퀴고 그리고 우유를 토했다. 나는 몇 번이고 분수처럼 우유를 토하는 아이들의 순두부와 같은 더러운 오물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내 몸에서는 어린애들의 똥과 오줌, 토한 오물로 더러운 가축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편도선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맥주."

나는 거의 울듯이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스튜어디스는 나를 난감한 듯 내려다보았다.

"좋아요. 대신 딱 한 잔입니다."

"댕큐."

나는 눈을 감았다.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공짜는 없는 법이로군. 이제 또다시 이런 일치 생긴다면 1,000불의 디스카운트가 아니라 십만 불이라 할지라도 나는 더 이상 이런 우스꽝스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맹세코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맹세할 것이다. 아멘.

스튜어디스는 차디찬 맥주 한 잔을 내게 주었다. 나는 단숨에 그것을 삼 켰다. 공연히 비감한 생각이 들어, 울고 있는, 한없는 울음을 계속하는 쌍동이들을 말없이 우울하게 내려다보았다. 그 아이들이 갑자기 내 새끼들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아이들과 나는 버림받은 것이다. 이 아이를 낳아 준 에미는 도망가 버리고.

"미스터 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돌아보니 헨더슨이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걸 먹이시오."

헨더슨은 약 봉지를 내게 내주었다.

"우유에 한 봉지씩 타서 먹이시오."

"뭡니까. "

"수면제요. 한 서너 시간 잘 겁니다. 내일 아침엔 시애틀에 닿으니까요."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비행기 뒤편으로 걸어갔다, 더운 물에 우유를 타서 흔들며. 나는 왜 출발할 때는 시끄럽던 아이들이 태평양 상공에서부터 줄곧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의아했던 의문점들이 그제서야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이런 일에 두어 번 이상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예 수면제를 타서 먹였던 것이다.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 수면제를 섞는 손끝이 떨려왔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수면제를 타서 먹이는 비인간적인 행위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들었다. 그들은 왕왕 어린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수면제를 타서 먹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화났던 것은 왜 그들은 나 혼자 거의 사투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 것을 수 시간 보았으면서도 지금까지 개의치 않았는가 하는 데에 대한 분노였다,

주크. 너는 주크다.

까닭 없이 우유를 타는 내 가슴속에는 영어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 말은 전쟁터에서 미국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던 단어였다. 주크는 토인 혹은 바보, 황인종이라는 의미를 파지고 있는 미국 속어였다.

Gook. You are a gook !

너는 토인이다. 너는 비열하고 더러운 황인종이다 !

나는 돌아와 그들에게 우유를 먹였다. 수면제를 탄 우유를 나의 작은 주크들에게.

쌍동이는 잘 받아먹었다. 그리고 놀라웁게도 이내 잠들어 버렸다.

비행기는 정적에 빠져 있었다.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고개를 빼어 창 밖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는 검은 태평양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망망한 바다. 고래가 숨쉬는 바다 위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야만 미국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온몸은 쑤시고 솜처럼 지쳐 있었다.

미국은 너무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을 형제처럼 믿고 있다. 이처럼 멀고 먼 거리를 넘어야만 만날 수 있는 미국을. 아니다. 미국은 단지 그 엄청난 거리로서만 우리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거리뿐 아니라 사고의 개념 자체에 있어서도 우리와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우리가 아무리 산업사회로 줄달음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푸른 눈을 닮지 못하듯이 그들이 아무리 우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체는 될 수 없다. 그들은 이방인이며 분명한 서양인이다.

우리가 운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우유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우유 속에 수면제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현명한 미국인들은 절대 그 우유 속에 넣는 수면제의 양이 치사량을 넘어설 만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는 아이를 잠재울 만큼 수면제를 탈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을 맹목의 잠 속에 빠뜨릴 것이다. 그것은 인도적인 수면제의 투여가 아니다. 그것은 재갈이다. 우리는 그들의 재갈에 물려 있다.

그들은 우리들이 왜 우는가를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 울음은 자아의 표시이며 인격의 표현이다. 그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수면제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덫이며, 재갈이며, 가위에 눌린 꿈이다. 우리는 깨어나지 못한다.

어릴 때 우린 배웠다. 음악 시간이면 뉴똥 치마 입은 담임 여교사가 찌그러진 풍금을 눌러 댔다. 풍금을 두드리면 쉬익쉬익 바람 새는 소리가 나곤 했다.

싸악싸악 닦는다 윗니 아랫니. 싸악싸악 닦는다 윗니 아랫니.

이 잘 닦는 아이는 착한 어린이. 웃을 때 반짝반짝 보기 좋아요.

우리들은 그 노래를 합창할 때마다 모두 손가락으로 자기의 이빨을 닦는 시늉을 했었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칫솔을 사용하는 아이는 과연 몇 명이었던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칫솔질을 우린 그 노래를 합창하면서 환상의 칫솔인 손가락으로 해댔었다. 마치 손끝에 털이라도 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굵은 강소금으로 이빨을 닦았었다. 손가락에 듬뿍 소금을 묻혀 한여름 썩지 말라고 생선을 소금 저장하듯 잇몸을 세차게 문지르곤 했었다. 매번 이발을 닦을 때마다 잇몸은 상해 아까운 피가 입 안에 가득 차 오르곤 했었다. 그래서 우리 또래의 아이들 입에서는 누구든 조선 간장 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체육 시간에 한 대의 미군 지프차가 우리 학교들 방문했었다. 미리 전달을 받은 우리들은 운동장에 늘어서서 그들을 박수로써 맞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나눠 준 것은 치약과 그리고 칫솔이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운동장엔 초봄의 햇살이 가득하고 뜰엔 개나리가 만발했었다. 우리는 여담임 교사의 구령대로 넓은 간격으로 늘어섰다. 손엔 치약과 칫솔을 들고서. 반장이었던 나는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연단 위에 섰다.

우리는 추계 운동회 때 매스게임을 하듯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올바른 이빨 닦는 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환상의 칫솔이 아닌 실제의 칫솔 위에 신비한 치약을 조금 짜서 우리들 늘 짠 소금 냄새에 젖어 있는 누런 이빨을 일제히 비비대기 시작했다. 향기로운 치약 거품이 입 속에 가득 차 오르고 우리는 모두 입으로 정액을 뿜어대듯 광란의 환회에 떨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마구 치약 거품을 꿀덕꿀덕 삼키곤 했었다. 뱉기엔 그 치약 거품이 너무 아까웠으므로. 마치 향기로운 비누로 얼굴을 씻은 후 그것을 닦아 버리려 하지 않고 눈으로 들어가는 매운 비눗기를 양지바른 곳에 서서 인내로 참으면 이윽고 물기가 걷혀 나가고 마침내는 얼굴에 비눗기만 매끄럽게 남아 오랜 시간 향기로운 비누 냄새가 나듯. 우리는 달콤한 치약 거품을 뱉어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을 삼킨다면 비눗방울을 밀집대로 날려보내 무지개를 만들어 내듯, 우리가 말을 할 때마다 치약 거품이 입 안에서 한 방울씩 한 방울씩 민물게처럼 솟아나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연단에 급우들과 마주 서서 칫솔질을 하며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친구들이 일제히 구령에 맞춰 흔들어대는 칫솔질을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치약과 칫솔을 준 미군은 우리들을 카메라로 찍기 시작했다, 나는 부1L러웠다. 그리고 구역질을 했다. 그들의 행위에 분노를 느낄 만큼 아직 크지 못했으므로 단지 칫올대가 목구멍 깊숙한 곳을 찔렀기 때문에 웩웩 구역질을 했을 뿐이었다

왜 선생님은 저들의 카메라를 막아서지 못하는가.

이제야 나는 안다. 과연 그들이 우리에게 치약과 칫솔을 준 것은 우리들에게 위생적 생활을 가르척 주려는 인도적인 의미였을까, 아니면 우리들의 희희낙락하는 꼬락서니를 카메라로 담기 위함인가.

마찬가지로 수면제를 먹고 잠든 열 다섯 명의 고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마다 크리스마스날이면 우린 교회에 나갔었다. 혹시 그들이 보내 주는 헌 옷가지라도 얻어 입을 요량으로. 우린 헐벗고 굶주렸으므로 그들이 입다 버린 옷들을 부러워했었다.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다가 아무 옷이나 집어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입었다. 대부분 컸었다. 옷은 따스했으며 질겼다. 어쩌다 주머니를 뒤지면 주머니 속에서 껌이나 과자가 나오기도 했었다. 마치 우리가 먹었던 꿀꿀이죽 속에서 어쩌다 만년필이 튀어나와 횡재하는 것처럼.

"벗어라. "

내가 교회에서 얻어 입은 옷을 껴입고 집으로 돌아간 성탄절 날 어머니가 내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리시면서 말씀하였다.

"당장 옷을 벗어 버려라."

내가 그래도 옷을 벗으려들지 않자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남의 옷을 빌어 입으면 남의 누명을 쓰는 법이란다. 남의 죄를 뒤집어쓴단다."

이 열 다섯 명의 고아를 데려가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과연 청교도적 휴우머니즘 때문일까.

자식들을 일 년에 한 번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 속에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외롭고 쓸쓸한 은퇴한 미국인 노인들이 그들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돈을 모아 사들여 가는, 일테면 살아 있는 인형의 존재가 아닐까.

아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왜 이처럼 모든 것을 비뚜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인간적인 따뜻한 박애정신을 왜 모독하고 있는가. 그때였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밤들어 있지는 않았다. 단지 꼬리를 무는 기억 속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스튜어디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을 자서는 안 쉽니다. 당신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나는 신경질이 났다.

"난 잠을 자지 않았소."

"눈을 감고 있었잖아요."

"제기랄."

나는 한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몸은 솜처럼 피로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밝은 불은 다 꺼져 있었고. 개인등만 조그맣게 켜져 있어서 기내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모두들 담요를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도 꽤 깊어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시간을 변경하였지만 새벽 세 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쌍동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고, 연석은 눈을 말똥말똥 뜨오 앉아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좌석에서 일어나 복도를 걸어 비행기 뒤편으로 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댕기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라이터는 없었다. 나는 모든 주머니를 열심히 뒤져 보았다, 그런데도 라이터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행기에 타고 나서 수십 차례 담배를 피우지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비행기 뒤편으로 오르내렸었어도 라이터는 늘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혹시 좌석에 떨어지지 않았나 살펴보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백 원 짜리 주화가 카페트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뿐 라이터를 찾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성냥을 빌어 불을 댕겨 물고 나는 비행기 뒤편으로 가 흡연을 하다가 문득 어쩌면 라이터가 저절로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없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라이터는 저절로 움직일 수 업는 무생물이었으므로.

나는 그 순간 지난 낮에서부터 연석이가 내 라이터를 들고 몇 번 찰칵찰칵 켰다가는 끄고 켰다가는 끄고 반복해서 호기심을 보였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나는 무언가 뜨거운 용암이 머릿속에 분출되어 솟아오르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나는 절망했다.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될 수 있는 한 분노를 나타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자리로 돌아왔다. 절대로, 절대로 이 비열한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연석의 등을 두드렸다. 소년은 나를 마주 보았다.

"일어나라."

"왜요."

퉁명스럽게 연석은 나를 보았다.

"일어나."

나는 강제로 소년의 목덜미를 끌어올렸다.

"아야야야, 아야야야."

소년은 느닷없는 비명을 질렀다. 몇몇 승객이 우리를 보았다. 나는 헐떡였다.

"일어나. 이 새끼야."

소년은 비틀대며 일어섰다. 우리는 복도를 지나 비행기 뒤편으로 갔다. 나는 변소 문을 열고 소년을 밀어 넣었다.

"내놔."

변소 벽에 밀어붙인 후 나는 소년의 밤을 가볍게 때렸다.

"뭘요."

소년은 덤빌 듯이 이빨을 보였다

"훔쳐 간 것 내놔,"

"웃기시네."

소년은 웃었다.

"웃기지 마세요."

로스앤젤레스에서 스웨터를 짜며 누이는 말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한밤중에 깜둥이가 권총을 들고 들어온단다. 그럴 땐 절대 깜둥이 얼굴을 봐서는 안 된다. 보면 총을 쏴요. 그저 돌아서서 손을 들고 다 가져가라는 한 마디만 해야지."

"너는."

나는 헐떡였다.

이제 미국에 가서도 총을 들고, 강도짓을 할 참이냐, 깜둥이처럼."

"남이사."

소년은 웃었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 말든."

"이 새끼가."

나는 소년의 뺨을 때렸다. 상상외로 힘이 들어갔던 모양이었다. 소년은 뺨을 곧추세우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내놔라. 훔친 물건 내놔."

소년은 떨면서 응답 없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안 내놓으면 뒤지겠다. "

소년은 서서히 손을 들어 보였다. 마치 항복하는 자세로, 나는 소년의 몸을 훑어 가기 시작했다. 물론 내 행동이 몰상식한 행동임에는 분명하였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떠나는 녀석에게 무언가 베풀어 줘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있었다. 나는 녀석의 나쁜 버릇을 마지막으로 꾸짖어야만 하는 최후의 증인이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사탕이 두 개 나왔다. 그리고 나무로 깎은 팽이가 한 개 나왔다. 몇 개의 유리구슬. 지남철. 그리고는 없었다. 라이터는 주머니에 들어 있지 않았다.

"어디다 감췄니."

"없으면 됐지, 봤잖아."

".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넌 쓰레기다. 도둑놈이다."

나는 변소 문을 열고 자리로 돌아왔다.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면 녀석의 몸을 들어서 변기통 속에 던져 버리고 싶었을 정도였다.

이때였다. 갑자기 어린애가 깨러 울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우는 아기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마치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나는 일어서서 빈 우유 병에 우유를 가득 타서 저었다. 그리고 남은 수면제를 모조리 넣었다. 그리고 흔들었다.

자거라. 이 자식들아.

나는 우는 아이의 입에 우유 병을 들이밀었다. 아이는 그것을 사납게 빨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잠이 들었다. 몇 분 지나자 또 한 애가 울었다. 나는 미리 준비하였던 우유 병을 물렸다. 그 아이 역시 독살 당한 개처럼 이내 잠잠해졌다.

"도둑 아버지 도둑. 도둑 엄마 도둑. 도둑 아들 도둑. 도둑 손자 도둑,"

제 자리로 돌아온 연석이가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3

 

비행기는 오전 8시쯤 시애틀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는 밤새 태평양을 건너 마침내 미국,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오브 어메리카에 도착한 것이었다.

도착하기 두 시간 전부터 쌍동이는 깨어났고 그 여느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었다. 또다시 그 애들의 울음을 잠재우기 위해 수면제를 먹일 수는 없었다, 헨더슨에게 수면제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얻어 온 많은 양을 이미 다 소비하고 한 번 더 얻는다는 것은 염치 없는 일이었으며, 또한 내게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안 됩니다. 더 이상 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소아과 의사처럼 내게 머리를 흔들며 대답할 것이다. 설혹 그가 순순히 내게 수면제를 다시 주었다 한들 그 애들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수면제를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소 감정적인 동요로 많은 양의 수면제를 타 먹이고 나서 나는 몇 번이고 잠든 아기들을 바라보며 반성을 했고 그들에게 후회했었다. 어쨌든 그들이 내 비행기 값을 1,000불이나 할인하게 해 준 장본인이라는 고마움보다도 이제 그들이 내 곁을 떠난다면 영영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의 품은 마지막이 아니겠느냐는 일차원적인 센티멘털한 동정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핏줄이며, 그런 이상 그들에게 따스하게 대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쌍동이는 동시에 깨어났으며 깨어나자마자 반사적으로 울었다, 비행기 안은 잠시 후면 미국에 도착한다는 기쁨으로 모두들 일찍 깨어 술렁이고 있었고, 덩달아 연석이도 고리 풀린 망아지처럼 노래를 부르며 비행기 안을 뛰놀고 있었다. 모든 고아들이 한꺼번에 깨어나서 앙앙앙 울기 시작했으며 우리는 다시 바빠졌다.

창문으로 밝은 햇살이 부채살을 펴들었다. 떠나고 나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는 피로감이 햇살과 더불어 강렬히 다가왔다. 창 밖은 아직도 망망한 바다였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서 뜨거워진 프라이팬 위를 튀어 오르는 기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기저귀를 갈아주어도 울었고 우유를 먹여도 울었다. 안아 주어도 울었고 닥치는 대로 할퀴고 있었다.

악동이다. 지옥이다.

나는 아이의 엉덩이에 묻은 푸른 똥을 휴지로 닦아내고 살갗 위에 젖은 똥은 기름 묻은 가제로 닦아내리면서 자신을 비웃었다.

이것이 아비규환이다.

손에 묻은 똥과 오줌을 변소의 물을 틀어 닦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미국이다."

창가 쪽에 앉아 있던 노파가 소리를 지르자 너도나도 창가로 몰려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환희에 찬 고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과연 바다는 끝이 났으며 황금의 땅, 미국의 땅덩어리가 완만한 회전을 하면서 시야에 들어왔다. 바다와 육지가 마주한 경계선엔 하얀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짐들을 정리하고 시선이 마주치면 미소를 띄우는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벨트를 매시오.

붉은 표시등의 불이 켜졌다.

담배를 피지 마시오.

붉은 표시등의 불이 켜졌다.

나는 피로에 겨운 무거운 손을 들어 연석의 벨트를 죄어 주었다. 나 역시 벨트를 매고 결박당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비행기가 점점 고도를 강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발악적으로 울고 있었다. 연석은 그가 처음 도착하는 미국의 땅에 대한 공포로 손등에 난 사마귀를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연석을 보았다.

이제 나는 그를 꾸짖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그의 땅에 온 것이니까. 이젠 내가 이방인이 되었으니까. 어린애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나면 울듯이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맞는 미국 땅의 제일성을 울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점점 고도를 낮추자 하늘만 보이던 창 밖으로 땅이 너울거렸다. 점점 나무와 숲과 도시의 빌딩이 비대해져 갔다.

와아. 곤두박질치는 비행기로 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무언가 금속성 소리가 났다. 활주로 위에 비행기 바퀴가 닿는 소리였고, 저항하는 공기를 뚫는 비행기의 진저리치는 아우성이 고조되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비행기의 속력은 죽었다.

비행기는 그렇게 미국에 닿았다.

나는 피로에 지쳐 허리를 된 벨트마저 풀어 버리려고 하지 않고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활주로에는 정박하고 있는 비행기들이 열대어처럼 누워 있었다. 관제탑에 씌어진 시애틀 인터내셔널 에어포트'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으로는 미국의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 사람씩 짝지어 일어나 떠들썩거리며 사라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며 우는 아이의 볼을 웃으면서 도닥거리곤 했다.

우리는 그들이 다 지나갈 때가지 움직이려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우리는 언제든 비행기에 계일 늦게 타야 했으며, 내릴 때는 제일 늦게 내려야만 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지켜야 할 규율이었다. 늦게 내릴 뿐 아니라 간단한 기내 청소까지 해야만 했다.

더럽혀진 기저귀들과 휴지, 과자 봉지, 우유 병들을 차례차례 챙겨 들고 최소한 우리 주위의 청소를 완료하는 것이 임무였다.

사람들이 다 내리자 연석이가 일어났다.

"앉아 있어라. "

나는 목쉰 소리로 녀석을 불러 세웠다.

다 왔잖아요."

아직 멀었다. 서너 시간 더 가야만 한다."

"우라질,"

연석은 투덜거리면서 앉았다.

"더럽게두 멀다."

그때였다. 한 메의 중년부인들이 한꺼번에 비행기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또한 녹색의 가운을 입고 있었고 가슴에는 십자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내 앞에 선 중년부인이 손을 내밀면서 웃었다. 그 손에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여인은 우는 아이들의 입에 고무 젖꼭지들을 물리고는 익숙하게 안아 들고 차례차례 비행기를 빠져 나갔다. 연석은 졸랑졸랑 그 여인의 뒤를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라가고 있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인가. 벌써 그들에겐 본능적인 적응력이 생겨 버린 것일까. 연석의 손은 그 중년부인의 매니큐어 칠해진 손을 놓칠세라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좌석에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아이들의 벗겨진 양말 조각 한쪽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주워들고 나는 비행기 트랩을 빠져 나왔다.

"두 시간 후에 비행기는 출발합니다."

핸더슨이 내 곁을 따라오면서 말을 했다.

"그 동안 공항 대기실에서 잠을 한숨 주주시지요. 어때요. 피곤하시죠."

"."

나는 대답했다.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미국엔 처음인가요."

"아뇨. 두 번쨉니다."

"임무의 삼분의 이는 끝난 셈입니다. , 난 아이들의 입국 수속을 하러 가겠습니다, 이제 그들은 미국 시민들이니깐요."

그는 사라졌다. 나는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 여권에 입국 도장을 받고는 대기실로 올라갔다.

아기들은 미국 여인들의 품에 안겨 한 구석에 몰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서 앙앙거리고 울던 애라고는 생각 들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나와 무관하여 보였다. 그들은 울기는커녕 기쁨의 소리를 지르면서 제멋대로 대기실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비행기 내에서는 잠 한숨 못 자게 되어 있는 규정 때문에 쉬는 시간에라도 눈 한번 붙여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왔다. 건너편 의자에 연석은 앉아 있었다.

미국인 중년 부인이 주었는지 손에는 태엽을 주면 준 만큼 그림이 돌아가며 노래가 흘러나오는 장난감을 들고 있었다.

소년은 태엽을 주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런넌 브릿지 폴링 다운. 폴링 다운. 폴링 다운. 런던 브릿지 폴링 다운. 폴링 다운. 마이 페어 레이디."

소년은 태엽이 끊어지면 또다시 태엽을 돌려 음악을 틀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서는 소년이 비행기 속에서 부르던 노래의 가사가 떠올랐다.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은 노가리 ,아가리 ,종아리 ,머저리 .우리 대가리. "

우스꽝스럽게도 소년의 손에 든 장난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곡조와 비행기에서 부르던 노래 곡조는 똑같았다. 단지 가사만 다를 뿐이었다. 원래 외국 곡에다가 가사만을 지어 아이들에게 동요로 불리웠던 모양이었다.

이제 소년은 리리릿짜로 끝나는 말을 찾지 않아도 된다. 조금 후면 소년은 유창한 영어로 노래를 부를 것이다. 리짜로 끝나는 말은 잊혀질 것이다.

개나리. 소쿠리, 미나리. 코끼리. 병아리. 항아리......

그 대신 다른 가사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곡조는 같으나 가사만 다른.

"런던 다리가 무너집니다. 무너져, 무너져요. 무너져, 런던 다리가 무너진다구요. 귀여운 꼬마야. "

나는 짚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 잠은 핸더슨에 의해 깨워졌다. 두 시간 동안 대기실에서 정신없이 잠 속에 빠졌었던 모양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었던 숙면이었다.

"미안합니다."

헨더슨은 내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한 듯 상냥하게 웃었다.

"비행기에 타야 합니다. 곧 출발합니다."

우리는 나란히 트랩을 걸어 비행기 속으로 들어갔다. 외국에서 오는 탑승객이 다 내리고 오직 시카고까지 가는 국내 손님들만이 탔기 때문인지 비행기는 텅텅 키어 있었다. 우리는 우리들 전용 좌석에 앉았다. 한 두어 시간 정신없이 잤던 탓인지 몸은 한결 개운해 있었다. 일단 미국까지 왔다는 사실로 긴장감이 풀려 피로도 가시고 있었다.

이제 세 시간 정도만 가면 내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나는 병사가 휴식 시간에 총을 분해 소제하듯 우유 병에 데운 물을 붓고 우유를 타 흔들어 준비해 놓으면서 다짐했다. 돌연 미국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대기실에서 정신없이 잠을 잔 일이라는 사실이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고아들은 출발하기 직전에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안고 떠났던 여인들에 의해 또다시 우리들의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주 귀여운 아이여요. "

여인은 쌍동이들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때였다.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나를 보고 방실방실거리면서 웃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비고 다시 그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분명히 아이들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우연히 떠오른. 웃음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나는 조카들을 잘 안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다 안아보려 하면 아이들은 불에 덴 듯 울었다.

"낯이 설어서 그래요."

형수는 민망한 듯 그렇게 대답하곤 했었다. 내 손에서 벗어나 형수에게 돌아가는 조카들의 얼굴에는 언제 울었냐 싶게도 웃음이 피어오르고 안도의 기쁨이 충만하고 있었다. 그 웃음을 나는 쌍동이의 얼굴에서 본 것이었다. 그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아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벨트도 매지 않고 그 아이들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들이 태평양 상공 위에서 나를 괴롭혔던 만큼의 역비례한 기쁨이 용솟음쳐 올랐다.

이 아이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 단 하루를 같이 지내 준 전혀 낮던 사내의 얼굴을. 자기들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두 번씩이나 수면제를 먹인 사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방실방실 웃으며 내 입에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들이밀면서 까르르르 까르르르 웃었다. 나는 혓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아이들은 웃었다. 까꿍까꿍 해 보였다. 아이들은 까르르르 웃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까르르르 웃었다. 웃는 아이들의 몸에는 울며 떠나 보내던 보모가 매어 준 복조리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그 복조리가 내 눈을 찔렀다.

그래.

너희들을 길러 주었던 보모들은 너희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 복조리를 매달아 준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나와 헤어진다. 너희들은 금새 잊어버릴 것이다. 너희들 가슴에 매달린 복조리와 내 얼굴을.

나는 그 애들이 오줌을 쌀 때마다 정성껏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기저귀를 갈아주기 위해 받침대에 누이고 엉덩이를 들어올리면 꼬마들의 엉덩이에는 매맞은 자국처럼 푸른 멍 자국이 선명히 엿보였다. 그것은 몽고반점이었다.

미국에는 인디언의 아이들에게서나 몰 수 있는 몽고반점이라든가, 그 몽고반점이 공연히 나를 센티멘털하게 만들었다.

여권이 나와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받기 위해 찾아갔을 때였다. 국제 결혼한 많은 한국인 부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속을 밟고 있었다. 그 부인들 등에 어린애들이 업혀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내 눈에 등에 업힌 애기 엉덩이의 그 푸른 몽고반점이 보였었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떠나기 위해 찾아온 그네들의 등에 업힌 머리칼이 노랗고 눈알이 파란 아이들은 얼핏 보면 우리 나라 아이 같기도 하고 얼핏 보면 외국 아이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엉덩이에 매맞은 자국처럼 파란 무우청과 같은 몽고반점이 있었다.

나는 무엇일까. 엉덩이에 푸른 몽고반점을 가진 나는 무엇일까. 나 역시 신체만은 한국인이며 머릿속은 외국의 사고 개념으로 뒤범벅된 잡종 트기가 아닐까.

기저귀를 갈아주는 내 손은 매번 떨리고 있었다. 그 푸른 몽고반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이 아이들은 평생 엉덩이에 푸른 반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껌을 씹으며 핫도그를 먹으면서.

내 눈엔 낯선 빌딩의 숲을 걸어가는 외로운 쌍동이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거리의 네온은 번쩍이고 있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은박처럼 화려한 도시 속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걸어가는 쌍동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때때로 고아처럼 느낀다.

나는 때때로 고아처럼 느낀다.

혹인 영가의 절규가 쌍동이의 실루엣을 사로잡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12월의 어느 겨울날. 나는 외롭다.

외국의 어떤 팝송 가수가 부른 노래 말 가사가 흑인 영가의 음률을 이어받고 있었다.

 

조용한 눈발 속의 거리를

창문에서 내려다본다.

나는 바위. 나는 하나의 섬,

나는 깊고 견고한 벽을 쌓았네.

아무도 들어올릴 수 없게.

우정도 필요 없어요.

아픔만 주니까.

웃음도 사랑도 다 조소거리.

나는 하나의 바위. 하나의 섬.

 

4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여행은 끝나 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넓은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동부로 날아가고 있었다.

시카고가 마지막 기착지였으므로 사람들은 도착하기 삼십여 분 전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나는 어린애들을 변소에 차례차례 데리고 가 얼굴을 씻겼다. 그들은 차디찬 물이 얼굴에 닿았음에도 울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고 내 얼굴을 쥐어뜯으며 웃었다.

잘 보여야지.

나는 그들에게 속삭였다.

너희들을 맡는 새로운 부모, 새로운 나라에게 잘 보여야지.

어린애들을 씻기고 돌아와 나는 연석을 불러 세웠다.

"얼굴을 씻어라."

"왜요."

소년은 퉁명스럽게 나를 쏘아보았다. 손에는 시애틀에서 받은 장난감을 꼬옥 붙들고 있었다.

"씻으라면 씻어. "

나는 연석을 데리고 변소로 들어갔다. 연석과 들어선 세 번째의 변소 행이었다. 한 번은 시끄럽게 노래부르던 녀석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한 번은 훔친 라이터를 돌려 받기 위해서, 이번엔 그의 얼굴을 씻어 주기 위해서.

나는 세면대에 물을 틀어 주었다.

"얼굴을 씻어라."

나는 소년에 대한 적의가 이미 깨끗이 사라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라이터 하나로 녀석에게 구타를 하였던 나는 얼마나 바보인가. 라이터는 얼마든지 새로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소년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이발도 닦아라."

나는 내 세면도구에서 새 칫솔과 치약을 꺼내 주었다. 소년은 물기 묻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려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소년은 대답했다.

"닦으라면 닦아라. 곧 새 엄마 아빠를 만나야 하지 않니. 얼굴 깨끗이 씻고 이빨 닦아 봐라. 깨끗한 네 모습에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겠니."

"하지만."

소년은 망설였다.

"이건 아저씨 칫솔이 아니예요."

"괜찮아. 내겐 하나 더 있으니까."

소년은 묵묵히 치약이 잔뜩 짜여 있는 칫솔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이를 닦기 시작했다.

그 언젠가 내가 생전 처음으로 미국 군인들에게 선사 받은 치약과 칫솔로 소년은 이발을 닦고 거품을 뱉었다.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자 소년의 얼굴은 한결 맑아 보였다, 머리까지 빗기고 나는 소년을 데리고 좌석으로 돌아왔다.

비행기는 곧 시카고에 닿았다. 몇 되지 않은 승객들이 내리자 시애틀에서처럼 같은 복장을 입은 중년부인들이 한꺼번에 기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쌍동이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언젠가 또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므로.

안녕.

나는 왼손에 들린 아이에게 속삭였다. 까르르르 아이가 웃었다.

안녕.

나는 오른손에 들린 아이에게 속삭였다. 역시 아이는 웃었다.

"수고 수고 수고했어요."

여인이 다가와 내 손에서 아이를 받아 들었다.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돌아선 내 등뒤에서 연석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 갈래요."

소년은 소리쳤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져 버린 후 우린 최후로 기내를 정리하였다. 서로 서로의 수고를 치하하면서 악수를 나누고 더러워진 시트를 치웠다. 그때였다.

나는 좌석 밑 구석진 자리에 내 라이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망연히 그 라이터를 쳐다보았다. 감허 주우려는 마음조차 일지 않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연석은 내 라이터를 홈치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터는 바지 주머니에서 미끄러져 시트 바닥 구석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아저씨."

헤어지는 연석을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으려던 내 등뒤에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어조로 나를 불렀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자 했던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인사말이었을까.

"나 갈래요."

그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소년은 나를 불렀던 것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찰칵 눌러 보았다. 불이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주머니 속에 그것을 집어넣었다.

"갑시다."

헨더슨이 앞장을 섰다. 우리는 트랩을 걸어 나왔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회전대에서 우리는 나란히 임자 없이 돌고 있는 짐을 찾아 들었다. 우리가 맨 마지막 손님이었으므로 회전대 위에는 우리들의 짐밖에는 없었다.

서둘러 공항 복도로 빠져 나왔다.

대합실은 붐비고 있었다. 열 다섯 명의 고아들이 각기 제 부모들을 찾아갔는지 대합실은 대낮인데도 실내였으므로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터지고 있었다. 환호성이 일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공항을 쩡쩡 울리고 있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서서 내가 데리고 봤던 아이들이 어디만큼에 있는가를 발돋움하여 보았다.

찾기는 쉬웠다. 쌍동이 아기였으므로 두 아기를 안고 사진 찍는 부모를 찾으면 되었다. 다행히 마음 좋게 생긴 늙은 부부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아기들을 안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연석은 한구석에 서 있었다. 어느 틈에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카우보이 모자까지 쓰고 있었고 손에는 카우보이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이제 배 연석에서 '토마스 배'로 탈바꿈해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 입으로 소리내어 빌고 싶었다. 단 하룻밤 동안 신을 믿는기독교인 행세를 하였으므로 단 하루 동안의 신에게 빌고 싶었다. 그들에게 신의 은총이 내리기를.

"갑시다."

핸더슨이 등뒤에서 나를 툭툭 쳤다.

"수고했어요. 또 만납시다,"

핸더슨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 살아 있다면 언제든."

우리는 손을 흔들었다. 그는 사라졌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을 돌아보았다. 탕탕. 연석은 카우보이 권총을 들고 눈에 띄는 대로 뚜렷한 대상 없이 총을 쏘고 있었다.

탕탕 탕탕. 타앙 타앙.

나는 미로와 같은 시카고 공항을 헤엄쳐 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떠나기 전 S연맹 구내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 드릴 때 부르던 찬송가의 귀절이 거짓말처럼 분명하게 기억되어졌다. 나는 중얼거려 보았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석, 주의 크신 사랑 안에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서로 만날 때, 다시 만날 그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아멘."

아멘.

밑도 끝도 없는 단어 하나를 나는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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