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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74. 신화의 단애

by 자한형 2022.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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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단애(神話斷崖-한말숙

 

새까만 거리에는 해드라이트의 행렬이 한결 뜸해졌다. 밴드는 다시금 왈츠로 바뀌었다. 시간은 마구 흘러간다. 진영은 별로 초조해지지도 않는다. 애당초에 댄서로 취직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한달 동안 일을 한 연후에야 겨우 월급을 탄다는 것은 안될 말이다. 오늘 저녁을 먹고, 이 한밤을 여관에서 자기 위한 돈이 - 그것도 단 돈 이천 환이면 되지만- 필요한데 한달 후가 다 무엇이냐.

이대로 서 있자. 지난 봄에도. 늦어서 오는 손님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처럼, 한 열흘을 벌어서 또 다시 반년을 살고 보자.

춥다. 추워서 움츠러진 조그만 젖꼭지가 스웨터 위에 뾰조록이 솟아 버렸다. 그 뿐만은 아니다. 배도 고프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거의 질식 상태다. 추위와 굶주림...... 진영은 그 속에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스스로를 또렷이 깨닫는다.

(지금 나는 살고 있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살고있다]하고 되씹어 본다.

오층 빌딩의 높은 창턱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밤은 아늑하고 다정스럽다.

[들어가실까요?]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다보니 해멀쑥한 청년이 웃고 서 있다. 홀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샨데리아가 희미하다. 그 속에서 밴드는 흐르고, 춤꾼들은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있다. 초만원이라 채 몇 발짝 떼게 전에, 다른 쌍과 맞부딪쳐 버린다.

리이드는 서툴고 맘보는 재미없었다. 그래도 진영은 밴드에 맞추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해서, 추위나 덜어 볼까 하는 속셈이었다. 호울드는 차츰 가까워졌다. 술 냄새가 진영의 얼굴에 확 끼친다. 빰에 남자의 수염이 까칠까칠 닿는다. 귀찮다. 팁은 얼마나 주려나.

[기피자를 적발해야 할 텐데요.]

청년은 술 때문에 조금 혀꼬부랑 소리다.

[왜요?}

[직업상...........]

{직업?]

[난 형사야.]

[그러세요?]

진영의 말끝은 힘없이 흐려진다. 그처럼 어린 형사에게 돈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하나 잡았나 했더니............)

짜장 구슬픈 블루스보다도 진영의 스텝은 맥이 없다. 카아네이션 꽃잎 지던 밤.

스테이지에서는 가수가 앞가슴을 허옇게 드러낸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도 기피자인데 남을 잡으려니 양심이 찔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내 목이 달아나고.]

추억에 울던........

[내일까지는, 꼭 하나 적발해야 할텐데.............., 그리고 보니 모조리 기피자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후유..............]

남자가 풍기는 술 냄새는 견딜 수가 없다. 진영은 스탭을 밟으며 무턱대고,

[저기 있지 않아요? 기피자.]

하고 소리쳤다. 형사는 진영의 뺨에 대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며

[어디?]

한다. 진영은 턱으로 아무 데로나 가리켜 보았다.

[저어기]

마침 저편에서 키 큰 청년이 깨끗한 뒤통수를 이쪽으로 보인 채, 멋있게 터언을 하고 있었다.

[정말?]

{으응.]

진영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진영은 그 청년이 누구인지도 물론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기피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바가 못되었다. 다만 술 냄새와 까칠까칠한 수염을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블루스는 멎었다. 진영은 위스키를 마셨다. 목에서는 차나 이내 몸은 후끈해진다.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형사는 화장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은 담배 연기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알바이트?]

하며 눈이 어글어글한 청년이 진영의 앞에 우뚝 섰다. 진영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었는 걸.]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센터로 나가는 청년의 뒤통수를 보자, 진영은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까, 턱으로 아무렇게나 기피자라고 가리킨, 바로 그 깨끗한 뒤통수였기 때문이다.

리이드는 멋있었다. 진영의 등에 얹혔던 팔이 차차로 내려와서 감긴다.

[멋진데?]

그의 눈은 정열적이면서 어딘지 냉랭하다.

[아까부터 허리가 좋다고 생각했었지.]

[................]

[추면서, 남이 안고 있는 여자를 감정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

[학생?.............미스?]

진영은 연달은 질문에 대답 대신 웃고 있었다. 청년은 진영이가 둘 다 긍정한 줄로 알은 모양이다.

[일주일만 살까?]

하고 웃는다.

[십만 환이면 되지, 내일부터.]

사뭇 뻐기는 어조다.

[!]

진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십만 환이 다 무엇이냐. 내게는 지금 당장에 단돈 이천 환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러나 웃음이 뜻을 잘못 알아차린 청년은,

[비싼데, 그럼 이십만 환!]

[!]

진영은 더욱 답답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면 ,삼십만 환.]

밴드는 멎고 호울드는 풀렸다.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일주일간의 일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지금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늘밤을 어찌하나 그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진영이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진영의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다. 육백 이십 환이다.

[남은 게 그것밖에는 없어.]

두 사람은 다른 춤꾼들 사이에 끼어 묵묵히 층계를 내려갔다.

거리는 추웠다. 이내 온 몸이 오싹해지며 떨린다.

[내일,.호심으로 오시오. 아홉 시 반]

청년은 말을 뚝 자르고 돌아섰다.

아홉 시 반이라면 자고 일어나서 나오기가 꼭 알맞은 시간이라고 진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오후나 저녁 몇 시라고 한다면 진영은 그것을 지킬는지가 의문이다. 그 동안의 시간에 혹시 하루를 살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구태여 그를 기다려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진영도 돌아섰다. 몹시 배가 고팠다.

통금 예비 사이렌이 불고 난 거리에 음식이 있을 리 없다. 그뿐 아니다. 명동에는 거의 불빛이 없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다. 진영은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성당을 향하는 언덕길 가에 군고구마 장수가 부스럭대며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석유 등잔이 가물가물 켜져 있다.

진영은 남은 고구마를 다 털었다. 대여섯 개 밖에는 안 된다.

진영은 군고구마를 먹으며 걸었다. 여간 맛있지 않다. 주린 배에는 이토록 맛난 것이 또 있으랴 싶다.

어디로 갈까? 오백 환으로 재워 줄 여관은 없다. 이토록 추운 밤에 내 몸을 꽁꽁 얼려 재우다니. 죽으면 썩는 몸이다. 살아있는 순간 다시는 없을 이 지극히 소중한 순간을 나는 내 몸을 하필이면 얼려 재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안될 말이다. 진영는 경일 한데 가서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방도 냉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같이 자면 한결 따뜻할 것이 아닌가.

손바닥만한 방에 책과 화구가 하나 가득 흩어져 있다. 진영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경일은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모른 체하고 캔버스만 보고 있다. 진영은 먹다 남은 군고구마를 책상 위에 놓으며 요 밑으로 발을 넣었다. 뜻밖에도 바닥이 더웠다. 그림이 팔렸나?

[웬일이세요? 방이 더워.]

경일은 갑자기 몸을 돌이키고 다짜고짜로 진영의 등을 마구 때린다.

[왜이래. 왜이래]

[이년아 준섭이가 장작을 사온거야.]

[좋겠군요 친구 잘 두어서]

[엊저녁 얘기 다 들었다. 이년아 준섭이가 여기서 잔 거야.]

[내가 그래 어쨌다는 거예요. 어쨌다는....]

진영은 경일의 눈을 뚫어져라 흘겨본다. 경일은 눈 한번 깜작이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진영의 등을 주먹으로 때리기만 한다.

어저께 저녁 일이다. 한달 밀린 밥값 대신 화구 일체와 책 전부를 빼앗긴 채 하숙을 쫓겨 나온 진영은 통금 사이렌을 듣다 어쩔 수 없이 준섭의 하숙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것은 경일의 하숙보다 가깝고 파출소보다는 갈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진영은 시민증을 잃은 지 벌써 반년이 넘는다. 그것이나마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x 미술대학 학생증만으로는 파출소로 가기는 꺼림칙했다. 꺼림칙 이상으로 싫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늘밤 재워주세요.]

진영은 파자마째로 당황하는 준섭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던 것이다.

[....]

준섭은 눈 둘 곳을 모르고 있었다.

[.........?]

[저 김 군이, ..........]

[미스터 김이 어쨌단 말씀이세요?]

[.....]

주뭇거리며 망설이고는 있으나 준섭의, 눈에는 무엇인지 기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진영은 그것이 메스껍고 화가 났다.

[누가 누가 당신하고 무슨 연애 유희라고 하고 싶어 온 줄 아세요? 천만에 잘 데가 없어서 하룻밤만 자겠다는 거예요.]

진영은 꼿꼿이 선 채 말했다.

[그런게 아니라 저 김 군이 알면 또 오해나....]

[오해를 하면 어떻단 말이에요. 지금 잘 데가 없다는데 오해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이예요.]

준섭은 한참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못내 걸렸던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잡을까? 내버려두자!)

외투가 없어진 못에는 머플러가 걸려 있다. 여자의 것이다. 때로 자러오는 기생이 있다더니 그 기생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분홍 빛깔이 무척 자극적이라고 느껴졌다.

준섭은 바로 그저께도 진영에게 또 알쏭달쏭한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경일군과의 관계를 다 이해하겠습니다.. 조금도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중략.... 덧없는 일인 줄 아오나 어쩔 수 없이 적은 글입니다..>

내용은 대개 이렇게 적혀 있다. 어쩌자는 소리인지 도무지 답답한 예기이다. 아마도 같이 살자는 말인 성싶다. 그렇다면 왜 좀더 알아듣기 쉽게 쓰지 못한단 말인가 또 어째서 지금 이대로 잠자코 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가. 오늘밤만은 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간 준섭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은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한밤을 고이 자고 났던 것이다. 그러나 준섭이가 경일에게 가서 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만 때려 그만 그만]

그러면서도 진영은 주먹을 피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도무지가 못 견딜만큼 아프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추위에 움츠려 들어서 어깨가 아팠는데 매를 맞고 보니 시원한 것을 어떻게 하랴. 주먹이 멈추었다. 방바닥은 뜨겁고 몸은 후끈거렸다.

[매맞고 나니 더워졌어요.]

진영은 솔직히 말했다. 아프라고 때렸는데 더워서 좋다니, 경일은 성난 얼굴이다. 그는 마치 보기 싫은 물건을 다루듯이 발바닥으로 진영을 아랫목 쪽으로 밀어붙였다. 진영은 종이쪽 모양 주르르 밀려간다.

경일은 다시 붓을 들었다. 진영은 스웨터와 스커어트를 벗어서 차근히 개켜 놓았다. 꾸겨진 옷으로는 댄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일찍부터 나가서 돈을 벌어야하지 않느냐고 그녀는 속으로 다짐한다.

몸이 풀리고 나니 맞은 떼가 뻑적지근한 것 같다.

지난 봄에도 댄서로 나갔다고 해서 이렇게 맞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준섭이 하숙에 자러 갔다고 해서 맞았지만) 편지마다 사랑하노라고 적어 보내는 준섭보다는 말없이 때리기만 하는 경일 이 편이 오히려 벅차게 가슴에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군고구마로 굶주림은 면했고 , 따뜻한 방에 누워 있으니까 진영은 무한히 행복한 것 같았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이제 잠만 자면 그만이다. 이렇게 머리 속이 텅 비게 될 때면 진영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진영은 -경일이- 하고 입 속으로 속삭여 본다. 나의 애인, 그리운 그리운 사람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정말 그리워지는 것 같다. 그리워 못 견딜 것 가다. 그립다. 그 그리움이 그립다. 아아........

[키쓰할까?]

진영은 요 밑에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시끄러!]

경일은 소리를 꽥 지른다. 진영은 벽을 향해 몸을 돌이키며, 좀 전에 헤어진 청년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삼십만환, 삼만 환의 열 배다. 내일을 생각지 않는 진영에게는 오히려 벅찰 만큼 많은 돈이다. 하숙비를 내고, 아니 자취를 하자 등록비도 걱정 없구........ 그러나 진영은 그 이상 더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경일이 그를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경일의 포옹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깨끗한 청년의 호울드 또한 부드럽고 기분 좋은 것이었다고 진영은 생각한다.

멀리서 아홉 시를 치는 소리가 났다. 경일은 벌써 나가고 없었다. X극장 뒤의 창고가 그의 출근처인 것이다. 영화의 간판을 그리는 것이다. 그나마 어저께 가까스로 얻은 아르바이트인 것이다.

책상 위에는 군고구마가 덩그랗게 하나 놓여 있다. 진영은 그것을 먹으며 경일의 하숙을 나섰다.

걸음이 성당 앞에 이르렀을 때, 진영은 교인은 아니나 무엇이라도 한번 기도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성모마리아, 나에게 애인을 하나 마련해 주세요. 영원한 애인을요.]

진영은 경건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이내 그 마리아 상이 왜 졸렬한 조각이 눈에 띄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진영은

[마리아. 좀더 기다리세요. 내가 당신을 조각해 드리겠어요.]

했다.

찬 하늘 아래 홀로 하얗게 서 있는 마리아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고뇌로 해서 스스로를 매질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애틋하기 한이 없다. 처녀가 아이를 낳다니! 사랑의 기쁨도 모르면서 진통만 겪다니! 가엾어라 가엾어라!

시간이 이른대도 다방에는 손님이 많았다 오일 스토우브가 벌써 벌겋게 달아 있다. 누가,

[여보.]

한다. 어젯 저녁의 그 청년이었다. 하얀 턱에 세이빙을 한 자국이 파랗다.

[.]

하며 그는 테이블 위에 자그마한 보따리를 올려놓는다.

[현금이야 삼십만환. 수표면 부도나 아닌가 할까봐 바꿔 왔어, 큰돈으로 바꾸느라고 애썼지, 어때 그 정성이? 하하하.}

그는 거리낌없이 큰 소리로 웃는다.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만 마시고 싶다. 군 고구마를 먹어서 목이 바싹 말라 버렸다. 그래서 우선 커피나 마시고 보자고 했다. 진영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가자.]

하며 그는 일어섰다. 그는 댄스홀에서 보다 더 미남같이 보였으며 더욱 점잖다고 진영은 느꼈다. 진영도 뒤따라 일어섰다. 앞뒤 테이블의 손님들이 진영과 그를 번갈아 보고 있다.

택시 안에서 그는 진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호텔의 현관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주홍빛 빌로오드의 양탄자가 눈부시었다. 기둥이랑 천장에 현대적인 감각이 확 끼친다. 수부에서 청년은 일주일 방 값을 전불했다.

[309호실]

하고 사무원이 말 하니까 보우타이를 맨 보이가 성큼 나선다.

진영은 손에 등 지폐의 무게와, 그녀와 나란히 층계를 올라가는 청년의 로우션 냄새와 주홍빛 양탄자를 인식했다.

층계의 커어브를 돌 때다.

[여보,]

하고 아래서 누가 소리를 쳤다. 형사라는 것이었다.

형사는 청년의 신분증을 조사하더니 가자고 한다. 기피자라는 것이었다. 지금 곧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형사를 비웃는 듯 싱긋 웃으며,

[갑시다!]

하고 늠름한 걸음으로 층계를 도로 내려간다. 깨끗한 뒤통수가 몹시 사랑스럽다. 진영은 당황하며 뛰어갔다.

[여보세요.]

[.........?]

[이것......]

진영은 돈 보따리를 내밀었다. 청년은 싱긋 웃는다.

[가지시우. 약속을 어기는 것은 이쪽이니까.]

[너무 많아요.]

[애당초에 삼십만 환은 너의 허리 때문이 아니야. 이걸 봐 이렇게 죽음이 쫒아 다니지 않아? 나는 일년을 살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우선 하루라도 살고 보아야 해. 살 시간이 없어 바뻐.]

하고 빙긋 웃으며 돌아선다. 진영은 청년에게 바싹 다가섰다. 진영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

[가지 마세요,]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진영의 입에서도 앵무새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저도 사랑해요.]

말을 하고 보니 진영은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요!]

[돈으로 안 되는 일없지 곧 온다.]

그는 진영의 뺨을 슬쩍 쓰다듬고 호텔을 나가 버렸다. 형사가 뒤따라 나갔다. 그때 수부에서 헤멀쑥한 청년이 담배를 피우며 진영에게로 다가왔다. 진영은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을 했다. 누구일까? 아차! 엊저녁의 그 형사로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섭게 쏘아 붙였다.

[당신이군요! 비겁한.}

[왜 그러슈! 남편?]

진영은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럼 애인?]

[아니.]

[그러면?]

[남자.!]

하고 진영은 돌아섰다. 형사는 뒤따라오며,

[내가 논산으로 갈 때엔 나도 프로포즈 할 생각이야.]

[어림없어.]

[나는 일년은 넉넉히 살 수 있어!]

진영 은 앞을 똑바로 본 채 층계를 올라갔다.

진영은 호텔의 그릴에서 치킨 스테이크를 먹었다.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은 한결 쓸쓸하리라고 생각하며, 오우버와 구두를 샀다. 립스틱도 샀다. 이것을 바르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홀로 갈 날이 멀지않아 또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도 샀다, 그래도 돈은 남았다.

진영은 하숙으로 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삵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셋이나 데린 전쟁 미망인이다. 밀린 밥값을 치렀는데도 진영의 마음 한구석 어딘지 개운치 못한 데가 있다. 오만 환을 더 내어놓았다. 주인은 고맙다고 하며 이내 흑흑 흐느껴 운다. 삼십만 환을 얻은 데도 고마운지를 몰랐던 진영은 하숙 주인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진영은 그 여자의 가난이 끼친 울적한 기분을 가시게 하고 싶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진영은 화구를 샀다. 모두 사만 환이다. 갑자기 붓이 들고 싶어진다. 어서 그려야지,. 국전에서 모 장관상을 탄 경일의 그림이 생각난다. 그녀는 그 구성이 참 잘되었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학교의 성적은 진영이 수석이나 국전에서 는 낙선했던 것이다. 시기와 비슷한 불길이 몸 어느 모에서 부턴지 소리 없이 이는 것 같다.

(그려야 한다.)

진영은 거리의 책 점에 들렀다.

[고호]의 소묘집이 있다. 진영은 책장을 들춰보았다. 까마귀가 날으고 있다. 사육을 파먹고 산다는 날짐승...... 금시에라도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진영은 자기 자신이 까마귀 같다는 느낌이 온다. 팁으로 해서 살아있는 그녀의 살이 까마귀의 살만 같다. 진영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흔들어 본다. 불퉁한 젖가슴이 육중하게 흔들린다. 진영은 다만 그녀의 실존을 재확인 할 따름이다.

진영은 위스키를 한 병 사들고 호텔로 갔다. 더블 베드는 지나치게 호화로왔다. 그녀는 일주일 여기서 홀로 사는 것이다 고요 속에서 붓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온다면? 돈으로서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오면 오는 것이고, 그때 일을 지금 생각지 말자.

진영은 위스키를 더블로 해서 마셨다. 이내 몸이 상쾌해 진다. 푹신한 배드에 엎드려본다. 기분이 여간 좋지 않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농락해보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자신이 강력히 솟구친다. 무서울 것도 꺼릴 것도 없다. 오로지 그려야한다는 의욕만이 파랗게 불탈 뿐이다.

진영은 준섭에게 편지를 썼다. 베드가 부드러우니 그 색시와 하룻밤 자러오라는 얘기를 썼다. 그저께 한밤 따뜻이 재워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다음은 경일에게 글을 썼다. 사랑해요---하고 쓰기 시작했으나, 도시 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랑 사랑...... 진영은 그 말의 감각을 느껴 보려 하였으나 그 추상명사가 마치 숫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열될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다만 진영은 지금 경일을 포옹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영은

'..... 경일씨 어서 오세요, 보고 싶어요.' 라고 편지의 끝을 맺었다.

진영은 베드에서 일어나서 높은 창가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았다.

창 밖은 밤이었다.

무수한 별빛이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명멸하고 있다.

 

 

 

 

 

 

 

 

 

 

 

 

 

 

 

 

 

 

 

 

 

 

 

세계(世界)의 사람

 

순주는 타임 잡지를 대강 훑어보았다. 미스터 K,미스터 Y,닥터 B의 기사가 몇 줄 있는가 하면, 즐비하게 문 닫은 구라파의 공장들과 실직자들의 사진이며. 주문이 밀려서 야간 작업까지 하는 한국 공장들의 분주한 사진. 대문자로 된 코리어 이즈 카밍.

어머, 이건 전에 읽은 건데?

어저께 배달된 것을 분명히 여기에 꽂아두었었는데, 누가 또 어디에다 갖다두었어! 그녀는 조금 짜증이 난다. 일곱 식구 중에서 타임지를 읽는 사람이 그녀의 남편시동생, 그리고 그녀 자신해서 셋이고, 사진이라도 보아야 성이 가시는 국민학교부터 고등과의 아이들이 넷이 있으니, 누가 그것을 보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책 한 권을 마음잡고 앉아서 읽을 만한 시간이 없다. 가사 노동 사이 어쩌다 시간이 나서 책을 들어도, 한 줄 읽으면 대문 초인종, 두 줄 읽으면 전화소리, 그것이 삼십 퍼센트쯤은 잘못 걸려온 것들일 때도 있다. 오전에 빨래며 청소하고 나면, 오후에는 시간마다 다르게 하나씩 여섯 식구가 귀가한다.

어저께도 존 폴 교황의 사진이 있는 타임지를 표지만 보고 잡지 꽂이에 우선 끼워 두었었다.

집을 지켜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고등과 영어 교사직을 작년에 사직했었다. 일자리가 많아져서 가정부직을 찾는 사람이 적어진 탓도 있으나 그보다 성실한 사람들이 적어져서 믿고 쓸 사람이 없는 것이 더 큰 원인 같다.

가사 돌보며, 틈틈이 번역하는 편이 수입면으로도 나을 것 같아 결행한 사직이었으나,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도 일년 동안 이백 장 짜리 단편소설 한 편밖에 번역 못하고 있다. 하루 걸러서 파출부를 부르고 있으나 집일은 여전히 밀리고, 파출부를 매일 열 시간씩 쓴다면 그녀의 시간이 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대학교수의 사정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지출이다.

오늘은 파출부를 쓰지 않아야 할 날이지만 새로 별장을 지었으니 순주더러 놀러와 달라는 영희의 부탁에 하는 수 없이 응하느라고 동이 엄마를 불렀다.

영희는 그녀의 소녀 시절의 심부름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굴지의 거부 A토건회사의 사장 부인이다. 그녀의 남편인 정사장은 순주 아버지의 친구 집의 사환이었다. 학력은 시골의 국민학교. 순주의 어머니가, 고 녀석은 싹이 있다 하며 중매를 서서 고아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들이 삼십대 들어서며부터 조금씩 돈이 생기더니 사십대가 되어서는 백억 대를 육박하게 되었다.

순주보다 한 살 아래인 영희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 온 것은 영희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시골서 서울로 일 오는 사람들 중 그 무렵은 더러 머리에 이가 우글거려서 식구들에게 소개하기 전에 어머니는 먼저 길게 땋은 머리를 단발을 시키고 몇 번이나 세발시켜서, 참빗으로 수없이 빗겨 서캐 하나도 안 보일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훑어내게 했었다.

나포댁이라는 고참 아줌마가 넷 있는 사용인을 잘 지도하고 있었는데, 나포댁의 잔소리가 심해서 십대의 아이들은 어머니한테 직접 와서 하소연을 자주 했었다.

마님. 종이 종을 부릴 때는 식칼로 부린대요.

하고 아주 감정이 틀어질 때는 그렇게까지 혹평을 했다.

아니다. 나포댁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솔개의 마음은 솔개만이 안다는 말도 있다. 너희 가 그 사람을 아직 몰라 그런다.

하고 타이르면서도, 어머니는 나포댁을 조용히 불러서.

자네 딸이 저런 처지로 있다고 생각해보게. 같은 뜻이라도 어하고 아하고는 다르다지 않나. 자네는 말투가 괄괄해서 오해받을 때가 많네. 속마음이 비단 같은 것을 나야 아네만 말이지.

하고 말하면 나포댁은,

마님도 저러시니, 난 속 터져 죽어요.

할 때도 있고, 복 받을 어른이라고 돌아서며 축원하기도 했다.

단발머리가 된 영희는 아줌마가 참빗질을 하는 동안 내내 울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두어 시간을 끈질기게 훌쩍거렸다.

빗질할 때 머리가 당겨져서 아파서도 울었겠으나, 긴 머리가 짧아진 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낯선 집이 불안하고, 사용인 신세가 된 것이 슬프기도 했었을 것이다.

나포댁은,

머릿폭에 이 길러 가지고 팔아먹을 작정했었냐? 딱 안 그치면 늬네 이모더러 도루 데려가라 할 테여! 늬 팔자에 이런 본대 있는 대가댁 구경이라도 했겠냐?

하며 뒷방에서 퉁명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참만에 그리로 가서 문을 열고,

저것 봐라. 영희가 금방 서울아이가 되었다.

고 했다. 서울아이라는 말에 영희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하고 차차 울음도 그쳤다. 어머니는 소녀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구, 질겨터진 년, 그 울음 아까와서 어떻게 그쳤냐? 내일까지 울면 한 덩이 상으로 사줄려 했는데, 내 돈 굳었구먼.

하며 나포댁은 빈대떡 하느라고 맷돌을 돌리며 소리쳤다.

영희는 울어서 눈가가 벌겋게 붓고, 화가 나서 입을 한치쯤 빼물고 있었는데, 맷돌 돌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가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경자가,

아줌마, 재 보셔요, 우스워 죽겠는가보아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영희는 기어코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년 아가리 큰 것 봐. 눈등은 원숭이 궁둥이처럼 벌개가지고 얼굴빛은 무짠지여. 내 말 못믿겠거든 저 거울가서 쳐다보아.……금례야, 아까 마님이 주신 배 딱 세 개만 갖고 와서 깎아라, 딱 세 개다. 내가 그 바구니 속에 몇 개 있는 줄 다 알고 있어. 혼자서 숨어 처먹을 생각 말고, 깎아서, 아가리 제일 큰 년부터 먼저 먹여라.

나포댁은 우는 영희가 불쌍했으나, 웃으니까 더욱 그 철없는 것이 측은했다.

그녀는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에 사용인으로 들어가서 박한 주인 밑에서 모질게 고생하고, 시집가서는 빈곤과 남편의 횡포에 인생고를 더 한층 겪었다. 남편이 첩을 두자 뛰쳐나와서 순주집에 왔는데, 그녀의 나이 마흔이 넘었으니 순주집에서만도 이십 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마님. 저는 이제 어느 정승 부럽지 않은 팔자예유.

하며 그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배맛 꿀맛 같지?

나포댁이 물으니까 영희가,

꿀이 무엇꼬?

했다.

꿀도 못 먹어봤냐? 가난도 육실하게 가난했던개비.

먹어보았어야 알제.

쯧쯧.

영희는 나포댁의 몸집이 절구통만치 뚱뚱해서 웃었다고 했다.

뒤꿈치로 팍 밟은 것 같은 네 콧등은 어떻고?

하면서 그날 밤에 뒷방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났었다.

철부지야. 그래, 남이 절구통 같다고 웃음이 나데? 머릿속에 이 한 말 뒤집어쓰고 앉은 주제에, 쯧쯧.

영희는 무서운 가난과 계모의 학대 속에서 짐승처럼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한다. 그녀의 이모는,

나도 날품팔이 신세니, 데려와야 밥 세 끼 멕일 수가 없어요. 사흘에 보리 한 끼 먹을까말까 하는 꼴 보고 눈감아 둘 수도 없구요. 읍내 포목상에서 첩으로 데려 가겠다는데……」

거기까지 왔을 때 영희 이모는 기어이 옷고름으로 눈등을 누르고 말았다. 행상 두부장수인 그녀의 이모는 영희를 이 댁에 데려다놓는다면 죽은 언니의 혼도 눈을 감을 거라며 나포댁에게 애원했고, 나포댁은 순주의 어머니에게 졸라서 영희가 오게 되었었다. 영희의 입고 온 옷은 검은 무명치마저고리였는데 몇십 번을 빨아 입은 것인지 꿰맨 자리는 수도 없고, 낡아 버어져서 속이 비칠 지경이었다. 속 팬티도 없이 치마를 들면 속살이 이내 나왔다.

나포댁은 밤에 어머니에게,

지긋지긋한 가난인가 보아요. 딴 애들은 쟈에 비하면 진사댁 작은아씨예요.

했다.

나포댁은 그녀가 추천한 하녀이어선지 영희에게는 잔소리가 더 많았다. 대청에서 발소리를 낸다고 야단, 군것질을 딴 애들보다 더 한다고 야단, 추석에는 긴 치마 입어보고 싶다고 하니까, 나포댁은 어이없는 듯 입을 딱 벌리며,

, , 사루마다(속팬티의 일본어)도 못 끼던 때 생각 안 나냐? 개구리가 올챙이 때 일 잊어버리면 벼락맞는다, 알갔냐? 늬네 집에서 똥개 새끼처럼 굴러 있었으면 월경할 때 무 얼로 막을 뻔했냐? 어이구. 빌어먹을 년, 늬 엄마 혼이 점지해서 이런 댁에 온 줄 알아. 그 짧은 다홍치마도 인조견이야. 산해 같은 마님 덕인 줄 알아,

그리고 나포댁은 군밤을 까서 영희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들은 모녀같이 다정하다가도 여러번 말다툼했다. 극도로 감정이 격하고 앞뒤 이치가 맞지 않아서 변명할 말에 궁하게 되면 영희는,

알았어, 알았어, 전라도 개똥쇠!

했다. 그러면 나포댁도 어른의 체통도 잊고,

이 경상도 문둥이가!

하며 소리를 쳤다. 그러다가도 어머니가 뒷마루에 나오는 기색이 있으면 싸움은 당장 그쳤다. 통일이 되어서 천여 년의 세월이 갔어도, 당시의 백제와 신라의 대립 감정이 언어로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고 순주는 속으로 놀랐었다.

신라인들은 피정복자 백제인을 개처럼 천시하고, 백제인들은 정복자 신라인들이 죽더라도 몹쓸 문둥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서 개와 문둥이라 저주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때로 반갑고 사랑스러우면 문둥아, 개똥쇠야 하며 부등켜안고 열광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한 천 년 더 가면 온 세계가 이렇게 되는 게 아닐까?

영희와 같은 때에 사용인으로 있었던 금례경자도 순주집에서 주선해서 시집을 보냈는데 영희처럼 갑부가 된 사람은 없고,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출가하고 삼십 년쯤 지나고 나니 순주에게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은 차차로 없어졌다. 영희만이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를 했었는데, 그녀의 재산이 늘어감에 따라 생활이 바빠지는지, 근래 들어서는 한 달에 한 번쯤. 꽃꽂이며 외국어며 요리며 숙녀 학원 등에 다녀서, 상류생활 부인이 갖출 소양은 일단은 고루 갖춘 모양이었다. 그것도 <마님이 그 옛날 야간학교에 보내주어서 한글을 깨친 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지난봄에 삼백명 내외의 손님을 초대해서 가든 파티를 여는데, 외국인에게나 우리 나라 손님에게나 대하는 영희의 품이 이제 제법 세련된 것을 보고, 돈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구나, 하고 순주는 홀로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두빛 시폰의 이브닝 드레스를 잘 입고, 스페인풍의 삼각 쇼올을 두른 영희가 외국인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순주는 나포댁 말대로, 장아찌처럼 찌든 얼굴에, 머리에는 허옇게 서캐를 뒤집어쓴 채 울고 있던 소녀 영희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환경이 변하면 정형을 하거나 화장에 주력하는 사람도 있는데 영희는 납작코도 그대로고, 갸름한 외꺼풀 눈도 옛날 그대로다. 더구나 화장도 분만 엷게 바르고 입술 연지도 눈에 뜨이지 않게 칠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미인이 아니나, 그것이 도리어 수수하고 전통이 있어 보여서 삼백명의 손님 중 그녀의 불우했던 때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손님들은 업계의 한다하는 인사들이었고, 업계와 무관한 사람은 순주 내외뿐이었다. 그녀는 몇몇 인사들에게 순주 내외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 은인의 따님 김순주 선생님. 그리고 그 부군 박교수님.

순주의 남편은 가끔,

영희는 특별한 사람이야, 보통은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했다.

그래요. 의리 있는 아이예요. 그러니까 저렇게 잘 되나부지요?

하고 순주도 마음속으로부터 칭찬했다. 추석이며 정초 명절과 순주 내외의 생일에는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선물을 사들고 오거나, 바쁠 때는 운전수를 시켜 보냈었다.

부엌에서 동이 엄마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설겆이를 하고 있다. 소리가 크게 날 때마다, 그릇이 깨지나 하고 순주는 섬찟섬찟한다. 조심하라고 몇 번 당부는 했으나 동이엄마는 지난 한 달만도 커트 글라스와 접시 하나씩을 깨고, 국 대접은 두 개나 이를 뺐다. 값을 따지면 만 오천 원쯤 된다.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그것을 따지면 야속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순주는 그들에게 지불하는 급료보다도 그러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 때문에 되도록 살림을 손수 하는데, 그러려니 그녀 자신의 시간을 못 갖게 된다.

파출부를 몇 사람 겪어보니까 사람마다 각양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고추장에서부터 설탕 , 깨소금까지, 조미료 일체를 조금씩 몰래 퍼 가는가 하면, 고기며 김치까지 숨겨 간다. 어떤 사람은 옷도 몰래 가지고 간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일부터 아주 있을 사람이 오니까 오지 말아요. 수고했어요.

하고 은근히 그녀는 거절할 뿐이나 크건 작건 절도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순주는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지각없는 사람이 근로자의 긍지를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동이 엄마는 미숙 엄마가 그만둔 후로 석 달 동안 그릇은 잘 깨어도 손 거친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닌 실수로 깨어서 피해는 주나 정직이 주는 그녀의 신선한 인간성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보배다.

타임지를 도로 책꽂이에 꽂고 순주는 일어섰다. 닥터 B와 한국의 괄목할 산업 발전의 기사를 동시에 실은 타임지는 역시 권위 있는 잡지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서투른 잡지는 그 어느 한쪽만 강조하고, 한쪽은 아예 묵살해버릴 텐데……

동이 엄마가 왔으니, 순주는 황금 같은 자신의 시간을 얻은 셈이었다. 영희와의 약속 시간까지 읽으려고 어저께 배달된 타임지를 찾았다.

큰아들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영희다.

작은 아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한다.

얘야, 그 작은 아씨 소리 그만 하기로 했잤니? 아주머니라고 해, 제발.

순주의 말에,

작은 아씨, 별말씀을 다 하세요. 세상이 거꾸로 서도 작은 아씨는 작은 아씨지요.

그 소리가 꼭 옛날 귀신 부르는 것 같아.

영희는 까르르 웃는다. 지금, 군주 제도 시절의 호칭을 들으니 거북해서 몇 번 고치라고 말했으나 영희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가 변해도 옛날은 안 변한다 한다. 그때의 주종관계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그러는지, 흑은 그것도 일종의 콤플렉스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희가 아이들이 있다면 순주는 그녀를 아무개 엄마라고 부를 텐데 아이는 낳아보지 못했으니 부를 때 불편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그녀를 정사장댁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어색할 것이었다. 순주는 그래서 부모 형제 없는 영희를 동생 같은 기분으로 영희라고 불렀다. 영희가,

차가 열한 시에 모시러 갈 거예요. 마님 제삿날이 다가왔는데, 그 생각 끝에 가회동 젊은 마님 생각이 나요. 이번 별장은 호숫가에 있어서 속리산 것보다 좋은 것 같아서요. 가회동 마님도 함께 모셨으면 어떨까 해서 의논드려요.

한다. 순주는 가회동으로 전화를 해서 올케를 찾았다. 올케는 펄쩍 뛴다.

지가 부자돼서 뻐길려고 그러는데 작은아씨가 가주실 건 무어예요 ? 밥 한끼 못 먹는 사람인가요? 요새 벼락부자들은 집 지어 놓고는 사람들한테 떠벌리지 못해 몸살이라니까요.

올케는 음성까지 흥분해서 떤다.

언니. 그렇게 생각할 게 무어 있수. 나는 가요. 얼마나 신통하고 기특해요. 우리는 부모 덕에 대학까지 나와도 요 꼴인데.

우리 꼴이 어때서 그래요. 작은 아씨도 돈이면 다요?

순주는 어이가 없다. 손위 올케이나 달래듯이,

꼭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제가 뻐기고 싶으면 뻐기라지. 제가 뻐긴다고 내 속눈썹 하 나 까딱할 리 없구. 뻐기더라도 다 잘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애가 옛날처럼 앞도 못 가릴 형편이라도 초대하면 나는 가요. 기왕이면 노력해서 잘 살아 남에게 뻐기는 사람이 되었으 니 좋지 노력도 않으며 남 헐뜯고 앉아 있는 사람이 좋아요? 딴 부자는 어떤지 몰라도 영 희네는 좋은 사람이에요. 정서방을 어머니가 얼마나 잘 보신 줄 아세요? 정직하고 부지런 하고 언제나 웃는 낯이라구 하시며, 그래서 영희와 짝지어주신 거예요. 정서방은 돈을 벌어 도 도둑짓 사기짓은 안 했을 거라구요.

그 소리 스물다섯 번은 더 들었어요.

별걸 가지고 다 신경 쓰시네. 부자면 어떻구 가난하면 어때서 그래요? 사람만 보면 되는 걸 가지구……」

순주도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마당을 뛰어오며 동이 엄마가,

사모님!

하고 소리를 친다.

큰일났어요, 큰일났어요!

한다. 무엇인가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그러나 순주는 침착하게,

왜 그래요?

한다.

그러니까 정규엄마의 아들이 목 매달아 죽었대요.

정규가 죽었다구?

그래요, 정규가 죽었대요. 저기 저 뒷산을 보세요. 낭떠러지 나뭇가지에 매달렸지요?

동이 엄마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까, 바로 가까운 뒷산에 몇 그루 서 있는 나뭇가지에 확실히 사람이 매달려서 늘어져 있다.

정규인지 어떻게 알지?

사람들이 그래요.

정규 엄마는?

까무러쳐서 뻗었대요.

순주는,

저런!

하고 맥이 빠져서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정규 엄마는 작년 한 해 동안 하루 걸러 오던 파출부였다. 정직한 사람이었다. 몸매며 얼굴 생김새며 미인형이었다. 시골서 국민학교는 나왔는데 결혼을 잘못해서 그날부터 고생이라 했다. 아들 둘, 딸 하나. 그녀는 그 자식을 기르느라고 해보지 않은 노동은 없다고 한다.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며 파출부직을 그만두었었다. 남편은 알콜중독자인데다가 일하기를 싫어해서 노상 빈둥대는 위인. 순주도 그를 두어 번 보았었다.

순주는 동이엄마더러 집 잘 보라고 이르고, 영희의 별장에 가려고 입었던 검은 바지 위에 화려한 블라우스만 곤색으로 갈아입고 정규 집으로 향했다. 정규네는 길 하나를 건너서 뒷산, 산이라느니보다 언덕의 무허가 건물촌에 있었다.

한 평이나 되는 판잣방 문을 여니까 술 냄새가 물씬 난다. 한낮부터 정규아빠는 술을 마셨는지 눈이 게슴츠레하다. 정규 엄마는 말없이 순주를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해골에 눈방울이 박힌 것 같다. 그녀를 못 알아보는 것 같다.

정규엄마. 그게 정말이요?

, 금상 보고 왔어요.

정규 엄마는 안 본 사이 바싹 마르고, 목이 더욱 길어진 것 같다.

저놈이 죽어야 할 텐데 애꿎은 우리 정규가 죽었어. 아이구 불쌍해, 아이구 불쌍해. 중학교 마칠려고 신문팔이 막노동하며 밥도 한 끼만 먹고 살아 볼려고 발버둥쳤었는데. 애비란 놈이 푼푼이 모아놓은 등록금 몽땅 술 처먹어버리지 않나, 내일은 또 무허가건물이라 집이 헐린다는데…… 쥐새끼도 집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집은 있는데, 어찌 우리 정규는 짐승만도 못해서…… 날 죽여라, 이놈아 날 죽여라. 이 죽일 놈아!

하며 정규엄마는 갑자기 찌그러진 남비를 들더니 남편을 아무 데나 마구 갈긴다. 정규 아빠도 죽고 싶은지 피하지도 않고 앉아 있다.

순주와 이웃사람들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정규 엄마는 뼈만 남은 몸에서 무슨 힘이 솟는지 어른 남자가 셋이나 잡아끄는데도 힘이 모자랄 지경이다. 남편을 죽이고 말 기세였다. 겨우 밖으로 끌려나온 정규 엄마는,

사모님, 난 죽을 테에요. 정규 동생하고 같이 죽어서, 정규 뒤따라 가야지요. 저놈 못 보 면 그게 천당이지. 아니, 저놈 죽는 꼴 보아야 돼. 제 잘못 제쳐놓고, 주제에 남의 핑계만 하는 놈. 주둥이는 있다고 씨부렁대기는. 혼자 잘났지. 이놈, 네가 지껄인 소리 불면 너는 형무소 감이야, 이놈아!

정규 엄마는 경찰이 옆에 와 있는데도 그렇게 소리치며 주먹으로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경찰은,

사망 시간이 약 한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누가 같이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안됐습니다. .

하고 순주에게 말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순주가 그들의 보호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순주는 정규엄마더러,

이것 보아요. 이러면 안돼. 남편과는 그만두더라도 정규 동생들은 잘 길러야지. 언젠가 그랬잖아 ? 자살하고 싶어도 고생한 것도 슬픈데 고생하다 죽는 게 원통해서 못 죽겠다고 응? 내가 방을 얻어줄 테니까 분발해보아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돼? 내가 내일 오십 만원 줄 테니까 집 헐리기 전에 방 있나 알아보아요. 정규 장사라도 정성껏 치르어 주고.

순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녀의 말이 안 들리는 듯이 다리를 뻗고 땅바닥에 앉아 있던 정규엄마가 갑자기,

정성껏 치르어야지요. 황태자보다도 정성껏 치르어야지요.

하며 미친 듯이 허둥지둥 산으로 올라갔다. 이웃사람들이 우우 그녀를 뒤따랐다. 순주가 집으로 내려오는데 정규 아빠가 그녀를 따라왔다. 술 냄새가 역겨웠다.

김선생님, 참 창피합니다. 집사람이 원래 무식해서. 난 제법 산다는 집에 태어났었지요. 학교도 고등과까지 나왔지요. 연애 잘못 해 가지고 오늘까지 이렇게 고생입니다. 그렇다고 사회가 좀 어떻게 길을 터주는 것도 아니고. ,...

정규 아빠는 침을 툭툭 튀기며 술에 취해서 걸음을 비틀거린다.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라던가. 순주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듣기 싫어요. 마누라나 자식들이나 너무 과분해. 사회도 너무너무 과분해 저리 가요!

훈장짓 이십 년에 목소리만 남았는지, 순주의 음성은 또릿하고 매서웠다.

순주는 퇴직금 중에서 오십만 원을 정기 예금해 두었는데, 그것으로 내년에는 냉방장치를 사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 무서운 더위 속에서 부엌일 하며 소제며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높은 혈압도 더 오르는지 뒤통수도 뻐개질 듯이 아팠다. 남을 시키더라도 그런 더위 속에서 시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잔뜩 기대하던 냉방이었는데…… 아이들의 방학 동안 서늘한 속에서 번역 일도 본격적으로 해볼까 했었는데……그 부푼 꿈이 정규네 식구가 살 방 한 칸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어요?

하며 동이 엄마가 뛰어나왔다.

죽었어.

순주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애비가 그 모양이니. 가엾어라, 쯧쯧.

동이 엄마는 돌아서서 세탁실로 가며,

젊은 내외가 죽으라고 일하면 요새는 굶지는 않아요. 어린 자식도 버는데 그것저것 다 보태면 자식 중학교는 보내지요. 빌어먹을 놈!

하며 분해한다.

순주는 영희에게 전화를 했다. 별장에 내일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순주는 불행한 시체를 막 보고 온 길이라. 미신은 아니나. 너의 새 별장에 처음 가는데 기분이 석연치 않다고 하니까, 영희도 두말없이 응낙했다.

작은아씨, 이번 별장은 정말 예쁘게 되었어요. 돌아가신 마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그래, 내가 어머니 몫까지 좋아하고 있다. 기특하고 고맙다.

마님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저도 남의 밑에서 일도 해보고 남을 부려도 보았지만, 마님 같은 흉내도 못 내겠어요. 작은 아씨들 형제가 모두 그렇게 잘 사시는 것도 다 부모님 은덕 덕분 같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순주는 잘산다는 말이 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

-냉방장치 하나 해놓고 살 수도 없는 실정인데……

정서방도 일이 잘될 때마다 마님 내외분 얘기를 해요.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고요. 이번 별장도 짓자마자 그랬어요.

영희의 음성은 밝고 힘찼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그야 좋아하셨겠지. 하지만 욕심이 많으셔서, 별장 둘쯤 가지고는 만족 못하셨을 거다.

어머, 어머, 또 짓겠어요, 그러면.

아니, 별장 같은 걸로는 안 된다는 얘기야. 그분 욕심 채워드릴려면 세계의 사람이 돼야 할 거야. 외국에는 훌륭한 업자가 많다더라.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부잔데요?

얼마나 부자인가는 나중 문제다.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어떻게 썼는가, 직원들에게 이익을 어떻게 분배했는가, 본인은 얼마나 작고 묵은 집에서 사는가가 문제다. 정서방은 잘 알 테니까 물어보아라. 어떤 이는 학교를 세워도 이십일 세기를 지도하는 훌륭한 인물을 길러내는 취지하에 세웠다더라. 정서방도 제발 그렇게 되기 바란다고 전해다우.

작은아씨, 그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어느 나라 사람이건, 그런 사람은 세계의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순주는 영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까 의심스러워서,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님도 다 딴나라 사람 아니냐 ? 아인시타인도, 베토벤도 그래도 온 세상 사람이 다 숭배하지?

그래도 사업가는 아니잖아요?

순주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정서방한테 물어보아라. 잘 설명해줄 거다. 어떤 직업으로도 세계의 사람이 될 수 있단다.

하고 순주는 전화를 끊었다. 정사장은 어릴 때도 독서를 즐겨서 머리에 든 것이 많았었다.

순주는 정규네에서 얻은 충격을 가라앉히는 데는 땀흘려서 일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소매를 걷고 빗자루를 잡았다. 동이 엄마가,

사모님, 정사장댁에서 차가 왔어요.

한다. 영희의 운전 기사가 예쁘게 리봉까지 단 뭉치를 가지고 왔다.

이것. 조금이지만, 오늘 아침에 비행기로 온 오렌지라 아주 싱싱하다구 사모님이 보내셨 어요.

한다. 비행기로 온 오렌지? 영희가 그쯤 되었구나 싶으니까 너무나 고마와서 순주는 떨어진 검은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가난에 찌들렸던 영희의 소녀상에 합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죽은 정규도 정사장처럼 될지도 모르는데……순주는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정규의 시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저승에서는 좋은 아빠 만나서, 다시는 가슴 아픈 일은 당하지 말아요.>

하고 실지로 합장했다.

오렌지는 싱싱하게 윤기가 흘렀다. 모두 열 개니까 식구마다 하나씩 돌아가고 셋은 남는다. 그것을 또 쪼개면 순주를 빼놓고 한 개 반씩은 돌아갈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며 시동생이며 아이들이 때아닌 오렌지에 환호성을 지를 것을 생각하니 행복했다. 열 개를 모두 냉장고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먼저 하나쯤 먹어 나쁠 게 무엇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 때문에 교직도 희생하고 지닌 재주도 완전히 희생할 지경인데 싶으니까 슬그머니 화도 난다. 그녀는 과도를 들고 와서 오렌지 하나를 잘랐다. 그것을 또 반달형으로 잘라서 먹으려는데 동이 엄마가 꽃병에 물을 갈아서 들고 온다. 순주는 속으로 아이고 맙소사, 이것 하나 온 것 먹을 팔자가 못돼, 하면서 오렌지의 반 토막을 집어서 아줌마한테 주었다.

이게. 글쎄 비행기 타고 오늘 아침에 도착한 거래요. 귀한 것이니까 먹어 봅시다.

-내가 가질 것 다 가지면, 먼지 하나라도 남 줄 것은 없단다.

하던 어머니의 말을 수긍하며, 오렌지를 껍질째 먹는 동이 엄마를 쳐다보았다.

껍질은 먹지 말아요. 더러운 것 묻었을지도 몰라.

괜찮아요. 비싼 건데.

동이엄마는 어림없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즐거운 듯이 먹었다.

 

신화의 단애(神話斷崖)

-한말숙

 

새까만 거리에는 해드라이트의 행렬이 한결 뜸해졌다. 밴드는 다시금 왈츠로 바뀌었다. 시간은 마구 흘러간다. 진영은 별로 초조해지지도 않는다. 애당초에 댄서로 취직할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한달 동안 일을 한 연후에야 겨우 월급을 탄다는 것은 안될 말이다. 오늘 저녁을 먹고, 이 한밤을 여관에서 자기 위한 돈이 - 그것도 단 돈 이천 환이면 되지만- 필요한데 한달 후가 다 무엇이냐.

이대로 서 있자. 지난 봄에도. 늦어서 오는 손님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처럼, 한 열흘을 벌어서 또 다시 반년을 살고 보자.

춥다. 추워서 움츠러진 조그만 젖꼭지가 스웨터 위에 뾰조록이 솟아 버렸다. 그 뿐만은 아니다. 배도 고프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거의 질식 상태다. 추위와 굶주림...... 진영은 그 속에서 여전히 생존하고 있는 스스로를 또렷이 깨닫는다.

(지금 나는 살고 있다.)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살고있다]하고 되씹어 본다.

오층 빌딩의 높은 창턱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밤은 아늑하고 다정스럽다.

[들어가실까요?]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다보니 해멀쑥한 청년이 웃고 서 있다. 홀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에 샨데리아가 희미하다. 그 속에서 밴드는 흐르고, 춤꾼들은 마시고 웃고 떠들고 있다. 초만원이라 채 몇 발짝 떼게 전에, 다른 쌍과 맞부딪쳐 버린다.

리이드는 서툴고 맘보는 재미없었다. 그래도 진영은 밴드에 맞추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그렇게 해서, 추위나 덜어 볼까 하는 속셈이었다. 호울드는 차츰 가까워졌다. 술 냄새가 진영의 얼굴에 확 끼친다. 빰에 남자의 수염이 까칠까칠 닿는다. 귀찮다. 팁은 얼마나 주려나.

[기피자를 적발해야 할 텐데요.]

청년은 술 때문에 조금 혀꼬부랑 소리다.

[왜요?}

[직업상...........]

{직업?]

[난 형사야.]

[그러세요?]

진영의 말끝은 힘없이 흐려진다. 그처럼 어린 형사에게 돈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하나 잡았나 했더니............)

짜장 구슬픈 블루스보다도 진영의 스텝은 맥이 없다. 카아네이션 꽃잎 지던 밤.

스테이지에서는 가수가 앞가슴을 허옇게 드러낸 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도 기피자인데 남을 잡으려니 양심이 찔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으면 내 목이 달아나고.]

추억에 울던........

[내일까지는, 꼭 하나 적발해야 할텐데.............., 그리고 보니 모조리 기피자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후유..............]

남자가 풍기는 술 냄새는 견딜 수가 없다. 진영은 스탭을 밟으며 무턱대고,

[저기 있지 않아요? 기피자.]

하고 소리쳤다. 형사는 진영의 뺨에 대고 있던 얼굴을 번쩍 들며

[어디?]

한다. 진영은 턱으로 아무 데로나 가리켜 보았다.

[저어기]

마침 저편에서 키 큰 청년이 깨끗한 뒤통수를 이쪽으로 보인 채, 멋있게 터언을 하고 있었다.

[정말?]

{으응.]

진영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대답을 했다. 진영은 그 청년이 누구인지도 물론 모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기피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바가 못되었다. 다만 술 냄새와 까칠까칠한 수염을 면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블루스는 멎었다. 진영은 위스키를 마셨다. 목에서는 차나 이내 몸은 후끈해진다.

마지막 곡이 시작되었다. 형사는 화장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은 담배 연기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알바이트?]

하며 눈이 어글어글한 청년이 진영의 앞에 우뚝 섰다. 진영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었는 걸.]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센터로 나가는 청년의 뒤통수를 보자, 진영은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까, 턱으로 아무렇게나 기피자라고 가리킨, 바로 그 깨끗한 뒤통수였기 때문이다.

리이드는 멋있었다. 진영의 등에 얹혔던 팔이 차차로 내려와서 감긴다.

[멋진데?]

그의 눈은 정열적이면서 어딘지 냉랭하다.

[아까부터 허리가 좋다고 생각했었지.]

[................]

[추면서, 남이 안고 있는 여자를 감정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

[학생?.............미스?]

진영은 연달은 질문에 대답 대신 웃고 있었다. 청년은 진영이가 둘 다 긍정한 줄로 알은 모양이다.

[일주일만 살까?]

하고 웃는다.

[십만 환이면 되지, 내일부터.]

사뭇 뻐기는 어조다.

[!]

진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십만 환이 다 무엇이냐. 내게는 지금 당장에 단돈 이천 환만 있으면 충분한데. 그러나 웃음이 뜻을 잘못 알아차린 청년은,

[비싼데, 그럼 이십만 환!]

[!]

진영은 더욱 답답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면 ,삼십만 환.]

밴드는 멎고 호울드는 풀렸다.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일부터 일주일간의 일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지금 생각할 여유가 없다. 오늘밤을 어찌하나 그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진영이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진영의 손에 지폐가 쥐어져 있다. 육백 이십 환이다.

[남은 게 그것밖에는 없어.]

두 사람은 다른 춤꾼들 사이에 끼어 묵묵히 층계를 내려갔다.

거리는 추웠다. 이내 온 몸이 오싹해지며 떨린다.

[내일,.호심으로 오시오. 아홉 시 반]

청년은 말을 뚝 자르고 돌아섰다.

아홉 시 반이라면 자고 일어나서 나오기가 꼭 알맞은 시간이라고 진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오후나 저녁 몇 시라고 한다면 진영은 그것을 지킬는지가 의문이다. 그 동안의 시간에 혹시 하루를 살수 있는 돈이 생긴다면 구태여 그를 기다려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진영도 돌아섰다. 몹시 배가 고팠다.

통금 예비 사이렌이 불고 난 거리에 음식이 있을 리 없다. 그뿐 아니다. 명동에는 거의 불빛이 없었다.

검은 하늘에 조각달이 걸려 있다. 진영은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성당을 향하는 언덕길 가에 군고구마 장수가 부스럭대며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석유 등잔이 가물가물 켜져 있다.

진영은 남은 고구마를 다 털었다. 대여섯 개 밖에는 안 된다.

진영은 군고구마를 먹으며 걸었다. 여간 맛있지 않다. 주린 배에는 이토록 맛난 것이 또 있으랴 싶다.

어디로 갈까? 오백 환으로 재워 줄 여관은 없다. 이토록 추운 밤에 내 몸을 꽁꽁 얼려 재우다니. 죽으면 썩는 몸이다. 살아있는 순간 다시는 없을 이 지극히 소중한 순간을 나는 내 몸을 하필이면 얼려 재워야만 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안될 말이다. 진영는 경일 한데 가서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그 방도 냉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래도 같이 자면 한결 따뜻할 것이 아닌가.

손바닥만한 방에 책과 화구가 하나 가득 흩어져 있다. 진영은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경일은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모른 체하고 캔버스만 보고 있다. 진영은 먹다 남은 군고구마를 책상 위에 놓으며 요 밑으로 발을 넣었다. 뜻밖에도 바닥이 더웠다. 그림이 팔렸나?

[웬일이세요? 방이 더워.]

경일은 갑자기 몸을 돌이키고 다짜고짜로 진영의 등을 마구 때린다.

[왜이래. 왜이래]

[이년아 준섭이가 장작을 사온거야.]

[좋겠군요 친구 잘 두어서]

[엊저녁 얘기 다 들었다. 이년아 준섭이가 여기서 잔 거야.]

[내가 그래 어쨌다는 거예요. 어쨌다는....]

진영은 경일의 눈을 뚫어져라 흘겨본다. 경일은 눈 한번 깜작이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로 진영의 등을 주먹으로 때리기만 한다.

어저께 저녁 일이다. 한달 밀린 밥값 대신 화구 일체와 책 전부를 빼앗긴 채 하숙을 쫓겨 나온 진영은 통금 사이렌을 듣다 어쩔 수 없이 준섭의 하숙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것은 경일의 하숙보다 가깝고 파출소보다는 갈 만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진영은 시민증을 잃은 지 벌써 반년이 넘는다. 그것이나마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x 미술대학 학생증만으로는 파출소로 가기는 꺼림칙했다. 꺼림칙 이상으로 싫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늘밤 재워주세요.]

진영은 파자마째로 당황하는 준섭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던 것이다.

[....]

준섭은 눈 둘 곳을 모르고 있었다.

[.........?]

[저 김 군이, ..........]

[미스터 김이 어쨌단 말씀이세요?]

[.....]

주뭇거리며 망설이고는 있으나 준섭의, 눈에는 무엇인지 기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진영은 그것이 메스껍고 화가 났다.

[누가 누가 당신하고 무슨 연애 유희라고 하고 싶어 온 줄 아세요? 천만에 잘 데가 없어서 하룻밤만 자겠다는 거예요.]

진영은 꼿꼿이 선 채 말했다.

[그런게 아니라 저 김 군이 알면 또 오해나....]

[오해를 하면 어떻단 말이에요. 지금 잘 데가 없다는데 오해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이예요.]

준섭은 한참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못내 걸렸던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밖으로 나가 버린다.

(잡을까? 내버려두자!)

외투가 없어진 못에는 머플러가 걸려 있다. 여자의 것이다. 때로 자러오는 기생이 있다더니 그 기생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분홍 빛깔이 무척 자극적이라고 느껴졌다.

준섭은 바로 그저께도 진영에게 또 알쏭달쏭한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경일군과의 관계를 다 이해하겠습니다.. 조금도 나무라지는 않겠습니다. 중략.... 덧없는 일인 줄 아오나 어쩔 수 없이 적은 글입니다..>

내용은 대개 이렇게 적혀 있다. 어쩌자는 소리인지 도무지 답답한 예기이다. 아마도 같이 살자는 말인 성싶다. 그렇다면 왜 좀더 알아듣기 쉽게 쓰지 못한단 말인가 또 어째서 지금 이대로 잠자코 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가. 오늘밤만은 나를 마음대로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간 준섭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영은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한밤을 고이 자고 났던 것이다. 그러나 준섭이가 경일에게 가서 잤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그만 때려 그만 그만]

그러면서도 진영은 주먹을 피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도무지가 못 견딜만큼 아프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추위에 움츠려 들어서 어깨가 아팠는데 매를 맞고 보니 시원한 것을 어떻게 하랴. 주먹이 멈추었다. 방바닥은 뜨겁고 몸은 후끈거렸다.

[매맞고 나니 더워졌어요.]

진영은 솔직히 말했다. 아프라고 때렸는데 더워서 좋다니, 경일은 성난 얼굴이다. 그는 마치 보기 싫은 물건을 다루듯이 발바닥으로 진영을 아랫목 쪽으로 밀어붙였다. 진영은 종이쪽 모양 주르르 밀려간다.

경일은 다시 붓을 들었다. 진영은 스웨터와 스커어트를 벗어서 차근히 개켜 놓았다. 꾸겨진 옷으로는 댄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일찍부터 나가서 돈을 벌어야하지 않느냐고 그녀는 속으로 다짐한다.

몸이 풀리고 나니 맞은 떼가 뻑적지근한 것 같다.

지난 봄에도 댄서로 나갔다고 해서 이렇게 맞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준섭이 하숙에 자러 갔다고 해서 맞았지만) 편지마다 사랑하노라고 적어 보내는 준섭보다는 말없이 때리기만 하는 경일 이 편이 오히려 벅차게 가슴에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군고구마로 굶주림은 면했고 , 따뜻한 방에 누워 있으니까 진영은 무한히 행복한 것 같았다.

(지금 나는 행복하다.)

이제 잠만 자면 그만이다. 이렇게 머리 속이 텅 비게 될 때면 진영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지 않을까? 진영은 -경일이- 하고 입 속으로 속삭여 본다. 나의 애인, 그리운 그리운 사람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니까 정말 그리워지는 것 같다. 그리워 못 견딜 것 가다. 그립다. 그 그리움이 그립다. 아아........

[키쓰할까?]

진영은 요 밑에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시끄러!]

경일은 소리를 꽥 지른다. 진영은 벽을 향해 몸을 돌이키며, 좀 전에 헤어진 청년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삼십만환, 삼만 환의 열 배다. 내일을 생각지 않는 진영에게는 오히려 벅찰 만큼 많은 돈이다. 하숙비를 내고, 아니 자취를 하자 등록비도 걱정 없구........ 그러나 진영은 그 이상 더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경일이 그를 와락 껴안았기 때문이다. 경일의 포옹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깨끗한 청년의 호울드 또한 부드럽고 기분 좋은 것이었다고 진영은 생각한다.

멀리서 아홉 시를 치는 소리가 났다. 경일은 벌써 나가고 없었다. X극장 뒤의 창고가 그의 출근처인 것이다. 영화의 간판을 그리는 것이다. 그나마 어저께 가까스로 얻은 아르바이트인 것이다.

책상 위에는 군고구마가 덩그랗게 하나 놓여 있다. 진영은 그것을 먹으며 경일의 하숙을 나섰다.

걸음이 성당 앞에 이르렀을 때, 진영은 교인은 아니나 무엇이라도 한번 기도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성모마리아, 나에게 애인을 하나 마련해 주세요. 영원한 애인을요.]

진영은 경건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러나 이내 그 마리아 상이 왜 졸렬한 조각이 눈에 띄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진영은

[마리아. 좀더 기다리세요. 내가 당신을 조각해 드리겠어요.]

했다.

찬 하늘 아래 홀로 하얗게 서 있는 마리아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고뇌로 해서 스스로를 매질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애틋하기 한이 없다. 처녀가 아이를 낳다니! 사랑의 기쁨도 모르면서 진통만 겪다니! 가엾어라 가엾어라!

시간이 이른대도 다방에는 손님이 많았다 오일 스토우브가 벌써 벌겋게 달아 있다. 누가,

[여보.]

한다. 어젯 저녁의 그 청년이었다. 하얀 턱에 세이빙을 한 자국이 파랗다.

[.]

하며 그는 테이블 위에 자그마한 보따리를 올려놓는다.

[현금이야 삼십만환. 수표면 부도나 아닌가 할까봐 바꿔 왔어, 큰돈으로 바꾸느라고 애썼지, 어때 그 정성이? 하하하.}

그는 거리낌없이 큰 소리로 웃는다. 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만 마시고 싶다. 군 고구마를 먹어서 목이 바싹 말라 버렸다. 그래서 우선 커피나 마시고 보자고 했다. 진영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가자.]

하며 그는 일어섰다. 그는 댄스홀에서 보다 더 미남같이 보였으며 더욱 점잖다고 진영은 느꼈다. 진영도 뒤따라 일어섰다. 앞뒤 테이블의 손님들이 진영과 그를 번갈아 보고 있다.

택시 안에서 그는 진영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호텔의 현관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주홍빛 빌로오드의 양탄자가 눈부시었다. 기둥이랑 천장에 현대적인 감각이 확 끼친다. 수부에서 청년은 일주일 방 값을 전불했다.

[309호실]

하고 사무원이 말 하니까 보우타이를 맨 보이가 성큼 나선다.

진영은 손에 등 지폐의 무게와, 그녀와 나란히 층계를 올라가는 청년의 로우션 냄새와 주홍빛 양탄자를 인식했다.

층계의 커어브를 돌 때다.

[여보,]

하고 아래서 누가 소리를 쳤다. 형사라는 것이었다.

형사는 청년의 신분증을 조사하더니 가자고 한다. 기피자라는 것이었다. 지금 곧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청년은 형사를 비웃는 듯 싱긋 웃으며,

[갑시다!]

하고 늠름한 걸음으로 층계를 도로 내려간다. 깨끗한 뒤통수가 몹시 사랑스럽다. 진영은 당황하며 뛰어갔다.

[여보세요.]

[.........?]

[이것......]

진영은 돈 보따리를 내밀었다. 청년은 싱긋 웃는다.

[가지시우. 약속을 어기는 것은 이쪽이니까.]

[너무 많아요.]

[애당초에 삼십만 환은 너의 허리 때문이 아니야. 이걸 봐 이렇게 죽음이 쫒아 다니지 않아? 나는 일년을 살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우선 하루라도 살고 보아야 해. 살 시간이 없어 바뻐.]

하고 빙긋 웃으며 돌아선다. 진영은 청년에게 바싹 다가섰다. 진영의 표정은 자못 심각해졌다.

[가지 마세요,]

청년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진영의 입에서도 앵무새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저도 사랑해요.]

말을 하고 보니 진영은 정말 사랑하는 것 같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요!]

[돈으로 안 되는 일없지 곧 온다.]

그는 진영의 뺨을 슬쩍 쓰다듬고 호텔을 나가 버렸다. 형사가 뒤따라 나갔다. 그때 수부에서 헤멀쑥한 청년이 담배를 피우며 진영에게로 다가왔다. 진영은 낯익은 얼굴이라 생각을 했다. 누구일까? 아차! 엊저녁의 그 형사로군!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진영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섭게 쏘아 붙였다.

[당신이군요! 비겁한.}

[왜 그러슈! 남편?]

진영은 입을 한일자로 다문 채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럼 애인?]

[아니.]

[그러면?]

[남자.!]

하고 진영은 돌아섰다. 형사는 뒤따라오며,

[내가 논산으로 갈 때엔 나도 프로포즈 할 생각이야.]

[어림없어.]

[나는 일년은 넉넉히 살 수 있어!]

진영 은 앞을 똑바로 본 채 층계를 올라갔다.

진영은 호텔의 그릴에서 치킨 스테이크를 먹었다.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은 한결 쓸쓸하리라고 생각하며, 오우버와 구두를 샀다. 립스틱도 샀다. 이것을 바르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홀로 갈 날이 멀지않아 또 있으리라 생각했다. 백도 샀다, 그래도 돈은 남았다.

진영은 하숙으로 갔다,. 주인 아주머니는 삵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아이를 셋이나 데린 전쟁 미망인이다. 밀린 밥값을 치렀는데도 진영의 마음 한구석 어딘지 개운치 못한 데가 있다. 오만 환을 더 내어놓았다. 주인은 고맙다고 하며 이내 흑흑 흐느껴 운다. 삼십만 환을 얻은 데도 고마운지를 몰랐던 진영은 하숙 주인이 오히려 우스꽝스럽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었다. 진영은 그 여자의 가난이 끼친 울적한 기분을 가시게 하고 싶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진영은 화구를 샀다. 모두 사만 환이다. 갑자기 붓이 들고 싶어진다. 어서 그려야지,. 국전에서 모 장관상을 탄 경일의 그림이 생각난다. 그녀는 그 구성이 참 잘되었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학교의 성적은 진영이 수석이나 국전에서 는 낙선했던 것이다. 시기와 비슷한 불길이 몸 어느 모에서 부턴지 소리 없이 이는 것 같다.

(그려야 한다.)

진영은 거리의 책 점에 들렀다.

[고호]의 소묘집이 있다. 진영은 책장을 들춰보았다. 까마귀가 날으고 있다. 사육을 파먹고 산다는 날짐승...... 금시에라도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뚝뚝 떨어질 것 같다. 진영은 자기 자신이 까마귀 같다는 느낌이 온다. 팁으로 해서 살아있는 그녀의 살이 까마귀의 살만 같다. 진영은 진저리를 치며 몸을 흔들어 본다. 불퉁한 젖가슴이 육중하게 흔들린다. 진영은 다만 그녀의 실존을 재확인 할 따름이다.

진영은 위스키를 한 병 사들고 호텔로 갔다. 더블 베드는 지나치게 호화로왔다. 그녀는 일주일 여기서 홀로 사는 것이다 고요 속에서 붓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이 온다면? 돈으로서 안 되는 일이 있겠는가고 하였는데....... 오면 오는 것이고, 그때 일을 지금 생각지 말자.

진영은 위스키를 더블로 해서 마셨다. 이내 몸이 상쾌해 진다. 푹신한 배드에 엎드려본다. 기분이 여간 좋지 않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농락해보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자신이 강력히 솟구친다. 무서울 것도 꺼릴 것도 없다. 오로지 그려야한다는 의욕만이 파랗게 불탈 뿐이다.

진영은 준섭에게 편지를 썼다. 베드가 부드러우니 그 색시와 하룻밤 자러오라는 얘기를 썼다. 그저께 한밤 따뜻이 재워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다. 다음은 경일에게 글을 썼다. 사랑해요---하고 쓰기 시작했으나, 도시 펜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랑 사랑...... 진영은 그 말의 감각을 느껴 보려 하였으나 그 추상명사가 마치 숫자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열될 따름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다만 진영은 지금 경일을 포옹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진영은

'..... 경일씨 어서 오세요, 보고 싶어요.' 라고 편지의 끝을 맺었다.

진영은 베드에서 일어나서 높은 창가에 스케치북을 들고 앉았다.

창 밖은 밤이었다.

무수한 별빛이 어둠 속에서 별빛처럼 명멸하고 있다.

 

 

 

 

 

 

 

 

 

 

 

 

 

 

 

 

 

 

 

 

 

 

 

세계(世界)의 사람

 

순주는 타임 잡지를 대강 훑어보았다. 미스터 K,미스터 Y,닥터 B의 기사가 몇 줄 있는가 하면, 즐비하게 문 닫은 구라파의 공장들과 실직자들의 사진이며. 주문이 밀려서 야간 작업까지 하는 한국 공장들의 분주한 사진. 대문자로 된 코리어 이즈 카밍.

어머, 이건 전에 읽은 건데?

어저께 배달된 것을 분명히 여기에 꽂아두었었는데, 누가 또 어디에다 갖다두었어! 그녀는 조금 짜증이 난다. 일곱 식구 중에서 타임지를 읽는 사람이 그녀의 남편시동생, 그리고 그녀 자신해서 셋이고, 사진이라도 보아야 성이 가시는 국민학교부터 고등과의 아이들이 넷이 있으니, 누가 그것을 보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책 한 권을 마음잡고 앉아서 읽을 만한 시간이 없다. 가사 노동 사이 어쩌다 시간이 나서 책을 들어도, 한 줄 읽으면 대문 초인종, 두 줄 읽으면 전화소리, 그것이 삼십 퍼센트쯤은 잘못 걸려온 것들일 때도 있다. 오전에 빨래며 청소하고 나면, 오후에는 시간마다 다르게 하나씩 여섯 식구가 귀가한다.

어저께도 존 폴 교황의 사진이 있는 타임지를 표지만 보고 잡지 꽂이에 우선 끼워 두었었다.

집을 지켜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고등과 영어 교사직을 작년에 사직했었다. 일자리가 많아져서 가정부직을 찾는 사람이 적어진 탓도 있으나 그보다 성실한 사람들이 적어져서 믿고 쓸 사람이 없는 것이 더 큰 원인 같다.

가사 돌보며, 틈틈이 번역하는 편이 수입면으로도 나을 것 같아 결행한 사직이었으나, 출판사의 의뢰를 받고도 일년 동안 이백 장 짜리 단편소설 한 편밖에 번역 못하고 있다. 하루 걸러서 파출부를 부르고 있으나 집일은 여전히 밀리고, 파출부를 매일 열 시간씩 쓴다면 그녀의 시간이 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대학교수의 사정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지출이다.

오늘은 파출부를 쓰지 않아야 할 날이지만 새로 별장을 지었으니 순주더러 놀러와 달라는 영희의 부탁에 하는 수 없이 응하느라고 동이 엄마를 불렀다.

영희는 그녀의 소녀 시절의 심부름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굴지의 거부 A토건회사의 사장 부인이다. 그녀의 남편인 정사장은 순주 아버지의 친구 집의 사환이었다. 학력은 시골의 국민학교. 순주의 어머니가, 고 녀석은 싹이 있다 하며 중매를 서서 고아나 다름없는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들이 삼십대 들어서며부터 조금씩 돈이 생기더니 사십대가 되어서는 백억 대를 육박하게 되었다.

순주보다 한 살 아래인 영희가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 온 것은 영희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시골서 서울로 일 오는 사람들 중 그 무렵은 더러 머리에 이가 우글거려서 식구들에게 소개하기 전에 어머니는 먼저 길게 땋은 머리를 단발을 시키고 몇 번이나 세발시켜서, 참빗으로 수없이 빗겨 서캐 하나도 안 보일 때까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훑어내게 했었다.

나포댁이라는 고참 아줌마가 넷 있는 사용인을 잘 지도하고 있었는데, 나포댁의 잔소리가 심해서 십대의 아이들은 어머니한테 직접 와서 하소연을 자주 했었다.

마님. 종이 종을 부릴 때는 식칼로 부린대요.

하고 아주 감정이 틀어질 때는 그렇게까지 혹평을 했다.

아니다. 나포댁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솔개의 마음은 솔개만이 안다는 말도 있다. 너희 가 그 사람을 아직 몰라 그런다.

하고 타이르면서도, 어머니는 나포댁을 조용히 불러서.

자네 딸이 저런 처지로 있다고 생각해보게. 같은 뜻이라도 어하고 아하고는 다르다지 않나. 자네는 말투가 괄괄해서 오해받을 때가 많네. 속마음이 비단 같은 것을 나야 아네만 말이지.

하고 말하면 나포댁은,

마님도 저러시니, 난 속 터져 죽어요.

할 때도 있고, 복 받을 어른이라고 돌아서며 축원하기도 했다.

단발머리가 된 영희는 아줌마가 참빗질을 하는 동안 내내 울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를 내며 두어 시간을 끈질기게 훌쩍거렸다.

빗질할 때 머리가 당겨져서 아파서도 울었겠으나, 긴 머리가 짧아진 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낯선 집이 불안하고, 사용인 신세가 된 것이 슬프기도 했었을 것이다.

나포댁은,

머릿폭에 이 길러 가지고 팔아먹을 작정했었냐? 딱 안 그치면 늬네 이모더러 도루 데려가라 할 테여! 늬 팔자에 이런 본대 있는 대가댁 구경이라도 했겠냐?

하며 뒷방에서 퉁명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한참만에 그리로 가서 문을 열고,

저것 봐라. 영희가 금방 서울아이가 되었다.

고 했다. 서울아이라는 말에 영희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하고 차차 울음도 그쳤다. 어머니는 소녀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구, 질겨터진 년, 그 울음 아까와서 어떻게 그쳤냐? 내일까지 울면 한 덩이 상으로 사줄려 했는데, 내 돈 굳었구먼.

하며 나포댁은 빈대떡 하느라고 맷돌을 돌리며 소리쳤다.

영희는 울어서 눈가가 벌겋게 붓고, 화가 나서 입을 한치쯤 빼물고 있었는데, 맷돌 돌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가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경자가,

아줌마, 재 보셔요, 우스워 죽겠는가보아요.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영희는 기어코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저년 아가리 큰 것 봐. 눈등은 원숭이 궁둥이처럼 벌개가지고 얼굴빛은 무짠지여. 내 말 못믿겠거든 저 거울가서 쳐다보아.……금례야, 아까 마님이 주신 배 딱 세 개만 갖고 와서 깎아라, 딱 세 개다. 내가 그 바구니 속에 몇 개 있는 줄 다 알고 있어. 혼자서 숨어 처먹을 생각 말고, 깎아서, 아가리 제일 큰 년부터 먼저 먹여라.

나포댁은 우는 영희가 불쌍했으나, 웃으니까 더욱 그 철없는 것이 측은했다.

그녀는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에 사용인으로 들어가서 박한 주인 밑에서 모질게 고생하고, 시집가서는 빈곤과 남편의 횡포에 인생고를 더 한층 겪었다. 남편이 첩을 두자 뛰쳐나와서 순주집에 왔는데, 그녀의 나이 마흔이 넘었으니 순주집에서만도 이십 년이 넘은 세월이 흘렀다. 그래도,

마님. 저는 이제 어느 정승 부럽지 않은 팔자예유.

하며 그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배맛 꿀맛 같지?

나포댁이 물으니까 영희가,

꿀이 무엇꼬?

했다.

꿀도 못 먹어봤냐? 가난도 육실하게 가난했던개비.

먹어보았어야 알제.

쯧쯧.

영희는 나포댁의 몸집이 절구통만치 뚱뚱해서 웃었다고 했다.

뒤꿈치로 팍 밟은 것 같은 네 콧등은 어떻고?

하면서 그날 밤에 뒷방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났었다.

철부지야. 그래, 남이 절구통 같다고 웃음이 나데? 머릿속에 이 한 말 뒤집어쓰고 앉은 주제에, 쯧쯧.

영희는 무서운 가난과 계모의 학대 속에서 짐승처럼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한다. 그녀의 이모는,

나도 날품팔이 신세니, 데려와야 밥 세 끼 멕일 수가 없어요. 사흘에 보리 한 끼 먹을까말까 하는 꼴 보고 눈감아 둘 수도 없구요. 읍내 포목상에서 첩으로 데려 가겠다는데……」

거기까지 왔을 때 영희 이모는 기어이 옷고름으로 눈등을 누르고 말았다. 행상 두부장수인 그녀의 이모는 영희를 이 댁에 데려다놓는다면 죽은 언니의 혼도 눈을 감을 거라며 나포댁에게 애원했고, 나포댁은 순주의 어머니에게 졸라서 영희가 오게 되었었다. 영희의 입고 온 옷은 검은 무명치마저고리였는데 몇십 번을 빨아 입은 것인지 꿰맨 자리는 수도 없고, 낡아 버어져서 속이 비칠 지경이었다. 속 팬티도 없이 치마를 들면 속살이 이내 나왔다.

나포댁은 밤에 어머니에게,

지긋지긋한 가난인가 보아요. 딴 애들은 쟈에 비하면 진사댁 작은아씨예요.

했다.

나포댁은 그녀가 추천한 하녀이어선지 영희에게는 잔소리가 더 많았다. 대청에서 발소리를 낸다고 야단, 군것질을 딴 애들보다 더 한다고 야단, 추석에는 긴 치마 입어보고 싶다고 하니까, 나포댁은 어이없는 듯 입을 딱 벌리며,

, , 사루마다(속팬티의 일본어)도 못 끼던 때 생각 안 나냐? 개구리가 올챙이 때 일 잊어버리면 벼락맞는다, 알갔냐? 늬네 집에서 똥개 새끼처럼 굴러 있었으면 월경할 때 무 얼로 막을 뻔했냐? 어이구. 빌어먹을 년, 늬 엄마 혼이 점지해서 이런 댁에 온 줄 알아. 그 짧은 다홍치마도 인조견이야. 산해 같은 마님 덕인 줄 알아,

그리고 나포댁은 군밤을 까서 영희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들은 모녀같이 다정하다가도 여러번 말다툼했다. 극도로 감정이 격하고 앞뒤 이치가 맞지 않아서 변명할 말에 궁하게 되면 영희는,

알았어, 알았어, 전라도 개똥쇠!

했다. 그러면 나포댁도 어른의 체통도 잊고,

이 경상도 문둥이가!

하며 소리를 쳤다. 그러다가도 어머니가 뒷마루에 나오는 기색이 있으면 싸움은 당장 그쳤다. 통일이 되어서 천여 년의 세월이 갔어도, 당시의 백제와 신라의 대립 감정이 언어로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닐까 하고 순주는 속으로 놀랐었다.

신라인들은 피정복자 백제인을 개처럼 천시하고, 백제인들은 정복자 신라인들이 죽더라도 몹쓸 문둥병에 걸려 죽기를 바라서 개와 문둥이라 저주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때로 반갑고 사랑스러우면 문둥아, 개똥쇠야 하며 부등켜안고 열광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한 천 년 더 가면 온 세계가 이렇게 되는 게 아닐까?

영희와 같은 때에 사용인으로 있었던 금례경자도 순주집에서 주선해서 시집을 보냈는데 영희처럼 갑부가 된 사람은 없고, 겨우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 그것도 출가하고 삼십 년쯤 지나고 나니 순주에게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은 차차로 없어졌다. 영희만이 사흘이 멀다하고 전화를 했었는데, 그녀의 재산이 늘어감에 따라 생활이 바빠지는지, 근래 들어서는 한 달에 한 번쯤. 꽃꽂이며 외국어며 요리며 숙녀 학원 등에 다녀서, 상류생활 부인이 갖출 소양은 일단은 고루 갖춘 모양이었다. 그것도 <마님이 그 옛날 야간학교에 보내주어서 한글을 깨친 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지난봄에 삼백명 내외의 손님을 초대해서 가든 파티를 여는데, 외국인에게나 우리 나라 손님에게나 대하는 영희의 품이 이제 제법 세련된 것을 보고, 돈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구나, 하고 순주는 홀로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두빛 시폰의 이브닝 드레스를 잘 입고, 스페인풍의 삼각 쇼올을 두른 영희가 외국인하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순주는 나포댁 말대로, 장아찌처럼 찌든 얼굴에, 머리에는 허옇게 서캐를 뒤집어쓴 채 울고 있던 소녀 영희를 도저히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환경이 변하면 정형을 하거나 화장에 주력하는 사람도 있는데 영희는 납작코도 그대로고, 갸름한 외꺼풀 눈도 옛날 그대로다. 더구나 화장도 분만 엷게 바르고 입술 연지도 눈에 뜨이지 않게 칠하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미인이 아니나, 그것이 도리어 수수하고 전통이 있어 보여서 삼백명의 손님 중 그녀의 불우했던 때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손님들은 업계의 한다하는 인사들이었고, 업계와 무관한 사람은 순주 내외뿐이었다. 그녀는 몇몇 인사들에게 순주 내외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 은인의 따님 김순주 선생님. 그리고 그 부군 박교수님.

순주의 남편은 가끔,

영희는 특별한 사람이야, 보통은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했다.

그래요. 의리 있는 아이예요. 그러니까 저렇게 잘 되나부지요?

하고 순주도 마음속으로부터 칭찬했다. 추석이며 정초 명절과 순주 내외의 생일에는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선물을 사들고 오거나, 바쁠 때는 운전수를 시켜 보냈었다.

부엌에서 동이 엄마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설겆이를 하고 있다. 소리가 크게 날 때마다, 그릇이 깨지나 하고 순주는 섬찟섬찟한다. 조심하라고 몇 번 당부는 했으나 동이엄마는 지난 한 달만도 커트 글라스와 접시 하나씩을 깨고, 국 대접은 두 개나 이를 뺐다. 값을 따지면 만 오천 원쯤 된다.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그것을 따지면 야속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순주는 그들에게 지불하는 급료보다도 그러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 때문에 되도록 살림을 손수 하는데, 그러려니 그녀 자신의 시간을 못 갖게 된다.

파출부를 몇 사람 겪어보니까 사람마다 각양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고추장에서부터 설탕 , 깨소금까지, 조미료 일체를 조금씩 몰래 퍼 가는가 하면, 고기며 김치까지 숨겨 간다. 어떤 사람은 옷도 몰래 가지고 간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일부터 아주 있을 사람이 오니까 오지 말아요. 수고했어요.

하고 은근히 그녀는 거절할 뿐이나 크건 작건 절도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순주는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지각없는 사람이 근로자의 긍지를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동이 엄마는 미숙 엄마가 그만둔 후로 석 달 동안 그릇은 잘 깨어도 손 거친 일은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본의 아닌 실수로 깨어서 피해는 주나 정직이 주는 그녀의 신선한 인간성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보배다.

타임지를 도로 책꽂이에 꽂고 순주는 일어섰다. 닥터 B와 한국의 괄목할 산업 발전의 기사를 동시에 실은 타임지는 역시 권위 있는 잡지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서투른 잡지는 그 어느 한쪽만 강조하고, 한쪽은 아예 묵살해버릴 텐데……

동이 엄마가 왔으니, 순주는 황금 같은 자신의 시간을 얻은 셈이었다. 영희와의 약속 시간까지 읽으려고 어저께 배달된 타임지를 찾았다.

큰아들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영희다.

작은 아씨, 안녕히 주무셨어요?

한다.

얘야, 그 작은 아씨 소리 그만 하기로 했잤니? 아주머니라고 해, 제발.

순주의 말에,

작은 아씨, 별말씀을 다 하세요. 세상이 거꾸로 서도 작은 아씨는 작은 아씨지요.

그 소리가 꼭 옛날 귀신 부르는 것 같아.

영희는 까르르 웃는다. 지금, 군주 제도 시절의 호칭을 들으니 거북해서 몇 번 고치라고 말했으나 영희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가 변해도 옛날은 안 변한다 한다. 그때의 주종관계의 의리를 지키느라고 그러는지, 흑은 그것도 일종의 콤플렉스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희가 아이들이 있다면 순주는 그녀를 아무개 엄마라고 부를 텐데 아이는 낳아보지 못했으니 부를 때 불편했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그녀를 정사장댁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어색할 것이었다. 순주는 그래서 부모 형제 없는 영희를 동생 같은 기분으로 영희라고 불렀다. 영희가,

차가 열한 시에 모시러 갈 거예요. 마님 제삿날이 다가왔는데, 그 생각 끝에 가회동 젊은 마님 생각이 나요. 이번 별장은 호숫가에 있어서 속리산 것보다 좋은 것 같아서요. 가회동 마님도 함께 모셨으면 어떨까 해서 의논드려요.

한다. 순주는 가회동으로 전화를 해서 올케를 찾았다. 올케는 펄쩍 뛴다.

지가 부자돼서 뻐길려고 그러는데 작은아씨가 가주실 건 무어예요 ? 밥 한끼 못 먹는 사람인가요? 요새 벼락부자들은 집 지어 놓고는 사람들한테 떠벌리지 못해 몸살이라니까요.

올케는 음성까지 흥분해서 떤다.

언니. 그렇게 생각할 게 무어 있수. 나는 가요. 얼마나 신통하고 기특해요. 우리는 부모 덕에 대학까지 나와도 요 꼴인데.

우리 꼴이 어때서 그래요. 작은 아씨도 돈이면 다요?

순주는 어이가 없다. 손위 올케이나 달래듯이,

꼭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 제가 뻐기고 싶으면 뻐기라지. 제가 뻐긴다고 내 속눈썹 하 나 까딱할 리 없구. 뻐기더라도 다 잘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애가 옛날처럼 앞도 못 가릴 형편이라도 초대하면 나는 가요. 기왕이면 노력해서 잘 살아 남에게 뻐기는 사람이 되었으 니 좋지 노력도 않으며 남 헐뜯고 앉아 있는 사람이 좋아요? 딴 부자는 어떤지 몰라도 영 희네는 좋은 사람이에요. 정서방을 어머니가 얼마나 잘 보신 줄 아세요? 정직하고 부지런 하고 언제나 웃는 낯이라구 하시며, 그래서 영희와 짝지어주신 거예요. 정서방은 돈을 벌어 도 도둑짓 사기짓은 안 했을 거라구요.

그 소리 스물다섯 번은 더 들었어요.

별걸 가지고 다 신경 쓰시네. 부자면 어떻구 가난하면 어때서 그래요? 사람만 보면 되는 걸 가지구……」

순주도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마당을 뛰어오며 동이 엄마가,

사모님!

하고 소리를 친다.

큰일났어요, 큰일났어요!

한다. 무엇인가 하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그러나 순주는 침착하게,

왜 그래요?

한다.

그러니까 정규엄마의 아들이 목 매달아 죽었대요.

정규가 죽었다구?

그래요, 정규가 죽었대요. 저기 저 뒷산을 보세요. 낭떠러지 나뭇가지에 매달렸지요?

동이 엄마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까, 바로 가까운 뒷산에 몇 그루 서 있는 나뭇가지에 확실히 사람이 매달려서 늘어져 있다.

정규인지 어떻게 알지?

사람들이 그래요.

정규 엄마는?

까무러쳐서 뻗었대요.

순주는,

저런!

하고 맥이 빠져서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정규 엄마는 작년 한 해 동안 하루 걸러 오던 파출부였다. 정직한 사람이었다. 몸매며 얼굴 생김새며 미인형이었다. 시골서 국민학교는 나왔는데 결혼을 잘못해서 그날부터 고생이라 했다. 아들 둘, 딸 하나. 그녀는 그 자식을 기르느라고 해보지 않은 노동은 없다고 한다. 장사를 해보겠다고 하며 파출부직을 그만두었었다. 남편은 알콜중독자인데다가 일하기를 싫어해서 노상 빈둥대는 위인. 순주도 그를 두어 번 보았었다.

순주는 동이엄마더러 집 잘 보라고 이르고, 영희의 별장에 가려고 입었던 검은 바지 위에 화려한 블라우스만 곤색으로 갈아입고 정규 집으로 향했다. 정규네는 길 하나를 건너서 뒷산, 산이라느니보다 언덕의 무허가 건물촌에 있었다.

한 평이나 되는 판잣방 문을 여니까 술 냄새가 물씬 난다. 한낮부터 정규아빠는 술을 마셨는지 눈이 게슴츠레하다. 정규 엄마는 말없이 순주를 바라보고만 있다. 마치 해골에 눈방울이 박힌 것 같다. 그녀를 못 알아보는 것 같다.

정규엄마. 그게 정말이요?

, 금상 보고 왔어요.

정규 엄마는 안 본 사이 바싹 마르고, 목이 더욱 길어진 것 같다.

저놈이 죽어야 할 텐데 애꿎은 우리 정규가 죽었어. 아이구 불쌍해, 아이구 불쌍해. 중학교 마칠려고 신문팔이 막노동하며 밥도 한 끼만 먹고 살아 볼려고 발버둥쳤었는데. 애비란 놈이 푼푼이 모아놓은 등록금 몽땅 술 처먹어버리지 않나, 내일은 또 무허가건물이라 집이 헐린다는데…… 쥐새끼도 집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집은 있는데, 어찌 우리 정규는 짐승만도 못해서…… 날 죽여라, 이놈아 날 죽여라. 이 죽일 놈아!

하며 정규엄마는 갑자기 찌그러진 남비를 들더니 남편을 아무 데나 마구 갈긴다. 정규 아빠도 죽고 싶은지 피하지도 않고 앉아 있다.

순주와 이웃사람들이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었다. 정규 엄마는 뼈만 남은 몸에서 무슨 힘이 솟는지 어른 남자가 셋이나 잡아끄는데도 힘이 모자랄 지경이다. 남편을 죽이고 말 기세였다. 겨우 밖으로 끌려나온 정규 엄마는,

사모님, 난 죽을 테에요. 정규 동생하고 같이 죽어서, 정규 뒤따라 가야지요. 저놈 못 보 면 그게 천당이지. 아니, 저놈 죽는 꼴 보아야 돼. 제 잘못 제쳐놓고, 주제에 남의 핑계만 하는 놈. 주둥이는 있다고 씨부렁대기는. 혼자 잘났지. 이놈, 네가 지껄인 소리 불면 너는 형무소 감이야, 이놈아!

정규 엄마는 경찰이 옆에 와 있는데도 그렇게 소리치며 주먹으로 땅을 치고 울부짖었다. 경찰은,

사망 시간이 약 한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누가 같이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안됐습니다. .

하고 순주에게 말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순주가 그들의 보호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순주는 정규엄마더러,

이것 보아요. 이러면 안돼. 남편과는 그만두더라도 정규 동생들은 잘 길러야지. 언젠가 그랬잖아 ? 자살하고 싶어도 고생한 것도 슬픈데 고생하다 죽는 게 원통해서 못 죽겠다고 응? 내가 방을 얻어줄 테니까 분발해보아요.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돼? 내가 내일 오십 만원 줄 테니까 집 헐리기 전에 방 있나 알아보아요. 정규 장사라도 정성껏 치르어 주고.

순주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녀의 말이 안 들리는 듯이 다리를 뻗고 땅바닥에 앉아 있던 정규엄마가 갑자기,

정성껏 치르어야지요. 황태자보다도 정성껏 치르어야지요.

하며 미친 듯이 허둥지둥 산으로 올라갔다. 이웃사람들이 우우 그녀를 뒤따랐다. 순주가 집으로 내려오는데 정규 아빠가 그녀를 따라왔다. 술 냄새가 역겨웠다.

김선생님, 참 창피합니다. 집사람이 원래 무식해서. 난 제법 산다는 집에 태어났었지요. 학교도 고등과까지 나왔지요. 연애 잘못 해 가지고 오늘까지 이렇게 고생입니다. 그렇다고 사회가 좀 어떻게 길을 터주는 것도 아니고. ,...

정규 아빠는 침을 툭툭 튀기며 술에 취해서 걸음을 비틀거린다.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라던가. 순주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듣기 싫어요. 마누라나 자식들이나 너무 과분해. 사회도 너무너무 과분해 저리 가요!

훈장짓 이십 년에 목소리만 남았는지, 순주의 음성은 또릿하고 매서웠다.

순주는 퇴직금 중에서 오십만 원을 정기 예금해 두었는데, 그것으로 내년에는 냉방장치를 사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 무서운 더위 속에서 부엌일 하며 소제며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높은 혈압도 더 오르는지 뒤통수도 뻐개질 듯이 아팠다. 남을 시키더라도 그런 더위 속에서 시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잔뜩 기대하던 냉방이었는데…… 아이들의 방학 동안 서늘한 속에서 번역 일도 본격적으로 해볼까 했었는데……그 부푼 꿈이 정규네 식구가 살 방 한 칸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어요?

하며 동이 엄마가 뛰어나왔다.

죽었어.

순주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애비가 그 모양이니. 가엾어라, 쯧쯧.

동이 엄마는 돌아서서 세탁실로 가며,

젊은 내외가 죽으라고 일하면 요새는 굶지는 않아요. 어린 자식도 버는데 그것저것 다 보태면 자식 중학교는 보내지요. 빌어먹을 놈!

하며 분해한다.

순주는 영희에게 전화를 했다. 별장에 내일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순주는 불행한 시체를 막 보고 온 길이라. 미신은 아니나. 너의 새 별장에 처음 가는데 기분이 석연치 않다고 하니까, 영희도 두말없이 응낙했다.

작은아씨, 이번 별장은 정말 예쁘게 되었어요. 돌아가신 마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시겠어요.

그래, 내가 어머니 몫까지 좋아하고 있다. 기특하고 고맙다.

마님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저도 남의 밑에서 일도 해보고 남을 부려도 보았지만, 마님 같은 흉내도 못 내겠어요. 작은 아씨들 형제가 모두 그렇게 잘 사시는 것도 다 부모님 은덕 덕분 같아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순주는 잘산다는 말이 실감 있게 들리지 않는다.

-냉방장치 하나 해놓고 살 수도 없는 실정인데……

정서방도 일이 잘될 때마다 마님 내외분 얘기를 해요.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고요. 이번 별장도 짓자마자 그랬어요.

영희의 음성은 밝고 힘찼다.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그야 좋아하셨겠지. 하지만 욕심이 많으셔서, 별장 둘쯤 가지고는 만족 못하셨을 거다.

어머, 어머, 또 짓겠어요, 그러면.

아니, 별장 같은 걸로는 안 된다는 얘기야. 그분 욕심 채워드릴려면 세계의 사람이 돼야 할 거야. 외국에는 훌륭한 업자가 많다더라.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부잔데요?

얼마나 부자인가는 나중 문제다.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어떻게 썼는가, 직원들에게 이익을 어떻게 분배했는가, 본인은 얼마나 작고 묵은 집에서 사는가가 문제다. 정서방은 잘 알 테니까 물어보아라. 어떤 이는 학교를 세워도 이십일 세기를 지도하는 훌륭한 인물을 길러내는 취지하에 세웠다더라. 정서방도 제발 그렇게 되기 바란다고 전해다우.

작은아씨, 그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어느 나라 사람이건, 그런 사람은 세계의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순주는 영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까 의심스러워서,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님도 다 딴나라 사람 아니냐 ? 아인시타인도, 베토벤도 그래도 온 세상 사람이 다 숭배하지?

그래도 사업가는 아니잖아요?

순주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정서방한테 물어보아라. 잘 설명해줄 거다. 어떤 직업으로도 세계의 사람이 될 수 있단다.

하고 순주는 전화를 끊었다. 정사장은 어릴 때도 독서를 즐겨서 머리에 든 것이 많았었다.

순주는 정규네에서 얻은 충격을 가라앉히는 데는 땀흘려서 일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소매를 걷고 빗자루를 잡았다. 동이 엄마가,

사모님, 정사장댁에서 차가 왔어요.

한다. 영희의 운전 기사가 예쁘게 리봉까지 단 뭉치를 가지고 왔다.

이것. 조금이지만, 오늘 아침에 비행기로 온 오렌지라 아주 싱싱하다구 사모님이 보내셨 어요.

한다. 비행기로 온 오렌지? 영희가 그쯤 되었구나 싶으니까 너무나 고마와서 순주는 떨어진 검은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가난에 찌들렸던 영희의 소녀상에 합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죽은 정규도 정사장처럼 될지도 모르는데……순주는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정규의 시체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저승에서는 좋은 아빠 만나서, 다시는 가슴 아픈 일은 당하지 말아요.>

하고 실지로 합장했다.

오렌지는 싱싱하게 윤기가 흘렀다. 모두 열 개니까 식구마다 하나씩 돌아가고 셋은 남는다. 그것을 또 쪼개면 순주를 빼놓고 한 개 반씩은 돌아갈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이며 시동생이며 아이들이 때아닌 오렌지에 환호성을 지를 것을 생각하니 행복했다. 열 개를 모두 냉장고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먼저 하나쯤 먹어 나쁠 게 무엇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식구들 때문에 교직도 희생하고 지닌 재주도 완전히 희생할 지경인데 싶으니까 슬그머니 화도 난다. 그녀는 과도를 들고 와서 오렌지 하나를 잘랐다. 그것을 또 반달형으로 잘라서 먹으려는데 동이 엄마가 꽃병에 물을 갈아서 들고 온다. 순주는 속으로 아이고 맙소사, 이것 하나 온 것 먹을 팔자가 못돼, 하면서 오렌지의 반 토막을 집어서 아줌마한테 주었다.

이게. 글쎄 비행기 타고 오늘 아침에 도착한 거래요. 귀한 것이니까 먹어 봅시다.

-내가 가질 것 다 가지면, 먼지 하나라도 남 줄 것은 없단다.

하던 어머니의 말을 수긍하며, 오렌지를 껍질째 먹는 동이 엄마를 쳐다보았다.

껍질은 먹지 말아요. 더러운 것 묻었을지도 몰라.

괜찮아요. 비싼 건데.

동이엄마는 어림없다는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즐거운 듯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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