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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단편소설2

105. 무색계

by 자한형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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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색 계 (無色界)-황충상

 

혼이 점지(點指)의 명을 받고 숙주(宿主)인 여인에게 갔을 때, 이미 여인은 임신 3개월이었다. 이럴 수가, 혼은 제법 인간들처럼 뇌이었다.

여인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혼이 그녀의 아랫배에 귀를 바싹 들이대도 잠결의 가벼운 숨만 내쉬고 있었다. 혼은 여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슬그머니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점지의 통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관문인 왼쪽 겨드랑의 땀샘 세 구멍을 찾아야 했다. 조만간 찾아야 할 그 구멍을 확인할 겸, 혼은 여인의 겨드랑을 향해 뜨겁고 세찬 바람을 투사했다. 바람은 마치 관능에 사로잡힌 사내의 뜨겁고 끈적한 입김 같았다. 섬찟 놀란 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침대의 탄력이 여인의 팽팽한 엉덩이의 탄력과 잠시 맞서다가 푹신한 정지태를 이루었다. 여인은 본정신이 아닌 순간을 수습하더니, 겨드랑이로부터 또르르 흘러 떨어지는 땀방울을 의식했다. 의식의 확산을 지배하는 그녀의 정신이 그녀 오관(五官)의 끈을 조정함으로써 잠은 순식간에 걷혔다.

혼은 상대적으로 잽싸게 구석 쪽을 찾아 숨어들었다. 혼이 예측한 태로 여인은 갓 등 스위치의 끈을 당겼다. 주황빛 마직 천으로 만든 갓을 쓴 붉은 전구가 확 방안을 불 붙이듯 강렬하게 자극시키며 밝혔다. 갓의 안과 밖, 이중 조명의 무드는 선정을 도발시키는 맛과 냄새를 지녔다. 다행히 혼은 더 깊숙이 숨지 않고도 전등의 직사광을 피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여인의 행동을 관찰하기가 용이했다. 여인은 땀방울이 흘러 떨어진 겨드랑을 훔친 다음 조심스럽게 잠옷 위로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흐뭇해했다. 저럴 수가 있나. 완전한 착각을 하고 있군. 이봐 여자, 진짜 임신이 아니야.

점지의 명을 받은 혼은 어떠한 일을 보고 만나더라도 의구심을 일으키는 것을 금기로 해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혼은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여인의 정신이 완전한 임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혼은 인간의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확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붙들고 아득함을 느꼈다. 임신의 확신으로 탱탱한 여인의 의식을 보고 혼은 조금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이내 본혼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벨소리 때문이었다.

여인은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려 방문을 열고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나갔다. 호릿한 여인의 몸매가 가뿐한 것으로 보아 혼이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도 상상 임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혼은 응접실을 질러 현판으로 여인을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전등 빛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점지의 혼들은 전등의 직사광을 가까운 거리에서 백팔 초 이상 받게 되면 점지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떠돌이 혼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금기 사항을 항상 명심해야 했다.

사내가 여인을 답싹 안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한 덩어리였다. 두 인간의 정기가 저토록 하나가 될 수 있다니, 혼은 깜짝 놀랐다. 사내 역시 자기 아내가 임신임을 확신하고 있다. 으흐흐, 사내가 갑자기 만족한 듯 웃었다. 새우처럼 안긴 여인도 흐무적흐무적 간질림을 당하듯 따라 웃었다. 사내는 침대 위로 여인을 띄워 던지고 몸을 날려 덮쳤다. 낮 동안 참았던 정욕을 사내는 여인의 입술을 찾아 불어넣기라도 하듯 열렬히 키스했다, 혼은 저런 행위가 모아져서 여인의 몸 속으로 들어가 열 달을 채우고 비로소 환생의 육신을 얻어 세상에 나을 수 있음을 그려보았다.

수억의 정자 가운데서 톱을 달리는 정자가 난소와 도킹하는 순간이 바로 점지. 그러나 웬지 그 이상 그려지질 않았다. 혼의 상상작용도 보이는 사실 앞에서는 무력했다. 사내와 여인의 행위가 혼을 달뜨게 했다. 아릿아릿 매운 느낌이 가끔 지나쳤으나, 다행히 혼에게 열까지는 동반시키지 않았다. 혼은 열에 대하여 잘은 모르지만 전생의 육신이 화장을 당했기 때문에 열기라면 외적인 느낌이든 내적인 발생이든 막연하게나마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내와 여인의 애무, 그 조마조마한 시간이 한동안 흘렀다. 마침내 그들의 행위가 그들의 옷가지를 한 겹 한 겹 벗기어나갔다. 이어 여인과 사내가 알몸으로 서로의 아픔을 물고 물린 채 돌풍처럼 격렬한 바람을 일으키더니, 열락의 극단에서 잠잠히 스러졌다.

이윽고 사내가 전등불을 껐다. 혼은 여인의 아랫배 위로 올라가 다시 점지되기 위한 점검을 시작했다. 순간 혼은 깜짝 놀라 여인의 뱃가죽을 꼬집어 뜯듯 아픔을 줄 뻔했다. 사내의 손이 여인의 배를 어루만지다 혼을 스쳐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때 여인은 간지러운 소름기를 토하듯 까르륵 웃었다. 웃음으로 보아 여인은 점지되려는 혼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인이 혼을 의식함으로써 점지의 관문인 겨드랑이의 세 땀샘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여인은 그녀의 모든 문을 닫고 사내의 품에서 평온한 잠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은 더 점검해볼 필요도 없이 정신적으로 완전한 임신 3개월이었다.

혼은 여인의 잠을 흐트러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혼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인간의 믿음, 그 믿음이 상상이거나 착각일지라도 승하면 절대적인 것과 다를 바 없이 빛과 음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독실한 신앙인 (그녀는 상상 임신의 태교를 성경과 찬송가에 의지했다)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하는 수없이 혼은 방을 빠져 나왔다. 밤하늘의 공간, 혼은 그 허공계의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점지의 숙주인 여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물주(造物主)를 만나야 해. 흔들의 내세를 주관하시는 조물주여 어디 계시나이까 ?

혼은 조물주를 만나기 위해 떠돌기 시작했다. 혼의 내세를 주관하는 조물주는 무소부재지만 혼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었다. 조물주는 혼이 애태워 찾아 떠돌면 어디선가 홀연히 소리 없이 소재를 밝혔다. 조물주의 소리를 듣고 혼이 찾아가면 그 실체는 예상 밖의 사물이었다. 그래서 혼은 조물주의 본래 모습을 여지껏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혼은 밤이 깊도록 지구의 공간을 떠돌았다. 도심의 전등 빛을 피해 민가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고궁을 찾아가 연못 위를 거닐기도 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혼이 찾아가는 곳은 인왕산이었다. 혼은 인왕산을 향해 고공으로 날아갔다.

인왕산 계곡 중심부에 이르렀을 때 그토록 찾아 떠돌았던 조물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리 오너라.

조물주는 계곡의 바위틈에 서 있는 노송으로 변신해 있었다. 혼은 예를 갖추어 읍한 자세로 황망히 여쭈었다.

전능이시여. 점지의 숙주를 다른 곳으로 정하여주옵소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느뇨. 숙주의 업이 도타운 줄을 몰랐느냐. 숙주 스스로가 업을 깨칠 날이 조만간 올 것이다.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리하는 동안 너의 업 또한 도타운 줄을 안 연후에 비로소 인과를 찾아가는 길을 보게 될 것이다.

이로써 혼은 업의 인과에 따른 시간 속에 무주(無主)고혼(孤魂)으로 남게 되었다. 무주고혼, 글 그대로 머물 수 없어 외로이 떠도는 혼은 숙주인 여인을 깨우쳐주기 위한 방편들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몸을 빌어 몸을 얻을 여인에게 미래의 상을 끌어다 보일 수 있으리요. 인간에게 시간을 앞당겨 과()를 보인다 함은 쉬 늙게 만드는 것이나 진배없는 법. 혼은 한숨으로 여인에게 기원할 뿐이었다.

, 여인이여. 제발 상상 임신으로부터 벗어나소서. 고만 거짓 착을 버리고 깨어나소서.

오히려 여인의 상상 임신에 대한 집착은 거대한 성곽을 이루어갈 뿐 허물어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혼은 뜨뜻미지근한 혼미 속에서 방황했다.

밤이면 혼은 지구의 공간을 종횡으로 질주하다가 새벽빛에 스러지며 섞고 외로운 인간처럼 울고 또 울었다.

무주고혼의 울음은 소리의 울음이 아니라 빛의 울음이었다. 환상기 어린 파란빛의 울음, 그것이 무주고혼의 울음이었다. 그러므로 파란빛의 엷고 짙음에 따라 무주고혼들은 서로의 설움에 겨운 울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울음의 파란빛은 새벽빛에 발리움으로 새벽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점지의 날만 기다리다 지친 혼은 금기사항을 하나 무너뜨릴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전생의 연고인(緣故人) 중 모친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혼은 전생에 기거했던 생가(生家)만은 차마 찾을 수가 없었다. 연고인을 많이 볼수록 그와 비례하여 혼의 순수 의지가 미혹에 싸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혼은 모친이 다니는 인왕사를 찾아갔다.

인왕산 중턱에 자리한 인왕사 명부전에는 혼의 위패와 여고 교복을 입은 사진이 아직 영정으로 놓여 있었다. 저 아리따운 여학생이 전생에 자기 몸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혼은 절로 눈물이 났다. 참으로 일찌기 발할 수 없던 파란 빛깔의 눈물이었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박힌 순백의 자위에 쌓인 검은 눈동자, 미간으로부터 흘러내리다 오똑 멈춘 코, 알맞게 도톰하나 관능 쪽으로 치우친 입술, 학생 유니폼의 생명인 횐 깃 위로 뽑은 목의 선, 횐 살결에 깜찍한 소녀는 금방이라도 입을 열 것 같았다.

혼은 잠시 혼으로서의 모든 것을 떠나 멍청한 상태였다. 한동안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어둠 속에서 명료했던 전생의 모습이 서서히 희미한 빛에 싸였다. 어느새 새벽녘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명부전을 빠져나가야 하는 아쉬움을 지닌 채 혼은 계곡의 정()한 바위 굴을 찾아 낮 동안 휴식을 취했다.

조물주가 창조한 대낮의 햇빛 속에서 활동을 하면 혼은 쉬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이날만은 피로를 잊은 채 혼은 인왕사 대웅전의 불공 예식을 지켜보아야 했다. 전생의 모친이 혼의 명복을 위해 불공을 드리러 왔던 것이다.

인왕사 대웅전엔 전등을 끄고 여섯 촉대의 촛불로 신비스런 조명을 이루어놓았다. 삼존불과 오백 나한을 모신 불단 좌우로 안쪽은 봉황대의 짧은 두 촉대, 바깥쪽은 긴 용대의 두 촉대가 놓였고, 꾸밈이 없이 소박한 연화대의 두 촉대가 명부전을 밝히고 있었다. 맛과 빛깔의 냄새가 분명히 존재하나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로 떠도는 공간, 신비스런 조명을 받은 불상들의 명암이 법담(法談)이라도 나누는 듯하여 보는 이마다 법열을 일으키게 하는 대웅전 분위기였다.

하이얀 옥양목에 엷은 치자물을 들인 한복차림의 40대 여인. 혼은 전생의 모친이 조금도 변함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

혼은 불렀으나 소리의 부름이 아니어서 모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친이 다기(茶器) 앞으로 사뿐이 다가가 정성을 다하여 천수를 갈고 합장하여 반배를 올리자 부전스님의 염불이 시작되었다.

정엉구업지 이는수리수리마아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아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아수리숫수리사바하. 오방내외 안에제신지 이는나무사만다못다남옴도로 로지 미사바하,,,,,,

목탁 소리는 염불에 따라 강하고 약하고 빠르고 느린 소절로 복합의 화음을 이루었다, 어느새 목탁 소리가 멈추고 염불만 흐르는가 싶더니 다시 염불은 목탁 소리와 어우러지며 매듭을 풀 듯 마디를 이어나갔다.

모친은 오체(五體)투지로 세 번 절하고 좌복 위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합장한 손끝으로 모친의 반쯤 감긴 시선이 미동도 없이 머물렀다. 이어 본존 불단에 마지(摩旨)가 오르고 축문의 기원으로 상단 불공 예식이 끝났다. 이어 부전 스님은 본존 불단의 마지 한 기()를 명부전으로 옮기고 혼의 천도를 위한 염불을 시작했다, 무상계가 끝나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이 이어졌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관자재보살행심 반야바라밀다시조견오온개공도일체 액사리자 색불이공공불이 색색즉시공공즉시 색수상행익 역부여 시사리자------

모친은 자신도 모르는 눈물을 홀리기 시작했다. 딸에 대한 애상의 심연으로-터 자극을 받은 순수한 눈물이었다. 부전스님의 왕생극락 축원이 끝나기까지 모친은 계속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보살님. 따님의 사십구재가 끝나고 벌써 삼칠일이 지났습니다. 부디 슬픔을 거두십시오. 중생의 인과란 본래 무상한 것,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금생의 연이 짧다 하여 그 슬픔에 집착하다 보면 마음이 상하는 법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몸이 상하고, 몸이 상하면 뜻이 상하고, 뜻이 상하면 종당에는 멸이 오고야 만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생각하시고 평안을 얻으십시오.

모친은 눈물을 멈췄다. 그러나 아직 물기 잔잔히 번진 동공만은 명부전에 안치된 검은 리본을 드리운 딸의 사진에 박혀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스님, 이대로 좀더 있고 싶어요.

그럼 천천히 나오시지요.

혼은 모친의 자애심과는 전혀 무관한 상태에서 모든 예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비로소 혼은 혼의 세계를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신을 떠 혼은 육신과 더불어 지은 모든 행위와 사고로부터 감정의 자극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전생의 삶이 명료하게 기억되지만 그 삶에 한 향수나 애착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가 않았다. 그저 무덤할 뿐이었다.

이윽고 모친이 법당을 나섰다. 딸에 대한 연민이 조금씩 그녀 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모친의 얼굴은 서서히 밝아졌다, 마침내 모친은 하산하여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오르자 모친은 그때까지의 딸에 한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 홀가분한 상태가 되었다. 어느새 모친은 정의 질서 속에서 한치도 빈틈이 없는 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혼은 모친을 태운 택시가 4차선의 대로로 접어드는 것을 보고 낮 동안 머물던 바위 굴로 돌아왔다. 혼은 전생의 고제 현상을 기억함으로써 중압감의 피로를 느꼈다. 그러나 조용히 혼의 무감(無感)한 상태를 관()함으로써 혼의 본래 면목을 서서히 회복해갔다.

 

밤이 왔다. 빛이 물러선 어둠의 공간에서 혼은 무한대의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껏 떠돌 수 있는 밤은 어슬어슬 추운 기분을 일게 하고 마침내는 그 추운 기분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게 했다. 혼은 그 알음아리를 떨쳐버리기 라도 하듯 고공으로 도심을 가로질러 남산의 어둠 속으로 하강했다.

계곡의 단애, 바위의 굴곡, 무성한 초목의 가지 사이를 지나 능선에 이르러 다시 고공을 날아 인왕산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도 혼은 정체할 수 없는 박진감에 싸여 인왕의 어둠을 샅샅이 더듬어나갔다. 어둠을 호흡하는 자연의 숨결을 타고 혼은 인왕산 중턱 천양암 약수터에 이르렀다. 순간 혼은 무주고혼의 울음을 발견하고 긴장했다. 파란빛의 울음을 발하는 곳은 약수터 왼쪽에 서 있는 노송 밑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는 거리에 따라 울음은 더욱 파란빛을 띠었다. 혼은 그 울음 빛의 광도(光度)로 보아 몹시 처량하고 안타까운 울음임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알아차릴 수 있는 곳까지 다가선 혼이 물었다.

웬걸 그리 슬피 울어?

울고 있던 혼이 울음의 빛깔을 거두며 말했다.

너도 무주고혼이구나. 내가 울고 있음을 아는 걸 보니.

그래 나도 무주고혼이야. 한데 왜 그토록 섞게 울었어?

춥고 외로와서야------네 모습은 투명한데 마치 달걀처럼 생겼구나.

너도 울음을 그치니까 마찬가지야.

다행인데,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모습도 모를 뻔했잖아.

그래 참 다행이야. 나도 혼자 있을 땐 으실으실 추운 기분을 느꼈는데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푸근한 기분이 들어 좋은데.

이제 나도 춥고 외롭던 기분이 가셨어. 한데 낮 동안은 어이서 뭘 했어?

그건 왜 묻지?

낮에 인왕사 쪽으로 날아가는 혼을 보았어. 혹시 그게 네가 아니었어?

맞았어. 전생의 엄마가 나를 위해 불공을 드리는 것을 지켜보았어. 그때 나를 따라오지. 그랬더라면 전생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럴까 싶었는데 그냥 참았어. 너는 참 좋겠구나. 너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를 볼 수 있어서.

왜 너의 엄마는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니?

, 너는 내 아픈 곳을 건드리는구나.

미안해, 처음 만나서 너무 많은 것을 알려 했다면 용서해.

아니야. 좋아, 그럼 내 전생 얘기를 할 테니까 너두 내게 너의 전생 얘기를 해야 해, 약속하겠어?

그럴께.

쪼륵 쪼르륵, 암석 벽이 자신의 즙을 짜내듯 약수를 흘려보냈다. 울음 울던 혼은 물받이의 둥근 홈통에 차고 넘치는 약수의 흐름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아무 감정도 없이 전혀 뜻있는 얘기가 아닌 듯, 그래서 숨을 내쉬는 것이나 진배없이 냄새, , 빛깔도 없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시작했다.

살아가기 위해 사내의 몸에 자신의 몸을 붙들어매려는 여자, 하룻밤의 시간을 동강내어 보다 많은 숫자의 사내를 몸 속에 잠시 담았다가 꺼내는 여자, 그리하여 정신보다 행위만이 선행하는 율동의 조작을 기계보다 정확히 제어하는 여자, 그러다가도 착각의 끈에 끌려 조금 열 오르려다 아차 싶어 열 내리는 여자, 몸을 파는 여자, 몸을 주는 여자, 웃음을 파는 여자, 혈기를 파는 여자.

그러나 마음까지는 팔 수 없는 여자, 소위 쉽게 창녀라고 부르는 여자 말이야. 내 어머니는 창녀였어. 어머니는 재수에 옴이 붙은 여자였어. 자궁종양과 함께 나를 밴 거야. 몸을 파는 여자들의 세계에서 임신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어머니는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어. 소파수술을 받기 위해서였지. 어머니는 팔짝 뛰고 나자빠지도록 놀랐어. 의사 말이 소파수술과 함께 초기 자궁종양도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자궁을 들어내게 되므로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거야.

어머니는 앞뒤 잴 생가도 없이 아이를 낳겠다고 했대. 그러자 의사가 어머니 자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는 투로 어머니의 입장을 의학적인 측면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더래. 정상적인 아이의 출산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거였지. 분만일 전에 종양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아야 될 경우 아이를 죽일 수밖에 없는-다 산모의 생명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거였어. 그리고 덧붙이기를 정상분만일지라도 아이는 제왕절개로 출산시킨 다음 종양을 수술해야 하는데 경과가 좋을 경우 산모와 아이가 함께 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산모와 아이를 함께 잃을 확률이 반반이라는 거였어. 완전히 어머니는 마음이 뒤집혔겠지. 그렇더라도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을 했대. 여자의 집념 앞에서는 신의 질서도 우회할 수 있나봐. 마침내 열 달을 채운 나는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고 어머니는 종양수술을 받았지.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못하여 어머니는 나를 낳은 지 1주일만에 죽고 말았어, 누가 갓난아기를 천사에 비유했지? 누가 순수 의지의 지향이 최고급의 이성이라 말했지? 모친을 죽이고 생을 얻은 살모자가 있는데. 어머니의 친구들은 악덕이면서도 모질지 못했어. 그들은 비록 몸을 팔아 삶을 살면서도 친구의 죽음과 친구 아들의 생을 목격하고 하나같이 나를 버려둘 수 없다고 뜻을 모았어. 그래서 나는 사내 속에 내재하는 허공을 품어주는 창녀들 사이에서 세 살까지 자라다가 고아원으로 보내졌지. 고아원에서 나는 국민학교 5학년까지 별탈 없이 자랄 수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밤 자다가 갈증으로 깬 나는 수돗가 물받이 통의 물을 떠 마시려다 첫 간질의 발작으로 그만 물통에 머리를 박고 비명횡사한 것이야.

이야기가 끝나자. 듣고 있던 혼은 갑자기 육신 속에서 느낄 수 있던 감정으로 충일해졌다. 이토록 비참한 어린 혼을 만나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혼은 믿음의 불확실성과 더불어 막연하게나마 어떤 의미가 내재하고 있는 만남 같아 그 알 수 없는 예감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이 만남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모르나 무작정 한스러운 것은 감정이 앞서는 까닭이겠는데, 그로 인하여 어린 사내 혼의 전생이 자꾸자꾸 떠올랐다

전생이 몹시도 불행했구나. 너에 비교하면 내 전생은 참으로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어. 과장급 공무원인 아버지가 가장인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삶을 누렸으니까. 그런데 내게 불행이 성큼 다가와 입김을 분 것을 중학교 3학년 때였어. 과외공부에 지친 나는 시름시름 뚜렷한 병증도 없이 몸만 야위기 시작하더니, 멘스를 거르기 시작하는 거였어. 그러다가 멘스를 하게 되면 거르던 멘스까지 곱으로 하혈을 했는데 생약, 한방 등 백약이 무효야. 그러더니 결국 내 몸은 피가 모자라 급기야는 수혈을 받아야 했지. 수혈도 체내에서 피를 생성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필요한 건데 그렇지 못한 내게는 오히려 부작용이 생겼겠지. 뒤늦게 병명이 밝혀졌는데 백혈병이었어. 마침내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한 한을 안고 자리에 누운 지 반 년만에 생을 버리고 말았어.

두 혼은 전생의 감정으로 돌아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전생에 비추어본다면 누나고 동생뻘이지만 내세에 있어서는 누가 먼저 점지의 혜택을 받을지 모르겠구먼. 하지만 누나로 대하고 싶어.

어린 사내 혼은 육신 속에서 정감을 느끼듯 말했다. 그러나 혼의 본질적인 면에서는 그러한 정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혼은 육신을 떠남으로써 전생에 대한 기억의 한계가 분명했다. , 인간계의 생명력 있는 기억이 아니라 생명력을 잃은 잠재 속의 기억뿐이었다. 따라서 전생에 대한 잠재 속의 기억은 미혹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속될 수 없는 잠재의 앙금으로서의 기억은 혼으로 하여금 잠시 착각을 일으키게 하다가도 무미건조하게 파삭한 느낌을 일깨워 본혼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혼의 세계에서도 본질을 선행하는 것이 존재했다. 두 혼은 육신을 떠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정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문제는 왜 우리가 무주고혼으로 떠돌게 되었느냐야. 나는 점지의 명을 받고 숙주인 여인을 찾아갔더니 상상 임신이었어. 그래서 그 상상 임신이 풀려 정상 임신이 되는 날까지 무주고혼으로 떠돌게 된 것이야.

나두 누나처럼 그렇기나 했으면 좋겠어. 나는 점지의 명을 받고 숙주인 여인을 찾아갔더디 내세에 아버지 될 사내가 정관 수술을 받아버렸지 뭐야. 그러니 조물주께서 명한 대로 점지되려면 숙주의 여인이 간통을 하기 전에는 불가능이야. 인간의 문명이 조물주의 질서를 차질나게 만드니 조물주도 혼들을 제도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되겠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혼들만 떠돌이 신세가 되잖아.

그렇다고 어쩌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인간들이 저지르는 일은 하두 해괴한 일들이 많으니 그것까지도 조물주께서는 계산에 넣은지도 몰라. 혹시 아마 숙주인 그녀가 정부라도 둘지.

글쎄, 그러니 기다려보겠어. 누나도 점지될 때까지는 함께 있어줘. 부탁야.

그럴 테니 염려 마.

어느덧 새벽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인왕사 범종이 서른세 번 울고 나서 대기의 어둠은 기다렸다는 듯 서서히 물러갔다.

낮 동안 빛이 머물던 공간으로 밤의 어둠이 들어서자 다시 두 혼은 자유로와 졌다. 어둠 속에서 혼들은 엷은 우유 빛을 발했다. 그러므로 혼들은 칠흑의 어 속에서 서로를 더 잘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윽고 사내 혼이 우유빛 광도를 높이더니 장난스럽게,

누나!

하고 여자 혼을 불렀다.

왜 그러니?

오늘밤 우리 죽은 이의 시신을 찾아가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을래. 누나는 전생에 여자였으니까 여자 시신을 골라야 해. 나는 남자였으니까 남자 시신을 고를 테야,

그것 참 재미있는 모험이구나. 다행히 전생의 우리 또래 시신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걱정되지 않니? 점지의 명을 받은 혼으로서 이런 장난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 혹시 조물주께서 벌을 내리지나 않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무슨 벌을 내릴지 그걸 알기 위해서도 한번쯤 해봄직 하잖아.

그렇기도 하구나.

전생의 우리 또래 시신이 없으면 적당한 시신을 택하기로 해. 그럼 지금 나는 거야. 아 잠깐, 인왕사 새벽종을 치기 전까지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해 그럼 나는 대학 병원부터 가볼 테야.

사내 혼은 대학 병원 영안실을 찾았으나 마땅한 시신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같이 병들어 고통의 덩어리로 굳어 있는 시신을 대할 때마다 사내 혼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뿐이었다. 사내 혼은 할 수없이 종교 재단의 종합 병원으로 방향을 바꾸어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 도심의 가장 번화가 모퉁이에 자리잡은 종교 재단의 종합 병원. 그 병원 영안실은 지하층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늙고 병든 시신과 교통 사고로 피 홀린 시신들뿐이었다. 다시 사내 혼은 방향을 바꾸어 민가의 시신을 찾아 나설 양으로 영안실을 빠져 나왔다. 순간 고층 병원 빌딩 중간쯤, 창문을 빠져 나온 혼 하나가 밤하늘의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저 혼이 빠져나간 시신은 어떨까 깊어 사내 혼은 잽싸게 그곳으로 날아갔다.. 국민학교 2학년 정도의 사내아이가 뇌막염을 앓다가 갓 죽은 시신이었다. 사내 혼은 이만한 시신도 드물리라는 생각에서 얼른 시신 속으로 들어갔다.

담박 사내 혼은 이 아이가 사랑의 결핍으로 죽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뇌막 안쪽 대뇌에서 사랑의 불기운이 없이 시들어버린 사랑에 대한 욕망의 의식이 메마른 껍질로 남아 덜그럭거림을 느꼈던 것이다. 의사는 아이의 죽음을 뇌막염으로 진단하고 사인을 그렇게 적어놓았다. 물론 의학의 상식으로는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의학의 폐단은 바로 그 점이었다. 생활에 쫓긴 어버이의 삶이 아이에게 편협한 사랑을 낳고. 그 편협한 사랑마저 너무도 짧은 순간이어서 아이의 정기에 사랑의 갈증을 배가시켜 소생할 기운을 잃게 함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었다.

사내 혼은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난 듯 시신을 일으켜 인간들의 사고 작용을 교란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혼에게 있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고 참았다. 아이의 죽음이 부른 암흑 속에서 부모의 비애는 촛불마냥 활활 타올랐다.

그 비애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 동안뿐임을 사내 혼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비애가 가장 고급한 비애였기 때문에 사내 혼은 부모의 사랑에 대한 전류를 느꼈다. 그 전류에 대한 미련을 안은 채 사내 혼은 아이의 시신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어느새 밤은 새벽의 서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내 혼은 그 밤의 자락을 딸아 약속 장소인 천양암 약수터로 향했다. 허공의 고도를 날으며 사내 혼은 처음으로 저 아래 아스라이 빛나고 있는 전등 빛이 어쩌면 밝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여자 혼은 인왕산 입구의 옥인동 민가를 샅샅이 뒤진 다음 누상동, 누하동을 거쳐 효자동에 이르러서야 한 시신을 만날 수 있었다.

한옥 문간방은 세 사람 눕기가 비좁을 정도의 공간이었다, 등꽃 무늬의 카시미론 이불 위에 새우등으로 움츠린 여자는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시신임이 분명했다.

이불자락으로 반쯤 덮인 재떨이에 대마초 재와 꽁초가 그득 차 일부는 넘쳐 있었으며, 그 주위로 산발스럽게 양주병 세 개가 빈 채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었다. 대마초 중독에다 다량의 알콜로 죽은, 한때는 고급 콜걸로서 휘황한 안광을 지니다가 중독의 원색 동굴로 들어서면서부터 전락한 20대의 여자 시신이었다,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 없이 죽어 있는 시신은 조용한 정숙 그대로였다. 여자 혼은 시신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여자의 육신을 일으켜 세웠다. 여자 혼은 몽롱한 안개 속에서 오색 빛의 윤무 때문에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꼈다. 이어 대단한 거부 반응으로 심장의 압박을 받으며 여자 혼은 모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다지 싫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잠시 오색 안개의 고통을 참아내는 동안 서서히 시신에 남은 대마초와 알콜기가 함초롬히 여자 혼을 적셔왔다. 가슴의 압박이 팽만감으로 이어지며 전신이 허공에 등등 뜨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모든 근육이 흐물흐물 웃음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근육들은 황폐한 바람을 일으키며 옥죄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고통의 나락으로 깊이 모르게 떨어졌던 육신이 반복되는 감각으로 환각을 일으켜보고 있었다. 그 환각은 뿌연 안개 속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영롱한 오색 빛과 매슥매슥한 향기로 이루어진 진공의 상태였다. 여자 혼은 이러다가 완전히 빈 육신에 얽매이지나 않을까 싶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 순간 여자 혼은 의지 이전의 선행으로 시신으로부터 뛰쳐나오고 말았다. 본혼으로 돌아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시 행해볼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

 

어느새 인왕사의 범종이 새벽 첫 타종을 울려 퍼뜨렸다. 여자 혼은 혼미한 상태를 털고 범종소리의 힘을 빌어 천양암 약수터를 향해 날기 시작했다.

혼들은 서로 의도적으로 행한 행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천안(天眼)을 지니고 있었다. 두 혼은 기진한 상태에서 서로를 응시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는 어떤 시신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생의 삶 속의 회억이 혼에게 있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서로의 기진한 모습에서 읽어냈다.

혼들에게 있어 가장 명료한 빛과도 같은 소리는 승가(僧家)의 범종 소리였다. 그때 인왕사의 범종이 서른세 번 마지막 울었다. 두 혼은 그때까지의 미혹을 종소리의 힘을 빌어 떨쳐버렸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지내다보면 인간계에 어지러움만 피우겠어.

여자 혼지 불쑥 말했다.

누나 말이 맞아. 그럼 어쩐다지?

사내 혼은 동의하면서도 시무룩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우리 서로 헤어지기로 해. 그러나 점지되는 날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지켜보는 것을 잊지 마, 어쩌면 나는 천상으로 오르는 길이 열릴 것 같아. 그때쯤이면 내 점지의 숙주인 여인이 상상 임신에서 깨어나게 될 거야. 그럼 너의 숙주보다 내 숙주의 몸을 빌어 점지의 혜택을 입는 것이 빠르겠지.

누나, 그렇게만 된다면 내게도 환생의 길이 발리 열리겠는걸.

여자 혼과 사내 혼은 헤어졌다. 서로를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갔다. 그러나 천상으로 비상하는 날은, 또 점지의 날은 언제런가.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간계는 시간이 변화시키는 대로 빛깔, 냄새, 모습이 달라져 갈 것이다.

여자 혼은 인왕사 범종지기 사미승의 꿈자리를 어지럽히며 조금씩 조금씩 친해지고 있었다. 처음 여자 혼이 사미승의 장삼 자락에 숨어 새벽 타종 소리를 들었을 때는 두려움의 극단에서 공허를 느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타종 소리를 듣는 동안 천상의 음향과 이어지는 인간계의 음향이 바로 범종 소리임을 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서서히 눈이 열리고 마음이 감응하더니 드디어는 뜻의 문이 열렸다. 그리하여 여자 혼은 천상의 음향과 이어지는 범종 소리를 타고 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십일 일째 되던 새벽, 여자 혼은 사미승의 장삼 자락으로부터 사미승의 정수리로 옮아가 비상의 순간을 기다렸다. 사미승은 범종의 타종을 위한 경건한 자세로 반쯤 감았던 눈을 뜨고 종매의 밧줄을 거머쥐었다. 이어 범종은 둔중한 울음을 울었다.

덩 은---------

여자 혼은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로 꿈틀거렸다. 비로소 여자 혼은 종소리에 의한 희열을 붕 뜨듯이 느끼며 열락 속에서 이제 날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서른세 번의 마지막 범종 소리와 더불어 여자 혼은 사미승의 정수리로부터 뛰어올라 비상의 나래를 폈다. 천상으로 천상으로 비상하는 열락 속에서 여자 혼은 더없이 허허로운 환희의 세계가 혼의 세계임을 느끼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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