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文化史) 대계(大系)-허윤석
수심도 설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웃음과 향기로만 한 시절 꽃이 피던, 그러한 얼굴과 자리를 같이하던 곳은 한 떨기 구름에도 소나기를 곧잘 지우는 산 속이었다.
산 속은 호담해서 좋았다. 구름을 본 산새들이 마음이 달떠 울고 풀꽃도 무더기로 피었다. 잎만 퍼지던 목련마저 무수한 꽃으로 치레하고 있었다.
산과, 구름과, 꽃에 어리운 마음이래서 설레기만 하잘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산의 호흡에 사랑이 살져 보는 것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바위엔 어느 때부터 시작된 생장인지 그 연륜조차 모르는 돌 이끼를 깔고 즐거운 얼굴들 이 마주앉아 있노라면 때로는 산비가 수어수어 숲을 밟으며 골을 묻었다,
비에 쫓긴 새소리가 소나기를 뒤에 달고 비보다 앞을 서 산 속으로 쪽쪽 몰려왔다. 엄연하던 자연이 전나무와 바위를 안은 산이 새소리에, 빗소리에 철철 울렸다. 구름이나 머리에 감고 앉았던 듬성한 산이언만 어느덧 풀어진 마음이 작은 새와 마주 이야기를 주고받으려 산은 저대로 수다를 떨었다. 굴뚝새가 울어도 산은 탐내 울었다. 멧새가 울어도 산은 울었다. 노루가 우는 골 안은 후들후들 목을 떨어 울기까지 했다.
산비는 돌 이끼를 축이며 깊숙이 왔다. 현배는 비를 맞으며 웃었다. 득심이도 현배가 하자는 대로 비를 맞으며 웃을 수밖에 얼었다, 빗물에 등골이 젖어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산에 앉은 바위어니, 바위요 돌 이끼가 이렇게 산비에 젖거니만 했다.
비가 가는 대로 산새는 골을 울리며 멀리로 을아 갔다. 새소리에 귀담하던 득심이가 현배를 바라보며 웃는 것이었다.
"적은 새소리에 산이 우나 보지요? "
"고랬다구 부자연하잘 것두 없지."
"그래두요.천연스럽진 못한가 봐요."
"그럼 수다스럽다는거지? "
"수다스럽잖구요. 범이 운담 몰라두 커단 산이 새한테 밑이 빠져 울구, 안 그래요?"
득심이는 현배를 비꼬아 보았다. 현배도 넌지시 웃었다.
"새가 울었으니까 산도 울어야 옳잖아?"
"아스세요. 그런 거룬 이론이 서지 않는걸요. 암만 새가 먼저 울었담 크단 체신머리에 저렇게 울어서 돼요? 비겁한 거지 뭐야요."
바위가 하듯이 말이 없던 득심이가 어느새 현배의 마음에다 돌을 던져 보는 것이었다. 산비가 가져오는 기능으로 해서 급각도로 쏟아지는 득심이의 변조에 현배는 도리어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다구 사낼 넘볼 텐가?"
"넘보았담 어쩐 테야요. 그만 속을 모를라구요. 미리 뷔여 앉었던걸 뭐."
여전히 비는 왔다. 눈에서는 빗물이 목이 져 흘렀다. 득심이는 비에 젖은 치마 앞자락을 휘근희 감아 짰다.
"그럼 이게 다 산울림이야요. 남 끌어다 앉허구 이렇게 빌 맞히구두 산울림인 체만 해 보세요."
"이까짓 소낙비가 다 놀라운가?"
현배는 마음이 지피우고 나자 얼굴부터 확확 달아왔다. 득심이는 현배의 기색을 떠보잘 것 없이 주먹다짐으로 대들었다.
"진작 할 말이 있담 그만 걸 툭 털어 뷜 기벽두 없나요. 나 같은 계집애한테 눈칠 채두룩 끙끙 앓기나 허구. 남 비나 맞히구 다니구 그게 체신 없는 사내지 뭐야요."
득심이만 열에 뜬 게 아니라, 현배도 어지간히 씨걸대었다. 이러면서도 현배는 창을 앞으로 받으려 하지 않고 넌지시 뒤통수로 돌려 놓는 것이었다.
"산은 만세부동이야. 어쩌다 구름이 흘러간 거겠지. 구름을 보고 흔히 새가 놀라는 거구."
현배는 코에 맺힌 빗물을 훅훅 불었다. 빗물이기보다는 차라리 뜨거운 땀이었다. 이런 것이 땀인 줄을 안다면 득심이가 좀더 넘볼 것이 겁이 났을 뿐이었다.
득심이는 일부러 현배 얼굴에다 빗물을 뿌리며 몸을 털었다.
"흥 거대한 산인 체만 해 보세요. 산이래두 골골이 우러나는걸요. 숲이 비에 젖음 사질 털구, 저 할짓 다 하면서두 그러네요.“
"곯려두 난 겁 안 난다니까. 단수암산 이전 사람이야. 돌의 화신이 이렇게 앉었구."
"그렇담 비를 맞구 다니는 것두 무슨 수도인가요."
가드득하고 웃음을 퍼뜨렸다. 자지러지는 웃음소리에 활엽수는 비를 떨며 우줄우줄 마주 섰다. 득심이 머리에서도 땟국을 씻은 빗물이 목을 감고 흘러내렸다. 청춘의 배설물이랄까, 간간이 스쳐 가는 바람결에 싫지 않은 체취가 현배의 코허리를 묻어 주었다. 이럴 무렵이면 현배도 득심이도 비를 맞고 있는 바위로만은 살고 싶지가 않았다. 한 소나기의 빗물에 흐뭇해진 아름드리 나무였다,
비는 멎었다. 득심이는 얼굴을 씻으며 자리를 떴다. 현배도 낄낄대는 득심이를 따라 산비탈을 끼고 돌았다. 득심의 치맛자락이 물을 줄줄 그으며 앞을 서 다녔다. 그렇게도 풍성하던 옷 매무시가 비에 젖어 어깨와 허리가 서로 균형을 잃고 실룩댔다, 포물선이 허물어진 붉은 자세가 탐나기보다는 차라리 수줍기만 했다. 미인이란 아마 얼굴보다 옷에 있었던가 싶었다. 한여름동안 이렇게 난 것이 득심의 얼굴이 아니요 옷이었다면, 한소나기의 비를 맞게 된 것도 현배에게 있어서는 그리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구름도 스쳐 가고 햇빛은 눈이 부시게 쏟아졌다. 숲은 잎잎이 기름져 흘렀다. 바람이 올 적마다 전나무는 너무도 좋아서 목을 뽑고 휘파람을 불었다.
현배와 득심이는 어깨를 비비며 침침한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옷이나 말릴까?"
산 그늘로 해서 현배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대담한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세요, 어서 벗으세요. 내 말려 드릴께요."
득심이는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옷을 벗으라고 재촉했다.
"눈감고 돌아섬 ! "
득심이는 젖은 머리를 늘이워 물방울을 지우며 살진 허리께만 꼬았다.
"이만함 됐죠? "
"한 걸음만 더!"
"이만큼요?"
"좀더 저만큼만.“
"자요, 아무 것도 뵈잖는걸요. "
현배가 하자는 대로 나뭇가지에
멀지 않은 산발에서 꿩이 울었다. 득심이도 킥킥 웃어댔다.
소나기로 하여 산속은 이렇게 흉허물 없는 곳이 됐다.
옷을 벗은 현배는 숲을 헤얹으며 둠벙이를 찾았다. 샘물은 고요했다, 천년도 더-침묵을 지닌 듯 마음이 조심스러웠다. 발을 넣자 수면은 둘레둘레 여울져 웃었다. 연잎만큼 트인 하늘로 소리개가 흘러갈 뿐, 산은 잠잠해서 좋았다. 층층으로 쌓아 올린 돌 벼랑이 더풀썩 앞으로 와 안길 것만 같고, 이런 것 외에는 아무런 간섭이 없는 산이었다. 옷을 벗어도 허물하지 않는 자유로 해서 마음이 얼마든지 호담할 수도 있었다.
현배는 한참 동안이나 모든 사념이 메마른 현실에서 벗어나 저만큼 기름져 흐르는 동안, 산도 바위도 저르렁저르렁 울어서야 산꿩이 우는 게 아니라 득심이가 부르는 노래임을 알았고, 노랫조가 무르익은 육자배기이매 현배는 적이 놀랐다. 그림이나 그리고 다니던 득심이언만, 어느새 그런 준비까지 있었던가 싶었다.
노랫조가 점점 난조로 흘렀다. 득심의 무르익은 낭만으로 하여 산은 와들와들 떨었다. 물길보다도 수물대는 숲을 타고 명랑한 멜로디는 멀리로 퍼져 나갔다
바람과 노래가 그치자 산은 고요해졌다, 물방울 소리까지가 크낙히 들려 오고, 산은 다시 잠잠해서였다
현배가 헤어들던 풀밭으로 무엇이 껍신대며 다가왔다. 현배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보아도 산짐승이었다, 만일 늑대라면 이런 짐승을 무엇으로 처치해 낼까가 겁이 났다. 득심일 불러 볼까! 득심이가 늑대를 쫓아 줄 힘이 있을까 ! 피를 흘리면서까지 그럴 만한 애정을 가졌을까! 이렇게 당황해할 즈음에 현배의 안계에는 늑대보다도 좀더 처치에 곤란한 물체가 나 났다.
생각 밖의 득심이었다. 득심이도 그저만인 득심이가 아니었다. 활활 벗어 젖힌 득심이었다. 그렇게도 살이 쪘던가 싶게 풍만한 피부가 현배를 보고 엉거주춤히 섰다가 흉허물없이 물로 뛰쳐드는 것이었다
"아! 저런!"
현배는 이렇게밖에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현배가 당황해할 때도 득심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이 젖가슴을 들먹대며 물을 감고 있었다. 물은 기름진 피부를 미끄러져서는 다리 샅으로 줄줄 흘렀다.
고요하던 수면은 다시 둥근 파문을 지으며 득심이와 현배를 한꺼번에 휘어안아 주었다. 득심이는 산악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엉덩짝을 현배 앞으로 메어박으며 껍신대고 있었다. 팔을 씻고, 가슴을 씻고, 배와 허리를 씻다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서서 젖가슴을 비비정대었다.
현배는 이성을 탐내는 미적 감상을 더듬어 볼 여유도 없이 득심의 표정만 엿보았다.
득심이는 웃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도리어 울 듯한 얼굴이, 현배의 머리에 쏟아질 한 소나기 산비로만 보였다.
이런 구름장에서도 비는 곧잘 쏟아졌다.
"그런 걸 왜 남 망신만 시켜 놔요."
득심이는 씨걸대며 현배 앞으로 다가섰다.
"누가 있기나 한가? "
이런 대답을 하기도 전인데, 득심이는 현배 얼굴에다 물을 퍼 끼얹었다. 현배도 얼결에 득심의 얼굴로 마주 물을 헤얹었다, 득심이는 물을 훅훅 불며 다가서기만 했다. 그리 넓지도 못한 옹달샘에는 한참이나 물벼락이 졌다. 현배는 물을 먹다 못해 득심의 손을 붙들려고 했으나 미끄러운 촉감을 가져왔을 뿐, 득심이는 용히도 붙들리지 않았다.
"옷을 주나 봐요. "
득심이는 언덕으로 뛰어오르자 다시 풀밭을 헤얹으며 도망을 쳤다. 득심이가 나간 뒤에도 물은 철철 물결져 놀았다.
현배는 어시간해서야 눌리었던 압력에서 몸을 풀었다. 흥분이 꺼지자 사지가 풀리고 맥이 없었다.
나와 보니, 득심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득심이만 없는 게 아니라 옷까지 없어졌다. 풀밭을 더듬어 보아야 등산화, 단장 이런 것 외에는 윗걸기 한 쪽 남기지 않았다.
산장 앞 개울에는 핏빛 같은 붉은 물이 흘렀다. 득심이는 문득 발을 멈춰섰다. 무침허 산 그늘을 벗어나게 된 것이 차라리 용감했다고 생각은 했으나, 산에서 빚어진 마음이 보람없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일념에 두었던 산의 품, 산의 호흡조차 무심해졌고 붉은 물로만은 산속이 이리도 서럽잘 것이 아니언만 산비를 맞으며 괴어 오르던 더운 피가 물거품보다도 아쉽게 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위협조로 들려 주는 어머니의 해룡담(海龍談 ‘火印設’)-때문이었다. 지금의 득심에게는 눈이 부시도록 뉘우쳐 왔고 어머니가 옳다고 생각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배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심술을 피우던 어머니를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여지없이 당하고 난 실망에 피는 다시 가락가락 울었다. 그래도 눈물에 낭자해진 마음을 쉽사리 가시기가 어려워서 현배의 옷을 안고 어깨를 흔들어 보기는 했으나 살 냄새가 코를 묻어 주던 그때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땀 냄새를 탐내기까지 하던 코허리로는 시큰하고 눈물이 재우쳐 왔다. 핏방울마다 웃음 짓던 마음이언만 이 일이 다시금 생각키울 때면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렇다고 눈물만 적시고 있을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시금 되씹어 보는 것이 가슴 아프긴 했으나 해룡담에 나오는 매란의 모습을 더듬어 보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야기로나 엮을 수 있는 흘러간 세월이지만 제법 한시절이던 일본군이 애드벌룬 한 개로 대륙을 왜 점령했던 것이었고, 가로수마저 허리를 꺾어 놓은 상해 거리 거리에는 겁먹은 잿빛 얼굴들이 대륙의 기풍을 그 대로 흘려 놓았던 것이었다. 득심이가 오룡배 온천장에서 매란이를 웃고 만나던 때도 그때였다.
매란이는 끓던 퍼가 스쳐 간 구김진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검고 큼직한 눈망울 하며 가늘한 목을 가진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다만 의문이었던 것은 푸른 눈섭 아래 언제든 눈물을 지우고 있었고, 흔히 대화에서 엿볼 수 있는 지성으로만도 이런 온천장에나 찾아다닐 서비스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국의 여성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의사가 통하게 되자 매란이는 득심의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이었다. 서슴지 않고 서울이라고 했을 때 매란이는 머리를 흔들어 부인하는 것이었다.
"기무라상(득심이)의 고향은 동경일 게요. 알아맞혔지요. "
이러고 천연스럽게 웃었다. 득심이는 쩔쩔매던 끝에 금강산 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나중 '아리랑'까지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꺼울리방즈 꺼울리방즈“
하고 웃고 떠들었으나 그실 득심이를 무시하자는 게 아니라 득심의 손길을 흔들면서 무용가 최승희를 아느냐고 묻고 최승희가 입고 다니는 옷이 조선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나. 옷도, 춤도 조선 것이라고 했을 때 최승희의 춤이 조선의 스타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며 득심이가 조선옷을 입지 않은 것이 좀 더 유감이라고 수선을 떨었다. 득심이는 아직 조선옷을 입어 보지 못했던 것이며 매란이처럼 옷이나 언어의 자유를 갖지 못한 불행을 말했을 때 매란이는 눈물까지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언제나 눈물을 쥐어 짜던 매란이 가 어스날 긴장한 얼굴로 득심이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매란이가 하자는 대로 옷을 주워 입고 따라나섰다. 가자는 대로 가기는 갔으나 가다 보니 가는 곳이 그리 착실한 곳이 아니었다. 언제나 갈 수 있는 영화관 앞에서 초대권 한 장을 던져 주고는 휘적휘적 앞을 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화는 아편전쟁(阿片戰爭)이라는 선전영화였다, 애드벌룬 한 개로 대륙의 간담을 허물듯이 누구의 간담이나 헐어 주자는 이런 영화임에 득심이는 너무나 기대에서 벗어났던 것이었다. 그러나 매란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 뒤이어 몸을 흔들어댔다. 나중에는 득심의 가슴에다 머리를 처박고 울기까지 했다.
양차를 타고 돌아올 때도 매란이는 칙칙 콧물을 쥐어 뿌리며 울었다.
집에 닿아서야 땀에 젖은 득심의 얼굴을 치어다보며,
"기무라상, 나 때문에 욕봤지요? "
하고 웃었다, 그리고 매란이가 왜 울었는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매란의 구김진 얼굴만 빠안히 바라보고 있었다. 매란이도 득심이를 마주 바라보다가,
"득심이도 꺼울리방즈라면 짱골로의 설움을 응당 알아 줘야 할 거야."
이러고 장담이었다. 그리고 아편전쟁이라는 영화가 하필 일본인의 손에서 지어질 것이 아니라, 적어도 장개석의 손에서 벌써 탄생했어야 운다고 탄식이었다. 매란의 소견에도 빠안히 엿볼 수 있는 어느 약점으로 해서 문화운동을 일으키진 못하고 기껏 기를 써 본다는 게 아편물에 누러진 골상들을 붙들어가 놓고 화인(火印)을 찍기 시작했다고 원망이었다.
이러자 급조로 오는 설움에 다시 몸을 떨면서 득심이를 왈칵 쓸어안고 뺨을 비비는 것이었다.
"미스 코리안 ! 매란의 설움을 알자면 내 팔을 걷어 봐요. 화인 맞은 팔을 어서 좀 걷어 봐요."
득심의 손이 가기도 전에 옷소매를 걷어 올리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그렇게도 어여쁘리라고 생각했던 매란의 팔을 보았을 때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쳐졌다. 부드러운 피부 위에는 두 군데씩이나 붉은 허물이 져 있었다. 매란의 말대로 바다햇자를 넣은 둥근 화인이었다. 득심이도 하는 수 없이 허물진 매란의 팔을 만지고 있었다. 매란이는 득심의 손을 뿌리치며, "미스 코리안 ! 이걸 무슨 꽃무늬로 아나 봐요. 그렇담 매란이가 왜 이렇게 울라구요. 바다햇자는 해룡(海龍) 이란 표구요, 해룡은 아편이란 뜻이지요. 아편을 먹는 사람은 이런 화인을 맞아야 한다나 봐요. 내가 이제 한 번만 더 화인을 찍힌댐, 그땐 몸이 식겠지요. 미스 코리안도 못 보게 될 게 아냐요. 화인을 세 번만 찍힘 그때는 목을 벤다니까요. 내가 운다면 소용이나 있어요."
그만 득심이도 울고 말았다. 매란이는 득심의 팔에 안긴 채 몸을 흔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두 한전 최승희만큼 춤을 추던 거 랍니다. 중국의 스타일을 사랑했구요. 그랬담 인제야 보람이나 있어요. 썩었는데 이렇게 팔이 썩었는데 누굴 원망한다구 색은 살이 다시 돋아날 수도 없잖아요. 허지만 이것 봐요. 매란이는 너무나 불쌍했던 거죠. 춤과 함께 사랑이 왔던 거랍니다."
매란이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득심이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스 코리안 ! 사랑처럼 맹랑한 건 없나 봐요. 나하고 죽네사네 하던 그이가 지금은 정치로 해서 매란이를 버린다구요. 저 싫어 마다는 걸 글쎄 무어래요. 흘러간 물인데 속을 색인 담 내나 죽어났지 다시 돌아오진 않을 거야요. 허지만 나는 그일 떠나선 춤도 밥도 잊었던 거랍니다. 이런 걸 봄, 예술도 사랑의 노옌가 봐요. 주인을 잃구 쩔쩔매구 이렇게 울구나 다 니고. 그래서 사랑 대신 아편을 먹은 거죠. 아편을 먹음 사랑이 없이도 춤을 출 수 있다니까요. 내 마네저인 권이 그러했어요. 춤을 추기 위하여 아편이나 먹자구요. 남은 조국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데, 매란이는 중국의 스타일을 살리기 의하여 아편을 먹은 거죠. 이렇게 화인을 맞었구요.
미스 코리안 ! 당신은 정치가 중에 누구를 존경하고 있어요? 흥 매란이는 이래 봬도 장 개석일 존경했던 거랍니다. 제일 졸렬한 사람도 장 개석이구요. 춤을 모르는 정치는 영원성이 있다구는 볼 수 없으니까요. 말하잼 예술은 민족의 피야요. 호흡이구요. 피가 맞지 않는 정치가는 난 기댈 가질 수가 없어요. 만일 쓰러진 이 땅 위에 재건이 있다면 그전 칼만 들 게 아니라 민족이 즐겨 할 춤도 춰야지요. 이까진 전쟁의 승리쯤이야 사흘 걸러 피는 꽃이지 뭐야요."
매란이는 쓰러져 울다가,
"미스 코리안! 나 용서해요. 나두 장 개석일 미워만 하는 사람은 아니야요. 장 개석인 그래도 진시왕보다는 월등낫다고 생각해요. 귀만 좀더 컸더라면 꼭 누현덕이야. 의장 누현덕이야. 이 땅 위에 암만 폭탄을 던져 보라지요. 카덴푸릿치가 허리가 꺽임 꺽였지 아쉽게 의장의 마음이 갠일라구요. 그런데 이거 봐요. 나를 버린 그이가 누군지 아세요. 아마 기무라상은 나보다도 더 잘 알구 있을 거야요. 저번 동경에서 기밀비까지 받었다는 왕 때문이어요. 내가 상해를 버리고 온 것도 왕 때문이어요. 왕을 다시 찾으려구요. 왕을 다시 찾는담 소용이나 있어요. 매란이보다도 무서운 화인이 찍히어 있는 걸 내나 섧담무얼 해요. 나 외에도 사억 오천만이나 청청히 살어 있는데요."
매란이는 이러고 쥐쥐 울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오롱배에서도 매란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었다……
득심이는 다시금 마음이 암담해졌다. 매란이는 소원대로 왕을 찾았고 왕은 또한 사억 오천만의 눈앞에서 과연 용서를 받고 웃을 것인가…… 이런 캄캄한 문제에 부대끼고 난 득심의 눈에서는 매란이로 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매란이를 위해서까지 눈물을 보여 줄 말론, 지금의 현배로 해서도 응당 울어 주어야 할 것이언만 매란이가 사억 오천만의 눈을 꺼리듯이, 득심이도 저 외에 삼천만이나 살고 있는 이 땅 위에서 혼자서만 눈물을 지운다고 용서를 주고받을 방편을 취하기는 너무나 가슴 아팠다.
차라리 소나기만 오지 않았어도 현배의 호주머니를 뒤지거나 그런 부질없는 장난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수상 메달(總 文學賞)이니, 스크랩북이니 하고 그런 걸 발견하잘 기회조차 없었을는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훼방을 놀아도 득심이만은 그렇게 믿어 보리라던 현배연만 한 소나기 산비로 해서 매란의 팔목보다도 무서운 비밀(皇道文學派)이 드러났던 것이었다.
득심이는 단순한 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현배도 인두겁을 샜으면 어름어름할 게 아니었다.
현배가 하던 잘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조선이 두 갈랫길로 해서 한 가닥은 낙랑땅에서 꽃이 피고 있다는 것이 현배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평양으로 간 지 달포가 못되어 다시 이 산장으로 오고 말았다, 돌아왔어도 분위기(路線)를 이야기하고, 이런 투쟁이 계속하는 동안만은 이 산장을 빌리게 될 거란 말도 어림한 말이었다. 허물진 팔이 흉허워서 춤을 추지 못하고 그늘이나 찾아다니는 매란이와 진배없는 현배였다.
해가 기울어서야 득심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치마 앞자락을 걷어 올린 채 산장 앞 개울물을 건너고 있었다. 붉은 물은 소리를 지르며 점점 깊어 왔다. 종아리를 휘어감던 물이 허리께를 잴 때도 득심이는 겁나지 않았다. 도리어 다리샅이 간지러운 것 외에는 마음이 대담해질 뿐이었다. 물길에 옷을 풍기며 강물을 중간쯤 건널 때였다.
"이깐 녀석“
손에 들었던 현배의 옷을 서슴지 않고 물에다 처넣는 것이었다. 옷은 물 위에 떠서 쉽사리 스미지 않고 아직도 득심이 안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무적대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멀거니 바라보다가 산속에서 현배에게 하듯 물을 퍼 끼얹었다, 그제서야 옷은 물꼬리에 감기어 후연히 떠내려 가는 것이다.
물은 벌써 허리께를 지나 젖가슴을 어르댔다. 득심이는 킬킬대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웃어 보는 순간, 현배와 함에 물을 감고 있을 때보다도 좀더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차라리 잊어 보자던 현배연만, 현배의 그 푸진 얼굴이 물길을 타고 다가오는 듯했다. 살 냄새도 호흡도 그대로 와 안기었다. 이렇게 오는 생리적 흥분에 득심이는 그만 물길에 허리가 꺾이었다. 수영장에서나 하듯 두 손을 뻗고 한참이나 흘러 내려가서야 물에 빠진 게 아니라 다시 현배의 옷을 휘어 물고 물 밖으로 나왔다.
웩웩 물을 토했다. 뻐근한 생각에 다시 수상 메달을 찾고, 스크랩북을 펼쳐 들었다. 스크랩북은 벌써 물에 젖어 잉크가 피고 있었다. 차라리 못보게 된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는 갑자기 쏟아지는 오한에 와들와들 떨면서,
"이깐 녀석."
옷도 수상 메달도 할 것 없이 다시 물에다 처넣고 휘청휘청 돌아서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산장으로 돌아왔다.
아직 흥분도 꺼지기 전인데, 어머니는 얼굴을 말아 올리면서 매란이의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고 있었다.
"수암산엔 범도 무심한가베. 비를 맞고 나다니는 저런 연놈들을 그냥 둔담. "
"어머니두요. 제철에 오는 소내길 무어래요. 저 즐거워 오는 소내길 나물하잘 수도 없잖아요. 돌물도 철철 흐릅디다요. "
득심이는 조용하고 싶었으나. 뱃속을 화안히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눈과 미주서기가 무서워 이렇게 말을 막아 놓고 말았다.
"그렇담 매란이두 무섭잖구. 왕서껀. "
"그러게 돌을 던지고 온 게야요. 메달서껀, 저구리서껀 죄다 물에 처넣구 휭하니 돌아서고 만 거야요."
득심이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은 했으나 주착없이 눈시울부터 뜨거워 왔다. 그러나 다시는 현배로 해서 눈물을 짓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참기에 적이 애를 쓰다가야 간신히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있었다.
어머니는 매우 놀라는 것이었다.
"네 주제에 누헌테 돌을 던져. 고랬담 누가 속을라구. 될 말이냐 ! 이래두 내가 환히 알구 앉었는데 그만 엄살에 속을라구."
"왜요? 자식이래서 깔보세요. 이렇게 손이 둘씩이나 있는데 전 돌을 던져 볼 힘두 없나요."
"안 듣는다는데 이년 또 가락을 넣네, 아! 몸서리쳐,"
어머니는 새로운 사태에 눌리어 어머니 편이 도리어 눈을 감고 무엇을 심심히 생각하다 한숨도 끄고 나서, 어쩌다 현배의 편을 드는 것이었다
"내…… 저년 때문에 이래두 골목길 저래두 골목길. 죽어서나 잊어 볼 밖에."
현배를 깔보고, 매란의 이야기로 현배를 헐어 주던 어머니가 도리어 현배를 가엾다고 득심이도 못하던 눈물까지 지우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자극으로 해서 득심이 역시 무작정대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으나 다시금 얼굴을 정리해 가면서 그래도 천연스럽게 이야기를 옮기는 것이었다.
"어머니두 내가 험담 무얼 해요. 나 외에도 삼천만이나 청청히 살어 있는 걸요."
득심이 험담에 어머니는 그만 파르라니 얼굴이 질리고 말았다.
"이러단 내 지레 죽나 부다. 얘…… 마루청으로 날 업어 내라. 나두 시원히 산이나 바라보게 어서 업어……"
어린애처럼 손을 떨며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득심이는 울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하자는 대로 등을 돌려 대었다.
마루청으로 나오자 어머니는 난간 기둥에다 등을 걸치고 앉아서 산을 바라보고 늘어지게 울어내는 것이었다.
조선만 나오면 병도 설움도 가시리라던 어머니연만 조선의 산을 보고 우는 뜻은 어디 있을까? 꽃도 피고 물도 흐르는데 웃어 보지는 못하고 왜 눈물로만 대해 줄까? 현배를 친일파니, 민족 반역자니 하고, 그렇게도 극성이던 어머니가 현배를 산에 두고 왔다고, 그리고 옷을 물에 처넣고 왔다기로서니 산이 무너지도록 서럽잘 것은 없잖은가? 날로 더쳐가는 어머니 병이어서 세상을 허무로만 돌려 놓는 것일까? 촛점을 잃고 흘러만 가는 물길일까?
이런 생각에 득심이도 왈칵 눈물이 솟구쳐 왔으나 그래도 마음을 달래어 보려고 잠겼던 화실로 다시 들어서고 말았다.
화실은 제법 햇볕이 다양해서 좋았다. 득심이는 먼지를 털고 나서 그리다 두었던 캔버스를 당기었다. 캔버스 위에는 눈 감은 모나리자가 완성이 되어 주기를 기다리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모델은 그리 신통한 것이 아니었다. 장님인 여동생 득매였다.
현배가 즐거워 한동안 버려 두었던 그림이언만 다시금 들어보는 마음이 제대로 즐거웠다. 옷을 찾아다니는 현배도, 산을 보고 우는 어머니도 이 그림 속에서만은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다만 득심이만이 마음 놓고 찰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였다.
그러나 이런 그림으로만은 마음이 흡족할 수 없는 것이 - 그려 놓은 그림이 젖꼭지가 검붉어야 했고 붉다 못해 핏방울이 져야 할 곳에 가서 채색이 약해졌다. 살진 허리께하며 다릿살이 확확 체취가 풍기도록 육박해 나갔어야 할 붓이 그만 죽고 만 것이었다. 생선토막처럼 캔버스 위에 살져 누운 나체로만은 그림의 보람일 수가 없었다. 장님에게도 청춘이 있고 감정이 있고 감정을 빚어내일 다감한 생활면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득심이가 그려 오던 그림 속의 장님은 청춘과 생활이 없어 보였다. 다만 지팡이나 더듬고 있는 남의 동정이나 받을 그런 장님이었다. 과연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불후의 명화라고 친다면 지금 득심이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서 모나리자 이상의 생활과 감정 내지는 정신까지를 그려내어야 할 것이었다.
득심이는 고민스러워 눈을 감았다, 장차 이 땅 위에 나설 천재가 되자면 현배의 사기술에도 어머니의 수다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닌가?
"아! 예술의 이반자 나의 생활이여!"
마음은 그냥 어두워 왔다. 밝을 줄을 모르고 그냥 어두워 왔다. 어두운 물길에 아직도 현배가 있었다. 잊자던 현배가 미꾸라지처럼 그리고 상사말처럼 꼬리를 저어 가며 마주 와 서는 듯했다.
어머니의 눈물, 썩어빠진 매란의 팔목, 현배의 수상 메달 모두가 암담한 생활이었고 무서운 형체였다. 그러나 지금의 득심이에게는 팔이 썩어도 좋았다,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아편을 먹어도, 다시 부활하지 못할 매란이가 되어도 좋았다.
산비에 부서지던 감정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자 득심이는 붓을 들고 나앉았다. 그제서야 춤이 오듯 새로운 화상이 떠올랐다. 화구에는 물감이 지천으로 흘렀다. 그 많은 채색이 차라리 득심의 마음이요 정신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행복해 보기도 이 날이 처음이었다.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이런 행복을 두고 산으로나 싸다니던 길을 후회하면서 다시 화실로 잊었던 득매를 불러 들였다.
눈 감은 득매는 더듬더듬 바람벽을 쓸며 들어왔다. 득심이가 하라는 대로 옷을 활활 벗어 젖히고 고 풍만한 육체를 거리낌없이 드러내어 놓은 것이었다.
열 여덟, 광선을 감고 앓은 아름다운 모델은 살 냄새를 풍기면서 붓을 따 화면으로 옮아 앉고 있었다.
"언니! 그림은 장님이 아니래나 보지요?"
득매의 얼굴은 완전히 정열에 빛났다, 산과 숲을 보고 싶어하는 그런 얼굴로 환히 타 올랐다.
"언니, 어서 대답 좀 해요?"
득심이도 이야기를 했다.
"그림 속의 득맨, 산악을 탐내는 해동청 보래매야."
"그렇담 저대로 숲을 보게요? 일구월심이던 해와 달과 무름도 보구요? "
"그렇다뿐인가! 이런 산악시도 있다던데. "
안개 덮인 골 안은 차라리 숫 먹진 산수화, 이래도 층층 벼랑이 나는 좋아라. 산허리로 바람이 간다. 건목을 치며 바람이 간다, 산너머 노루가 울기에 목을 뽑은 푸른 나무여라!
득심이는 부르고 득매는 들었다. 시를 듣고 앉았던 득매의 얼굴이 구름 피듯 활활 피어 올랐다,
"아주 산씨 그렇게까지 아름답나요. 푸른 나무가 짐숭처럼 목두 뽑구요."
"건, 시인이 본 산이구, 득매도 그런 감정으로 산이 보구 싶지?"
"그래요. 한번만이래두 봤음 해요. 이러단 꼭 미치나 봐요."
득매도 득심이도 정열에 탔다. 소나기를 맞으며 타오르던 가락이 지금은 캔버스를 울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던 득심이는 순간, 실색을 하고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득심의 정열로 해서 멋지게 나가던 그림의 광선이 죽어들었다.
득심이는 붓을 놓고 모델을 바라보았다. 그림만 죽는 게 아니라 득매 얼굴이 죽고 있는 것이었다.
"득매?"
득심이는 황겁해서 득매를 불렀다.
"왜, 깜짝 놀라세요. "
"왜 놀라긴. 잡념을 생각험 광선이 죽는다구 안 그랬어."
"아무 것두 생각한 게 없는데요. "
득매는 여전히 쓸쓸한 얼굴이었다.
"그런 광선이 왜 이렇게 검어 ! "
"호호, 물감 탓이겠죠. 창이 어둡거나 그런 거겠죠. 제 앞두 못 보는 이런 주제에 무슨 생각을 했다구 성화세요. "
"그러단 또 망쳐 놓는대두, 우리 득매 이쁘지. 자아 여길 좀 봐요."
"아무렇지두 않아요. 난 아무렇지두 않대두요."
이러면서 득매의 얼굴은 득심이가 부르는 대로 따마갔다.
"언니?"
"언니가 아냐…… 짓까불지 말구 무엇 좀 생각해 보라니까, 득매가 가장 좋아하는 세계, 해와 달과 구름과 또"
득심이는 득매의 얼굴에다 정열을 부어 넣으려고 쩔쩔맸다.
"득매, 창 밖을 좀 내다보지. 구름이 얼마나 아름답나.“
"상상으루요?"
"그래, 돌물 가는 거랑, 폭포랑."
"여전히 어둡기만 한걸요."
득매는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만 흔드는 게 아니라 눈물까지 질름대면서 우는 것이었다.
"언니 ? 그림이나 눈을 떴음 뭘 해요. 난 언니를 위해서나 사나 봐요. 허구헌 날을 이렇게 흉물스럽게 벗구나 앉았구, 안 그래요."
치미는 설움에 어깨를 흔들었다. 득심이는 그만 울상이 되었다. 붓을 동댕이치고 와락 득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샐 못 참아 청승이야! 아예 뒤어져라."
찰삭 손이 건너가자 득매는 아무런 반항이 없이 젖가슴을 웅크려 안고 의자에서 떨어졌다.
정열이 꺼지고, 흐트러져 우는 여자의 육체처럼 보람없는 것은 없었다, 득매의 살진 피부를 탐내기까지 하던 득심이는 구질구질한 생각에 산악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득매는 우는 듯 자는 듯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득심이는 한참이나 부아를 사이고 나서야 득매 쪽으로 얼굴을 돌리었다. 득매는 그린 듯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득매 머리맡에 웅크리고 앉았는 것은 어머니였다.
득심이는 놀랐다. 등에나 업혀 다니던 어머니여니, 무얼로 화실에 들어왔을까? 떨리는 손으로 눈물에 젖은 득매의 얼굴을 닦고 있던 것이었다.
"제깐년이 엄살이나 부렸지 돌을 들어 볼 힘이 있나. 건방지게 제 주제에 누게다 돌을 던져, 던지길.“
어머니는 이런 말을 외면서 무슨 주검이나 바라보듯이 암담한 빛으로 득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득심이와 얼굴이 마주치자 어머니의 두 눈에는 불길이 활활 섰다. 분명 득심이를 저주하는 눈이었다. 한참이나 흥분해서 득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턱을 들어 창 밖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손을 쳐들며 명령적으로 또 자기를 업고 마루청으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득심이도 뭉클한 생각에 왈칵 울어 보고 싶었으나 모성애란 사람 이외의 힘인데 적이 놀라면서 어머니를 업고 마루청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몸은 육체라기보다 한 개 불덩어리였다. 여느 때보다는 체중도 한결 무거워 보였다. 이렇게 맹렬한 신열이 어디 숨었다가 이런 경우에 일어나는 것인지 몰랐다. 허구한 세월을 병으로 지내 왔고, 이제 뼈만 남은 몸이언만 득매를 울렸다고 해서 다시금 타는 듯 뜨거운 피부를 느껴 보는 득심이는 질투까지 일어났다.
"어머니에겐 득매만이 자식이랄 수는 없잖아요. "
"그런다기루 네깐년이 어밀 넘보잘 체면은 있구."
"그렇담 모성애두 무슨 소유권이게요. "
"아무렴. "
"그래둡시다. 득심이는 게르만족이 미워하던 유대족의 핀가요. "
“………“
어머니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산악 쪽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득심의 손길을 휘어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은 무엇을 호소하는 난처해진 눈이었다.
"득매가 자니?"
"자나 봐요."
"문두 잠그구?"
"잠근 채 있어요."
어머니는 다시 눈물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득심이도 따라 우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만이 혼자 생각에 한참이나 느끼다가,
"득심아?"
"네!"
"득심아?"
"먼데 그러세요."
어머니의 얼굴은 매우 당황해졌다.
"넌! 돌을 던지기나 하고 남 건져 볼 힘두 손두 없니."
"오룡배서 만나던 매란이요. "
"매란인!"
"그럼 현배요."
"것두 아니 라니까."
"먼데 그리 어려우세요."
"득매의 눈을 그르쳐 놓은 사람이 만일 네 앞에 나타난다면 너는 무슨 말을 권하고 싶으냐."
"득맨 배냇병신이라면서 그러시네요."
"증거가 있어두."
"그땐 돌이나 던져야지요. 현배게 하듯 돌이나 던져 볼 밖에요."
득심이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웃기까지 했으나 기실 웃는 게 아니라, 코허리가 실룩거리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득심이는 얼마간 당황해지면서,
"왜 웃으세요. 어머닌 절 아마 매란이로 아시나 봐요."
득심이는 천연스럽게 웃어 보고 싶었으나 뻐근한 생각에 어머니가 하듯 얼굴을 실룩대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를 마주 보던 득심의 시선이 발부리로 떨어지자, 어머니는 가만한 소리로……
"득매년의 눈을 그르쳐 준 사람이 득심이 너라면 그땐 누게다 돌을 던져야 옳담."
이런 비밀이 쏟아지자 득심이는 예기나 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두 그런다고 제철에 오던 소내기가 안 올라고요. 득매는 득매구 또 득심이는 득심이가 아니어요. 득심이마저 장님이 되잘 필요는 없잖어요. 건 너머 하세요. 그렇게는 못하시는 거예요.“
득심이는 펄펄 뛰었다. 그리고 얼마든지 부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 가 드러내어 놓는 어머니의 일기장에서 다섯 살머리 득심이가 어른의 시늉으로 득매의 눈에다 극약을 부었고 득매의 눈을 그르쳐 놓았다는 남의 일 같은 이런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눈앞이 어두워 오기까지 했다.
"그렇담 진작 왜 말을 못했더랬어요. 집에다 매란일 치면서 오룡배나 찾아 다니구. 건 너머나 잔인한 짓이에요. 아……"
득심이는 목을 놓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득매가 알까 보아 득심이도 어머니도 숨을 죽여 가면서 눈물을 지을 때였다.
잠이 들었다고 믿었던 득매연만 화실에서도 느껴 우는 음침한 소리가 담을 밀고 흘러나왔다. 득매도 이미 알고 났던 것이었다. 득심이는 미칠 듯이 화실로 달려갔으나 문고리는 이미 잠근 채 있었다.
"득매야? 득매야?"
소리쳐 불렀으나 안에서는 대답 대신 그림 찢는 소리가 날카롭게 흘러 나왔다. 쾅쾅 하고 화구 치는 소리마저 가슴을 칠 때는 득심이는 문고리를 놓고 저만큼 나가 떨어졌을 때였다.
그만 병을 못 참아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다. 산장으로 모여 온 병인들이 집일로 해서 곧잘 지껄이던 잔소리도 없어지고 다만 사람은 허사여니! 허사여니! 이런 소리뿐이었다. 무덤엘 가면 무덤을 싸고 화제가 퍼지듯이 병인은 언제든 죽는 거라고 했다.
이런 어두운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고 난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나서였다. 초상을 치르고 나서도 일체로 나타나지 않던 득심이가 현배의 방문을 두드렸다. 현배더러 산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으레 어머니의 무덤을 가자거니 하고 현배는 서슴지 않고 따라 나섰다, 득심이는 물색 옷보다도 더 유난스럽게 하얀 소복 단장을 했다. 제물 바구니를 이고서 산길로 총총걸음을 쪘다.
물론 현배와 득심이는 소나기를 맞으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득심이는 어머니의 해골이나 생각해야 했고 현배는 득심이를 위로해 주어야 했다.
"득심인 이런 고독두 첨이겠지?"
"어머니루 해서요. 그럼 소내기루 해서요?"
"그건 득심의 자유구."
득심이는 한숨을 쉬며 가던 길을 세우고 웃지도 않는 얼굴로 마주 바라보았다.
"넋이라두 있담 어머닌 날 또 질투나 하실 거야요. 덜 먹은 년이라구요.“
"원 말이 되나 ! 모성애로 해서라두 어머닌 곧잘 우실 거야."
"그런 건 벌써 평범한 대화예요. 어머니가 우신댐 소내기가 싫어서람 몰라두!"
득심의 치맛자락은 풀밭을 쓸며 갔다. 벌써 석등이 보여 왔다. 무덤으로 가자면 이 석등 밑에서 좁은 길로 갈라져야 했다. 그러나 득심이는 그냥 대고 곧은길로만 내빼었다. 현배는 득심이를 따라 그 굽이진 산비탈을 수없이 끼고 돌아갔다.
"아니! 예가 어디여!"
"어디긴 무에 어디야요. 이렇게 가면 그만 아니어요."
"이 길루 가단 소내기나 맞을걸!"
"그런 건 묻지 마시래두요. 이 위엔 절도 있대나 봐요."
"흥 초상 상제하군 당치 않은 길이야."
"왜요. 이렇게 소복을 하고 나섰는데 그러세요. 옷이 눈물에 젖구요.“
다시 말이 없이 걸었다. 산 그늘이 깊어 오고 돌물 가는 소리가 좀더 낭자하게 들려 왔다, 산비탈을 몇 개나 더 싸고 돌아서야 가던 길을 멈추었다. 득심인는 육자배기를 읊던 곳으로 다시 오고야 말았다. 제물 바구니를 내려 놓고 풀밭을 쓸고 그 위에 현배더러 앉으라고 했다. 현배가 앉자, 네모지게 개켜 넣었던 하얀 보자기를 활짝 펴 놓고 그 위에다 음식을 널어놓는 것이었다. 깨 묻힌 시루떡이 나오고, 달걀이 나오고, 과일이 나오고, 술병까지 나왔다. 흡사 무덤이나 받을 그런 제찬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아니 이게 머야. 산적 꼬치가 다 놓이고 점심하곤 너무나 유난스러워."
"왜요? 중세기적 습성이라고 해서 웃으세요. 이래도 어머니를 따러다니며 밴 거래요."
득심이는 병을 기울여서 컵에다 술을 부었다. 부은 술을 현배더러 먹으라는 것이었다. 현배는 득심이가 하라는 대로 술을 마시며 사래를 챘다. 다시 술을 청했을 때는 득심이는 병을 딱 떼어 버리고 더는 주지 않았다.
"석 잔만 드세요. 이런 경우에는 석 잔만 먹는 게 옳다고 기억되나 봐요."
"산(生) 사람두?"
"가만하시라니까 되려 그러시네요. 하필 그런 착각으로 해서 파흥이 되잘 필요는 없잖아요. 무덤하듯 그냥 계셔야 해요."
"그러자긴 나이 젊은걸!"
"그럼 늙어서만 죽으란 법은 있구요. 건 욕심이야요. 생명이 긴 거루만은 인생의 보람일 수 없듯이 오래 산댐 지리나 허구. 안 고래요."
다시 둘이 말이 없이 있다가 현배는 과일을 집어 들며,
"먹어요. 자! 달걀서껀 과일서껀,"
"호호 제찬을 노눈다고 누가 그러세요. 현배씨나 어서 드세요. 등신이 먹구 가거든 저두 먹을께요."
득심이는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옷고름을 고깃고깃 고기 다가,
"소복을 입은 게 어머니루 해선 줄 아세요?"
"으레 그렇겠지. "
"선생님 거야요. 이렇게 무덤을 찾어온 거구요."
물기 먹은 듯한 득심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번졌다. 그리고 어깨를 들먹였다. 치마 앞섶으로 눈잔등을 눌러 가며 느껴 울었다.
"어머니 대신 현배씨가 죽었담 난 무덤이나 찾어다니구 쥐쥐 울구. 가마귀나 헤쫓구. 그렇담 행복할 거 같어요."
이래도 현배는 아무런 공포가 없이 저대로 등신이 하듯 술에 익은 얼굴이 어림해 있었다. 현배가 먹고 나서야 득심이도 먹다 남은 과일을 씹었다.
"어머니두 아버지 제찬 물림을 먹을 땐 나처럼 미각보다 눈물이 좀더 낭자했더래요. 그래두 불행하진 않더라구요. 이게 아마 어머니가 던져 준 소유욕인지도 모르지요. "
득심이는 치마 설을 적선 가며 쭐쭐 울었다. 현배도 우울해졌다.
"인생이 잡초보다 무성했어두 득심은 울어야 하구 미련을 가져야 하나."
"그랬다구 애인을 남 주고 싶을 년이 있을라구요. 나도 하긴 주판을 들기는 한 거야요. 그러나 타산으로만은 청춘의 보람일 수가 없어요. 나도 고였던 피가 서러워서 한때는 현배씨를 건지려구요. 물을 먹구 헴을 치구."
득심이는 목이 메어서 더는 말을 짓지 못했다.
"건 센치겠지. 센치에서 오는 일종 병이구. 그런 병으로 해서 득심이도 나도 앓아야 옳을까?"
"그렇담 모성애는 병이 아니구요. 닭이 알을 깔 땐 열이 사십 도나 올라 모일 잊던데요."
득심이는 여전히 눈물을 쥐어 뿌리며 울었다. 득심이도 닭이 알을 까던 그런 신열로 해서 오는 설움이라면 조만해서는 달래질 것 같지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현배도 한숨을 껐다. 득심이가 하자는 대로 무덤이 되어 주어야 했고 쥐쥐 우는 꼴을 보아 줘야 했다.
"현배씨 ! 이렇다구 강잉히 꾸짖지는 마세요. 이게 다 센치에서 오는 설움만은 아닌가 봐요. 알프스산을 가기 위해서 으례껏 있어야 할 계단인가 봐요."
"하긴 모성애의 첫출발이라면 몰라도 득심의 생각은 꼭 병적인걸. 득심이 안 그래. 현배는 타다 남은 성냥깨피야. 소내기에 꺼버린 불길이구. 그런걸 가지구 우잘 건 없지 않나."
"그래두요. 하긴 저두 사랑을 생리학 시간엔 닭이 알을 품는 정도루만 해석허려구 들었더랬어요. 그러나 번식 외에도 얼마든지 무서운 세균이 들어 있거든요. 방역도 모르는 그런 병균으루 해서 지금 제가 병이 들구 이렇게 열이 사십 도나 올라 쩔쩔 끓구 다니구, 울구. 나 보기에도 꼴이 안됐나 봐요."
"득심의 머리 위에 새로운 소내기가 온대두. 산이 울어두."
"그런 건 제게 있어 아무런 위력도 없는걸요.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추억 담으로나 들을까요."
득심이는 구름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해는 벌써 기울어져 산그늘이 어깨 위로 내려왔다, 소쩍새도 처량하게 울었다.
"현배씨, 내게도 소내기가 오던 과거가 있지요. 그렇게도 즐거운! 그렇게도서러운! 아…… 무서운! 조국에 눈이 뜨자 사랑도 기쁨도 다 잊어야 할…… "
그러나 득심이는 눈물을 씻으며 고요히 웃었다. 득심의 얼굴은 어느덧 조용해졌다. 눈도 잠잠했다. 산울림을 들으며 소나기를 맞던 그런 풀어진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산장에서 처음 보던 그 얼굴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쥐었던 옷고름을 다시 펴들며 득심이는 가만 한숨을 껐다.
"소낙비의 경륜으로 해서 생긴 일 아셔요. 우리집 장님헌테 못 들었어요."
"수상(授賞) 메달이 들어 있대서…… "
"그 다음은요?"
"중간잇병신이래서 좀더 섧다는 거……"
"그래요. 빠안히 알고 계시네요. 그걸루 해서 제겐 꽃으로 묶을 현실이 무서워진 거지요. 산 사람보다는 무덤이 반갑구요. 그런 비밀이 있기 전에 이미 어머니도 현배씨도 죽었댐 나는 또 속구 살었을 것이야요. 현배씰 대신해서 삼천만 앞에 용어를 받잘 일두 없구요."
산그늘에 덮이는 득심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 갔다. 파리한 얼굴이 간간이 털리기까지 했다.
"현배씨 ! 내가 빛을 다 갚는 댐 그전 어머니만큼 늙어 뵌 거야요. 서럽담 허는 수 있어요. 갚어야 옳아요. 손발이 붉도록 갚어야 옳아요."
득심이는 치마폭마다 산바람을 감으며 살포시 일어났다. 곱다란 손으로 바위를 하마하나 건너 짚었다. 그늘진 바위에는 아직도 따끈한 체온이 남아 있었다
나무마다 푸른 머리를 흔들며 바람이 왔다. 바람 뒤에 섰던 산머리의 구름이 현배와 득심이를 덮자 소나기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득심이는 꺾어 들었던 꽃묶음을 현배 앞으로 내던졌다.
"소내기가 온다기루서 이런 것들이야 살어날 수 있나요. 현배씨가 내가 송장이긴 일반인데 서럽다면 무얼 해요."
죽은 사람보다도 좀더 겸손히 현배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득심이는 코를 칙칙 풀고 나서 치맛자락을 털었다. 현배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 계셔요. 그러고 좀더 노다 오세요."
"난 무덤이래서 그럴까?"
"호호 이를템 그렇죠. 전 먼첨 나려갈 테야요. 장님이 또 울고 기다릴 거야요."
현배는 더는 간섭할 수 없어 털석 주저앉았다. 무덤이 남듯이 무덤을 두고 가듯이 득심이는 벌써 저만큼 산비탈을 끼고 돌았다.
현배가 산비에 쫓기어 산장으로 내려왔을 때는 득심이는 벌써 산장에 있지 않았다. 득매를 데리고 산장 층층다리를 지축대며 내려가는 것이었다.
득매는 득심의 뒤에서 지팡이로 떠듬떠듬 길을 더듬으며 따랐다. 득심이는 멀거니 득매를 바라보다가.
"눈이 아직 둘씩이나 있는데 이건 다 뭣에다 쓰자는 거야."
득심이는 득매가 들었던 지팡이를 뺏어 던지고 더풀썩 득매의 손길을 쥐는 것이었다.
득심의 더운 손이 가자, 득매는 너무도 좋아서 희멀금이 웃음을 지으며 득심이를 자라 비오는 산비탈을 돌아가고 있었다.
허윤석(許允碩: 1915- ) 유두 | 문화사 대계(文化史大系) | 해녀(海女)
경기도 김포 출생. 1935년 <사라지는 무지개와 오뉘>로 문단에 등단함. 그는 시대적 사건이나 상황을 서정적인 문체로 형상화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실락원>, <문화사 대계>, <옛 마을>, <해녀>, <길 주막>, <조사(釣師)와 기러기>, <구관조>, <초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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