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도 -황순원
중학 이년에서 삼 년에 걸친 한 일 년 동안 아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대개 그 때 한 반 동무로 이웃에 이사해 온 만수라는 애네 집에서 살다시피 한 일이 있다. 이웃이었으니 필시 이 애도 우리 집에 찾아왔을 것인데 지금 내 기억으로는 암만해도 내 편에서만 그 애네 집에 찾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떤 까닭일까.
만수는 어머니와 다만 둘이서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만수 아버지는 평양에서도 손꼽히는 고무 공장 사장으로 작은집을 얻어 딴살림 차려 놓고 큰집과는 영 발을 끊은 듯했다. 나는 이 만수 아버지라는 이를 만수가 이웃에서 떠나기 직전, 그러니까 우리가 삼 학년이 되던 해 늦봄, 만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 마당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것도 누가 만수 아버지라고 일러 줘서 안 것은 아니다. 마침 그날이 일요일인가여서 장례식에 가볼 수 있었던 나는 거기 모인 많지 않은 사람 가운데서 이 만수 아버지를 알아 낸 것이다. 베두건 쓴 얼굴 모습이 수질을 머리에 두른 만수의 얼굴 그대로였다. 양복 위에 베두루마기를 아주 말쑥히 입고 맑은 맵시에 이목이 수려한 청년 같은 신사 만수 아버지는 그대로 만수의 형님이래도 좋은 나이밖에 안 돼 보였다.
이 만수 아버지에 비겨 만수 어머니는 쪼글쪼글 아주 늙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내외라고 볼 수 없었다. 만수가 아들이래도 늦게 본 아들이래야 맞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수는 그의 부모가 일찍 결혼해서 곧 본 첫 아들이자 만수 하나밖에는 더 애낳이를 해 보지 못한 어머니와 아들 새였다.
게다가 만수 어머니는 항상 어딘가 편찮아 있었다. 궂은 식구가 없는 집안이라 옷매무새 같은 것도 늘 정하게 하고 있는 편이었으나 언제나 병 그늘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하니 철색 살갗으로 해 더 그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은 또 결혼 생활의 파탄이 가져온 그늘로 인해 더했던 것 같다. 만수 어머니가 서른여섯엔가 세상을 떠난 것도 이 결혼의 파탄이 가져온 정신적 타격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만수네 가정사가 아니다. 그저 이런 어머니와 아들만이 사는 집의, 그것도 아들이 차지하고 있는 한 칸 방에서 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만수의 방은 꺽어 지은 이 집 한끝에 붙은 동향방이었다. 이것이 만수가 우리 동네로 이사온 이래, 그가 자기 외삼촌을 따라 대륙 방면으로 떠나기까지 일 년 남짓한 세월을 거의 매일같이 우리가 정들여온 방이다. 동향이라 아침에 학교 갈 적에 들를라치면 앞 미닫이 가득히 햇볕을 받아 정신들게 환하곤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방이 둘이의 방으로 차지되기는 저녁 뒤의 일이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도 했다. 얘기도 했다. 만수는 그렇게 명랑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우울한 편도 아니었다. 교실에서도 그랬다. 먼저 나서서 떠들고 까부는 축은 아니었으나 남과 같이 웃고 얘기하고 떠들곤 했다.
만수는 하모니카를 잘 불었다. 나도 그 시절 하모니카를 좋아했기 때문에 둘이는 같이 불었다. 제대로 악보책을 놓고 부는 것이 아니었다. 만수도 나처림 악보책 놓고 배운 하모니카가 아닌 듯 둘이는 닥치는 대로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학교에서 배운 노래건 거리에서 들은 유행가건 아는 노래면 마구 불어 넘겼다.
누가 먼저 어떤 노래의 첫머리를 시작할라치면 다음 하나가 거기 따라 불었다. 숨이 차고 양볼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냥 불어댔다. 좀 전에 분 곡을 몇 번이고 되풀이도 했다. 이 아직 소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한창의 두 소년은 마치 자기들의 정열이랄까 정력을 이것으로나 소모시키려는 듯이 불고 또 불었다. 한 칸 방이 떠나갈 만큼. 아마 그때 밖에서 보았으면 이 하모니카 소리로 해서 그렇듯 고요하던 집 전체가 어떤 이상한 생기를 띄웠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지쳐서야 불기를 그만뒀다. 이것도 어느 한쪽이 그만 불자고 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누가 불기를 그치면 다른 하나도 따라 입에서 하모니카를 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대개 손깍지 베개를 베고 드러눕는 것이었다. 한참은 누구도 말이 없었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떠들썩함에 비겨 너무나 갑작스럽고 지나친 고즈넉함이었다. 마침 이 집 전체에 끌리어 우리들의 방이 바다 속 깊이로 자꾸만 가라앉아 들어가는 것만 같은, 이런 때 우리들의 정적을 혹 만수 어머니가 와서 깨쳐 주기도 했다. 참외니 수박이니, 또는 사과니 밤이니 귤이니 하는 것을 들고 와서.
우리가 하모니카에 지치거나 공부나 잡담에 물려 손깍지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을 때는 곧잘 벽에 붙어 있는 한 장의 바다 사진에로 눈이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원색으로 된 꽤 큰 그림 사진이었다.
파도가 약간 있을 뿐 크고 작은 횐 물머리가 깔려 있는 망망한 바다에는 일견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이 바다와 맞닿는 하늘에 솜반을 아무렇게나 뜯어 던져 놓은 것 같은 구름이 몇 조각 떠 있었다. 그리고 이 구름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것이 또 몇 점 떠 있었다. 갈매기였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저어기 까마득히 머언 수평선 너머에 까만 점 같은 게 하나 찍혀 있었다. 사진의 흠집인 양. 그러나 그것은 사진의 흠짐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이 점은 아련한 연기 같은 것을 끌고까지 있는 것이다. 배였다. 수평선 너머로 가는 것인지 이리로 오는 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우나 배임에는 틀림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그림 사진으로서도 그리 신통한 것이 못 되는 것이었으나 그 때의 우리에겐 어떤 꿈이라 할까 동경이라 할까 한, 그런 심정을 일으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심정은 그 때 우리의 나이도 나이였으려니와 그보다도 만수가 늘 그리는 꿈으로 해 복돋우어 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만수는 장래 마도로스가 되겠노라고 했다. 그래가지고 두루 돌아다녀 보겠다고 했다. 이럴 때의 만수의 눈은 벌써 이상한 빛을 띄우곤 했다. 나는 이 만수의 눈에서 이미 내가 그에게서 몇 번이나 들은 항구의 이름을 외어 보는 것이었다. 좀 가까이는,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콜롬보, 봄베이,,,,,, 좀 멀리는, 아테네, 수에즈 운하를 거쳐--,--아주 멀리는, 나폴리, 마르세 이유, 런던, 함부르크, 케이프타운----
그래서 그랬는지 만수는 보트도 잘 저었다. 여름 방학 때 흰 런닝셔츠 바람으로 찾아와 나를 대동강으로 꾀어 낸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옳다. 그가 우리 집을 찾아온 것은 다른 때는 말고라도 이 일로도 한 두 번이 아닌 것이다. 그런 걸 나는 그가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 낸 지금에도 그가 우리 집에 온 일이 없고 내 편에서만 그를 찾아간 것같이 느껴짐은 무슨 까닭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수와 나의 관계라 하면 그의 집 그것도 그의 한 칸 방과 떼어놓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한 칸 방. 거기에는 비록 길지는 않으나 우리들 한창의 소년만이 가질 수 있는 생활의 한 토막이 깃들여 있었으니, 그것은 벽 위 사진의 저 망망한 수평선 너머 한 점 선박이 내뿜는 아련한 연기와 같은 꿈이요, 알 수 없는 소년기의 정력이랄까 정열의 연거푼 발산이요, 이 꿈과 정열과 정력이 한데 어울려 지껄여댄 수많은 얘기 - 그 거의 전부가 사진 속 바닷물결 새에 생겼다 스러지는 물거품 모양 이미 내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얘기 같은 것으로 수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 방의 단 하나인 앞미닫이만 꼭 닫아 놓고 꼼꼼히 그 안을 더듬으면 아직껏 거기에 남아 있는 무엇을 좀더 호흡할 수도 있고 어루만질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한 칸 방의 안속만을 더듬으려는 건 아니다. 차라리 나는 우리들의 이 한 칸 방문이 좌우로 열려져 보다 넓고 새로운 세계, 그것은 벽 위에 붙은 바다의 넓이와도 다른, 그리고 그 즈음 학교에서 배운 무슨 지리학적 넓이나 새로움도 아닌, 그러면서 또 그 당시의 우리의 아련한 꿈과도 구별되는 그런 세계로 통하게 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닫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벽에다 새로 눈에 뵈지 않는 크나큰 들창 같은 것을 뚫어 놓게 하고야 만 성질의 것이었다.
우리의 한 칸 방에서 그렇듯 넓은 세계로 통하게 한 것은 바로 만수의 외삼촌 되는 이었다. 지금까지 내 기억에 남은 이분의 인상으로는 얼굴이 만수 어머니와 같이 가무잡잡하던 것, 몸집은 보통이나 키가 작은 편이었던 것, 그 작은 눈이 때로 이상하게 빛나던 것, 그러면서도 퍽은 친근감을 느끼게 하던 것 따위로, 이 분의 내면 생활에 대해서는 이렇다하게 아는 게 없다. 그저 오래 전부터 만주랑 홍안령 땅에 가 있었던 것과 그리고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는 것만은 만수의 얘기로 알고 있었으나, 무엇 때문에 이분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기는 그 때의 내 나이가 나이였으니까. 그리고 설혹 내가 그 때 그런 것을 지각할 수 있는 나이와 기회가 있어 이 분의 생활이란 걸 알고 그것이 여태 기억에 그대로 남아 있다손치더라도 나는 여기다 그것을 일일이 쓰려고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와 크게 관계가 없는 한.
내가 우리의 한 칸 방에서 이분을 처음 대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처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분을 꼭 두 번, 그것도 둘째 번은 만수 어머니의 장례 때 만수 아버지 곁에 고개 숙이고 서 있는 것을 본 것뿐이니 이 한 칸 방에서 이 분을 대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마지막인 셈이다.
곧 이분은 우리를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만주 땅의 스릴한 마적 이야기며 불가사의한 중국 사람과 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북만주 눈보라치는 밤에 승냥이의 울음소리, 마굿간의 말이 추위에 발 옮겨 짚느라고 언 땅에 내는 소리, 늦나그네 지나가는 썰매 방을 소리를 들으며 저절로 처량해져 고향 생각이 간절하다가도 정작 이렇게 돌아오면 되레 그 때의 일이 그리워진다는 만수 외삼촌 자신의 이야기. 이런 만수 외삼촌은 만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자 만수를 데리고 다시 대륙으로 갔다. 그 뒤에 만수가 그냥 대륙에 있는지 혹은 소원이던 마도로스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런데 만수 외삼촌이 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방문을 열고 벽에다 새로 큰 들창까지를 뚫어 보다 넓고 새로 운 세계로 통하게 한 이야기는 흥안령 저쪽 이야기다.
자작나무 숲이 들어선 구릉성의 산맥과 잇닿아 펼쳐진 무연한 초원. 거기 여러 십, 여러 백 마리씩 무리를 져 다니는 이리 떼. 소들은 밤이면 이들 사나운 짐승의 습격을 방위하기 위해 자기네의 어린것을 가운데 두고 뼁 둘러 뿔을 밖으로 향하고 자고, 말들은 또 말들대로 자기네 어린것의 주위에 머리를 안으로 모으고 자는 곳
그 속에서 몽고 사람들은 소박하기 짝이 없는 목가적인 생활(지금 와서 보면 반드시 그런 생활만도 아닐 듯싶지만)을 영위하고 있다. 이 몽고 사람들의 생김생김이 어딘가 우리 나라 사람과 비슷하고, 말도 흡사한 데가 있다. 어머(어머니-아바(아버지-아가(아기-메수(메주) 따위 이외에도 적잖은 예를 들었으나 다 잊어버렸다.)
언젠가 만수 외삼촌이 어떤 곳(그 땐 분명히 지명까지 들었으나 이것도 잊어버렸다. 왕야묘가 아니었는지?)에 갔을 때 일로, 여름철이라 낮에 낮잠이 들었다가 밖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바람에 눈을 뜨니 지금 한창 누구와 싸우는 듯한 언성 높인 말소리가 에누리없이 경상도 노파의 말투였다. 그래 생각하기를, 저 늙은이는 무슨 참지 못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타국 땅에 와서까지 큰 소리로 싸움을 하는 것일까, 하고 고개를 내미니, 그것은 경상도 노파도 아무도 아닌 바로 늙은 몽고 부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몽고 땅 한 곳에 난수 외삼촌이 이번 갔을 적의 일이었다. 주막이란 없는 곳이어서 마침 저녁때 당도한 거기 한 집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묵게 되었다. 그만큼 몽고 사람들은 인심이 후한 것이다.
우연히도 그 집엔 만수 외삼촌 외에 객이 하나 더 있었다. 만수 외삼촌 낫세의 일본 사람이었다.
인심이 후하고 친절한 집주인은 저녁에 두 사람에게 술까지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 몽고 사람 특제의 젖으로 양조한 술과 양고기 안주, 집주인도 만주말을 통하고 일본인도 만주말을 알아, 셋은 술 순배가 돌아감에 따라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소기름 등잔불도 이미 밤이 깊음을 말하며 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파오(몽고집) 문밖에 있던 이 집 개 두 마리가 한꺼번에 짖기 시작했다. 짖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을 모르고 다급하게 짖어 댔다. 주인이 문을 열고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 조용히 두 나그네를 향해 말했다. 이리 떼가 나타난 거라고.
그리고 주인은 그 몽고인 특유의 수염이 적은 검붉고 넓은 순진스런 얼굴에 어떤 미소까지 띄우며, 개가 저렇게 몸을 피하면서 짖을 땐 이리 같은 짐승이 나타났을 경우라고 했다. 낯선 사람을 봤을 때는 한 곳만을 향해 짖어 대고, 이웃의 아는 사람이 오면 그저 한번 컹컹 짖고 만다는 말까지 했다.
주인의 지른 소리로 짖기를 멈추었던 개들이 아까보다도 더 극성스럽게 짖어 대기 시작했다. 이리 떼가 더 가까이 나타났나 보다.
이 때 마주 앉았던 일본인 객이 벌떡 일어났다. 어느 새 그의 손에는 어디다 감춰 가지고 있었는지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주인이 약간 놀라는 빛으로 손을 들어 일본인 객의 앞을 막듯 했다. 일본인 객이 술로 해 붉어진 얼굴을 주인에게로 돌렸다. 왜 그러느냐는 듯, 내 이제 그놈의 이리를 보기 좋게 쏘아 잡을 테니 두고 보기나 하라는 듯.
주인은 들었던 손을 거두면서 조용한 말로, 정 쏘려거든 허공에다 한 방 쏘아서 쫓아 버리고 말라고 했다. 이 말에 일본인 객도 제 고집을 세우지 않고 밖으로 총만을 내밀어 무턱대고 한 방 쏘고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자연 짐승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주인은 두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산 속에서는 그게 날짐승이건 길짐승이건 심지어는 한 마리의 벌레까지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한 도덕처럼 돼 있다는 것. 특히, 외지에서 온 손님으로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리 떼를 만났을 때 수중에 총을 가졌더라도 직접 쏘아서는 안 된다는 것. 정 이리들이 성화를 먹이면 그저 한 방 허공에다 대고 총 소리를 내는 정도로 쫓아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것. 얼핏 직접 쏘아 버리는 게 이리 떼를 쫓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 물론 그것도 인가 근처라면 한두 마리 쏘아 넘어뜨린대도 무방하지만 만일 무인지경에서 섣불리 총질을 했다가는 봉변을 당한다는 것. 이리란 놈은 다른 짐승이 다 그렇듯이 화약 냄새를 몹시 싫어하고 겁내기도 하지만 한번 피를 본 뒤에는, 그것이 자기네의 피건 어떤 다른 것의 피건 한 번 보고 냄새를 맡은 뒤에는 달아나기는커녕 되레 미친 듯이 달려든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여기서 주인은 얼마 전 어디선가 있은 일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국경선을 지키는 군인 셋이 술이 취해 가지고 밤길을 가다 이리 떼를 만났다. 추근추근하게 굴면 허공에다 대고 총 한 방씩을 쏘아 가며 가까운 인가를 찾아 들어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이들은 그만 술 취한 김에 이리 떼를 향해 불질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결국 총알 다하는 것이 목숨의 마지막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거기에는 세 자루의 총대와 함께 찢긴 옷 조각이 몇 흐트러져 있을 뿐이었다.
주인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밖에서 또 이리라도 나타난 듯, 개들이 다시 몸을 피하며 짖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인의 밖을 향해 지른 소리와 일본인 객이 좀 전처럼 권총을 빼들고 자리에서 일어 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번엔 주인이 손을 내밀어 막지 않았다. 일본인 객이 일어섬은 좀 전처럼 허공에 대고 한 방 쏘려는 것이려니 생각한 듯.
그러나 어두운 등잔불 속에서도 이 쪽으로 돌린 일본인 객의 갑작스런 흥분으로 해 핏기 걷힌 얼굴에는 좀 전과는 달리 분명히 무엇을 경멸하는 듯한 빛까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거 다 변변치 못한 인간들이기에 한 놈도 아니고 세 놈씩이서 그것도 총을 가지고 잡혀 먹히지, 될 말이냐고, 자기는 군대에 있을 때에도 사격에 손꼽히는 명수였지만 이제 대일본 제국 신민의 솜씨를 한번 뵈어줄 테니 자세히들 보라고. 일본인 객의 얼굴에는 벌써 어떤 말못할 살기마저 내돋쳐 있었다.
그제서야 주인은 약간 놀란 빛으로 손을 내밀어 일본인 객의 앞을 막으며, 자 그러지 말고 앉아 술이나 한 잔씩 더 하자고, 다른 한 손으로 새로 술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객은 그 술일랑 이따가 이리 떼를 격퇴시킨 뒤에 축배로 들자고 하고는 주인의 손을 피해 밖으로 나서고 말았다.
주인은 좀 당황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의젓한 말로 만수 외삼촌에게, 정 저렇게 이리를 쏘아보아야 직성이 풀리겠으면 인가 근처기도 하니 한번 쏘아보게 내버려두자고 했다.
만수 외삼촌은 귀를 기울였다. 이제 들려 올 총 소리에 그러나 총소리는 좀처럼 들려 오지 않았다. 웬일일까? 주인도 귀를 기울이고 있는 눈치였다. 드디어 총 소리가 들려 왔다. 꽤 먼데서, 뒤이어 애 울음소리 같은 짐승의 비명 소리도.
주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거 큰일났다. 꽤 멀리 간 모양인 걸. 어디에 이런 요소가 들어 있었는가 잎은 표한한 빛을 얼굴에 떠올리며 그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만수 외삼촌도 뒤따랐다. 밖은 그 새 대륙 특유의 기후 변화로 부쩍 차진 공기가 얼굴에 와 부딪혀 술 먹은 뒤의 머리를 정신들게 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는 별빛 총총하건만,
주인이 무턱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서 돌아오라고. 그리고 이어서 이상한 고함을 냅다 몇 번 쳤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이리 떼가 되도록 속히 일본인 객 가까이 달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고함인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총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주인이 총 소리 난 데를 향해 빨리 돌아오라는 소리와 함께 예의 이상한 고함을 연거푸 지르며 그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만수 외삼촌도 그 뒤를 따랐다, 들리던 야릇한 비명 소리에 섞여 그 지점을 향해 휘익 몰리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주인이 후딱 발을 멈추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이거 다 틀렸다. 그리고 돌아서 만수 외삼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여기도 위험하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집으로 돌아오자 주인은, 그 객 미친 사람이 아니었느냐고, 글쎄 일껏 일러줬는데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느냐고 하면서, 다시 그 어수룩하고도 선량한 얼굴로 돌아온 눈에 눈물기까지 띄우는 것이었다.
만수 외삼촌은 너무나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라 지금 일어난 일이 거짓말같이만 느껴졌다. 좀 전까지 그렇게 당돌하게 앉아 있던 사람이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될 말인가. 그는 주인더러 총 소리 나던 곳에 인가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일본인 객이 마지막 총알을 다 쏘고는 거기 어디 인가로 뛰어들어갔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주인은 십 리 안짝 이 근방에는 인가라곤 없다고 했다. 그냥 만수 외삼촌은 인가가 없으면 없는 대로 거기 나무라도 있어서 그리 올라가 있을 것만 같은 것이었다.
좌우간 날이 밝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날만 새면 뛰쳐나가 보리라. 그 객이 어느 나라 사람이건, 무엇을 하러 이런 데로 왔던 자이건, 그리고 우연이라면 예서 더 우연한 일이 없을 하룻저녁 그것도 서너 시간밖에 더 안 되는 동안의 나그네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이 살아 있어 주기만 바라는 마음이었다. 설사 그 사람이 어떤 자만의 웃음을 띄우고 어떤 누구를 깔보는 태도를 하고서라도.
만수 외삼촌은 진정 그래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날이 새기까지 앉아 기다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며칠째의 피로에다 아까 먹은 술기운이 차차 되살아 올라왔다 사라지면서 그만 저도 모르게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만수 외삼촌이 눈을 떴을 때에는 벌써 날이 환히 밝았을 때였다. 늦었구나 하고 일어나는데, 집주인은 벌써부터 만수 외삼촌이 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눈앞에 무엇인가를 내 뵈는 것이었다.
권총이었다. 묻지 않아도 어제 그 객이 가졌던 권총이었다, 정말 죽었구나 하는 실감이 그제야 만수 외삼촌의 가슴에 와 안겨졌다.
주인은, 이것 하나가 떨어져 있을 뿐 그 근처에는 머리칼 한오라기 헝겊 한 조각 남겨져 있지 않더라고 했다. 만수 외삼촌은 순간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과 함께 뒤이어 그 짐승을 향한 어떤 증오감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주인은 그냥 손바닥 위에 올려 은 권총을 만수 외삼촌 앞에 내민 채 자세히 보라고 했다. 권총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주인은 다시 여기에 난 것이 무슨 자린지 아느냐고 했다. 눈여겨보니 거기에는 본시 그랬을 리 없는 자국이 세로가로 무수히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슨 줄 같은 것으로 함부로 긁어 놓은 것 같은 자국이. 주인은 만수 외삼촌의 눈앞에서 권총을 한번 뒤집었다. 거기에도 같은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이게 뭐냐고, 만수 외삼촌이 권총에서 눈을 들자 주민이 사뭇 침통한 어조로,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 자국이오,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리의 이빨 자국? 음,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 자국이라?
다음은 주인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좋았다.
이리도, 그러면 이리까지도?
-(백 민)(1950. 2)
'현대단편소설2'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 피하의 안개 (0) | 2022.04.08 |
---|---|
120. 잔등 (0) | 2022.04.08 |
118. 운수 좋은 날 (0) | 2022.04.08 |
117. 어둠 속에 찍힌 판화 (0) | 2022.04.08 |
115. 술 권하는 사회 (0) | 2022.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