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3
이튿날 아침 내장사 뜰에서 좌, 우익을 갈라 잠시 군사를 조련한 다음 30여 리를 행군,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다시 진영을 정비하였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의병진은 다음날 첫새벽에 빗속을 행군, 정오경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많은 주민들과 이속들이 나와 의병들을 환영하였으며, 군수 이건용(李建鎔)은 최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했다. 이를 전후해서 채영찬(蔡永贊), 황균창(黃均昌), 김갑술(金甲述), 양윤숙(楊允淑) 등이 인근 각지에서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의병진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최익현은 여기서 의병진을 재정비하고 부서를 정해 임병찬을 참모장으로 하고 김기술(金箕述), 유종규(柳鍾奎), 강종회(姜鍾會), 이동주(李東柱), 이용길(李容吉), 손종궁(孫鍾弓), 정시해(鄭時海) 등을 부장으로 각기 임명,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기도 하였으나 의병은 산골짝에서 이들을 일거에 격퇴시켰다. 그 후 의병진은 그곳 순창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인 6월 8일 남원으로 진출코자 행군, 정오 무렵 50여 리 떨어진 곡성에 당도,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稅錢), 양곡 등을 접수하였다. 그곳 군수 송진옥(宋振玉) 역시 의병진을 영접하였고, 또 주민들도 적극 협조해 왔다. 그러나, 남원에는 이미 의병의 공격에 대비, 방어태세가 견고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이튿날 의병진은 다시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의병에 합세하려는 삼방(三坊)포군 1백여명이 구암사와 백양사(白羊寺)에 주둔하고 있다는 전갈도 왔기 때문이다.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병진이 곡성으로 진출한 틈을 타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에게 지원 요청을 하여 의병 '토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를 탐지한 최익현은 이건용을 의리로 타일러 오히려 그를 의병진에 가담토록 해서 전부장(前部長)으로 삼아 모병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의병진은 거의 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무기와 군사를 모아 거의 초기에 80여명에 지나지 않던 병력이 이때에 와서는 9백여명에 달했고, 그중 상당수가 소총 등의 화기를 소지하게 되어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호남 일대가 최익현 의병의 활동 이후 의기로 가득차 의병진의 사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 11일 아침,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선유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한국 통감부의 괴뢰로 전락한 정부에서는 전라북도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6월 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하여 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客館)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의병진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본군인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뒤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군이 아니라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
그러나 전주진위대와 남원진위대는 최익현의 이와 같은 호소를 묵살한 채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避戰)자세를 역이용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의병측은 이미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고 사생취의(捨生取義)를 결행, 응전없는 상태에서 맹공을 받게 되자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일시에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순창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가 22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에워싼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단식과 최후
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 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병진의 유준근(柳濬根), 이식(李식) 등 의병 9인이 이미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6년 10월경 그는 풍증이 발병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풍증과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시신의 운구와 장례식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 20일 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문집으로는 《면암집》, 면암속집 등이 있다.
사후
묘소 《최익현선생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최익현의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해방 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소재 묘소에 다시 세워졌다.
시호 없이 1928년 이왕직에 의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시호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종묘에서 출향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서[편집]
《면암집》
《면암속집》
사상과 신념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개조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개화된 일본도, 금수시(禽獸視)하는 서구 각국과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그는 동학 농민 운동의 농민군과 동학도들을 도적이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왕조 질서를 뒤흔들려는 동학(東學)도 '동비'(東匪)로밖에 간주되지 않았다.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이 나오면, 동문이자 친구 김평묵과 함께 번번히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이들은 그가 죽은 직후인 1907년(융희 1) 순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로 격상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도 않았다.
농민군 출신에 대한 반감과 의심
의병활동을 하면서 최익현을 포함한 유생들은, 유생들과 농민들 사이의 협력에 대한 요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가졌던 적개심과 공포가 뒤섞인 업신여겨 보는 태도를 전혀 극복할 수 없었다.[7] 최익현은 농민 출신들의 잔인함과 호전성, 살인, 도둑질, 무례함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정재식은 이를 두고 '최익현은 '살인적이고 도둑질을 자행하는 농민 무리들 을 반대하며' 라는 격렬한 글에서 보인, 16세기 독일의 "위험하고, 해로우며, 극악무도한 농민반란자들을" 남모르게 혹은 공공연하게 치고, 죽이고, 찌르라" 주장한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보였던 감정적인 반응과 비슷한 반응'이라 평하기도 했다.
기타
그는 그의 스승 이항로의 도덕적 원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단호한 면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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