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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최익현(1/3)

by 자한형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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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최기남(崔奇男), 자(字)는 찬겸(贊謙), 아호(雅號)는
면암(勉庵)이다. 김기현과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3년 음력 10월과 1874년 음력 11월, 이토록
두 차례씩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끝내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러 번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과
단식 후유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개화파를 반대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와 남인, 북인 채용 정책에 적대적이었고, 고종의 황제 칭호 격상을 옳지 않게
여겼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초반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범리(嘉范里)에서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
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익현으로 고쳤다. 최익현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수학과 소년기
14세 때 경기도 양근군 벽계(蘗溪)에 은퇴한 노론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대학장구(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이항로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되었고,
나중에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스승인 이항로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화서는 최익현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낙경민직'(洛敬민直)이란 글을 주면서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구국부도'(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유인석, 김평묵 등을 만나게 된다. 1855년(철종 6년) 2월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강경(講經)에서 1등, 바로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관료 생활과 정치 활동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철종 재위 중인 1855년(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 이조정랑(吏曺正郞),
신창현감(新昌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과 선정(善政)으로 칭송되었다.
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벗어나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등도 등용하자 그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8년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그가
표방한 민본주의 성향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0년(고종 7)에 승전을 지냈다.
대원군 비판
경복궁 중건, 당백전, 서원 철폐령 문서를 참고
스승인 이항로의 생존 시에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가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으므로
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이항로 사후에는 대원군에게 비판적으로 변하게
된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를 촉구하고,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생계 문제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물가 인상과 재정의 파탄 등을 지적,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실정(失政)이라며 상소하였다. 그는 경복궁 중건의 대규모 공사에 많은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어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가 심함을 들어 경복궁 중건을 반대하였다. 그해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1868년 10월 다시 경복궁 중건을 무리한 토목공사라며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사간 권종록이 이를 너무도 무례하다며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를
10월 20일을 기하여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최익현은
10월 28일을 기한즉 직책 승진한지 8일만에 돈녕부 도정직을 사퇴한다. 그 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대원군에 대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1871년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들의 철폐는 존주대의와 면학분위기를
망치는 것이며 철폐령을 취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원군 축출에 협력
한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자 한 명성황후는 사람을 보내 그와 교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3년(고종 10년) 10월 돈녕부도정으로
재직 중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고종이 성년이며 대원군이 섭정을 할 이유가 없음을
상소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그의 상소에 민씨 일족과 고종이 적극 지지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승정원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된다.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그는 이어 조정 대신들이 일처리를 잘못하여 번잡하다는 것을
지적, 상소한다. 이에 의정부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 영돈녕부사 홍순목 등이 사직
상소를 올렸고, 삼사에서는 최익현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높이 사서
일약 호조참판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상소문이 무례하다는 비난이 빗발쳤고 대원군계
인사들은 그를 규탄했다.
영의정 이유원 등과 함께 종실 흥선대원군 독점 전횡 체제 비판 작전에 전격 합세를 한
그는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대원군을 공격하여 결국
실각시켰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가선대부로 승진, 돈녕부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와 영상 이유원이 공동 시행한 흥선대원군 하야 운동은 부자이간의
행위라며 대원군 계열 인사로부터 비판받았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돈녕부도정에 전임되었다가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하자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11월 의금부에서 국문을
한 뒤,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윤휴, 이현일 복권 반대
1873년(고종 10)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최익현과 김평묵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최익현과 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873년(고종 10) 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인 윤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과 김평묵은 남인과
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였다. 결국 윤휴, 이현일 등은 김평묵과
최익현이 모두 죽은 뒤 1907년(융희 2년)에 가서야 복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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