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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최익현 2(3/2)

by 자한형 2021.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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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개화 반대 운동

민씨 정권과의 갈등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1876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을 해서는

안되는 다섯가지 이유를 적어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5()로 된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렸다. 척사소에서 그는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정부의 수교방침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그 무렵 모든 개항반대상소

중에서도 가장 잘 지은 내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외면되었고, 그는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4년간 위리안치된 것이다.

최익현이 반대한 개항 후의 사태는 개화, 주화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문물을 앞세운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으로 나타나 그의 예견은 적중한 것이었다. 특히 외국 자본의

침투와 경제적 진출은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그에 더하여 정치적, 군사적 침략이

강화되어 경향(京鄕)의 백성이 정부의 개화시책을 비판하는 속에서 위정척사의 배일운동이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까지 되었다. 1879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뜻을 함축한 표현이었다.

갑오경장 반대 운동

최익현은 계속 서구 문물의 유입을 나라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규정, 척사운동에 앞장서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조시키고 외세의존세력을 규탄하여 마지 않았다. 1894년의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외세의 내정 간섭은 부당하다며 성토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외세의 내정간섭이라며 규탄하였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그는 고종으로부터 갑오, 을미년의 의병항전에서는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진회대죄소'(陳懷待罪疏)를 올려 의병들을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 일컬어 거의구국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정당한 거병을 해산, 탄압할 이유가 없다며 항거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때에도 각처에서 의병이 발생,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유사의 직책을 내려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게 하였으나 해산 설득을 포기한다.

단발령 반대 운동[편집]

18951230(음력 1115) 단발령이 시행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 불감훼상'이라는 이유로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최익현은 유림 거두들과 연명하여 단발령은 야만적인 행태라며 규탄했다.

그러나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 등은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1896년 초, 유생들의 단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유길준은 유생들의 시위의 배후로 최익현의 체포를 지시한다. 유길준은 유생들의 단발에 앞서, 유림들과의 몸싸움도 불사하고 최익현 체포를 위한 순검 1개 부대를 보냈다. 그는 단발령 반대 여론을 주도하던 최익현을 경기도 포천군 영평에서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이후 유길준은 유생들에 대한 단발을 감행하다. 유길준은 직접 최익현에게 고시문을 보이면서 법령대로 단발을 강행하겠다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질타하며 몸부림쳤다. 유길준은 가위를 들고 와서 최익현의 머리카락을 삭발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완강하게 몸부림쳐서 유길준의 삭발 기도는 실패하고 만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비판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 대해 정부의 대신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무리들이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정부 관료에게 압력을 행사하거나 모함을 할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민권당, 민권지당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최익현은 18981210일의 국내 현안에 대한 상소문 중 7번째 조항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혁파를 건의했고, 이들을 변란을 조장하는 발판으로 규정했다.[3] 최익현에 의하면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조선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모임에 대해서도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3]'라고 지적했다. 최익현은 집회가 폭력시위로 변질할 우려가 있다는 점도 같이 지적하였다.

그는 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해산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정사와 형벌을 밝히고 교화를 힘껏 시행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과연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정사로 시종여일하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3]'라 하였다. 최익현은 이권단체가 사사로이 이익을 챙기는데 정부 관리들에게 압력을 행사할수 있다는 점과, 이권단체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일수 있다고 보았다.

최익현은 18981210일의 현안 상소의 7번째 조항에서, 고종에게 다른 이들을 시켜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산할 것을 같이 진언한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다'며 고종이 직접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해산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악역으로 내세워 이들을 해산시킬 것을 강조했다.

백정 박성춘의 연설을 그는 못마땅히 여겨 패거리들의 작당으로 규정, 비판하였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1898(광무 1)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제수되어 입궐하고, 이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의정부찬정(贊政)이 되었다. 그해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위정척사론의 전파를 추진했다. 세상이 혼란한 것은 인륜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 굳게 확신하고 정론과 정학의 수호를 위해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침탈을 보고서는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를 올려 외세의 척결과 국권수호의 방책을 역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고, 한성부 거리에서 당시 내각 담당자들을 규탄, 이들의 파면과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을사늑약 반대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를 늑약으로 간주,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의 늑결을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 조약 체결 당사자 5명의 처단을 주장,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불법 조약의 폐기, 취소와 의병항일전을 천명하였다. 또한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투쟁을 호소하였으며, 포고문과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충남 홍주의 유학자 민종식(閔宗植)이 구성한 의병진과 연대, 공동항쟁할 호남의병진의 편성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19061월에 충청남도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 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모임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약했던 경남 합천의 명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10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제천에서는 유인석 등도 거병하였다.

19062, 자신의 문하생이자 이미 독립하여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 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거사 장소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정한뒤, 최익현은 담양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奇宇萬), 이항선(李恒善), 장제세(張濟世), 조안국(趙安國) 등 호남의 명유지사 50여명을 소집, 이들과 회동하여 항전 방책을 논의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는 한편, 순천, 낙안(樂安),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 등 호남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거병함을 밝히고 양심적인 지사들은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의병의 군율(軍律), 의복제도(衣服制度), 규칙(規則) 등을 작성하고, 임병찬이 주관이 되어 무기를 비롯한 각종 군비를 마련하였다.

의병 활동과 최후 의병 봉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된다. 190664일 아침 최익현은 최제학(崔濟學), 고석진(高石鎭) 등 문인 수십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 강회를 연 뒤 거사를 일으켰다. 그때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을 맹세하였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

190664일 최익현의 호남의병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 당일에 태인 본읍으로 진군한 뒤 향교에서 잠시 유진할 때에 발표된 최익현의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발표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도()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노생의 범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화열국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제 우선 귀국(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논한 다음에 귀국이 반드시 망하게 되고 동양의 화가 그칠 때가 없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

이어 그는 강화도 조약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조선에 대해 '기의배신'(棄義背信)한 일제의 죄상을 16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논술하여 한일 양국을 위해, 나아가서는 동양평화를 위해 일제의 각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의 거병에 제자 문인들과 이날 모인 모든 회중(會衆)이 흔연히 사생을 맹세하니, 최익현은 죽음으로써 국가의 은혜를 갚을 것을 천명하였다. 그 즉시로 80여명이 대오를 편성한 뒤 태인 본읍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의병 전쟁

19066월 중순 최익현 의병진이 태인 본읍으로 진군해 오자,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저항은 엄두도 못내고 도망쳤다. 따라서 의병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고, 최익현은 향교로 들어가 명륜당에 좌정하고 향장(鄕長)과 수서기(首書記)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의병진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태인읍을 출발한 의병진은 30여리를 행군, 당일 하오 정읍에 당도하였다. 이어 정읍군 관군과 대결, 결국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의 항복을 받은 의병진은 이곳에서 소총 등의 무기류와 병력을 확보한 다음 다시 행군, 30여 리 떨어진 내장사(內藏寺)로 들어갔다. 이때 흥덕(興德) 선비 고석진(高石鎭)이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여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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