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열림원
나에게는 단점이 적지 않이 존재한다. 단점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치명적인 단점이 몇 개 있다고 느낀다. 그중 내 의도와 달리 상대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공격적인 언행으로 상대방을 깔아뭉갠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을 때 타인의 질문이나 접근에 무반응·무감각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스킨십이 좋아 착착 감기는 둘째 딸이 상처가 많은 편이다. 아빠에게 다가와 노크했을 때 내가 아무 반응 없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며 엄마에게 다가가는 둘째 딸의 모습이 눈에 자주 아른거린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 평가받는 고 이어령 선생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 부채감 때문에 펜을 든 에세이가 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고 이어령 선생이 당시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를 그리워하며 쓴 눈물의 에세이다. "오래전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지 못했다"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한 시대를 풍미한 거대 지성이 딸을 먼저 떠나보내며 쓴 회한의 고백록이다. 시대와 입장은 다르지만 두 딸을 키우고 있는 나에게 큰 영감과 울림을 준 책이다.
이 책이 감동적인 건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빠가 시간을 거슬러 참회와 그리움의 메시지를 진솔히 고백한 데 있다. 책 곳곳에 딸과의 추억을 아련히 기억하고 소환하는 현실 아빠의 그리움이 애절하게 녹아 있다. 딸의 꿈, 신앙, 첫사랑, 결혼, 이혼, 상처, 회복, 죽음 등의 테마를 그리움의 관점에서 기술한다. 실제 시점과 글 쓰는 시점 사이에 긴 시간의 세례로 깎아지며 형성된 해석과 깨달음이 저자의 애잔한 글을 추출하고 수식한다. 딸 잃은 아빠의 그리움과 거대한 지성의 양립이 저자의 명품 문장을 통해 따뜻하고 묵직한 한 권의 편지글이 되었다.
부모에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다는 건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다. 언어는 그 고통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다. 저자와 저자의 딸 모두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즉 저자는 딸과 손주를 먼저 보낸 것이다. 그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책에는 살아생전에 딸의 마음을 다 받아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아빠의 절절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뒷부분에는 딸 이민아 목사와 아내 강인숙 교수의 편지를 담았다. 말미에는 딸 이민아 목사가 죽기 직전에 인터뷰한 <조선일보 why> 기사를 실었다. 저자(아빠)의 마음과 대비하여 딸의 생각과 견해도 살포시 추가함으로써 일방적인 편지글이 아닌 아빠와 딸이 주고받는 대화의 형식으로 편집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의 고밀한 인문학적 통찰이 편지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 니체, 사르트르, 보부아르, 데카르트, 볼테르 등 인류 지성사를 수놓은 사상의 거장들이 한 토막씩 소개된다. 지식인의 고매한 지적 자랑처럼 읽히지 않고 딸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의 수식어로 위치하기에 적확하고 아름답다. 특히 이런 지적인 대화를 딸과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아름다웠다. 나도 책 관련 파워블로거로서 내 평생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작품을 딸과 함께 읽고 토론하고 싶은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로망의 정점을 찍게 해준 것이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이 책은 저자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 『지성에서 영성으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두 책의 집필 목적이 모두 저자의 딸인 이민아 목사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자가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소식은 국내 지성계에 커다란 뉴스였다. 일본에서의 세례식은 국내외 전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정도였다.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해온 저자가 결국 신을 받아들인 계기가 바로 딸 이민아 목사의 실명 위기 때문이다. 딸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그럼 당신을 믿겠노라고. 저자는 평생 자신이 부정해온 하나님께 기도했다. 결국 기적같이 딸은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저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시대를 풍미한 거대한 지성조차도 물질적 풍요를 채워주는 것이 자식 키움의 우선이라고 잘못 생각했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한편 위안도 되었다. 그만큼 삶과 사랑은 쉽지 않은 방정식이다. 본질의 선상에서 사랑은 언어, 관심, 미소 등의 일상의 작은 것들에 의해 발현된다. 사십 대 중반의 나이에 영업차장의 직급을 감당하며 회사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두 딸의 속삭임은 얼마나 큰 시그널로 다가오고 있을까. 저자의 위로 메시지가 내 눈을 적시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오늘 밤 두 딸을 재우면서 항상 해주는 기도를 마칠 때쯤 반드시 '굿나잇 키스'를 건네야겠다. 딸을 가진 아빠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만일 지금 나에게 그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래 민아야, 딱 한번이라도 좋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자라 민아야."
여기서 민아는 이어령씨의 딸 이민아 목사다. 그는 지난 2012년 암으로 세상을, 아버지 이어령씨의 품을 떠났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고(故) 이민아 목사의 3주기를 맞아 그가 펴낸 산문집이다. 딸의 유년시절, 읽고 쓰는 일에만 몰두해 '굿나잇'을 외치는 딸에게 늘 등만 보여주던 아버지는 뒤늦게 딸을 향해 매일 밤 굿나잇 키스를 보낸다. 이 책은 그가 지난 3년간 딸을 향해 보낸 편지들, 굿나잇 키스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말했다. "딸을 잃은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바치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고.
이야기는 딸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아기집에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아내의 입덧을 보고 체한 줄 알고 활명수로 축배를 들 뻔 했던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일화들을 소개한다. 어린 딸을 가슴에 안고 여행하면서 딸의 심장 뛰는 소리에 감동한 이야기, 딸의 첫사랑과 결혼식을 보며 느낀 아버지 마음, 손자가 태어나면서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 이야기, 딸의 투병으로 영혼의 눈을 뜨게 된 이야기 등 시간 순서대로 나열된 에피소드들은 아버지, 할아버지로서 그의 감정을 가감없이 담아낸다. 그리고 딸의 죽음 이후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된, 삶과 죽음을 넘은 진짜 사랑의 가치 비로소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슬픔만 남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씨앗과도 같은 것이다. 슬픔의 자리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떨어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 삶을 더 푸르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추임새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 글들은 단순 추모 산문이라기보다 슬픔을 더 깊은 사랑으로 만들어 세상을 품은, 그래서 다른 이들에 오히려 희망을 전하는 한 아버지의 아름다운 고백이 된다. 민아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는 새로운 아침이 온다는 희망을 품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이어령 교수의 강의를 보다가 그의 딸인 이민아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영문학도에서 시작하여 변호사, 검사를 거쳐 목사가 되고, 아프리카에서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을 보살피고 귀국 후 목회활동을 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다. 강의를 보고 난 후 이민아 목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여기저기 검색하다가 이어령 교수가 딸의 죽음을 애도하는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이 책을 찾아 읽었다. 이민아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 딸과의 일화, 아버지로서 느낀 감정들,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들을 이어령 교수 특유의 문법으로 담담하지만 감동적으로 쓴 책이다.
저자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난 후 나와 똑같은 슬픔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신도 그랬냐고”라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이 책을 펴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의 딸에게 바치는 글이면서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이에게 바치는 글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살아서 못다 한 말]에서는 딸의 출생, 어린 시절 딸과의 추억, 딸의 사랑과 이른 결혼, 그리고 어머니가 된 딸, 딸의 실명 위기와 암 투병 과정에서의 고통과 극복, 기독교인으로서의 세례, 그리고 딸의 죽음 등 딸의 일생을 다양한 일화 중심으로 연대기 형식으로 정리하면서도 곳곳에 저자 특유의 문화적 담론까지 언급하고 있다. 2부 [오늘만 울게 하소서]는 딸을 그리워하는 저자의 시로 이루어졌으며, 3부 [빨간 우편함의 기적]에서는 저자와 그의 부인이 딸과 주고받은 편지와 이민아 목사에 대한 언론사 인터뷰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 부모든 자식을 먼저 잃었을 때의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저자 역시 인간이기에 자식의 죽음을 겪으면서 느낀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의 딸이 아버지와 같이 놀고 싶어 서재 방문 앞에서 아버지를 불렀을 때, 한창 공부에 골몰하던 아버지는 등을 보인 채 이를 어쩔 수 없이 무시하곤 했다 한다. 그 후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고 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달래기 위하여 글을 쓰고 이를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생각이 곳곳에 스며있다. 그것을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학가로서의 저자의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보통의 아버지였으면 마음은 있어도 표현 능력의 한계로 이렇게까지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이 시대의 최고 지성이라는 저자답게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애도하며 농도 깊은 가족애를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 가족애를 넘어선 인간과 생명에 대한 성찰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광범위한 저자의 지적 능력과 사고력이 상상의 날개를 달고 더 넓고 깊은 경지로 나아가게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족과 우리 삶에 대한 성찰을 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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