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울다 -둥근 돌의 소소한 일상[제럴드 싯처]
이 책은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경험과 그것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들에 대해서 말한다.
저자인 제럴드 싯처는 한순간의 사고로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을 잃었다.
이 책은 저자의 상실이라는 비극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경험과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상실은 개인에게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저자와 동일한 경험은 아닐지라도 책의 내용에 많이 공감되었다.
아프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읽기가 힘들기도 했다.
위로도 되었고 인생의 한 과정을 잘 이겨냈고 버텨낸 자신에게 격려도 되었다.
상실은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상실 자체를 되돌리거나 바꿀 힘은 없다.
하지만 그 상실 앞에서 선택할 수는 있다.
그 선택에 따라 상실로부터 시작된 우리의 경험에 변화를 가져다주고
성장과 성숙을 허락하며 은혜와 치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p.30
나는 상실이라는 경험이 감히 요모조모 저울질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가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문이다.
모든 상실은 나쁘다.
어떤 면에서 나쁘냐가 다를 뿐이다.
또한 어떤 것이라도 두 경우의 상실이 똑같을 수는 없다.
상실은 어느 것이든 고유한 면면이 있어서 그 고통 역시 특별할 수밖에 없다.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든 이런 상실은 곧 그 상실을 겪는 사람에게는 재앙이며, 파괴적이고 결과가 누적되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속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85
그러나 이런 깊은 슬픔은 영혼이 건겅하다는 걸 알려주는 징표다.
분명히 말하는데 영혼이 병들었다는 징표가 아니다.
슬픔은 병적인 것이나 숙명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슬픔은 피해가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껴안아야 하는 무엇이다.
...
슬픔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자신이 진정 비참함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또 슬픔은 자신 때문에 또는 다른 이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이 감정적인 고뇌를 알리는 수단이다.
슬픔은 숭고하며 은혜롭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애통할 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자들로 성장한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세상의 고통을 체휼하며 그와 동시에 세상의 치유를 기대하는 자들로 성장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슬픔은 우리 영혼에 유익하다.
p. 93
은혜의 선물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는 상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러나 삶은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희생 말이다.
행복하다는 표현의 의미가 전과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삶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p. 127
하나님의 용서는 그분이 우리의 상실을 취하여 축복이라는 형태로 돌려주실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은혜의 사역은 상실 그 자체를 없애거나 상실에 따른 결과를 바꾸지는 않는다.
은혜는 도덕 질서를 바꿀 수 없다.
나쁜 건 어떻게 해도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나쁜 상황에서도 선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은혜는 악을 취해서 그것을 선한 결과가 나오는 무언가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취하신 일이다.
p. 176
희생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진 잘못을 정의나 복수나 다른 무엇으로도 뒤집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용서의 과정은 시작된다.
용서는 희생자들을 상실에 따른 결과에서 구원해주지 않는다.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삶을 되돌려놓지도 못한다.
희생자들은 과거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
재앙처럼 찾아온 상실인 경우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돌아갈 방도는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희생자들은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파괴의 악순환을 끊기로 선택할 수 있으며, 잘못된 일을 계속 행하는 대신 옳은 일을 행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용서는 단순히 옳은 일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용서는 상처를 주는 대신에 치유를 가져온다.
깨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증오가 있던 곳에 사랑을 심는다.
어떻게 보면 용서가 공정함이나 의로움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들이 공정함만 있는 세상에 살기보다 자비가 있는 세상에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같다.
삶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버겁다.
그들은 더 버거운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p. 179
용서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규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그저 용서할 줄 아는 보통의 행복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자신들이 직접 원수를 갚고, 정의를 실현하고, 모든 잘못들을 응징하기보다,
단순히 책임감 있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선택한다.
그들은 필요한 이들에게 약간의 은혜를 나누려고 애쓴다.
상대방 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상처 입은 이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 널린 그 많은 악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p. 250
3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날의 사고는 나를 당황케 한다.
그 일로 많은 유익을 얻기는 했지만, 세상에 있는 아무 좋은 것이라고 해도 사고 자체를 좋은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날의 사고는 내게 끔찍하고, 비극적이며, 악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나 외에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겪은 결과로서 유익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비극 자체를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단언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의 해악성과 그 결과가 가질 수 있는 유익성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 둘이 서로 같지는 않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후자가 전자에게 합법성을 부여하거나 정당화하거나 선한 것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최고의 선물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여러가지 상실감을 갖고 살아간다. 상실감에 대한 크기의 비교, 그 수치의 차이는 그 누구도 비교할수 없는 일이다.
내가 오늘 시험을 못 본것.
아침부터 남편과의 다툼.
친구와의 갈등.
가족들과의 불화.
교회서의 의견충돌.
면접에서의 불합격등등...
우리에겐 하루에도 몇번씩 수없이 많은 상실감이 다가오며, 그 상실감의 크고 작음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 목사님의 갑자기 다가온 상실감은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살아가면서 제일 큰 아픔과 상처. 상실감일거라 생각이 된다.
아내. 두딸.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며, 그 가운데서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힘을 내며, 자신의 상처와 상실감을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 안에서 고통의 문제, 상실의 문제를 극복하고 나아가는 모습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렇게 간략하게 이야기 하지만,
바로 어제 있었던일, 행복했던 아내와의 이야기 나눔, 아내가 좋아하며 앞으로의 비전을 이야기 한것 등등... 문득문득 생각나는 과거로 인한 아픔의 회복은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벽한 회복은 이루어질수 없는 것이다. 회복이란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잊기 위한 노력은 사실 그때 잠깐 뿐이라는것.
상실감을 딛고 일어설수 있는것은 하나님의 은혜위에 서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추스르고,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방향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상실과 슬픔속에서도, 우리는 모든 순간이 가지는 기적을 껴 안을수 있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의 선물을 언제라도 받아 누릴수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현재라는 순간은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가고 없다. 미래는 아직 여기에 없다 그러나 현재는 우리에게 살아있다.” 90p
하지만 그 상실감은 우리의 일상을 정지시키고, 우리의 모습까지도 잃어버리게 만들며, 통제권도 뺏앗아 버린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소중한 관계를 시작할수 있다.
하나님이야 말로 깨어진 나의 삶을 새울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안점감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p199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임하셨다. 우리를 대신해 기꺼이 상실이라는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200p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상실감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나가길 소망해 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쉽게 생각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가 나를 아프게 했다.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일이든 아프다면,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나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분노, 슬픔, 정의에 대한 갈망과는 다르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그것을 표출해서 또 다른 상실감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얼마전 나에게 두번의 상실감이 있었고,
한번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관대함이었고, (부족한 사람인지라 완전한 용서는 아니었나보다)
한번은 그 감정을 표출하여 (나는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였다) 상대방에게 상실감?을 더해 주었던 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나의 마음은 두가지 다 편하지 않았다.
'비문학(인문과학, 사회과학, 철학, 역사,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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