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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민족의 진로

by 자한형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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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진로

김 기 석

1945년8월,동방의 하늘은 말게 개어 있었다.이 갠 하늘 아래 펼쳐진 아시아의 산과 들은 더 한층 푸른빛이었다.동족의 유일한 반도인 한반도에는,오랫동안의 곤욕의 땅을 새로운 영광의 지역으로 바꾸는 역사의 벅찬 세기가 시작되었다.

동방의 하늘과 별을 쳐다보면서 자라난 이 땅의 젊은이들의 기슴 속에는 더 한층 고상한 꿈과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그러나,벅찬 꿈과 희망을 실은 배는 순조롭게 저어 가지 못하고,풍랑에 휩쓸리면서 모진 고난을 겪어 왔다.

우리들은 지금 겨레의 앞길을 올바로 내다보아야 할 시점에 서 있다.배가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듯이,우리도 우리를 인도하는 역사의 별을 바라보면서 용감하게 전진해야 한다.똑바로 걷는 자만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모든 소리,모든 푸념,모든 한탄,모든 앙탈을 집어치우라.우리 앞에는 묵묵한 전진이 있을 뿐이다.인제 뱃머리에는 물결이 한층 더 일고,주위에는 물결이 한층 더 짙다.폭풍과 비와 우뢰와 눈보라와 암초와 유혹하는 인어와……

그러나,이미5000년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 온 우리는 이 새로운 시련과 유혹을 물리치고,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곧장 날아 과녁에 들어가 맞아야 할 것이다.그런데,서구 물질주의 풍조는 우리를 이끄는 역사의 별이 못 된다.기계 문명은 우리를 이끄는 별이 못 된다.겉만 화려한,번화한 도성은 우리를 이끄는 별이 못 된다.백성을 괴롭히는 사회주의 혁명은 우리를 이끄는 별이 못 된다.민족 지상주의나 일민주의도,종교를 비웃는 과학이나,도덕을 무시하는 종교도,우리를 이끄는 역사의 별이 못 된다.

1896년,서 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문을 세우고,독립 협회를 만들고,독립 신문을 간행했다.이 독립 협회 운동은 낡은 한국과 새로운 한국을 갈라 놓았다.낡은 한국은 유구한 국초로부터 삼국 시대,고려 시대,조선 시대를 거쳐 한말에 끝났다.새로운 한국은 독립 협회 운동에서 시작하여3․1운동, 8․15광복, 6․25사변과4․19의거, 5․16혁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낡은 한국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을 졌던 데 반하여,새로운 한국은 자기와 함께 아시아 및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우리를 이끄는‘역사의 별’의 사명이 단순한 민족주의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한국은 자기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면서 아울러 자기가 그 속에 있는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만일 한국의 할 일이 단순한 국권 회복이나 한갓 서구 문명의 모방에 그친다고 하면,우리 일은 이미1948년이나 늦어도1960년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국권을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실시하되,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밝고 덕성스러운 사람이 되어,역사를 진실로 새로운 방향으로 꺾어 돌리는 데 우리 자신의 길이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한국이 알아야 하는 역사적 책임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첫째,흔들리지 않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둘째,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셋째,온 겨레가 다 함께 잘 살 수 있는 복지 사회를 만들고-독립 노선과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와-이 셋이 새로운 한국이 한국 및 세계에 대하여 지는 책임이 된다.

그런데,이 세 가지 일은 어느 때 어느 민족에게나 맡겨지는 공통된 책임이다.우리 나라는 반만 년 역사가 한결같이 첫째 책임 하나에만 얽매어 있었고,유럽에서도 이 셋을 어설프게밖에 더 실현하지 못했는데,이것이 앞으로 한국에 의하여 인도될 때,여기에 역사적으로 새로운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국토가 분단된 우리 나라나 독일의 경우는 우선 국토 통일이 당면 과제이기는 할 것이다.그러나,이 같은 국토 통일은,자세히는 역사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 것이지,그 자체로서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독립 노선과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가 새로운 한국을 이끄는 역사의 별이 되어야 하고,이것이 명의상의 자세만을 보일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보람 있는 역사의 알맹이가 되어 한반도 위에 그 금자탑을 쌓아올려야 한다.

그런데,독립 노선을 비롯하여 이 중대한 세 가지 일이 우리 사이에 잘 이루어지지 않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독립 노선과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를 쌓아올릴 터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그 원인일 것이다.집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먼저 튼튼한 기초가 필요하다.이 기초란,제도나 돈이나 기술이 아니고,그것을 만들고 쓰고 하는 개개인,곧 나와 너일 것이다.

독립 노선을 제1혁명,민주주의와 복지 사회를 각각 제2,제3혁명이라고 하면,나와 네가 진실한 사람으로 고쳐지는 것을 제4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제4혁명이 모든 제도상의 혁명에 선행해야 한다.

공자는 낮잠 자는 제자를 깨워 일으키고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썩은 나무로는 도장을 새기지 못하고,부스러지는 흙으로는 벽을 바르지 못한다.”이는 그 사람됨이 건실하지 못하고는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이 될 것이다.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 나무의 바탕과 흙의 풀기 문제다.약해서 달아나는 군대를 몰고 나가 적과 싸울 수 없는 것처럼,썩고 부스러지는 백성을 가지고 튼튼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는 없다.우리의 병은 제도의 병이라기보다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인품과 사고 방식과 생활 인습에서 온 병이다.나 한 사람의 몸가집과 마음가짐이 나라의 운명에 직결됨을 알라,그 짜는 실로,짜인 천을 알 수 있다고 하거니와,오십 년 후 백 년 후의 한국은,그 날이요 씨인 개개인의 자질에 따라 썩은 무명도 되고 윤기 있는 양단도 될 수 있다.

우리 중에는 입으로 국토 통일을 외치면서도 자기 스스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돌이 되는 자가 없을까?우리 국토는 허리가 동에서 서로 끊어졌거니와,이것은 국제 공산당과 서구 물질주의 풍조가 양쪽에서 가위질해 들어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겨레의 상하가 그 성격과 습성에 있어서 거듭나지 못하는 한,민족중흥이고 경제적 자립이고는 한 마당의 어지러운 꿈이 되고 만다.

한국이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함이란 단순히 제도와 지도자와 정당을 바꾸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이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두운 응달서 나와 밝은 햇볕 아래로 옮아 가는 것을 말한다,돈을 따라가고,권세를 따라감은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못 된다.모략과 중상과 음해를 일삼음은 새로운 햇볕아래로 옮아 감이 못 된다.자기를 높이고 상대편을 낮추는 것은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못 된다.물질주의 풍조에 취하여,먹고 마시고 술취하여 감각적 쾌락에 빠지고 함은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못 된다.

그러나,부지런함은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된다.검박하고 검소함이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된다.서로 좁고 협동함이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된다.사에 앞서 공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이 새로운 햇볕 아래로 옮아 감이 된다.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 같은 새로운 사람으로 쌓아진 굳건한 방파제다.공산주의 공세에 뚫리지 않고,향락주의 공세에 뚫리지 않고,봉건주의 공세에 뚫리지 않고,비관주의 공세에 뚫리지 않고……새로운 형의 인간,새로운 형의 지도자,새로운 형의 민족성-이것이 오늘날 우리 겨레가 지녀야 할 최고의 필수품이다.우리 사이에 이 같은 새로운 형의 인간을 없을까?한국 사람은 먼저 이 같은 인간성의 혁명을 일으켜 이것을 기반으로 하고 독립 노선과 민주주의와 복지 사회를 쌓아올려,자기 스스로 선두에 서서 역사를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는 현세기의 혼미 속에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다.근세 초기에서 그 근원을 발한 서구의 모든 풍조가 놀랍게 밀어닥쳐,그 중에서도 퇴폐적인 요속들이 세력을 떨친다.한국은 지금 얽히고설킨 사상과 습성 속에서,어린이나 어름이 한가지로 걸어갈 길을 잃어버렸다.우리의 걸어갈 길은 첫째 공산주의를 이기는 자유민주주의 노선이고,둘째는 퇴폐적인 풍조를 물리치는 도덕주이이며,세째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물리치는 협동주의,평화주의 노선이다.자유와 도덕과 국제적인 협동과……이것을 돕는 것은 바른 길이요,이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그릇된 길임을 알아야 한다.

이 길은 이미 독립 선언문 속에 밝혀졌고, 3․1운동에 의하여 명확하게 보장되었다.이 길,이 정신이 우리 앞에 있건만,용감하게 거기로 달려 나가지 못하고 한결같이 머뭇거림은 무엇 때문일까?그것은 우리의 영광이 영광만의 아니라,고난과 짝하여 이 고난을 물리치고 올라오는 영광이기 때문이다.우리를 에워싸는 여러 모양의 어두운 연기와 우리들 자신 속에서 피어 오르는 안개 속에서 꺼질 듯 꺼질 듯하다가 용감히 그 위에 솟아올라 푸른 하늘에 연결되는 데 우리의 승리가 있으니,이럴새,새벽 동이 트기에 앞서 어둠이 한때 더 짙어지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다운 산과 들이 펼쳐지는 한반도,아늑한 골짜기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저녁 연기가 평화스럽게 올라가는 한반도,원효와 의상과 이 율곡과 이 충무공과 이 준과 안 도산의 나라인 한반도,그리고,수많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그들의 고난어린 생애를 마치고 지하에 조용히 누워 있는 한반도․…만일 저들이 그 목숨을 바쳐 이 땅,이 백성의 전통을 지켜 내려온 보람이 있었다고 하면,저들이 남긴 뜻을 이어받아 몸을 나라에 바치고 덕을 천하에 폄은,저들의 후예인 우리의 존귀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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