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매체 시대의 책
박 이 문(朴異文)
20세기 전후(前後)문명의 가장 확실한 특징의 하나는 정보 매체의 혁신으로 기록될 것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보 매체는 주로 책으로 대표되는 인쇄물이었고,정보는 표현 수단인 문자의 해독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그러나 오늘날에는 책으로 대표되는 인쇄 매체를 텔레비전,인터넷 등과 같은 전자 매체가 대신해 가고,정보 교환은 문자적 기호의 개념적 의미 해석이 아니라 영상적 이미지의 감각적 접촉이라는 양식을 차츰 더 띠게 되었다.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틀림없이 가속화될 것이다.
현재 텔레비전,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영상 매체와 컴퓨터 통신 매체의 급속한 발달 및 보급과 병행하여 고전적 정보 매체인 책의 발간도 양적으로 엄청난 증가를 보이고 있지만,전자에 비해 후자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음이 분명하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이나 책을 읽기보다 텔레비전 화면 앞에 앉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편지를 펜으로 쓰기보다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보내고자 한다.이러한 경향에 비추어 볼 때,책이라는 형식을 갖춘 정보 매체는 전자 영상 매체로 완전히 대체되어 골동품으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상 매체에 의한 메시지는 순간적으로,그 이미지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은 수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경제적이다.이런 점에서 영상 매체는 책이 갖지 않은 장점을 갖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순간적이고 단편적이며,따라서 반성적이지 못하고 애매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이런 점에서 메시지의 전달은 피상적이다.활자로 된 책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면,그것을 읽고 그 개념적 의미를 능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그만큼 지적 긴장과 시간이 필요하고 따라서 비경제적이다.그러나 전통적 매체에 의한 정보 전달에 치르는 대가는 충분히 보상된다.책을 구성하고 있는 문자 기호의 의미는 영상 매체를 구성하는 기호인 이미지보다 정확할 수 있으며,영상 매체의 기호들이 언제나 제한된 공간과 시간에 구속되어 단편적이고 순간적인 파악을 요청하는 데 반해,하나의 책에 기록된 기호들은 공식적으로 전체적인 입장에서 포괄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시간의 제약 없이 반복적이면서도 반성적으로 해석될 수 있고,따라서 그만큼 깊은 차원의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책의 기호적 의미와 그러한 의미에 의한 정보 전달 기능은 그 성격상 어떤 상황에서도 영상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 기능으로 완전히 대체될 수 없다.
영상 매체가 지배하는 문명은 피상적이고,피상적 문명의 의미는 공허하며,공허한 문명은 곧 문명의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깊은 의미를 지닌 문명과,인간적으로 보다 충족된 삶을 위해서 영상 매체의 완전한 지배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아무리 영상 매체가 발달되더라도 의미 있는 문명이 살아 있는 한 인쇄 매체는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명과 삶이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채의 기능을 의식하고,보다 나은 책을 더 많이 창조하고,책에 담긴 풍요롭고 깊은 가치를 발견하고 음미하는 습관을 잊지 않는 노력이 한결 더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