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그리울 때 보라, 한만년의 일업일생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
출판인 구봉(久峰) 한만년(韓萬年, 1925 ~2004) 선생을 대한민국 출판계의 큰 어른이었다고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른’이란 말이 가지는 권위에 대해 요즘 시각으로 보면 섣부르게 ‘꼰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당신은 정말 큰 어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9월14일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41번지에 도서출판 일조각(一潮閣)을 설립한다. ‘일조각’이란 이름은 한만년 선생의 장인 유진오(兪鎭午) 박사가 장차 출판사를 운영할 생각으로 미리 지어놓은 이름이었다. 일조각은 창업 이래 현재까지 한국학 관계 도서 1500여 종을 비롯해 역사학·사회학·법학·의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2500여 종의 책을 출판한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 중 하나이다.
흔히 우리 출판의 역사에서 1950년대를 ‘교과서의 시대’라 하는데,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활자는커녕 종이도 부족하던 시절이었던 터라 당시 출판의 중심은 교과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집’류가 출판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때를 ‘전집의 시대’라고 부른다. 전집 중심의 출판 행태는 분명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국내에 축적된 콘텐츠가 부족한 상황에서 교과서 출판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단기간에 출판의 질과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일조각은 전집 출판이 일반적이던 시대에도 뛰어난 국내 연구자들을 발굴해 단행본 학술서 위주로 출간하며 출판 문화를 선도했다. 내가 아는 한 한만년 선생이 남긴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문화와 전통이 단절되기 쉬운 우리 역사에서 선배 격인 출판사와 신진 출판사들 사이에 충실한 연결고리 구실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한만년과 한홍구
첫 번째 사례가 1970년대 우리 지성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기까지 ‘창비’와 ‘문지’를 지원하고 육성해주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정확하게 30년 전인 1985년의 일이다. 광주민중항쟁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정당성이 결여된 정권의 한계를 감추기 위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같은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한편 문화정책에서 강경 일변도보다 강경책과 유화책을 오가는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이 본격화되던 1985년 무렵부터는 정부가 무차별적이고 자의적인 ‘이념도서 압수 및 서점 수색’이라는 출판 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풀빛의 나병식, 일월서각의 최옥자 대표 등이 연행되었고, 출판사와 서점에 대한 압수수색이 연일 자행되었다.
바로 그때(1985년 5월20일), 우리 역사상 초유의 출판인 자유선언이 나왔다. 정부의 출판 탄압에 맞서 정진숙(을유문화사)·한만년(일조각)·김성재(일지사)·박맹호(민음사)·윤형두(범우사)·전병석(문예출판사)·김경희(지식산업사)·이기웅(열화당)·김병익(문학과지성사)·김윤수(창작과비평사)·서재숙(정우사)·이갑섭(평민사)·박종만(까치)·이재철(홍성사)·김진홍(전예원)·김언호(한길사)·박기봉(비봉출판사) 같은 신·구세대 출판인들이 ‘출판인 17인 선언’을 내놓은 것이다. 이때 정진숙·한만년·김성재 선생 같은 출판계 원로들은 젊은 후배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로 이 선언에 동참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며 “그동안 이번 사건에 직접 관련된 출판사들이나 운동권 단체에 의한 즉각적인 성명서는 몇 차례 있었으나 문화의 기본 매체인 출판을 수십 년씩 맡아온 원로 중진들이 이 시점에서 재천명한 헌법상의 기본권으로서의 ‘출판의 자유’는 우리 문화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한만년 선생은 회갑을 맞이하며 그동안 쓴 글을 모아 〈일업일생(一業一生)〉을 펴냈는데, 막내아들 홍구(역사학자 한홍구)에 대한 걱정을 절절하게 적고 있다.
“좌경으로 낙인찍힌 덕택으로 장래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더더욱 싫은 법이다. 그런 형제나 자매나 친척을 두었다는 이유로 음으로 양으로 불리한 대우를 받을 다른 자식, 친척들 간에 조금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생길까 보아 더더욱 생각하기도 싫다.”
그런데 이 글이 요즘 화제다.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한홍구 교수를 ‘디스’하기 위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부모·자식 사이도 일자리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로 만들어버리는 시대이긴 하지만, 이처럼 자식에 대한 애끓는 부정(父情)이 담긴 글에서조차 자식과 의절하고픈 마음을 읽어내는 난독증 환자들이 이토록 많을 줄 미처 몰랐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취업은커녕 배우자, 일가친척들까지 감시하여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갈 방도마저 막아버렸던 독재정권의 가혹한 처사를 직접 체험하고 증언할 사람들이 아직 많이 생존해 있는데도 말이다.
'일조각' [03176]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길 39 (신문로 2가)
물론 부모 된 마음은 한결같아서 자식이 기왕 학문의 길로 들어섰으면 연구에 보다 충실한 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지사이겠으나 최근 보수 언론들의 보도를 보노라면 한홍구 교수의 강연 내용을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인이 된 아비와 자식 사이를 마치 적대적인 관계라도 되었던 양 대놓고 이간질한다. 한만년 선생이 이렇게 글을 썼던 이유는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다른 자식들의 앞길이 염려되었기에 공안기관 사람들에게 보라고 쓴 글이었다.
한만년 선생은 생전에 일본의 출판계와도 교분이 두터운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일본의 헤이본샤(平凡社)는 서로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헤이본샤에서 한홍구 교수의 대표 저작 중 하나인 〈대한민국사〉(한겨레출판)를 번역·출간하기로 결정한 뒤 알고 보니 일조각 출판사의 막내아들이라고 해서 양측의 인연이 더 깊어지고 한만년 선생이 매우 흐뭇해했다는 이야기는 출판계 주변엔 제법 알려진 일화다.
이처럼 한만년 선생이 자식 하는 일에 정치적 압력이나 탄압이 있을 것을 염려했을망정 자식을 불만에 찬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평화박물관은 잘 알려진 대로 일본군 위안부 문명금·김옥주 할머니가 남기신 7000만원을 종잣돈으로 삼아 만들어졌지만, 여기에 아들 한홍구 교수가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부친이 생전에 별도로 내놓은 기금 1억원도 포함되어 있다. 그 기금이 토대가 되어 지금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사업까지 연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자식치고 스스로 돌아볼 때 불초자(不肖子) 아닌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부모님 생전에 판검사로 출세해 호의호식하다 정계에 진출하진 못할망정 민주화운동 한다고 부모를 염려하게 만들었던 자식이라면 1980년대 대학 생활을 했던 이들 대부분이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서의 이런 감정과 별개로 한만년 선생이 생전에 자식과 의절하다시피 했다거나 형제간에 서로 교류도 없다는 둥 사실과 다른 기사를 남발해선 곤란하다. 한만년 선생의 염려와 달리 다행히도 민주화된 시대를 맞아 슬하의 자식 다섯 중 셋은 서울대 교수, 한 명은 연세대 교수가 되었고, 막내 한홍구 역사학자는 성공회대 교수가 되었다. 한홍구 교수의 모친을 비롯한 유가족들은 2014년 한만년 선생 10주기를 맞아 생전에 고인이 출판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뜻을 기리기 위해 한홍구 교수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학교에 10년 동안 ‘책의 문화사’와 ‘책의 사회사’ 강의를 개설하기로 했고, 운영비로 1억원을 기부했다. 그들의 보도처럼 형제간에 “교류가 거의 없다”면 왜 한홍구 교수가 몸담고 있는 성공회대에 기념 강좌를 개설하도록 기부했을까. 지금 이 시대가 아무리 재벌가 형제끼리 경영권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하는 시대, 남과 북의 자손들이 부모를 앞세워 정치하는, 거꾸로 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아비 그리울 때 보라”는 마음으로 펴낸 고인의 문집을 이렇게 욕된 방식으로 써먹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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