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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피아노야

by 자한형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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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야 김잠복

피아노를 친다. 전날보다 손놀림이 훨씬 좋아졌다는 선생님 칭찬에 자신감이 생긴다. 하얀 건반 위의 다섯 손가락이 오늘따라 더 예쁘다. 그러나 며칠 내로 마련해야 할 회비를 생각하면 몸은 바위무게로 내려앉고 손이 오그라들었다.

여고 시절, 짝꿍 애선이는 피아노를 잘도 쳤다. 음악 시간이면 반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이 피아노를 쳤다. 선생님 대신 왜 그가 피아노를 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다가 음악 시간을 끝냈다. 입이 노래 삼매경에 빠질 때도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건반 위에서 은구슬을 굴리듯 튕기는 애선이 손가락만 지켰다.

나도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절 피아노는 부잣집 자식한테나 가능했다. 약국집 맏딸이던 애선이에 비하면 촌뜨기인 나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시골 동네에서 칠 남매 중 셋째 딸로 컸다. 남아선호사상이 분명했던 부모님한테 딸자식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가시나 공부시키면 겉멋만 든다.’는 말을 주문처럼 읊으시던 아버지. 하지만, 셋째 딸은 그런 주문에 곧잘 반기를 들어 아버지의 심기를 불편케했던 미운 오리새끼였다. 위로 두 언니는 중학교를 마치고 얌전하게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기어이 상급학교를 가겠다며 원서를 아버지 턱밑까지 갖다 대고 허락도장을 우격다짐하는 독한 년이었다. 아버지 주문과 셋째 딸의 반기는 탱탱한 밧줄을 당기며 기 싸움질을 했다.

고등학교 진학원서를 마감하던 날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고 아버지는 아침부터 쇳소리를 쳤다. ‘그럴 수는 없다.’는 오기의 목소리가 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지만 제풀에 꺾이기를 거듭했다. 이제 밧줄을 놓아야 한다고 나를 달랬지만, 다시 펄럭거리는 깃발을 잠재우지 못했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문제집을 산다는 거짓말로 돈을 타내고 읍내에서 아버지 이름자가 들어간 도장을 새겨 손안에 넣었다.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험에 붙은 것은 그리 반가운 일도 아니었다. 당장 내야 할 등록금이 문제였다. 부엌일과 농사일을 온힘을 다해 거들며 통사정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보나 마나 였다. 아버지 앞에 내말은 매번 바람에 뱉은 침일 뿐이었다. 이제 합격통지서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할 판이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날은 마침 건넛마을 외삼촌이 들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K 여고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보내야 한다.’라는 권유가 아버지 마음을 주물렀다. 외삼촌은 나의 구세주였다.

그랬다. 피아노는 감히 쳐다보지 못할 나무였다. 임시방편으로 학교 앞 문방구에 들러 종이 건반을 샀다. 집에 오자마자 오빠 책상 위에 압정으로 고정시키고 양손으로 짚으며 소리는 입이 대신했다. 밤이면 꿈속에서 피아노를 만나 허공에 손사래를 치다가 잠을 깼다. 만약에 내가 피아노를 칠 수 있는 날은 파리가 새일 터고 지렁이도 용이었다.

하굣길, 교문을 나서 오른쪽 담벼락을 따라 걸어간 끝에는 나지막한 담장으로 둘러친 붉은색 이 층 벽돌집을 만났다. 마음에 뭉게구름이 이는 날은 발이 절로 그곳을 향했다. 거기는 엘리제를 위하여음악 선율이 제 맘대로 담장을 넘나들었다.

그날, 대문에 걸린 피아노 교습소란 사각 간판만 보지 말았어도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간판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싶었다. 마음에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발이 먼저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분홍색 가디건을 걸친 여자선생님이 가루분 냄새를 풍기며 반갑게 맞았다. 피아노앞에 나란히 앉아 양손을 건반 위에 올렸다. 떨고 있는 내 손등 위로 따뜻한 선생님의 체온이 전해질 때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은 알사탕을 녹이듯 달달했다. 그때만큼은 신데렐라 공주나 부잣집 고명딸이 부럽지 않았다. 기분은 구름 위를 걸어가 하늘 위를 나비로 날았다. 그래도 회비걱정에는 악보와 건반이 흐릿해지고 손목에 힘이 빠졌다.

아버지로부터 회비를 타내는 일은 엄동설한에 동생 흥부가 놀부로부터 전셋돈을 청구하는 일만치나 힘이 들 것은 자명했다.

해결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문제집’, ‘자습서’, ‘영어사전’ ‘콘사이스를 교대로 등장시켜 거짓말로 둘러댔다. 사흘들이 애먼 학용품과 준비물을 핑계로 목돈을 마련하려니 머리가 다 욱신거렸다.

도가 지나친 거짓말은 오래갈 리 만무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내 앞에 호랑이 할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날, 하늘에서 노란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걸 경험하고서야 끝을 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미 아버지는 이승의 강을 건너가셨다. 고집쟁이 셋째 딸은 손주를 거두며 할머니로 늙어간다. 몸은 젊음이 가시고 기억력은 물속의 흙 인형처럼 조금씩 지워지는 노년에 들었다.

지천명에사 만난 문학이다. 뒤돌아보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온 삶의 일면들이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한때 간절했던 피아노 대신 컴퓨터 화면 앞을 지키며 토닥토닥한글 자판기를 치는 데 정신을 모은다.

되지도 않는 글을 쓴답시고 수해 째 글 마당을 지킨다. 내가 문학회 모임에 나가는 날은 빈집이 설렁하다는 그이다. 고집 센 여자와 인연이 되어 사는 또 한 남자를 불편하게 한다.

새벽잠을 반납하고 자판기 치는 소리로 하루를 깨운다. 알수록 어렵고 두려운 수필 쓰기, 때로는 성에 차질 않아 글밭을 확 갈아엎고 싶은 심정이지만 진득하게 궁둥이를 붙이려한다. 우리네 삶과 맞물려 있는 수필 쓰기, 인생살이의 감동을 격하지 않은 어조로 조곤조곤 풀어내 기록하는 이 성스러운 작업을 어찌 내칠 수가 있단 말인가.

창밖 하늘은 진주목걸이를 풀어놓은 듯 별빛이 총총하다. 서쪽하늘에서 상현달로 지키는 아버지를 향해 감성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는 이야기보따리를 실타래처럼 술술 풀어달라고 주문을 건다.

글 쓰는데 돈 안 들제하고 빙긋이 웃어주실 것만 같은 아버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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