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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비탈에 서 있는 나무

by 자한형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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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에 서 있는 나무 -서양호

8월이라 녹음이 절정이다. 수목들은 초록이 짙어져 검푸른 모습이 되었다.

올여름에는 장마가 수십 년 만의 기록을 세우며 장기간으로 길어진 데다 태풍마저 더해져서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계곡의 수량도 엄청나게 불어나 흐르는 물소리가 산을 울리고 있다.

장대비가 퍼붓듯이 내려 제방을 무너트리며 물난리를 일으키고 여러 곳에서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산사태 발생 지역은 인공의 손길이 미친 곳이 대부분이라 했다. 인간의 무모함과 지혜롭지 못한 욕심이 자연의 뜻을 그슬린 듯해서 안타까움이 앞선다. 폭우로 인한 자연재해를 보면 인간의 능력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비탈이란 산이나 언덕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부분을 일컫는다. 주말마다 가는 등산로 주변에는 경사가 심한 비탈에도 나무들이 울창하다. 기울기가 예사롭지 않은데도 나무들은 굳건히 자라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오랜 장마로 비의 양이 엄청나서 주변의 개천을 따라 난 산책로가 물에 잠긴 날이 많았다. 비가 그쳐서 차단된 산책로가 풀린 날 조심스럽게 산책에 나섰다. 개천에 맞붙어 있는 산자락이 불어난 물살에 많이 파여 나갔다. 비탈 아래쪽에서 자라던 나무들의 뿌리가 어지간히 드러나 있었지만 다행히 나무들이 쓰러지지는 않았다. 비에 흙이 씻겨 저토록 뿌리가 드러났으니 살아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듯해서 그런 모습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그토록 많은 비가 쏟아졌어도 비탈 위쪽의 나무들은 비를 이겨낸 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견뎌온 생명력이 놀랍고 자연에 깃든 창조와 인내력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비탈에 선 나무를 보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라는 장편 소설이 연상된다. 1960년대 사상계에 연재된 황순원의 작품으로 시련과 위기에 처한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 낸 소설이다. 구성 인물들 사이의 갈등 관계를 주제로 한 소설로 인물들 상호 간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자의식의 상처 양상을 다루고 있다. 어려움에 처한 상처 받은 인물들의 모습을 상징하고자 소설 제목으로 나무들 비탈에 사다를 채택했다면 불안정하고 위험하고 시련이 따르는 지형이 비탈임을 은유한 것이지 싶다.

등산을 하거나 산기슭을 지날 때마다 비탈에 서 있는 나무들에 눈이 자주 간다. 비탈에 서 있어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자라는 나무들이 자세를 가다듬게 하는 커다란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이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기울어진 비탈에서도 나무들은 꿋꿋이 자라고 있다. 몸체와 뻗어난 가지들과 잎들을 달고서도 기울어짐이 없이 중심을 잡고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비탈을 이겨내고 곧게 서 있기에 나무들의 기상과 위용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평평한 지면에서 자라는 나무들에 뒤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사투를 치르고 있는 것일까. 지면이 비탈이다. 살아내려는 의지가 평지 나무보다 훨씬 더 강건하지 싶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야만 쓰러지지 않는 것일까. 잡아주는 손길도 없는데 허공을 향해 혼자만의 힘으로 굳건히 서 있다. 그 모습은 자존심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무뿌리는 뿌리대로 땅속에서 서로가 손을 잡아 주고 함께 견디며 격려하며 땅 밖의 몸체를 살아내게 하는지가 궁금하다. 비탈에 선 나무들이 함께 울창하게 자라는 것을 보면 나무들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로가 바람을 막아주고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서로를 잡고 있는지 사람의 눈으로는 알 수가 없다. 하늘로 솟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뿌리는 더 깊이, 더 강하게 아래로 내려가 있으리라. 어쩌면 나무는 비탈을 의식하지 않는 지도 모른다. 아무리 급격한 경사라도 비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지구의 근원을 향해 힘차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싶다. 그들의 생존력이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비탈에 촘촘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기울어진 땅에다 뿌리를 내리는 일은 어렵고 시련도 따랐으리라. 나무는 비탈을 탓하지 않고 평지와 비교하지도 않는다. 자연이 부여한 환경에 오로지 순응하며 살아내고 있다.

사람들도 비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살이에 평평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이 막혀 있고 비탈일 때도 있기 마련이다. 열악한 환경에 처했다 해도 지켜내야 할 지존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상처를 입었어도 비탈에 선 나무처럼 굳건히 살아내는 것이다.

비탈에 선 나무의 뿌리를 잡아주는 또 다른 뿌리가 있다면 부러움의 대상이다. 누구라도 더불어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 희망을 지녀 어딘가로부터 잡아주는 손이라도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비탈에 서 있다 해도 살아내는 일은 오로지 자기 몫이다. 그러고도 또 다른 비탈에 선 사람을 위해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지도 뒤돌아 볼 일이다.

사람은 나이 들면 허리가 굽어지지만 나무는 나이 들수록 허리가 펴진다고 한다. 꼿꼿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나무들은 경건하다. 그들의 자세가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 여름, 장마가 휩쓸고 갔어도 나무들은 아무 일 없는 듯 흐트러짐 없이 비탈에 서 있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던 비탈에 선 나무는 나무를 닮고 싶어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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