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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문학을 위하여

by 자한형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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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하여 -고종석

식물성의 저항

'문학의 죽음'은 이제 상투어가 되었다. 그것은 지난 세기 중엽에 서유럽에서 처음 발설된 뒤, 그럴싸한 이론들의 뒷받침을 받으며 한담 설화의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의 죽음이 바야흐로 임박했다는 구체적 징후는 새로운 세기의 초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문학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학은 지난 세기까지의 문학과는 생김새와 놓여 있는 자리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문학'이라는 말은 '문자'라는 말과 어원적으로 깊게 얽혀 있다. 그것은 문학이 무엇보다도 '기록된 것'이라는 관념을 반영하고 강화해 왔다. 이런 관념에 기대어 문학의 역사와 문자의 역사를 나란히 줄세운다면, 문학의 역사는 55백 년 정도 될 것이다. 쐐기 문자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는 문학이 없었을 것이고, 디지털 형상이 문자를 위협할 미래에도 문학의 자리는 고스란하지 못할 터이다.

그러나 문학의 역사와 문자의 역사가 꼭 포개지는 것은 아니다. 그 단적인 예로 구비 문학이 있다. 지난 55백 년 동안의 문자 시대에도 그랬듯, 그 이전에도 구비 문학은 존재했을 것이고, 그것은 먼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실상 인쇄술의 발명과 보급 이래 문학의 변두리로 밀려난 구비 문학은 대중 문화의 물결을 타고 문학의 한복판으로 거드름 떨며 복귀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와 관련해서 그렇다. 전통적인 의미의 시는 앞으로 더 이상 널리 읽히지 않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지난 세기 후반 이래로 시가 그 힘을 크게 잃었다.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는 살아 있는 유럽 시인을 꼽기 위해 열 손가락이 다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아직까지도 시집이 곧잘 베스트셀러가 되는 한국의 풍경이 유럽인들에게는 매우 낯설 것이다. 그리고 길게 보면 한국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시의 운명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 자체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시는 노래 가사의 형태로 남을 것이다. 그것은 시가 그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시는 원래 노래였으니까 말이다. 시의 영역에서 구비문학이 부활하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다. 물론 노래 가사가 아니더라도, 가사 못지 않게 외형률이 도드라진 시나 감각의 표피를 도발적으로 자극하는 시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의미의 시가 문학의 한복판에 남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쓰일 것이고,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수백만부, 심지어 수천만부가 팔려나갈 것이다. 그러나 깊이 관찰하면, 소설의 운명이 시의 운명과 아주 다를 것 같지는 않다. 팔려나가는 소설들은 현실에 대해 초월적 거리를 유지하며 성찰의 계기를 건네는 본격 소설들은 아닐 것이다. 그런 징후는 지난 세기에 이미 나타났다. 미래의 문학을 주도하는 소설은 멀티미디어에 기생하는 초감각적 소설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생하는 문학' 조차, 프랑스어에서 '기생충(parasites)'이 의미하듯, 고작 '소음'이나 '잡음'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문학의 창작과 수용에서 대중이 득세하게 된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런 현상을 가속화하는 것은 사이버 세계 또는 하이퍼 세계의 등장이다. 순차적인 종이 텍스트와는 다른, 전방위적인 하이퍼 텍스트가 유행할 것이다. 물론 종이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콤팩트 디스크나 카세트 테이프가 종이책을 완전히 대치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이작 아시모브의 재치있는 서술대로, 종이책은 "쓰는 사람의 뜻에 완전히 따르는 카세트"이기 때문이다. 종이책은 사람이 눈을 떼면 이내 테이프가 멈추는 카세트이고, 사람의 눈길이 닿으면 이내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카세트이며, 읽는 사람의 뜻에 따라 빨리 또는 천천히, 앞으로 또는 뒤로, 건너뛰어서, 또는 되풀이해서, 테이프를 돌릴 수 있는 카세트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 곧 디지털망은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디지털망의 특징은 쌍방향성이다. 거기서는 발신자나 수신자, 또는 작가와 독자의 구분이나 위계가 없다. 이것은 언뜻 민주주의의 공간, 직접민주주의의 공간처럼 보인다. 모두가 '네티즌'이라는 똑같은 자격으로 참가하는 그 공간에서 개인의 이름은 사라지고, 감정과 소음은 자유롭게 나부낀다. 문학 평론가 정과리는 이렇게 이상한 형식으로 실현된 문학의 민주주의를 '문학의 크메르 루지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가 엄밀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통신망 안의 직접 민주주의가 운영체계라는 상위 단계 체계의 정치, 경제적 입장에 따라 조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법이 편리해지면 편리해질수록 그 체계와 사용자 사이의 거리는 멀어질 것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렇게 '문학의 크메르 루지즘'은 만인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기구의 통제에 만인을 묶어놓는 '문학의 킬링필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정과리는 경고한다. 사이버 세계가 사이비 세계이듯, 사이버 민주주의와 사이버 문학도 사이비 민주주의, 사이비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그 어원과는 상관없이, 문자의 예술이 아니라 언어의 예술이다. 언어가 존재하는 한 문학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긴장을 유지하는 문학이 미래 세계에서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것은 분명하다. 소설가 이인성은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이라는 글에서, 역사적으로 '늙은' 문학이 '젊은' 디지털 문화 양식에 저항하게 될 21세기를 애처롭게 내다보며, 젊음에 대한 늙음의 이 역설적 저항을 '식물성의 저항'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저항을 그리는 글의 뒷부분은 슬프고 아름답다.

"새로운 문화적 상황 속에서, 21세기의 작가들은 더 이상 떠돌이가 될 수 없을지 모른다. 아무리 떠돌려해도 정교하게 구축된 체제의 회로를 맴돌다 제자리로, 변두리의 오지로 되돌려질 작가란 존재들. 그들은 마침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깊어지며, 들꽃 같은 문학을 피우리라. 외롭고 쓸쓸하게, 어쩌다 찾아오는 누군가와 색깔과 향기로 대화하며 견디리라. 하지만, 그 식물은 서서히 민들레 꽃씨 같은 자기의 미래를 허공에 날려 이동시키리라. 그것이 사방으로 날려가 그 기계적인 체제의 녹슨 빈틈에 뿌리를 내려 꽃의 균열을 만들고, 마침내 동시 다발적인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전조직적 착란을 일으킬 수 있기를 꿈꾸며." (2000.1.5)

문학의 효용성에 대하여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사르트르는 1964418일자 <르몽드>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해 말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될 철학자-작가가 문학의 한계에 대해 내린 차가운 선고였다. 사르트르가 이 말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서유럽에 존재하는 문학과, 인류의 다수가 직면하고 있던 비참한 삶 사이의 간극이었다. 매일매일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위대한 소설마저도 -- 이 경우에는 사르트르 자신의 소설 [구토] -- 이런 현실 앞에서는 가소로운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발언을 통해서 모든 문학을 비난하는 체하면서, 실제로는 유용한 문학과 무용한 문학을 나눈 뒤 무용한 문학을 비판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거기서 겨냥한 것은 구체적으로 그즈음 프랑스에서 힘을 키우기 시작한 누보로망(신소설)이었다. 그는 저개발 국가에서 예컨대 로브그리예(Alain Robbe-Grillet)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서사를 통해 소설적 언술을 해체시키는 로브그리예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의 눈에 세계의 현실과 완전히 절연된 무용한 텍스트로 보였다. 사르트르는 문학의 효용과 한계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진술 밑에, 신소설가들이 구현하고 있는 문학의 새로운 개념에 대한 비난을 깔고 있었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 발언은 신소설가들과 그 옹호자들의 반박을 촉발시켰고, 프랑스 문단은 참여 문학과 신소설의 대립 구도 속에서 격렬한 논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당시 누보로망의 이론가였던 장 리카르두(Jean Ricardou)'문학이라는 이름의 문제'라는 글에서 사르트르의 주장을 이렇게 명료하게 반박했다.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다. 물론 그것은 추문이다. 문학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을 다른 것과 구별짓는 드문 행위들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다양한 고등 포유류와 구별되는 것은 문학을 통해서다.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얼굴이 그려지는 것도 문학을 통해서다. 그러면 [구토]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책(과 다른 위대한 작품들),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한 어린아이의 아사(餓死)가 추문이 되는 공간을 규정한다. 이 책은 그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 어딘가에 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어린아이의 죽음이 도살장에서의 어떤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도 옳고 리카르두도 옳다.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구토],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책을 읽지 않는다면, 그런 깨달음을 얻지도 못할 것이다. 문학이 있기 때문에, 한 어린아이가 굶주려 죽는 것은 추문이 된다. 그것이 문학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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