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 살어리랏다 - 김 진 식
내 앞에 손님이 한 분 나타났다. 속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면서도 기품이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은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귀한 분이 찾아 왔구나’ 하고 서재로 안내했다. 그는 내게 가벼운 묵념을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청산 백운동에서 띳집을 짓고 사는 모생(茅生)이라면서 연분이 있어 거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청산 백운동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학 같은 몸짓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푸른 산이 솟아 있고, 흰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그의 손을 잡으려 했을 때 정신이 들었다. 그것은 꿈이었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정암사 가는 길에 일박한 허름한 여인숙에서였다. 무엇인가 예지하는 꿈인 것 같아서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마음이 쓰였다.
이튿날 정암사에 들러 산 이름부터 확인했다. 태백산 기슭이라고 했다. 어느 산인들 청산이 아니랴. 내친김에 스님에게 백운동을 알아보았다. 꿈속에 들은 것이지만 뭔가 집히는 듯했다. ‘백운동’은 들을 수 없었지만 ‘백운산’이 이웃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절이 있는 태백산과 연봉을 이룬다고 했다. 수림이 울창하고 화절령(花折領)은 절경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부터 태백산을 가운데로 하여 함백산과 백운산이 이어져 있고, 산기(山氣)가 영험하여 은자나 무속의 거처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나는 이만한 정보를 얻게 된 것만으로도 지난밤 꿈의 단초가 될 성싶었다. 다음에 때를 보아 백운산에도 한 번 가야지 하고 새겨두게 되었다. 그러나 삼십 년을 더 넘기고도 그곳 백운산을 찾지 못했고, 학 같은 손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내가 속진에 몸담고 있었으니 정암사 골짜기, 그 청류의 열목어가 어찌 탁류를 헤치며 누항에 들 수 있었으랴.
그러다가 고희에 이르러 낙향을 서두르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때의 꿈이 떠올랐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백운동’의 이름과는 다르지만 울창한 수림의 산줄기가 에워싸고 있으니 ‘청산’으로 모자람이 없고, 흰 구름이 무시로 떠돌고 있으니 ‘백운동’이라 자청해도 탓할 바가 아니다. 인생으로 이미 저문 연대, 청산 백운은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고시(古詩)의 청산 행이 묘하게 닿아온다. 그 상징성 때문일까. 저문 연대에 들었으니 어찌 꽃에 드는 호사를 기대하랴. 동행의 나비 또한 청산의 무위(無爲)를 따르는 한때의 꿈인 것을.
나는 지금 스무 층이 넘는 아파트 복도에서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다. 북한산도 내 뜻을 아는 듯이 청산의 의연함으로 앉아서 백운대의 구름을 맞고 있다. 이젠 꿈이 아니다. 점점 청산 백운동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얼마나 바쁘게 저잣거리를 오가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아왔던가. 한편으로 보면 치열한 삶이었다고 대견스럽기도 하나 다른 편으로는 부질없음을 뉘우치며 돌아보게 한다. 내가 곧 낙향하여 청산의 기(氣)를 취하며 구름을 벗하며 한거(閑居)할 수 있다면 그것이 꽃이 아니고 풀잎이라 하더라도 순리를 따르는 지복(至福)인 것처럼 생각된다. 내가 들고자 하는 청산은 정선의 준령에 비길 수 없는 서울 근교의 안성(安城)에 있는 야산에 불과하지만, 전원과 산이 어우러져 있고, 철마다 지어감이 없어도 순환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고라니 토끼 등 산짐승들도 나타나고, 텃새 철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어 절로 지어가는 자연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좋아하는 청산의 절로인 삶이 값지고, 은둔의 자유스러움이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 준다.
안성으로 낙향하기 전에 정암사 가는 길의 그 여인숙을 다시 찾아 꿈을 청해 보고 싶지만, 그곳은 지금 강원랜드라는 도박장으로 화려한 세속의 탁류가 넘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연분이 남아 있다면 기약하지 않아도 스쳐 가지 않으랴.
어느 때 구름처럼 백운산을 찾고 싶다. 그 또한 연분의 소치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절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어찌하랴. 경치가 절경이라는 화절령에서 산꽃 몇 송이 꺾어 들고 곰곰이 굽어보며 모생(茅生)을 불러보고 싶다. 꿈에 있으면 마음에도 있다지 않은가.
나의 낙향에 그가 생각나니 꿈인가, 생시인가. 감회가 자못 새롭다. 속진을 털며 돌아가는 청산길이 아무래도 꿈만 같다. 모생(茅生)의 백운동이 어디 정처(定處)가 있으랴. 청산이 있고 구름이 머흐면 어디인들 아니랴. 문득 그가 내 잠결에 학처럼 나타나 무위를 떨치며 창밖을 내다볼 것만 같다.
눈앞의 북한산이 침묵으로 일러주고, 백운대의 흰 구름이 하릴없이 떠돈다. 그 무위가 청산의 지족(知足)을 알려준다. 청류 계곡에 흙먼지와 얼룩을 씻으라고 한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청산 백운동이 마음에 어린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김진식 (1938~ ) 경남 밀양 출생. 80년대 초반 “한국수필”, “시와 의식” 등에 수필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 한국문인협회 경기도지회장, 경기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선수필” 편집인 겸 주간. 에세이 80년대 간사로 동인수필집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등 4권 상재. 수필집 “잊혀진 이름들”, “혼자 걸어가며”, “수필로 만나기”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