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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해인의 달

by 자한형 2022.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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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의 달 / 장 기 오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 냉기가 뼛골까지 스며드는 대웅전 바닥에 엎드려 여자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다. 무슨 사연일까. 속세의 근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눈 오는 이 겨울날,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대고 저리도 울고 있을까?

남한산성 입구에 자리 잡은 이 절은 평소 사람의 왕래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적막강산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경 소리만 청명하다. 선방 앞에 나란히 놓인 흰 고무신이 스님의 고행을 말해준다. 스님은 이 적막한 아침에 무슨 화두를 안고 고뇌하고 있을까. 저 중생의 아픔을 아시는가.

지난겨울 눈이 많이 왔다. 하루건너 한 번씩 내렸다. 도로가 끊어지고 시골 비닐하우스가 무너졌다. 영동산간은 고립되었고 산짐승들의 먹이를 헬리콥터로 공급해 주어야 했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본다. 그렇게 눈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내 전화는 지금 일주일째 울리지 않는다. 눈 오는 날, 보고 싶은 사람이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으면 그는 아주 강한 사람이거나 냉정한 사람일 것이다. 눈 오는 날 전화 한 통도 없다면 그는 늙은 사람이거나 잊힌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사랑다운 사랑을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는 삭막한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누구를 사랑한 일도, 누구와 헤어져 본 일도 없이 오로지 아내와 자식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뒷짐을 지고 공연히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소심하고 멋대가리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정도는 되새김해 보리라.

지난겨울 나는 밤마다 잠을 설쳤다. 2시간 간격으로 깼다. 한밤중 멍하니 TV 앞에 앉아 있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그때마다 어지러운 꿈이 나의 잠을 불편하게 했다.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눈송이건만 잠결에는 어찌 그리 크게 들리는가. 사각사각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소리를 들으면서 중얼거린다. ! 많이도 오는구나. 반쯤 가사상태에서 겨울밤을 보냈다.

눈 덮인 산이 보고 싶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많던 등산객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바로 남한산성 입구다. 부처님께 합장 인사나 드릴 양으로 들렸다가 한 여자의 깊은 슬픔을 보았다. 내 안에 삭아 내리는, 내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슬픔이 아니건만 우울했다. 슬픔이 옮겨온다. 고뇌 없는 살이()는 없는 걸까. 이 중생들의 고뇌를 해결해 주려 부처님은 집을 나와 숱한 고행을 했건만 수천 년이 지나도 중생들은 오늘도 이렇게 당신에게 빌고 있다. 부처여! 내 안의 고뇌를, 저 절절한 중생의 슬픔을 당신의 자비로써 다스려주소서.

절을 나왔다. 나무들은 잔뜩 눈을 이고 서 있고 눈에 덮여 어느 곳이 길인지가 분간이 되지 않았고 무릎까지 파묻혔다. 어디서 우두둑 우듬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이어 우수수 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까치가 화답한다. 그때마다 산이 한 번씩 몸부림친다. 나무를 올려다본다. 여항(閭巷)에서 일희일비하며 사는 내가 저 꼿꼿하고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를 닮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따라 저 겨울나무가 위대해 보인다.

젊었을 때는 꽃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우렁우렁 가지를 하늘로 키워내는 나뭇잎들이 그렇게 눈부셔 보였다. 초록의 찬란함도 내게는 위안이었다. 그런데 무거운 그 모든 것들을 다 떨어내고 묵묵히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저 겨울나무의 인내가 눈물겹다. 잊어버리라고, 그리고 빈 몸으로 가뿐하게 추운 겨울을 맞는 것도 귀로(歸路)의 아름다움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겨울나무는 해탈이다. 대웅전 바닥에 엎드려 울던 그 여자의 슬픔도, 늘 내 앞 서너 발자국 정도 앞서가는 내 안의 욕망도, 그 모든 것을 떨쳐내고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나무는 말한다.

결국은 하나일 것이다. 하늘의 달은 둥근데 바다에 비친 달은 일그러져 보인다. 어느 것이 본질인가. 그래 잊자. 한 생각만 놓아버리면 온 바다의 파도가 다 조용해진다. 전생의 업()을 타고 날지라도 이승에서도 반드시 치러야 할 업이 있고 그것을 다 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죽으려 해도 죽지 못할 것이다. 업을 다 했기에 이승을 홀가분하게 떠나는 것이리라. 눈이 온다고 떠나버린 옛사랑을 다시 추억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같은 둥지에서 자란 새들도 날 밝으면 각자 날아가거늘 우리 인생 또한 그와 같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옷깃 적시며 눈물 흘리는가?*’ (衆鳥同枝宿 天明各自飛 人生亦如此 何必淚霑衣)

차가운 바닥에 엎드려 울던 중생이여! 하늘의 달을 보고, 눈 오면 잠 못 이루는 그대들이여, 날아가는 새들을 보아라. 그리고 벌거벗고 서 있는 저 겨울나무들을 보아라.

그날 나는 아주 깊은 잠을 오래오래 잤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인용

[장기오 1946. 5. ~ ] 대구광역시 출생.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수료. 한국방송공사 제작본부 대PD, TV문학관 금시조, 홍어47편의 드라마 연출. 2004현대수필로 등단, 국제 펜 문학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전문서적으로 장기오의 드라마론, TV드라마 연출론, TV드라마 바로보기, 바로읽기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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