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일본의 유명작가인 시바 료타로에 관해 언급을 해보자. 그는 일본 국민의 추앙을 받는 작가로 명성이 높은 이이다. 그런데 그의 성은 사마(司馬)로 되어있다. 중국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에 매료돼 성(姓)까지 바꾸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역사소설에 ‘언덕위의 구름’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NHK에서 이를 장대한 스케일로 극화해서 방영하고 있다. 전체가 3부인데 1부, 2부가 끝나고 3부가 제작 방영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세계적인 경제불안과 위기속에서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동양의 조그만 나라가 거대 대제국들과 맞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전 일본국민이 혼연일체가 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명치유신이 일어난 후 36년 동안의 일본의 중흥기라고 한다. 국운이 상승했던 때였다. 그 속에 마쓰야마란 시골의 조그마한 곳에서 세 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그들은 아끼야마 요시후루, 아끼야마 사네유끼, 그리고 마사오까 시끼라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첫 번째 인물 아끼야마 요시후루는 일본의 기병을 설립한 인물로 프랑스에 유학하여 일본 기병을 세계적인 기병으로 반석 위에 세워놓은 사람이었다.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을 물리치고 요동반도상의 여순을 함락시키는데 지대한 공훈을 세웠던 인물이다. 두 번째 사네유끼는 요시후루의 동생으로 병기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영국에 유학해서 선진문물과 전술전략을 배워 온 인물이었다. 해군으로 입대해서 청일전쟁에 참전하였고 러일전쟁의 해전에서 전략전술을 수립한 작전참모로서 활약을 펼친 이이다. 다음으로 사네유끼의 친구인 시끼는 그때 당시 하이쿠라는 것의 기초를 세운 작가로 명성을 날렸던 이였다. 종군기자로 활약하기도 하였지만 병약한 상태였기에 요절하고 만다. 나쓰메 소세끼와 절친하기도 했었다. 주인공 세 명을 중심으로 엮여져가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세계 각국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급변하게 돌아가는 것을 묘사하고 있었다. 모든 중심에는 일본이 있었다. 중심인물과 더불어 나오는 이들의 주변 인물들도 역사상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이들도 나오고 있었다. 도고 헤이하찌로 같은 이도 있었다. 해군 총대장이라는 이이다. 노기 마르스께도 있었고 제국주의가 한참 팽배하던 때에 일본의 국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외교가 고무라 주타로도 있었다. 단신이어서 ‘생쥐 공사’로도 불리었고 미국, 중국, 영국 등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거대제국 영국과 ‘영일동맹’을 성사시키기도 했고 세계의 정세에 정통하기도 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05년 포츠머스 회의에서 일본전권으로서 참석하여 러시아측 전권대사인 세르게이 비테와 교섭하여 포츠머스 조약을 조인하였다.
러일전쟁이 나기 전 6년 동안 러시아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하로세 해군 대위는 사네유끼의 친구로 나오지만 여순항의 폐색작전에서 전사하기도 한다. 그와 러시아 미녀와의 러브스토리는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노기 마르스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서남전쟁에 참가해서 부대 깃발을 잃어버리는 과오를 범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평생 죄책감을 갖게 된다. 할복을 하려 했으나 저지당하게 되고 다시 또 청일전쟁에서 여순 요새를 하루 만에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런 후 농사꾼으로 돌아가 세월을 보내고 있던 중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러일전쟁에서 요동반도의 여순을 공격하기위한 사령관에 임명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여순 함락작전을 지휘하게 되고 러시아가 온전하게 구축 해 놓은 여순 요새에 무모한 함락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사상자 5만명이라는 전무후무한 피해 속에 203 고지의 탈환을 하게 된다. 국내의 여론이 들끓고 언론의 비난이 쇄도하자 그는 할복을 하려했으나 천황의 만류로 할복을 보류하게 된다. 천황이 내린 말은 “내가 죽기전에는 죽어서는 않된다”였다고 한다. 천황의 자제를 교육하는 기관의 장으로 취임해서 나날을 보냈으나 천황이 죽고난 뒤 그 장례일에 맞춰 노기 부부는 할복으로 한(恨) 많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여순에서 두 아들을 잃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군인의 표상으로 칭송되기도 했고 무모한 작전수행에 대해 질타를 받기도 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제국주의의 열국들이 부국강병으로 열을 올렸던 그 기간에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정에 있었는가를 되돌아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자세도 되어있지 않았고 세계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눈여겨보려는 혜안을 가진 이들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쇄국으로 문을 꼭꼭 틀어막았던 것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했다. 그 때 당시 벌써 일본의 경우에는 부국강병을 위해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 젊은이들을 보내 견문을 넓히게 하였고 국민들의 자국부흥을 위해 와신상담했던 것이다. 거대제국 러시아와 일전을 불사할 만큼 일본이 급성장했던 것은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던지 자신의 이익에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나라와 조직에 헌신하고자 했고 집단의 목표를 위해 한 몸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었던 그 기개는 사무라이 정신에서 유래된 것일까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가미가제특공대가 폭탄을 싣고 적함에 투신하던 것에 대해 그 원류를 볼 수 있었던 것이 폐색작전이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적의 손아귀 속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우리식으로 얘기 하자면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간 토끼 꼴이 난 것이었다. 해군대위 히로세는 그렇게 죽어갔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도 그가 러시아에서 근무한 공을 기려 정중히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극적인 얘기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허구이지만은 않으리라는 느낌도 있었다. 러시아의 무적함대를 궤멸시켜버린 일본 해군과 육군의 승리는 일본을 세계의 열강과 함께 섣불리 넘볼 수 없는 나라로 성장해 나갔다. 잠깐 잠깐 조선의 사정에 대해서도 언급이 있었다. 을미사변이나 삼국간섭 등 우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도 짤막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고종임금의 러시아대사관으로의 피신 등도 나오기도 했다. 사네유끼는 미․스페인 전쟁에서 폐색작전을 경험하게 되었고 영국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며 넬슨의 해전사를 매우 잘 배우게 되었다.
도고도 영국에 유학한 바 있었다. 그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넬슨과 비교 그리고 이순신과의 비교를 묻는 기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넬슨에게는 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순신에는 비할 수 가 없다. 그의 하사관 병졸에 불과 할 뿐이라고 했다한다.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성장(聖將)으로 칭송되기도 한다고 한다. 제국주의가 횡횡하던 시절에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다시 한 번 깨우쳐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이 된다. 어렵고 힘들었던 때에 마음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위해 열과 성의를 다했던 이들에게서 애국심의 정수를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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