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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노기 마레스게에 관한 소회

by 자한형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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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인이었던 노기 마레스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자국 내에서도 성장(聖將)으로 칭송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능한 장군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두 명의 성장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노기와 도고헤이하찌로였다. 도고는 해군을 책임졌고 노기는 육군을 통해 여순을 함락시켰다. 노기는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港区)에 있던 쵸슈번의 지번인 쵸후번(長府藩)의 번사인 노기 마레츠구(乃木希次)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현재 롯폰기 힐즈(六本木ヒルズ)가 되어있는 쵸후번에도 저택(上屋敷)이 태어난 곳이다. 어릴 적에 모기장 밑에서 자고 있을 때 모기장의 금붙이가 떨어져서 왼쪽 눈에 맞아 왼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가 되었다.

 

일 전쟁 중 여순 요새함락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무모하게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두 아들까지 잃게 되었다. 서남전쟁에서 자신이 속했던 부대의 기를 빼앗김으로 인해 할복으로 속죄를 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저지되었다. 자신의 형제가 다른 쪽에 속하게 됨으로써 할복하는 이가 생겼던 부분 등에 큰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여순 요새는 중일 전쟁 때에는 단숨에 함락했던 경험이 있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고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총공세를 감행하게 된다. 러시아가 견고하게 구축해놓은 요새여서 함락이 쉽지 않았다. 5만 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겨우 함락을 시켰지만 그 출혈은 너무나 컸다. 일 전쟁 후 천황의 황태자 스승으로 생활하기도 했다. 육군대장이었고 백작의 작위가 있었다. 독일에 유학을 하기도 했다. 노기는 1912913일 메이지천황 장례식날 밤에 부인과 함께 자살했다. 우선 노기의 부인이었던 시즈코가 노기의 도움으로 가슴을 찔렀고 이어서 노기가 할복했고 다시 의복을 갖추고 나서 스스로 경동맥과 기관을 절단해서 절명했다. 유서에는 메이지천황에 대한 순사(殉死)이며 서남전쟁 때 연대기를 빼앗긴 걸 사죄하기 위한 죽음이다 라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었다.

전후의 노기는 여순이나 봉천에서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부하나 유족의 궁상을 들으면 아무도 모르게 찾아가서 위문금을 건네거나 부하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곧 이 사실은 보도기관이 알게 되어 노기는 더욱 더 신격화되었다. , 팔을 잃은 사람을 위해 스스로 설계에 참가했던 노기식 의수를 완성시켜 자기의 연금을 담보로 제작 배포하였다. 이 의수를 썼다는 부상병의 감사편지가 노기에게 전해져 노기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일화가 신문에도 실려 서민의 노기 장군은 더욱 영웅, 위인이라는 것으로도 모자라 일종의 신앙대상이라는 영역까지 확대되어버렸다. 소장시절의 노기가 카나자와(金沢)의 거리에서 점괘를 파는 소년을 보았다. 그 소년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릴 때부터 일가의 생계를 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소년에게 당시로서는 엄청난 2엔이라는 돈을 건넸다. 소년은 감격해서 열심히 노력하며 산 결과로 금박가공의 세계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는 일화가 유명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여순 전투에 엮여서 각색되어 창가(唱歌)나 강담(講談)으로 유명해졌다. 일 전쟁 때 노기는 아들을 잃었고 많은 희생자를 낸 점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 할복을 원했다. 하지만 메이지천황에게 제지당해 아들을 잃은 만큼 자기 아들을 아들로 생각해서 훈육하도록 학습원원장을 하도록 명했다. 어린애가 울면 노기장군오라고 한다면 금세 울음을 그쳤다고도 하고 먹길 싫어하고 음식을 남기면 다 먹을 때까지 싫은 음식만 준다는 관행을 낳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생겨났고 신격화되고 우상화되기도 했다. 노기 백작가는 성장한 아들이 모두 전사했고 장녀와 셋째 아들은 요절했다. 아들들이 전사한 뒤 동생이 오오타테씨(大館氏)에게 양자로 나갔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어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양자를 들여서 상속시키려고 했으나 노기의 유언 때문에 가문이 단절되었다. 그러나 노기 부부의 죽음으로부터 딱 3년 뒤에 해당되는 1915913일 노기 가문의 옛 주인인 쵸후 번주의 후예인 모리 모토토시(毛利元敏)의 둘째 아들이 백작이 되어 성도 노기로 바꿔서 새로운 노기 백작가를 세웠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강해1934년에 작위를 반납하고 성도 모리로 다시 바꿔야만 했다.

 

노기 마레스게는 무척이나 청렴했다. 그는 피죽을 먹었다. 그렇게 조국을 위해 멸사봉공했던 이였음에도 무모한 돌격작전을 감행해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도 책임을 통감했던 듯하다. 물론 그 속에는 자신의 두 아들의 희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만총독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분명한 책임의식을 지녔던 것 같다. 부대기를 빼앗긴데 대하여 자책감을 갖고 있었고 러일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서도 많은 책임감을 통감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천황의 뒤를 따라 할복자살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훌륭한 장군으로 칭송되기도 하고 어리석은 장군으로 평가절하 되기도 한다.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장녀와 셋째아들까지 요절함으로서 단절된 가문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삶에 대해서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리라. 무모하고 저돌적인 백주의 공격으로 엄청난 희생과 사상자를 불러온 부분에 대해서는 응분의 객관적인 평가와 책임을 감수해야할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천황에 대한 맹종과 충성이 극에 달했던 듯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기도 하다. 군국주의의 전형이고 오도된 군인정신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노기 마르스게는 제역할을 충심으로 다했던 군인의 전형이었음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가 칭송을 받던 아니면 악평을 받던 그걸 떠나 인간적인 부분에서만은 참 불행한 삶을 살다간 사람이 아니었나하는 소회(所懷)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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