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5

내마음의 풍경

by 자한형 2022. 9. 25.
728x90

내 마음의 풍경 - 곽흥렬

여남은 살 어릴 적엔 절집을 꺼려 했다. 대웅전의 울긋불긋 요란스런 단청이며 험상궂은 형상의 용머리 장식이 영락없는 한 채의 나무상여였다.

지난날 고 또래 아이들에게는 상엿집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가. 그래서 절집 근처에만 가도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런 감정은, ‘절집하면 곧 상엿집이라는 등식을 세워 놓게끔 오랜 세월 나의 의식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다 딱히 언제부터인진 알 수 없으되, 묘한 매력을 풍기며 다가오는 절집에 마음이 빼앗기기 시작했다. 물론 별반 소득 없이 먹어 버린 나이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추녀 끝에 매달려 종일토록 댕그랑댕그랑 유리잔 부딪는 소리를 내는 풍경風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풍경 없는 절집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대갓집 행랑채에 솟을대문이 썩 어울리듯, 절집과 풍경은 절묘한 조화다. 주변의 빼어난 산세와 어우러져 탈세속의 풍경風景을 연출해 내는 풍경, 거기다 고즈넉이 저녁안개까지 내려앉으면 절집은 승천하는 영혼인 양 뒤말리며 피어오르는 향불 연기에 휩싸이어 현묘함을 더하고, 그리하여 그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잠시나마 나를 잊고서 무념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풍경 소리에는 소망이 묻어 있다. 맑고 맑은 풍경 소리 따라 지상의 뭇 중생의 바람들이 바람을 타고서 삼천대천세계로 전해질 것만 같다. 아마도 그래서이지 싶다. 가만히 풍경 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노라면, 지난날 정화수 떠 놓고 소지를 올리며 비손을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정월 보름이나 이월 초하루 같은 날이면 우물가 석류나무 아래서 소지를 사르셨다. 허공을 헤치며 풀어져 가는 연기로 소망을 지펴 올리셨다. 은은히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와 너울너울 사라지는 소지 연기, 소리와 모습으로 본질은 달라도 그 속에 간절한 바람 하나씩 담기어 있음은 어쩌면 똑같은 것이 아닐까.

생명체가 죽으면 그 일부가 바람이 된다지만, 그 바람은 도리어 죽은 생명을 살려내는 기운이 된다. 물고기는 수국水國이 그들의 천국天國이거늘, 이 산중의 물고기는 무슨 운명을 타고났기에 바람을 물로 삼아 천날 만날 저 진리의 세계처럼 광대무변한 허공 속을 헤매어야 하는가. 풍경 속의 물고기는 자신을 살려낸 바람에게 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한시도 쉬지 않고 경전을 외며 용맹정진을 한다.

그 누가 맨 처음 절집의 추녀 끝에다 풍경을 달아 놓을 생각을 했을까. 무릇 목숨 가진 존재이면 서로서로 어우러져 지내야 마땅한 법이거늘, 어쩌자고 이 쇠물고기를 영원 세월토록 무소의 뿔처럼 저렇게 혼자서 가도록 만들었는가. 그는 필시 남모를 비원悲願 하나 가슴속에 품고서 세상을 살다 떠난 불심 깊은 대목장이었지 싶다. 아니면 고독의 깊은 맛을 사랑했던 어느 이름 없는 철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풍경 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영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 세상잡사로 뒤숭숭하고 혼란스럽던 마음도, 풍경 소리가 귓전에 닿는 순간 짚불이 사그라들듯 금세 평정에 이른다. 그 소리를 듣고서 한순간이나마 마음을 비우지 못할 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끈질긴 세간살이에 붙들려 허우적거리는 비루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풍경 소리는 바람이 켜는 염불 소리다. 오랜 시간 절집의 댓돌에 앉아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 소리의 울림에 한 번쯤 귀 기울여 보라. 그 소리는 때로는 반야경般若經으로, 때로는 천수경千手經으로, 때로는 지장경地藏經으로 화하여 뭇 중생들에게 위없는 설법을 전한다. 단 하룻밤만이라도 절집에서 지새운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풍경이 읊조리는 염불 소리에 취해 저 망망한 허공 중천을 더듬으며 잠든 영혼이 깨어나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으리라.

 

같은 영화라도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듯, 비록 똑같은 가르침일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풍경 소리는 유달리 마음을 탄다. 밝고 맑은 마음으로 들으면 통통 튀는 햇살 같은 소리가 나고, 어둡고 흐린 마음으로 들으면 음산한 구름장 닮은 소리가 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으면 경쾌한 실로폰 가락으로, 무거운 마음으로 들으면 둔중한 첼로의 선율로 전해져 온다.

어찌타 마음뿐이랴. 계절에 따른 풍경 소리의 여음도 한결같지는 않다. 납작 엎드려 있던 대지에 봄기운이 감돌면 풍경 소리에도 촉촉이 물이 오르고, 녹음 짙어지는 한여름이면 풍경 소리는 푸르른 나무처럼 싱그럽게 윤기가 흐른다. 그러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지면 그 소리도 한층 넉넉하고 여유로워지며, 이내 겨울로 접어들면 휑한 솔바람 소리처럼 맑아진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 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노산 선생의 시조 한 수를 나직이 읊조리노라니, 몸은 도회의 한복판에 붙박여 있건만 마음은 벌써 어느 고즈넉한 산사의 앞마당을 거닐고 있다.

내 이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남은 날들을 위하여 가슴 깊숙한 곳에다 풍경 하나 달아 두고 싶다.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울려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가며 살고 싶다.

 

 

'현대수필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홍빛 눈  (1) 2022.09.25
변덕에 관하여  (1) 2022.09.25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  (0) 2022.09.18
우리를 늙게 만드는 것  (0) 2022.09.18
우리 계레 모두가 기다리는 인물  (1) 202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