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눈 - 김채영
겨울이 되면 불현듯 분홍빛 눈의 영상이 아련한 향수로 떠오른다. 꿈속에서라도 옛집을 찾아간다면, 뒷문 빗장을 활짝 열고 분홍 눈을 보고 싶었다. 백설보다도 아름답던 그 분홍빛 눈밭.
어느 겨울 어머니는 하얀 옷에 물감을 들인 뒤 허드렛물이 담긴 양은 세숫대야를 건네주셨다. 무심코 뒷문 밖에 쏟아 붓는 순간 내 눈에 보이는 세상 하나가 마술처럼 황홀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까지 덮이도록 쌓인 눈밭 한 부분이 어느새 진분홍빛으로 물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들은 영롱한 아침 햇살을 받아 무지개보다 더 현란하게 눈부셔 왔다. 나는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분홍빛 눈을 뭉쳐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작은 손이나 마음까지도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느새 분홍 물감을 들인 내 치마를 빨래 줄에 널어놓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 한 켤레는 서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빨래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눈 쌓인 마당에 분홍색 동그라미 몇 개가 점점 커 가고 있었다. 분홍 물을 들이기 이전에 내 치마는 하얀 치마였다. 의복이라는 개념보다도 몇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입었던 상복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딸이 입었던 상복이 보기가 싫었는지 분홍 물감을 들여놓으셨다.
다음해 가을날 소풍을 갔다. 점심시간에 함께 김밥을 먹던 오빠가 장난스럽게 사과를 풀썩 던져주었다. 새빨간 사과 한 알이 떨어진 그 진분홍치마가 새삼스럽게 클로즈업되었다. 아, 내가 그 분홍치마를 입었구나. 사과를 먹으며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눈물이 비어졌고, 오빠는 강물에 말없이 애꿎은 돌멩이만 자꾸 던졌다. 물수제비가 무수하게 수면에 떴다가 깊은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들의 입안에서 맴돌다 삼켜버린 많은 말처럼 그렇게.
화사한 나들이옷으로 채색된 분홍치마, 그 것은 슬픈 기억을 잊고 곱게 자라라는 어머니의 무언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반대로 백설처럼 깨끗한 동심도 그쯤에서 멈춰버려 너무 이르게 여러 가지의 아픈 생활의 땟물로 얼룩지며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얼마 전, 흰 빨래를 삶다 무심코 빨간 수건을 같이 삶았다. 빨래가 더욱 희게 삶겼으리라 기대했는데 막상 꺼내 보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흰 빨래들이 온통 붉은 색으로 뒤엉킨 채 혼탁하게 물이 들어 있었다. 작은 실수로 속옷이며 흰 양말들의 색채나 형태까지 완전히 망쳐버렸음을 후회하고 본연의 색을 찾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써 보았다. 몇 번을 헹군 다음 다시 세제를 뿌려 삶았고 표백제를 써 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물을 빼려고 애쓴 나머지 다소 붉은 빛은 엷어졌지만 옷감들이 상해 한층 흐늘흐늘한 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 짧은 세월에 숱한 괴로움을 겪어 겉늙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살아가는 일이란 늘 연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실전의 연속인 것을 나는 어리석게도 뒤늦게 깨닫는다. 순간의 실수는 영원한 상처를 동반한다는 것을 이처럼 크고 작은 실수를 수습하면서 여러 번 느껴야 했다.
삶아 빨아 널은 흰 빨래는 푸른빛이 돌 정도로 청결해 보이지 않았던가. 긴장대로 괴어놓은 시골집의 빨래 줄 아래 서 있으면 흰 빨래들은 푸른 하늘에 점점이 떠가는 구름과도 같았다.
하얀 메리야스, 하얀 레이스 양말, 하얀 셔츠 그리고 수건들. 우리 집에서 공유하는 하얀 빨래들이 모두 붉은 물이 들어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건조대에서는 하얀 와이셔츠가 물든 빨래들에게 너희들은 빨간색이라 할 것이고, 붉은 옷은 하얀 옷에게 가보라고 밀어낼 것이다.
나는 빨간색도 아니고 하얀색도 아닌 빨래들을 곤혹스럽게 바라보며 세상의 뒷골목 어느 후미진 지붕 아래 핍박받는 혼혈아들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도 여러 인종들의 결합을 몇 대에 거쳐 피부 빛깔이나 윤곽이 애매해진 혼혈아들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못 물든 빨래 같은 생을 슬퍼하며 살아갈 것이다. 조물주의 실수가 아닌 인간이 만든 잣대의 오류에 의해.
한번 변색된 빨래는 영원히 다른 빛의 헌옷으로 단축된 수명을 맞이할 것이다. 그 옛날 어머니가 물감을 들인 치마는 상복에서 새 옷으로 재생되었지만, 잠깐의 실수로 멀쩡한 옷들이 헌옷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렸다.
지난날 하얀 눈에 입혀진 분홍색은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모양 없는 철근조각에 도금을 한 것처럼, 밋밋한 장신구에 그림을 양각시킨 것처럼. 하얀 치마에 물감을 들이는 순간부터, 하얀 눈에 분홍 물을 쏟아 붓는 순간부터 내 인생은 달라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추운 겨울날의 분홍 물감은 내 삶에도 여백 없이 고운 물감을 들여놓았던가 보다.
그것은 아홉 살의 여린 내 마음에 한 겹 보늬처럼 덧씌워져 끊임없이 웃자라게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고단한 현실은 내 키만큼 자란 유년기를 정리하고, 몇 년을 훌쩍 뛰어 넘은 낯선 세상에다 나를 데려다 놓았다. 새로운 도전을 가장한 위태로운 현실도피였다.
미국의 어느 식물학과 교수는 단풍잎의 빛깔은 나무가 받는 스트레스에 따라 달라진다는 학설을 발표했다. 즉 기후나 환경이 악조건인 곳의 나무일수록 더욱 선명하고 고운 단풍 빛으로 물든다는 얘기였다. 온실 속의 꽃나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벼랑에 핀 야생화의 오묘한 자태와 심오한 향기를 흉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생을 안온하게 보낸 후덕한 노인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의 생애가 한편의 소설처럼 아름답다. 뒷날, 순탄치 않았던 나의 삶도 구비 구비 다채로운 무늬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질 날도 있을까.
겨울이면 분홍빛 눈의 영상이 열병처럼 찾아온다. 일찍이 절망이나 비애를 알아버린 아홉 살 시절, 그 겨울날 분홍빛 눈은 내게 파격적인 위안이었고, 슬픈 반란이었으며, 내 인생의 구도를 환치시킨 경계이기도 했다. 그 현란한 빛깔과 냉기를 풀어 내 안에 갇힌 감성의 씨앗을 성급하게 깨워주던 분홍빛 눈밭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겨울이면 끝없이 혼곤한 꿈속에 빠지고 싶다. 떠나 온지 너무 아득해서 꿈속에서까지 옛집을 찾지 못한다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으련다. 뒷문 밖의 분홍빛 눈은 아주 오래 전에 내 안에 옮겨져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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