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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오케하자마 전투(22/25)

by 자한형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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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하자마 전투 : 동반자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와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1560612일 오와리국의 오케하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내세워 오다 노부나가의 오와리국을 침공하였다.

당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대는 25000명 규모로 오다 노부나가는 불과 2천여명의 군사로 오케하자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대를 기습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벰으로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

당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다케다 신겐과 호조 우지야스와 혼인을 통해 1554년 동맹을 맺고 착실히 준비하고 국력을 기울여 오다 노부나가의 오와리국을 침공하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1551년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의 사망 이후 동생인 오다 노부유키와의 분쟁을 겪는 등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병력이 분산되어 압도적인 병력의 이마가와 군을 막는 것은 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따라 가신들은 대부분 이마가와에 항복할 것을 권할 정도였다.

한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156065일 슨푸성을 출발하여 610일 구쓰카게 성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61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선봉으로 내세워 #오다카 성 주변의 와시즈 성채와 마루네 성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성채의 함락소식을 듣고 오다카 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군의 공격소식을 듣고 출진 준비를 갖쳐 새벽 4시경 출발하였다. 그리고 8시경 아쓰타 신궁에 도착하여 군대를 집결시키며 필승을 기원하였다.

노부나가는 첩자를 동원하여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동선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는데 노부나가는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지역에서 식사를 겸하여 휴식을 취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케하자마로 이동하였다.

오케하자마는 계곡이 파이고 계곡사이에 깊은 늪지대가 조성되어 있고 수풀이 높이 자란 험한 지형이었다.

한편 오후 1시부터 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와시즈와 마루네 성채를 함락시키고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장수인 #삿사 하야토의 군대가 공을 노리고 이마가와 군을 공격하였다가 패퇴하게 되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이러한 초전의 승리에 취하여 방심하고 있던 요시모토의 군대는 노부나가의 부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노부나가의 기습에 요시모토는 타고 다니던 꽃가마 마져 팽개치고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모리 신스케라는 인물에게 목을 베이고 말았다.

전투 후에 오다 노부나가는 정보 수집의 책임자였던 야나다 마사츠나에게 최고 상을 내리고 요시모토에게 창을 들이대고 돌격한 핫토리 가즈타다를 두 번째,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한 모리 신스케에게 삼등상을 주었다.

이는 한고조 유방이 전쟁 승리의 토대를 만든 소하를 일등공신에 봉한 것과 유사하며 이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정보를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망소식을 듣자 오다카 성을 버리고 후퇴하여 오카자키 성 주변의 다이주 사로 피신하였다.

오카자키 성은 원래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본거지였던 성으로 이마가와 가의 측근이 이에야스 대신에 점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고 이마가와 군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오카자키 성을 지키던 무장이 성을 버리고 이마가와의 본거지인 스루가로 돌아가자 자연스럽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카자키 성을 접수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의 영향력을 벗어나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기요스 성에서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이 동맹을 기요스 동맹이라고 부르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편 기요스 동맹을 알게 된 이마가와 가의 우지자네는 배신으로 여기고 도쿠가와의 인질들을 처형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내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조카딸이어서 죽이지 않고 나중에 인질교환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려준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 지역을 평정하고 천하 제패를 노리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미카와 지역에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오케하자마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이마가와 가는 그로부터 8년 후에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망한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의 결단력과 용기가 돋보이는 전투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치밀하게 정보를 모으고 적의 빈틈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 전력을 기울여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라고 불리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순간적인 방심으로 경계의 소홀을 초래하여 결국 목숨을 잃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서는 이마가와의 족쇄에서 벗어나 오다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통해 힘을 키워 마침내 에도막부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오는 먼 원인이 되는 것이 오케하자마 전투라고 할 것이다.

오케하자마의 전투(1/3): 잡동사니의 역사이야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출격

에이로쿠 3(1560)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군에 출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스루가의 전국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에이로쿠 3(1560)에 출진 명령을 내려 슨푸를 카케가와성, 인마성, 요시다성, 오카자키성, 치리우성과 벌써 이마가와가의 산하에 있던 도토우미에서 미카와의 성으로 이동해, 오와리의 국경을 넘고, 콘도우 카게하루(近藤景春)의 구쓰카케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앞에는 이마가와가의 최전선 나루미성과 오다카성 한층 더 앞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키요스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요시모토의 출진은 상경이 목적이지, 노부나가와의 마찰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만 최근에는 상경이 목적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설 쪽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요시모토의 군세는 총원 25천 정도로 상당히 많지만 노부나가를 물리쳐도 상경하려면 그 앞에는 미노의 사이토가도 있고 오미의 롯카쿠가도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세력을 넘어뜨리고 상경을 하기에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상경같이 덴노나 쇼군의 알현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평화로운 상경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시모토의 경우는 천하를 노리는 상경으로서는 군세가 적고, 평화로운 상경으로서는 영주들과의 사전 교섭이 없지요. 따라서, 이번 출진의 목적은 상경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요시모토는 출진을 결의했을까요?

키요스 삼국동맹

노부나가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의 시대부터 영지 쟁탈 전투를 반복하고 있던 오다와 이마가와의 전투는 이 시점에 종막을 맞이하려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이 주변에서 힘을 기른 것이 스루가의 요시모토, 가이의 다케다 신겐, 사가미의 호조 우지야스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셋만이 전국의 패자는 아니었습니다. 요시모토가 노부히데와 싸우는 것처럼, 신겐은 에치고의 겐신이라고 하는 굴지의 라이벌이 있었고 우지야스도 인접하는 우에노나 하야로 손을 뻗으려 해 삼국의 키요스 동맹이 성립하고 신경이 쓰이고 있던 다른 이웃나라에의 공략에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와리와 스루가

오다가는 스루가에 신경을 쏫고 있던 노부히데가 텐분 20(1551)에 죽은 뒤 그 자리를 계승한 노부나가는 우선 오와리 국내의 통일에 힘을 쏟습니다. 노부나가가 뒤를 이었을 무렵은 오다가는 아직 오와리 하4군의 수호대 오다 야마토 마모루(織田大和守)가의 가신인 입장이었고, 게다가 상사군의 수호대 오다 이세 마모루(織田伊勢守)가도 있었기 때문 밖에 참견을 하는 것보다, 오다 집안에서 정상에 서는 것이 선결과제였던것입니다. 이런 오다 가의 혼란의 무렵에 오다에서 등을 돌려 이마가와로 들어간 것이 오다카성을 빼앗은지 얼마 안된 나루미 성주 야마구치 노라쯔구(山口教継)나 구쓰카케성의 콘도우 카게하루(近藤景春)이었습니다. , 이번 요시모토의 출진은 노부나가의 오와리에 대한 출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주류가 되고있습니다.

이런 것이 츠케시로(付城)입니다

위의 나루미성과 오다카성이 이마가와의 물건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이러한 성에 대해서 츠케시로(付城)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츠케시로란 목표로 정한 성에 대해서 공격을 하기 쉽게 혹은, 감시하기 쉽도록 그 근처에 만드는 임시 성을 말합니다. 나루미성에는 단게,센조우지,나카지마의 3개를, 오다카성에는 와시즈, 마루네토의 2개를 지어 합쳐 5개의 츠케시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오케하자마때의 포진도를 보면 알기 쉽습니다)

, 이 때의 출진은 이 두 개의 성에 근처의 츠케시로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사실 요시모토의 25천이라고 하는 대군입니다만, 그중 2~3천만을 요시모토가 지휘하고 나머지는 각 성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또 요시모토도 말이 아니고 가마를 타고 출진했지요. 예전에는 말을 타지 않고 가마를 탄 것은 무사스럽지 않아 비웃음을 사는 일이었지만, 전국시대에 힘있는 영주가 가마를 타는 것은 타 영주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분이 있는 오다가의 새로운 영주, 노부나가에 대한 요시모토의 자신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케하자마 전투(2)

오다 노부나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취하다

엔로쿠 3(1560) 전국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중 하나인 오케하자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저번에 보았듯 스루가의 전국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천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가와의 국경선으로 도착합니다. 이런 가운데 구쓰카케에서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던 요시모토 본대에게 희소식이 들려옵니다. 오다측이 설치하고 있던 츠케시로 와시즈를 중신 아사히나 야스모토(朝比奈泰朝)가 눈 깜짝할 순간에 점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군의 승리에 기분의 좋아진 요시모토는 근처의 오케하자마에 진을 쳐 군세를 쉬게 합니다. 한편, 와시즈가 점령된 일을 알게 된 오다 노부나가의 키요스성은 야단 법석이 납니다. 게다가 요시모토군은 허세를 부려 군세를 45천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오다측의 중신들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농성을 제안합니다.

와카마이 아츠모리

인간 50년 하늘 안을 견주어보면, 꿈이나 환상과도 진배없는 것

한번 인생을 얻어서 멸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출격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는 노부나가였습니다. 말의 재갈을 잡거나 직접 앞길을 막아 출격을 막으려는 가신도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코우와카마이(幸若舞)의 아츠모리(敦盛)를 춤추고 유즈케(湯漬: 전국시대의 음식)를 가득 먹고 출진합니다. '아츠모리''인간 50~'이 나오는 무용으로 노부나가의 아버지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출진한 노부나가는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에 참배해 필승을 기원하고 그곳을 집합장소로 아군이 모이는 것을 기다립니다. 당시 여기저기 나눠져 공격하고 있는 요시모토군을 막기 위해 병력을 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노부나가의 아래에서 모인 것은 약 2천이었습니다. 이마가와와 상대하려면 정공법에서는 무리지요. 따라서 노부나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만을 노린다는 작전이 완성됩니다.

오케하자마

그렇게 해서 현재 요시모토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이 선결과제가 됩니다. 이때 야나다 히로마사(梁田広正)'요시모토는 지금 오케하자마에서 쉬고 있다고 합니다.'라는 정보를 가져 옵니다. 이때를 기회라 판단한 노부나가는 자신이 센죠우지도우리데(善照寺砦)에 있는 것처럼 획책 하고 2천의 군사를 인솔해 요시모토 본대를 기습하기 위해 오케하자마를 목표로 합니다. 통설에서는 북방으로 우회해 요시모토의 배후에서 산을 내려가며 기습했다고 합니다만, '신죠코기(信長公記)'에는 센죠우지도우리데를 나와 우회 하지 않고 나카지마에 들어간 뒤에 직진 했다'라고 합니다.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의 평지가 아닌 오케하자마라고 하는 산 위에서 쉬고 있었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우회하지 않고 직진 했다'는 것이 주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평지에서 이동할 때 발견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일은 흐린 날로 게다가 출발하기 직전에 '갑자기 눈도 뜰 수 없을듯한 큰 비가 내렸다' 고 합니다. 이런 비를 뚫고 적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요시모토가 방심하고 있을 때, 노부나가군은 서서히 요시모토 본대의 목을 죄어 왔습니다. 그리고 급습을 시작합니다. 조금 전까지 아사히나 야스모토의 승리에 열광하고 있던 본진은 순식간에 대혼란이 됩니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핫토리 코헤이타(服部小平太)가 모토나리를 죽이고 모우리 신스케(毛利新介)가 그 목을 베어 창에 끼워서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가장 많은 포상을 받은것은 이 둘은 아니고, 정보를 제공한 야나다 히로마사였다고 합니다.

오케하자마의 기습

천하를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대영주가, 한 시골 영주와의 전장에서 어이없게 전사한다라 하는 것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전투에서도 극히 드문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전투는 언제나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노부나가는 어디까지나 폭풍간지로 등장하고 요시모토는 방심한 멍청이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사실 이 전투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역시 ''이었습니다. 그 운을 타고 실날같은 실현 가능성이 있던 이 작전을 성공시킨 노부나가가 지나치게 대단한 것입니다. 사실 노부나가에게 이 작전은 100% 성공한다! 라는 것보다 내기에 가까운, 아니 노부나가이니까 이왕 질거 간지나게 지자!라는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여서 미화되고, 게다가 이 전투로 요시모토가 패배해 자유를 얻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과거를 좀더 드라마틱하게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명장이었던 것은 그의 목이 취해진 후에 가신들의 싸우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군의 죽음을 안 뒤에도 이마가와군은 허둥지둥 철퇴하지 않고 당분간 계속 싸웁니다. 그 중에서도 나루미 성주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는 모토나리의 수급을 빼앗을 때까지 철퇴하지 않고 항전을 계속해 결국 수급을 적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스루가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주군을 돌려주어라! 돌려주어라!'라며 필사의 형상으로 싸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가신에게 존경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결국 이 싸움에 진 이마가와가는 몰락의 일로를 걷기 시작하고, 노부나가는 단번에 전국시대의 무대의 전면에 뛰어 오르는 일이 됩니다. 저승에 있는 호조 소운과 아사쿠라 소테키는 자신들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고 있지 않았을까요?

오케하자마 전투(3)

도쿠카와 이야에스는 어디 있었나?

오케하자마 전투로 당시 천하에 제일 가까웠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어이없이 전사해 한 때의 양아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단번에 전국시대의 무대 전면에 뛰어 오릅니다. 그리고 이 오케하자마의 전투에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3년간의 인질 생활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겐신등이 그랬듯이 알기 쉽게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를 그냥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때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당시 오다카성, 나루미성은 이마가와가의 산하에 있었습니다. 한때는 오다가의 성들이었지만 나루미 성주 야마구치 노리쯔구(山口教継)는 자신 성 뿐만아니라 오다카성도 점령해 아마가와가에 투항합니다. 이 성들을 되찾기 위해 츠케시로를 지은 오다측에 요시모토의 선발대가 공격을 걸어 오케하자마 전투가 시작됩니다. 사실 오케하자마 전투에 시선이 집중되기 쉽지만, 전의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마가와의 대군은 여러 장소에 분산되 동시에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츠케시로는 언제까지나 임시방편의 성이었기 때문에 내구도도 떨어지는데다가 노부나가는 츠케시로에 응원군을 보내지 않았으므로 츠케시로의 전투는 이마가와측의 대승이었습니다.

이 츠케시로를 공략하는 선봉을 맡은 사람 중 한 명이 이에야스였습니다. 이야에스는 오오다카성으로 군자금을 운반하는 중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요시모토는 원래 오오다카성을 공격의 거점으로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이 성에 장기 체재하기 위해서는 군자금 확보가 필요 불가결합니다. 하지만 주위에 츠케시로가 있다고 하는 일은 적이 여기저기에 있다고 하는 일로 군자금을 가지는 수송대가 이동하는 일은 결코 쉽지않습니다. 이에야스는 오오다카성에 향하며 지나가야 하는 이치를 정찰합니다. 역시 '이치에는 많은 오다측의 군사가 파수를 스고 있어 이곳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나 정찰대중 스기우라 카츠요시(杉浦勝吉)는 우리들이 산기슭을 지나는 것이 발각 되었지만, 산 위에 있는 군사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군사의 수가 적은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와 싸울 정도의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라고 진언해 이에야스는 이 의견을 채용했습니다.

오케하자마

많은 수송대로 군자금을 지키며 출진하고 자신은, 마루네토리데(丸根砦)로 공격을 개시해 군사를 사이로 유인합니다. 농성을 그만두어 결사의 각오로 야전을 시작한 마루네토리데의 오다군이었지만 군사의 수는 불과 400, 이에야스측은 1000으로 두배가 넘는 군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사히 군자금은 오다카성으로 옮겨지고 마루네토리데도 괴멸 상태가 됩니다. 한편, 와시즈의 츠키시로에는 아사히나 야스모토가 인솔하는 2,000의 군세가 공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오다군은 와시즈 츠키히로에서 농성에 들어갔지만, 역시 이쪽도 지키는 군사는 400 정도였습니다. 명장 야스모토는 쉽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통지를 들은 요시모토 본대는 오케하자마에서 휴식을 취해, 노부나가는 멈추는 가신들을 뿌리치고 흥망을 걸어 출진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이에야스는 오다카성에 입성해 이른 아침부터 움직인 군사들을 쉬게 하고 스스로도 쉬며 요시모토 본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요시모토 전사'라는 청천벽력같은 통지가 날아옵니다. 혼란에 빠져 성중이 분주하게 되는 중, 이에야스는 '전장에서는 정보가 잘못되거나 조작될 수도 있다' 며 냉정히 당분간 상태를 보려 합니다.

거기에, 이에야스의 백부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의 사자라고 자칭하는 아사이 토추우(浅井道忠라는 무사가 와서 '요시모토님이 전사하셨으므로, 내일이라도 여기에 오다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 말합니다. 그러나 백부에게서의 소식이라 해도 현재는 오다의 산하에 들어가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일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확인을 위해 파견하고 있던 스스로의 부하의 보고로, 겨우 요시모토의 죽음을 믿는 일이 된 이에야스는 성을 지킬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성을 퇴각할 결의를 합니다만, 밖은 이미 밤이었습니다.

오카자키성(岡崎城)

패자의 퇴각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이야에스는 야음을 틈타 아버지 히로타다가 죽은 이래, 이마가와가가 지배하는 원래의 본거지 오카자키성(岡崎城)으로 돌아가기를 결의합니다. 심야, 철퇴를 개시하는 이에야스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야스모토의 전사소식을 듣고 배신한 고쿠진들이었습니다. 이윽고 이에야스 군대는 상금을 노리는 토호들 1000명 남짓에 둘러싸여 버렸습니다. 절체절명에 빠졌으나, 아사이 토추우가 노부모토의 이름을 대며 오다의 세력이라고 피력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오카자키성에 도착해 수킬로 멀어진 다이쥬우지(大樹寺)라는 절에 머물어 성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처음에는 아마가와군이 남아 있었으나, 이윽고 오다군을 두려워해 도망쳐 버립니다.

상황을 확인하고 빈성을 접수한 이에야스는 향년19세로 인생으로 처음으로 성주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마가와의 본거지인 슨푸에는 요시모토를 적남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질의 몸이면서, 이에야스는 왜 슨푸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잘 모르지만, 아마 그의 혜안이 아마가와가의 멸망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