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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일본 대하소설 ) 관련 사항 등[기타 일본대하 소설]소설

야마자키 전투(23/25)

by 자한형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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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키 전투(1) : 잡동사니의 역사이야기

츠츠키 준케이, '호라가토게를 자처하다'

덴쇼 10(1582) 62일에 일어난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여러 무장들은 각자 행동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가코에(이가코에), 하시바 히데요시는 츄고쿠대귀환(츄코쿠 대귀환 )을 했습니다. 610일 히데요시는 정오에 아마가사키(尼崎)에 도착해, 그곳의 무장들에게 자신의 아군이 되도록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데요시의 요청에 따라 아리오카성(有岡城) 성주 이케다 츠네오키(池田恒興), 이바라키성(茨木城) 성주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 타카츠키성(高槻城)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라고 하는 무장들이, 즉석에서 히데요시 측의 참전을 표명합니다. 당연히 아케치 미쓰히데는 상당한 충격을 받습니다. 셋츠중이라 불리는 그들은 오히려 미쓰히데에와 가까이 지내던 무장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참전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미츠히데도 히데요시와 같이 기나이의 무장에 아군이 되도록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득하던 무장 중 하나가 츠츠이 준케이입니다. 그는 여기서 '호라가토게()를 자처한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

호라가토게라고 하는 것은 교토 남부와 오사카의 히라카타의 경계에 있는 고개의 이름입니다. 전국시대에는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귀신들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오는 무서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야마자키 전투 시에 이 호라가토게에서 츠츠이 준케이가 정세를 보고 움직이지 않으며 정세를 관망했기 때문에, 지금도 일본에서는 우위인 측에 붙으려고 정세를 관찰하는 일을 '호라가토게를 자처한다'고 합니다. 분명히 지형상 호라가토케에서 전투의 정세는 확실히 보였겠지만, 아쉽게도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호라가토케는 이미 마쓰히데의 영토로 만약 정말로 준케이가 호라가토게에 있었던 것이라면, 그 시점에서 자동적으로 미츠히데 측에 붙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요? 덴쇼 10(1582) 611일의, 혼노지의 변으로부터 9일이 지난 시점에 미쓰히데는 준케이에게 재삼, 재사번 참전해달라는 권유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 준케이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 날, 호라가토게에 진을 친 미쓰히데는 호라가토게에서 야마토 코오리야마성(大和郡山城)에 있는 준케이에게 마지막으로 출병을 재촉합니다. 즉 호라가토게에 있었던 것은 준케이가 아니라 미쓰히데였던 것입니다.

사실 준케이는 미쓰히데에게서 어마어마한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시골 사무라이였던 준케이를 성장시켜 주고 지금 머물고 있는 코오리야마성의 축조를 도운 것도 미쓰히데 였기에 그는 쉽사리 돕지 않는다고 할 수 없었으나, 이미 상황은 미쓰히데에게 엄청나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일부 부하를 미쓰히데에게 보내 원조하도록 하고 본인은 히데요시에게 서원서를 보내 히데요시편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코오리야마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음날인 12, 히데요시는 본진을 20이동시켜 셋츠 토미타에 진을 쳐, 노부나가의 미츠오, 간베 노부타카와 오다가 중신 니와 나가히데와 합류합니다. 한편의 미츠히데는, 준케이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호라가토게를 나와 전장이 되는 강의 건너편의 야마자키로 향합니다.

야마자키 전투(2)

히데요시, 노부나가의 복수를 하다

덴쇼 10(1582) 천하의 판세를 두고 덴노산에서 야마자키 전투가 발발합니다.

혼노지의 변에서 어느덧 11일째, 아케치 미쓰히데를 보통 '삼일 천하'라고 말하지만 이런 표현이 으례 그렇듯이 딱 삼 일만 천하를 거머쥐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피눈물을 흘리며 주군의 복수를 부르짖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밑으로 오다의 세력들이 쏙 쏙 흡수됩니다. 한편의 미츠히데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키운 츠츠이 준케이도 오지 않고('호라가토게를 자처하다'), 의지하고 있던 딸 가라샤의 남편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도 참전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2일에 호라가토게에서 출진한 미쓰히데는, 직속 부하 16천의 군사를 이끌고 히데요시군 4만과 맞서 싸우려 전장인 야마자키(山崎)로 향합니다.

미쓰히데에게는 적은 군사임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는 데에 한가지 자신을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사카에서 교토로 향하는 교통의 요소 야마자키에서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지형상 히데요시의 대군은 좁은 길목을 거쳐야 해서 쉽게 빠져 나갈 수 없었습니다. 치약을 짜내듯이 조금씩 기어나오는 적군을 쳐부수면 승산은 남아 있다고 미쓰히데는 생각했겠지요.

전황도

드디어 결전의 날의 아침이 되어 덴쇼10(1582) 613, 하늘에서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흐린 날이었습니다. 좁은 장소의 출구에 진을 치고, 선봉을 배치하는 미쓰히데의 군세 앞에 이윽고, 히데요시군의 선봉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와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이 덴노산의 기슭에 진을 칩니다. 그 뒤에는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 히데요시의 남동생), 그리고 히데요시가 등장 합니다. 전투는 오후 4시 반 무렵에 개시되었습니다. 우선 미츠히데군의 사이토 토시조(斉藤利三), 나미카와 소부(並河掃部), 마츠다 타로우자에몬(松田太郎左衛門), 츠다 나오토키(津田正時)등의 무장들이 선봉으로 히데요시군의 선봉에 돌격 합니다. 그러나 최강의 오다군의 선봉은 그렇게 간단히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미츠히데군의 선봉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그 사이에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츠키오키(池田恒興), 가토 미쓰야스(加藤光泰), 키무라 하야토(木村隼人)등이, 요도가와의 가장자리를 비집고 나가 미쓰히데군의 동쪽을 공격합니다. 여기를 지키는 것은, 이세 요소츠카사(伊勢与三郎), 미마키 산자에몬(御牧三左衛門),스와 히다모라(諏訪飛騨守)였지만, 이들은 주력이 아닌 2군 부대였기에 금새 고전에 빠져 버립니다. 거기를 노려 히데요시군 본대의 대부분이 그 곳으로 향해 빠져 나가 덴노산의 동쪽의 넓은 부분에 나와 버립니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불과 1시간 후의 일이었습니다. 본대가 넓은 장소에 나와 버리면, 그 다음은 수의 문제로 네배에 달하는 히데요시군에 완전히 전황히 기울었습니다.

야마자키 전투

기세등등한 히데요시군과는 다르게 미쓰히데군은 패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시간 정도의 전투로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황혼이 찾아오며 드리워진 어둠을 틈타 미쓰히데는 본진의 후방에 있는 카츠류지성(勝龍寺城)으로 도망칩니다. 그러나 성은 성채 보다 좀더 나은 정도의 히라죠오(平城: 평지에 지은 성)이기 떄문에 히데요시군의 추격을 맞아 싸울 수 있는 성이 아닙니다. 미쓰히데는 밤이 되는 것을 기다려 본거지인 오미 사카모토성(坂本城)을 목표로 해 카츠류지성에서 나옵니다. 사카모토성으로 미쓰히데는 재기를 기약하며 도망쳤습니다.

죽창에 찔려서 생을 마감한 아케치 미쓰히데

그러나 일행이 야마시나 오구루스(栗栖)에 도달했을 때, 돌연 수수풀에서 죽창들이 쑥 나옵니다. 이 죽창들은 도망치는 무사 사냥을 하고 있던 주변의 마을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즉석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다시 오미에 향하지만, 갑자기 미쓰히데가 낙마 해 버립니다. 조금전의 죽창에 맞아 어느새 겨드랑이로부터 대량의 피를 흘리든 미쓰히데는 그 자리에서 할복 해 목을 빼앗기지 않게 땅 깊은 곳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몇번이나 포스팅 했듯이 범행 동기와 과정이 미스테리에 쌓여 있는 미쓰히데이지만, 죽을 때도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또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목을 찾기도 합니다. 음모론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요. 과연 미쓰히데는 정말로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