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가하라 전투(1) : 잡동사니의 역사 이야기{ 세키가하라 1~ 22{9없음} 큐슈 세키가하라1.2
마에다가의 미래는? 아사이나와테 전투
게이쵸 5년(1600년) 8월 8일, 호쿠리쿠의 세키가하라라 전투인 '카가 아사이나와데 전투'가 있었습니다.
게이쵸4년(1599년), 병으로 쓰러진 마에다 토시이에는, 병상에 부인 마쯔를 부르고, 유언서를 씁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장남 토시나가는, 향후 3년간 카가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차남 토시마사는 반대로 가나자와성(金沢城)을 나와서는 안 된다. 오사카와 카가의 양쪽 모두 8,000 씩 군사를 두어 만약 도요토미에 모반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오면, 토시마사는 즉석에서 그 군사를 인솔해 상경해, 토시나가의 군사와 합류해 싸우도록 해라
마에다 토시이에와 히데요시는 어릴적부터 친구였습니다. 그런 히데요시가 작년(게이쵸 3년) 아직 어린 히데요리를 남겨 세상을 떠날 때, 토시이에의 손을 잡아 '제발 히데요리를 지켜주게나'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부탁한 것을 그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만, 토시나가는 이것을 어기고 가나자와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에다 토시나가 초상화
마에다 토시마사 초상화
그러자 이야에스는 재빨리 트집을 잡습니다. '그가 무단으로 히데요리의 보호를 중지한 것은, 문치파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이라 하고, '카가 정벌'을 하려 합니다. 이대로는, 모반을 일으켰다고 해서 이에야스에 공격받아 마에다 가문이 멸망 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결국 토시나가의 어머니인 마쯔가 인질로 에도에 가기로 해, 이에야스는 카가에의 출병을 멈춥니다. 이윽고 7월, 이에야스가 비운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한 후시미성공방전(후시미성 공방전)이 발발하는 것과 동시에, 토시나가도 행동을 일으킵니다.
그 무렵 카가 남부에서 에츠젠에 걸친 호쿠리쿠 일대의 영주들은, 도요토미 측인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권유를 받아, 대부분의 사람이 서군측에 섰습니다. 이에 토시나가는 자신이 이에야스 측인 일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호쿠리쿠 각지의 도요토미측의 성의 공략에 착수합니다. 8월 3일에는, 야마구치 무네나가(山口宗永)의 카가 다이쇼우지성(大聖寺城)을 공략하고, 그 기세를 타 에츠젠에 진공합니다. 하지만 '적의 대군이 바다로의 공격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어, 일단 가나자와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카가 코마츠성(小松城) 성주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는 그들의 철퇴를 쫓아 아사이나와데에서 8월 8일의 심야, 공경을 시작합니다.
아사이나와데 전투가 일어난 곳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에 총을 사용할 수 없는 토시나가 부대는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게다가, 코마츠성에서는 차례차례로 원군이 출진해 옵니다. 그는 여기서 단념했으나, 본대의 고전을 우연히 듣고, 무장등이 원군으로 도착해 어떻게든 버텨 냈습니다. 이윽고,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토시나가는 나가시게와 전투중이었기에 참가는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후에 이야에스는 호쿠리쿠에서 그의 활약을 칭찬해, 에도 막부에서 '카가 백만석'의 다이묘가 됩니다.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 때 마에다 가문역시, 모리 가문이나 사나다 가문처럼 멸망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친이 '가나자와성에서 떨어지지 말아라'라고한 토시마사가 식솔이 오사카성에 있는 것을 핑계로 서군이 됩니다. 전투 당일이야 거성인 나나오성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결국 도쿠가와의 손에 의해 노토의 영지가 몰수되고 교토에서 은거합니다. 하지만 이 몰수된 영지가 형의 것이 되었기에 마에다 가문의 손실은 실질적으로 '0'입니다. 마에다 가문은 훌륭히 지켜졌습니다만, 히데요리를 지키기를 바랬던 그들의 부친 토시이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세키가하라 전투(2) 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게이쵸5년(1600년) 8월 10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앞두고,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카이성 앞에 진을 칩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미쓰나리는 오카이성으로 들어갑니다
후시미성 함락과 함께 할복한 성주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목은 곧 오사카에 옮겨집니다. 미쓰나리는 이 목에 예를 다하고, 타카미무스히(高御) 대(台)에 놓아 오사카성의 쿄우하시구(京橋口)에 놓았다고 합니다. 「토리이 가문 중흥보(鳥居家中興譜)」에 의하면, 이 일을 전해 들은 모토타다와 은고가 있는 교토의 상이 사노 시로우에몬 코레유시(佐野四郎右衛門此由)라는 인물이 서둘러 오사카에 가서, 경비 몰래 모토타다의 목을 훔치고 밤새 교토에 돌아가, 절에서 공양한 후 은밀하게 매장했습니다. 얼마뒤 목이 사라진 것을 알고 탐문을 하는 미쓰나리에게 그가 자백하자, 미쓰나리는 그의 충의에 감동해 없던 일로 해 주었습니다.
8월 9일, 미쓰나리는 3,000뿐인 군사를 인솔하고, 미노의 타루이(垂井)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타루이에게는 군이 머무를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 미쓰나리는, 서군에 참여 하는 일을 표명하고 있던 오카이성(大垣城) 성주 이토 모리마사(伊藤盛正)의 노신 이토 타노모(伊藤頼母)를 설득해 오카이성에 머우르게 됩니다.
오카이성 전경, 세키가하라 전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오타니 요시쓰구는 호쿠리쿠 방면의 공략을 시작하는 와중에, 미쓰나리는 군의 일부를 타나베성(타나베성 공방전), 아노쓰성(安濃津), 마츠자카성(松阪城)으로 파견합니다. 이즈음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나 나가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는 미노, 오와리 방면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해 오사카성에 머무는, 서군의 태세가 갖추어집니다. 이 분위기를 보면 서군측은 이미 이 시점에서, '세키가하라 부근에서 동군과 결전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미쓰나리는, 타카하시 슈리(高橋修理)라는 서 미노의 무장을, 아군에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같은 서 미노 출신의 히로세 고노쓰게(広瀬兵庫助)라고 하는 무장에게 얼마의 금전을 가지고, 그에게 보냅니다.「세키란요시(石卵余史)」에는 이 둘의 회담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알고있는가? 얼마 뒤면 큰 전투가 일어난다네. 군을 가지고 서군으로 참전해 주지 않겠는가? 승리가 밝아올 때, 미노의 절반을 주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무로마치 때부터 이 토지에 뿌리를 박고 살았다네. 실은, 히데요시 공이 우리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네. 하지만 우리의 가훈은 '지금 이상의 물건을 바라지 말라.'라는 것이네, 미노의 절반은 매력적이지만, 가훈을 어기면 어떤 천벌을 받을지 모르니, 우리는 중립을 유지하려 하네."
"여기서 우리의 제안을 무시한다면 도쿠가와의 편이라 의심되어 영민이 몰살당하고, 영지를 빼앗길 지도 모르네!"
"어째서 적대하지도 않는 우리를 공격하려 하는가? 천하를 지배할 대단한 인물에게 그냥 이 영지를 중립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고 싶네."
'천하를 지배할 대단할 인물'이라면 영지를 치는 것이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성공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중립을 완수해 낸 것 같습니다.
세키가하라전투(3) 동군, 오카자키성 착진
게이쵸5년(1600년) 8월 11일,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분의 선봉이 미카와 오카자키성(岡崎城)에 도착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 소식을 들은 이야에스는 오야마에서 평정을 엽니다.
회군을 시작하는 이야에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본의 다이묘들은 동군이나 서군 한쪽에 참가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이끄는 동군의 멤버는,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 아리마 토요우지(有馬豊氏),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이코마 가즈마사(生駒一正),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쿠와야마 모토하루(桑山元晴),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히또쯔나야기 나오모리(一柳直盛)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 호리오 타다우지(堀尾忠氏), 야마노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등 이었습니다. 7월 25일에 행해진 오야마의 평정(오야마 평정)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붙는 일을 표명해, 자신의 성을 동군의 거점으로 제공한 다이묘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오야마 평정에서 서군으로 간 것은 사나다 부자를 포함한 극히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오야마는 에도보다 한층 더 북쪽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기나이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도중에 거점이 필요합니다. 오야마 평정에서, 동군에 서는 일을 표명한 여러 무장이, '자신의 성을 부디 사용해 주십시오'라며 거점을 제공했습니다. 요코스카성(横須賀城)의 아리마 토요우지, 요시다성(吉田城)의 이케다 데루마사, 코우코쿠지성(興国寺城), 슨푸성(駿府城)의 나카무라 카즈타다(中村一忠), 누마즈성(沼津城)의 나카무라 카즈히데(中村一栄), 카케가와성(掛川城)의 야마노우치 가즈토요, 오카자키성(岡崎城), 니시오성(西尾城)의 타나카 요시마사, 하마마츠성의 호리오 타다우지, 카리야성(浜松城)의 미즈노 가쓰나리, 키요스성의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이러한 성이 이에야스에 제공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대대로 이어온 가신 혼다 다다카쓰, 이이이 나오마사가 군감이 되어, 8월 1일에 오야마를 출발한 선봉대는 게이쵸5년(1600년) 8월 11일, 타나카 요시마사가 제공한 오카자키성에 도착했습니다.
이후에, 그들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제공한 키요스성으로 향해, 키요스를 거점으로, 서군에 붙은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 히데요시가 밀었던 산포시)의 기후성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선봉이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울까요? 8월 4일에 오야마를 출발한 이에야스는, 5일에 거성인 에도성에 돌아가,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다테 마사무네를 시작해 많은 무장에게 전투 후의 은상을 제시하며, 동군에 참전하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아직 이에야스의 입장은 도요토미의 가신입니다. 이 전투는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기 때문에, 하나라도 많은 아군을 끌여들여야 합니다.
이야에스는 수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선봉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호리 타다마사(堀忠政) 등의 서포트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군에 속하는 일을 표명하고 있긴 했지만, 처자를 오사카에 남긴 채인 사람도 많이 있었으니까, 언제 배신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서군이 되어 버린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나 이토 스게카타(伊藤祐兵) 등 에게도 연락을 해, 결전 시에 동군에 붙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이에야스가 쓴 편지는 150통이 넘는다고 합니다. 오사카에 남은 처자를 감금해 인질로 무장들을 아군으로 한 미쓰나리와 비교하되는 점이지요. 역시, 사람의 취급에 대해서는, 이에야스 쪽이 우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에야스에 있어서, 제일호 예상외였던 것은 서군의 총대장으로 모리 데루모토가 된 것입니다. 그는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킷카와 히로이에의 불참전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을 종용합니다.
결국, 세키가하라 당일 이 두 명의 행동은, 전황을 크게 좌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8월중에, 사전의 대책을 끝마친 이에야스는 9월 1일에 조용히 에도성을 출발해 서쪽으로 향합니다. 「게이쵸기(慶長記)」에 의하면, '9월 1일에 출진한다'고 한 이에야스에게, 이시카와 휴우가 마모루(石川日向守)가 '9월 1일은, 서쪽에 힘이 차는 불길한 날이니 큰 일의 시작으로 삼기에는 좋지 않는 날입니다'라 말합니다. 이에, 이에야스는 말합니다. '서쪽의 힘은 벌써 차고 있다. 지금부터 그것을 스스로 부수려 한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4) 다테 마사무네의 행보는?
게이쵸5년(1600년) 8월 12일, 우츠노미야성(宇都宮城)에 들어가 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가 기타메성(北目城)의 다테 마사무네에게, 협력해 동군에 서달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8월 12일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서 다테 마사무네에게 협력 요청이 갑니다. 바로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에 서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키가하라는 기후에 있습니다. 즉, 마사무네와는 강 건너 불인 이야기 입니다. 미야기현, 게다가 우츠노미야성에 있는 히데타다는 이 후, 세키가하라에는 늦지 않고 참존해 동군의 주력이 됩니다. 한편 서군의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는 오사카성에 머문 채로, 주력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 동료들 입니다. 현재까지, 드라마나 소설로 종종 그려져 온 세키가하라이제만, 이 때, 동시에 일어난 토호쿠의 세키가하라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때, 우에스기는 서군측 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동군측에 참가 해 토호쿠의 동군을 이끈것이 다름아닌 다테 마사무네 입니다.
다테 마사무네 초상화
원래, 생전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만약의 일이 있었을 때 아직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해 도요토미가를 지키도록, 오대로와 오봉행을 시작으로 하는 부하들과 여러가지를 약속을 해 놓았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그 약속을 최초로 찢은 것은, 다름아닌 이에야스와 마사무네입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자, 원래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 피어오르고 있던 무투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점화됩니다.(이시다 미쓰나리 습격) 그리고 서서히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게이쵸 4년(1599년) 이야에스의 6번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松平忠輝)와 마사무네의 장녀 이로하공주(五郎八姬)가 약혼합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유력 영주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킨 히데요시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때, 우에스기가 지배하고 있는 아이즈는, 원래 마사무네의 영지입니다. 오다와라 정벌의 출발이 늦어진데다, 카사이 오사키 잇키의 주모자라 의심돼( 카사이, 오사키 잇키) 마사무네의 영지는 대폭 줄고,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의 것이 된 아이즈는 가모 우지사토가 죽은 뒤, 우에스기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우대한 우에스기이기 때문에, 이대로 도요토미의 세상이 계속 되면 한층 더 영지가 줄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사무네는 원래의 영지, 다테군도 포함해 영지를 되찾고 싶어 했기에 도요토미에 반기를 드는 이에야스의 편에 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천하가 다시 혼란스럽게 되면 그 혼란을 타고, 다시 오슈의 패왕이 되는 것도 가능할지 모릅니다. 아니요 아직도 나이 젊은 정종이라면, 천하를 노리는 일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이러한 계산 아래서 아이즈 정벌과 동군에 설 것을 각오합니다.
이 때, 이에야스가 명한 여러 무장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쪽의 시라카와구치(白河口)는 이에야스 본인과 아들 히데타다가, 동쪽의 센도구치(仙道口)에서는 사타케 요시노부 (佐竹義宣), 시노부구치(信夫口)에서는 다테 마사무네, 북쪽의 요네자와구치(米沢口)는 모가미 요시미쯔(最上義光), 서쪽의 츠가와구치(津川口)에는 마에다 토시나가(前田利長)와 호리 슈지(掘秀治)가 맡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토호쿠가 분주하게 되는 중에, 우에스기 가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7월 22일에는, 우에스기의 가로 나오에 키네츠구가 에치고 잇키를 선동해, 현재의 에치고의 영주인 호리 슈지를 견제합니다.(에치고 잇키) 이때 마사무네는 북상해 온 이에야스가 오야마에 도착한 7월 24일, 이미, 우에스기령의 최북단에 있는 시라이시성(白石城)에 공격을 시작해 다음날인 25일에는 함락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황이 바뀝니다. 후에, '오야마 평정'이라고 불리는 25일의 군의에서 이에야스는 함께 아이즈 정벌로 온 여러 장군에게, 아이즈 정벌을 중지하고 서쪽으로 돌아갈 것임을 발표합니다.(오야마 평정) 이미 7월 19일부터, 이에야스가 부재중으로 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명령을 받은 모리 히데모토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우에스기는 왜 추격을 하지 않았을 까요?
이것에 대해, 키네츠구가 이에야스를 토호쿠에 끌어당겨, 그 사이에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는 밀약이 있었다던가, 반대로 이에야스가 미쓰나리의 공격을 유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아이즈 정벌을 구실로 후시미성을 부재중으로 했다던가 라는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만, 모두, 확고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이에야스는, 여러 장군에게 '서군에 붙고 싶은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여기서 떠나 주어 함께 와 주는 사람은 남아 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처자는 오사카성에 인질 상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야마노우치 가즈토요등 토카이도에 성을 가지는 무장등이 솔선해 지성과 병량을 제공하는 전면 협력에, 그 자리에서 서군으로 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에 의해, 잠시 아이즈는 정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차남 유우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우츠노미야성에 배치해 우에스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과 동시에, 마사무네나 요시미쯔의 동향에 주위를 기울이도록 명하고 자신은 거성인 에도성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사타케 요시노부(佐竹義宣)의 고취입니다. 아이즈정벌에 참여하겠다고는 했지만,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 그들에게 이야에스는 의심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북 간토의 무장들에게 사타케의 동향을 조사해 달라고 하고 에도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여러 영주들에게 편지를 보내지요.
백만석 보증문서, 이것으로 마사무네도 대영주가 될지도...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는 타지마를, 가토 기요마사에는 히고, 치쿠고를 보증하고, 마사무네도 8월 22일부로, 승리한 뒤 카리타, 다테, 시노부, 니혼마츠, 시오마츠, 타무라, 나가이 등 옛 영토 7곳 즉, 50만석을 증가시킬 약속을 합니다. 이것을「백만석 보증문서(百万石のお墨付き)」라 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을 중심으로 구성한 토카이도의 서쪽으로 향한 선발대가 제대로 동군에 설지 판별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철퇴하는 이야에스를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내버려 둡니다. 어째서 추격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드라마 '천지인'처럼 의를 중시하는 카게카츠였기에 추격을 금지시켰던 것일까요?
이 후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때 우에스기의 추격이 없었던 것이, 천하를 나눈 분기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추격을 진언했지만 거부당한 키네츠구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가미의 영지를 점령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공합니다. 그것이, 세키가하라의 전투와 같은 날에 발발하는 하세도우 전투입니다. 마사무네는 여기서 동군으로 출병해 우에스기와 싸웁니다. 하지만 정작 세키가하라가 불과 하루만에결착이 붙어 버립니다. 뭔가 시원찮은 마사무네는 이야에스의 말을 무시하고 우에스기를 공격하다 2만석만 영지가 증가합니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아직 남아 있었으니, 후에 하세구라 쯔네나가(支倉常長)와 관련된 일이 일어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5)
세키가하라의 전초전, 기후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8월 22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기후성(岐阜城) 공방전'으로, 최초의 야전이 시작되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기후성 공격을 위해 진군하는 동군
8월 8일에는 호쿠리쿠에서 아사이나와테 전투(아사이나와테 전투)가 일어나는 등 세키가하라의 전초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토카이도를 서쪽으로 진군하는 동군은 카즈토요(一豊)의 카케가와성(掛川城)을 거치고, 마사노리의 오와리 키요스성(清洲城)으로 진군합니다. 이런 이들 앞을 도요토미 측에 붙은 오다 히데노부(織田秀信)의 거성 기후성이 막아 섭니다. 기후 성주 오다 히데노부는, 그 오다 노부나가의 적손으로 키요스 회의(키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가 후견을 맡았던 산포시 입니다. 이 때 그는 21세의 젊은 무사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사이토 도산의 난공불락의 이나바야마성을 노부나가가 겨우 점령해(이나바야마 공방전), 기후성으로 이름을 바꾼 이 성은 견고하기나 화려하기가 비할데 없었습니다.
오다 히데노부 초상화
하지만 이 난공불락의 성에 진군하는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 야마노우치 가즈토요(山内一豊)의 세 명 입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야마노우치 가즈토요는, 원래 히데요시 산하의 무장입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부아였지요. 노부나가가 이 기후성에 있었을 무렵, 그들도 모두 기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기후성의 지리는 익숙했습니다. 이케다 데루마사는 노부나가와 젖형제의 가계로, 이전에는 기후 성주를 맡고 있었으니까, 기후성은 그들의 손바닥 안이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8월 22일 그들은 기후성에 도착합니다. 히데노부는 과감하게 요격을 결의합니다. 그것도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로 등장합니다. 사실 이것은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의 군대에 기운을 불어 넣고, 상대에게 자신이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임을 강조해 공격에 망설임을 주려는 작전이었습니다만, 통하지 않습니다. 대패한 히데노부는 기후성에서 농성을 시작하나, 이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입니다.
기후성 함락되다
다음날 23일에는, 후쿠시마대, 이케다대, 야마노우치대가 일제히, 성벽으로 진군해 총공격을 시작해 금새 성안으로 쳐들어 옵니다. 적은 총원 3만 5천의 대군입니다. 거기에에 비해, 성을 지키는 것은 불과 6천이지요. 게다가, 원래 의욕 이 없던 성병들은, 항전을 단념해 기후성은 함락 돼 버립니다. 히데노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하려 하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그에게 '우리는 노부나가님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설득을 해 그를 살게 합니다.
결국, 히데노부는 코노야마에 보내져 불가에 입문해 5년 후의 게이쵸10년(1605년) 5월 8일, 26세의 젊음으로 죽게 됩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야사에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전국시대 삼걸 중 하나인 노부나가의 본가의 혈통은, 여기서 단절되어 버립니다.
세키가하라 전투(7)
신출귀몰한 시나다, 우에다성 공방전
게이쵸5년(1600년) 9월 2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의 하나.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가 항복을 권고하며 우에다성(上田城)을 포위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게서 끝까지 성을 지킨 우에다성 공방전이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초상화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하지만 여기서 서군에 붙은 극히 일부의 무장이 다름아닌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였습니다.(이누부시의 이별)
사나다는 소국으로 이 전국의 세상을 지혜와 힘으로 살아 남아 온 일족입니다. 도요토미에도 토쿠가와에도, 그다지 도움을 받지 않고, 은혜도 느끼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국을 둘로 나눈 천하를 판가름 하는 전투입니다. 중립으로 있을 수는 없는 이상, 그들은 동서 어느 쪽이 이겨도 살아 남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에야스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이고, 이에야스의 양녀인 코마츠도노(코마츠도노)와 결혼한 장남 노부유키는 동군에, 서군의 영웅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딸을 아내로 하고 있던 차남 유키무라와 아버지 마사유키는 서군에 붙기로 합니다. 마사유키와 유키무라는 그 날에 군사를 되돌리고, 노부유키는 그 일련의 경위를 이에야스에 고합니다. 아버지와 동생과 언쟁을 하고, 끝에는 자신의 편이 된 노부유키에게 이야에스는 기뻐하며 '신슈를 주겠다'고 합니다. 도쿠가와가 이기면 현재의 영지는 장남의 것이 되고, 도요토미가 이기면 현상 유지이기에 전황이 어떻게 되어도 사나다 가문이 생존할 것은 확실입니다.
히데타다군의 이동로
이윽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등의 토카이도를 따라 올라가 기후성을 공격합니다.(기후성 공방전) 뒤이어, 이에야스의 아들 히데타다가 나카센도우를 타고 서쪽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는 것이 마사유키가 있는시나노 우에다성이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2일, 히데타다는 시나노 코모로성(小諸城)에 들어가 우에다성에 항복을 권고합니다. 당연하게도 마사유키는 그 권고를 거부해 곧 바로 소규모 전투가 개시됩니다. 여기서, 선봉이 된 것은 장남 노부유키가 인솔하는 군사 였습니다. 그는 동생 유키무라가 지키는 이세사키성채(伊勢崎砦)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유키무라는 재빨리 성채를 버리고 우에다성으로 후퇴합니다. 하지만 우에다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히데타다 본대 쪽은 3만 5천이라고 하는 대군에도 불구하고, 불과 2천의 마사유키군의 게릴라전법으로 계속 골치를 썩입니다. 게다가 군의에서 의견이 둘로 갈려 혼란이 옵니다.
'우에다성의 공략은 보류해, 일각이라도 빨리 이에야스의 본대와 합류해야 합니다.'라는 의견과 '우에다성공략은 필수이기 때문에 공격을 계속해야 합니다.'라는 의견이 대립합니다. 이 혼란에 4일이나 소비했고 우에다성의 공략도 실패한 채로, 결국 히데타다는 우에다성 주변에 모리 타다마사(森忠政: 란마루의 남동생) 등을 남겨, 본대에의 합류를 서두르게 됩니다. 그러나,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9월 19일입니다. 전투는, 이미 끝나 버렸습니다. 물론, 아버지 이에야스에게 지독하게 꾸중을 듣게 되지요. 후에 우에다성에 있었던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를 비롯한 이들은 죽이려한 히데타다에게, 노부유키는 '저부터 죽여주십시오'라고 해, 사나다 일족은 코노야마로 추방되고 목숨은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8) 쿄고쿠 다카쓰구 회군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3일, 쿄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거성인 오츠성으로 귀환했습니다.
쿄고쿠 다카쓰구 초상화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서군은 오카이성에(서군, 오카이성에 착진), 동군은 오카자키성에(동군, 오카자키성 착진) 착진해 전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오미주변의 수호를 맡는 명문이었던 쿄고쿠가문은 전국시대에 아자이가에 패배해, 다카쓰구가 가문을 잇는 무렵에는,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에서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편에 섰고, 시즈가타케(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의탁했었습니다. 완전히 패배하는 쪽에만 섰었네요. 그런데도 아직 가문이 남아있다니, 어떤 의미로 대단합니다. 쿄고쿠 가문이 아직 건재했던 것은 실은, 누나(혹은 여동생)인 쿄고쿠 다츠코(쿄고쿠 다츠코)가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인을 밝히던 히데요시는 그녀를 측실로 맞아들여, 쿄고쿠 가문은 2만 5천석의 영지를 받게 됩니다.
게다가 쿄고쿠 다카쓰구 자신은 아자이 세 자매중 둘째 하츠(죠우코우인)과 결혼하는데, 그녀의 누나인 챠챠(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했고, 동생인 고우(소우겐인)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결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부의 위광으로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비와호 근처의 물류의 중심지인 오츠성(大津城)을 맡게 됩니다. 이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카쓰구는 예전의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는 듯 서군의 편에 서서,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와 합류할 예정이었지요.
생각보다 동군의 진군은 빨랐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이동로입니다
미쓰나리의 참전요청을 받은 요시쓰구는(요시쓰구 설득) 곧바로 거성인 츠루가성에 귀환해 호쿠리쿠의 여러 장군을 서군에 참전시키고 있었습니다.(요시쓰구의 에츠젠, 카가 설득) 이것을 가로막은 것이, 카가의 마에다 토시나가였습니다. 그를 겨우 무찌를 서군(아사이나와테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다카쓰구는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쓰구에게서 요청이 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나는 미노로 향하므로 그쪽으로 와주게'라는 것이었습니다. 기후성이 함락된(기후성 공방전)것을 알게 된 서군은 요시쓰구나 다카쓰구를 그쪽으로 파견해 도쿠가와의 군세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카쓰구는 처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합니다. 군을 반전시켜, 이에야스의 동군에 붙을 결의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변은 이미 서군이 점령한 곳입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거성인 오츠성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는 비와호의 북해안의 시오츠(塩津)로 향해, 배를 타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을 서군이 모를리도 없고, 그의 앞에 위기가 닥쳐오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0)
우에스기의 세키가하라, 하세도우 전투
게이쵸5년(1600년) 9월 9일, 나오에 키네츠구가, 모가미령의 침공을 개시해, 거성 요네자와성(米沢城)에서 출진했습니다.
나오에 키네츠구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이에 나오에 키네츠구는 추격을 진언하나,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겐신공은 적의 후미를 쫓지 않았다.'며 추격을 불허합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아무튼 키네츠구는 이번에는 모가미령으로 진군을 개시합니다. 아이즈 정벌에 다테 마사무네를 비롯한 토호쿠의 무장들은 우에스기를 토벌하러 모였었습니다. 하지만 이야에스가 돌아간 일로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의 거성 야마가타성에 집결하고 있던 난부 토시나오(南部利直), 도자와 마사모리(戸沢政盛), 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는 각각의 거성에 돌아가 버립니다. 다테 마사무네 조차 아이즈 정벌을 이야에스 없이 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빼앗은지 얼마 안된 시라이시성(白石城)을 철퇴해 우에스기와 화목을 맺습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단독으로 120만석의 아이즈를 지배하는 우에스기를 상대로 싸우게 된 것입니다. 8월 18일 요시아키는, 적자 요시야스(義康)을 인질로 내어, 거의 무조건 항복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강화를 겁니다. 하지만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황을 보고 행동을 하려는 모가미의 시간끌기입니다. 이를 간파한 키네츠구는 9월 3일 모가미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9일, 키네츠구는 2만 4,000남짓의 군사를 인솔하고, 거성 요네자와성을 출진합니다. 동시에, 요이타중(与板衆)인 키무라 치카모리(木村親盛)과 나카야마성(中山城)을 맡고 있던 요코타 무네토시(横田旨俊)가 인솔하는 별동대가 타카시마성(高島城)을 출진합니다. 키네츠구 본대는 하타나성(畑谷城)에, 별동대는 카미야마성(上山城)으로 향합니다. 비교적 방비가 낮은 주위의 지성을 점령한 키네츠구 군세는 서서히, 요시아키카 있는 야마가타성에의 포위를 시작합니다. 우에스기령의 쇼나이(庄内)에서는 사카타성(酒田城主) 성주 시다 요시히데(志駄義秀)가 모가미가와(最上川)을 따라서, 오우라성(尾浦城) 성주 시모 요시타다(下吉忠)가 육십리가도(六十里街道)를 넘어 모가미령으로 향합니다.
하세도우 전투 개요도
9월 13일 우에스기의 대군세를 앞에 두고, 불과 350명의 군사가 지키는 하타다니성에 요시아키는 성주 에구치 아키키요(江口光清)에 철퇴 명령을 내립니다만, 아키키요는 농성을 결행합니다. 거기서, 키네츠구가 성의 남쪽에 위치하는 카타쿠라산(片倉山)을 점거하고, 맞은편에 총포대를 배치해, 양쪽에서 동시 공격을 하자 금새 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그 후도, 야치성(谷地城),사가에성(寒河江城), 시로이와성(白岩城)등을 차례차례로 점령해,모가미의 영지의 반은 우에스기의 것이 됩니다.
서쪽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던 운명의 9월 15일, 모가미의 지성 중에서는 가장 견고한 하세도우성(長谷堂城)으로 진군합니다. 다만, 카미야마성으로 향한 별동대 2,000남짓은 성병과 복병의 협격을 당해 고전해, 16일에는, 키무라 치카모리가 전사 해, 요코타 무네토시가 나카야마성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이쪽은 참패가 되었습니다. 이제 키네츠구는 하세도우성을 점령하고, 모가미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1) 전초전, 쿠제카와 전투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전초전인 쿠제카와 전투(杭瀬川の戦い)를 하는 것과 동시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카야마(岡山)에 포진 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카이성(大垣城)을 나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아침 일찍 기후성을 나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오를 넘겨 아카사카성(赤坂城)에서 미노 오카야마에 도착해, 여기를 동군의 본영으로하고 진을 쳤습니다. 조속히 열린 군의의 자리에서, '적의 본영인 오카이성에는 조금의 군세를 향하게 하고, 주력은 사와산성을 공격해 그 기세로 오사카성으로 진군한다.'라는 방침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본심은 세키가하라에서 결착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동군의 이 작전이 서군에게 흘러간다면 미쓰나리가 오카이성에서 공격해 나올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오카이성에서 미쓰나리가 농성 작전을 펼치면, 먼저 오카이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쿠제카와 전투 디오라마
실은 9 월초의 시점에서,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는 아마 농성 할 것이기 때문에, 오카이성에 수공을 할 생각이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이에야스에게 큰 오산이 생겼습니다. 토카이도로 향한 이에야스와는 반대로, 나카센도우를 진군 한 아들 히데타다의 군이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가 지키는 우에다성에서 금족 되어, 13일까지 도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히데타다에게는 동군의 최다의 군세인 3만 8천명이 있었습니다. 농성 하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수의 군세로 성을 둘러싸야 합니다. 즉, 본대가 없는 이 시점에서는 반대로 미쓰나리의 농성은 곤란합니다. 게다가, 농성전은 시간도 걸리기 때문에, 그 사이에 서군의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내걸고 출진하면, 필사적으로 사전 교섭을 해서 아군으로 만든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들이 일제히 서군에 배신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꾀어내어 결착을 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도중에 덴노가 개입해, 어중간하게 화목해 미쓰나리 세력을 일소 할 수 없게 되어도 곤란하므로, 교토에 가까운 장소는 안됩니다. 그렇기에 세키가하라 근처에서 결착을 내야 했습니다.
한편, 같은 9월 14일 서군 본영의 오카이성에는 미쓰나리를 시작해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에야스의 우마지루시(馬印)를 확인해, 아연실색합니다. 그들은 우에스기를 공격하려 이에야스는 아직 토호쿠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에 미쓰나리는 심복 시마 사콘 카쯔타케(島左近勝猛)에 500 정도의 군세를 맡겨 적진의 정찰로 향하게 합니다. 황혼을 틈타, 동쪽으로 오카이성 서쪽에 오카야마, 그 사이를 남북으로 흐르는 쿠제카와(杭瀬川)을 조용하게 건넌 시마 사콘은 적진의 가까이까지 다가간 뒤, 방화해 적을 도발합니다.
동군에서는 나카무라 카즈히데(中村一栄)와 아리마 토요우지(有馬豊氏)가 나와 응전합니다. 당분간의 소규모 전투의 뒤, 일제히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오려고 하는 사콘 부대, 나카무라 부대와 아리마 부대는 당연히 추격했습니다. 그런데 , 나카무라대와 아리마대가 강을 건넌 그 때에 복병으로 잠복하고 있던 우키타 부대가 일제히 총격을 가합니다. 본진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 상태를 보고 있던 이에야스는 연이어 넘어지는 자신의 군세를 보고, 당황해서 군사를 철수시켰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초전 쿠제카와 전투는 서군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조속히 열린 직후의 군의로,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기세를 타고 선제공격을 합시다!'라고 제안합니다만,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는, 정말로, 이대로 오카이성을 무시해, 한층 더 서쪽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라고 생각합니다.
서쪽은 오미 미쓰나리의 거성 사와산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9월 7일의 시점에서, 모리 히데모토,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등의 서군의 주력부대가, 세키가하라 근처의 난구산(南宮山)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하기로 합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오후 7시 미쓰나리는 오카이성의 방비로 사위 후쿠하라 나가요시(福原長堯)에게 7천 5백의 군사를 맡기고, 나머지 4만의 전군을 인솔하고, 운명의 세키가하라로 향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2)
전야, 히데아키는 무엇을 생각하나?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드디어,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전날입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아침 일찍 기후성을 나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오를 넘겨 아카사카성(赤坂城)에서 미노 오카야마에 도착해, 여기를 동군의 본영으로하고 진을 쳤습니다. 조속히 열린 군의의 자리에서, '적의 본영인 오카이성에는 조금의 군세를 향하게 하고, 주력은 사와산성을 공격해 그 기세로 오사카성으로 진군한다.'라는 방침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본심은 세키가하라에서 결착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동군의 이 작전이 서군에게 흘러간다면 미쓰나리가 오카이성에서 공격해 나올 것을 예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오카이성에서 미쓰나리가 농성 작전을 펼치면, 먼저 오카이성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쿠제카와 전투(쿠제카와 전투) 후,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하기로 합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4일 오후 7시 미쓰나리는 오카이성의 방비로 사위 후쿠하라 나가요시(福原長堯)에게 7천 5백의 군사를 맡기고, 나머지 4만의 전군을 인솔하고, 운명의 세키가하라로 향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화
서군은 오카이에서 세키가하라까지, 약 16 km의 밤길을 행군했습니다. 이 날은, 밤 늦게 비가 내려, 비에 젖은 가도를 행군 하는 중, 미쓰나리는 도중에 부대를 떠나 나가츠 마사이에(長束正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등, 동쪽을 맡은 부대와 전투의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마츠오산(松尾山)에 진을 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에게 전령을 보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원래 이날, 오카이성의 군의에 출석했어야 했지만 왠지 오카이성에는 오지 않고 그대로 마츠오산으로 향해 버렸습니다. 이에 미쓰나리는 불안을 안은 것입니다. 그는 히데아키에게 미쓰나리, 오오타니 요시쓰구 등 서군 주요 멤버의 서명이 들어간 서약서를 보냈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지닌 1만 5천의 군세는 동군, 서군 어느 쪽에 있어서도 매력적입니다.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마사(木下家定)의 아들로, 아이의 없는 네네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도 그를 자신의 아이와 같이 귀여워해, 한때는 자신의 후계자라고 보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도도노가 히데요리를 낳은 일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뀝니다. 13세 때, 모리가의 분가인 코바야카와가에 양자로 보내져, 다음해 치쿠젠, 치쿠고 32만석을 상속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대패해 에츠젠, 키타노쇼에 좌천 되어 버렸습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다시 치쿠젠, 치쿠고의 영주로 돌아옵니다만, 실은 이것은, 당시 오대로의 한 사람인 이에야스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즉, 히데아키에게 히데요리는 원망의 대상이며 은의를 느낄 이유도 없고, 오히려 은의를 느낀다면 이에야스와 그의 편인 의모였던 네네에게서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군의 총대장 모리 가문의 분가 코바야카와 가문의 당주입니다.
히데아키가 전장에서 입었던 옷
미쓰나리가 보낸 서약서에는 '히데요리가 15세가 될 때까지, 관백의 자리를 양보한다.'라고 쓰여져 있었고, 관백이 되면 교토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비용으로 '하리마 일국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중신 이나바 마사나리(稲葉正成)와 히라오카 요리카츠(平岡頼勝)에게는 '각 각 오미 10만석을 준다', 그리고 군자금으로 '황금 300매를 준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나바와 히라오카앞에는 혼다 타다카츠, 이이 나오마사의 서명에 있는 동군의 서약서도 와 있었습니다. 동군으로부터의 서약서에는 '서군의 일원으로 후시미성 공방전에 참가한 일은 일체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과 '세키가하라에서의 행동에 따라서 기나이의 2국을 준다'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19세인 소년 무장에게는 너무 무거운 천하의 판세를 읽어야 하는 결단입니다. 결국 그는 서군에는'봉화를 신호로 마츠오산을 물러나 전투에 참가한다.'라고 약속했습니다. 한편, 동군에는, '기회를 봐 서군을 배반해, 동군 측에 참가해 싸운다'라고 했습니다. 원래 그는 후시미성 공격의 뒤 병을 핑계로 오미에 틀어박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미쓰나리가 출병요청을 하자 어쩔 수 없이 출병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에 미쓰나리 부대를 시작으로 서군의 주력 부대는 세키가하라에 잇달아 도착합니다. 이야에스를 도망치기 못하게 하려고 서북쪽에 진을 쳐, 홋코쿠가도와 나카센도우를 봉쇄한 것은 오전 1시경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포진도
미쓰나리는 히데아키에게 전령을 보낸 뒤, 야마나카 마을에 진을 친 오오타니 요시쓰구를 방문해 최종 협의를 끝내고 자신은 홋코쿠 가도를 내려다 보는 사사오산(笹尾山)에 진을 쳤습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서군이 세키가하라로 향해 이동중'의 소식을 오전 2 시경에 듣게 됩니다. 그는 조속히, 전군에 출진 명령을 내립니다. 선봉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와 쿠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그 뒤을이어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한층 뒤에는 마쓰다이라 타다요시(松平忠吉)가 맡게 됩니다. 마쓰다이라 타다요시는 이에야스의 사남으로, 실은 이 자리는, 이에야스의 후계자인 히데타다의 자리였지만, 그는 우에다성에서 발이 묶여 늦어버렸습니다. 이윽고, 오전 4 시경 서군의 포진이 완료되었습니다. 1시간 늦은 오전 5 시경,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동군은 오전 6시에 포진을 완료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3)
천하는 누구의 것?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게이쵸 5년(1600년) 9월 15일, 천하를 판가름한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7월에 들어가 본격적인 세키가하라가 시작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중진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죽어 도요토미 가문 내의 균열(히데요시 유언)이 점차 심해집니다. 그런 가운데, 거두의 죽음으로 따라 오대로중에서도 필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종종의 상경 요청에 응하지 않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 모반의 혐의를 덮어 씌워 아이즈 정벌을 결행하게 됩니다.(카게카츠의 상경 거부) 이렇게 되어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을 시작합니다.(후시미성 공방전) 이에 오야마에서 평정을 해, 회군을 결의한 이야에스는 말머리를 돌립니다.(오야마 평정) 여기서 그는 여러 무장에게 편지를 써, 동군으로 끌어 들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동군과 서군은 세키가하라에서 맞붙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포진도
오전 8시, 이이 나오마사가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발포한 것을 신호로 전투의 포문이 열렸습니다. 처음은 호각의 전투, 아니 오히려 서군이 약간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투 개시부터 2시간이 지나도 서군의 반수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윽고, 미쓰나리의 오른 팔로 활약하고 있던 시마 사콘이 부상하기에 이르러, 미쓰나리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재삼 구원을 요청합니다만, 시마즈는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미쓰나리는 여기서 총공격의 봉화를 올립니다만, 이에야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리나 요시카와도 나가츠카도 그리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도,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습니다.
이에야스는 '코바야카와는 반드시 동군에 선다'고 확신하고, 한시라도 빠르게 결단시키려고 코바야카와군에 총을 발사 합니다. 정오가 지나 히데아키는 간신히 군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서군의 오오타니 요시쓰구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히데아키의 배반으로, 차례차례로 배반하는 이가 속출해, 오오타니군에 공격 합니다. 전황은 단번에 뒤집어졌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는 할복, 고니시와 우키타는 패주, 끝까지 싸운 미쓰나리군도 붕괴됐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불과 반나절에 종결합니다. 이 싸움의 승리로 도요토미 가문 내 톱의 위치를 획득한 이에야스는, 이윽고 천하로 돌진하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4) 오오타니 요시쓰구 전사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오오타니 요시쓰구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모습
전날밤 세키가하라에서 결전을 결의해 오카이성을 나온 이시다 미쓰나리가 인솔하는 4만의 군세가 세키가하라에 도착한 것은 일자가 바뀐 오전 1 시경이었습니다. 미쓰나리는 이미 난부산에 포진 하고 있던 나츠카 마사니에(長束正家),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등과 최종 협의를 하고, 세키가하라의 북서쪽에 위치하는 사사오산(松尾山)에 본진을 두었습니다. 오전 2시, 미쓰나리가 한밤 중에 이동을 한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려, 그 최후미에서 이동을 개시합니다. 그리고 오전 4시에 서군, 오전 6시에 동군이 포진을 완료합니다. 남서의 마츠오산에는 전날에 이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가 도착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욱한 안개가 개인 오전 8시, 이이 나오마사가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공격을 한 것을 계기로, 천하를 판가르는 전투의 막이 올랐습니다.
쌍방의 병력은 함쳐 8만~10만 이라고 합니다. 이 때, 동군의 사전 교섭역이었던 쿠로다 나가마사의 가신 케야 몬도(毛屋主人)가 이에야스에게 '적은 2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합니다. 이 2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소 과장도 있지만, 나가마사의 사전 교섭에 의해 몇명의 서군 무장이, 동군에 내통 하고 있는 것이 현상이었습니다. 우선, 난구산 주변에서는 킷카와 히로이에사 있었는데, 킷카와는 모리의 분가로, 모리군의 선봉대이기 때문에 그가 움직이지 않는 한 그 후방에서 진을 치는 모리 히데모토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히데모토는 서군 총대장 모리 데루모토가 오오사카성에 머물고 있기에 대리와 같은 형태로의 세키가하라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난구산 주변의 서군은 움직이지 않아 버립니다.
다음으로, 미쓰나리의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대는 원래 이에야스의 동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미쓰나리와 함께 있었을 때, 전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서군에 말려들어갔을 뿐입니다. 그는 쿠제가와 전투이후 야습을 제의하나, 미쓰나리가 일축하자 화가나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개전과 동시에 격돌한 것은 이시다대 VS 쿠로다&호소카와대, 우키타대 VS후쿠시마 마사노리대, 고니시 유키나가대 VS데라자와 히로타카대, 오오타니 요시쓰구대 VS도도 다카토라&교고쿠 다카토모대 였습니다. 최초 1시간 정도, 일진일퇴였습니다. 아니, 약간 서군이 우위인 상태였지만, 이시다대의 선봉인 시마 사콘이 부상해, 전란안에서 자취을 감추는 무렵에는, 형세가 역전합니다. 참지 못한 미쓰나리는 오전 11 시경에 총공격의 봉화를 올립니다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 버립니다. 게다가 미쓰나리는 움직이지 않는 시마즈대에게 향해 사자까지 보냅니다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투 개시부터 4시간 정도 지난 정오 무렵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대가 드디어 마츠오산을 하산해, 오오타니대에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에 주변에 있던 와키자카, 쿠츠키, 오가와, 하라츠카의 4부대도 동군에 붙어, 일제히 오오타니대에게 돌진했습니다.
오오타니 요시쓰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미쓰나리가 가장 신뢰를 가지고 있던 무장입니다.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를 토벌할 결의를 해, 최초로 상담했던 것도 요시쓰구였습니다. 그는 당시 한센병으로 거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천성의 지략으로 요소요소에 말방책을 구축해, 도도, 쿄고쿠 를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 때, 요시쓰구는 부자유스러운 신체로 이미 시력도 거의 없고, 가마를 타서 지휘했습니다. 게다가, 죽음을 각오했는지 투구와 갑옷을 입지 않고 손상한 피부를 숨기기 위해, 얼굴에는 복면을 한채로 손발에는 흰 옷감을 감고 있었습니다.
하라츠카 다메히로
그런 요시쓰구의 손발이 되어 지휘, 명령을 서포트한 것이 히라츠카 타메히로(平塚為広)라는 무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도도, 쿄고쿠대에 가세해 코바야카와대를 시작으로 하는 서군의 배신자들의 총공격을 받습니다. 이에 오오타니대의 유명한 무장이 차례차례로 쓰러져 가는 중, 드디어 최후를 각오한 타메리로는 적장의 목 하나하나에 와카를 붙여 주군 요시쓰구에게 보내도록 지시한 후, 밀려 드는 적진에 돌입해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사자에게서 들은 요시쓰구는 크게 웃으며 말합니다.
'무용에도 와카에도 감동했다! 지금부터, 그 녀석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나서, 가신 유아사 고스케(湯浅五助)에게 할복을 도울 것을 명한 뒤, 배를 열십자로 찢어, 장렬히 할복을 했습니다. 오오타니대의 괴멸로, 더욱 더 패색이 짙어지는 서군은 이윽고 우키타대, 고니시대가 차례차례로 전선 이탈해, 히데이에도 유키나가도 이부키산으로 자취을 감추고, 미쓰나리 자신도 패주 합니다.
유아사 고스케 일러스트
오후 2 시경, 끝까지 세키가하라에 있던 시마즈대가, 결사의 돌파로 남동측의 이세지에 퇴각을 개시해, 난구산에 있던 군단도, 역시 이세로(伊勢路)로 퇴각해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불과 반나절에 끝나게 되었습니다. 전투 종료 직전 도도 다카토라의 조카 도도 다카노리(藤堂高刑)는 전투의 긴장상태에 지쳐 물을 마시려고 산중에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눈앞의 나무의 그림자 아래로 한 명의 무장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 이상으로 피곤하고, 상처도 심한 다름아닌, 유아사 고스케였습니다. 가 아닙니까! 고스케는, 동군에서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무장이었으나, 심하게 지쳤기에 쉽게 포박되어 버렸습니다.다카노리에게 잡힌 고스케는 그에게 부탁을 합니다.
'기다려주게! 지금 나는 막 이 주변에 주군 요시쓰구밈의 목을 묻었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찾지 말아 주게!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게, 제발 부탁이네. 나는 요시쓰구님에게서 '병에 걸린 얼굴을 적에게 보여지면 안된다. 반드시 발견되지 않는 곳에 묻어 줘.'라는 명령을 받았네. 주군의 명령을 지킬 수 없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네. 무사의 정으로 약속해 주면, 나의 목을 당신에게 주겠네!"
고스케의 주군의 생각해 감동한 다카노리는 대답합니다.
"알았다. 약속한다! 신에 맹세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이에 기뻐한 고스케는 무저항인 채 다카노리의 손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진으로 돌아와 그 목을 숙부 다카토라에 보이면, 그는 크게 기뻐하며 본진의 이에야스에게 보고합니다. 물론, 이에야스도 많이 기뻐했으나, 다카노리에게 묻습니다.
고스케를 쿠비짓켄 하는 이야에스
"고스케 정도의 무장의 목이 이렇게 깨끗하다니, 거의 저항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것인가?"
"우연히 그를 만났을때 매우 지치고, 많은 상처를 입고 있어 쉽게 목을 베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요시쓰구의 목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 주변은 찾아 봤는가?"
다카노리는 체념하고 대답했습니다. '네, 실은 그의 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스케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약속을 하고 목을 베었으므로, 비록 이에야스 님이어도 이야기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벌하여ㅠ주십시오."
이에 그 자리에 긴장이 달립니다. 주군의 '이야기하라'는 명령에 '싫습니다'라고 거역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리에서 목이 베어져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당분간의 정적 이에야스가 크게 웃습니다.
"대단하구나! 의리가 있는 젊은이구나! 정직 하기도 하거니와, 요시쓰구의 목도 너의 공훈이 될텐데..."
라고 말하면서, 다카노리를 가까이에 불러, 스스로의 칼과 창을 포상으로 하사했던 것입니다. 현재의 세키가하라 옛 전장에는 요시쓰구의 무덤과 고스케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후에, 도도 가문에 의해서, 그 땅에 세워 졌다고 합니다.
契りあらば 六の巷に 待てしばし
약속했었던 여섯개의 갈림길에 기다리게나
遅れ先立つ 事はありとも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15) 시마 사콘, 전사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죽은 시마 사콘(島左近)은 서군의 주요인물이면서, 오오타니 요시쓰구와 함께, 목이 발견되지 않은 인물입니다. 요시쓰구의 목에 대해서는 유아사 고스케와 도도 다카노리의 일화가 있습니다만, 사콘에는 그런 일화도 없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시마 사콘과 직접 대결한 쿠로다 부대 병사의 회고록 「후루사토이야기古郷物語」에도,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몸의 털이 곤두섰다'라고 썼듯이, '귀신 사콘(鬼左近)'의 이명에 어울리는 맹장은 에도시대가 되어도, 쿠로다의 가신들의 이야깃거리로 남았습니다. '밀려 드는 대군에 녹아들어 자취을 감추었다', '깊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창을 휘두르며 분전 해, 장렬히 전사했다.'라고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온전히 보지 못해, 아무도 그 최후를 확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귀신도 때려잡는 시마 사콘!
그 정도의 무장이 죽은 것을 확인으로 하지 않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신초코기(信長公記)」에서는 행방 불명, 「세키가하라 군키모노(関ヶ原軍記)」에서는 서쪽지방에 은거했다고 하며,「세키가하라 마을 역사(関ヶ原町史)」에서는 교토의 절에 숨어서, 이 앞 32년간이나 생존하고 있었 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콘 정도의 맹장이 살아 있었다면 오사카의 진에게 참전하지 않을 것은 없기 때문에, 역시 이 세키가하라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마 사콘, 그의 이름은 카츠타케(勝猛)하고도 하고, 키요오키(清興)라고도 합니다. 이름에서 부터, 그 전반생이 수수께끼에 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출신은, 오미, 오와리, 대마도 등 다양합니다만, 현재는, 다이와 동부의 헤구리(平群)군의 쿠니진으로, 츠츠이씨의 가로인 시마 가문의 사람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해지고 있습니다.
뜬금없이 쓰시마에 있는 사콘의 묘
코후쿠지(興福寺)의 다몬인 에이슌(多聞院英俊)의 「다문원일기(多聞院日記)」에는, 에이로쿠10년(1567년)에, 그 헤구리의 성에서, 25세의 아들이 친아버지인 성주나 양모 등, 일족 9명을 살해하고 당주가 된 이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사콘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시마 사콘의 이름으로, 역사상에 등장하는 것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의 가로인 마츠쿠라 우콘 시게노부(松倉右近重信) 이라는 무장과 함께, '츠츠이의 우콘 사콘(筒井の右近左近)'이라고 칭해지게 되고 나서 입니다. 그러나, 덴쇼 12년(1584년)에 주군 준케이가 병사해, 그 후를 이은 아들 사다쯔구(定次)가 술에 빠진 실망스런 주군이기 때문에 대립이 생겨 이윽고 츠츠이 가문이 균열이 생겨,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나가(秀長), 히데야스(秀保) 부자를 시중들고, 조선 침략때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이와 도요토미(大和豊臣) 가문이 개역이 되어, 시마사콘은 료닌(방랑무사)로서 불우한 나날을 보내, 출가도 생각하는 나날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다가옵니다.
당시 오미 미구치성(水口城) 성주였던 미쓰나리는 스스로의 사콘에게 가서 4만석의 반인 2만석을 주모 '꼭 나의 가신이 되어 주게.'라고, 사콘에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사콘이 미쓰나리의 가신이 된 것은 그가 19 만석의 다이묘가 되어, 사와산성의 성주가 되고 나서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어 창작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만큼 사콘을 갖고 싶었다라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만약, 미쓰나리가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출세하는 타입이 아니고, 내정으로 출세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무공을 보충해 주는 맹장으로 이름 높은 사콘에 주목했을 것입니다. 사콘은 사콘대로 주군으로 삼을만한 지장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三成に 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
미쓰나리에게는 지나친 것이 두개 있네
島の左近と佐和山の城
시마의 사콘과 사와산성이라네
미쓰나리에게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1명입니다. 히데요시가 죽은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그의 지위가 흔들리는 중, 사콘은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우선, 우에스기의 태도에 격노해 아이즈 정벌로 향하는 이에야스를 암살하도록, 미쓰나리에개 진언 합니다. 도리를 존중해 망설이는 미쓰나리에게 사콘은 '수단을 선택하고 있으면, 목적은 달성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설득을 거듭해 결국 설득합니다. 이렇게 해서, 토호쿠에 간 이에야스를 이시베 숙소(石部宿)에서 매복해, 야습을 할 수 있도록 800의 군사를 준비합니다.
도쿠가와의 위기, 이시베 숙소
오봉행의 1명인 나츠카 마사이에(長束正家)와 그가 함께 암살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사전에 새어 이에야스가 알게 되어, 아이즈로 출발을 앞당겨 미수로 끝나 버립니다. 사콘은 많이 분해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에서 사콘은 쿠제가와 전투에서 승리해 사기가 오릅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오전 8 시경에 이이 나오미사 부대의 발포에 의해서 개시된 전투에서 우선, 선두에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 부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부대가 부딪치는 중에, 개전에서 1시간 되었을 무렵, 사콘은, 100명에 못 미친 정도의 군세로 본진인 사사오산에서 돌격해 나갑니다. 상대는 쿠로다 나가마사 부대였습니다. 장병을 교묘하게 운용하고, 귀신과 같이 달려드는 사콘의 모습은 쿠로다 부대를 번농시켜, 차츰 쿠로다 부대의 사기는 내료 갑니다. 그러나, 쿠로다 부대도, 정면에서는 맹장 사콘을 죽이는 일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해, 이미 총포대를 우회 시켜, 위험한 순간에 총을 발사합니다.
쿠로다 나가마사의 총포대
피격당한 시마 사콘
혼전 중에, 말등에 있던 사콘은 조준사격을 해 중상을 입어 버립니다. 이 쿠로다 부대의 측면공격은 사콘 뿐만이 아니라, 이시다 부대를 비롯한 서군에 크고 깊은 상처를 입게 했습니다. 일단, 목책 안으로 돌아온 사콘은 지혈도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말을 타고 나와서 적에게 돌격해 나가,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후에, 사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그는 창작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을 앞에두고 부상당한 채로 뛰어나간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6) 쇼나이의 란과 쵸주인 모리아츠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사츠마의 전국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의 '후토코로카나타(懐刀: 호신용 칼)'로 불린 쵸주인 모리아츠(長寿院盛淳)가 전사 했습니다.
후토코로카나타(懐刀)의 모습
오늘의 주역인 초주인 모리아츠에 대해 간단히 알아봅시다. 그는 원래 무로마치 막부에서 관령직을 대대로 계승하고, 오닌의 란의 발단이나 되는 상속자 분쟁이 있었던 하타케야마씨의 분가의 사람입니다. ,본명은 하타케야마 모리아츠(畠山盛敦)입니다. 조부의 대에 사츠마로 옮겨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리아츠 자신은 3세에 코노야마에서, 11세부터 쵸주인(長寿院)에서 공부한 승려로, 그 출가한 후의 이름이 쵸주인 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를 쵸주인 모리아츠라 합니다. 아들 타다히데(忠栄)가 출가해 아타 요시후사(阿多吉房)로 칭하고, 그 후의 자손들이 '아타'를 자칭하는 일로, 그도 아타 모리아츠, 혹은 아타 쵸주인 모리아츠라 부르기도 합니다. 승려의 지식을 충분하게 사용한 외교 교섭에 능했었던 것 같고, 그 재능을 평가한 시마즈 요시히사, 요시히로 형제에게 대발탁 되어 갑자기 군단의 요직을 맡았다고 합니다.
쵸주인 모리아츠
덴쇼 15년(1587년) 큐슈 정벌을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싸움에 진 시마즈 가문은 본래라면, 모든 것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을, 사츠마와 오스미의 영지가 남았던 것도 모리아츠의 외교술 덕입니다. 도요토미 정권하에 들어간 시마즈의 가신으로서 태합검지의 봉행을 역임해, 요시히사가 은거한 다음은 요시히로의 가로로서 활약하는 모리아츠였지만, 이 즈음에서 시마즈가에 내분이 일어납니다. 히데요시는, 진 시마즈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시마즈 굴지의 용장 이쥬인 타다무네(伊集院忠棟)를 주군인 요시히사나 요시히로보다, 후대 하는 일로, 시마즈가의 약화를 꾀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용장으로 이름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책략에 의한 후대인지 실력에 수반하는 중용이었는가는 미묘하긴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히데요시의 수많은 우대조치에, 시마즈의 갈등은 심해집니다. 결국,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가 게이쵸 2년(1597년), 이쥬인 타다무네를 후시미의 시마즈 저택에서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는 모반을 도모하고 있었다'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모반은 시마즈측의 의견이고, 진실은 모릅니다. 이무튼, 이에 입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은, 타다무네의 아들 이쥬우인 타다자네(伊集院忠真)가 양휴유가 미야코성(都城)에 농성 해, 철저 항전 의 자세를 보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쥬인 타다무네
쇼나이의 란(庄内の乱)이라 불리는 이 반란은 결국 게이쵸 5년(1600년)의 3월에 진압됩니다만, 이 미야코성이 12개의 지성을 가지는 견고한 성이었기에, 용이하게 공락하지 못하고 시마즈 가문은 여기에 상당한 인원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게이쵸5년은 바로 세키가하라가 있던 해입니다. 이 내란을 때문에,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에 많은 군사를 데려 갈 수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요시히로 일행은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참전하기 위해서, 최초로 향한 후시미성에서, 이에야스의 부재중 성을 맡는 토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에 입성을 거절 당해, 어쩔 수 없이 서군으로 세키가하라에 참전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사츠마에서 들은 모리아츠는 '주군이 위급하다!'이라며, 7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 말을 몰아, 세키가하라로 달려 갑니다. 어떻게든 세키가하라의 개전전에 시간이 맞은 모리아츠를 마중나간 요시히로는 기쁜 나머지 손을 잡고 진바오리(陣羽織)를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시마즈가의 진바오리(재현)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 이른 아침 세키가하라 전투의 막이 열립니다. 원래 서군으로 참전할 것이 아니었던 요시히로는 싸움이 시작되어도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재삼의 요청도 무시해 움직이지 않는 시마즈대 부였지만, 금새 서군의 대패가 결정적으로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서군으로 참가한 전투에서, 적인 동군에 항복하기에는 시마즈의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한때 할복을 각오하는 요시히로에, 조카 시마즈 토요히사(島津豊久)가 극구 말립니다. 여기서 전선 이탈을 진언 한 것이, 모리아츠입니다. 게다가, 일부러 도쿠가와 측의 앞을 돌파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마즈의 배진(島津の背進)입니다.
이 때, 모리아츠는 '사츠마까지의 5백리, 주군을 지켜 훌륭히 전사 해, 그 이름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라고, 병사들에게 역설해 달려나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돌격은 예상대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군은 차례차례로 전사 해, 남은 군사도 부상으로 쓰러져 가는 가운데 토요히사가 전사 하면, 모리아츠도 그 뒤를 잇습니다. 그래, 전투전에 주군에게 받은 진바오리를 입은 모리아츠는 '내가, 시마즈 요시히로이다!'라고 자청해 적의 주의를 모읍니다. 명장의 목을 들려고 모이는 적군의 한 명, 야마모토 요시즈미(山本義純)의 손에 의해서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결국 요시히로는 훌륭히 전선 이탈에 성공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7) 적도 놀래키다! 시마즈의 배진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탈출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토키무라(時村)에 도착해 미즈구치(水口)를 거쳐, 오사카로 향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동상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시마즈대는 끝까지 서군으로서 전장에 남아있었습니다. 시마즈대는, 전투의 한중간, 완전히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보다 모산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자를 보내고 참전을 재촉해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싸움을 한다.'라며 끝까지 관망했습니다. 시마즈대를 인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와 두 명의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4 형제'로 알려진 사츠마의 무장입니다. 원래 시마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맹세를 주고 받은 사이여서, 요시히로가 일부러 사츠마에서 세키가하라에 온 것도, 사실은 이에야스 때문입니다. 아직 후시미성에 있던 이에야스를 방문한 요시히로는 그 때, 이에야스로부터 '나는 지금부터 아이즈 정벌로 향하기 때문에, 후시미성의 부재중을 부탁하네.'라고 말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데리고 있는 수로는 체면이 서지 않는다.'라고 사츠마의 형에게 군사를 더 보내어 주도록 요청합니다. 하지만 당시 사츠마는 내전 상태였기 때문에, 너무 많은 군사를 소비하는 일은 어렵웠습니다. 어떻게든 1,500 정도의 수를 기나이에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야스가 아이즈로 향한 후, 부재중이 된 후시미성에 향하지만, 이 때, 후시미성을 맡고 있던 것이 토리 모토타다(鳥居元忠)는 완고한 성격 때문에 요시히사의 진심을 의심해 입성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혹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던 모토타다가, 다른 무장을 끌어 들이는 일을 거절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 후시미성은 일종의 미끼이기 때문에 성실하고 정직한 모토타다는 거기에 시마즈를 말려 들게 하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같은 무렵,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친아버지 키노시타 이에마사(木下家定)도, 인질로 후시미성에 들어가는 일을 신청하고 있습니다만, 모토타다는 이것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모토타다에게 후시미성으로의 입성을 완고하게 거절 당한 요시히로는 우연히 오오사카에 체재하고 있다가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켜, 얼떨결에 서군에 참가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서군의 패색이 진해진 전장에서 미쓰나리까지 패주 한 지금, 어떻게든 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군에 항복하는 것은 '사츠마의 네마리 용'의 자긍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적을 베다 전사 하는지, 전장을 탈출하는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 합니다. 요시히로는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거나 할복하려 했지만, 조카인 시마즈 토요히사가 맹반대해서 결국, 전장을 탈출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동군의 후방에 있는 이세로(伊勢路)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후 2시에 시마즈 부대는 돌격해 적을 뚫으려 하고, 혼다 타다카츠와 이이 나오마사가 그들을 막아 섭니다.
시마즈의 배신(보라색은 배신한 서군)
시마즈대는 지면에 점을 찍듯이 일정 간격으로, 군사가 앉아 총을 쏜다고 하는 작전을 짜, 뒤의 군사가 총을 쏘는 동안에, 앞의 군사가 그 군사의 뒤로 후퇴해, 뒤이어 그 군사가 총을 쏘아, 그 사이에 다시 앞의 군사가 뒤로 간다고 하는 동작을 반복해 공격 하면서, 서서히 후퇴해 갔습니다. 그런데도 밀어닥치는 대군에 조카인 토요히사는, 요시히로의 진바오리를 입고 분투해, 미끼가 되었습니다. 이 탈출극은, 다른 사람이 전원 전사 해도, 요시히로 한 명이 살아 남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요히사는 전사하고, 이에 쵸주인 모리아쯔(長寿院盛淳)가 '내가 시마즈 요시히로다!'라고 외쳐, 적의 주의를 필사적으로 끌어당깁니다. 하지만 역시 그도 전사해 버립니다. 두 명의 대역의 분전 덕분에, 요시히로는 어떻게든 전장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합니다.(쵸주인 모리아츠)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에 토키무라에 도착해, 미즈구치를 거치고, 이후에 오사카로 향했습니다. 18일 후, 고향의 토미노구마성(富隈城)에 가까스로 도착했을 때는, 불과 80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시마즈의 탈출극은 '시마즈의 배진(島津の背進)'이라고 하며 적인 동군에게서도 절찬되었다고 합니다. 무사하게 사츠마에 돌아가기야 했지만, 시마즈를 이대로 놔 둘 리가 없습니다. 이 후, 이에야스는 '시마즈 정벌' 의 명령을 내립니다. 과연 시마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세키가하라 전투(18) 배신자의 보신, 사와산성 공격
게이쵸5년(1600년) 9월 17일, 그저께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배신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등 세력이 보신을 위해 사와산성(佐和山城)을 공격했습니다.
시와산성 전경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에 발발한 세키가하라 전투는 천하 판가르는 전투라고 하지만, 오후에는 거의 결착이 나 버렸습니다. 저녁, 전공의 확인을 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찾아 왔습니다. 히데아키의 배신에 의해, 단번에 전황이 이에야스 측에 유래해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는 동군 승리의 제일 공로한 것입니다. 그러나, 배신이 늦었던 일로, 이에야스가 초조 시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앞에 나아가, 배신이 늦은 일을 사과하는 것과 동시에 '사와 산성 공격의 선봉을 맡고 싶습니다'라고 신청했습니다.
사와산성은 사실상 서군의 대장(명목상 총대장은 모리 데루모토였지만, 전투가 있던 이 날 오사카성에 있었습니다)인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성입니다. 세키가하라로에서 패주 한 미나리가, 무사 사냥의 그물을 빠져 나가고, 사와산성까지 도망칠 수 있는(직선 거리로 20 km 정도)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거성을 그대로 둘 수도 없었습니다. 히데아키의 그 말을 들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쿠츠키 모토쯔나(朽木元綱), 오가와 스게타다(小川祐忠)등이 앞다투어 자신도 선봉에 서겠다고 나옵니다.
시와산성의 위치와 세키가하라 전개
그들은 모두 히데아키의 배신을 계기로, 서군에서 동군으로 붙은 인물들입니다. 여기서, 이에야스의 환심을 사, 나중에 동군에 참가한 불이익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려고 필사적입니다. 물론, 히데아키도 그럴 생각으로, 선봉을 신청한 것입니다. 군감의 이이 나오마사와 함께, 그들이 세키가하라를 출발한 것은 전투의 다음날 9월 16일이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7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1만 5천의 군세는, 두 패로 나누어져 단번에 사와산성에 쳐들어갔습니다. 이 때, 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는 2천 8백이뿐이었습니다. 자군의 패배에 사기도 추락한데다 수의 차이까지 명백, 당연하게도 반나절 만에 산성은 거의 점령당해 버렸습니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화
저녁에는, 미쓰나리의 형 마사즈미(正澄)의 할복을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하고, 이에야스는 공격을 그만두게 합니다. 그런데 , 다음날인 18일의 이른 아침에, 타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의 군사가 천수각의 문을 파괴해, 단번에 성내에 쳐들어갔기 때문에, 천수각에 있던 미쓰나리의 아버지 마사츠구(正継), 그리고 형 마사즈미가 천수각에 불을 지르고, 일족 전원이 할복하 사와산성은 함락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와산성의 선봉을 선 일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보신은 성공한 것일까요? 아니, 집은 지켜졌을지도 모릅니다만, 본인의 마음에는, 무엇인가가 크게 눌려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불과 21세의 젊음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세키가하라 전투(19) 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진 서군에 속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부키산(伊吹山) 속에서 잡혔습니다.
이부키산 전경
게이쵸5년(1600년) 9월 19일의 일 세키가하라의 촌장 린조우주(林蔵主)가, 이부키산속을 걷고 있저, 약간 먼 곳에서 '여보시오. 이리 와 주시오.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도망자였습니다. 4일전의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큰 전투가 있어, 근처는 그물 처럼 둘러쳐진 도망 무사 사냥으로 삼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때주위 마을의 태도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도망치는 무사 사냥에 참가해 포상을 받는지, 혹시모를 화를 입지 않기 위해서, 못 본 척을 하는지 입니다. 린조우주는 후자였습니다. 이 근처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성 사와 산성도 가깝습니다. 전투 자체는 동군의 승리이지만, 일반 영민들에게는, 이 앞이 어떻게 될 지 짐작도 가지 않기 때문에, 린조우주의 마을에서는 '도망자를 잡거나 비참한 일을 하지 않고, 관계를 가지지 말자' 결정했던 직후였습니다.
'우리는 관계가 없으니, 어딘가에 도망가시오.'
라고 도망자와의 거리를 줄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눈치 채이지 않게 작은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도망자는
'괜찮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부디 여기에 와 주십시노.'라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 도망자에게 가면, 그는
'나는 고니시 셋츠츠노카미(小西摂津守)입니다.' 라고 자칭합니다.
이름을 들어 또 다시 깜짝놀란 린조우주는 '빨리 도망쳐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나이후(内府: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으로 데려가고, 포상을 받으시오' 라 말합니다.
'말도 안됩니다!
'이 근처는 도망자를 사냥하려는 사람등이 많이 있습니다. 이대로 적에게 잡히는 것은 분합니다. 할복 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는 크리스찬입니다. 크리스찬의 가르침에서, 할복은 금지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잡아 주었으면 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자칭하는 도망자는, 그렇게 말하고 린조우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린조우주는 부득이, 그 도망자를 자택에 데려 돌아갑니다. 그 후, 세키가하라 영주 타케나카 시게몬(竹中重門)의 가로에 상담하고, 그 도망자를 동반해 이에야스의 부하인 쿠사츠의 무라게츠 시게스케(村越茂助)에게 데려갑니다. 그는 도망자를 포박해 린조우조는 금 10량을 받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일러스트
그는 정말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유키나가는 사카이의 호상 고니시 류사(小西立佐)의 차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키나가도 크리스찬이 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오다 노부나가에 알현 할 때에 아버지와 형이 안내역을 한 일이나, 장사의 관계로 우키타 히데이에의 집에 출입하고 있던 인연으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만납니다. 원래 상인이기 때문에, 사카이의 상인과의 연결도 있고, 경제나 유통에 정통한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부하로 출세해 나가게 됩니다. 이윽고, 덴쇼 16년(1588년), 삿사 나리사마가 실각()해, 히고국 우토(宇土) 24만석이 주어져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지에 수도원이나 교회를 시작으로, 고아원이나 한센병 치료 병원등의 건축에도 힘을 쏟았고, 사카이나 오사카에 있는 병원에도 기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인해 주위에서는, '큰 영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돈이 창고에 없는 사람이다.'라 험담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무장으로서도 매우 우수하고, 부하를 통솔하는 기량도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에서도 조선 침략의 고삐를 놓지 않으며, 조속히 강화의 교섭을 개시하거나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진군 루트를 조선에 가르치거나 여자, 아이를 놓아주거나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히고가 주어져 비슷한 시기에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와는 뜻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키요마사씨는, 그 무용이 장점이니까요. '희생을 줄이고 싶다.'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희생이 있는 것이 전쟁이다.'라는 두 명의 확집이,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계속 되어 이윽고는, 세키가하라에서의 동, 서군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이 날 체포, 아니 자수해 포박 된 유키나가는 2일 후의 21일에 잡은 미쓰나리, 23일에 잡힌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10월 1일에 로크죠가하라(六条河原)에서 처형됩니다. 유키나가의 기모노에는 처자 앞의 유서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뜻밖의 사건에 조우해 지금까지 살아 온 가운데, 제일 힘들게 괴로워했소. 이것도, 지금까지 내가 범해 온 죄의 보상을 저세상이 아니고, 현세에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특별한 은혜를 준 데우스(신)에 감사하고 있소.'
먼 이국에서, 그의 죽음을 들은 로마교황은, 유키나가의 죽음을 순교로서 취급해 시민에게 '함께 유키나가를 위해서 기도합시다'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20) 이야에스, 오츠성에 들어가다
게이쵸 5년(1600년) 9월 20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츠성(大津城)에 입성 했습니다.
카가의 마에다 토시나가였습니다. 그를 겨우 무찌른 서군(아사이나와테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다카쓰구는 홋코쿠 가도를 통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쓰구에게서 요청이 옵니다. 그것은 '지금부터, 나는 미노로 향하므로 그쪽으로 와주게'라는 것이었습니다. 기후성이 함락된(기후성 공방전)것을 알게 된 서군은 요시쓰구나 다카쓰구를 그쪽으로 파견해 도쿠가와의 군세가 더 이상 오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다카쓰구는 회군해 버립니다.(다카쓰구의 회군) 이에 서군은 그를 일벌백계로 삼기 위해 공격해, 오츠성은 점령당합니다.(오츠성 공방전)
오츠성 전경
게다가 쿄고쿠 다카쓰구 자신은 아자이 세 자매중 둘째 하츠(죠우코우인)과 결혼하는데, 그녀의 누나인 챠챠(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결혼했고, 동생인 고우(소우겐인)은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결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부의 위광으로 출세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비와호 근처의 물류의 중심지인 오츠성(大津城)을 맡게 됩니다. 게다가 그의 누나(혹은 여동생)인 쿄고쿠 다츠코(쿄고쿠 다츠코)가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인을 밝히던 히데요시는 그녀를 측실로 맞아들여, 쿄고쿠 가문은 2만 5천석의 영지를 받게 됩니다. 오츠성에서 농성할 때, 요도도노의 청을 받은 기타노만 도코로의 사자들의 설득에도, 다카쓰구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격은 갈수록 강해져, 결국 성의 중심 건물만이 남게되었을 때, 14일에 다시, 기타노만 도코로로부터의 사자가 옵니다. 이에 다카쓰구는 간신히 성문을 엽니다. 그는 죽음을 각오합니다.
하지만 그날 아침 세키가하라 전투가 있었습니다.(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결과를 모른 채로 목숨을 부지한 다카쓰구는 머리를 밀고 코노산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키가하라는 불과 반나절만에 서군의 대패로 끝나 버립니다. 오츠성을 점령한 서군의 무장들은 이에 모두 자신의 영지로 도망쳐 버립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이야에스는 9월 20일 오츠성으로 입성해, 이곳을 본영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전후처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번의 선택으로 인생이 반전!
이야에스는 다카쓰구에 만나러 오라고 사자를 보냈지만, 자신의 패배를 부끄러워한 그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몇번이나 이야에스가 사자를 보내자, 다카쓰구는 부끄러워하며 그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이야에스는 '그 대군을 오츠성에서 막아내다니, 고맙네.'라며 칭찬하고, 그에게 와카사 1국, 8만 5천석의 영지로 시켜줍니다. 그리고 남동생인 다카토모(高知)도 탄바 미야츠성 성주로 임명합니다. 다카쓰구는 드디어 마누라와 누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100%는 아니지만)으로 훌륭한 다이묘가 된 것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21) 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로 패주 하고 있던 이시다 미쓰나리가 동군에 잡혔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점심이 넘어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오오타니 요시쓰구( 오오타니 요시쓰구)의 죽음으로 형세는 어이없게 동군에게 유리하게 되어, 차례로 서군은 패주합니다.(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오오타니군 다음에 무너진 것은 고니시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부키산의 쪽으로 도주했습니다.(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그 다음은 최초부터 후쿠시마 마사노리 군과 일진일퇴의 호각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우키타군이었습니다. 코바야카와의 배반에 격노하고 있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형세가 나빠진 것을 느껴 '이렇게 되면, 히데아키라도 찔러 죽이겠다!'고, 적의 한가운데에 돌진하려다 가신에게 제지당해 유키나가와 같이 이부키산으로 도주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
결국 끝까지 노력하며 적의 공격을 막고 있던 이시다군이었지만, 잇달아 새로운 적이 더해지고, 고니시, 우키타군의 패주를 눈앞으로 봐서, 사기는 내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중신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가 방패가 되고 적의 이목을 끄는 동안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도 이부키산 방면으로 탈출했습니다. 히데아키와 배신한 무장들이 이이 나오마사의 감독아래 미쓰나리의 거성 사와산성을 공략(사와산성 공격) 하고 있는 동안에도, 서군의 무장들이 도망치고 갔다고 여겨지는 이부키산을 중심으로 대규모 도망 무사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19일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부키야마의 산중에서 자수했습니다. 그리고 게이쵸5년(1600년) 9월 21일, 이시다 미쓰나리가 스스로의 영내의 이카군(伊香郡) 코토키(高時)마을의 굴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다나카 요시마사(田中吉政)의 군사가 찾아냈습니다. 미쓰나리는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나무꾼으로 변장했었다고 합니다. 22일에, '미쓰나리 체포'의 통지가 이에야스의 앞으로 닿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이에야스에 있어 또 하나의 기쁜 통지도 도착했습니다. 그것은, 오사카성에 있는 모리 데루모토가 항복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모리가 만약 반항하면, 다시한번 세키가하라와 같은 전투를 해야했지만, 여기에 와서 이야에스는 확실히 천하를 얻은 것입니다. 새가 울때까지 기다린 이야에스는 드디어, 자신의 세상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22) 서군의 거물들 처형당하다
게이쵸5년(1600년) 10월 1일, 앞의 세키가하라의 싸움으로 패자가 되어, 그 후, 잡힌 이시다 미쓰나리등 세 명의 처형을 했습니다.
요전날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뒤에 도주해, 이부키산에서 잡힌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이시다 미쓰나리 체포되다), 고니시 유키나가(고니시 유키나가, 자수하다), 안코쿠지 에케이의 세명의 처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으므로 할복하지 못하고 자수 했습니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는 왜 할복을 하지 않았을까요?
참수당하는 이시다 미쓰나리
그를 교토까지 호송한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가 도중에, '전투에 진 이상, 깨끗하게 할복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바보 취급해 말했습니다. 미쓰나리는 '그 옛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공(源頼朝公)1은 이시바시산 전투(石橋山の合戦)에 지면서도 생명을 남겨 후에 겐지의 세상을 열었다. 이것이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반대로 일갈되었다고 합니다.
게이쵸5년(1600년) 10월 1일도 그는 교토에 수레에 실려 갑니다. 그 때 도중에 목이 마른 미쓰나리는 주위의 사무라이에게 '뜨거운 물을 달라'고 요청합니다만, 공교롭게도 뜨거운 물이 없었기에, 우연히 그 사무라이가 가지고 있던 마른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마른감은 담(痰)에 좋지 않으므로 먹지 않겠다.'라고 해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사무라이가 '곧 있으면 처형되는데 담을 아끼다니, 생명을 아까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라고 웃자 미쓰나리는 '진정한 용사란, 마지막까지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라고, 또다시 일갈했습니다.
그 후, 세 명은 로쿠죠가와라(六条河原)의 처형장에 옮겨집니다. 미쓰나리의 처형을 보려고, 인산인해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중에, 세 명은 목을 잘려 그 목은 산죠 오오하시(三条大橋)에 걸렸습니다. 당시에 미쓰나리의 행동은 부끄러웠을 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타도 이야에스'에 대한 집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입니다 [본문으로]
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1)
쿠로다 죠수이의 야망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앞두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기운을 타 재흥을 꿈꾸는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그것을 맞아 싸우는 쿠로다 죠수이(黒田如水)의 이시가키바루 전투(石垣原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쿠로다 죠수이 초상화
7월 19일에 발발한 후시미성 공방전(후시미성 공방전)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솔하는 동군의 선발대는 서쪽으로 향해 기후성을 공략(기후성 공방전)합니다. 한편 이시다 미쓰나리가 인솔하는 서군은, 아노쓰성(아노쓰성 공방전), 마츠자카성을 공략합니다. 그리고 동군으로 배신한 쿄고쿠 다카쓰구의 오츠성을 공격하면서(오츠성 공방전), 타나베성을 공격합니다.(타나베성 공방전) 호쿠리쿠에서는, 이에야스 측의 마에다 토시나가와 미쓰나리 측의 니와 나가시게가 아사이나와테에서 싸우고(아사이나와테 전투), 시나노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인솔하는 동군의 별동대가, 우에다성에서 농성하는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를 공격중이었습니다.(우에다성 공방전)
이런 대규모 전투의 전후에, 그 혼합을 틈타 가문을 재흥시키거나, 옛 영토 탈환을 목표로 해 군사를 일으키는 몰락 영주도 많이 나타납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큐슈에 이름을 떨치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아들입니다. 오오토모 가문은 아들에게 당주직을 물려주고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를 세우려 벌인 미미가와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진 것을 계기로, 몰락해 갑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을 도와 어떻게든 분고 일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린의 뒤를 이은 요시무네가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점령한 성을 방폐한 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무렵은 영지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 초상화
천하를 판가름하는 전투를 앞에 두고, 많은 영주가 군세를 인솔해 출진하고 있는 이 상황을 기회라고 간파한 요시무네는 오오토모의 옛 신하를 인솔하고, 도쿠가와측에 속하는 분고 키즈키성(杵築城)을 습격합니다. 이 키즈키성은,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가 소유한 성입니다. 타다오키는 이에야스가 최초로 행동을 일으킨 '아이즈 정벌'때부터 쭉 이에야스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성의 방비는 얇은 상태였습니다. 이 시기의 큐슈는, 도쿠가와측에 속한 히고 구마모토성(熊本城) 성주인 가토 기요마사와 토요마에 나카츠성(中津城) 성주 쿠로다 나가마사가 있었습니다. 오오토모의 과거 세력이 군사를 일으켰다 하더라도 이 양 가문에 있어서는, 별 일이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 혼란을 틈타 재기를 노리는 몰락 영주는 한 명이 아닙니다. 키즈키성이 서군의 손에 떨어지면, 눈사태와 같이 큐슈 전 국토가 서군에 기울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일을 걱정한 쿠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죠수이는, 키즈키성의 구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때, 아들 나가마사는 호소카와 다다오키와 같이 군세를 인솔해 기나이에 출장중이었기 때문에, 죠수이는 있는 대로 금은을 풀어, 료닌(방랑무사)은 물론, 농민, 직공 등 등 많은 사람을 모으고, 어떻게든 1만의 군사를 준비했습니다.
쿠로다 죠수이는 다름아닌 히데요시의 참모, 쿠로다 칸베에(黒田官兵衛)입니다. 혼노지의 변(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동요하는 히데요시에게 미소를 지으며 '최고의 기회입니다' 하며 츄고쿠대귀환을 성사시킨 이 입니다. 히데요시는 천하를 잡고 나서 가신들의 앞에서, 죠수이에게 '다음에는 누가 천하를 잡는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죠수이가 '모리 데루모토가 아닐까요...' 라고 대답하자 히데요시는 '아니, 틀렷다.... 그것은 바로 그대다! 100만의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것은 그대 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끔 있자, 히데요시에게서 경계되고 있다고 느낀 칸베에는 현역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나가마사에 당주직을 양위하고 은거한뒤 삭발해 죠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거한 다음에도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큐슈에, 그를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히데요시는 쭉 죠수이를 영토에는 돌려 보내지 않고,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히데요시가 거기까지 경계하고 있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를 상대에게 요시무네는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분고 이시가키바루에서큐슈의 세키가하라, 이시가키바루 전투(2)
오오토모 요시무네의 야망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세키가하라의 전투를 앞두고 각지에서 일어나는 전투의 기운을 타 재흥을 꿈꾸는 오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그것을 맞아 싸우는 쿠로다 죠수이(黒田如水)의 이시가키바루 전투(石垣原の合戦)가 있었습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 초상화
7월 19일에 발발한 후시미성 공방전(후시미성 공방전)을 계기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솔하는 동군의 선발대는 서쪽으로 향해 기후성을 공략(기후성 공방전)합니다. 한편 이시다 미쓰나리가 인솔하는 서군은, 아노쓰성(아노쓰성 공방전), 마츠자카성을 공략합니다. 그리고 동군으로 배신한 쿄고쿠 다카쓰구의 오츠성을 공격하면서(오츠성 공방전), 타나베성을 공격합니다.(타나베성 공방전) 호쿠리쿠에서는, 이에야스 측의 마에다 토시나가와 미쓰나리 측의 니와 나가시게가 아사이나와테에서 싸우고(아사이나와테 전투), 시나노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인솔하는 동군의 별동대가, 우에다성에서 농성하는 사나다 마사유키, 유키무라 부자를 공격중이었습니다.(우에다성 공방전)
이런 대규모 전투의 전후에, 그 혼합을 틈타 가문을 재흥시키거나, 옛 영토 탈환을 목표로 해 군사를 일으키는 몰락 영주도 많이 나타납니다. 오오토모 요시무네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큐슈에 이름을 떨치던 오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아들입니다. 오오토모 가문은 아들에게 당주직을 물려주고 크리스천의 왕국 무지카를 세우려 벌인 미미가와 전투로,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진 것을 계기로, 몰락해 갑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큐슈 정벌을 도와 어떻게든 분고 일국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린의 뒤를 이은 요시무네가 임진왜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 요청을 무시하고 점령한 성을 방폐한 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세키가하라의 전투의 무렵은 영지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원래, 이 때의 그는 료닌(방랑무사)이기 때문에, 동군에 붙든지 서군에 붙든지 자유였습니다. 실제로, 죠수이나 가토 기요마사는 그에게 동군에 참전하도록 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굳이 서군으로 죠수이와 적대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히데요시로부터의 개역의 명령을 받은 직후에, 스오우에 있던 인연때문인지 친분이 있었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강하게 권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분고에 귀국 즈음에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히데요리로부터, 구족(具足: 갑주) 100령, 장병창(長柄槍) 100개, 총 300정, 은 100매, 말 100마리를 선물로서 받고, 승리할 때에는 분고 일국을 복령 할 약속도 얻어 내고 있습니다. 총대장의 권유이 도요토미가의 백업이 있었다면 그가 의욕이 생긴 것도 알 것 같습니다. 분고로 향하던 요시무네는 여행의 도중 , 옛 신하인 요시히로 무네유키(吉弘統幸)와 재회합니다. 무네유키은 오오토모 대대로의 중신으로, 타치바나 도셋츠(立花道雪)와 함께 오오토모가를 지탱했으며, 이와야성(岩屋城)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은 나막신 다카하시 소운(高橋紹運)의 조카입니다. 요시무네가 개역하게 되었을 때부터, 소운의 아들인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의 야나가와성(柳川城)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즈음 불온한 공기를 느껴, 요시무네의 아들 요시노리(義乗)를 보좌하려고, 큐슈에서 에도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무네유키는 요시무네에 게 동군으로 참전할 것을 호소합니다만, 이미 서군으로 참전할 결의가 단단한 의요시무네는 그 말을 듣지 읺았습니다. 분고로 돌아온 요시무네의 아래에서는, 옛 신하를 포함해 눈 깜짝할 사이에 2,000 정도의 군사가 모입니다.
조속히, 요시무네는 모인 군사를 인솔해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부재한 키즈키성(杵築城)을 포위합니다. 그 일을 우연히 들은 죠수이가 구원으로 달려 드는 일을 알자 일단 요시무네는 키즈키성의 포위를 풀고, 타테이시(立石)로 돌아와 맞아 싸울 수 있도록 태세를 정돈합니다. 이렇게 해서 게이쵸5년(1600년) 9월 13일, 오오토모군과 쿠로다, 호소카와 연합군은 이시가키바루(石垣原)에서 대진하게 됩니다. 그 날의 저녁에 쿠로다군의 선봉대가 도착한 키즈키성에서는 성을 맡고 있던 호소카와가의 가신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 아리요 다테유키(有吉立行)와 함께 이시가키바루로 출진했습니다. 한편 오오토모군은, 다카가와(境川)의 남쪽에 쌓아 올려진 타테이시성채(立石砦)를 거점으로 포진 합니다.
당시 전황도
호소카와군, 약 200의 쿠로다군, 약 2000을 더한 연합군에 약 900의 오오토모군은 대치를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그 날의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우선, 오오토모군의 총포대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것에 쿠로다 군의 선봉대 히사노 지자에몬(久野次左衛門)이 돌격 해, 계속해 지소우지산(実相寺山)에 포진하고 있던 마츠이 야스유키(松井康之)도 돌격 합니다. 그러나, 격렬한 총포대의 공격에 지자에몬이 전사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히사노 부대가 일단 후퇴하지만, 마츠이 부대는 계속 견딥니다. 결국, 이노우에 유키후사(井上之房)가 야스유키를 설득해, 간신히 후퇴합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오오토모 군의 선봉인 요시히로 무네유키와 무나카타 시게쯔구(宗像鎮続)가 앞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오토모 군이 우세하게됩니다. 한때는, 연합군을 지츠소우지산의 산기슭에까지 추적합니다만, 적군이 수가 더 많은 것과, 피로가 누적되어 오오토모군은 잠시 지체합니다. 연합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재빠르게 요시히로 부대와 무나카타 부대를 겨냥하고 공격을 시작 합니다.
단번에 형세가 역전이 되어, 아군의 열세를 본 요시무네는 퇴각을 명합니다만, 무네유키는 명령을 듣지 않고, 더욱 더 분전합니다. 양군이 혼잡한 와중에, 우연히 유쿠후사(之房)와 무네유키의 일기토가 벌어집니다. 무용으로 이름 높은 무네유키였습니다만, 이 일기토에서는 유쿠후사가 이겼습니다. 게다가 이 후, 시게쯔구마저 전사 해 버려, 오오토모군의 사기는 단번에 내려가 버렸습니다. 오후 6 시경에는, 오오토모군의 패색이 짙어 지는 중, 남하해 온 쿠로아 죠수이의 본대가 지츠소우지산의 산기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요시무네는 타테이시성채(立石砦)에 농성합니다. 다음낳인 14일부터, '이대로 단번에 오오토모를 전멸 시켜야 한다'라는 가신의 의견에, '오오토모에게는 사적인 원한은 없는데, 요시무네를 죽이는 것은, 좀...'이라고, 죠수이가 주저 하고 있는데, 요시무네가 부하 타하라 쇼우인(田原紹忍)을 통해서, 쿠로다의 부하인 모리 토모노부(母里友信)에게 항복을 신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시가키바루 전투는 종결됩니다. 기이하게도, 그 날은, 그 세키가하라에서 전투를 한 9월 15일이었지만, 당연, 큐슈에 있는 누구라도, 그 천하를 판가른 싸움의 승패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
도전합니다.
이시카키바루 전투 사적지
전황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오오토모군은, 눈 깜짝할 순간에 패배해버립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죠슈이는 단 5일간으로 토요마에의 반 가깝게이 평정 해, 한층 더 북상을 계속해합니다. 큐슈 전 국토를 평정 할 것 같은 기세입니다. 그 때의, 히데요시의 경계는 잘못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그는 혼란을 틈타 가문을 강화하고 있엇던 것입니다.
그는, 우선은 큐슈를 평정 해, 그 후 츄고큐, 기나이에 쳐올라갈 생각으로 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죠수이의 예상으로는 오래 간다고 생각하고 있던 세키가하라의 전투가, 하루만에 끝나 버렸습니다. 그것도, 서군이 완패 해 버렸습니다. 천하는 이에야스의 수중에 굴러 들어온 것 같은 것입니다. 짓궂게도 킷카와 히로이에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배신시켜, 동군을 승리로 이끈다고 하는 큰 공적을 세운 것이, 아들 나가마사였습니다. 전투 후, 그 공적에 의해서 치쿠젠 52만석이 주어져 의기양양하게 귀국한 아들 나가마사에게, 죠수이는 칭찬하는 일도 없이, 차갑게 한마디했습니다. '천하 판가름의 싸움이란, 좀 더 길게 하는 것이다. ' 지신의 야망이 혹시라도 이야에스에 경계될까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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