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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전쟁, 전투 사건 등 , 인물, 대하소설 등

페리제독이 우라가항에 입항 1

by 자한형 202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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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제독이 우라가항에 입항

카에이 6(1853) 63, 페리 제독이 인솔하는 4척의 아메리카 합중국 함대가 우라가(浦賀)항구에 입항했습니다.

<페리제독>

이때의 미국은 약 23개의 항구에서 700척의 배가 원양 포경을 하러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연료는 석유가 아닌 고래의 기름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미 미국의 근해에서는 고래가 잡히지 않았기에, 서서히 태평양으로 향했습니다. 당시의 증기선은, 큰 물레방아를 돌리는 외륜선(外輪船)으로, 선체의 크기에 비해 많은 석탄을 필요로 해,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나 인도양, 남태평양의 섬들에 기지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에도 물과 연료와 식량을 보급 기지를 만들려고했습니다. 동인도 함대, 기함 사스케하나(サスケハナ), 사령장관 페리가 미국의 필 모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쇄국중인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太平りをさます 正喜撰>

<태평의 잠을 깨우는 쇼우키센(증기선)>

たったはいで れず

단 네잔의 밤에도 자지 못하고

사실 이 즈음에 외국의 배가 많이 들어왔었기에, 이번 페리의 외국 래항에, 제일 당황한 것은 일반 서민이 아니고, 막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받아 들여, 다음 해인 안세이 원년(1854) 33일에 '미일화친 조약'을 맺게 됩니다. 페리는 이 때, 곧바로 우라가항에 온 것이 아니고 류구1에 들르고 나서, 우라가항에 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번 만이 아니고, 이전에도 3번이나 방문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류구에서는 필수품목의 자유 매매나 석탄창의 차수(借受) 등에 나하항의(那覇港)에 개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라도항에 등장한 흑선들>

당대의 류구는 사츠마 번의 아래에 있었습니다만, 원래 류구는 중국과의 교역이 번성했습니다. 사츠마 번도 그 교역의 이권을 갖고 싶어서 류구를 점령한 것이기 때문에, 류구왕국 자체를 멸망시키지는 않고, 교역의 문으로 존속시키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만일 일본이 솔직하게 개국에 응하지 않고, 전쟁이 되었을 경우에, 연료를 보급하는 기지가 근처에 필요했기에, 사츠마의 점령하로부터 개방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류구의 사람들을 회유해, 미국의 지배하에 류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기대로 일본과 조약이 연결되었기에 류구와도 같은 해의 617일에 '미류화친조약'이 맺어졌었습니다.

시나가와에 오다이바 포대 건설

카에이 6(1853) 828, 외국 함선으로부터의 방위를 위해 시나가와(品川) 바다에 오다이바(御台場)의 축성을 시작했습니다.

카에이 6(1853) 63, 사령장관 페리가 인솔하는 동인도 함대, 기함 사스케하나호 등 4척의 증기선이 우라가항에 모습을 보였습니다.(흑선등장) 구경 금지령이 나온 것만을 봐도 당시의 막부가 얼마나 충격을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조속히 당시 에도막부의 칸죠우봉행(勘定奉行)의 하나였던 카와지토시아키라(川路聖謨),이즈 니라산(韮山) 대관인 히데타츠(江川英龍) 등을 중심으로 에도를 직접적인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시나가와의 해상에, 돌담에 둘러싸인 4 각형, 5 각형 양식의 포대를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카에이 6(1853) 828, 그 공사가 개시되었습니다. 우선은, 1기 부터 제 3기 까지 완성되었습니다. 당초의 예정에서는 12기의 건설을 할 계획으로 제, 6기 까지는 완성했지만, 당연하게도 이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으로 결국, 4 다이바(台場)70% 정도 완성 한데서 기초 부분인 바다 속 부분까지만 만든 채 정지되었습니다.

<포대인 오다이바 모습>

다음 해인 카에이 7(1854)에 미일 화친 조약이 맺어 졌습니다. 시나가와 포대로 불리고 있던 이 건축물들은 쓰이는 일은 없었습니다. 타이쇼(大正) 무렵에는, 다이바로 불리게 되어, 거기에 경칭을 있어 붙여 '오다이바'라고 불렸습니다. 사실 페리가 상륙하려 했을 때, 이 시나가와 포대의 일부는 완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에도 만에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려 요코하마에 상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교섭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포대와 함대간의 전투가 있을 수도 있었겠지요.

몬쿠(文久) 3(1863) 3월에 이 포대가 쓰일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경해 조정과 양이의 약속을 한 제 14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의 뜻을 받아, 5월에 양이를 결행한 조슈와 7월에 사츠에이센소(薩英戦争) 전쟁에 돌입한 사츠마를 보고, 8월에는 '외국과 전쟁이 되어도 어쩔 수 없다'라 생각해 일단 개항한 요코하마항을 다시 폐쇄하는 것을 결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에, 교토에서 818일의 정변이 발발해 조정 내의 양이파가 일소 되어, 막부에 의한 외국과의 전쟁은 회피되었습니다.

현재 오다이바는 관광과 젊은 커플의 데이트코스로 유명합니다. 한때, 외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어졌던 포대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역사의 유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막부, 구경 금지령 발포

안세이 원년(1854) 23, 에도 막부가 116일에 다시 우라가에 나타난 외국 함선의 '구경 금지령(見物禁止令)'을 발포했습니다.

<일본 앞바다에 등장한 흑선들>

만약 한 사건이 금지되었다면, 그 사건이 끼친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것입니다. 외국 함선의 금지령을 보더라도 외국 함선이 당시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녔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페리제독 이전에도 많은 외국의 배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의외로 서민들의 반응은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것의 등장을 두려워 하는 막부측의 반응이 더 소란스러웠습니다. 당시에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일어났기에 외국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지요.

이전 막부는 '무휼령(撫恤令)'1를 내거나 반대로 '이국선 추방령(異国船打)'을 내거나 또 다시 '장작과 물 급여령(薪水給与令)'을 내 보거나 하며 개항의 장단을 타진해 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작년에 페리제독이 개항을 요구한 것으로(페리제독 입항) 대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일반 백성들은 외국 함선쪽으로 나룻배를 타고가 장사를 하려는 등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막부는 '구경 금지령'을 내려 접촉을 막으려 했지만, 그것이 과연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안세이 대지진으로 후지타 토고 사망>

안세이 2(1855) 102, 오후 10 시경에 발생한 안세이 대지진으로 후지타 토고(藤田東湖)가 죽었습니다.

후지타 토코는 미토번의 쇼우코관(彰考館)에 근무하는 후지타 유우코쿠(藤田幽谷)의 차남으로 분카 3(1806)에 태어났습니다. 쇼우코관은 미토번의 2대째 지방 영주였던 미토 고몬(水戸黄門) 도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시작한 미토번의 중대사업인대일본사(大日本史)의 편찬을 실시하고 있던 부서에서 21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것을 상속해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유우코쿠는 헌옷가게의 아들인 낮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우수함을 주목받아 대발탁된 것입니다.

<후지타 토고>

그의 아들인 토코가 이어받은 것은 토코의 우수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미토학(水戸学)파의 리더적였던 아버지의 아래에서, 어릴 적부터 열심히 미토학을 공부한 그는 아버지를 이어 미토학파의 리더적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미토학을 간단히 말하자면 '존왕천패(尊王賤覇)' , '황통을 계승하는 조정은 고귀하고, 무력으로 패권을 잡은 막부는 천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자학적 역사관에 의한 학문입니다만, 도쿠가와의 영향력이 큰 미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이 미토학은 막부를 안정시키는 논리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막부가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하극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막부는 스스로가 덴노 밑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함으로서 막부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또한 고귀한 덴노가 지배하는 신의 나라인 일본은, 문화적으로도 무력적으로도 외국에 범해져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어져, 존왕양이의 사상으로도 연결됩니다. 이 존왕양이가 막부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은 좀 더 후의 일로, 현단계에서는 어디까지나 막부를 위한 존왕양이 사상입니다. 그런 미토학이 힘을 기르는 계기가 된 것은, 미토번의 지방 영주 교대 사건이었습니다. 8대 번주 나리노부(斉翛)에 적자가 없었던 것으로 미토번의 보수파는 나리노부의 부인인 11 쇼군 이에나리(家斉)의 딸이었기에 그의 아들을 양자로 해 후계로 추대하려 했습니다. 한편, 혁신파는 나리노부의 동생 나리아키(斉昭)를 후계자로 세우려 했습니다.

결국 나리아키가 미토번의 번주가 되어 미토번은 혁신파가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이 때, 나리아키를 추대한 이 중 한 명이 토고였습니다. 그는 곧 소바요닌(側用人) 중 하나가 되어, 코오리 봉공(郡奉行), 시라베야쿠(御用調役)등 핵심적인 직위들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런 존왕양이의 사상은 페리가 내항한 사건 이후로 크게 변하게 됩니다.(페리 내항) 무력하게 외국 세력에게 무너지자, 막부는 덴노의 권위를 빌어 이것을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당대의 덴노 121대 타카아키덴노는 외국을 매우 싫어했기에, 어쩔수 없이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덴노의 허가를 받지 않고 무작정 미국화 수호통상조약을 맺어버렸습니다. 막부는 스스로 월권행위를 행한 것입니다. 게다가 안세이의 옥사(安政大獄)로 반대파를 탄압하자, 존왕양이의 사상은 점차 막부 토벌로 향해 갑니다.

옥사의 전에 차기 쇼군 옹립에 실패한 토고는 실각했었습니다만, 그는 유폐 중에도 회천시사(回天詩史)라는 서적을 집필해, '이런 위기일수록 충군애국의 정신으로, 국가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회천시사는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돌연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안세이 2102일 오전 10시경에 일어난 메그니튜드 6.9의 지진에 의해 연로한 어머니를 살리고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초대 미국 주일 영사 하리스 부임

안세이 3(1856) 721, 초대 미국 주일 총영사 하리스가 이즈 시모다항에 입항했습니다.

미국 뉴욕주 워싱턴의 궁핍한 집에서 태어난 타운젠트 하리스는, 중학을 졸업한 뒤 가업을 도우며 독학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습득하며 각국의 문학을 배웠습니다. 이 경험에서 그는 교육에 흥미를 가지고, 교육 활동을 열심히했습니다. 그 활동이 인정되어, 1846년 부터는, 뉴욕시 교육장을 맡았습니다. 그 후, 화물선의 권리를 취득하여 무역상이 되어, 태평양의 각국으로 항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청나라에서 페리가 인솔하는 동인도 함대를 만난 뒤에 일본에도 흥미를 가져, 외교관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페리가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시킨 일로, 시모다에 영사관이 설치되는 일을 우연히 들은 하리스는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초대 주일 총영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초대 주일영사 하리스>

이렇게 해서 안세이 3(1856) 721, 하리스는 이즈 시모다에 입항했습니다. 처음에는 통역이 잘못되어, 상륙이 거절되거나 했지만, 의사가 통해 상륙해 시모다 이즈미지(玉泉寺)에 영사관을 지은 후에도 에도에 가는 것을 거절 당하거나 하며 막부는 하리스를 경계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윽고 그의 성실한 인품이 인정받아 서서히 막부도 그를 인정하게 됩니다. 다음 해에는 에도에 가는 일도 허락받아 제13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알현 하는 것도 실현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다음 해인 안세이 4(1858)7, 14회에 걸치는 교섭의 끝에, 미일 수호 통상조약의 체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하리스가 주장한 일본 화폐와 미국 화폐와의 교환 비율에 의해, 엄청난 양의 금이 유출되게 됩니다. 한편으로 하리스는 일본의 금화가 외국의 은화에 비해 의도적으로 그 가격을 인하되고 있는 사실을 막부에 알려, 시급하게 금화의 가치를 올리도록 화폐 가격의 비교 일람표를 보내기도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초대 총영사에서 초대 공사로 직함이 바뀐 하리스는 병을 이유로 공사의 사임을 신청하게 됩니다. 그리고 분큐 2년 연(1862) 459개월에 걸친 일본생활에 이별을 고해 하리스는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완전히 하리스에 신뢰를 두고 있었던 막부는 어떻게든 귀국을 미루려 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하리스의 재임을 요청했습니다. 하리스도 일본을 좋아해 자주 이야기를 했다고 하네요.

<하리스의 묘지>

독신이었던 하리스는 그 후, 15년간 뉴욕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일본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의 비용을 스스로 조달하고 있었던 일을 우연히 들은 국무장관이 그 체재 비용을 국가에서 보상해 주어 유유자적한 노후생활을 보낸 것 같습니다. 하리스는 1878(메이지 11) 22574세의 생애를 끝냈습니다. 지금도 뉴욕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일본의 좋은 친구'라는 내용이 쓰여져 있다고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나무가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