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다야 사건 3
분큐 2년 연(1862년) 4월 23일, 사츠마 번사끼리의 항쟁 사건인 '데라다야 사건(寺田屋事件)'이 있었습니다.
타이쇼(大正) 시대가 되어 경진전철(京津電車)이나 교토와 오사카 전철이 개통할 때까지, 여객선인 산짓코쿠부네(三十石船)은 교토~오사카 간의 교통을 담당했습니다. 오사카측은 텐마바시(天満橋)에 있는 하치켄야선착장(八軒屋船着場), 교토측은 후시미(伏見)의 선착장이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교토~오사카간을 육로로 이동하는 쿄카이도우(京街道)도 연결되어 후시미는 확실히 교통의 요지로, 많은 숙박 시설이 늘어서 대단한 활기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후시미에 있는 한 채의 선숙 데라다야는 사츠마 번저가 가깝기도 해 당시, 사츠마번의 정 숙소였습니다.
데라다야 사건
사건은, 분큐 2년년(1862년)의 4월 23일,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당시의 일본은 에도막부 말기의 동란기였습니다. 막부인가 존왕(덴노)인가로 두동강로 나뉘고 있었을 무렵입니다. 그런 중에 사츠마 번주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공무합체'란, '14 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和宮)의 결혼을 계기로 덴노와 막부가 협력해 정치를 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시마즈 히사미츠는 그 공무합체 파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츠마번 가운데에도 '막부를 단념해 지금부터는 덴노를 중심으로 하자'는 존왕파의 젊은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4월 23일, 데라다야에 모여 있던 것은 그런 존왕파의 사츠마 번사들이었습니다. 이 날,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와 사츠마 번의 동지들, 그리고 존왕파의 지사들은, 관백 쿠조 히사타다(九条尚忠)와 교토 죠시다이(所司代) 사카이 타다요시(酒井忠義)를 습격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사츠마번측에 들키고 있어,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사츠마번에서 파견된 것이, 나라하라 시게루(奈良原繁) 이하 9명의 번사들이었습니다. 한밤 중의 데라다야의 현관을 통해 들어간 방에서 나라하라는 어떻게든 아리마 신시치에게 사츠마 번저에 오도록 설득합니다만, 말싸움을 하다 갈등이 커져, 숙소는 큰소란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리마 등 존왕파 중 7명이 사망해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츠마 9열사의 묘지>
2층에도, 존왕파의 지사들이 있었습니다. 나라하라가 칼을 버려 설득에 임해, 나머지의 사람들은 투항했습니다. 결국, 부상당했던 2명도 다음날에 할복 자살을 명령받아 지사들은 각각의 번에 보내졌습니다. 실은 '공무합체'를 추진하기 위해서 방해였던 사츠마 번내의 존왕파를 처리할 계획은 이전부터 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그들이 모이든지 모이지 않든지 방해자는 제거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단번에 공무합체파가 된 사츠마 번과 시마즈 히사미츠는 그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에도로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에도로 돌아가는 길에 예기치 못한 사태에 조우합니다. 그의 수행을 하고 있던 사무라이가 영국인을 살해해 버린다고 하는 '나마무기 사건'이 발발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발하는 일련의 영국과의 항쟁으로 히사미츠와 사츠마번은 반대로 '개국, 토벌 막부 파'로 변해 버립니다. 오히려 조슈와 협력해 막부를 토벌하는 선두에 서게 되 버렸습니다. 그 뒤에 반역자로 다루어지던 데라다야 사건의 9명의 피해자는 오히려 선구자인 '사츠마 9열사'가 되어 남았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요.
<시마즈를 바꾼 나라무기 사건>
분큐 2년(1862년) 8월 21일, 요코하마에서 나마무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존왕양이파를 힘으로 억누르고 있던 다이로우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의 변(사쿠라다몬의 변)으로 암살되어 드디어 막부의 체제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막부는 어떻게든 체제를 고쳐 세우려고, 조정과 막부가 협력하고 정치를 실시하는 '공무합체 운동'의 기치를 내겁니다. 그 상징이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고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던 것이, 사츠마 번의 은거한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입니다.
나라무기 사건
그리고 다이묘를 일정기간 교대로 머무르게 하거나, 서양식 군대의 채용 등 분큐의 개혁이라 불리는 막부의 신체제를 정돈해 이것으로 존왕양이파를 눌러버리려 합니다. 분큐 2년 연(1862년) 8월 21일,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이 요코하마의 나마무기(生麦) 마을에 도달했는데, 말을 탄 4명의 영국인을 만났습니다. 이 영국인이 하마도 하지 않고, 길을 양보하는 일도 하지 않았기에, '무례하다!'며, 수행의 무사들이 베어 버렸습니다. 한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의 세 명은 미국 영사관에 도망쳐서 살았습니다. 영국 측은 막부에 범인의 체포와 정식적인 사죄, 그리고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하고, 사츠마번에는 영국인 입회의 재판과 극형, 유족에게의 2만 5천 파운드의 위자료의 지불을 요구했습니다. 막부는 영국측의 요구 대로 사죄의 공포와 배상금을 지불했습니다만, 사츠마 번은 요구에 응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사츠마 대 영국의 포격전인 사츠에이센소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영국의 최신식의 암스트롱포로 큰 피해를 입은 사츠마 번은 결국, 막부에서 빚을 져 2만 5천 파운드를 지불해, 군함 구입을 영국에 부탁하는 일을 조건으로 화해했습니다. 구미의 군사력의 굉장함을, 직접 체험한 사츠마는 방침을 전환해 조슈번과 함께 근대화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의 상경 시도
메이지 24년(1891년) 1월 25일, 히젠 카라츠(唐津) 번주로, 에도 막부 말기, 로쥬우(老中)로 활약한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小笠原長行) 70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분세 5년(1822년)에 카라츠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마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오사유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불과 2세였기 때문에, 가신들의 책략에 의해 '병으로 뒤를 이을 수 없다'고 막부에 보고되어 버립니다. 카라츠번은 나가사키라고 하는 중요 지점을 그 영지로 삼고 있습니다. 2세의 어린 아이를 번주로 세우면, '도저히 수습하지 못할것이다'고, 막부가 작은 영지로 소령이 명령될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오사유키는 4명의 양자의 뒤에 카라츠번을 잇게 됩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두뇌가 명석해, 일찍부터 막부의 눈에 띄게 됩니다.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 래항 이래, 혼란스러웠던 막부는 새로운 인재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오사유키는, 헤야즈미(部屋住み)1인 채, 소우쟈반(奏者番)2 그리고 로쥬우까지 대발탁 됩니다. 그리고 오사유키가 자신의 재능을 과시해 주는 것은, 그 후 분큐 2년(1862년)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입니다. 이것에 격노한 영국이 막부와 사츠마 번에 대해, 사죄와 배상금을 요구합니다. 이 때 막부측의 교섭을 실시한 것이 오사유키입니다. 철저한 저항을 천명하는 사츠마번을 무시한 채로, 그는 독단으로 배상금을 지불해 버렸습니다. 아직 양이의 기운이 퍼져있는 상태로, 막부내에서도 많은 반대 의견이 있었습니다.
사츠마도, 조슈도 진심으로 양이를 결행하려고 생각하고 조정마저도 양이를 요구했기에,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어쩔 수 없이 분큐 3년(1863년) 5월 10일로 양이를 결행할 약속까지 해 버린 시기입니다. 게다가, 이치하시 요시노부도 개항한 항구의 폐쇄를 조정에 약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사유키만은 '양이가 잘 될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시원시럽게 배상금을 승낙했습니다. 분큐 3년 연(1863년) 5월, 앞의 폐항은 물론, 양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을 알리게 하기 위해, 오사유키는, 관료 미즈노 타다노리(水野忠徳)나 이노우에 키요나오(井上清直)를 권해, 막부의 양식 보병대의 정예 약 1,600명을 인솔해 해로로 오사카에 향했습니다.
물론, 목표는 상경으로 교토에 들어가, 생트집을 잡는 조정내의 양이파를 일소 하고, 조정을 정리해 교토에 금족 되고 있는 이에모치를 에도에 데리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즉, 8월 18일의 정변의 2개월전에 오사유키는 단독으로 이 쿠데타를 결행하고 있었습니다. 히라카타(枚方)에서, 교토를 목표로 한 오사유키 일행은 요도(淀)까지 왔지만, 교토에서 이 뉴스를 듣고, 당황해서 온 교토에 있던 로쥬우나 와카노시요리(若年寄) 등에 제지되어 그 설득에 따라 요도에 머물어 버렸습니다.
본래라면 막부측이어야할 교토 수호직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나, 교토 죠시다이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도, 이미 조정의 의향을 막부에게 전하는 지위화되어 요도에 있었던 오사유키는 서서히 고립되어 갔습니다. 결국 오사유키는 주군인 이에모치에 의해 로쥬우에서 해임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사유키의 쿠데타는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그 후, 용서되어 게이오 원년(1865년)에는 다시 로쥬우가 되어, 외교도 겸임해 제2차 조슈 정벌에서는 오구라구치(小倉口) 전군의 지휘를 맡았고, 후에 발발한 보신 전쟁에서는 양부의 의절을 겪으면서도 하코다테 전쟁까지 참전해, 끝까지 막부에의 충성을 관철했습니다. 그런 오사유키의 최후는 70세로, 메이지 24년(1891년) 1월 25일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夢よ夢 夢てふ夢は夢の夢
꿈이야 꿈을 꿈꾼 후의 꿈은
浮世は夢の 夢ならぬ夢
속세의 꿈의 꿈이 되지 않은 꿈
막부의 멸망의 시초? 사카시타몬 외의 변
분큐 2년(1862년) 1월 15일, 에도성 사카시타몬(坂下門) 밖에서, 존양파인 미토번의 료닌등 6명이 로쥬우(老中) 안도 노부마사(安藤信正)를 습격해 부상시킨 사카시타몬 외의 변(坂下門外の変)이 있었습니다.
안도 노부마사는 분큐 2년년(1819년)에 무츠 이와키타이라(磐城平) 번의 제4대 번주 안도 노부요리(安藤信由)의 적남으로서 하이테이(藩邸)1 코우카(弘化) 4년(1847년)에 아버지의 죽음뒤에 이어 제5대 번주가 되어 이와키번을 이어, 카에이 4년(1851년)에는 지샤봉공(寺社奉行)2, 안세이 5년(1858년)에는 와카요시도리(若年寄)3가 됩니다. 다음해인 안세이 6년(1859년)에 당대의 다이로우(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결행한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에서는, 이이 나오스케와 함께 미토번의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등을 포함한 존양파의 단속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만엔(万延) 원년(1860년)에 로쥬로 승진합니다만, 그 직후에 일어난 것 그 사쿠라다문 외의 변(사쿠라다문 외의 변)입니다.
<안도 노부마사>
이 사건으로 암살당한 이이 나오스케의 죽음을 숨긴 것이 바로 이 안도 노부마사입니다. 사건의 뒤, 히코네(彦根)번저를 방문한 노부마사는 목을 꿰멘 나오스케의 사체를 앞에 두고,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오스케를 중병으로 꾸민 뒤에, 차남인 이이 나오노리(井伊直憲)의 당주 승계가 된 뒤에, 사망을 발표했습니다. 만약 현역의 다이로우직에 있는 주군이 암살되었다고 되면, 히코네 번사들이 입다물고 있을리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세 대가 중 하나인 미토입니다.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렵부터의 대대로 이어옴 필두의 가신인 이이 가문과 세 대가 미토가 싸우게 되면, 막부의 운명은 어떻게 되어 버릴지 명약관화합니다. 그렇기에 노부마사는 재치를 발휘해 갈등을 봉합시킨 것입니다.
나오스케의 사후, 노부마사는 역시 로쥬우인 쿠제 히로치카(久世広周)와 함께, 막부의 정치 담당자가 되어 활약합니다. 두동강이가 된 일본을 어떻게든 하나로 정리하려고한 나오스케의 유지를 이으면서, 갈등을 없애는 방법을 모색해 당대의 덴노인 제121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와 제14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를 결혼시키는 공무합체(公武合体)를 실현시킨 막부측의 사람이 노부마사입니다. 미국 영사관의 통역인 휴스켄이 양이파에 살해된 사건도 그가 처리에 임해, 원만히 해결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불리한 금은의 교환율로 이루어진 통상조약으로 돈이 유출하지 않도록 대책을 가다듬었습니다.
<사카시타몬 외의 변>
그러나 양이파에서 보면, 통상조약을 맺고 외국과 협조를 취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공무합체라 해도 분명한 정략 결혼을 강요하고, 막부의 안정을 도모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분큐 2년(1862년) 1월 15일 오전 8 시경 죠우겐(上元)4의 축하를 위해서 토죠(登城)5하는 노부마사의 행렬이 사카시타 문 밖에 도달할 때 였습니다. 미토번을 벗어난 료닌 6명이 습격 했습니다. 이것이 사카시타몬 외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쿠라다몬외 변 이후, 엄중하게 된 경비를 뚫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곧 6명 모두 토벌되었습니다. 그러나, 혼란을 틈타 찌른 검이 운 나쁘게 노부마사의 등을 찔러 그는 경상을 입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도 노부마사는 냉정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노부마사 스스로 사카시타몬까지 가, 상주하고 있는 번역(番役)에 경과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피가 뭍은 부정한 의복을 입고는 토죠할 수 없다'며 저택으로 돌아갑니다. 이 후, 요양 기간중에 영국 공사인 올콕과 붕대차림으로 회견한 노부마사의 모습에, 올콕은 감탄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적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노부마사는 뒤에서 찔린 일로 등에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무사의 수치다'라며 비난 합니다. '당당히 적을 향해야만 무사', '등의 상처는 무사의 굴욕이다'며 이미 막부에 의한 정치의 중심에서 물러나고 있던 중진적 입장의 무사들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계기로,노부마사는 로쥬를 퇴임해 실각합니다. 매우 능력이 있었던 노부마사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실각시킨 막부의 미래는 이미 보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키요카와 하치로의 최후와 신선조의 탄생
분큐 3년(1863년) 2월 23일 에도에서 모집한 료닌을 인솔해 상경한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료닌들의 앞에서, 존왕양이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키요가와 하치로우>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 내항(페리 내항)으로, 개국인가 양이인가의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일본은 다음 해, 다시 일본에 방문한 페리에 의해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과제 미일 통상조약과 차기 쇼군 문제로, 막부는 두동강이 됩니다. 당대의 쇼군은 제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였지만 그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쇼군으로 옹립 된 것은 기슈의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이치하시 가문의 양자가 되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였습니다. 그대로 이 둘은 개국파와 양이파이기도 했습니다. 화친 조약은 적대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개항은 통상조약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덴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로 조약을 맺어버린 것이 안세이 5년에 다이로우로 취임했던 이이 나오스케 였습니다.
이이 나오스케가 기슈파이며, 오오오쿠(大奥)1도 아군으로 하고 있었기에, 차기 장군은 이에모치로 결정되어, 반대파인 이치하시파(양이파)를 일소 하기 위해서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가 결행됩니다만, 강렬한 탄압이 반감을 샀기 때문에, 만엔 원년(1860년) 3월에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암살되어 버립니다(사쿠라다이몬의 변) 여기서 통상조약 조인의 이래, 조정과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을 느끼고 있던 막부는 쇼군 이에모치와 당대의 덴노 제121대 코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와의 결혼을 진행시켜, 공무합체(公武合体)를 도모합니다. 한편 그 기슈파와 이치하시파가 우왕자왕하는 무렵에,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막부의 통제가 느슨해진 교토는 덴노가 있는곳이라는 것도 있어, 양이파의 집합소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이파에 의해, 사바쿠파(佐幕派)나 공무합체파에 대해, '텐슈(天誅)'라고 칭하는 암살, 습격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교토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교토 수호직을 신설해,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를 임명했습니다. 이윽고, 그 가타모리 약 1,000기의 정예를 이끌고 교토에 들어간 것은, 분큐 2년년(1862년)의 12월 24일의 일이었습니다. 이것과 동시기에 막부의 정사총재직(政事総裁職)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나 로쥬우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静) 등에 의해서 료닌들을 모아 무투집단이 결성됩니다. 이것은 사바쿠파인 쇼나이번의 향사 출신의 키요카와 하치로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다음 분큐 3년년(1863년)의 3월에 쇼군 이에모치의 상경이 예정되어 있는 막부로서는, 교토의 치안 유지는 급한 용무였습니다. 그래서 조속히, 이 키요카와 하치로에 대항해, 대사의 모집을 실시했습니다. 그 임무는 '쇼군의 상경에 앞서 교토로 들어가 치안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쇼군의 신변 경호를 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콘도 이사미>
채용될 때에는 1명에 대해 10량의 일시금을 지급한 뒤에 쌀 1되가 매일 지급된다는 계약을 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활약하면 후에 막부의 신하로 등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회도 있었습니다. 분큐 3년(1863년) 2월 4일과 5일의 2일간에 걸친 채용시험에는, 근린의 젊은이 230명 남짓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있던 것이 에도, 이치타니로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의 검술 도장 시에이관(試衛館)을 열고 있던 콘도 이사미(近藤勇), 동향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 ), 그곳에서 식객인 야마나미 케이스케(山南敬助) 오키타 소지(沖田総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검객으로서 칼은 가리고 있었습니다만, 신분은 읍인이나 농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케다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랑도 있고, '언젠가 무사가 되어 나라에 충의를 다하고 싶다'라고 하는 생각도 있어, 이것을 기회로 보았습니다.
분큐 3년(1863년) 2월 23일 교토에 도착한 그들은, 미부(壬生)의 신도쿠지(新徳寺)에 본영을 두어, 절이나 향사(郷士)의 집에 분숙 하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터무니 없는 것이 일어납니다. 여기까지, 그들을 인솔 해 온 것은 그들을 모은 키요카와와 야마오카 테츠타로우(山岡鉄太郎)였습니다. 키요카와가 본영인 신토쿠지에서 주요 인물을 모으고, '이번의 상경은, 존왕양이의 선봉이 되기 위한 상경이다!'라고 선언해, 조정에 제출하는 같은 내용의 겐바쿠쇼(建白書)에, 신속하게 서명하라고하기 시작했습니다. 키요가와는 이미 에도에 존왕양이를 논하는 '코비의 회(虎尾の会)'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알게된 로쥬우 이타쿠라는 곧바로 에도 귀환을 명령합니다.
키요카와는 료닌들을 이용해 에도에서 존왕양이 활동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에도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그들과 헤어져 교토에 남은 것이, 콘도와 그 동료들 8명 그리고 미토파의 료닌 세리자와 가모(芹沢鴨)와 그 동료들 5명으로 합계 13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쇼군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 상경 자체가 조정과 쇼군의 관계를 양호하게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에도로 돌아간 키요카와는 막부의 원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료닌들을 이용해 상인들에게 반 협박을 하며 자금 조달을 하고, 외국인 습격 계획을 하다 위험시되어 4월 13일에 암살되어 버렸습니다. 한편, 콘도는 교토 수호직에 탄원해 '아즈번을 맡으라'는 약속을 얻어 내었습니다. 이제 후에 신선조가 되는 낭인 무사대(壬生浪士組)가 만들어 지게 되었습니다.
신선조의 전신, 로시구미 결성
분큐 3년(1863년) 2월 27일은 신선조의 전신인 '로시구미(浪士組)'가 결성되었습니다. 新撰組라고도도 하고, 新選組라고도 합니다. 국장인 콘도 이사미(近藤勇)도 둘 다 썼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옳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다 맞다고 할 수 있죠.
<신선조(신센구미)>
신선조는 원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상경하기에 즈음해, 그 경비를 담당할 사람을 넓게 모집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00명 정도의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들이 모여, 쇼군을 옹립해 교토로 향합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뒤, 이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쇼나이번의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근황파(勤皇派)와 통해 료딘들을 덴노의 부하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니다. 이로 인해 조직이 공중 분해되어, 대부분은 에도에 돌압니다. 하지만 그 중의 몇 사람은 쇼군에 대한 충정을 관철해 교토에 남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대표가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의 검술 도장 시에이관(試衛館)을 열고 있던 콘도 이사미였습니다.
50명 남짓의 집단이 되고, 교토 미부의 야기저(八木邸)나 마에카와저(前川邸)를 거점으로한 그들은 '미부 로시구미(壬生浪士組)'라고 자칭해, 분큐 3년년 8월의 정변으로 조슈번에서 퇴거한 교토 수호직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에게서, 존왕파의 행위의 단속하게 됩니다. 이즈음 집단의 이름이 '신선조(신센구미)'라고 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국장 세리자와 가모(芹沢鴨)와 대립한 콘도 이사미는 그를 암살해 버리고, 신선조 톱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이 각광을 받을 때가 옵니다.
겐지 원년(1864년) 6월에 일어난 '이케다야 소동'입니다. 만회를 기도하고 있던 존왕양이파의 지사들이 밀회를 하고 있던 이케다야를 급습한 신선조는 그들을 죽여 재기를 막았습니다. 이 일로, 단번에 신선조는 유명하게 되어, 인원도 130~40명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그 후, 하마구리고몬의 변에서도 활약해, 많은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시대는 바뀌어 갑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 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 그리고 '토바 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로 막부는 큰 충격을 받게되었습니다. 당연히, 행동을 함께 하고 있던 신선조도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콘도 이사미>
싸움으로 죽는 사람, 도망친 사람 등 신선조는 조금씩 축소되어 갑니다. 패배한 막부군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의 군선으로 신선조도 에도로 향했습니다. 그 후, 신정부군의 고후 진군을 막기 위해, 신선조는 코요 친부타이(甲陽鎮撫隊)라고 이름을 재차 바꾸지만, 패배합니다. 이윽고, 콘도 이사미는 시모우사 나가레야마에서 잡혀 신정부군에 의해 이타바시의 형장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콘도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던 오키타 소지(沖田総司)도 병사했습니다. 그런데도 신선조는 아이즈에서 분전 합니다만, 아이즈도 함락됩니다. 이번에는 하코다테에 가서,에조 공화국을 목표로 하고 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등 옛 막부부군과 함께 신정부군과 싸웁니다만, 이 전투로 콘도의 오른 팔이었던 히지카타 토시조(土方歳三)가 사망했습니다. 신선조는 항복했고, 그 4일 후에는 옛 막부부군도 항복해 보신 전쟁이 종결해, 신선조도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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