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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 전쟁, 전투 사건 등 , 인물, 대하소설 등

유신이 시작된 쇼카손주쿠

by 자한형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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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의 시작이 된, 쇼카손주쿠 2

안세이 4(1857) 115일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조슈번(長州藩)의 허가를 얻어, 하기()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개강했습니다.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분세이(文政) 13(1830)에 조슈번사 스기 유리노스케(杉百合之助)의 차남으로 태어나 5세에, 야마가류헤이가쿠(山鹿流兵学)의 사범인 요시다 오스케(吉田大助)의 양자가 됩니다. 하지만 다음 해에 오스케가 죽었기 때문에, 숙부인 타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연 쇼오카 손주크(松下村塾)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 에도에서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사를 받았습니다. 이윽고, 카에이 6(1853) 페리가 우라가에 입항했을 때(페리 입항)에는 스승 쇼오잔과 함께 외국 함선을 시찰하며 서양의 최신 문명에 많은 흥미를 가집니다. 다음 해, 페리가 다시 입항 할 때에, 함대에 밀항하려다 실패해 쿠니모토(国元)의 야산 감옥에 수용되었습니다. 옥중에서는 죄수나 간수 상대로 서로 우수한 분야를 가르치는 공부 써클을 시작했습니다.

안세이 2(1855)에는 용서되어 출소되었습니다. 당분간 유폐 상태가 계속 되었습니다. 안세이 4(1857) 115, 가문의 부지내에 있던 오두막을 개조하고, 숙부 분노신의 이름을 계승하는 쇼오카 손주크를 개강했습니다. 막부가 칙허1를 얻지 않고 '미일 수호 조약'을 체결해, 개국을 단행한 일에 반대하고 있던 쇼우인은 그 후 안세이의 옥사의 숙청에 걸려,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교편을 잡은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쇼오카 손주크에서 수많은 인재가 탄생하기에 이것이 얼마나

하지만 다음해인 안세이 6(1859)에 처형되어 불과 3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쇼오카 손주크의 출신 학생들이 유신에서 대활약해서 에도막부 말기 굴지의 위인이 되었습니다. 쇼오카 손주크에는 시간표도 없고, 정해진 교과서도 없습니다. 번교(藩校)2의 명륜관과 달리 신분에 관계없이, 입학원 희망자를 모두 받아 들이고 있었으므로, 다양한 학원생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주도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쇼인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그들의 질문에 답해줌으로서 강의와 비슷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따로 교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여러명이 함께 공부를 해가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구사카 겐즈이>

<타카스기 신사쿠>

게다가 쇼인은 학원생 한사람 한사람의 개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늘리는 힘이 훌륭했습니다. 학원생 중에서 쌍벽을 이뤘던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는 서로 경쟁했습니다. 하지만 입학때부터 한참이나 구사카가 톱으로, 타카스기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런 타카스기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간파한 쇼인이 일부러 타카스기의 앞에서 구사카를 칭찬해 타카스기를 자극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가 성장했다고 합니다.

하기의 난()의 주모자인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는 집이 꽤 빈곤해, 불과 10일 밖에 학원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쇼인은 '그 재능은 구사카에 이르지 않고, 그 학식은 타카스기에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완벽한 점은 이 두명도 야소(八十)3에는 미치지 않은다'라고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10일 만에 사람의 성격을 완전히 판단해 내니, 그의 사람보는 눈이 보통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 요절

안세이 5(1858) 76, 13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3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사다>

분세 7년년(1824), 12 대장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4남으로서 에도성에서 태어난 도쿠가와 이에사다는 매우 병약했습니다. 게다가 기행도 일삼아서, 일설에는 장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보통 쇼군으로 능력이 부족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독을 이용한 암살을 무서워해 스스로 요리를 해, 특히 과자 만들기는 능숙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 뒤의 신하의 증언에서도 '우수하지는 않지만, 우둔하지도 않았다.'라고 했고, 미국 공사 하리스도 '이상한 행동은 했지만, 말한 일은 확실히 하고 있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13 대 쇼군으로 취임한 것은 페리 내항의 반년 뒤 입니다. 안세이 원년(1854)과 그 다음 해에 연속한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관동 근교를 포함해 이가, 히다 등지에서 불과 2년간에 6회의 대지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활약한 것이 다름아닌 로쥬(老中)1들이었습니다. 지진의 발발 이후에는 대책 기구를 세워 영민들을 구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쇼군인 이에사다의 무능함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오히려 로쥬들이 대책을 신속하게 세울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욱 도움을 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단 하나 스스로의 의사로 한 일은 자신의 후계자의 지명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의 약하고, 그 자질이 부족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이에사다이기에, 그 후계자 결정의 문제가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없었던 이에사다의 후계자로 이름이 오른 것은, 고산케(御三家)2인 기슈 번주인 도쿠가와 요시토미(徳川慶福), 고산케 히토츠바시(一橋) 가문의 양자가 되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였습니다. 밧카쿠(幕閣)3나 유력 번들이 두 파로 나뉘어 싸우는 중에

안세이 5(1858) 625, 이에사다는 갑자기 번주들을 소집해 '요시토미를 쇼군 후계자로 한다'는 것을 결정해, 75일에는 이치하시파의 제 번주의 처분을 발표하는 이례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 다음날인 안세이 5(1858) 76, 이에사다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버렸습니다. 사인은 각기의 악화나, 유행하는 콜레라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묘한 타이밍에다 막부도 그 죽음을 1개월간 숨기고 있어, 사인에 의혹을 안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의혹은 죽은 직후부터 있던 것 같아, 후지나미(藤波)라고 하는 시녀가 이에사다의 죽음의 다음날에 친가에 보낸 편지에는 '미토, 오와리, 이치하시, 에츠젠 마츠다이라가등의 공모에 의해 쇼군이 독살되었다'고 하는 내용의 일문이 있다고도 합니다.

안세이의 큰 옥사 발발

안세이 6(1859) 107,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행한 안세이의 큰 옥사로 에츠젠 번사(藩士)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가 참수 되었습니다.

안세이의 큰 옥사

카에이 6(1853)의 외국 함선 입항(외국함선 등장)은 개국인가 양이인가로 일본을 두동강이로 나누게 됩니다. 타이밍이 나쁘게, 이 해에 제12대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사망해, 4남의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뒤를 이어 13 대 쇼군이 되지만, 그는 병약하고 아이가 없었기에, 쇼군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그 후계자 문제가 부상해 현 쇼군과 혈통이 가까운 기슈 지방 영주 도쿠가와 요시토미(徳川慶福)를 추천하는 난키파와(南紀派)와 전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7남으로 고산쿄(御三卿)의 하나인 이치바시(一橋)가문의 양자가 되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지지하는 이치바시파로 나누어집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 총영사 하리스에게서 미일 수호 통상조약의 체결을 재촉당하는 막부는 로쥬우(老中)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가 교토로 향해, 당대의 제121대 코우메이덴노(孝明天皇)의 칙허(勅許)를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별개였던 '덴노를 존경한다는 '존왕'과 외국을 배제한다는 '양이'가 결합된 것입니다. 당대의 코우메이덴노는 대단히 외국을 싫어했기 때문에 당연히 허가가 나올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안세이 5(1858) 4, 막부 다이로우(大老)에 난키파인 이이 나오스케가 취임해, 14 대 쇼군으로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옹립하는 한편으로, 덴노의 칙허를 얻지 않는 채로 조약을 조인해 버립니다. 이것에 불복한 것이, 전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그 아들로 현번주 도쿠가와 요시아키(徳川慶篤), 그리고 오와리 지방 영주 도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 후쿠이 지방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 등 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치하시파입니다.

그런 그들 이치하시파가 항의의 뜻을 담고, 토쇼우(登城)1 을 보이콧 하여, 이이 나오스케는 그들에게 근신 처분을 하면, 거기에 반발한 사츠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가 군사를 인솔한 상경을 계획합니다. 단지, 그 직전에 나리아키라가 죽어 버려 실제로 상경은 없었습니다. 이런 혼란 속의 8월 코우메이덴노는 존왕양이의 생각이 강했던 미토번에 대해, '무오의 밀칙(戊午密勅)'을 내립니다. 이것은 미일 화친 조약을 덴노의 허락이 없이 체결한 일을 나무라는 것과 동시에, 막부에 향후는 양이를 추진하도록 개혁을 실시하는 일을 명령하고, 나리아키라에게는 이것에 협력해 공무합체(公武合体)2를 실현하도록 지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덴노가 막부를 뛰어넘어 미토번에 직접 명령한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정 내에서도 막부측이었던 관백 쿠조 히사타다(九条尚忠)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이 직후에 히사타다는 사직하게 됩니다.

<옥사의 희생자들>

이렇게 해서, 막부를 무시한 밀칙에 완전히 위신을 망친 막부는 조속히, 그 밀칙을 한 채로 로쥬우인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와 교토 죠시다이(所司代)인 사카이 타다아키(酒井忠義)를 상경시켜, 97일에는 존왕양이론을 전개하고 있던 우메다 운핀(梅田雲浜)을 체포했습니다. 계속 되어 10월에는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가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무가 뿐만이 아니라 공가에게까지 존왕양이파에의 탄압이 확대됩니다. 이것을 '안세이의 대 옥사'라 부릅니다. 일설에는 아편 전쟁에 패배한 청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국력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이이 나오스케가 독단으로 진행시킨 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안세이의 대 옥사에 희생된 하시모토 사나이는 영재로, 15세에 계발록(啓発録)을 저술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서론에 있는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이 사태로 불과 26세로 죽어버렸습니다.

1. 아이같은 마음을 버리다(稚心): 놀고, 편하게 살며 부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은 버려야 한다.

2. 진기(振気): 다른 이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 자신을 발달시키는 일이다.

3. 입지(立志): 목표를 분명히 결정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일이다.

4. 면학(勉学): 배우는 일은 책을 읽고 지식을 늘리는 일이 아니고, 선인에게 배우고, 자신도 지지않게 노력해 진정한 지식을 높여 마음을 단련하는 일이다.

5. 붕우를 선택(朋友): 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주는 귀찮은 친구를 소중히 하고, 친구가 본받아야 할 것을은 본받고, 스스로를 높여 주는 친구를 가지자.

이이 나오스케의 각오, 사쿠라다몬의 변

안세이 7(1860) 33, 다이로우(大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미토번을 벗어나 떠돌이가 된 뒤에, 료닌에 습격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것이 '사쿠라다문의 변(桜田門外)'입니다.

<이이 나오스케>

안세이 7(1860) 33일은 전날 밤부터 내린 폭설로, 일본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33일은 죠우시(上巳)의 셋쿠(節句)의 날로, 이 날 에도 성내에서는 명절을 축하하는 성대한 축연이 열렸습니다. 성의 망루()에서는 일정 간격으로 북이 울려 영주들은 그 신호에 따라, 차례로 토쇼우(登城)1 중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구경하듯이 바라보고 있던 집단이 있어습니다. 니시노마루로 통하는 사쿠라다몬에 진을 친 그들은, 미토번을 벗어난 료닌 17명과 사츠마번을 벗어난 료닌 1명이었습니다. 오전 9 시경 그들의 앞을, 다이로우 이이 나오스케를 태운 가마와, 호위의 사무라이 수십명의 행렬이 우연히 지나갔을 때, 그들 중 한 명 모리 고로쿠로우(森五六郎)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직소장을 바칩니다. 이를 호위대가 막으려 하자, 발도해 선두의 사람을 베려 합니다. 호위가 이쪽에 눈이 집중된 사이에, 총성음이 울립니다.

동시에 그것이 신호였는것과 같이, 다른 료닌들이 가마에 달려 들어 밖에서 몇번이나 가마를 찔렀습니다. 물론 호위의 사무라이들도 곧바로 응전합니다만, 공교롭게도의 눈이 왔었기에, 칼에는 츠카부쿠로(柄袋)2 가 씌워져 있어, 시간이 걸렸습니다. 행렬의 여기저기에서 전투가 전개되는 중, 사츠마의 료닌 아리무라 자에몬 카네쿄(有村次左衛門兼清)가 가마의 문을 부숴, 안에서 이미 녹초가 되어 있는 나오스케를 끌어내고, 단칼로 목을 떨어뜨렸습니다. 시현류(示現流)로 유명한 그였지만, 베어 쓰러졌던 나오스케의 가신 코가와라 히데노죠우 무네치카(小河原秀之丞宗親)의 필사의 검술로 등을 베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일어나 나오스케의 목을 가지고 도주를 도모하는 카네쿄를 추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2~3명의 료닌에게 공격받아 쓰려져 버렸습니다.

사쿠라다이몬의 사건은 습격자 18명이대부분이 죽고, 이이 나오스케가 죽은 뒤로 끝나 버렸습니다. 사쿠라다몬까지 나오스케가 가는 불과 400m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오스케의 목이 없는 일에 충격을 받은 이이 가문은 온갖 방법을 썼습니다. 결국 목을 찾아 봉합한 뒤, 1달 간 그 죽음을 숨겼습니다. 이 암살극의 원인은 다름아닌 안세이의 대 옥사에 있습니다.(안세이의 대 옥사) 이 사건으로 인해 큰 벌을 받은 것은 대부분 미토번의 관계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도쿠가와 나리아키, 이치하시 요시노부, 케이 아츠시 등도 근신 처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군을 잃은 료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쿠라다이몬의 변

왜 미토번이 타킷이이었을까요? 간단하게 말하면, 페리의 외국 함선 래항 이래, 쇄국을 계속하는지, 개국하는지의 양극단이 미토번과 이이 나오스케입니다. 미토와 덴노 가문은 특별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덴노 제 121대코우메이덴노(孝明天皇)는 개국을 싫어해 양이를 표명하고 있었습니다. 혼란으로 인해 명령을 쉬이 내리지 못하는 막부 대신 이이 나오스케가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막부의 톱이 이렇게 쉽게 암살 당할 수 있었을 것일까요? 그 날 아침에 에도성에서 '암살의 주의를 촉구하는 서신'이 와 있었고, 가신들도 이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움직임을 늦출 수 있는 비옷이나 츠카부쿠로를 일부러 입힌 것도 이이 나오스케였습니다.

게다가 습격된 다음에도, 가마에서 나와 응전하지 않고, 한 걸음도 나오지 않는 채 살해당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총탄이 그의 대퇴에서 허리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은 아닌가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등정하는 도중에 가마에서 나오는 것은 규칙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규칙을 중시해, 공격 받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아마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규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분큐유구 사절단 출항

분큐 2(1862) 122, 타케우치 시모노카미 야스노리(竹内下野守保徳)을 정사(正史)로 하는 '분큐 유구(遣欧)사절단이, 영국 군함 오딘호를 타 시나가와항을 출항했습니다.

만엔(万延) 원년(1860)에 예의 칸린마루(咸臨丸)으로 '견미 사절단'을 파견한 일본은 그 후 영국과 프랑스의 공사에게서 재촉을 받아 2년 후의 분큐 2(1862) 122, 타케우치 시모노카미 야스노리를 장으로 하는 38명이 유럽을 향해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제일의 목적은 당시 유럽에서 요구되고 있던 에도, 오사카, 효고, 니가타의 개항의 연기를 직접 담판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가라후토(樺太)의 국경 문제에 대한 러시아와의 회담도 예정되어 있어 꽤 중대 임무를 짊어진 유럽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대한 임무에도 불구하고 힘든 도정을 걷게 됩니다.

이 멤버는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미국에 간 경험도 있고 네델란드어에도 정통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나 후에 저널리스트가 되는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郎)라고 하는 신진기예의 젊은이들로 외국의 사정에도 자세한 서포트역이었입니다. 하나 더는, 방금전의 중요 임무를 짊어진 이들로, 하타모토(旗本)급의 중진들이었습니다. 외국의 사정에 정통한 이들의 말은 듣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시킵니다. 출발때부터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으려 했다고 합니다. 짐에도 된장과 쌀을 실어, 결국 된장이 심한 냄세가 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많은 산해진미가 나와 쌀과 취사도구는 그냥 호텔에 주었다고 합니다.

가장 기묘했던 것은 이 사절단이 화장실을 이용했을 때입니다. 일단 몇명의 보디가드역인 사무라이를 대동했습니다. 그리고 양변기에 앉지 않고 위에서 수세식을 이용하듯이 앉았다고 합니다. 또한, 이 자세가 매우 불안정 하기에 측근이 횃불을 들고 비추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문은 열고 이런것들을 행하였가에, 외국인들은 매우 당황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