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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만가

by 자한형 2021.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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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훈

 

. . . 아카시아 가지가 차를 때린다. 좁은 길. 아주 좁은 길. 이런 데서 자동차들은 어떻게 비켜갈까. 어머 그게 무슨 상관야. 나 좀 봐. 아이 어쩜 이럴까. 이런 생각밖에 안나, 내 세상이 끝났는데 왜 이렇게 아무 일도 없담. 왜 이렇게. 왜 이렇게,,,,,, 아아. 텅 비어 있을까.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모든 것이 ? 모든 것이. 모두가. 모두가. . . . 아이 어쩜 이럴까.

그녀는 창 밖의 가을을 본다.

속이 알차 가는, 부듯하게 익은 철이 자신 있게 유유하게 거기 서 있다. 앓아 있다. 웃고 있다. 개솔린 냄새보다 짙은 송진냄새. 아아 어쩜 이럴까.

고원(高原)의 마루턱에서 차는 멎는다. 네 사람의 손님들은 차를 내려가서 차 머리 쪽으로 간다. 그녀는 맨 뒤 자기 자리에 앉은 채로 움직이고 싶지 않다. 그늘이 바뀌어 있다. 타고 오던 때와 거꾸로 햇빛이 곧바로 들어온다. 그녀는 놀란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다. 운전사 옆자리 덩그마하게 솟은 기관부 위에 북어 짝이 장작개비처럼 수북이 일려 있다. 허름한 시골 버스다. 마루(?)를 본다. 판자가 들썩한 사이로 자갈이 내려다보인다. 그녀의 구두는 보얗다. 그녀는 웃는다. 어머. 죽으러 가면서도 교태야. 그녀는 웃는다. 구두한테 ? 구두한테야 뭐 어쩔려구. 뭐가. 뭐가? 무슨 말이었드라? 그녀는 깜박 잊어버린다. 무엇을? 무엇을? 무얼 잊어버렸을까, 무얼 잊어버렸는지 알면 잊어버리지 않았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웬일일까. 일어선다. 차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비로소 와 있는 곳을 안다. 다 트였다. 구불구불 산길. 이 차가 올라온 길이 저기까지 보인다. 아카시아가 많은 길이다. 주욱 올라와서 여기다, 다 트였다, 사방이, 제일 높은 곳. 운동장만한. 클로버. 클로버. 클로버,,,,,,

클로버 보료 위에 뭇 들꽃들이 꽃밭을 만들고 있다. 거의 완전한 원형의 산마루. 구름이 바로 머리 위에 있다. 높은 가을 구름이.

부르릉. 돌아본다. 운전사는 자리에 올라앉아 핸들을 잡고 비죽이 창 밖으로 목을 내밀고, 손님들은 밭 갈다 넘어진 황소 들여다보듯 엔진 주위에 몰려 서 있다.

거기를 잘 봐요.

운전사가 밖에다 대고 소리친다. 부르릉 부릉.

그녀는 돌아서서 들꽃 속으로 절어 들어간다. 네 잎사귀의 클로버. 경망스런. 정말 경망스런 사랑의 장난. 한 푼 짜리 사랑의 장난. 한푼 두 푼 모아서 목돈을 만들려던 것일까. 손이 퍼렇게 되게 클로버를 따고 그는 말짱한 손을 뒷짐지고 웃는다. 보고만 있다. 나는 그의 머리며 가슴 호주머니며 단추 구멍에 꽂아 주고. 저요? 제 행운은 당신이 맡아 가지고 계시잖아요. 싫어. 생각하기 싫어. 생각하기 싫어. 생각하기. 깨끗한 손으로 물러설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 내 눈에는. 장님이 된 내 눈에는. 싫어. 싫어. . 모두. 그럴 수 없어. 그럴 리가. 고럴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녀는 클로버를 밟고 걸어간다. 끝이다.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어머, 안 오셨어요?

이러저러하게 궁리를 했던 말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받아버린다.

엇갈리신 모양이구만.

늙은 바깥주인은 혀를 끌끌 찬다.

어쩌나.

깜빡, 거짓말이 참말 같다. 울고 싶다.

어쩌나.

어디 딴 남이, 호숫가의 산장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 때문에,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정말 어쩌나. 아아 정말 어쩌나.

허허 참. 아무튼,,,,,,

들어가자고 주인은 앞장선사. 뒤뜰 정자에 가서 앉는다. 노인은 마누라를 부르면서 부엌 쪽으로 돌아간다. 노인의 모습이 칡넝쿨 저쪽으로 돌아가자 그녀의 고개는 고리가 열린 기계처럼 돌아간다.

거기 호수가 있다.

호수에는 금()의 화살들이 수없이 꽂혀 있다. 해질 무렵의 햇빛이 호수에 기름처럼 흘러 있고 물가에서부터 시작하여 훨씬 안쪽까지 자라 있는 갈대들은 그렇게 보인다.

늙은 부부가 나오는 기척에 그녀는 휘딱 고개를 돌린다. 호수를 보고 있는 자기를 들키면 그녀의 마음이 들킬 것처럼 느껴져서.

늙은 마나님 앞에서 그녀는 또 한번 정말이고 싶은 거짓말을 다시 한번 걱정해보아야 했다. 철이 지나서 손님이 없다 한다. 기찻길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늘 그럴 것이라고 한다. 오기로 했으면 어련히 오겠느냐고 말한다. 냄새가 독특한 산차(山茶)를 권한다.

노파와 둘이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그 인자하게 늙은 얼굴의 주름이 점점 분간차기 어려워지고 끝내 말소리만 남는다. 잠깐 사이에 해가 넘어가 버린다. 지난 여름에 정이 든 늙은 부부는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오질 않는 것이 자기들 탓이나 되는 젓처럼 미안해한다.

포마드 통에 심지를 단 기름불이 밝히는 밥상에 둘러앉아서 식전 기도를 드리면서 노인들은 주님의 어린 딸이 먼길을 무사히 닿은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녀와 여기서 만나기로 한 청년이 내일 차편으로 무사히 오게 되기를 간절히 빈다. 그녀는 끝내 울음소리를 입밖에 내고야 만다.

이러면 안돼요. 하룻밤만 꾹 참으면 될 걸 가지구서, 자자, 몸에 해로와요. 이럴 땔수록 끼니를 제대루 해야지.

모두 산나물뿐인데 늙은이가 호수에서 잡았다는 붕어도 올라 있다. 그녀는 속이 올라왔다. 문득 보인다. 어두운 호수의 밑바닥에 누워 있는 자기의 입으로 드나들고 있는 고기떼들이. 그녀는 더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늙은이들은 말리지 않는다.

 

작년과 같은 그 방에서 그녀는 호수를 내다본다. 원래 숙박은 받지 않고 철에 찾아오는 인근의 소풍객들에게 차와 식사를 대접하는 집이라 크지도 않다. 혼지 있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지 주인 부부는 잠자리를 보아주고는 자기들 방에 돌아가서 찬송가를 부른다. 많이 불리는 곡이어서 귀에 익은 그 노래를 그들은 조용히 같이 불렀던 것이다. 이 방에서 지난 여름에. 아아. 그러고도 이렇게 될 수 있다니. 우리는 호수에 나갔다. 작은 배를 타고 저어나갔다. 그는 물론 노 젓는 것이 서툴다. 기우뚱기우뚱하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얼마를 젓다가 돌아보면 우리 배는 그저 그만한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 배가 남겨놓은 물 이랑이 달빛 속에서 또아리를 풀어 가는 뱀처럼 구불거려 보인다.

나는 소리 없이 일어서서 물가로 내려간다. 노인들의 노래 소리도 그만하게 들릴 만큼 가깝다.

우리는 갈대 사이로 배를 저어간다. 갈대가 있는 데는 빠져가기가 더 어렵다.

달빛은 갈대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가냘픈 창대처럼 갈대는 달빛을 튕겨내고 물 위에 그만한 수의 그림자를 눕여 놓고 있다. 서 있는 은빛의 창대들을 헤치고 물 위에 쓰러진 그림자를 깨뜨리면서 배를 몰아간다, 처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처벅처벅거리면서. 갈대가 뱃전에 부딪치는 탁탁탁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단단하면서 약간 물기 있는 소리. 노가 갈대를 헤치는 팔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한바퀴 들리는 소리 사이에서 뱃전에 부딪치는 갈대소리는 한결 잦다. 사그락 사그락 할 때는 스칠 때. 지금 그 소리가 들린다.

지금도 배 세 척이 물가에 매여 있지만 저기 보인다. 우리가 탄 배가 갈대 사이를 지나는 것이. 훨씬 들어간 곳이지만 배 가는 소리도 들린다. 탁탁탁 부딪치는 소리만이 아니고 은밀한 사그락 사그락 소리까지도. 자기 귓속의 귀지가 무너앉는 소리처럼 가깝고 가깝게.

 

좋지?

좋아요, , 좋아요.

내 친구가 여기 한번 가보라는 거야.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명승지라는 거야.

그분도 이렇게 했나요 ?

그건 말 안 하더군.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린데 어때 ?

그런 말 싫어요.

? 내가 나빴어, 화났어 ?

처벅 처벅. 타 탁 탁. 그 사이로 살그락거리는 숨소리를 그는 자기 입술로 막는다.

 

사랑해.

사랑해요.

영원히.

영원히.

어떻게 사랑하면 다 사랑할 수 있을까?

다 사랑하는 것 싫어요.

--슨 소리지?

다 사랑하면 어떡허게요?

우리 죽을까?

어머 왜 죽어?

죽기가 무서워?

당신하고 살고 싶어요.

살아야지.

이담에 죽으면 같이 파묻혀요 네?

왜 파묻히는 소릴---

어머 자기는?

 

그들은 웃는다. 서투른 노 끝에서 빛나는 물방울이 튀어나간다.

 

인제 그만 나가요.

얼마 오지도 않았어.

그래도 많이 왔어요.

난 헤엄 못하니까 당신만 믿어.

저도 못해요.

 

온 누리에 은빛이 넘쳐흘러서 서먹할 만큼한 크낙한 행복. 그들은 다시 노를 저어 그녀의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끝에서 끝이 보이는 호순데 그들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기슭에도 닿지 않았는데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갈대 숲에서 그들의 배가 쑥 나온다. 부인이다. 그의 부인이다. 아아. 나쁜, 나쁜 사람. 그녀는 한발 물가로 다가선다. 사라졌다. 그들이 타고 있던 배는 어느 기슭에도 없는데. 갈대 숲은 아무 것도 감춘 것이 없는데. 그의 목소리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그 밤에 부르던 노래. 나쁜 나쁜 사람. 거짓의 호수로 나를 부른 사람. 그녀는 한 발 더 다가섰다. 어느 기슭에도 배는 없고 호수로 부르는 젊은 노래 소리 대신에 늙은 목소리들이 신()을 부르고 있는 평화스런 소리를 등뒤에 듣는다.

 

노인들 방에 가 앉는다. 대단찮은 가구들이 모두가 잘 닦아놓은 곱돌 솥처럼 참하다. 시렁에 얹어놓은 산차 꾸러미가 언뜻 보기에 시래기 널어놓은 모습이다. 그 밑에서 노인들은 산차 같은 이야기를, 시래기 같은 이 야기를 들려준다. 눈으로 듣는다. 고개로 듣는다. 제 속의 환상을 보면서 제 슬픔에 혼자 주억거리면 노인들에게는 고즈넉한 말동무가 되어준 것이 된다. 그래서 산차 같은 이야기고 시래기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도 자리를 뜨고 싶지는 않다. 생명이 멍해지고 노인들의 얘기꼬리도 놓치면 벌레소리가 몰려온다. 포마드 통에 심지를 단 기름불은 창호지를 적시며 밝혀주는 달빛보다 훨씬 못하다. 창호지 너머로 그녀에게는 보인다. 은빛의 갈대들이 창창하게 꽂힌 호수가. 노인들은 그녀가 참하다고 한다. 덕이 있어서 남편 복이 있겠다고 한다. 달빛이 번쩍이는 호수에 그들이 탄 배가 미끄러져 간다. 두 사람이 탔는데 세 사람이다. 얼굴이 셋인데 몸은 둘이고 한 몸뚱이에 얼굴은 하나씩이다. 갈대가 배를 때린다.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이 참한 청년이라고 노인들은 말한다. 요즈음 세상에는 시골 젊은이들이라고 참하지만은 않다고 한다. 내일은 꼭 온다고 한다. 그러면 교회에 나가보자고 한다. 건너 마을에 있는 교회에 셋이서 가자고 한다. 셋이 탄 배에 두 사람이 앉아서 그녀를 도고 웃는다. 어쩜. 그녀는 노엽다. 노인은 자기 말이 통해서 즐겁다. 노인은 아들 셋을 앗아간 전쟁이 노여웁다. 늙은 마나님은 성경책을 편다. 치마꼬리를 눈에 가져가는 형국으로 성경책을 편다. 늙은 여인도 그녀의 호수를 본다. 그녀의 호수에서는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가신다. 그녀는 알릴락말락 몸을 흔들면서 주님을 따라 중얼중얼 호수를 건너간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온다. 앉지 않고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다. 벌레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그렇게 아득하게 벌레소리에 잠겨 있다가 다시 노인들에게로 간다, 혼자서 자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노인들은 그녀를 아랫목에 눕히고 자기들은 웃목에 밤송이처럼 오그라 붙는다. 기름불이 꺼지고 방안에 싯부연 달빛이 가득 찬다.

한 해를 호수에서 살았다. 어디를 가나 호수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나 호수가 있었다. 그녀의 스물네 시간에 호수는 그녀의 속에 있고, 밖에 있고, 거기서 그들은 늘 배를 타는 것이었. 호수에서의 삶. 사그락 대는 갈대 숲의 목소리 속에서 도시의 해가 뜨고, 호수에 어울리지 않는 도시의 부분들은 호숫가에서 산등성이에서 스르륵 움직이던 반딧불보다도 못했다.

그녀는 창문으로 내다본다.

밤의 호수. 묵화처럼 둘러선 산 그림자 속으로 밖으로 차단한 여린 빛의 티끌들이 스르륵스르륵 떠돈다. 그것들은-반딧불들은 홀수 위에도 흐른다, 갈대 숲 사이사이로 인불처럼 흐르고 줄기에 매어달린다. 깜박 내려앉은 태양을 미처 따르지 못하고 달은 뜨기 전 한결 어두운 하늘에 은하수가 흐른다. 별들은 호수로 떨어져 내려와 물 속에 잠기고 갈대 숲 사이사이로 인불처럼 흐르고 묵화처럼 둘러선 산 그림자 속에서 밖에서 차단한 여린 빛과 티끌이 되어 스르륵 스르륵 떠돈다.

이윽고 달이 뜬다. 호수는 빛의 거울이 된다.

 

갈대 사이로 배가 지나간다. 밑바닥에 문둥이가 누워 있고 여자가 곁에 앉아서 남자의 허물어진 이마를 짚고 있다. 문둥이 얼굴에서는 여기저기 은빛의 고름이 배어 나온다. 여자는 거기다 입맞추고 핥아먹는다. 여자가 문둥이가 된다. 달처럼 환한 남자가 누워 있고, 얼굴이 허물어진 여자가 곁에 앉아 있다. 여자는 세 손가락만 남은 손으로 근심스럽게 남자의 이마를 짚는다. 남자는 몸서리치며 일어난다. 가만있어야 해요, 하고 여자가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말아. 남자가 그렇게 말한다. 제가 만져야 나아요. 나를 속였지, 하고 남자는 말한다, 억설을 한다고, 그 자리에-없는 내가 발을 동동 구른다. 당신이 그래도 좋다고 하지 않았어요? 하고 여자는 말한다. 나 아닌 패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고 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됐어 ? 하고 남자는 말한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고름을 빨아왔어, 하고 남자는 말한다. 내게서 ? 내게 어디 고름이 있어. 여기 있잖아요 ? 그녀는 은빛 나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허물어진 얼굴에 흐르는 고름을 찍어 보인다. 여기 있잖아요 ? 하고 여자는 말한다. 네가 나를 망쳤어, 남편이 있으면서 나를 유혹했지? 하고 남자가 말한다. 아아 거짓말을. 당신도 아내가 있으면서, 하고 웃는다. 그것이 정말인데. 내 남편은 저기 있어요. 여자는 은빛의 손가락을 물 속에 잠그면서 가리킨다. 호수의 밑바닥에 달 같은 남자가 누워 있다. 손짓한다. 저이가 불러요. 가야 해요. 그녀는 물 속으로 내려간다. 남자와 여자가 탄 배는 어디론지 가버렸다, 어느 언덕에도 닿지 않고 그들의 배는 먼 항구로 가버렸다. 그녀는 그들이 웃으며 가는 것을 본다

호숫가에 매어놓은 세 척의 배는 그때처럼 그녀의 눈 아래 있고, 그런데도 내 세상은 끝난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한밤내 자지 못했는데도 머릿속이 은종이처럼 맑다. 늙은 주인은 그녀와 마주앉아 호수를 둘러싼 산을 가리킨다. 한가한 틈이면 마누라와 둘이 여기 앉아서 서로 무덤자리를 짚어본다고 한다. 그들의 의견은 아직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한다. 저기 눈에 띄는 소나무 아래가 좋지 않느냐고 한다. 할아버지는 오래 사신다고 말한다. 늙은 주인은 그래도 여기저기 산비탈을 가리켜 보이면서 그들이 오래 살 집터를 이야기한다. 소나무 저편이 차()밭이라 한다. 작년에 그들은 어찌어찌 하다가 가보지 못하고 만 곳이고. 차 이야기가 나온다, 차는 까다로운 식물이라 한다. 자리가 바뀌면 여간해서 살지 못한다고. 그래서 혼인 예식에 다례식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 지아비 한 지어미를 섬겨 해로 백년하자는 뜻이라 한다. 서로를 떠나서 서로의 삶은 없으리라는 정절의 맹세라 한다. 가냘픈 나무 포기보다 못한 사람의 이야기가 슬프다. 집에 데리고 가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가족을 알자고 하지도 않았다. 약혼식을 하자고도 않았다. 도장 찍고 주고받는 것이 싫어서. 세상을 얕보면서 살리라 했다. 속고 속이는 험한 꼴은 유행가에나 있는 것이었다. 뭐 애써 그리 생각한 것도 아니겠다. 사랑하기에 태일 바빠서. 당신하고 죽고 싶지만 내 몸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고. 나를 남편이라 애비라 부르는 것들이 나를 묶는다고. 땅을 옮겨 앉아도 안 죽겠노라는 사람. 나무에 목숨을 걸었던 내 바보.

높은 구름이 하늘에 비껴 있고 호수는 고요하게 빛난다. 허깨비들은 다 어디 갔는가. 그 추한 것들은. 어지러이 뛰던 그것들은. 노인이 일어서든 기척에 퍼뜩 다른 정신으로 돌아온다.

늙은 부부는 그녀를 두고 건너 마을 교회로 갔다.

빈집에서 서성거리다가 정자에 와 앉는다. 누렁이가 곁에 와 엎드린다. 털이 수북한 늙은 개다.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그 사이 사람이 올까봐 집에 있으라고 늙은 부부는 말했다, 사람이 온다고. 정말 올 것 같은 환상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녀가 찾아온 시간에 그 사람도 불현듯 달려오고 싶은 마음이 솟기를 바라는 마음. 방에 가서 시계를 본다. 정말 약속한 것처럼 사무친다. 반딧불보다 약한 우연을 바라는 마음이 해바퀴만한 환상이 된다.

호수의 겉에서 반짝이는 햇빛 알알들을 낟알 줍듯 헤아리면서 기다린다. 그 숱한 낟알을 다 주워도 사람은 오지 않는다.

뒤뜰에 가서 닭 모이를 준다,

그늘에 널어놓은 산차를 뒤적인다.

부엌에 가본다. 반지르르한 솥뚜껑을 들어본다. 찐 고구마, 찬밥이 들어 있다. 뚜겅을 닫는다. 찬장을 열어본다. 고사리 접시가 하나, 도라지 무친 것이 하나, 이름 모를 산나물이 두어가지 더 있고, 말짱하게 씻은 그릇들. 어디 한군데 손댈 데가 없다.

정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에 오른다. 나무 같은 것들이 서 있고, 풀 같은 것들이 자라 있달 뿐 아랑곳없는 마음이 산을 오른다. 벌레 소리가 짜증스럽고 맨 종아리는 쓸데없이 따끔거린다.

내려와 버린다.

도로 정자로 온다. 방으로 가서 시계를 본다. 물가로 내려간다. 누렁이가 따라온다. 호숫가에는 세 척의 배가 매어져 있다. 닻줄을 푼다. 올라간다. 기우뚱하면서 그녀든 배 가운데 선다. 노가 없다. 다시 내려서 뒤꼍으로 간다. 노 한 개를 들어다 배에 얹는다. 누렁이가 의아스럽게 쳐다본다. 하나를 마저 가져다가 싣고 탄다. 노 하나를 들어 물밑을 민다. 천천히 모로 틀어지면서 배가 쑥 나간다. 두 팔에 힘을 주어 노질을 해본다. 안 나간다. 씨애질을 한다. 누렁이가 짖는다. 어느새 누렁이는 발을 반쯤 잠그고 물 속으로 들어와 있는데 그녀의 배는 누렁이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은 나와 있다. 누렁이는 또 짖는다. 그녀는 또 젓는다. 앞으로 나가는 대신에 호수는 그녀의 배를 모로 핑그르 돌려놓는다, 저만큼 앞에 물 속에 잠긴 구름의 머리까지 아무리 애를 써도 닿지 못한다.

갈대숲 사이에서 배가 나온다. 배에 탄 두 사람의 남녀는 얼굴이 허물어진 그 사람이다. 그들은 칼을 들고 그녀 쪽으로 쏜살같이 저어온다. 그녀는 죽을 힘으로 달아나는데 물에 잠긴 구름의 머리는 아직 그만하고 쏜살같이 칼 든 사람들은 고만한 데서 그만하게 그대로 저어온다.

저 사람들이 무섭다. 무서워. 이 호수에서 발리 빠져나가야지. 그녀는 살고 싶다. 배는 자꾸 맴을 돌고 팔은 이제 노처럼 뻣뻣하다.' 안되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배로 도망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한다. 얼굴이 허물어진 사람들이 칼을 높이 든다. 창던지기 선수처럼. 그녀는 결심한다. 호수를 떠나기로. 그이도 없는 호수. 자기도 없는 호수. 허깨비들이 사는 호수에서 잔해를 살아온 호수. 영원히 살아야 할 호수. 떠나고 싶지 않은 호수. 그래도 떠나는 길밖에 없다. 그녀는 노를 버리고 뱃전을 찬다. 물위를 달려간다, 물에 잠긴 구름의 머리를 깨뜨리면서 달려간다. 울면서. 호수여 안녕.

 

빈배를 향해 짖으면서 누렁이가 물가를 따라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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