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떡개구리 한 마리 마음놓고 뛸 처지가 못 되는 이 좁디좁은 동네가, 잎담배 수납기(收納期)가 닥쳐오면 화냥년 속치맛자락처럼 바빠진다.
웬일인지는 몰라도 그 맘때쯤이면, 생판 낯선 타관붙이들이, 허술한 닭장에 족제비 드나들듯이 동네를 뻔질나게 드나든다. 읍내에서 화투장깨나 제낀다는 잡놈들이 사타구니에 두 손 찔러 넣고 골목을 기웃거린다. 술애비질로 피둥피둥 주걱턱에 군살이 오른 읍내의 소방대장인 최 아무개. 옛 날에는 파출소 소장까지 지냈다던 그 안경잽이 백 주사. 천하에 몹쓸 접대
부 생활 청산하고 이제는 합동정유소 소장 소실로 들어앉은 난옥이. 주재기자(駐在記者) 생활로 집을 두 채나 가진 김 아무개. 대개 이 따위 잡동사니 중생들이 소위 예비 시찰조로 동네를 한두 번씩 들러간다.
담배 수납은 대개, 가을걷이가 끝난 동짓달 하순에 시작되어 섣달 중순에 끝나곤 하였다.
농사는 추현 동네사람들이 뼛골 부러지게 짓건만 지은 농사 두고 흥분하는 건 언제나 타관 것들이 먼저였다.
동네로 들어오는 버스라야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것도 두 번이고 나가는 것도 두 번이다. 그놈의 버스가 바람 먹은 개구리배처럼 팅팅 부어서 엉긍엉금 담배 가게 앞에 와서 멎는다. 평일에는 겨우 좌석이나 찰까말까한 시골버스가 담배 수납기를 며칠 앞둔 지금에는 그저 칵 빠그라져 버릴까 겁이 날 정도다. 웬놈의 중생들이 그렇게도 들이닥치는지 그저 좋은 건 동네 아이들이다.
이 철없는 것들은 밥만 처먹으면 정유소로 달려가서 하루해를 보내고서야 집구석으로 돌아온다. 어른들이야 집 나간 계집이 돌아온대도 정유소에 나갈 틈이 없다. 수납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에 조리(調理) 작업 아니면 작포(作布)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애들이란, 특히 산골에서 커 가는 애들이란 오락이 없다. 오락이라야 소주 뚜껑 같은 것이나 튕겨서 땅뺏기놀음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호기심만은 중뿔나게 많은 아이들이어서 하루에 두 번밖에 오지 않는 그놈의 버스를 기다려 하루 종일 담배 가게 주변을 맴도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버스에서 많은 놀라운 광경들과 새로운 소식과 지식을 얻는다, 지난 봄에 시집간 누구 집 누이가 여덟팔자 걸음으로 버스에서 내리더라. 서울서 철공소에 다닌다는 순갑이가 비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삐딱삐딱 걸음으로 내려선 이발소에서 면도하는 제 형님하고 팔이 부러져라 악수를 하더라는 등, 읍내의 지서 순경인 지 아무개가 사복차림으로 버스를 내리더라는 등, 별별 소식을 물고는 해질녘에야 집구석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쇠끝같이 찬 초겨울 바람이 내복 없는 사타구니에 그대로 기어들건만 무슨 놈의 악다귀로 배겨내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물고 들어오는 그 형형색색의 단편적인 소식들이야말로 한 가족의 저녁 밥 상머리를 풍요하게 만들고 또는 잠자리에까지 이어가기 마련이었다,
"오늘 술집 색시 봤데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힐끗거리며 밥숟갈을 아가리에 우겨 넣던 대수란 놈이 느닷없이 이렇게 이죽거렸다. 실은 아까부터 그놈의 소리를 칵 뱉어 놓고 싶었는데, 애비 눈치 살피느라 이제까지 참아 온 것이다.
"술집 색시라이?"
투바리에서 금방 콩나물을 건져 올리던 아내가 묻는다. 윤직은 못 들은 척하고 밥숟갈만 우겨 넣고 있었다.
"이발소에 있는 순돌이가 그라는데, 오늘 막 버스에 술집 색시가 다섯이나 들어왔다카데. "
"니가 봤나?"
아내가 다시 묻는다.
"나도 봤지. 테레비에 나오는 여자들 같은 사람들이 왔어."
방안이 한참 조용하다. 텔떼비젼에 나오는 여자들 같다면 대수놈의 말은 아마 틀림없을 게다.
"담뱃돈은 개도 먹는다카디, 참말로 개년들이 모여들었구나."
그만 밥숟갈 탁 놓고 물러앉는 여편네의 한쪽 볼따구니에 까닭 없는 질투가 덕지덕지 묻어 온다. 술집 색시들이 몰려왔는데 처먹던 밥숟갈은 왜 던지는가 싶었지만 윤식은 모른 척한다.
"이 집에서 젤 좋아하는 사람 하나 있다카능 거 니 아제?"
밥상에서 물러앉는가 싶더니 여편네는 죄 없는 대수놈을 흘겨보면서 다시 깔죽거린다.
"아제. 아부지지 뭐."
제 어미 간장 타는 줄은 만에 하나라도 헤아릴 길이 없는 대수란 놈이 밥숟갈로 제 애비 주걱턱을 가리키며 히실히실 웃는다.
"어이그,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카디 이거는 워째서 떡살로 찍어 놓은 것 같으노."
입안에 남은 콩나물을 어금니로 으적으적 씹으면서 여편네는 아들과 아비를 번갈아 흘긴다.
"엄마는 공스레 신경질이고, 술집 색시들이 워디 우리 집에 쳐들어 오는갑다."
그렇지, 자식새끼 한번 능글맞은 놈으로 싸놓았구나 생각하면서 윤식은 끝내 말없이 일어나고 말았다.
오늘밤엔 집합(集合) 강화(講話)가 있는 날이다. 여편네와 티격태격 싸우다 그 자리에 참석 못 하면 큰일이겠기 때문이었다. 이 동네 담당 주재(駐在) 지도사(指導士)인 김 영배가 오후에 와서 총대(總代)집 사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달, 대전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는 손위 동서 내외가 왔을 때도 잡지 않고 두었던 씨암탉을 윤식은 오후에 잡아서 총대집으로 보낸 터였다. 총대도 물론 그렇지만, 주재 지도사를 잘못 사귀어 놓으면 일 년 동안 뼈 부러지게 지어 놓은 담배농사를 하루아침에 쓰레기보다 못한 농사로 만들기는 그리 어려온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배농사에 손대어 본 사람이 라면, 누구나 주재 지도사만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처지임을 안다. 더우기나 윤식에겐 쳐다보기조차 망막한 그 관청이란 곳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숨통이며 끄나풀이기 때문이었다.
밖은 추웠다. 섬돌로 내려서자, 차가운 골짜기바람이 아직도 얼지 않은 개울을 여우 울음소리를 내며 불어 갔다. 부엌으로 나간 여편네가 그릇들 이 부서져라고 구정물통에 쏟아 붓고 있었다. 윤식은 여편네의 그런 앙탈을 이해한다.
혼자 지은 농사가 아니다. 차라리 담배 농사라면 여편네가 더 깊이 관여 된 농사다. 묘상기(苗床期)에서부터 그랬다. 솎아내기, 밭으로 옳겨심기. 올해 같은 그 지독한 가뭄에도 한 포기라도 살려 보려고 10리가 좋은 개울에까지 물지게를 지고 가서 산등성이까지 물을 퍼올리는 데에 여편네는 뼈가 으스러졌다. 이제 겨우 서른에 접어든 여편네의 고와야 할 어깨에 담뱃불로 지진 듯한 멍든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윤식은 알고 있다. 젊은 놈들이란 깡그리 도회로 빠져나가 버린 이 급살맞을 놈의 동네는 돈을 쥐고도 일꾼이 없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그는 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서다 말고 곧장 건조실(乾燥室)로 들어갔다, 바닥에 나와서 뒹굴던 쥐들이 그가 들어서자, 흙벽을 타고 와르르 기어올랐다. 그는 석유초롱에다 불을 당겨 붙이고 비닐에 싸인 담배 포(包)들을 살펴보았다. 매캐한 담뱃잎 냄새가 건조실에 그득하다.
윤식은 그 냄새를 사랑한다. 그 냄새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상, 담배 농사는 지을 수가 없다. 운전사에게 기름 냄새가 나듯 밭에서부터 수납장(收納場)에 이르기까지 그 냄새는 그에게 붙어 다녔다.
읍내의 음식점이나 곡물 상회에서도 어깻짬에 담뱃진 냄새가 나지 않으면 외상 거래를 틀 수다 없다. 옷에서 그 냄새가 나서야 총대의 보증만으로 일 년 내내 외상으로 곡식 낟알깨나 들여올 수 있었다. 밭농사가 거의 전부인 윤식에게는 그런 편의가 있어 준다는 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건조실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건조실 출입구엔 돼지 발톱만한 자물통이 달려 있었다. 그는 자물통이 잘 물려 있는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도둑이 심했다. 특허 포장(包裝) 작업이 한창일 지금쯤에 담배 도둑이 심했다. 삼사 년 전부터 타관 놈들이 수납장 부근을 배회하고, 읍에서 삯전을 받고 조리 작업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마을에 덮치면 담배 도둑이 생기기 마련이다. 등급을 가늠 지워 포장된 물건을 훔쳐 가기 때문에 육칠 등 짜리면 몰라도 들고 간 게 일이 등 짜리라면 적어도 삼사만 원의 현찰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작년 이맘때의 일이었다.
밤 한시경이 되어 작포를 끝내고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포장한 담배를 건조실로 옮기지 못하고 마루방에다 그대로 쌓아 둔 채 윤식은 안방으로 건너왔었다. 건너와선 그대로 쓰러져 코를 탈탈 골아 버렸다.
잠결에 관자놀이 한쪽이 그냥 작두에 찍혀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윤식은 그러나 피곤 때문에 반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결에 귓밥으로 여편네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저게 무신 소리요?"
잠결에서나마 얼른 짚이는 게 있어 윤식은 부지불식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는 사람의 목덜미를 잡고 여편네가 다시 늘어졌다
"이 냥반이 왜 이려?"
다시 자리께로 그는 덜썩 누웠다.
"왜 그래?"
"저게 무신 소리요?"
여편네가 마루 방께를 어둠 속에서 가리켰다. 윤식은 마누라가 그쪽을 가리키자마자, 더 이상 생각하고 귀 기울여 보고 할 겨를도 두지 않고, 그냥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소리질렀다.
"웬 놈이냐? 누구야?"
분명 수 놈이, 쌍아 둔 담배포 곁에 서 있었다. 마침 한 놈은 뒤에서 떠받치고 한 놈이 그걸 받아 등에 얹어 뛰려는 참이었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윤식이 때문에 두 놈은 혼비백산으로 섬돌을 껑충 뛰어 마당으로 떨어졌다. 마루 한쪽이 놈들의 발길에 죽는소리를 하고 부러져 나갔다. 뛰던 노루가 바윗등걸에 떨어진 것처럼 모질게도 나가떨어진 두 녀석은 그러나 사태가 사태인만치 금방 일어나서 대문을 박차고 밖으로 내달았다.
금방 놈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긴 늦었으나 윤식은 대문을 나서는 두 놈의 뒤통수를 보고 냅다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골목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두 녀석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골목길만을 따라 한참 뛰다 보니 분명 앞서 튀어야 할 두 놈이 보이지 않았다.
맛도 못 보고 뭣끝에 똥만 묻힌다더니 달아난 놈 잡지도 못하고 동장네 집 외양간에서 퍼 내놓은 쇠똥에 미끄러져 하마터면 허리 부러뜨릴 뻔만 하였다. 종아리에 질펀히 묻은 쇠똥을 토담에 대고 문질러 벗기면서 윤식은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던 것이다.
그놈들을 잡아 봤자 무슨 소용이며 요절을 낸들 무슨 분풀이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십중팔구 동네의 열일곱 살이나 처먹은 놈팽이들이겠거니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잡고 보면 다 괄시 못할 집구석의 자식들이기가 십중팔구일 것이다. 일할 생각은 않고 돈만 눈에 선한 놈들이 동네에 남아 있는 젊은 것들이란 거다. 이 자식들은 눈만 뜨면 다 떠나는 그 숱한 서울 오입도 못 가는 놈들이다. 도회의 철공소에라도 가서 망치질도 하기 싫은 놈들이 동네에 남아있다고 해서 농사일을 거들 리 만무였다.
처먹고 밖으로 나가면, 이발소에 몰려들어가서 좁은 이마의 잔털이나 면도질하다가 골목 앞을 지나가는 동네 처녀들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곤 웬 썩어질 놈의 휘파람을 또 뱃구럭이 꺼지게 불러 제치던 것이다. 다 그런 놈들의 짓임이 분명하였다. 그 중엔 총대의 아들도 있고 예비군 중대장의 아들도 끼어 있었다.
그놈들을 잡아 봐야, 이쪽에서 할 말을 다 못 하고 놓아주어야 할 판인 것을 내가 왜 지랄한다고 쇠똥까지 밟아 가며 뒤쫓아왔던가 싶어 윤식은 서글퍼진 것이다.
녀석들이란 일찌기 여색에 맛들여서 걸핏하면 이웃동네 처녀들을 건드려서 아일 뱄느니 처녀가 도망을 쳤느니, 꿰차고 읍내 여관으로 나가서 일주일이나 자고 돌아왔느니 하는 소문들이 심심찮게 나돌던 것이다, 음식 싫은 건 개나 주지만 사람 못된 건 개도 못 준다는 말이 꼭 맞은 게 이들 몇 안 되는 동네의 놈팽이들이었다.
무슨 일이 났는지, 오늘밤에도 콧구멍만한 이발소에 녀석들은 웅기중기 모여 앉아 있었다. 담배 농사에 손끝 한번 넣어 본 일이 없건만 이 녀석들 또한 수납기가 닿아오면 저렇게 들떠야 한다.
그 이발소에서 노래 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은 영원한 것 나는 너를 사랑하네 아직도 너 하나만을- 어떤 놈이 어디서 언제 사 왔는지 기타 통을 빠그러지게 두드려 대고 야단들이었다. 그놈의 사랑은 무슨 놈의 힘이 좋아서 이 밤중에도 나자빠져 주무시지 못하고 아직도 사랑해야 하는지 참으로 한스럽다. 처먹은 것을 저토록 소화 못 시켜 뒷산이 징징 울도록 떠들어야 하는 것이라면 집구석으로 쫓아가서 흙벽돌이라도 찍어야 쓰겠건만 그 짓은 또 죽어도 못 하겠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사랑만은 영원히 해야 하는가 보았다.
딩강딩강 기타 소리에 창문이 떨고 있는 이발소 앞을 지나는 사이에 웬 낯선 타관붙이들이 담 모퉁이에서 이마를 맞대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 윤식은 넘어오지도 않는 가래침을 저 아래서부터 긁어 올려 이발소의 문설주 앞에다 칵 뱉었다. 필시 읍내에서 넘어온 노름꾼들임에 틀림 없거나 아니면 이차판에 한몫 잡아 보려는 거간꾼들임이 분명하였다. 하필이면 총대 집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는 게 윤식으로선 안스럽고 불쾌했다.
총대 집에 들어서니 사랑방에 불이 환하다. 네댓 평이나 됨직한 방안에 벌써 사람깨나 모여 앉았다.
건조기에 담배를 쪄내느라고 밤잠을 못 잔 사람들이라, 광대뼈가 퀭하니 드러난 사람들이 줄담배를 피우고 앉았다. 문을 열었더니 방안에 갇혔던 담배연기가 훅 얼굴에 끼얹힌다.
서른의 나이도 채 넘기지 못한 자식이 어릴 때 약을 잘못 먹었는지 대갈통이 원숭이 밑구멍처럼 벌겋게 벗겨진 지도사인 김영태가 윤식을 먼저 알아보고 방 안쪽에서 번쩍 손을 쳐들었다.
"얼런 와요."
윤식은 그 말에 꼬꾸라질 듯 놀라는 기색을 보이며 맞받아 묻는다.
"김 기사님, 저녁은 어떻게?"
"엇따 저녁 굶었을까비요."
허기사, 윤식은 그가 손을 번쩍 쳐들 때 낮에 총대 집으로 보낸 씨암탉 한 마리를 생각했었다. 여편네가 몹시도 섭섭해하던 그 속살이 찐 암탉 한 마리를 구워 잡쉈으면 손 몇 번 쳐드는 일이야 밤새도록 해 봐야 힘들 것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작업이?"
먼저 온 축들이 엉덩이를 미적거려 윤식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몇 포나 작포됐느냐는 김가의 물음이다. 두 손 비비고 자리 찾아 앉으면서 윤식이 대답했다.
"모레쯤이면 마칠 것 같아요."
"틀림없어요?"
"그럼 이차판에 누가 거짓말하겄소?"
"틀림없어야 합니다. 만약 일손이 모자라면 건조장에서 사람 물색해서 대 줄 것이니까."
"앗다, 김 기사님, 중국 놈하고 겸상 먹고 왔소? 뭔 의심이 그리 많으요?"
담배를 태우고 앉았던 축들이 더러는 히히 웃는다.
"그럼 됐어요. 모두들 수납일 2일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작포를 끝내야 합니다. 알았지요?"
사실은 작포가 그리 문제되는 건 아니다, 농사지은 것 수납하면 곧장 돈 나오는 것 빤히 알면서 수납기일까지 작포를 늦출 머저리 같은 놈이야 없다. 그러나 김 영태도 작업 진행 상황을 조합(組合)에 보고해야 하고 때로는 출타한 사람도 끼어 있어서 작업 진행이 여의치 못할 경우, 높은 사람으로부터 견책을 당한 예도 있었다. 오늘밤은 그것만 확인해 두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 말을 지금 당장 발설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었다. 입으로는 곧장 그 말이 뱀처럼 기어 나오려는 것을 김 영태는 가까스로 참아 넘기고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떡값)이라는 문제에 있었다. 자신의 근무 성적을 인정받자면, 잎담배 경작인(耕作人)들이 수납 때 어느 만치의 떡값을 감정원들에게 바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얼핏 보면, 그것은 전연 별개의 문에처럼 보였다. 김 영태 자신은 자신의 성실과 열의를 다해서 경작인들의 애로 사항이나 상부에 전달하고 경작(耕作)에 소요되는 자재(資材) 따위는 적기(適期)에 공급해 주고 기술 지도나 착실히 하면 그의 임무는 거의 끝난다. 수납 때 낙오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행정 조치나 한다면, 사실 명목상의 그의 직무는 끝난다. 그러나 그의 근무 평정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고 수납이 끝나고 난 다음, 개개인의 경작인들이 얻은 수납(收納) 대금(代金)이 얼마나 되느냐는 그 평균치에 의해서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좋지 못하면 그는 내년엔 다시 어느 곳으로 좌천이 되어 버릴지 예상할 수가 없어진다.
자기 담당 구역의 수납 결과가 좋을수록 사무실에서의 발언권도 살고 위치도 굳어질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수납 결과라는 게 번한 것이었다. 떡값이 많이 들어간 사람의 것은 예상보다는 등급 사정이 좋았고 떡간이 들어가지 못한 경우는 등급 사정이 형편없었다. 말하자면, 감정원의 재량권이 많은 것이어서 일등품에 해당되는 담배를 삼 등으로 놓아도 누구 한 사람 항의하고 대들 형편이 못 되었다. 삼 등품을 일등으로 사정해 준대도 누구 하나 항의하고 대들 입장 또한 못 되었다. 담배 한 잎 한 잎을 보아서 사정하는 것이 아니고 이십 킬로나 삼십 킬로씩이나 쌓아 둔 전부를 같이 사정함으로 생기는 재량권이요 폐단이었다.
어쨌든 감정원이 일단 등급을 때린 담배포에 대해서는 누구도 항의할 수 없었고 설령 소갈머리 고약한 사람이 있어서 불만을 품고 항의를 하기 시작하면 그것보다 더 낮게 사정해 버릴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등급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까지 감정적인 여파가 미치기 일쑤여서 누구 한 사람 항의도 못 하고 물러나야 했다. 만약 항의깨나 하고 대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경 동네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거나 다음 해의 담배 경작권을 빼앗겨 버리기 마련이었다. 동네의 다른 경작인들이 그를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납기가 되면 동네에 돈줄이 마르기 시작했다.
동네에서 돈을 못 구하면 평소 거래가 잦던 읍내의 곡물 상회나 약방에 가서 일수 빚을 내왔다. 누구 하나 없이 그 짓거리들이었다.
읍내의 양조장으로 막걸리를 받으러 갔던 축들이 그제사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뜰이 어수선하더니 술상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김 영태가 먹을 것은 맥주 다섯 병을 따로 사왔다. 촌사람들이야 양조장 막걸리로도 감지덕지하였지만 지도기사 술은 꼭 맥주대접이었다. 맥주 상을 따로 받은 김 영태의 얼굴이 잠시 어색하다. 그 눈치를 얼른 알아차린 총대 조 필기가 허허 웃으며 말한다.
"이거 손님은 보릿술 권하고 우리는 쌀 술 먹게 되어서 미안천만이네.”
그렇지, 참 그렇구나 하면서 방안의 좌중들이 맞장구를 치며 허허 웃는다. 이를테면 잠시 어색해진 김 영태 이 자식아 미안하게 생각 말고 넌 맥주나 마셔라 괜찮아, 그런 수작이었다. 물론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촌사람들이라 해서 맥주 맛이 막걸리 맛보다는 월등하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경우 병신처럼 허허 웃어서 얼렁둥땅 넘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올핸 어찌할까."
술이 몇 순배 돌고난 뒤 조필기가 넌지시 좌중을 돌아보며 묻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십여 명이 모인 좌중이 금방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하다. 누구 한 사람 선뜻 나서서 입을 떼려 하는 사람이 없다,
"남들 연례대로 하지요 뭐."
한참만에 이렇게 입을 텐 건, 그래도 평소 읍내 출입깨나 뻔질나던 조 필기의 육촌뻘인 조 상기의 대답이었다.
"남 연례대로라니 그게 무신 소리여?"
김 영태에게 꼴깍꼴깍 맥주병을 부어 올리면서 모가지는 좌중으로 돌리며 조필기가 묻는다.
"아 형님, 작년엔 총대 안 했소?"
다시 묻는 게 안스러웠던지 상기가 발끈하는 목소리로 되받아친다.
"그 사람, 그럼 작년에도 내가 했지."
"그러문 묻기는 또 왜 물어요. 작년엔 해가 동쪽에서 떴나요?"
"헛 그 사람. 엿가락처럼 비비꼬기는? 고약허게."
"조용조용 얘기합시다. 누가 들으면 어떡할려구 그래요."
맥주 거품을 입 가장자리에 뿌우옇게 묻힌 김 영태가 좌중에 주의를 주었다. 젠장, 맥주 한잔 마시고도 입가에 허옇게 거품을 묻혀 주체를 못하는 주제에 이십여 명 토론에 누가 듣는다고 주의를 주는 주제는 또 무슨 꼴인고 싶어 좌중은 김 영태의 허연 거품 묻은 주둥이를 흘낏 쳐다보았다. 마치 제 바지의 허리끈 터진 건 제칠 두고 남의 궁둥이에 똥 묻은 것 간섭하는 격이었다.
그러나 김 영태의 주의에 모두들 한번씩은 움칠한다. 움칠하는 게 싫어 조 상기가 다시 발끈한다.
"엇따, 놀래기는? 내 물건 잘 팔아먹자는 수작인데 어느 놈이 듣건 그게 무슨 대순가?"
"그래도 그렇잖어, 또 누가 알아서 이로울 것도 없잖어?"
그래도 입은 달고 있다고 양조장에 술 사러 갔던 배 두석이가 구석자리에 선 채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저건 또 왜 똥개 밑구멍에 호박씨처럼 튀어나와서 저 지랄이야?"
한바탕 배를 쥐고 웃던 좌중이 다시 조용해지자, 조 필기가 정색을 하고 좌중을 시선으로 획 감아쥐며 입을 뗀다.
"작년엔 수납 경빗조로 한 집에서 사천 원을 냈어. 그래서 이사는 팔만 원을 가지고 매일 수납장 인부들 술 사고 반원들 담뱃간 수건 비누 내복 한 장씩 사대기가 버겁드란 말여. 공연히 쪼개 쓰다 보니 풍속만 사무랍지. 그래서 아까도 김 기사님하고 상의해 봤는데 올해는 한 집에서 적어도 육천 원은 내야겠드라고. 육천 원 케싸 봤자 이륙은 십이에 십이만 원밖에 더 되나? 앗싸리 말해서 김 기사님 양복도 한 불 해 줘야 하고,,,,,,"
"알았어요. 형님 생각이 그런데 부가 항의허겄소."
조금 전까지도 갉그작거리던 상기가 색 앞당겨 앉으며 대답한다.
"그래도 워디 그려 ? 법치 국까에 종다수결로 해야 허고 의견들도 있을 꺼 아녀?"
"모두들 의견들 있으시면 말해 보시오. 나중에 딴소리들 하지 말고요. 아 의견들 말한다고 누가 때리나?"
맥주나 마시고 앉았던 김 영태가 한 마디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역시 별다른 의견들은 없다. 총대가 어련히 알아서 책정한 금액이겠느냐 싶어 모두들 입을 못 뗀다. 추현 동네가 수납하는 데는 딱 하루가 걸린다. 그 하루 동안의 자질구레한 잡비가 십이만 원이나 들어야 한다는 건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물론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반기를 들 사람은 없다.
조 필기는 그것을 안다. 더구나 부담액을 당장 코앞에다 내놓으란 것도 아니었다. 필경 수납대금 중에서 공제(控除)할 것이니 손해를 본다는 마음들이 생기지 않는다.
"그람, 딴 의견들이 없는 것으로 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겠으니 그리들 알고 술이나 들어들."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 조 필기 제 혼자서 북 치구 장구 치구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헐어 불 지피고 꼬리깃 뜯어 부채 만들었다. 종다수 가결이라 했지만 간혹 반대의사를 발설하면, 조 필기는 안색부터 달라진다. 안색이 달라진다고 해서 겁낼 사람이야 없다. 그러나 수납 때 어떤 감정으로 나와 버릴지 그게 두려운 것이다.
잠시 긴장되어 있던 사람들은 술잔이 다시 돌기 시작하자, 기분들이 달뜨기 시작했다. 조 필기의 육촌인 상기가 술잔을 돌리면서 벌써부터 해닥사그리하게 취한 낯빤대기를 쳐들고 알분을 떤다.
"올핸 말이여, 누구 할 것 없이 뿌로카는 찌지 마러, 이중에서도 작년에 뿌로카들 쪄서 작살난 사람들 있지,,,,,,"
말하자면, 떡값을 타관에서 들어온 브로커들에게 주어서 손해를 보았던 작년의 사례를 일컫는 말이다.
"아까, 골목밖에 선 작자들이 그거 뿌로카들 아녀?"
"워디?"
"골목밖에 웬 놈들이 서 있더네?"
이렇게 대답하는 건 윤식이다.
"모른 척해요. 만약 브로커들 찌고 워쩌고 허는 사람들 있으면 내년에는 경작 다한 줄 아시오."
물론 담배경작 때려치우고 다른 농사 지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속사정이 그렇게 되질 못한다.
추현 동네는 경작지의 대부분이 밭이었다. 주민들 거의가 담배 경작으로 살아간다. 담배 경작을 언덕 삼아 읍내에서 돈푼깨나 만지는 놈들에게 거의가 사오십만 원의 사채(私債)를 지고 있고 그것을 기화 삼아 일년 내내 곡물 상회에서 외상으로 곡식을 얻어 왔다. 담배 경작을 때려치우면 담보로 잡힌 농토가 하루아침에 채권자(債權者)들에게 넘어가고 말 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막을 장사가 적어도 이 방안에서는 없다. 사채가 이삼 년 동안을 묵어 온 게 아니다. 못난 장닭 벼슬에 피 마를 날 없듯이 그놈의 빚은 갚아도 갚아도 언제나 쌓여 있기 마련이다. 자식새끼들은 커 가고, 남 보는 텔레비젼은 옹기장사의 쟁빚을 내서라도 사들여야 하고, 월부 보온밥통도 사들여야 한다. 애새끼들도 이젠 고무신은 신지 않으려 든다. 텔레비견에서 선전하는 기차표 신발이 아니면 발목에 끼려 들지를 않았다. 여편네들도 이젠 고무신은 신지 않는다. 샌달인가 뭔가를 끌고 다녀야 맛이고 그걸 신어야 시장을 보러 간다. 삼사만 원 짜리 빠이루 오바쯤은 걸치지 않은 계집이 없다.
머리 빗고 비녀 찌른 년은 이제 이 산골에서도 눈 씻고 대들어도 찾아볼 길이 없다. 택시 한두 번 못 타본 녀석이 없고, 서울 창경원 구경 한두 번 안 다녀온 여편네가 없다.
늘어가는 사채는, 바람 먹는 개구리 배 모양으로 불어만 가건만, 할 건 해야 하고 볼 건 봐야 하겠는게 요새 추현 동네의 여편네들 욕심이었다. 사내들의 등골이야 부러지건 말건 삼사천 원 짜리 화장품 한두 통쯤이야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요샌 또 불두덩에 칠하는 향수까지 나왔다던가. 화장품 외판원이 마을에 들어왔다 하면 밭에 나갔던 여편네들도 집구석으로 쫓아가야 직성이 풀리던 것이다.
그런 생각하면서 윤식은 남보다 일찍 조 필기 집을 나섰다, 그 집에서 기르는 개가 부엌문 앞에서 뭔가 작살나게 먹고 있었다. 입안에서 뼈 조각이 부숴지는 소리가 아작아작 들려왔다. 닭 뼈다귀라도 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담장 위로 죽은 채로 걸려 있는 호박넝쿨을 핥고 가는 밤바람이 차다, 그 초겨울 찬바람에 또 달은 씻은 듯 환하다. 날씨가 차운 날에는 달이 항상 저렇게 째지게 밝았다. 땅만 내려다보고 씨앗 굵어 가는 모습만 찾다 보니 이런 산골에서 살건만 달 본 지가 옛날만 같다.
윤식은 넋잃은 사람처럼 섬돌에 가만히 서서 그 달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방 안에선 뭐가 저리들 좋은지 웃음소리가 빠그라진다.
벌써부터 뼈곬까지 냉기가 스미는 이 겨울을 살아갈 일이 밝은 달을 쳐다보면서 캄캄하게 느껴진다. 부엌 앞에서 이죽거리던 개가 그 순간, 부살같이 대문께로 치닫더니 컹컹 짖기 시작한다. 대문밖에는 분명 서너 사람은 됨직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상기가 말했던 수납 브로커들임에 틀림없다.
윤식은 으스스 몸을 떨며 뜰을 건너 대문 밖으로 나섰다. 대문 앞에 섰던 타관 것들은 얼른 물러나진 않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윤식을 보고 묻는다.
"김 기사 있읍디까?"
김 영태를 이르는 말이다.
"예, 있읍디다."
윤식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른 돌아서 걸었다,
"언제 끝나요?"
"뭐가요?"
"아, 회의 말입니다."
"궁금허면 들어가 봐요."
"엇따, 그 사람 퉁명스럽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윤식은 내처 이발소 앞까지 걸어와 버렸다. 동네 놈팽이들은 아직도 이발관에 모여 있었다. (한번만 더 봤으면 좋겠네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어떻게 기다려 너퍼셔 남버나인) 무슨 놈의 노래인지 이발관이 떠나갈 듯하다.
"이 보세요."
전연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윤식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부른 사람은 낯선 여자임엔 틀림없으나 윤식을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두 젊은 여자가 이발관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젊은 것들을 부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윤식은 저녁 먹으면서 대수란 놈이 지껄이던 술집 색시들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렸다.
여자 둘이 창문을 두드리자, 이발소의 노래 소리가 갑자기 뚝 멎었다.
"왜 그러시오?"
한 놈이 문을 벌컥 열고 대가리를 밖으로 내밀며 묻는데, 예비군 중대장 아들놈이다. 사내새끼가 왜 그러시냐고 물었는데도 여자들은 이렇다 할 대답은 없이 가재비 뱃가죽같이 발랑 자빠진 손을 입가로 가져가선 호호 웃는다,
"아가씨들 왜 그래요? "
아침에 처먹은 게 뭐 잘못되었는지 사람을 불러 놓고 헤실헤실 웃고 서 있는 것에 녀석은 약간 심기가 뒤틀렸던지 볼멘 소리로 다시 물었다.
"우리 집에 놀러 안 오실래요?"
웃음을 그친 한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곤 두 다리를 다시 꼬고 섰다,
"어? 야 놀러오라신다."
녀석이 이발소 안에 웅기중기 서 있는 패거리들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워디요? 당신들 집이?"
웬 녀석이 다시 대가리를 밖으로 불쑥 내밀며 묻는다.
"동장 옆집에 세 들어 살아요."
"언제부터요?"
"오늘부터지 언제부터예요."
"응, 개업주를 내시겠다 이거군."
윤식은 이발소 앞을 떠나 총총히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속새밭에 멧돼지 든 듯, 그날부터 마을은 어지러지기 시작했다. 담뱃돈을 바라고 모여들기 시작한 작부들은 그날 이후로 십여 명이나 더 들어왔다. 읍내에서 술장사로 재미나 보는 축들이 멀리 대구나 왜관, 안동 등지에서 작부들을 사와 추현으로 끌고 들어왔다.
동네로 들어와선 집을 얻고 임시로 영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투전꾼들이 원정을 오기 시작해서 그 작부들 집에 진을 치고 앉았다. 그건 투전이 아니라 순전히 날도둑놈들이란 걸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돈을 날리려고 일부러 자진해서 이 첩첩산중을 찾아드는 노름꾼이 있다면 그놈은 미쳤거나 내장 한 모퉁이 어디에 쉬가 쓸고 있는 놈들일 게다.
일년 내내 사채를 대 주던 읍내의 최주사, 곡물 상회 주인, 음식점 여편네들, 옷감 가게 주인,,,,,, 이런 썩어 자빠질 작것들이 경작인들에게 위임장(委任狀)을 받아 내기 위해 들락거렸다
위임장이란 그들의 채무자가 받는 잎담배 수납 대금을 채권자에게 수령권을 넘겨준다는 일종의 각서 같은 것이었다. 채권자와 채무자들간의 불신 관계에서 오는 거래로, 채권자들은 그 위임장을 받아가선 총대나 담당 사무자에게 얼마간의 커미션을 주고 대금이 당사자인 경작인에게 넘어가기 전에 가불 형식으로 받아 가던 것이다.
일년 내내 외상으로 살아가야 하는 추현동의 경작인들은 돈 한번 쥐어 보지도 못하고 수납 현장에서 곧바로 집으로 터덜거리고 돌아와야 하는 슬픈 꼴을 당하는 사람이 많았다. 현장에 있어 봤자 휑뎅그런 하늘만 쳐다볼 뿐이었지, 옛날에 위임해 버린 그놈의 현찰이 자신에게 떨어질 리 만무하겠기 대문이다.
아무리 못돼먹은 농사라 할지라도 추수해서 손에 만질 게 있다. 그것이 설령 죽대기만 남은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당사자의 손에서 흘러나가는 게 농사의 순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담배 농사는 어찌 한번 잘못 발길 내딛다 보면, 재주부리는 놈 따로 있고 돈 먹는 놈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오입 가서 일년 내내 소식 없던 자식 새끼들이 소식이 있는 게 추현 동네로선 바로 이때였다. 오입 나갔던 자식들은 용하게도 수납 시기를 알아서 집구석으로 찾아온다. 이를테면 이때만은 집구석에 푼돈이라도 굴러다니기 마련일 테니 그것을 나눠 먹자는 심산이었다. 일년 내내 미뤄 놓았던 학교 등록금이며 딸자식 혼수감도 이때서야 준비해야 한다. 그러자니 이 손바닥만한 동네가 부산스럽지 않을 수 없다.
재봉틀 월부장사, 라디오 월부장사, 일년 내내 미뤄 놓았던 텔레비젼 값, 농협에 진 빛도 이때에 갚아야 하고 농약 값도 이때에 갚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는 그 빚의 반도 탕감하지 못하고 다시 묵은 빚이 내년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수납이 닥치기 이전은 이 마을은 언제나 조용하다. 산협 아래로 동화적인 냇물이 맑게 흐르고, 비봉산을 감돌고 넘어가는 구름은 언제나 복스럽다. 아침 한나절 저녁 한나절에 먼지를 뽀오얗게 일구며 덜커덩거리는 버스가 오가는 모습이 오직 이 마을의 유일한 구경거리였다.
여름은 여름대로 시원하고, 더우면 냇가에 나가서 더러는 연놈들이 서로 섞여 미역도 감는다, 천렵도 하고 잠시는 읍내의 극장에 구경도 간다. 면서기 하나만 찾아와도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다, 그런 마을이 언제부터인가 이런 몰골 사나운 동네로 전락해 가고 있었다.
내일이 수납날이었다.
새벽부터 마을은 붐비기 시작했다. 수납반원들은 벌써 어제 오후에 아랫동네에 와 있었다. 등 너머 동네는 추현보다는 두 배나 컸으므로 거기다가 수납 장소를 만들었다.
윤식이는 새벽부터 일어나 리어카로 포장된 담배들을 날랐다. 수납반원들은 아랫마을 동장네 집을 통째로 빌려 들어 있었다. 김영태는 꽁지에 불붙은 노루 새끼모양으로 아랫마을 윗마을을 땀을 절절 흘리면서 오르내렸다. 말하자면, 제딴엔 담배 운송을 독려(督勵)하고 다닌다는 게다.
총대인 조 필기는 또 그대로 바쁘게 돌아간다. 사실은 별로 바쁠 것도 없건만 공연히 바쁘게 돌아가서 자신도 뭔가 일 많은 사람 같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시피 가만히 앉아서 이십여 만 원의 연차 수당이란 걸 경작자들로부터 받아 처먹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여편네들은 물론, 코흘리개들까지도 운반 작업에 끼어들어야 한다.
뉘엿뉘엿 초겨울 짧은 해가 기울어지기를 기다려 윤식은 일찍부터 조 필기 집으로 가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조 필기는 김 영태를 만나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윤식은 툇마루에 앉아서 비봉산 중턱으로 미적거리며 빠지는 개떡같이 누루쭉쭉한 저녁 해를 바라보았다. 웬지 넘어가는 해조차도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처럼 비실비실하는 것 같았다. 옛날에 어릴 땐 실눈으로만 쳐다볼 수 있었던 그렇게 이글이글 타던 해가 아니었다. 쳐다보면 이마빡에 몽둥이가 와서 딱 맞닥뜨리는 듯한 그런 쨍한 해가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동네에 술집 색시들이 들이닥쳤다고 입을 삐쭉거리던 여편네의 얼굴과도 같았고 원숭이 밑구멍처럼 발간 낯짝을 쳐들고 조 필기의 기분을 맞추던 상기의 얼굴과도 같았다. 추위에 인중이 시퍼렇게 언 대수놈의 얼굴과도 같았고, 사채가 대추나무에 연줄 걸리듯 한 못난 대수의 애비, 바로 자신의 찌든 얼굴처럼 보였다.
"뭣하고 앉았어?"
냉방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툇마루에서 어실어실 떨고 앉아 있는 윤식을 보고 조 필기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이렇게 물었다. 조 필기는 그러나 이렇게 허두를 떼어놓고는 뭇 본 척하고 제 혼자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밖에서 금방 윤식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볼일 있으면 퍼뜩 들어올 일이지 기침은 웬?"
"드가도 좋켄십니까 ? "
"들어와, 이 사람아. "
윤식이가 갑자기 왜 저렇게 조심스럽게 구는지 모를 조 필기가 아니다. 분명 떡값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지만, 그가 방안에 들어와 앉았어도 조 필기는 짐짓 엉뚱한 말만 물었다.
"운반은 다 됐지?"
"그러문요. 해 전에 끝낸다고 여편네는 밑이 빠질 지경이었어요."
"사람, 또 웬 밑은."
다시 말이 없다. 돈주고 돈 먹자는 판이 왜 이렇게 어색한 것일까. 조필기가 정색하고 그러나 혼잣소리로 지껄였다.
"올핸 감정원이란 사람이 성격이 좀 빽빽한 모양이여."
"어디서 왔는지요 ? "
"충청도에서 왔는데, 좀 빽빽 모양이여."
"그런 안 통하것네요?"
"엇따, 안 통할 리야 있나? 단까가 높다는 말이지,"
"전 이걸 준비했는데 될까요?"
윤식은 그제사 잠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신문 뭉치를 꺼내놓았다. 돈 뭉치를 꺼내놓는 윤식의 갈쿠리 같은 두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조필기는 곁눈질로 보았다.
조 필기는 우선 담배를 꺼내 윤식에게 권했다. 그러나 그의 앞으로 내밀어 놓은 돈 뭉치를 손내밀어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오랜 총대직에 몸담아 오는 동안 조 필기는 그런 식으로 느긋해져 있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 보이는 것처럼 행동해야 이 직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얼만가?"
그 자신도 담배를 달아물면서 조 필기는 다시 물었다.
"팔만 원입니다. "
"녀무 큰 기대는 가지지 마러."
"그저 등급이나 안 속으면 되지요."
"놓고 가게."
“네."
"요샌 눈이 많아서, 까뜩하면 나도 콩밥을 먹게 되네, 요샌 주는 놈이나 받는 놈이나 마찬가진께 말여. 그것도 김 기사가 말을 들어 줄 지도 의문이고."
"전 총대님만 믿겠심더."
"허기야. 자넨 날밖에 믿을 사람 누가 있겄나?"
"옳은 말씀이지요."
"뒷말 있으면 안 되네. 알지?"
"내가 무슨 뒷말이 있것소? 사람 한두 해 상대해 왔십니까?"
"그건 나도 알지. 허지만 돌다리도 두둘겨 건너라고 다시 확인허는 거지."
"내 걱정은 마소."
이렇게 오금을 박고서야 조 필기는 윤식이가 내밀어 놓은 돈 뭉치를 얼른 끌어당겨 허벅지 밑으로 밀어 넣었다.
"나가 보게."
엉거주춤 일어서는 윤식을 조 필기는 앉아서 작별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이 돈도 어디서 빚을 얻어 온 것임을 조 필기는 알고 있다. 제 놈이 항우 장비인들 이 동네에서 이만한 금액을 구해 내지는 못 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조 필기의 집을 나오면서 윤식은 괜히 허전한 기분이었다. 물론 팔만 원을 찔렀으면 그 배의 이익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영수증도 필요 없고 또한 그런 돈이 총대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비밀이다. 그러나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 들어가는 돈인들 쓰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이를 수가 없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신경통과 같은 것이다. 추현동 이십 명 경작인들은 매년 수납기가 되면 어디서 돈을 구해 대든지 자기야 당장 내일 아침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수납 전날까진 소위 떡값을 총대에게 전해야 한다.
그 돈은 김 영태를 통해서 등급사정의 권한을 쥐고 있는 감정원에게 전달될 것이다. 뼈 부러지게 지은 농사에 좋은 등급을 받고자 하는 욕심이야 누구에든지 있다. 만약 경작인 이십 명 중에 열 사람이 떡값을 쓰고 열 사람이 떡값을 포기했다 하면 그 열 사람에게 후하게 준 등급사정을 나머지 열 사람에게 떠맡긴다. 감정원은 일계표(日計表)상의 밸런스를 갖고 있다.
하루에 몇 프로의 상등품 이상은 내놓지 못한다는 잠정 규정이 있다. 그러니까 다섯 개의 떡을 가지고 한사람에게 세 개를 주었으면 나머지 한 사람에겐 두 개의 떡을 주어야 한다. 감정원이 쥐고 있는 떡은 다섯 개밖에 없다는 뜻이다. 두 개의 떡을 받기를 원하는 경작인은 없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장빚을 내서라도 모두들 떡값을 준비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윤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벌써 달포 전에 여편네를 대전으로 올려보냈다, 동서에게 보낸 것이다. 동서간이라 하지만 어릴 때부터 장사치로 굴러온 사람이라, 단돈 십만 원이라도 담보(擔保) 없이는 돈을 못 꾸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동서로부터 그런 전갈을 받았을 때, 윤식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느꼈다.
동서, 이 세상에 둘밖에 없는 동서. 그 동서가 담보 없이는 돈을 못 꾸어 주겠다니, 세상이 어쩔려고 이 지경으로 탈아 가는가 싶어 가을의 긴 하루 해를 마냥 먼 산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들 어쩌랴. 바쁘고 궁색한 놈은 자신이었다. 할 수 없이 가옥 문서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대전으로 올라가서야 동서는 십만 원을 겨우겨우 내어놓던 것이다,
"섭섭하에 생각 말게."
돈을 내어놓으면서 동서가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었다. 그러나 윤식은 뭐라고 또 대답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요새가 말하자면, 불신시대여."
"불신시대가 뭐여?"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 세상이란 말여."
"그래도 자네와 내 사인 다르잖여?"
"뭐가 달러?"
"동서지간 아이가?"
"그렇기 점에 내가 하는 말이여. 부자지간에도 못 믿는 게 요사이 세상이란 거여. 자넨 그걸 알게."
"그걸 몰라도 내 사십 평생 별탈 없이 살아왔네."
윤식은 불쑥 이렇게 말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까, 평생 농사꾼이지."
"이 사람 보게. 농사꾼이 뭐 잘못됐나? 내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자넨 당장 굶어야 허네."
"자네가 농사 안 짓는다고 내가 굶을 성싶어?"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 야길쎄."
"나이 사십이 다 돼 가지고 돈 꾸러 내외가 타관으로 나다녀야 한다는 사실이 자넨 보통 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게 그런 게 아니여."
"자넨 농사짓는 사람들 사정을 몰라서 그래. 누가 좋아서 이 짓하고 다니는 건 아닐세. 물론 나도 하루에 열 번은 맨땅에 쌔 끌어박고 죽고 싶다네."
"그럴 마음이 있으면 왜 좀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못 모우나?"
"모르는 소리. 농가란 아끼면 아낄수록 손해가 더 나는 법이여. 비료 아끼면 소출 덜 나고 몸 아끼면 곡식 병들고 막걸리라도 퍼마셔야 삭신이 덜 쑤군거려. 빈 지게라도 지고 장에라도 나가 봐야 세상 돌아가는 눈치도 살피고 쥐정이라도 해야 속이 후련해."
"그러니까 맨날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굴신을 못 하지."
동서의 그런 소리가 윤식른 먼데서 들려오는 곡마단의 확성기 소리 같았다.
"땅을 지킨다는 게 그처럼 어렵다는 걸 자넨 진작부터 그곳을 떠나와 버렸으니 모르는 소리지 "
"어서 돈이나 벌게. 농사로 돈 번 사람 나도 많이 봤어."
"돈 좋아하기야 나도 자네만은 하네. 그러나 그게 안 돼."
아무리 지껄여 보아야 결론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먼저 윤식이 편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고, 하룻밤만 자고 가라고 말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헌 걸레처럼 방 한 구석에 쭈그려뜨리고 앉아 있는 여편네를 잡아 일으켜 그날 밤차로 내려오고 말았던 것이다.
윤식이가 조 필기에게 갖다준 돈이 바로 그런 돈이었다. 윤식의 설움, 윤식의 창피와 수모가, 윤식의 가난이 그리고 세상의 질시가 아무래도 그 돈의 뿌피보다는 더 크게 묻어 있는 그런 돈을 덜렁 떠맡기고 나서는 윤식의 마음이 허탈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런 돈을 써야 하건만 영수증은 고사하고 설령 누가 몽땅 떼어먹는다 하더라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흔자 분해하고 혼자 삭혀야 할 그런 돈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부엌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여편네가 뜰로 들어서는 사내를 멀거니 쳐다본다. 그 눈치를 윤식이 모를 리 없다. 돈이나 똑똑히 전하고 들어오느냐는 힐난이다.
"전했어."
방으로 들어서면서 윤식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총대 집에 있읍디껴?"
"그럼 있지 그 사람 워디 가나?"
윤식은 찬 방바닥으로 가서 쳐 활개를 확 펴교 누워 버렸다. 저녁 짓는 여편네라도 금방 불러들여 그것이나 한번 땀 찍찍 흘리고 해 버리고 싶은 엉뚱한 욕정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윤식이가 대문을 나가는 것을 기다려 조 필기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장롱을 열고 그 동안 경작자들이 갖고 온 떡값들을 전부 꺼냈다.
상기가 십만 원. 조 옥제가 구만 원. 권상오가 십만 원 ,,, 그런 식으로 들어온 돈이 팔십칠만 원이나 되었다. 그는 그 명세를 수첩에다가 깨알같이 박아서 샜다.
조 상기 구만 원. 조 옥제가 팔만 원. 권 상기가 십삼만 원. 최 윤식은 칠 만원. 본인들이 가져온 돈의 액수와는 일이만 원씩이 밑도는 금액을 그는 수첩에다 적고 있었다. 그 차액이 무려 십육만 원이나 되었다. 십육만 원의 차액을 그는 따로 싸서 다시 장롱 속에 감추었다. 설령 그보다 더 많은 액수를 그가 착복(着服)한다 한들 어느 개아들놈이 알 수 있겠으며 어
느 후레자식이 항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죽 떠먹은 자리 같은 거지만 너무 많이 떼먹으면 눈치 채이기 십상이다.
그는 현찰을 꽁꽁 묶어서 챙기고 수첩에 적은 명단을 곱게 찢어 접어서 웃도리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가방에다가 돈을 넣고 내일 수납할 경작인들의 명단도 함께 넣었다.
김 영태의 방에 도착하고 보니 읍내에서 온 주재 기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조 필기는 어이쿠 싶었다. 물론 주재 기자와 총대와의 상대는 공식적이었다. 하지만, 김 영태의 방에 주재 기자가 들어와 앉았다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못 되었다.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조 필기는 몰래 듣고 있었다.
"올핸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볼멘소리로 말하는 것은 김 영태였다.
"올해라고 그런 일이 없을까?"
오금을 박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는 위엄이 배어 있었고 그리고 능글맞게 느껴진다.
"올해라고 있으란 법은 또 어디 있어요?"
“내가 이리로 올 때 보았는데 브로커들이 사오 명은 수납장 주변에 얼씬거리던데 뭘 그래.”
"그 사람들이야 얼씬거리든 말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 아녜요? 변소에 똥파리 끓듯 그건 매년 그런 거 아닙니까?"
"이 사람이? 여보쇼. 변소에 똥파리가 왜 끓어야 하느냐 난 이거여."
"신경 쓰실 것 없어요. 매년 그래 왔으니까. 올해도 그러려니 생각들 하고 모여든 것이니까."
김 영태는 거의 신경질적으로 내뱉긴 했지만 권 기자가 사뭇 이런 식으로 오금박고 기어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적잖이 불안해지는 것이다. 아직 자기 담당 구역에 수납이 시작되지 않아서 어떤 구체적인 꼬투리를 가지고 이 사람이 대어드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수납장 분위기만 보아도 눈치 빠른 기자란 작자들이 올해의 수납이 대강 어떤 식으로 돌아갈 거라고 짐작하기엔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치로 살아가는 녀석들이 시골 기자란 것이고 보면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자꾸 그러지 말고 나중에 봅시다."
김 영태는 목소리를 다소 누그러뜨려서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보자니?"
딴전을 피우면서 권 기자가 말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거 아닙니까."
"만나서 뭘 하게."
"꼬치꼬치 파고들긴? 만나서 대포라도 한 잔 하자는 거지."
"대포 한 잔 먹으려고 다시 당신을 만나?"
"그럼 대포지. 대포를 먹다 보면 결말이 나갔지."
"알았어. 나도 바쁘니까. 이만 가겠시다. 거 브로커들이나 잘 처리하슈."
브로커들이란 지방의 깡패들이거나 수납반원 중에 인척이 있는 작자들이거나 아니면 조합의 간부의 친척이거나 심지어 조합의 임원들도 이 짓을 하고 돌아가는 개자식들이 있다는 걸 경작자들은 알고 있었다.
경작인들을 꼬셔 가지고는 떡값을 가로채고 사기를 치는 작자들이 그들 브로커라는 사람들이었다,
삼 년 전에 윤식이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조합에서 이사(理事)인가 뭔가를 지낸다는 작자를 끼고 장난을 하다가 그 해 등급(等級) 사정(査定)을 형편없게 받았지만 돈을 준 놈도 받은 놈도 들어갈 땐 같이 들어간다는 그 개자식의 공갈에 오늘날까지 말 못 하고 참아 오는 터이다.
권 기자가 허절구레한 코트 자락을 여미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려 조 필기는 숨어들듯 김 영태의 방으로 들어갔다. 김 영태는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라 빨고 앉았다. 일별해서 간장이 탄다는 식이다.
"어서 와요. 권 기자 왔어요?"
"나가는 것을 봤어요. "
김 영태 앞에 풀썩 앉으며 조 필기가 대답했다.
"그 자식이 또 무슨 냄새를 맡으려고 동네를 찾아왔는지 원."
"이놈의 담배 농사는 짓는 놈 따로 있고 돈 먹으려는 놈 따로 있다니까."
"누가 아니래."
"뭐라 했소?"
조 필기는 문 밖에서 아까의 두 사람 대화를 죄다 빼놓지 않고 들었던 처지였건만 모른 척하고 정색해서 굴었다,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며 김 영태가 되묻는다.
"얘기나 해 봐요."
"내 구역에서 오만 원만 내놓으란 거야. 그것도 적은 액수라는 거야."
"왜 그래요?"
"눈감아 주겠다는 거지. 어떤 일이 있어도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조건이지 뭐."
거짓말이다. 그게 거짓말이란 걸 속속들이 알고 있었지만. 야 개자식아 하면서 대들지 못하는 데 조 필기의 고민이 있다. 속 같았으면 당장 따귀라도 한 대 보기 좋게 후려쳐 버리고 싶었지만, 조 필기는 짐짓 김 영태와 함께 낭패의 표정을 짓는다.
"김 기사가 껀수 뺏긴 것 있어요?"
기사(記事)거리가 될 만한 일을 그자에게 빼앗긴 일이라도 있느냐는 뜻이다. 김 영태는 펄쩍 뛰었다.
"내가 무슨 바지저고리인 줄 아슈."
"그럼 됐어요. 내 동네사람들과 상의해 보겠으니 경비조달은 염려 말아요."
코앞에서 뻔히 눈을 뜨고 조 필기는 당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로선 어차피 이 수납을 무사히 끝마쳐 주어야 할 책임을 동네로부터 위임받고 있는 한, 돈 오만 원 때문에 이 중요한 시기에 김 영태와 밀고 당길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경비 조달이야 동네의 회의(會議)에서 안건을 내어놓으면 될 것이고 그러면 상기란 놈이 요리조리 요리해서 통과되도록 농간을 부려 줄 것이다, 어차피 그 사람들 손에서 기어나올 돈을 이 개자식아 거짓말 말아라 하고 김 영태에게 대어들 까닭이 무엇인가 싶었다
"이거나 받아요."
조 필기는 가방을 열고 경작인들로부터 받아 챙긴 돈 뭉치를, 방안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건만 사방을 뚜릿뚜릿 살피며 내어놓았다. 김 영태가 우선 돈 뭉치만을 얼른 받아서 방 한켠에 포개어 놓은 이불 사이에 푹 찔러넣는다.
"얼마요?"
"칠십육만원."
"서류 닦은 것이나 내놓으슈."
조 필기가 내어놓은 명단을 살피면서 김 영태가 다시 물었다.
"새나간 것 없어요?"
말하자면, 총대와 주재기사 선의 전통적인 코스를 밟지 않고 브로커를 끼거나 흑은 지서(支署)의 순경을 끼고 다른 길로 감정원들과 선을 대는 코스를 밟은 사람이 없느냐는 뜻이다.
"한두 사람 있는 것 같은데, 누군지는 모르것소."
"총대 한두 해 해 봤소?"
"다 그런 자석들이 한두 놈은 있는 것 아닙니까. 김 기사도 매년 알고 있으면서 그러십니까."
"허긴 그렇지. 그렇지만 그것도 말썽 나면 내 책임이란 말이오."
"걱정 마슈."
말은 주고받으면서, 김 영태는 열다섯 사람의 명단을 한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그렇게 말하고 조 필기는 휑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일 수납할 동네 사람들이 묵어야 할 숙소(宿所)를 찾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밤 9시가 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김 영태 숙소 담 밖에서 몇 사람이 웅성웅성 찬바람 속에 서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었다. 전부 총대에게 떡값을 건넨 사람들이다, 더러는 숙소가 어딘지 몰라 총대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축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총대가 정말 그 돈을 김 영태에게 전하는가 싶어, 감시하려고 담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눈치로 때려잡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들아, 가세."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는 축들을 보고 조 필기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찌된 병신들이 숙소 한군데를 제 발로 온전히 찾아들지 못하는 숙맥들뿐인가 싶어 조 필기는 혼자 부아가 끓어올랐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세 살 먹은 아이들처럼 바로 이 집이다 해야 웅성웅성 들어앉았고 밥 여기 있다 해야 찌부둥하게 일어나 앉아서 밥숟갈을 드는 사람들이었다. 뭣 하나 제 힘으로 제 재주대로, 제 요령으로 일을 처리할 줄 모른다는 게 조 필기로 봐선 안타깝고 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숙맥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총대직에라도 오래 머물러 있겠고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떡값을 중도에서 떼어먹어도 모르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나 그것도 이젠 세월이 다한 느낌이었다. 요샌 군대다 객지바람이다 해서 촌놈들 중에도 타관바람을 더러 쐬고 돌아온 축들이 있어서 마을의 몇몇 악돌이들은 조 필기를 색안경을 쓰고 보는 녀석들이 없지 않다는 걸 안다. 그 중에서는 경작 초기에 조합으로부터 받아 내는 전도금(前渡金) 중에서 상당액을 조 필기가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놈도 있다. 그러나 녀석들은 아직까지 그것을 내색치 않고 있었다.
연초(年初)에 방출되는 그 전도금은 일년 내내 이자가 붙지 않는다. 일종의 농사 자금인 그 돈은 수납 대금 수령기에 무이자로 상환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경작인 누구도 그 돈을 쓰려고 아웅다웅했다. 그 돈을 총대는 동민들 몰래 상당액을 빌려쓰고 있었고 또 그것으로 사채놀이까지 하고 있었다, 원금이야 갚아 주면 되었지만 그 원금에 붙어서 불어나는 4부 이자는 고스란히 자기에게 떨어지는 것이다.
농사비가 없어서 돈을 꾸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신용으로 읍내에 가서 빌려 오는 척하여 실제로는 조합에서 무이자로 대부받은 돈을 내어주곤 연 4부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 처먹는 게 조 필기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집구석을 금방 누가 떠메고 간다 해도 생판 모르고 지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고개 푹 숙이고 제 밭이나 진력나게 쪼아서 거기서 나오는 소출이나 있으면 그것이나 까먹고 앉았다가, 여편네 자발없이 건드려 연년생으로 대가리에 기계충 오른 애새끼나 줄줄이 생산하고 앉았는 게 추현동 사람들의 생활의 전부라면 전부였다,
밭 갈아붙이고 나면 씨 뿌려야 하고, 씨 뿌리고 나면 김매야 하고, 김매고 나면 사촌간이라도 봇물 때문에 논뚝에서 멱살 잡고 뒹굴어야 하는 그런 생활, 참으로 오줌 누고 좆 털 사이도 없는 그런 생활에 어느 놈이 어떤 부정으로 달아 가는지 살펴볼 겨를도 얼고 꼬치꼬치 파고들면 다만 머리 아픈 게 추현동 사람들이었다.
조 필기가 나간 다음에 김 영태는 방문을 딱 걸어 잠그고 담요를 한 장 쳐 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에 이불 속에 찔러 넣어 둔 떡값을 다시 꺼내 액수와 명단을 번갈아 확인했다. 그가 가져온 명단의 금액과 실제 액수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김 영태는 조 필기가 가져온 명단을 놓고 다시 한 장의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조 필기가 가져온 명단의 금액보다는 만 원내지 이만 원이 적은 금액이었다. 조 필기와 김 영태의 손으로 떡값이 건너가는 동안 개개인의 금액은 도합 삼만 원내지 사만 원이나 줄어들었다.
김 영태는 십만 원의 돈을 따로 챙겨 다시 이불깃에 찔러넣고 새로 작성된 명단과 현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시간은 11시가 가까와 오고 있었다.
이 현찰을 박치기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감정원과 김 영태가 삼칠제로 분배한다. 칠은 감정원이 먹고 삼을 김 영태가 먹게 되어 있다. 벌써 옛날부터 그것은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가 짜져 있었다.
우둘우들 떨면서 감정원 숙소를 찾아갔더니 집구석이 왁자지껄하다. 무슨 힘이 솟아서 아직까지 나자빠져 자질 않고 술을 퍼 마시고 있었다. 수납 때가 되면 개도 맥주맛을 본다는 게 추현동이다. 맥주병 마개 따는 소리가 펑펑 하고 들려왔다. 숙소가 술집이고 술집이 바로 감정원들의 사무실이다. 잠도 거기서 자고 사무도 그 자리에서 본다. 오입도 그 자리에서 하고 떡값도 그 자리래서 주고받는다.
밖에서 잠간 들어보니, 동장, 총대, 면장, 지서주임, 농협 단위 조합장, 조합 간부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말하자면, 환영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그는 문 밖에서 한참 동안 기침을 하였다.
"누구요?
그렇게 묻는 건 분명 지서주임의 목소리다.
"접니다. 김 영태올시다.”
문이 벌컥 열리고, 금방 사람들의 눈길이 밖으로 쏠리면서 환장한 사람들처럼 모두 화들짝 놀라며 어서 들어오라고 발광들이었다. 영태는 짐짓 미안하다는 듯 모잽이 걸음으로 벽을 타고 들어가 작부 옆에 자리하고 앉았다. 작부 옆의 동장 녀석이 낯짝이 개가죽처럼 해 가지고 앉았다가 선뜻 자리를 비워 준 때문이었다.
동장이란 자식은 아직 나이 삼십도 못 된 주제에 주색잡기에는 남달리 탐닉되어 술자리다 하면 똥개 밑구멍에 보리쌀 끼이듯 끼어 앉아서 떠나갈 줄 모르는 성미였다. 일찌기 군대에서 헌병 생활 3년쯤 치르고 나오더니 애새끼가 깨이기를 모진 데로만 까여서 동네의 아무 일에든 끼어 들어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졌고 물고 늘어지다 진력이 나면 투서(投書)질이나 일삼아 공연히 이 사람 저 사람 괴롭히고 분위기만 어수선하게 만들던 망나니였다. 보다못한 동네사람들이 숙의한 끝에 동장을 시켜 버린 작자였다.
미운 놈에게 봉둣밥을 주자는 식이었는데, 동장을 시켜 놓으니 투서질 하는 버릇은 고쳐질 수밖에 없었으나, 사팔공 밀가루를 동네까지 가져오지도 않고 읍내의 양곡상에다 팔아 넘기기 일쑤요, 각종 보상금 떼어 처먹고 미루기는 제 혼다 다했고, 술자리 있다 하면 곤두박질을 쳐서도 같이 참석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다. 거기다가 또 무식한 놈이 유식한 척이나 하지 않으면 또 밉지나 않지, 이건 튀어나을 자린지 들어갈 자린지를 가리지 않고 발쑥거리고 튀어나와 되잖은 연설하기를 또 좋아하였다, 그것은 지금도 그랬다. 영태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비켜 앉은 동장 권 오수는 한 팔을 영태의 어개짬에 떡 올려 잡고는 씨부린다는 말씀이 이랬다.
"김 영태 기사님을 소개합니다, 이분은 지난 일 년 동안 우리 구역 경작자들을 위해서 불철주야 노심초사, 물샐 틈 없는 철저한 지도를 하느라고 참 고생도 많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요. 저는 그것을 압니다. 심지어 경작인들의 살림까지도 보살펴야 했고 병원 알선까지도 해 왔습니다. 이분을 위해 건배합시다.”
부라보 하고 누가 소리쳤고 그래서 도합 열 개의 맥주 잔이 허공으로 올랐다. 얼결에 김 영태는 좌중을 향해 허리 굽혀 절을 굽신하였다.
옆에 앉았던 춘자가 김 영태를 배시시 웃으며 쳐다본다. 말하자면, 관심이 간다는 수작이겠는데, 이게 또 김 영태의 넓적다리들 슬쩍 꼬집으면서 한다는 말이, 이따 좀 보자고요 한다.
"이름이 뭐야?"
왁자지껄하는 사이에 김 영태는 춘자를 보고 슬쩍 물었다.
"이름 한번 곱구나. "
"아이 그럼 자긴 눈도 없나? 얼굴은 안 곱고? 이래봬도 밖에 나가면 김 자옥이 닮았다고 야단들인데."
"야, 김 자옥이가 쌕 웃는다."
"아이 정말 속상해."
속상한다면서 꽃봉이는 다시 김 영태의 엉덩이 한쪽을 꼬집는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 김 영태는 알고 있다. 한번 주겠다는 뜻이란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알았어."
김 영태가 짐짓 조합에서 나온 김 상무에게 얼굴을 돌리면서 입으로 이렇게 지껄인다.
"상무님 잠자리는 불편치 않으시겠읍니까 ? "
지서장과 귓속말을 나누던 상무가 허옇게 웃으며 방이 널찍해서 좋드라고 대답하고 김 영태에게 술잔을 권해 왔다. 기침을 쿵쿵 하던 지서장이 그 사이 감정원 옆자리로 가서 앉는다.
"자 한잔 드십시오."
"이거, 자꾸 먹으면 내일 일에 지장이 있는데 ,,,,,,"
"엇따, 하루 과음한다구 공무에 지장이 있을라구요."
"그럼 조금만 받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 가난한 동네에 현찰을 많이 떨어뜨리고 가느냐 아니냐는 순전히 함 선생의 손끝에 달렸으니까 그렇게 아시오."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그러시면 전 부담이 와서 이 일을 제대로 해 나가기 힘들어요."
"또또, 능청부리시네. 이 동네를 보십시오. 순전히 담배 농사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동네입니다. 팔십 프로가 밭농사예요. 집집마다 건조실이 서 있지 않습니까? 보셨죠? 내년에 경작자들이 얼마나 불어나느냐 또 이 동네의 경제 사정이 호전되느냐 안 되느냐는 순전히 함 선생의 손끝에 달렸으니까 그렇게 알고나 계시오."
"진담이라면 진땀빼는 일입니다."
"엄살 부리시네, "
지서장의 말은 지당한 것이다. 등급 사정이 후하면 후한 만치 동네의 경제 사정이 호전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야 지서장도 먹고 살기 좋고 면장도 일하기 편하고 동장도 각종 밀린 요금 징수가 편할 것이고 김 영태도 사람 대하기 어렵잖게 된다.
함 석도는 거드름을 피우며 지서장의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러나 너무 많이 마시면 경작인들에게 신용이 떨어진다. 적당히 마셔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마시는 척하고 계집이 상 밑으로 디밀어 주는 빈 주전자에 거의 반잔씩의 맥주는 부어 버리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밤엔 옆에 앉아 있는 춘심이와 둘이 안고 자기로 밀약이 되어 있는 이상 너무 많이 마셔 버리면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체력에 일이 그르칠 염려까지 있으니까, 술을 조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상 밑으로 빈 주전자를 디밀어 넣어 준 것도 춘심이 짓이었다. 춘심의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계집의 배려를 함 석도는 잠시 감사하게 느낀다. 이런 산골에 출장을 와 보면 오락이 있나 구경거리가 있나. 엉덩이 적당히 통통한 계집이나 하나 골라서 잠자리 같이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된다는 것을 함 석도는 오랜 감정원 생활로 터득하고 있었다.
더우기나 그 동안 자기에게 들어올 그 상당한 액수의 떡값을 어디 안심하고 맡겨 놓을 자리가 없다. 앞으로 춘심이가 그 일을 도맡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감정원에겐 하룻밤이나마 정을 나눈 계집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싫어도 오입질을 해야 한다. 그 치사한 은밀한 관계가 함 석도의 비밀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춘심이가 다시 함 석도의 다리를 꼬집는다. 이를테면 술 좀 작작 마시라는 신호다. 함 석도는 술잔 위로 눈을 들어 지서장을 저으기 바라보면서 상 밑으로는 한 손을 내밀어 춘심의 손을 꼭 저어 주었다.
눈치 빠른 지서장이 두 연놈의 그런 장난질을 눈치 못 챌 까닭이 없다. 속으로는 이 연놈들 벌써 배가 맞았구나 싶었지만 얼굴로는 모른 척한다. 자기 자신은 설령 지서주임으로서 이 술상을 갑자기 뒤집어엎어 버린대도 어느 한 놈 핏대 세워 감히 항의하고 대들 놈이 적어도 이 방안에선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자기에게도 계획이 있는 이상, 함부로 기분 나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이 수납이 끝날 때까지는 적어도 지서 주임은 브로커로 전락한다. 평소에 안면깨나 있는 경작자들을 불러들여 총대나 주재 기사에게 갖고 갈 떡값을 자신이 받아먹고 감정원에게는 빈 입으로 찾아가서 부탁한다. 부탁 받은 감정원이야 물론 기분이 언짢다, 그러나 제 엉덩이가 구린 이상 지서 주임의 부탁을 묵살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 어떤 후환이 자기를 옭아 맬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술자리에 앉아서 허허 웃고 서로 꼬집고 서로 추켜세워도 하지만, 그러나 속마음은 서로가 생판 다르게 먹고 있었고 또 그래야만 이 술상 둘레에 앉은 사람들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마치 두더지와 족제비와 개와 닭과 말과 소가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앉았는 게 이 환영회라는 거다.
춘심이는 춘심이 대로 그렇다. 이미 오십 고개를 넘어가려는 이 힘없는 것을 씹어 봐야 그것이고 먹어 봐야 시들할 것이란 것을 그녀가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돈보고 돈 먹자는 판에 십오 명이나 되는 수납반원 중에 감정 담당을 물 수 있다는 건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행운인 바에야 그놈의 그것이 풀 먹은 삼베 조각이든 물먹은 배추잎사귀 같든 그것을 가릴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춘심이는 안다.
어쩌다가 함가가 이 동네로 몰려온 십수 명의 작부들 중에 자기를 택한 것인지 그것이야 제 눈에 안경으로 따라가는 이치지만 함가의 기분을 적어도 이곳에 머물 보름 동안은 맞춰 줘야 돈푼깨나 몽전해서 이 동네를 떠날 것이다. 그까짓, 이왕 돈 먹자고 이 팔자 만든 이상 늙은 놈이면 어떻고 젊은 놈이면 어떠하겠는가. 평생 이 동네에 살 몸도 아니고 수납반 떠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수납 경기 퇴색하면 어차피 떠날 동네다.
이왕 함가를 잡은 이상 동료들에게 빼앗기지나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그녀는 함가 옆에 더욱 바싹 붙어 앉았다. 단위 조합장이 춘심에게 눈독을 들이고 바싹 기어드는 꼴을 영태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주는 술잔이나 받아먹고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하든 잠바 안주머니에 쑤셔넣어 둔 현찰과 명단을 함가에게 전하고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데 얼른 그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 계 안타깝다. 이놈의 세상은 어찌된 판인지 먹을 놈보다 처멕일 놈의 처신이 더욱 어렵고 안달스럽다.
"자기, 너무 마시지 마."
옆에 앉았던 꽃봉이가 벌써 눈두덩께에 발그레하니 욕정을 묻혀 올리며 반말짓거리다. 그녀의 한 손은 어느새 영태의 혁대 밑으로 들어와 영태의 샅에 들어와 있었다, 이건 벌써 하룻밤 자 보지도 않고 제 서방 닦달하듯 구는 게 영태는 싫지도 좋지도 않다.
"내 언제 가면 돼?"
마침 안주 한주먹 집어서 영태의 입안으로 대령시키면서 꽃봉이가 넌지시 물었다.
"열두 시 넘어서 와."
"문 잠그지 말고 기다려 자기 ?"
"도둑놈이 있나 문은 왜 잠궈 ?"
"자기 그것 도둑질하러 내가 가잖여."
계집은 이렇게 말하고 께르르 웃었다.
술판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바라볼라치니 단위 조합장은 밸이 꼴리기 시작했다. 주재 기사는 주재 기사대로, 감정원은 감정원대로 계집 하나씩은 벌써 꿰어찬 것 같고. 동장 녀석이야 술만 처먹을 수 있으면 헤헤 벌어져 엎어지면 코 닿을 제 집구석으로 돌아갈 처지고, 지서장은 지서장대로 속셈이 있을 터이고, 총대는 총대대로 제가 할 일이니 이 술자리에 앉아 있을 터이다. 제각기 명분이 있고 까닭이 있는 처지인 것이 취한 기분에서나마 어렴풋이 잡혀 왔다.
자기는 일년 내내 회수(回收)되지 않던 농사 자금이나 이차판에 회수해서 수입잡으면 되었지만, 그러나 웬지 이 술자리에서 자기만은 어쩐지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깐 놈의 골치만 아프기 마련인 단위 조합장 때려치우고 내년엔 총대 선거에나 출마해 볼 심산을 굳히고 그는 벌건 낯짝으로 앉았다가 공연히 건너편에서 꼴사납게 불여우 아양 떨어쌓는 꽃봉이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야 이것아, 어디 김 영태만 손님이냐? 넌 워찌 체신머리가 그리 없냐? 워찌하여 나한텐 술 한 잔 안 치냐?"
그 소리에 호들갑스럽게 놀라는 척하면서 꽃봉이는 얼른 옆에 있는 맥주병을 주워들면서 말한다.
"미안해요. 어서 꼽부나 드세요, 술 쳐 드릴께."
"이년아. 니 술 받아먹으려고 내 그러는 줄 아냐?"
"그럼 뭣 땜에 그려요?"
"분위기가 더러워서 그런다."
꽃봉이로 말하면, 화류계 생활 5년째다. 제 아무리 추현동 단위 조합장이기로서니 촌놈이기 매일반이다. 대구, 봉화, 영양, 예천, 안동, 의성 어디 안 돌아다닌 술집이 없고 못 먹어 본 사내가 없다. 촌놈도 먹어 봤고, 운전수도 먹어 봤고, 농협 직원도, 국민학교 교장도, 약국 주인도 먹어 봤다, 산전수전 다 겪고 다니는 마당에 추현에 와서 이 촌놈에게 창피 당하는가 싶어 속으론 발끈하였으나 그러나 어쩌랴 촌놈 다스리는 데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다 싶었다.
"조합장님 너무 흥분하시지 마러유. 홍분하시면 빨리 늙어여.
"이년 봐라! 니가. 어찌하여 날 보고 늙다 젊다 하냐?"
"잘못했어요. 살다 보니 이런 수도 있잖아요. 살다 보면 중도 보고 개도 본다구요."
"야 이년 봐라 보자보자 하니 못할 말이 없네. 그럼 이년아, 니는 중이고 나는 개라 이거지?"
조합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꽃봉이를 향해 삿대질이었으나 영태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았다. 그때 지서 주임이 두 사람의 악다구니를 가로막고 나서서 말했다.
"엇따 조합장, 중이나 개나 다 그게 그거 아녀."
"주임님, 그러나 어디 그려요? 중 다르고 개 다르기. 저년이 글쎄 중이 돼도 서러울 나를 두고 개새끼라니, 수악한 잡년이 말입니다?"
그때, 고개 푹 숙이고 앉았던 꽃봉이가 발끈해서 낯짝 쳐들더니 딱 잘라 한 마디 발쑥 던졌다.
"지가 언제 개새끼라 하였소? 그냥 개라구 했지.
"그럼 이년아 개새끼나 개나 그게 그거 아녀?"
"개는 개새끼 애비 아뉴?"
이 말 한 마디가 조합장을 극도의 흥분으로 몰아붙인 모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삿대질만 일삼던 조합장이 어느새 두 손을 번쩍 들어서, 그래도 산골에선 차린다고 차린 환영회 술상을 덜렁 들어 엎어 버리고 말았다.
삽시간에 온 방안이 쑥대밭에 멧돼지 지나간 자리가 되었다. 술상 앞에 앉았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전부 벽 쪽으로 가서 엉거주춤 섰다.
"왜 이래?"
그 꼴을 보고 맨 처음 눈에 불을 켠 게 지서장이다.
"야 이 자식아, 남의 제사에 와서 왜 젯밥에 재를 뿌려?"
지서장의 말은 옳았다. 남의 계사에 와서 음식이나 곱게 앉아서 처먹고 갈 일이지 이게 무슨 망발인가. 그 말 듣고 보니 조합장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지만 이미 저질러 놓은 낭패를 수습하기는 어려웠다. 아니 이 낭패를 수습하는 길은 계속 버티고 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것 봐요. 그래 주임님은 개 소리 듣고 소새끼처럼 가만 앉아 있것소? 주임님도 쓸개는 있겄지요?"
"이 자식아, 어느 년이 소새끼라구 했어, 개새끼라고 했지."
지서주임은 어금니를 사려 물고 삐딱하게 버티고 서더니 그 이상은 더 참을 수는 없었던지 조합장의 한쪽 따귀를 보기 좋게 올려붙였다. 조합장의 한쪽 볼따구니에서 철거덕 소리가 나더니, 아직 입안에 남아 채 씹어 넘기지 못한 배추부침 한 조각이 튀어나와 발 앞에 척 떨어졌다, 그걸 보고 까르르 웃어 버린 것은 꽃봉이였다. 계집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닦달을 받고 저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이라 하더라도 웃을 건 우선 웃고 봐야 차는 게 자발 없는 계집들의 하는 짓이다. 그런다고 누가 교양 없다 떠들 사람도 없었고 가정 교육 못 받았다고 제 애비를 탓할 사람도 이 자리에는 없다. 생기는 대로 주워 먹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보이는 것이 있으면 웃어야 한다.
그 이상 싸움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난데없는 꽃봉이의 자지러지는 웃음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무안하여 한둘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사이에 김 영태는 함 석도를 꾹 찔러서 건넌방으로 건너와 버렸다, 술방에서는 작부 서넛이 퍼질러 앉아서 신세 한탄 조합장 원망 곁들여 있는 말없는 흉 털어 가며 난장판이 된 술상을 치우고 있었다. 영태는 함가를 건넌방으로 끌고 간 즉시 현찰과 명단을 불쑥 내밀고 집구석으로 돌아와 버렸다.
생각하면, 조합장이란 녀석이 상당히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도대체 마을의 유지인지 기름종이인지는 몰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제가 농협 단위 조합장이면 장이지, 왜 남의 제사에 차린 음식에 발길질인가 싶었다.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창이라고, 수납 경기에 제가 발끈하고 나선다는 자체부터가 덜 된 놈이다. 돈보고 대드는 계집년들이 눈꼴사납다고 해서 면장까지 와 있는 그 판에 감히 술판을 엎다니 그 용기야 가상하다고 친다 하더라도 사람의 도리로서 그럴 수가 없었다. 농자금 회수에 협조를 해 달라고 몇 달을 두고 만날 때마다 사정조로 얘기하던 작자가 계집이 볼꼴 사납게 군다고 그 지랄을 벌여 놓아야 한다니, 사람의 속은 알고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언뜻 문 밖에서 잔기침 소리가 나더니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시오?"
누웠던 뒤통수의 팔깍지를 얼른 빼면서 영태가 물었다. 밖에선 한참 주저하는 듯하더니 여자가 대답한다.
"자긴, 아까 약속 잊었부렀담7"
꽃봉이였다. 작부의 이름에 꽃봉이가 무슨 나자빠질 꽃봉인나 싶기도 했지만 그 북새통에 또 잠자리 약속한 건 잊어버리지 않았구나 싶어 영태는 불쑥 웃음이 흘러나왔다.
"들어와, 노크는 또 무슨 유식허게 노크야? "
"사람 깥보지 말아여. 수악한 촌년으로 아나 뵈? 이래봬도 춘천 소양강물 끌어올린 수도꼭지 빨다 왔단 말여."
방구석으로 들어와선 선뜻 앉을 생각을 않고 춘천에서 수도꼭지 빨다 온 자랑을 늘어놓아야 하는, 이 지지리도 못나 자랑할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꽃봉이의 판탈롱바지 한끝을 영태는 얼른 끌어당겼다.
"자기 힘도 세셔."
바짓가랭이 당기는 대로 사내의 가슴팍에 와서 벌렁 엎으러지면서 계집은 이렇게 씨부렸다. 뭘 처먹고 입가심은 또 할 줄 알아서 주둥이에서 아카시아 해태 껌 냄새는 등천을 하였다. 칫솔질이나 하고 사내를 찾을 일이지 뭐가 그리 바빠, 칫솔질 대신 껌으로 씹어 대신하여야 하는지 할 수 없는 계집이로구나 생각은 하면서 영태는 일순, 계집을 푹 끌어안고 똥개들 모양으로 방바닥을 한 번 딕디굴 굴렀다.
"아이 숨차, 이러지 말아요."
사내에게 안겨 짓눌리면서 꿎봉이는 싫지는 않았는지 영태의 가슴을 한 번 아프지 않게 꼬집는다.
집구석의 분위기가 조용하게 잡히기를 기다려 함 석도는 자리를 펴고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태가 가져온 명단과 현찰을 확인해 보았다, 액수는 틀림이 없었다. 그는 내일 수납될 경작인들의 수가 이십칠 명이라는 것을 영태가 가져온 접수 명단으로 확인하였다.
그 명단의 일련번호 앞에다가 십만 원 이상인 자는 △표를 하고 팔만 원 선인 경작인에게는 □표를 했다, 그리고 오만원 선인 자에겐 ◎표를 하고 삼만 원 선인 자에겐 X표를 해 두었다. 그 자신이 보면 어떤 사람이 얼마의 금액을 떡간으로 낸 건지는 환했지만 제삼자는 아무리 보아도 그 암호와 같은 표지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들어가도 돼요?"
춘심이가 어느새 문 밖에 좌서 종알거렸다. 얼른 시계를 보니 밤 1시가 넘고 있었다.
"그래 들어와도 된다."
춘심이는 고쟁잇바람이었다, 객지로 굴러다니는 계집이 잠옷 한 벌도 온전히 건사 못 했구나 싶어 함가는 순간적으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너 이리 와."
이불자락 위로 계집을 털썩 끌어 앉히면서 함가는 은근히 말했다.
"너 이것부터 어디다 좀 감춰 놓고 들어와야겠어."
함은 영태에게 받은 신문 뭉치를 얼른 춘심이 앞에 던졌다.
"이게 뭐예요?"
"아, 뭐긴 뭐야. 그건 알 필요도 없고 이건 너나 가져."
그는 삼만 원을 따로 춘심에게 던져 준다. 돈에 체한 여자는 아직 없다. 따로 던져 준 삼만 원을 냉큼 받아서 속옷 주머니에 찔러 넣은 그녀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함가에게 말했다.
"어디 감출 곳이 없어요."
"그럼 어떡헌다?"
"감출 곳이 딱 한 군데 있긴 있어요."
"워디?"
"저기."
그녀는 천장을 가리켰다. 그때서야 함가는 속으로 아 하고 소리질렀다. 그런 곳이 있었구나. 그래서 함가는 방바닥에 엎드리고 춘심이는 사내의 등을 딛고 올라서서 칼로 천장 한쪽을 째고 돈 뭉치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천정지를 곱게 맞추어 놓았더니 감쪽같았다.
두 사람만 입을 떼지 않는 이상, 누구도 천장 속에 거액의 돈이 감추어 쪘다는 건 눈치챌 수 없었다.
"입도 뻥긋 마러."
계집을 끼고 누우면서 함가가 이렇게 지껄였다.
"자기 날 불여우로 알우? "
"그러니까 널 택한 거 아니냐."
계집의 젖무덤으로 한 손을 찔러 넣으면서 함가는 금방 앓는 소리를 내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와자자아게 들려왔다. 고리고 산협을 웅얼웅얼 흔들면서 마을로 다가오는 소리가 있었다. 트럭이 기어오는 소리였다. 내일 수납할 잎담배를 건조장까지 회송(回送)할 트럭 이 벌써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최 윤식은 추현동 사람들이 묵었던 숙소에 혼자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수납을 마친 그날로 집으로 돌아들 가고 없었다.
그는 막걸리 한 되를 앞에 놓고 앉아 자작(自酌) 자음하고 있었다. 밖에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올핸 눈도 빨랐다. 작년엔 섣달에서야 눈이 날렸는데라고 생각하면서 윤식은 거무죽죽하게 바랜 벽을 바라보고 앉았다. 아무리 마셔도 취할 것 같은 기분이 아니다.
"혼자 무슨 맛으로 술을 마셔?"
술을 서되째나 날라 주전 늙은 과부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으나 윤식은 그 핀잔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도대체 그럴 수가 없었다. 총대 조 필기에게 갖다 준 것은 분명 8만 원이었다. 부랄을 털어도 먼지밖에 안 떨어질 산골 놈 주제에 8만 원의 떡값이라면 보통 액수가 아니다. 그 구렁이알 같은 돈을 바쳤는데도 수납 결과가 형편 없었던 것이다.
대개의 경우, 감정대 뒤엔 조합의 간부나 총대와 수납 당사자의 입회(立會)가 있기 마련이다.
간이천막 속으로 찬바람이 그대로 몰아치고 먼지가 뽀오얗게 올랐지만 대개의 경작인들은 자기 담배가 수납되어 등급이 사정되는 경과를 보기 위해 기를 쓰고 천막 안으로 기어들었다.
홑바지 차림으로 감정대 뒤에 서서 떤다. 추워서도 떨고 긴장되어서도 떤다. 한 포를 감정하는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담배잎 하나에 적어도 열 번 이상의 손이 가야 한다. 묘상기에서부터 본포(本圃)까지, 그리고 수확해서 건조하고 건조해서 조리 작업까지 한 잎 한 잎마디 마다가 시린 정성이 깃들여 있고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노력이 깃슬들여 있다. 병엽은 가위로 잘라 내고 상한 잎은 버려야 등급을 잘 받는다,
그렇게 고생고생으로 지어 놓은 담배 농사가 최종 판결을 받는 순간이 바로 이 감정대라는 것이다. 그것은 흡사 법정에서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과 같은 심정이다. 그래서 누구나 할 것 없이 감정대 뒤에 서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떨리기 마련이나.
윤식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등이 한 포 나왔고 2등, 3등이 세 포씩 나왔다. 그리곤 4등이 4포, 5등이 6포. 이런 식으로 등급이 사정되는 동안 어떤 것은 생각보다 높게, 어떤 것은 생각보다 낮게 후딱후딱 사정되어 나간다.
그러나 계산실에서 나온 등급표를 받아 쥔 순간, 윤식은 눈앞이 아찔하였다. 빚은 사십만 원이 넘는데, 수납 대금은 삼십칠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 수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윤식은 속으로 대금이 아무리 적어도 사십오만 원은 되리라, 그래서 진 빛이나 겨우 갚게 되리라는 보관이 섰었다. 그러나 결과는 윤식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더우기나 8만원까지의 떡값을 바친 것에도 불구하고 수납 대금 자체가 사십만 원을 밑도는 것이자.
확실히 여기엔, 윤식으로선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온 농간이 있었다. 어디엔가 그 농간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그 농간의 매듭이 어디인지를 윤식으로선 가려내기 어려웠다.
그런 경우, 대개의 감정원들은 4등에 해당되는 담배를 5등으로 놓아주다가 4등 짜리 한 포쯤을 3등으로 사정해 준다. 그러다가 2등 짜리는 3등으로 놓아주다가 2등 짜리 한 포를 탕 하고 우등으로 놓아준다. 이 우등 짜리 한 포에 대개의 경작인들은 기분이 좋아진다. 등급 사정에 불만이 없이 수납장을 물러 나온다. 그러나 계산실의 등급표를 받아 보면 그건 순전히 농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떡값을 바치면 그런 농간을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윤식은 자신의 담배의 등급 사정에 그런 농간이 작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조 필기의 농간인지 김 영태의 농간인지 함 석도가 판 함정인지를 윤식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 영태를 찾아가 무엇인가를 호소해 보아야겠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소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그 사람을 찾아갈 순 없었다, 그래서 윤식은 아무도 없는 빈 방애 혼자 앉아서 술을 퍼마시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술은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특허 할 수 없는 촌것인 윤식에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건 매우 비겁한 짓일 게다. 그렇지만 비겁하고 안 하고를 지금은 따질 처지가 못 되었다.
술 서 되를 혼자 앉아서 다 비운 윤식은 휙 문을 열었다.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펑펑 쏟아지지도 못 하는 눈발이 비봉산을 멀찌감치 비끼며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눈이 오면 수납은 쉰다. 노적(露積)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섬돌에서 신발을 찾아 신고 숙소를 나섰다.
"술값?"
안방에서 비쩍 마른 늙은 과부가 소리친다.
"안 떼 묵을 테니 걱정 말어요."
한 마디 던져 주고 그는 골목을 나섰다. 수납장은 예상했던 대로 쉬고 있었다.
몇 사람의 인부들이 나와서 수납장 부근에 불을 피워 놓고 쬐고 앉아 있었다. 동네의 똥개들이 간이천막 부근에 달려와서 흘레를 붙고 있었다. 윤식은 모닥불을 쬐고 있는 인부들 사이에 끼어 섰다. 아무래도 곧장 김 영태의 숙소를 찾아간다는 게 색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추현동 사람 아녀 ?"
귓때기가 새파란 한 녀석 이 모닥불로 들어서는 윤식을 보고 이죽거렸다.
윤식은 대답도 않고 우선 손부터 모닥불 위로 내밀었다.
"왜 아직 덜 바쳤소?"
담배에 습기가 많고 조리 솜씨가 서투르면 반품(返品)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땐 담배를 다시 만지기 위해 며칠이고 수납장 부근에서 묵어야 했다. 경비는 경비대로 나고 사람은 사람대오 골몰해진다.
"아니요, 반품이 안 났어요."
"그럼 집구석으로 가지 수납장 부근에는 왜 얼씬거리나? "
오십대의 사내가 다시 이죽거렸다. 윤식은 인부들 사이에서 빠져 나와 김 영태의 숙소께로 어기적거리고 걸어갔다. 그렇다, 집구석으로 돌아가지 무슨 지랄로 자기가 수납장 부근에서 늙은 개 모양으로 어슬렁거려야 하는가, 그러다 물어 볼 건 물어 보고 따질 건 따져 봐야, 속이라도 후련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대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선 여편네 보기가 범보다 더 무서울 노릇이다. 남들은 밭도 사고 논도 사고 소도 산다는데, 자긴 이게 뭐냐. 빚도 다 못 가릴 입장이라면 차라리 땅에 혀를 끌어 박고 죽어싸다고 윤식은 생각하고 있었다,
김 영태는 마침 집에 있었다. 그가 잔기침을 하고 서 있자, 영태 아닌 계집이 문을 빨쭘히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세요?"
계집이 묻는 말이다.
"김 영태씨 계세요? 주재기사님 말요?"
억지로 기어 나오는 말을 하자니 당사자도 어색하고 듣는 쪽도 힘들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내다보는 계집의 머리채가 까치 둥우리 같다. 눈은 내린다지만 이 발간 대낮에 계집이나 끌어안고 누운 김 영태의 배짱이 놀랍구나 생각하는데, 계집은 대강 옷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선다.
"들어가 보세요."
심드렁하게 한 마디 쏘아붙이곤 휭하니 제 집구석으로 사브작거리고 쫓아간다.
"들어 와요."
열흘 굶은 거위 새끼 모양으로 어깨를 쭈그리고 서 있는 윤식을 내다보며 김 영태는 그러나 내키지 않는다는 듯 지껄였다. 윤식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찾아왔소?"
담배를 뽑아 물며 김 영태는 다급하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어서요."
"뭔데요?"
"저 -, 저는 불만이 많습니다."
"무슨 불만이오?"
"사실 저는 아시다시피 담배 색상도 졸았고 조리작업도 알뜰히 했어요."
"고런데요. 뭐가 잘못됐소?"
"그란데. 등급이 나온 게 내 보관과는 영 어긋나요."
"그야, 욕심대로 되나요. 당신들 욕심대로라면 열이면 열이 전부 우등으로 받고 싶겠지."
"아시다시피 전, 욕심이 그렇게 얼토당토않게 많은 놈도 아닙니다. 내 분수는 내가 알지요. 그런데, 이건 기대에 어긋났다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무엇이 잘못되었소?"
이런 일이야 매년 당해 보는 입장이었으므로 영태는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경작인들이야, 어차피 불만 투성이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진 빛과 담배 대금을 같이 놓고 생각한다. 담배는 쓰레기처럼 만져 가지고 와선 자신이 진 빚이 팔십만 원이면 그 팔십만 원에 닿아야 만족하고 돌아서는 게 경작인들이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불만을 다 듣고 앉았을라치면 목구멍에서 몽둥이가 기어 나오는 심정이던 것이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기분나는 대로 지껄이다 보면 무슨 불상사가 자신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판이다. 그래서 영태는 그 불만을 구체적으로 내뱉으라고 닦달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구체적으로, 하고 최 윤식은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구체적으로 깍 집어서 무엇이라 할 수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뭔가 농간이 숨어 있는 이 일이 최 윤식에게는 왜 구체적으로 집혀 오지 않는 것일까. 가슴에 엉킨 이 불덩어리는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구체적으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윤식은 바른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영 생사람 잡으려고 작정한 사람이구만? 이 사람아, 그래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면서 대낮에 사람을 찾아와 닦달해."
"저는 팔만 원을 총대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팔만 원이 달아났단 말이오?"
"그게 감정원에게 전달됐습니까?"
"여보시오, 최 윤식씨? 난 날강도가 아니란 말이오. 분명히 여기에 명단까지 들어와 있단 말이오?"
영태는 잠바 주머니에서 예의 명단이 적힌 종이쪽지를 꺼내선 윤식의 코앞에다가 냅다 흔들었다.
"그런데 왜 등급이 그렇게 나왔을까요? "
"그건, 자리 보아 가면서 발뻗으란 말이 아니오. 자기 물건보고 돈 받을 요량을 해야지. 돈 먹었다고 십만 원 짜리 물건을 삼십만 원으로 놓아 줄 수는 없잖소? "
"그렇지만 너무나 억울합니다."
"이 사람 참 가당찮은 사람이네 ! 아까부터 자꾸만 억울하다 억울하다 캐쌓는데 정말 억울하다면 무엇이 억울하다는 걸 조목조목 따져 주어야 내가 시정을 하든지 감정원에게 가서 따져 주든지 할 꺼 아노?"
"자꾸 구체적으로 말하라구 허지 마세요. 내 속엔 시방 불이 나요."
"당신 속에 불 나니까 냉수사발이라도 갖다 바치란 말요? 관청의 일이란 게 구체적으로 하지 않는 일이 어딨소? 당신 정 그런 식으로 버티면 무고죄로 집어 넣는다구."
"나를 무고죄로?"
"이 사람이 아직 세상 돌아가는 판국을 모르는구만. 당신이 그런 허무맹랑한 불만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닦달한다고 해서 거기에 눈 하나 깜짝할 사람들이 있을 것 같소? 그러니까 무고죄로 처넣는다는 거지."
윤식은 더 이상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팔만 원의 현찰이 곧이곧대로 감정원에까지 전달된 것이라면 왜 감정원은 그 따위로 등급을 놓아 준 것일까. 그렇다면 김 영태에게 더 이상 닦달할 필요가 없어진다. 속 알맹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표면적으로는 김 영태는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남의 돈 심부름하기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진대 공연히 재미보고 있는 사람을 찾아와서 시답잖은 말마디 늘어놓는 것도 큰 실수이거니 싶어 윤식은 그만 그 숙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랬던지 김 영태의 숙소를 나서자마자, 읍내에서 온 권 기자가 마침 뜰에 숨어 섰다가 최 윤식을 잡았다.
"실례합니다."
작대기로 종아리 얻어맞은 수탉 모양으로 티죽끼죽 걸어나오는 윤식을 권가는 붙잡았다.
"누구신가요?"
"누군 누구요. 당신 잡아먹을 사람은 아니니까 나 좀 봅시다."
"누구신데요."
"요 앞에 대폿집으로 잠깐 들어갑시다."
"글쎄 누구신데요?"
"가 보면 알아요. 엇따 그 사람 의심도 많네."
뿌리치는 윤식을 권가는 한사코 붙들고 수납장 부근에 있는 대폿집으로 사람을 끌어넣었다. 돼지고기 삶은 물에 무우 조각이 둥둥 뜨는 국 한 그릇에 맥주가 두 병이나 앉힌 술상이 들어왔다.
"자 한 잔 쭉 드시오."
"댁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못 묵겄소. 공연히 폐끼치긴 싫으오."
"정 그렇다면 말하리다. 난 신문 기자요. 알것소? 당신이 아까 김 영태의 방에서 이야기한 걸 난 밖에서 죄다 들어서 알고 있소. 난 못난 놈이지만 신문 기자요. 신문 기자라는 것은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와 병폐를 이 사회에 고발하고 널리 알려서 그런 부조리를 뿌리뽑고 보다 건전하고 보다 맑고 서로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말이오. 당신은 보잘 것 없는 농민 아니오? 우매하고 가난한 농민이 아니오? 그런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을 이 사회에 대신 고발해 주는 숭고한 책임을 우리는 가지고 있단 말이오."
작자의 말을 전부 해석해 들을 겨를도 바탕도 없었지만, 최 윤식으로 봐선 물에 빠진 놈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에 이런 사실이 들켜 버렸다는 것이 우선 윤식에겐 가슴 섬찍한 일이었다.
자기의 억울한 사정이 신문에 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서에서 오라 가라 할 것이고, 내년의 담배 경작은 내다볼 수 없다. 허가권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권기자님께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난 억울한 사정이 없습니다."
윤식은 잘라 말했다. 잘못했다간 애새끼 병신 되고 내년 농사도 못 짓는 판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갑자기 그를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난 다 들었어요. 당신의 심정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오. 물론 이런 사실이 신문에 나면 당신을 오라 가라 하겠고 담배 허가는 떨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당신을 색안경 끼고 볼 테고, 그래서 당신은 어디 가서 농사 자금 한푼 못 빌리는 처지가 될 터이지요. 그런 사정을 내가 모르는 게 아니오."
"그것을 아시면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마시오."
"자 우선 한 잔 쭉 들이키시오. 난 그런 사정을 다 알고 당신을 부른 거요. 알겠소. 신문에 당신 이름이 나지 않고도 당신이 살아날 길이 있다는 거요. "
"내가 살아날 길이 있다니오?"
"당신은 팔만 원을 떡값으로 주었다고 했지요?"
윤식은 얼결에 권가가 내미는 맥주 잔을 벌컥 받아 마셨다. 마빡까지 차 올랐던 취기가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나니 뱃구레 저 아래로 꼬르르 하고 가라앉는다. 권가도 자작(自酌)하여 한 잔 들이키고 있었다. 잔을 놓으면서 윤식이 말했다.
"예, 나는 분명히 팔만 원을 총대에게 전했습니다. 팔만 원에서 향 장도 안 빠지는 금액입니다. 확실합니다."
"그 돈이 감정원에게 전해진 건 확인했융니까? "
“예, 김기사님이 명단을 내 보입디다. 확실히 보진 않았습니다만,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김기사님, 하고 존대할 것 없어요. 그놈도 도둑놈이긴 마찬가지니까요."
"사람이 그럴 수 있습니까."
"내 그 돈을 찾아 드리리다. 당신은 여기서 술이나 먹고 기다리시오."
말하자면, 감정원이 이미 놓아 놓은 등급이야 지금 다시 고쳐질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최 윤식이가 떡값으로 갖다준 현찰 팔만 원은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팔만 원을 다 찾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오만 원 정도라도 도로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최 윤식의 입장으로 보아선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격이다. 게다가 그 자신은 대폿집에 앉아서 술만 퍼 마시고 앉았으면 권 기자가 대신 그 돈을 받아 주겠다니 최 윤식으로 보아선 참으로 누워서 떡 받아 먹기였다.
세상에 이런 고마울 사람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최 윤식은 권 기자의 말이 곧이곧대로 믿어지질 않았다. 범의 아가리에 들어간 고깃덩이를 꺼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그 일을 이 체구가 조그만 작자가 어찌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권 기자의 간덩이가 아무리 부어올랐어도 호랑이 앞에서 웃통 벗어 던지는 격이 될 것은 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 기자의 눈초리는 자신에 차 있었고 그리고 입에서 기어 나오는 말 은 거침없었다.
신문 기자는 이 사회의 공복이란 알이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뭔가 바로잡는다는 뜻이 분명하겠고 보면 권 기자도 함부로 취급될 사람만은 아니라는 짐작은 들었다,
그는 최 윤식을 방에 그냥 두고 밖으로 나갔다. 밖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비봉산 골바람을 타고 하늘이 새까맣게 느껴질 정도로 눈은 나릴 모양이었다. 오버 깃을 잔뜩 추켜세우고 권 기자는 곧장 감정원 숙소로 찾아갔다. 수납원들은 이 방 저 방에서 밀린 잡무들을 처리하느라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감정원은 다음 수납될 총대와 둘이 앉아서 백 원 짜리 화투를 치고 있었다. 춘심이란 년이 감정원 옆에 바싹 붙어 앉아 훈수를 하고 있었다. 춘심은 낯짝에 영양 크림을 발라선지 개구리 뱃가죽처럼 빤질빤질하다.
"실례합시다."
문을 삐쭘히 열고 권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시더라?"
마침 난초를 먹고 있던 함 석도가 다소 거드름을 피우며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마주앉았던 총대가 슬쩍 함 석도의 무릎께를 꾹 찌르더니 눈을 껌벅한다,
"들어가도 좋겠습니까?"
총대의 눈치로 보아, 이게 똥파리 종류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한 함 석도는 얼른 화투장을 담요 위로 던지고 뒤로 물러앉으면서 들어오라는 눈짓이다.
“재미보시는데 이거 죄송합니다."
심심소일로 백 원 짜리 화투나 치고 앉은 사람을 두고 재미본다는 식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분명 비양거리는 투임에는 틀림없었다. 아직 신분은 모르겠으나 신문 기자가 아니면 읍내에서 나온 형사 나부랭이쯤 뒬 거라고 생각하면서 함가는 옆에 있는 춘심에게 술상 차려 오라는 눈짓을 보내고 들어온 녀석에겐 아랫목을 권했다. 어느새 총대도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눈길에 오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
권 기자가 불쑥 내민 명함을 받아들고 함가는 말했다
"이거, 인사가 늦었습니다."
잠깐, 천장으로 눈길을 돌리고 앉은 권에게 함은 다시 이렇게 씨부렸다.
"어디요, 별 말씀을. 오히려 이런 산골로만 찾아다니시느라고 반원들 전체가 고생들 많지요?"
"예, 고생이지요. 구월 하순부터 이 짓들이이까요. 전 그 동안 집이라곤 꼭 한 번밖에 다녀오지 못했다니까요."
"고생이 많지만, 고생 끝에 남는 건 있겠지요."
“어디요, 고생끝에 남는 거야 골몰뿐입니다."
"그렇지만도 않는 모양이던데요. "
"권 선생, 왜 이러십니까?"
"또 생사람 잡으려 드시누만, 허허."
함가는 공연히 너털웃음이다. 그러나 그런 너털웃음에 얼렁뚱땅 같이 헤벌씸 웃을 권기 자가 아니다. 그 동안 술상이 들어와서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이 산골에까지 웬놈의 맥주는 이렇게도 들이닥쳤는지 집집마다 맥주병이 깔리다시피 하였다. 일년 내내 처먹고 싶어 안달이던 이 맥주를 수납대금 좀 받아 쥐었다고 해서 이처럼 기를 쓰고 마셔대야 하는 건지 권가는 갑자기 씁쓰레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춘심이가 부어 주는 맥주를 한 잔 그득히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아가씨, 짜리 잠깐 비워 줄 수 없을까?
"왜요?”
춘심이가 퉁명스럽게 되묻는다.
“왜요? 왜요라니? 손님이 자릴 좀 빌리자는데 이건 또 무슨 깡다구로 이러는 거야?"
권가가 발끈하자, 함가가 눈짓을 했고 주둥이가 열 발이나 빠진 춘심은 속치마를 훌렁 걷어붙이며 밖으로 휑하니 나가더니 섬돌에다 켁 하고 가래침을 뱉는다.
권가의 발끈함에 함은 잠시 긴장한다. 이 작자가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이처럼 기세등등한 것일까.
"밀담이 있소."
대뜸 이렇게 말하고 권가는 함을 빤히 쳐다보았다.
"뭡니까?"
"나 지금 어떤 경작자 한 분을 만나고 곧장 이리로 달려오는 길이오."
"왜요?"
"시치미떼지 마시오. 당신도 살아야 하고 그 경작인도 살아야 할 꺼 아니오? 안그렇소? 당신이 돈 먹고 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것 아니오? 내 누군지 말할까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지각없이 하고 계십니까?”
"내가 지각이 없다고? 여보시오. 당신 감정원 생활 하루 이틀 하시오? 이런 사람 처음 대해 보시오? 왜 이러십니까 정말. 도사 앞에 요령 흔들지 마시오. 나도 기자 생활 팔 년째요."
"전, 통 종잡을 수 없습니다."
"거, 뻔히 알면서 왜 그러시오. 그 사람 성명 삼자 곧바로 대 드려야 하겠소 꼭?"
"누굽니까? 그 사람이?"
"최 윤식 왜 틀렸소? 그저께 수납한 사람이오. 그 사람이 생각 안 나요. 세 번째로 담배 바친 사람이오."
함가는 재빨리 사흘 전으로 머리를 굴려 간다. 사흘 전의 최 윤식이라. 그러나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자가 보는 앞에서 명단을 꺼내놓고 볼 수는 더욱 없다. 이 똥파리가 최 윤식이란 이름까지 댄 걸 보면 분명 어느 놈이 이 자식에게 정보를 준 건 확실했다. 그러나 함가에겐 그 이름이 기억에 없다. 한두 놈이 떡값을 갖다 주어야 생각이 나지 하루에 이십 명이면 이십 명이 전부 떡값을 들이미는 판국이니 최 윤식이가 어느 개아들놈인지 알아 둘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 생활 팔 년째라는 이 작자는 생긴 몰골로 보나 쏘아대는 듯한 말 씀씀이로 보아 호락호락하지 않을 위인임엔 틀림없을뿐더러,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이 자리에 덜렁 들어앉을 인물 또한 아님을 함가는 직감하고 있었다. 갑자기 함가는 허허 웃었다.
"흥분하진 마시오. 뭐 한번 그래 본 거니까. 세상엔 비밀이란 없는 거 아니오?"
"생각 잘 하셨구만, 여보시오 나도 담배 수납엔 도사급이란 말이오.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 담배곳에 살고 있는 내가 모르겄소."
"술이나 듭시다."
"술 잘 하시오?"
"예, 조금 합니다."
그제서야 권가도 조금 느긋해진다. 그때까지 추켜세웠던 오버 깃을 내리고 어깨를 누그러뜨리고 앉아 다시 함가로부터 술잔을 받았다.
"십오만 내놓으시오. 난 그 사람에게 찾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몸이니까 그리 아시고 십오만 내놓으시오."
"너무하십니다. 그 사람이 갖고 온 게 그만치는 못 될 텐데."
"이 사람 이제 보니까, 노랑 신문에 이름 석자 나고 싶군. 여보시오, 당신 정말 이러면 좋지 못해? 사람이 오십 고개가 가까와지면 이 눈치 저 눈치 볼 줄도 알아야지 영 석두구만."
돈 긁어내는 데는 권가도 함가를 뺨칠 정도였다. 맥주 세 병을 비우는 사이에 저쪽 방으로 잠깐 비킵시다 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십오만 원을 싸 가지고 다시 건너왔다. 이놈이 어디다 이 돈을 숨겨 놓고 있는 것일까. 이보다 더한 현찰 놀음은 없다. 도대체 외상이 통할 리가 없는 이 장사에 하루에도 수십만 원씩의 떡값이 들어올 텐데 어디에다 이 돈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그깐놈의 현찰이야 어디 숨기든 그건 자기 담당이 아니다 싶어 십오만 원을 코우트 자락 속에 숨기고 권가는 최 윤식이가 기다리는 대폿집으로 돌아왔다.
최 윤식은, 그때까지도 눈알이 벌개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권가가 들어서자, 그 벌건 눈을 들어 쳐다보는 꼴이, 술이 취해 눈알이 벌건 게 아니고 이 촌놈이 혼자 앉아서 질끔질끔 울었구나 싶었다. 뭣 때문에 울고 앉았던 것인지 그걸 묻지 않아도 환한 이치겠거니 생각되었다. 제 신세 한탄 말고 또 뭣이 있겠는가.
"어찌됐습니까?"
윤식이 앉은 채로 들어서는 권가를 보고 물었다.
"말도 마슈. 그 자식이 얼마나 깐깐하고 독한지. 돈 먹었다고 합디다, 그런데 발설한 사람을 데리고 오라는 거예요. 내 그래서 당신의 성명 삼자는 숨겼지만 그 자식이 누구든지 데리고 와서야 먹은 돈을 내놓겠다구 버티드란 말요. 그놈의 속셈이 뭔지 모르지요? 먹은 놈도 준 놈도 같이 들어가자 이겁니다. 요샌 그렇거던요. 먹은 놈보다 준 놈이 더 죄가 크다는 걸 그 놈이 벌써 알고 있드란 말요."
눈 가장자리에 말 오줌 같은 눈물을 질끔질끔 찍어붙이던 최 윤식의 무릎 위의 두 손이 간단없이 떨리고 있었다. 개 쫓으려다 되돌아선 개에게 손목 물리는 볼이나 되지 않는 건가 최 윤식의 불안은 거기에 있었다.
"어떡합니까 저는?"
최 윤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뭐라구 합디까. 처음부터 그런 어설픈 짓은 말았어야 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서 물러날 놈입니까? 내가 그 함가 놈의 뒤통수를 물었단 말입니다."
“뒤통수를요?"
"예, 뒤통수를 칵 물었지요. 당신이 경작자들의 돈을 먹은 것은 확실하다, 지금 처먹고 앉은 술잔은 도대체 어느 놈이 대는 거냐 이렇게 대들었지요. 녀석이 정말 우기기 시작한다면 당신의 성명을 밝히러고 마음도 먹었지요."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난 내년에 담배 농사는 다 지었습니다."
"내가 그걸 모를 리 있소. 난 당신편이 아니오. 녀석이 삼만 원을 내놓습디다."
녀석은 현찰 삼말 웜을 최 윤식의 무릎 앞에 풀색 던졌다. 꿈꾸다가 얻은 돈인 것처럼 최 윤식은 무릎 앞에 털어진 삼만 원이 아득하게 보였다. 세어 보니 분명 삼만 원이었다. 호랑이가 먹다 남은 고깃덩이를 건져 낸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랬다. 세 사람의 손을 거쳐서 건너가고 건너간 돈이 다시 세 사람의 손을 거쳐 되돋아올 수 있었다는 건 아무리 똑똑한 권 기자의 조화였다 할지라도 최 윤식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권가가 아니었으면 찾지 못했을 돈, 그리고 최 윤식이란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받아 낸 돈이라면 이건 분명 하늘예서 털어진 돈으로 비유해도 한 푼어치의 무리도 없으리라. 팔만 원의 현찰을 몽땅 되돌려 받진 못했을망정 삼만 원도 그런 조화로 되돌려진 돈이라면 공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받지 않겠다고 뒷걸음치고 빼는 권가에게 최 윤식은 오쳔 원을 사례조로 떠맡기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최 윤식은 절을 백 번이나 하오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것을 기다려 권가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젠 발자국이 남을 정도로 눈발이 쌓이고 있었다.
정유소에 가면 지 순경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작자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권가는 생각했다.
눈발로 발이 묶인 승객들이 정유소 담배 소매소 앞에 오들오들 떨고들 서 있었다.
정유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 꺼져 가는 난로를 끼고 앉아, 지 순경은 엉덩이가 떡판만한 버스의 차장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나좀 봐."
손가락 짓으로 지 순경을 불러내서 정유소 뒤꼍 변소 옆으로 몰고 갔다.
"얼마 줄래?"
권가가 대뜸 이렇게 물었다.
"물었어?"
"그러니까 얼마 줄래?"
"사륙제 아냐?"
"알았어."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은 전부 귓속말이었다. 똥개 한 마리가 변소 문 앞에 가서 한쪽 다리를 엉거주춤하니 들고 오줌을 갈기고 난 다음, 귓속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보고 서 있었다. 지 순경이 그걸 알고 옆에 찬 순찰봉을 후딱 꺼내 허공 높이 쳐들고 저리 가 하자 똥개는 그만 꼬리를 사리고 개 살려요 하고 휜 눈이 펄펄 날리고 있는 들판 한 가운데로 멀리멀리 달아났다.
권가와 헤어진 지 순경은 쓰적쓰적 수납반원들 숙소로 걸어갔다. 감정원은 낯짝이 찌부등해서 그를 만났다. 낮잠을 자고 있긴 했었으나 그리 편한 심성은 아닌가 싶다.
“어서 오세요. 눈이 와서 오늘은 쉽니다."
지 순경에게 언뜻 말하고 함가는 일어나 앉았다.
"아프진 마시오. 그러면 일에 지장이 있지요."
"그렇지요, 아프진 말아야지요."
"권기자 다녀갔지요?"
"예, 조금 아까요."
의아한 듯 함가가 지를 쳐다본다.
"왜요?"
"뭘요. 고냥 인사차 다녀갔지요."
"아는 사입니까?"
"아뇨, 금방 여기서 인사 나눴습죠."
'뭐라구 합디까? "
"대강, 올해의 잎담배 품질이 어떤가, 경작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수납 대금은 잘 지불되고 있는가 정도로 묻곤 돌아갔어요."
"그것뿐이었어요?"
"그럼요, 뭐 딴 게 있습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말씀 말라니요?"
"그 사람에게 돈 줬지요?"
"돈요?"
"그래요."
"아니,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이러십니까? 내가 왜 그 사람에게 돈을 줘요? 내가 왜?"
"여보시오 함선생? 그러지 맙시다. 그 사람이 이 집에서 당신 방에서 나가면서 떨어뜨린 현찰을 줒어 갖고 신고한 사람이 있단 말요."
"그건 얼토당토않은 말입니다.
"다 아는 사실 지금 와서 숨긴다고 누가 호락호락 넘어갈 성싶소? 그러지 마슈. 나도 간장이 있는 놈이란 말이오. 당신 이 동네에서 온전히 나가고 싶걸랑 처신을 잘 하시오."
함가는 묵묵부답이었다. 더 이상 말해 보았자, 이건 순전히 연극에 불과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만오천 원.
그 돈을 속주머니에 우겨넣은 최 윤식은 금방 부자가 된 느낌이었으나 그러나 금방 그 돈이 속절없음을 느꼈다, 이 돈 이만오천 원이 도대체 무슨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집구석에 가져가 봐야 그만, 이간 돈 없어봐야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는 곧장 집구석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미 손해보고 넘어진 농사에, 이미 다 못 갚을 빛에 이 돈 이만오천 원을 보탠다고 해서 그게 무슨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어슬렁어슬렁 동네의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그런 잡다한 생각에 빠지고 있었다. 어쩌면 이 돈을 뻥튀기 하듯 몇십 배로 둔갑시키기 전에는 도저히 아내를 볼 낯이 아니었다. 여편네는 우선 대전의 동서에게 진 빛을 들고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서의 것을 갚다 보면 농협 빚은 어쩌고 일년 내내 갖다만 먹은 양곡 빚은 어쩐단 말인가.
그는 눈앞이 다시 캄캄해 오기 시작했다. 이판사판으로 한번 꼭두잽이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발소 뒷골방에서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이발소 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뒷방에는 분명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으련만 신발도 없었고 사람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뒤꼍으로 돌아서 이발소로 들어갔다.
만석이란 깎사가 그를 힐끗 돌아다보았다. 타관 것으로 보이는 사십대의 남자와 장기를 두고 있었다.
"어떻게 왔시요?"
"아니, 그냥."
윤식은 엉거주춤 씨부렸다.
"이발허실려고."
"아니, 그냥 나좀 보까."
"왜요?"
"그러지 말고."
그 눈치 못 챌 만석이란 놈이 아니다. 녀석은 얼른 지나는 소리로 말했다.
"누가 뒤 본 사람 없소?"
"없어."
"지금 자리가 없을 텐데."
이놈도 노름방 빌려주고 방세 받아 처먹는 놈이란 것을 윤식이 모를 리 없다, 제치느라고 그러는 줄도 윤식은 알고 있었다.
"좀 끼어 주게."
이발소의 거울 밑에 난 조그만 눈으로 허리 꾸부리고 들어갔던 녀석이 한참만에 대가리만 내밀고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대가리가 나온 사이를 담배 연기가 굴뚝에서처럼 풍겨 나온다, 윤식은 녀석을 따라 콧구멍만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좁은 방안에 사람이 여섯 명이나 앉아 있었다, 대낮인데도 불을 켜 놓고 있었다. 콧등이 새까맣게 끄으를 정도로 담배들을 피웠던 모양이었다.
"얼마 가겼소? "
뒷전에 물러앉았던 오십대의 대머리 까진 녀석이 윤식에게 불쑥 물었다.
"얼마면 돼요."
"밑천이 하나는 돼야 낄걸."
몇날 며칠을 잠도 자지 못했는지 사내의 눈은 핏망울처럼 붉다. 그러나 윤식은 이 판에까지 와서 기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 안 가지고 다니는 놈 어딨소? 이 수납판에?"
“어련하실려고. 차롄 기다리시오."
그 외엔 어느 한 놈 윤식에게 시선 돌리는 놈이 없었다. 새까맣게 찌든 담요 위에 떨어지는 화투짝만 내려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은 안면이 있는 본 동네사람들이었고 하나는 상기란 놈이었다. 셋은 전연 낯선 사람들로 언젠가, 총대의 집에서 집합강화를 하고 나을 적에 김 영태가 있느냐고 그에게 묻던 작자들임을 윤식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 들어가 봐요. "
오십대의 대머리 까진 사내가 턱짓으로 윤식을 가리켰다. 앉은걸음으로 담요 앞으로 기어나간 윤식은 첫 판에 오천 원을 찔렀다.
'겨우 고고요?"
소눈깔처럼 유난히 눈이 큰 놈이 이렇게 물었다.
"왜 적어요?"
"아니 그것뿐이냔 말요."
"사람 깔보지 마슈."
"얼마나 있소."
그때, 뒤에 앉았던 대머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로막고 말했다.
"한 장은 된다니까, 해 봐."
"자넨 또 어떻게 냄새 맡고 찾아왔지?"
옆에 앉았던 상기놈이 드디어 고갤 외로 꼬고 그를 보고 물었다.
"내라고 코 없나? "
첫판의 오천은 삽시간에 획 날아갔다. 어느 놈이 먹었는지도 모르게 먹어 가고 없었다. 윤식은 다음엔 만 원을 찔렀다. 상기란 놈이 뒤에 앉았다가 옆구리를 꾹 찌른다. 그게 많이 찔렀다는 얘긴지 더 찌르라는 신호인지 그만 쉬라는 수작인지를 윤식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끝발은 당기고 있는데, 상기란 놈이 더 긴장하여 목을 열닷 발이나 빼고 윤식의 어깨를 넘어 본다. 녀석의 버릇이란 긴장하면 혀를 저무는 것이다.
삼팔 따라지였다.
일만오천 원이 삽시간에 나갔다.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다시 들었다. 화투장에 대수란 놈의 얼굴이 뻥긋하고 기어올라와 웃는가 하면 호박떡같이 펑퍼짐한 여편네의 얼굴이 떠올라와 퇘퉤 침을 뱉는 시늉도 하였다. 양곡상의 거만한 얼굴도 족제비 같은 대전 동서의 얼굴도 떠올랐다.
어쩐 셈인지 막돈 만 원에서 윤식은 도합 삼만 원의 돈이 일시 들어왔다.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돈이 제법 불어나는가 싶더니 자정이 넘어서고부터 돈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총대 조 필기가 일괄수령해서 갖고 간 수납대금 중에서 갚기로 하고 뒤에 앉은 상기에게 현찰로 십만 원을 꾼 것까지도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몽땅 날려 버리고 말았다.
십여만 원을 하룻밤에 날리고 나니 허탈도 긴장도 아니고 마냥 멍멍한 기분이 들었다. 상기도 이젠 더 꾸어 주지도 않았고 판에 끼어 주지도 않았다. 노름 뒷판에 앉아 있는 놈보다 더 열적고 숙맥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그냥 나가 버리기도 못내 아쉽고 그냥 남아서 남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는 것을 보자니 꿈만 같았다.
밤새 냉수 들이킨 것만 해도 열 사발은 되었음직한데 속은 아직도 화통 속처럼 답답했다. 누구 하나 위로하는 놈도 없고 욕하는 놈도 없다.
"당신 좀 비켜 앉지."
뒷전에 앉았는데도 대머리녀석은 아까부터 자꾸 비켜 앉으란다. 노름판에 엉겨붙어 앉았을 땐 비좁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그토록 앙탈이니 이젠 더 이상 앉아 버티기도 민망스러워졌다. 그러나 오금 펴고 발딱 일어서기가 못내 아쉽다.
"당신 안 갈텨?"
"워디로 간단 말이오?"
"아, 나가서 뭘 좀 구해 보든지. 아니면 휑 나가버리든지 좀 해 줘야 딴 사람들이 일을 볼꺼 아뇨?"
자리를 비우고 나을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노름꾼의 인정이란 게 그런거다. 돈 먹을 때 좋아하지 돈 떨어진 놈에게는 냉수 한 잔 마셔 보라는 소리 없는 세 노름꾼들 아닌가. 그렇다. 인정머리 없다고 달려들어 따귀라도 척 버리고 싶지만 또한 그럴 수도 없는 처지다. 옆에 있는 열 놈이 돈 먹자고 달려든 판이지 제 돈 잃자고 엉겨붙은 게 아닌 바에야 어느 놈을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하소연이라고 해 보았자 병신 육갑떤다는 소리밖에 더 돌아올 게 없다.
밖으로 나오니 해가 쨍마니 밝았다. 고 좁은 골방에서 꼬박 하룻밤을 새우고 밖으로 나오니 삭신이 쑤시고 뼈 마디마디마다 우두둑우두둑 고드름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이젠 집밖에 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러나 돌아갈 염치는 하룻밤 사이에 이젠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어쩌면 좋을까. 버스라도 들어온다면 그놈의 차를 타고 오입이라도 가고 싶다. 그러나 이 눈길 속을 또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 날씨 한번 쨍하고 밝았지만 윤식의 마음은 천근의 쇳덩이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수납반원 숙소 부근에서 불이야 하는 계집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이 눈밭 속에서 불이야 라니 맹랑한 소리로구나 싶어 윤식은 무심코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건 정말이었다. 바로 수납원 숙소에서 금방 물씬하고 시꺼먼 연기가 쨍한 하늘로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윤식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뛰었다, 동네의 애새끼들, 똥개들 할것 없이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집까지 달려가는 동안 연기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뭉클뭉클 기어올랐다. 집 쪽에서 남녀의 아우성소리가 찢기는 듯 들려왔다. 눈밭 속에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윤식은 아이들과 개에 어울려 숙소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수라장이었다. 불은 감정원이 들어 있는 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듯했다. 그 집에서 영업을 하던 작부들이 마당으로 기어 나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고, 두 방에 들어 있던 감정원들은 눈을 퍼다가 집에다 끼얹고 있었다.
함가는 파자맛바람으로 넋을 잃고 불길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눈밭 속에 집에 불이 났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동네는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게다가 감정원들 숙소에서 불이 일어났으니 사람들은 더욱 호기심이 일어났고 더욱 더 기승을 부리고 달려왔다.
어느새 동장이 달려와서 진화 작업에 나섰다. 우왕좌왕 질서가 없는 중에도 그 조그만 집에서 일어난 불은 차츰 꺼져 갔다. 그 바쁜 중에도 그러나 단 두 사람이 진화작업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함 석도와 춘심이었다. 그러나 함 석도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춘심은 두 입을 굳게 다물고 독기 서린 시선으로 타올라 가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고 연신 악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들 두세요. 끄긴 왜 꺼요. 활활 타서 없어져야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잡년아."
진화 작업을 지휘하던 동장의 입에서 윽설이 튀어나왔다.
"잡년이라구, 그래 난 잡년이다. 넌 잡놈 아니니? 너회들놈 잡놈 아닌 녀석들이 어디 있니? 개새끼 소새끼 다 먹는 돈을 나는 왜 못 먹니?"
"이년이 시방 잠꼬대를 하나 뭘 하나?"
"잠꼬대면 어떠니? 못 먹는 밥에 재뿌리는 게 내 취미다 왜? 난 안 되니?"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권 기자가 달려와서 춘심에게 엉겨붙어 물었다.
"불은 당신이 질렀지?"
"그래 질렀다 왜?"
"왜 방화를 했어?"
"왜 방화를 했어? 몰라서 묻나 이 똥개야?"
"이 여자 미쳤군!"
"미쳤다 이놈아, 촌놈들 돈 먹자고 이 산골까지 기어 들어온 건 너나 내나 마찬가지다, 이놈아. 넌 안 미쳤니? 왜 천장에 모아둔 돈은 쏙쏙 빼 가니?"
"돈을 빼가?"
"그래 이놈아 너도 그 돈 먹었잖니? 너만 먹고 내가 못 먹을 돈 타는 것이나 볼려고 불 한번 질러 봤다, 이놈아. 왜?"
아무리 간담이 있는 녀석이라 할지라도 튀어나오는 대로 막 줏어 씨부리는 데는 당할 장사가 없다. 춘심이가 후딱 달려들어 권가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려 하자, 질겁을 한 권가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수납장 옆 골목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불길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춘심이 입에서 또 다시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하고 전부 그녀의 주위로 몰려가서 서 있었다
"이놈의 자식들아, 뼈 부러지게 지은 농삿돈 안 처먹은 놈 있으면 이리 나와 봐, 손들어 봐. 그래도 허연 낯짝 쳐들고 체면 차리고 유식한 척하지? 그래 내가 불질렀다, 날 붙잡아 갈려면 붙잡아 봐. 그럴 권리가 있는 놈은 썩 이리 나오라구."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이 방화범에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자 춘심은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난 그래도 내 몸뚱이 주고 돈 먹으려 했다. 네놈들은 몸뚱이 밑천도 없이 순전히 입으로만 돈 먹고 살아가잖니, 안 그래요 여러분?"
불도 다 꺼지고 수납반원도 동장도 조합장도 김 영태도 함가도 권나도 지가도 이젠 화재 현장에선 보이지 않았다. 전부 어디로 간 것일까. 이발소 골방에 숨어 앉아 밤새도록 노름판을 벌이던 축들까지도 나와 서 있었더랬는데 지금은 어디로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몇 사람의 경작자들과 아이들이 춘심의 둘레에 웅기중기 서 있을 뿐이었다.
나중에사 안 일이지만, 백여만 원의 떡값이 들어온 것을 춘심은 정말 본심대로 천장 안에다 숨겨 왔었단다, 그러나 그놈의 돈이 어느 놈이 함가를 찾아올 적마다 십여만 원씩 뜯겨 나가는 것이 그녀는 공연히 마음 쓰라렸다. 물론 자신이 벌어들인 돈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도 그 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함가가 함께 살 요량이야 당초부터 하지 않았지만 수납이 끝나고 이 동네를 떠나갈 때는 적어도 십수만 원쯤은 자기에게 던져 주겠거니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놈의 돈이 찬물에 좆 줄어들 듯 하는 데는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방이 빈 사이에 얼마나 남았을까 하고 현찰을 꺼내어 확인해 봤더니 적어도 세 다발쯤은 쥐란 놈들이 갉아먹어 귀퉁이가 날아간 건 고사하고 오줌까지 갈겨서 이건 돈 뭉치가 아니라 걸레조각이 되어 있었다.
춘심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물론 제 돈이야 아니란 걸 그녀가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이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치 없는 돈이라 할지라도 쥐가 와서 오줌을 갈겨 놓다니. 천장을 뚫고 거기다 숨길 적엔 이런 꼴이 되리라곤 예상할 수 없었더랬다.
이놈 저놈 제사떡 돌리듯 입만 벙긋하면 몇 다발씩 건네주는 이 돈이란 것이 춘심은 순간 원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돈 다발을 앞에 놓고 잠시 넋을 잃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그녀는 도대체 이런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이 산골에까지 기어 들어와서 웃음 팔고 몸 팔고 지랄하는구나 싶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쥐도 먹는돈! 갑자기 그녀는 이 집구석에 불이라도 질러 버리고싶은 충동이 불끈 솟아 올랐다. 돈을 그대로 놔두고 춘심은 자신도 모르게 집에 불을 질러 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춘심은 눈밭 위에 엎으러져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동네 부인들이 멀찌감치 팔짱을 끼고 서서 걸레조각같이 퍼져 자라진 춘심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도대체 집에 불을 지른 이 대담한 여자를 잡아갈 사람이 없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간섭하고 질서를 운위해 왔건만 집에다 고의로 불을 지른 갈보 하나를 잡아갈 사람이 아직은 이 추현동엔 없는가 보았다. 갑자기, 그랬다. 갑자기 윤식은 눈밭 위에 엎으러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 불타다 남은 집터 위로 끌고 올라가 강간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 여기서 뭘 허요?"
멀리서 여편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여편네가 수건을 뒤집어쓴 채 바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윤식은 움칠 놀랐다.
'겨에 갑시다. "
수납을 마치고 사흘 동안이나 집구석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내를 찾아 여편네는 기어이 수납장까지 찾아나선 것이고 마침 화재 현장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그러나 짜 놓은 걸레조각같이 비쩍 마른 남편을 발견한 것이다.
"당신 어째 왔어?"
아직도 팔짱을 낀 채 여편네에게 이끌리어 나오면서 윤식은 볼멘 소리로 물었다.
"당신 찾으러 왔지 어째 오긴 워째 왔겄소?"
"내가 여기 있는 줄 워떻게 알었어?"
"당신이야 워딜 가던 내가 못 찾을 성싶소?"
"난 집에 못 가."
"왜 못 가요?"
"난 집에 갈 면목 없어."
"그라문 이 못난 여편네 버리고 대수도 버리고 오입이라도 갈랑가요?"
"난 또 실패했어. 노름해서 돈 잃고 사기 당해 거지 되었어."
"거지라도 좋고 문뎅이라도 좋소. 당신 아니면 또 누가 내년 농사 짓겄소? 짓다 보면 빚 갚을 날 있겄지."
"당신 정말이여?"
"그럼 내가 당신한테 사기치겄소, 어서 가서 옷 갈아입고, 동태 한 마리 샀응께 국이나 끓여서 우리 세 식구 몸이나 풉시다. 내년 농사할 준비나 또 뼈 부서지게 할려면 겨울 동안 몸이나 풀어야 할 것 아녀."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윤식은 상어 뱃가죽같이 누르딩딩한 여편네의 한 쪽 볼따구니를 마냥 쳐다보고 서 있다.
"뭘 해요. 어서 가잖코."
"당신 수납소에 언제 왔소? "
"벌써 아침에 왔어요."
"사뭇 날 찾아다녔소? "
"그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발소 노름방에 처박혀 있다 캅디다."
"그럴 왜 찾아오잖코."
"남정네들이 하는 일에 기집이 끼어 들면 재수 없다지 않소? 그래서 담배집 앞에서 당신 거기서 나오도록 기다렸소."
이발소엔 또 동네 놈팽이들이 모여 있었다.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어떻게 기다려 너퍼서 남버나인) 모래 소리에 이발소가 무너질 것 같다.
"저게 무신 소리요?"
여편네가 물었다.
"저거? 개구리가 달보고 짖는 소리여. 요샌 개도 달보고 짖는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여?"
윤식은 대답하지 않고, 아내의 성긴 손을 잡았다. 눈밭에 내린 햇볕이 찢어질 듯하다. 눈 쌓인 개천을 건너자면 여편네를 꼭 잡아야 했다.
김주영(1939- )
경북 청송 출생. 서라벌 예대 졸업. 1971년 <월간문학>지에 <휴면기>가 당선되어 등단. 그는 평범한 삶을 민족사의 비극과 관련시켜 보여 주고 있으며, 경험된 자기 세계에 대한 동경과 애정을 갖고 집착하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머저리에게 축배를>, <도둑 견습>, <천둥 소리>, <목마 위의 여자>, <과외 수업>, <천궁의 칼>, <붉은 노을>, <객주>, <외촌장 기행>, <겨울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