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처음으로 바둑을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정도쯤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거의 70년대 초반이었다. 기본적인 내용을 알게 되었고 규칙을 터득해 나갔다. 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에 흥미를 느꼈었다. 바둑도 있었고 장기도 있었다. 동네 아래쪽에 이발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바둑의 보급소였다. 조그만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항상 바둑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친선으로 두는 것도 두는 것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기도 벌어졌다. 항상 학교를 다녀오는 길에 들러 어깨너머로 구경을 하곤 했었다. 규칙은 방당 얼마였고 최고는 만방인 경우였다. 그때 당시 들었던 얘기로는 아무것도 모르던 초보 바둑을 두려던 이가 5만 원가량을 잃게 되니 5급 정도의 기력이 되었다고 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수준은 대부분이 초보에서 중급 정도의 수준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두뇌 발달이 잘 되었던 탓인지 쉽게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동네 어른들을 차례차례 격파해 나가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몇 점을 놓고 두는 접바둑에서 시작하지만 조금 지나면 실력이 늘어 금세 역전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평상에서의 대국 특히 내기 대국에서는 훈수라든가 물러준다거나, 무분별하게 대국에 개입하는 등 일체의 개입이 용납되질 않았고, 혹여 잘못 훈수했다가는 시빗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프로대국처럼 초읽기를 하고 덤을 주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룰의 공정성은 지켜지고 있었다. 먹여치는 것 등도 아직 익숙해지기 전의 일이다. 대충 어림잡아 기력으로 치자면 10급 내외의 수준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그 평상에 초청대국을 하러 온 이가 있었다. 기력으로 1-2급 수준이었던 것 같았다. 제법 소문도나고 웬만큼 기력이 되었다고 해서는 고수와 한번 대국을 해보라는 권유가 들어 왔다. 그래서는 이 양반과 대국을 벌이게 되었다. 13점 접바둑이었다. 바둑판이 새까맣게 되도록 돌을 깔고서 호기롭게 열중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고나자 흑대마가 다죽어 있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고수의 위용을 새삼스럽게 느꼈고 실력이 부족함을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셈이었다. 동기 또래 애들은 바둑을 두는 애들이 없었고, 보통 2~6세 정도의 연배 형들과 바둑을 겨루었다. 너댓 명 정도의 비슷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에는 이보다 더한 오락거리가 없었다. 틈만 나면 대국을 벌였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일본에 계신 친척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오시면 꼭 바둑을 두어야 했다. 바둑판을 앞에 놓고 바둑을 두고 있으면 맛있는 간식거리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어린 마음에는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초반에는 항상 흑의 페이스였지만 몇차례 두다 보면 막판에 밀리기 일쑤였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그렇게 어울려 다니며 바둑에 빠져 있기도 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거의 바둑을 접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같이 대국을 즐겼던 이들은 실력이 괄목상대(刮目相對)해져서 1급 수준까지 이르렀다. 대학에 들어간 후 한 두 차례 대국을 가져
본 적이 있었는데 실력 차가 너무 커 상대가 되질 못했다. 대학 시절에는 한 선배와 대국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집에 초청해서는 대국을 했는데 밤을 꼬박 새워 두었다. 7판을 두었는데 처음 세 판을 내리졌었고 마지막 4판에서 이겼다. 그렇게 두고 나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대국을 한 기이한 체험을 한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신선놀음(바둑)에 도끼자루가 썩는지를 모른다.”고 했었다. 초등학교 동기생과도 우연히 학교 앞에서 만나 기원을 가서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빅이 되었었다. 군에 가서 자대 배치를 받고 보니 중대장이 바둑이 수준급이었다. 휴게실에서 한 번씩 대국할 기회를 가졌었다. 중대장의 승부욕은 대단했다. 자
신이 이길 때까지 두었고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사회에 나오게 되니 바둑에 취미가 맞아 같이 즐길 만한 이는 없었다. 직장 내의 바둑대회에도 참여해서 대국을 해보기도 했지만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장기교육을 받는 중에는 점심과 휴식 시간 등에 대국을 즐기기도 하고 관전을 즐기기도 했었다. 어떤 이는 낚시와 바둑을 두는 것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없다고 힐난(詰難)하기도 하는데, 바둑은 그야말로 두뇌 스포츠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바둑이 시범 종목으로 채택이 되어 우리나라가 금메달 4개를 싹쓸이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었다. 어떤 바둑 마니아의 얘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대단하게 대국을 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군에 가서 자대 배치를 받고 보니 중대장이 바둑이 수준급이었다. 휴게실에서 한 번씩 대국할 기회를 가졌었다. 중대장의 승부욕은 대단했다. 자신이 이길 때까지 두었고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사회에 나오게 되니 바둑에 취미가 맞아 같이 즐길 만한 이는 없었다. 직장 내의 바둑대회에도 참여해서 대국을 해보기도 했지만 신통한 결과는 없었다. 장기교육을 받는 중에는 점심과 휴식 시간 등에 대국을 즐기기도 하고 관전을 즐기기도 했었다. 어떤 이는 낚시와 바둑을 두는 것만큼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없다고 힐난(詰難)하기도 하는데, 바둑은 그야말로 두뇌 스포츠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바둑이 시범 종목으로 채택이 되어 우리나라가 금메달 4개를 싹쓸이 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었다. 어떤 바둑매니아의 얘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대단하게 대국을 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고수가 번갈아가며 집을 방문해서 대국을 벌인다고 한다. 아마 7단 정도의 최정점에 있는 실력으로 용호쌍박(龍虎雙拍)이요 호각지세(互角之勢)이다보니 상금 5천 원이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끝이 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어떻게 좀 가르쳐볼까 하고 두어보기도 하지만 금방 싫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결국은 인터넷 바둑으로 대국을 못하는 설움을 달랠 수밖에 방법이 없다. 간간이 바둑을 두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원을 찾아 들어가 한 번씩 둘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사촌들과도 대부분 한 수씩 대국을 하기도 했었는데 거의가 한 수 아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실력이 부쩍 늘어난 상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무료하고 단조로운 시간이 지속할 경우에는 한 번씩 찾아 들어가 대국을 해보면 나날이 늘어나는 대국자들의 수준과 묘수에 대해 깜짝 놀라기도 한다. 얼마전 혜성처럼 나타난 신예기사가 있었는데 이 녀석이 고교동창생의 둘째아들이라도했다. 케이블바둑TV에서 간간이 녀석의 대국을 감상하고 있다. 바둑에 매료(魅了)되어 있다보면 참으로 정신수양이 되고 차분해진다. 적과의 전투이지만 그 속에서 내심으로 자신의 과욕이 화를 부르기도 하고 소탐대실(小貪大失), 다시말해 적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다. 바둑은 요순 시절에 자신의 아들 단주의 지능을 일깨우기 위해 바둑을 가르친 것에서 기원을 잡고 있다. 바둑은 인생의축소판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고교시절 한 선생님께서는 바둑을 좋아하셨는데 꼭 조치훈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바둑의 대세가 일본이었는데 그 속에서 조치훈의 활약상은 정말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휠체어 대국은 그가 얼마나 승부를 중요시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둔다.’는 어록을 남기기도했다. 바둑을 두면서 여러 사람과의 좋은 인연도 많이 맺었었고, 하나의 취미로서 훌륭한 역할을 해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요즘도 무료해지거나 한가해질 때면 한 번씩 오로 바둑에 들어가 대국을 하다 보면 아직도 쟁쟁한 실력가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