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의 고귀한 책무
주지하다시피 지도층의 고귀한 책무(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것은 많이 회자(膾炙)된 바 있고 심심찮은 이슈로 부각되어 지는 사안이다. 통상 사회지도층의 높은 도덕적 의무를 일컫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그 유명한 일본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로마역사 천년을 이어오게 한 원동력의 하나로 손꼽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제일 먼저 솔선수범하는 지도층의 헌신하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에 로마가 천 여 년을 지탱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전쟁의 참여, 개인이 건축한 공공건물의 국가 헌납, 기부 등 그러한 것이 해당된다. 로마시민이나 전 국민이 지도자를 존경하게 되고 따르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63년 가쿠슈인대학을
졸업했다. ‘역사는 흥미로운 이야기이자 최대의 오락’이라고 주장해 온 시오노는 1980년대 들어 신의 대리인이라기보다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교황의 모습을 그린 <신의 대리인>,마키아벨리의 삶을 현미경을 들이대듯이 밀착하여 재현해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을 잇달아 펴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올랐다. 그가 펴낸 대부분의 책들은 출간 당일 1만 부 이상 팔려나가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근자에 총 15권의 <로마인 이야기>를 썼고 현재는 <십자군 이야기>를 내고 있다. 그러면 로마의 천 년 지속의 원동력이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실현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를 규명해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하고 과거 역사는 어떠했는가를 통해 우리가 건강한 사회, 선진화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칼레의 시민’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현실세계에 있어서는 멋지게 조각된 로댕의 작품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백년전쟁이 한창이었던 1347년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중이었다.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 해안의 조그만 소도시 칼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계속적으로 칼레시를 공격했다. 11개월간의 저항을 했으나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끊임없는 저항과 항전에 화가 날대로 난 영국왕은 칼레시민을 모두 죽일 듯이 분노하게 된다. 측근의 만류로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측근들은 그랬다. “지금은 전쟁 초기로 우리가 성을 계속 함락시켜 나가야 하는데 성을 함락시킬 때마다 성주민을 몰살시킨다는 소문이 나게 되면 모든 성들이 최후의 일인이 죽을 때까지 죽기 살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몰살시켜서는 안됩니다.”그러자 왕은 분을 삭이고 항복조건을 제안하게 된다. 가장 간명한 복장을 갖추고 칼레의 대표 6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허나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모든시민들은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 관료, 상류층 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기로한다. 그리고 조금 있다 5명이 줄줄이 나섰다. 장데르(법률가), 자끄 드 위쌍(사업가), 피에르 드 위쌍(사촌), 장 드 피엥스, 앙드레 당드네(우는 시민)이었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왕을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만들었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1884년 칼레시의 요청을 받아 1894년 제막되었고 인물의 영웅적인 면보다는 갈등과 고난에 찬 인간의 내면을 조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법으로 12개의 판본(CAST)만 만들도록 제한했고 11번 째 판본은 1989년 제작되어 뉴욕 메트로박물관에 전시되고 마지막 12번째 판본 1995년 제작되어 한국 삼성미술관에 전시되어있다. 비틀린 팔, 비탄에 빠진 채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죽음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 그리고 심지어는 “나는 이 작품에 받침대를 원하지 않는다. 칼레시 한복판 바닥 돌에 고정되길 바란다.” 결국 그는 ‘비참한 모습의 영웅 등’을 맨 땅 위에 놓는 데 성공한다.’ 만약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인물들의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높은 곳에 두었다면 영웅성을 찬양함으로서 진실을 잊게 했을 것이다. 애국주의나 영웅주의 대신 사실성 속의 진실을 선택한 로댕, 추상적인 가치를 강요하기보
다는 칼레 시민을 위한 값진 희생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희생이란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타인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리라. 민주주의에 따르면 너도 한 표, 나도 한 표해서 투표로 뽑거나 시민들이 시민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해 이미 뽑힌 시장에게 처형대로 가도록 요구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에 따르면 세금이나 재산 조사를 통해 파악한 부자에게 그 책임을 부담하도록 했겠지만 오늘날의 알량한 부자라면 사전에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뇌물을 주고 재산 분할이나 주소 이전 등의 갖은 술수로 희생을 피하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칼레의 시민이야기는 한편으론 철저히 비민주적이며 비자본주의적이다. 그들은 단순한 사회구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상대적으로 많은 부를 소유했고 많은 권한이 있으며 많은 것을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자로 인식한 주체적인 책임의식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헌신이고 희생이었다. 누구나 찬란한 영광과 찬양을 기대하며 자신의 일부를 잠시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을 위해 죽음과 고통, 비탄과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바쳤다. 현대에는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고자 어쩔 수 없이 감성을 위한 감성, 감동을 위한 감동이 충만한 시대를 살아간다. 사람들에게는 그런 감성과 감동에 별로 마음이 동하지 않나보다. 그런 건 오래 가지도 않을 뿐더러 진실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진정 역사에 남고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실 혹은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힘이다. 우리는 진실에서 도피하여 자신에 얼마나 많이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렇게 장식된 것들에 미혹된 채 살아가고 있는가.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 되지 못한 자신을 은폐하기 위하여 얼마나 현란한 것들로 포장하고 있는가. 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여 얼마나 많은 개인과 사회의 역사를 외면해 왔는가. 칼레시가 5세기가 지난 후에 로댕의 작품을 일부 시민들의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용하게 되기까지에는 로댕의 진심을 이해하기 위해 그만한 세월이 필요로 했던 것이다. 이 일은 그들이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 이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이라 할 만한 사회지도층의 희생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존 F. 케네디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그는 병약한 몸이
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간청에 힘입어 해군에 입대하게 되고 태평양
전쟁에까지 참전하게 된다. 참전도 참전이지만 그 전투의 와중에 부하들
을구출하기위해전심전력을다했던것이다.그는진정한전쟁영웅이었고
지도자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훌륭히 수행해 내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덕
목으로 필요한 부분을 그렇게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런 반면에 또 한명
의 케네디가의 일원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있다. 이 사람은 그런 부분
에선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상원의원으로 만족해야했다. 1969. 7.18 늦은
밤 매사추세츠주 채퍼퀴딕 섬에서는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에드워드 케네디가 여비서 메리조 코페즈
니를 태우고 차를 몰고 가다가 다리 난간을 들이 받고 물 속에 추락한 사
고였다. 케네디 의원은 차문을 열고 헤엄쳐 나와 극적으로 살았으나 여비
서는 차 속에서 숨지고 말았다. 문제는 케네디 의원의 처신이었다. 비서를
남겨둔 채 홀로 살아 남은 데다 사건을 쉬쉬하기 위해 늑장신고를 한 것이
도덕성의 흠결로 부각되었다. 8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나오
자 사람들은 절대로 안 될 일이라고 보이콧을 해버리고 말았다. 상원의원
으로서는 괜찮을지 모르나 대통령으로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 미국의 시
민의식이었던 것이다.
왜우리나라에는이렇게노블레스오블리제를몸소실천하신분들이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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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을까 하며 되돌아보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불모
로 이역만리까지 가서 고초를 겪고 오신 이도 있었고
경주의 최부자는 사
방 백 리에 굶어죽는 자가 없도록 자선을 베풀고 선을
쌓기도 했다고 전해
진다. 지금까지 경주고택으로 보존되어 있는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 중 하
나에 들어 있는 적선의 예도 유명하다. 사방 백 리
내에 굶어죽는 이가 없
게 하라는 선대의 가르침을 쫓아 성실하고 극진하게
과객을 대접하고 우
대한 결과 300년이 넘게 대대손손 부를 누리고 복을
누린 명문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는
것은 하루아침의 일
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
적선을 했기에 가능한
복이었을 것이다.
또한평생토록헌신적으로모은전재산을사회에헌
납한유한양행의유
일한 회장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표상이라
할 만할 것이다. 어찌
보면 모두가 자기 앞의 이득에만 눈이 벌겋게 되어
있는 세상에서 보다 멀
리 세상을 내다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적으로 내던지
는 의인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인이
아니라면 사회복지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는 자세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전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 질 수는 없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그런 분위기나 풍토 내지는 그런 문화의 전통을 가질
수 있도록 해나가야
하는 것이 선진강국으로 가는데 필수 요소임을 우리
모두가 인식할 필요
가있다.유대인의경우에는가장빠르게현금화할수있
고처분할수있다
고 해서 장사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귀금속상이나 배추장사 등
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헐값에 팔아넘기고 조국의
부름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 전쟁에 참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갑부들이 미국정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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