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 1 / 고립적 개인주의가 만든 나라
사람마다 세계관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필자의 경우, LA에서 연수한 경험과 도쿄 직장생활이 그 예다.
LA에서 지내는 동안 나의 세계관은 상당 부분 무너져내렸다. 한국을 중심으로 바라본 세상과 미국을 중심으로 바라본 세상이 달랐다. 세계관을 재건축했던 경험은 손에 꼽히는 경험 중 하나가 되었고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나는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바라본 세상과 한국에 호기심이 생겼고 다시 한번 세계관을 깨보고 싶어졌다.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다.
세상은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일본 역시 배울 것이 많았다. 허나, 2년간의 직장생활 후 더 이상 일본에서 살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성장동력이 떨어진 일본은 19세기와 20세기에 만들어놓은 관성으로 굴러가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 어떤 특성들이 과거의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특성들은 지금의 일본에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지금부터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그런 개인적인 결과물이다.
첫 번째로 지금의 일본을 만든 특성 중 하나인 '개인주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개인주의에 관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왼쪽)과 악수하는 축구선수 티에리 앙리(오른쪽)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 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中 -
근현대에 개인주의를 가치로 했던 나라들에서 철학과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창조물과 기술과 이념이 발명 혹은 개발됐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인주의는 중요한 가치관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한 사람의 잠재력을 끝까지 발휘하는 데에 개인주의는 중요하며, 평등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권리를 이야기하는 데에도 개인주의의 가치는 유효하다.
일본은 어떨까?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기어트 홉스테드(Geert Hofstede)는 각 나라의 개인주의 지수를 연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의 개인주의 지수는 91점, 프랑스 71점, 영국 89점이었다. 일본은 46점이고 한국은 18점이 나왔다. 100점에 가까울수록 개인주의 정도가 강함을 나타낸다.
2010년 인제대학교 디자인대학 연명흠 교수는 '중국, 일본, 네덜란드, 한국의 개인주의 감성 비교' 연구에서 각 나라의 개인주의 지수를 조사했다. 결과는 네덜란드(2.98)와 일본(2.94)이 거의 동일한 점수로 개인주의 지수가 가장 높게 나왔고, 그다음 중국(2.82) 한국(2.37) 순이었다. 괄호의 숫자는 각 나라의 개인주의 지수이며 만점인 4점에 가까울수록 개인주의가 강한 걸 의미한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일본은 오리지널 G5로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과 함께 20세기를 선도했다. 일본은 구미 선진국과는 또 다른 개인주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에는 없는 개인주의 문화가 있다. 일본식 개인주의의 근원과 특성 그리고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의 일본식 개인주의의 의미를 이야기해보자.
2. 일본 개인주의 문화의 근원
1) 섬나라의 계급 구조
과거 일본의 각 지방에는 다이묘(大名, 일본 지방영주)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쇼군에게는 절대충성하지만 자신의 지역에서는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이묘는 사무라이를 고용했다. 과거 제도가 없었던 일본에서 사무라이들은 문관과 무관의 역할을 겸했다. 이들은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백성이 있으면 바로 죽여버려도 죄가 되지 않았다. 사무라이 문화 속에서 일반 백성들은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툼이 생기면 목숨이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한 것은 일본이 섬나라인 것과도 관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 간에 갈등이 생기면 떠날 곳이 없다. 더불어,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였던 쇼군과 다이묘는 백성들에게 이동의 자유를 주지 않았다. 다이묘가 지배하는 번(藩, 일본의 옛 행정구역으로 미국의 주보다 자치개념이 훨씬 강한 준국가의 개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섬나라에서, 사무라이들의 지배 하에, 제한된 지역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과 갈등을 최소화해야 했다. 타인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자신도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야 했다. 언제 목이 달이날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긴장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상존하는 긴장감 속에서 개인과 개인은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천황의 존재도 일본식 개인주의의 한 원인이다. 일본의 천황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권없는 상징임에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 연도를 이야기할 때도 '서기'보다 '연호'를 쓴다. '2020년'이라고 하지 않고, 지난해(2019년) 5월 1일 새로운 천황의 즉위를 기준으로 '레이와(令和)2년'이라고 한다. 외국인 입장에서 행정업무를 처리할 때나 과거 기록을 찾아볼 때 번거롭다. 일본에서 크리스마스나 부처님 오신 날은 휴일이 아니지만 역사 속 여러 천황의 생일은 휴일이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최고권력자였던 쇼군을 폐위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권력관계를 재정리하였다.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새로운 지배질서를 위해 천황에 신화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사실, 대외적으론 신분제 폐지였지만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이 신분제를 재정립한것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지유신 이래로 고대 제정일치 사회처럼 천황은 종교와 정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게 오죽 전근대적이면 미국이 2차 세계대전 항복선언서에 '천황은 (신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다'라는 문구를 넣었을까? 아래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한국보다 일본은 인간관계가 개인주의적이며 수평적인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천황이다. 천황이 위에 있기 때문에 천황과 총리로 상징되는 소수 귀족을 제외한 국민들은 모두 동등한 피지배층인 것이다.
2) 일본의 개인주의는 '고립주의'다
'모든 것을 일정한 장소에 둔다' 이것은 일본의 좌우명이다.
[국화와 칼] 中 -
개인주의를 '이익과 의지 개인주의'와 '타인무관심 개인주의'로 나눈 연구가 있다. 이익과 의지 개인주의의 예는 네덜란드고, 타인무관심 개인주의의 예는 일본이다. 네덜란드 같은 경우, 개인주의 속에서도 노동조합에 관한 의식과 제도나 타인들을 돕는 기부문화에 있어 한국, 중국, 일본보다 앞서 있다. 자신의 권리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인권이나 권리도 존중한다.
한편 일본은 타인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을 선호하는 데에 있어서 최고점을 기록한다. 일본의 전철과 버스는 무척 조용하다.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 조용한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나도 당신에게 피해를 안 줄 테니, 당신도 나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말라'는 것이다. 이게 일본식 개인주의다. 관련한 사회현상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무연사회(인간관계를 맺지 않는 사회를 뜻하는 일본 신조어), 고독사 등이 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메커니즘을 의미한다면 도쿄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섬세하게 튜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도쿄에선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고 주의깊게 조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모든 사물이 마치 행성들이 제 궤도를 따라 공전하듯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 [김영하 여행자 도쿄] 中 -
일본은 위에도 말했듯이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계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이나 프랑스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경험하지 않은 일본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일정한 장소에 둔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가치관과도 연관이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당시 지배층은 불교를 배격하고 '국가신도(国家神道, State Shinto)'라 불리는 일본종교를 재정립했다. 천황을 숭배와 존경의 위치에 두는 가운데, '모든 것을 일정한 장소에 둔다'는 생각을 국민 개개인의 머리에 심어두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일본의 질서의식이고 '대동아공영권'이다. 즉, '아시아 각국은 일본 아래에 있어야 하며, 서구세력에 대항하여 우리 일본이 너희들 각자의 위치를 지켜주겠다'는 것이 일본의 가치관이다. 이것은 그들의 허울뿐인 명분이 아니라 뿌리 깊은 사고의 반영인 것이다.
일상에 긴장감을 유지한 채, 타인에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 특성을 가진 개인주의가 형성된 데에는 자연재해가 많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도쿄의 회사에 다닐 때 일이다. 3월의 어느 날 소나기가 내렸다. 그냥 소나기인가 보다 했는데 바람이 정말 매서웠다. 태풍도 아니다. 그냥 부는 바람이 매서워서 길에 우산이 날아다녔다. 왜 일본인들 집에 그렇게 투명우산이 많이 있는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일본에선 장마도 보통 한 달 반에서 두 달이다. 태풍도 빈번하다. 지진도 많다. 그렇게 자연재해를 몇 번 느끼다 보니, 무언가에 항상 조아리면서 어느 정도는 긴장하며 살 수밖에 없겠다 생각했다. 자연재해는 대책이 없다.
일본의 역사깊은 계층구조, 섬나라적 특성, 자연환경이 결합하여 개개인들은 긴장감을 유지한 채 살게 되었고, 그 긴장감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타인들이 자신을 도와줬을 때에도 고맙다는 말을 하는 대신 '스미마셍(죄송합니다)'이라고 한다. '당신이 날 도움으로써 당신에게 폐를 끼쳤다'는 것이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도 '스미마셍'이라 한다. 사람 간 교류의 다양한 측면이 그들에게는 '상대방에게 폐를 끼친 것'이 된다. 이렇게 그들은 일상속에 긴장감을 유지한 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각자의 위치에 고립되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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