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 2 : 오마카세 민주주의가 만든 나라
고3 때 독서실에서 PMP(portable media player)로 [윤리와 사상]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강사가 물었다.
"민주주의 반대말이 뭔지 아~느냐?"
사회주의를 떠올렸다. 필자 같이 생각하는 학생이 익숙하다는 듯 강사가 말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란다.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란다. 이것들아..."
1. 민주주의의 쓸모
2019년 11월 13일 한양대에서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 학생 10여 명과
이를 반대하는 중국인 유학생 50여 명이 대치했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모든 정치제도를 제외하면 민주주의는 가장 나쁜 정치 형태다(It has been said that the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e others that have been tried).
- 前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경제질서의 세계화(globalization)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하지만 주요 선진국들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투쟁한다.
우리는 가장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국가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거기에 적합한 제도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이상한 사람이 권력을 잡아도 나쁜 짓을 많이 하지는 못하게 하는데 적합한 제도다. 20세기 후반 오랜 독재시절과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의 촛불혁명을 통해 한국인들은 독재와 민주주의를 몸소 경험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산하 EIU(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서는 매년 각국의 민주주의 지수를 조사 발표한다. 2019년에 한국은 8.00점으로 23위를 기록했다. 아시아 국가 중 1위다. 탄핵 같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권이 이양될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많지 않다. 아직 개혁되어야 할 영역들이 많지만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여기까지 잘 온 듯하다.
아시아 민주주의 짬밥왕 일본은?
민주주의 지표에서 일본은 7.99점으로 한국 바로 뒤인 24위다. 한국과 일본 모두 0.01~0.02점 차이로 분류상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다. 민주주의 역사가 훨씬 긴 미국이 25위인 걸 감안하면 두 나라 모두 썩 괜찮은 민주주의를 행하고 있다(참고로 2017년 한국 20위 / 일본 23위, 2018년에는 한국 21위 / 일본 22위에 올랐다).
일본 순위를 보고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것 같다. ‘선진국이자 한국보다 긴 세월 민주주의를 행했던 나라가 겨우 24위라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자민당 일당독재에, 선진국들 중에 가장 우경화된 나라가 한국과 동급이라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자라난 그들만의 개인주의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민주주의 또한 문화와 역사의 맥락 속에서 독특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자라왔다. 누군가는 그걸 '가부장적 민주주의', 또 누군가는 '도금된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필자는 피, 땀, 눈물없는 민주주의라 일컫고 싶다. 무언가에 발목이 잡힌 듯 일본의 민주주의는 그대로 멈춰 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예전으로 역행하는 느낌마저 준다. 그 속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 일본 민주주의 근원 ; 피·땀·눈물 없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경제적 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자신의 권리 신장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 있다. 가난했던 한국도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염원하던 민주주의를 이루게 된다.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한국보다 100년을 앞서 산업화를 시작했고 1800년대 말부터 의회를 만드는 등 민주주의를 일찍부터 학습했다. 현재의 형태를 띤 민주주의는 한국보다 40년이 빠른 1947년에 이뤘다. 그런데 두 나라의 민주주의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차이가 있다.
한국, 미국, 프랑스 등은 시민 개개인이 피, 땀, 눈물을 흘려 민주주의를 성취했다.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갖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다. 일본에는 그런 역사가 없다. 1867년 메이지 유신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듯 1947년 민주화 또한 미국에 의해 피동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피, 땀, 눈물을 흘린 건 전쟁이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에서 분명히 일본인들은 피, 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천황과 천황을 옹위하는 귀족들, 군인들을 위한 전쟁이었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
- 일본국 헌법(1947년 신헌법) 제1조
패전 후 일본은 1952년까지 미국이 점령했다(오키나와는 1972년까지 점령했다). 미국의 점령하에서 1946년 천황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선언해야 했으며 1947년 일본은 미국인들이 만든 신헌법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시작했다.
일본에는 1890년에 메이지헌법(大日本帝国憲法, 구헌법) 때부터 제국의회가 존재했다. 귀족원(상원)과 중의원(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였다. 다만, 이 때는 입법권이 천황의 권한에 속했으며, (의결을 거치지 않고는 법률이 성립할 수 없는) 제국의회는 단지 천황의 협찬기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참고로 귀족원의 초대 의장은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다)
다이쇼 천황 통치시기(1912~1926)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 Taisho Democracy)’라고 해서 사회 각층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보통선거권 도입, 정당정치의 확립, 군부의 정치개입 배제 등 민주적 개혁을 시도한 흐름이다.
다이쇼 천황이 병약했고 천황의 문고리였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원로(元老)들이 사망하자 권력축이 점차 의회로 넘어오는 듯 했다. 그러나 쇼와시대(昭和時代, 1926~1989)가 되어 1929년 경제대공황이 발생하고 1931년 일본 군인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1932년 만주국을 수립하는 등 군국주의가 대두되었다. 권력이 군인들에게 넘어가자 민주주의의 흐름은 약화되었다.
그 뒤 일본 군부는 산업규모가 일본보다 10배 큰 미국과 무모한 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고 패했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지금의 헌법과 민주주의가 부여되었다.
패전 후 일본에서 최대 쟁점은 '미국이 일본을 떠나고 난 뒤 일본의 방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참혹한 패전 경험 속에서 방위문제에 대해 당시 세 개의 정책노선이 경쟁을 했다. 하나는 사회당의 ‘비무장•중립외교’ 노선, 둘째는 민주당의 ‘자주개헌•재군비’ 노선, 셋째는 자유당의 ‘미일동맹’ 노선이다.
1947년 신헌법하에서 치뤄진 최초의 선거에서 사회당은 중의원 의석수 제1당으로 부상했다. 사회당은 보수적 성격의 민주당, 국민협동당과 연합하여 중도성격의 정부를 출범했다. 그런데 중도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사회당 내의 좌파 세력이 배제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당 좌우파 간(間)의 분열이 생겼다. 준비되지 않은 채 획득한 제1당의 지위와 좌우파의 분열 속에서 사회당은 국민들이 바라던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결과 1949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하여 정권을 차지했다.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사회당 세력은 점차 다시 지지세를 올리기 시작했고 정권 획득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감이 생긴 사회당 좌우파는 평화헌법 유지와 미•일 안전보장조약 강화 반대를 내걸고 1955년 10월 합당했다. 그런데 이것이 1955년 11월 양대 보수세력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촉발했고 소위 ‘55년 체제’와 자민당의 시작을 가져왔다. 물론 사회당 합당이 자민당 탄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맞으나, 1949년 자유당 집권부터 이미 일본 우파는 의석 다수를 차지해왔다.
1950년대 세계는 반공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 점철되던 시기이다. 자유민주진영의의 패권국가 미국은 공산화되는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일본의 공산주의와 노동운동 세력을 억누르고 보수집단이 권력을 잡고 유지하도록 큰 힘을 제공했다. A급 전범(戰犯)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등이 다시 세력을 잡는 ‘역코스(reverse course)’가 이루어졌다.
미국은 또, 유럽에 마셜플랜(유럽 부흥 계획, European Recovery Program)을 행했던 것처럼 일본에도 경제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했다.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데 있어서 일본을 최후의 보루(스타크래프트로 말하면 앞마당 멀티기지)로 생각했다. 그 후 지금까지 2차례(1993년~1994년, 2009년~2012년) 짧게 실권한 적이 있지만 자민당은 때에 따라 우경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다.
3. 왜 자민당만 장기집권 하는가
1) 그들의 오랜 악순환; 족의원(族議員)
중임제 미국 대선에서 현(現) 대통령이 연임을 성공할 때와 실패할 때의 차이를 조사한 연구가 있다. 답은 하나였다. 경제 성장이다. 대부분의 경우 기존 대통령의 경제 성과가 좋으면 연임에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다. 그래서 지미 카터가 실패했고 아버지 부시가 실패했다. 아버지 부시의 부진한 경제성과를 공격하기 위해 클린턴이 만든 문구는 유명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그만큼 경제성과는 정권유지에 핵심이다.
한국의 한강의 기적,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처럼 일본에도 고도경제성장(高度経済成長)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특수와 더불어 산업의 발전에 따른 엄청난 경제성장이었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 세계 경제규모 2위이자, 미국의 뺨따구를 때릴 정도가 됐다(1988년 세계 100대 기업 중 일본기업이 53개였다). 자민당 정권은 지지세가 안정적이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1990년대 경제 거품이 꺼졌을 때는 왜 자민당이 계속 집권했을까? 90년대에 전세계 공산권이 몰락하던 시기에 일본의 오랜 야당, 사회당 세력도 몰락한 것이 한 원인이다. 신자유주의의 흐름도 자민당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오랜 세월 동안 자민당이 집권하면서, 지역구마다 매우 촘촘하게 유착관계를 형성해온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자민당 정권이 자민당 정권을 낳는' 구조가 이미 고착화되었다.
사이토 준의 저서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의 정치경제학]에서는 일본 자민당과 지역 주민들의 유착관계를 ‘게임이론’을 들어 설명한다. 게임이론의 예로는 ‘죄수의 딜레마'가 대표적이다.
두 죄수 중에 한 명이 자백을 하면 자백한 사람에겐 가벼운 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한 사람에겐 무거운 형이 선고된다. 둘 다 자백하는 경우 둘 다 무거운 형이 선고된다. 둘 다 자백하지 않은 경우는 둘 모두에게 무죄(혹은 가벼운 형)가 선고된다.
내가 죄수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자백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어떠한 선택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자백하고 내가 자백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중형을 피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백을 해야 하는 상황이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오랜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 두 사람에게 반복된다면 어떻게 될까. 둘 모두 자백을 하지 않는다. 그게 이득이란 걸 학습한다.
이 게임이론이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에 어떻게 적용될까? 자민당 정권과 유권자 측은 서로를 돕는 게 이득이란 걸 오랜 세월 학습했다. 자민당 정권은 지속적으로 지역민들에게 일자리나 사회인프라 등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다.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쟁자에 비해 매우 수월하게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지역구 개인후원회를 통해 감시체제를 유지하고 공공정책을 조작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한다. 혜택을 받은 지역 주민들은 자민당에 투표한다. 일본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이익유도정치(또는 이익배분정치)라 부른다.
이런 모습은 농촌으로 갈수록 두드러진다. 기본적으로 이사를 잘 하지 않는 문화의 일본인데 농촌 주민들은 더욱더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같은 장소에 거주하는 유권자는 한번의 배신을 통한 단기적인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이익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이게 현재 일본 정치의 모습이다. 자민당은 오랜 세월 동안 구축한 지역 조직이 탄탄하다. 지역 조직들은 선거 때마다 지지자들을 모은다. 야당을 선택할 것 같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설득하고 회유한다. 일자리가 없는 곳에는 지속적으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한다. 가령, 경제적으로 어려운 농한기(農閑期)의 농촌 주민들에게 제설작업을 맡기는 식이다.
또는 농촌에 공장을 지어주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은 지역의 주민이자 경제적 혜택의 당사자인 이익집단과 관료들이 행한다. 이러한 식으로 정치인, 관료와 이익집단, 지역후원회는 끊임없이 지역민들을 관리하고 회유한다. 야당에 투표했던 지지자들에게는 일을 주지 않고, 야당 지지자였던 유권자가 여당으로 바꾼 경우에는 일을 주기도 한다.
이익유도정치의 정착은 195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자민당/관료/재계의 3자 유착관계가 풀뿌리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자민당은 집권당의 이점을 살려 관료기구에 압력을 행사하여 정부의 공적 자금을 자신의 정치적 지지집단(주로 농민과 중소자영업자층)에게 편파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이들 집단으로부터 지지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권정치의 대상을 대기업 중심의 재계로부터 지방의 풀뿌리 이익단체로까지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이념적 가치를 둘러싼 ‘큰 정치’가 사라지고 이익분배를 둘러싼 ‘작은 정치’가 일본 정치의 지배적 조류가 되었으며, 크고 작은 정치부패가 일상화되었던 것이다.
- [일본의 민주주의] 中
건설업, 농업 등 업계 이익단체와 결탁해 돈과 표를 받는 대가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들의 이익을 대변해 온 정치인들을 '족의원(族議員)'이라 한다. 일종의 로비스트이자 정책 브로커다. 족의원들은 관료, 이익집단들과 '철의 삼각관계'(iron-triangle)를 반세기 넘게 구축하고 있다. 족의원 중에는 힘있는 자민당 거물(巨物)들이 많다. 국민의힘을 탈당한 무소속 박덕흠 의원을 생각하면 한결 이해하기 쉽다.
2) 대물림을 사랑하는 일본 정치
헌법상 국가원수가 아니지만 국가원수로 대접받는 천황, 아버지의 지역구를 대대로 이어가는 2세, 3세의원이 40%나 차지하는 국회, 60여 년간 단 한 번의 중단 없이 규칙적으로 3년마다의 선거를 치러온 참의원, 좌우를 포괄하는 이념정당들 속에서 장기간 일당지배체제를 구축했던 자유민주당…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오래된, 그리고 안정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는 일본의 단면들이다.
- [일본의 민주주의] 中
한국 재벌문화는 일본에서 왔다. '재벌(財閥)'이란 단어 자체가 일본에서 건너왔다. 일본어로 읽으면 '자이바쯔(Zaibatsu)'로 브리태니커나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전범기업으로 유명한 미쯔비시를 비롯해 미즈이, 스미토모가 일본의 3대 재벌이라 불리우고 그 밖에도 많은 재벌들이 있다. 한국의 재벌들이 보통 한국전쟁 후 형성되었다면 일본의 재벌들은 19세기 서구문물을 수용하면서 형성되었다. 재벌 외에도 일본은 가족이 업을 계승하는 문화가 강하다.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심수관 도예가를 비롯한 일본의 한인 가문 도공들 또한 지금까지도 도자기를 만들며 대를 잇고 있다.
(왼쪽부터)아베 신조, 기시 노부스케, 아베의 형인 아베 히로노부
정치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국이나 미국, 영국에도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본에 유독 많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前) 총리는 뼈대 있는(?) 정치인 집안이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A급 전범이자 1957년 2월~1960년 7월까지 제56·57대 총리를 지냈던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이자 197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또한 1964년 11월부터 1972년 7월 7일까지 일본의 제61·62·63대 총리를 지냈다. 아베 신조의 친조부 아베 간(安倍寛)은 중의원을 2선 역임했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중의원과 장관 출신이다. 아베 신조의 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 또한 중의원이고 2020년 9월 16일부터 스가 내각에서 방위대신(한국의 국방부장관 격)에 취임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누리꾼들의 밈(Meme, 문화요소)이 된 ‘펀쿨섹좌’ 고이즈미 신지로 또한 뼈대있는 정치인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前) 총리의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와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 역시 정치인이었다. 고이즈미 신지로까지 4대가 정치를 하고 있다. 이러한 가문의 배경으로 신지로 또한 젊은 나이부터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장래 일본 총리로 거론될 정도이다. 덧붙여, 신지로와 일본의 유명한 프리랜서 아나운서 크리스텔이 결혼을 발표한 것은 당시 아베 신조 총리 관저를 함께 방문한 직후였다. 아베 신조 또한 결혼을 앞두고 예비신부 마츠자키 아키에와 함께 총리를 방문하여 인사한 바 있다. 아베 가문과 고이즈미 가문 말고도 일본에는 세습정치를 하는 가족들이 많다.
일본에서 뼈대있는 가문의 끝판왕은 천황이다. 조선 500년 왕조도 세계적으로 꼽히는 장기집권이라고 하는데 천황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를 이어 왕좌에 앉아있다.
천황이여 천 세대, 팔천 세대 영원하십시오 작은 모래알이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
- 기미가요(君が代)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
- 메이지헌법(1890년 구헌법) 1조
구헌법이든 신헌법인든 천황은 헌법 1조에 매번 등장한다. 만세일계(万世一系, 기나긴 역사를 하나의 천황 집안이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 천황의 존재는 일본 사회에서 21세기 어떤 작용을 할까. 천황은 ‘가문은 대대로 이어받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일본 국민들에게 영원히 학습시킨다. 재벌의 아들은 재벌이, 도자기공의 아들은 도자기공이, 의원의 아들은 의원이 되어야 함을 전국민에게 세뇌시킨다. 위에서 일본 정계(政界)의 대물림을 이야기했지만 재계(財界)도 대물림이 엄청나다. 매일경제(2009. 07. 08) 기사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일본은 200년 넘은 기업이 3,146개로 세계 1위이고, 2위는 독일로 837개라고 한다.
다른 나라 왕들과는 달리 세금도 내지 않고 투표도 하지 않는다는 천황은 오늘도 국민들에게 세습과 보수(保守)를 각인시키고 있다.
'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5 (1) | 2023.03.04 |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4 (0) | 2023.03.04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 3 (0) | 2023.03.04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 1(2/2) (0) | 2023.02.28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1(1/2) (0) | 2023.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