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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인술의 견학

by 자한형 2021.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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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신

 

고유번호 0356번의 성별란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0356번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등뒤로 내비치는 브래지어 끈이 살점을 조일 것만 같았다. 마주앉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미스 나병환자-같은 걸 선발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이 여자가 최고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거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렇게 깨끗한 피부를 가진 미녀에게 고유번호가 붙어 있다는 게 상담원 성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0356번이라면 상당히 고참 환자에 속할 뿐 아니라 천 번 이내의 환자라면 늙은이가 되었거나 반 정도는 이미 죽어버린 환자들의 번호였다. 0356번이라면 적어도 17년이나 된 환자의 번호였다. 나병력(癩病歷) 17년이라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콧구멍이 하나이거나 몽당 손이거나 아니면 이미 이 세상을 떠난 환자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른세 살로 보기엔 애티가 있었다. 앞가슴 단추가 금방 떨어져 나갈 것처럼 팽팽한 두 개의 젖무덤이 그녀의 윤곽을 더욱 빼어나 보이게 했다. 이름은 다혜, 그 미모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상담 카드의 특별 사항란에는 영문(英文)으로 S자 두개가 주서(朱書)되어 있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앞의 S자는 -특수-취급을 요하는 환자라는 표시일 거 라고 생각했다.

어느 구석이든 나환자라고 지적할 만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여자를 마주 앉히고 성수는 마치 인물값 하느라고 사고를 낸 미혼모라도 상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일매일 지옥에서 특별히 허락을 받고 외출 나온 것 같은 흉측한 나환자들만을 상담하고 있는 성수로선 모처 럼의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그럴수록 성수의 호기심은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차림새로 보아 여유 있는 집안의 딸 같았고 나환자답지 않게 밝은 표정이나 말하는 태도로 보자 웬만큼 교양을 갖춘 여자 같았다. 성수가 담당하는 분야는 종교단체가 으례 그렇듯 신앙상담이었지만 성수는 몇 가지 엉뚱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수가 단편적으로 알아낸 것은 다혜가 S여자대학교 가정과를 졸업한 주부적 자질을 갖춘 여자라는 것과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카드에 기록된 병형은 부정형(不定型, L)이었고 검진과 투약에도 우수한 성적을 가진 환자였다. 다만 외관상 전혀 나환자 같지 않다는 게 성수에게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상담을 끝낸 성수는 약제실에 내려가 병력지를 찬찬히 뒤져보았다. 3백 단위의 카드 함에 있어야 할 다혜의 병력지는 다른 함에도 들어 있질 않았다. 찾아보기 쉽게 만들어져 있는 병력지철 어디에도 다혜에 대한 병력지나 신상카드는 찾아낼 수 없었다. 성수는 S자가 붙은 몇 개의 다른 카드 역시 병력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문과 호기심은 더 극렬하게 성수의 가슴속을 휘저었다.

금요일 오후는 외래 환자를 받지 않는 날이었다. 병원 안팎을 소독하는 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4층에 있는 실험실의 물갈이를 하는 날이었다. 나병원 4층 실험실에는 정 박사(나병원장)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자라가 3백여 마리나 있었다. 커다란 플라스틱통에는 모래와 잔 자갈이 반쯤 담겨 있었고 직접 한강에서 길어 온 물이 통의 목까지 차 있었다. 한 통에 열두어 마리쯤의 자라가 발바닥에 나 병균을 접종 받은 채 길러지고 있었다.

3백여 마리의 자라들은 모두 양성환자의 체내에서 채취한 나균을 직접 발바닥에 접종시켜 종양이 생긴 자라들이었다. 바로 옆 실험실에는 한국산 다람쥐가 역시 발바닥에 나균을 접종 당한 채 우리에 갇혀 있었다. 자라는 천성이 그런지 나병에 걸리게 된 것이 원통해서 그런지 볼 때마다 모래나 자갈 속에 머리를 박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실험실에는 정 박사와 김 강사 외에는 여간해서 출입할 수 없었다. 정 박사와 교분이 있는 외국의 학자들이 가끔 실험실을 구경하는 정도였다. 다람쥐는 제가 나병 걸린 줄도 모르는지 다른 다람쥐들처럼 쳇바퀴를 돌리거나 먹이를 안고 깨물거나 나뭇가지를 타며 재주를 부려 자라와는 달리 수선스러웠다.

물갈이가 끝나면 실험질 문은 또 굳게 잠기고 출입금지라고 씌어진 붉은 팻말이 보는 사람마다 위압감을 느낄 만큼 정면에 버티고 서 있게 된다.

이 건물에서 가장 중요하고 철저하게 통제되는 장소가 4충의 실험실이었다. 이 실험실을 통한 나병 연구는 정박사가 일생을 바쳐온 그 마지막 승부를 걸게 되는 작업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균은 인공배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렇기 때문에 시험관에서 나균을 배양할 수 없고 약품 개발을 위한 투약 실험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체(人體) 실험을 통하지 않고는 살균이나 투약 실험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나병의 결정적인 치료 방법은 거의 만들어진 것이 없고 나균과 비슷한 균체인 결핵균을 실험으로 나병치료제를 만들게 되었고 그 약품들은 나균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정도의 구실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과학적인 치료가 아니라 통계학적인 치료법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지금 당장이라도 결정적인 나병 퇴치 방법을 찾아내는 학자가 있다면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고 실제로 노벨상위원회에서 나병균의 인공 배양만이라도 성공시키면 노벨상을 수여하겠다고 공헌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일찌기 우리 나라의 토종 고구마처럼 생긴 미진화 상태의 -알마딜로-란 동물로 인공 배양을 약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투약 실험을 할 수 있을 만큼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나균의 인공 배양에 노벨상을 미리 내건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노르웨이의 한센 박사가 나균을 발견한 이래 많은 미생물 학자들이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아직까지 과학적인 치료 방법이나 전염 경로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2차 대전 당시,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인권이 존중되고 인도주의 사상이 가장 발달되었다는 미국에서 사형수나 장기 복역자를 선발해서 나균의 인체 투여 방식이라는 가장 야만적인 실험을 비밀리에 실시하였던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물론 그들은 실험의 제물로서 석방되었고 정기적인 조사를 받았지만 단 한 명도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

의학자로서는 당대에 가장 큰 공적서가 되는 노벨 의학상을 받는 것만큼 학문의 객관적 평가를 얻는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의학자라면 승부를 걸어볼 만한 문제인 것이기도 하다. 정박사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다혜를 만난 후의 성수는 나병이 가지고 있는 불가사의한 여러 면모를 풀어보고 싶은 터무니없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 성수가 알게 된 나병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는 다혜라는 여자의 비밀을 풀 수가 없었다. 관심을 가지고 책자를 뒤져보았지만 다혜에 대한 호기심만 늘어갈 분이었다. S자가 두 개씩 붙어 있는 여자, 외관상 전혀 나환자일 수 없는 미모의 여자. 무엇인지 모르지만 비밀을 지니고 있는 여자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다음달의 상담일에도 성수의 호기심 따위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다혜는 상담실을 찾아왔다. 물색 바탕에 하얀 물방울 무늬의 원피스는 그녀의 모습을 더욱 빼어나 보이게 했다. 성수는 괜히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상담 일지를 뒤적거렸다.

이렇게 가슴이 설레이는 건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카운셀링을 담당해 보았지만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혜를 상대로 신앙상담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7년 동안 지독스런 나병과 싸워온 그녀의 고통의 언저리에서 성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인상을 느끼기도 했다. 성수는 상담보다는 일상적인 얘기로 시간을 끌었다. 순번을 기다리는 상담 대기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결혼 안 하세요?

누가 데려가겠어요?

다혜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다혜씨를 여태 그냥 둔 걸 보니 사내들은 되게 멍청해요.

다혜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며 횐 이를 드러냈다. 뭔가 대꾸하려다 마는 눈치였다.

그래, 뭘 하고 지내세요?

책이나 보구 뭐 그러죠.

그 이상의 아무 할말도 없는 여자 같았다.

안 갈 생각입니까? 아니면,,,,,,

---

그녀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성수는 그 순간에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그녀의 말처럼 누가 나 같은 걸 데며가겠느냐는 말이 농담만은 아닐 거라고 단정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날 상담시간에는 다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을 풀 수가 있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발병하여 주욱 정박사의 단골손님이 되었다는 것과 병형이 부정형이기 때문에 그나마 대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다는 것과 그 모두가 정박사의 끊임없는 보살핌 때문이란 것이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이라 이것저것 취미 삼아 손을 대보았지만 모두 중간에 집어치웠고 이제는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는 것밖에 할일이 없다고 했다. 나환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적지만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도 거의 없는 편이라고 했다.

다혜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어쩌면 정박사의 세심한 정성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혜의 카드가 병력지 속에 들어 있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성수는 다혜에게 뭔가 기쁨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졌다. 성수는 틈틈이 기도를 했다. 성수는 기도를 하면서 갑자기 범죄자가 된 기분이 되었다. 다혜에게 나병을 옮겨준 죄 많은 피조물 가운데 한사람일 것만 같았다. 그것은 그녀가 겪든 17년 동안의 고통을 보상해주려는 어떤 가해자의 심리 같은 것이기도 했다. 성수는 우선 다혜를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남의 눈에라도 띄게 되어 나환자 취급을 받게 하는 게 싫었다. 다방이나 식당의 귀퉁이 자리에서 만나곤 했다. 마치 다혜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전도사가 된 것처럼 달뜨기 시작했다.

성수가 상담을 하며 찾아낸 것은 병력이 짧은 경진이란 남자 환자였다. 감염된 사실을 일찍 발견하여 성적 좋게 치료를 받아 상흔(傷痕)이 외관상으론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K대학교 법과 출신으로 시골에 방앗간과 양식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전답을 물려받은 노총각으로 다혜와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도 다혜보다 두 살 위였고 신앙심도 깊어 두 사람이 어울리면 좋은 반려자가 될 것 같았다,

성수의 솔직한 대화에 경진이는 선뜻 응했다. 경진이의 허락을 받고 다혜가 어떻게 나올지 걱정을 했지만 처음에는 싫다고 버티던 다혜가 몇 번 조르자 싫지 않은 듯 허락을 해줬다.

두 사람을 마주앉게 한 성수는 흔한 중매장이처럼 수다를 떨어보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쾌적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끔찍한 투병생활로 결혼 적령기를 놓쳤기 때문에 웬만하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싶기도 했다. 상상했던 것만큼 둘은 잘 어울렸다. 일상적인 얘기를 벗어나 갈등과 고통들, 그리고 부끄러운 추억까지도 서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어떤 그라프에 그려넣으면 너무나 흡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의 유혹을 경험했던 것도 그랬고 하느님을 저주했던 것이 그랬고 세상사람 모두가 눈먼 사람되기를 빌어본 것이 그랬고 전쟁이나 대지진이 일어나 세상이 모두 파괴되기를 순간 순간 바랐던 것 역시 그랬고 그렇게 생각한 자신의 소갈머리를 부끄러워하거나 후회한 것도 거의 일치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런 모진 것들을 극복하고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 비슷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비싼 저녁 값을 성수는 기분 좋게 지불하고 나왔다.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핑계였던 것이다. 그 정도의 분위기라면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성수는 천천히 걸으며 그들이 부끄러움이라도 털어 버리고 어디 호젓한 여관에 들어가서 태어난 지 30여 년만에 서로 이성을 소유하는 경험이라도 가졌으면 하고 은근히 희망하기도 했다. 어쩌면 하느님도 그들의 부정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축복해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뜨거운 숨결과 마찰과 발가벗은 몸뚱아리에 그윽한 품위가 있을 것만 같았다.

계절이 바뀌자 둘 사이가 소년 소녀의 첫사랑처럼 들떠 있다는 느낌을 성수가 받을 만큼 친숙해졌다. 그들은 각기 오랫동안 혼자뿐이었고 처지가 비슷했기 때문에 쉽게 가까와질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성수가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목사관 옆에 다혜와 경진이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서 있으면 질투 유발죄에 해당돼요.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사랑 방해죄에 해당돼요.

성수의 말을 다혜가 재빨리 받아넘겼다.

잎새 떨어진 느티나무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까치집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바람만 세게 불어도 얼기설기 얽혀진 나뭇가지가 부러질 것 같았다. 두 마리의 까치가 가지 사이를 모듬 뛰기로 건너다니며 정답데 굴었다. 우르르 참새떼가 날아들어 느티나무에 열매처럼 다닥다닥 붙어 앓기도 했다. 교회 마당에는 청년부원들이 벌써 배구 시합을 하고 있었다. 경진이는 싱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혜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우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김 선생님.

경진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거 축하도 보통 축하할 일이 아닙니다. 다혜씨 솜씨가 그 정돈 줄 몰랐습니다.

다혜는 고개를 더 숙이고,

모두 김 선생님 탓이죠 뭐. 아뭏든 중매 잘못 선 죄로 자주 괴롭혀 드릴랍니다.

세 사람은 결혼 준비에 대해 상의를 했다. 생각 같아서는 성대하게 식을 올리라고 조르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사정도 성대하게 치를 여건이 아니었고 널리 알리기도 싫은 일이어서 병원의 회의실에서 간단하게 양쪽 가족끼리 모여 식을 올리기로 했다. 주례는 정 박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가을이 깊어지듯 둘 사이도 더욱 무르익어 갔다. 성수가 순회 진료반을 따라간 사이에 두 사람은 정 박사를 찾아가 주례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성수가 일주일 동안의 순회진료를 끝내고 병원에 도착하자 정박사가 급히 호출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간호원 말로는 뭔지 모르지만 정박사의 표정이 몹시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좀처럼 상담실에 관해선 간섭을 하지 않던 정 박사였고 몇 달 후엔 성수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얼굴을 붉힌다든가 신경질적으로 돌변하는 걸 보인 적 이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예비목사인 성수에게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대하는 일이 없던 정 박사였다.

연구실 정면 벽에는 확대된 나균 사진과 다람쥐 발바닥에 접종된 나흔(癩痕)을 정밀하게 찍은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자라의 발바닥에 주사기가 꽂혀진 사진과 나균 접종으로 부어오른 부위, 실험관에서 발생하는 타균의 확대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 실험들이 성공하려면 그 다람쥐와 자라는 나병에 걸려야만 할 것이다.

정 박사는 안경을 벗어 책상 모서리에 놓고 성수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기보다 그냥 쳐다보았는지도 모른다. 돗수 높은 안경을 벗었기 때문에 평소에 느끼던 표정이 아닌지도 모른다.

김 선생,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김 선생이 병원장야?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잡아챌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사님.

몰라! 다혜란 환자를 결혼시킨다며. 신앙 상담하라고 데려왔지 결혼 상담시키려고 데려온 줄 알아? 누구는 생각을 못해서 그런 짓 않는 줄 알아. 전도사면 전도사답게 신앙상담이나 하지 건방지게 뭘 안다고 환자를 데리고,,,,,,

박사님께 상의를 드리지 못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그만한 연분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17년씩이나 고통을 받아왔고 또 당사자들끼리 서로 마음이 통하고 해서. 두 사람에 대한 영혼의 의지도 되겠고 해서 말입니다,

성수가 두 사람의 영혼에 대한 얘기까지 늘어놓은 것은 정박사의 신앙심에서 이해를 촉구해서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 선생, 나병에 대해서 뭘 아나? 뭘 안다고 내게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냐 말야. 평생을 바쳐도 알까 모를까 하는 건데 김 선생이 뭘 안다고 그래. 다혜란 앤 내가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보고 병을 다스린 애야. 자살한다고 약을 먹고 다 죽어 나자빠졌던 걸 몇 번이나 살려내고 달랜 줄 아나? 개가 여태 살아있는 게 다 내 피눈물 나는 지랄 때문야. 병형까지 부정 세계적으로 특수한 체질이라서 도졌다 나아졌다 하는 걸 대학까지 졸업하도록 약을 싸들고 다니며,,-,,, 누군 개가 결혼하는 걸 싫어서 여태 그냥 둔 줄 알아? 까딱 잘못해서 약간만 신경을 건들거나 감기만 들어도 병이 심해지는 특수 체질이라는 걸 김 선생도 알 만한 때가 됐잖나. 나도 몇 번인가 결혼시켜보려고 해 보았지만 도저히 안되겠기에 그냥 둔 거야. 거기다 임신이라도 해봐. 영락없이 한 목숨 잡는다는 걸 몰라? 보통 음성환자도 임신하면 발병되는 판에. 그 동안 충격만 받아도 악화되던 그런 사람을 잡는 일이 전도 사업야? 이 사람이 상담합네 하구 사람 잡는 짓을 하구 있어.

성수는 정박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17년이란 세월을, 더구나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여고생 시절에 발병해서 결혼도 못하고 있는 게 여간 안타깝지 않았다. 정박사의 설명을 들어보니 정말 위험한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란 것과 전보다 건강해진 것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성수로선 정 박사 말에 약간의 의심이 아니 가는 건 아니었다.

전 정말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박사님. 두 사람 다 찬성을 했고 특히 여자 쪽에서 더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결혼얘기가 있고 부터 훨씬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모르면 잠자코나 있어. 내가 다혜를 불러다가 그 동안 차마 못했던 얘기까지 할 수밖에 없어서 죄다 해줬어. 그 연약하고 불쌍한 개로선 얼마나 충격이 컸겠냐 말야. 웬만큼 체념을 하고 살아가던 앨,,,,,, 상담실엔 그만 다니라고 했으니 그리 알고------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슈. 낼 모레면 안수 받을 사람이 큰일낼 뻔했잖소.

전에 없는 꾸중이었다. 역시 보통 나환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세상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나환자 한 명을 위해 그처럼 17년 동안을 보살펴온 정성만 가지고도 인술(仁術)의 사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정 박사는 그밖에도 의학부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나병의 병례와 증상들을 설명해주며 다른 환자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였다,

성수는 며칠 동안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다혜를 만나서 용서를 빌기엔 자신에게 큰 잘못이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불편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받은 충격을 보상해 줄 방법이란 전혀 없는 일이었다. 성수는 상담실에 앉아 열심히 기도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됐든 만나서 자신의 실수를 용서받고 싶었다, 17년 동안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알만큼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혼 같은 걸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 그처럼 결심해버린 것은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거나 하느님으로부터 천부적으로 받은 욕망이거나 그도 아니면 질기고 끈적끈적하게 살아 있느니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이나 해보고 죽자는 발악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박사의 말대로 그런 내막을 이미 알고 있었던 여자라면 목숨까지도 건 행복에로의 돌진이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이'. 결혼하게 되면 병이 악화되거나 잘못하면 죽게 될 거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으면서 용단을 냈던 것 같았다. 며칠간 다혜와의 상면을 걱정하던 성수는 스스로 결론을 얻었다. 목숨까지도 걸었던 다혜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성수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고 또 한번 성수 신이 나서야 될 일 같았다.

정전이 되어버 린 다방의 탁자마다엔 촛불이 놓여졌고 벽 거울에 반사된 촛불들이 저마다 불꽃 춤을 추고 있었다. 다혜에게선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몹시 수척해 보였다. 다혜를 위해선 정전된 것이 오히려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혜에게서는 언제나 향수 냄새가 났다. 아마 나흔으로 인한 악취가 몸의 어디에선가 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자격지심 때문일 것 같았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는 성수였다. 다혜는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엔 유난히 빛나 보이는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한 방울뿐이었지만 성수의 가슴엔 거센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마주앉지 않고 곁에 앉아 있다면. 경진이처럼 환자이기만 해도 그녀를 덥석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타들어 가는 촛불과 그림자만을 바라다보았다. 그렇게 침묵을 지켜도 그들은 할말을 서로에게 다 하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정 박사님께 말씀 다 들었어요. 그래서 경진씨완 헤어지기로 했어요. 죄송해요. 저희들 때문에 김 선생님이---

성수는 정전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혜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 미안해요. 다혜씨랑 두 분이 정말 안됐어요. 그러나 실망하지 말아요. 내가 나환자가 못된 것이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어요. 기도나 열심히 할께요.

고작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다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어지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보려는 것 같은 느리고 힘없는 고갯짓이었다.

정 박사님이 경진씨한테도 그런 얘기를 전부 했나요?

다혜는 어딘가 몹시 아픈 표정이었다. 그러나 참느라고 이를 악물고 있는, 마치 초산부가 진통을 견디는 듯한 표정 같기도 했다.

선생님 그만,,,,,,

가냘프고 여린, 그리고 어딘가 무너져 내린 돌더미 속에서 마지막 남은 힘으로 구원의 신호를 보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혜는 한살이나 아래인 성수에게 꼭 선생님이란 호칭을 썼다. 이렇게 한마디를 해놓고 아까보다 더 진한. 핏방울 같이 느껴지는 눈물을 홀렸다. 그러나 닦으려고 하지 않았다.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울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 말씀 않으셔도 선생님 마음 알아요. 아무 말씀 마세요. 그냥 돌아가게 해주세요. 제가 견딜 수 있게 아무 말씀 마세요. 경진씨와는 다시 만나지 않아도 우린 사랑할 거예요. 경진씨도 선생님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아마......

둘은 더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녀가 마지막 말끝을 내지 못한 것은 울음을 참느라고 그랬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라는 말을 하려다 그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다혜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잰걸음으로 골목길을 꺽어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울어버릴 모양이었다. 성수도 뒤따라가 참았던 눈물이라도 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환자가 된 것만도 서러운 그녀에게 하느님은 어깨서 저토록 처절한 시련을 안겨주는 것일까. 성수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기도를 드렸다. 그녀에게 광명을, 빛을, 은총을, 구원의 손길을 달라고.

나병원의 12월은 바쁘기만 했다. 사무적인 연말 결산도 그렇지만 실험동물의 겨우살이 준비에 하루 해가 짧기만 한 나날이었다. 상담실도 마찬가지였다. 상담자료의 토고서 준비와 다음해의 예산 편성과 계획표 작성. 그리고 교단에 별도로 제출해야 되는 결심자와 예비신자에 대한 보고자료 준비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성수는 다혜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정박사의 주장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지을 수가 없었다. 틈틈이 아래층에 내려가 병력지를 정리하는 간호원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다혜에 대한 카드와 기록들을 찾으려 했지만 자료실 어디에도 다혜에 대한 자료는 없었다. 오랫동안 간호원 일을 맡아했던 간호원이나 약제실의 약사까지도 다혜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부자 집 딸이라는 것과 대학을 졸업했고 병력이 17년이나 된 부정형 환자라는 것 이상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성수는 교단에 제출할 보고서를 가지고 본부에 들어갔다가 전임 상담자인 박 목사를 만나보았다. 다혜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정박사의 특진 환자라서 나도 잘 몰라. 그런 사람이 몇 사람 있기는 있지. 사회적으로 저명하다는 사람도 있고 기자나 장교나 재벌도 있다는 말을 들었어. 그러나 그 여잔 다른 환자처럼 감추어주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특별히 정박사가 연구하고 있는 케이스가 아닌지 모르겠어. 하두 유별난 환자라서 말야. 십 몇 년간 음성과 양성의 굴곡이 심했던 환자였나봐. 그런 케이스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지. 정 박사로선 신경이 쓰일 만하지. 학회 나갈 때마다 그 환자의 병례나 임상실험은 주목을 받고 있고 현재로선 그 환자가 정박사를 국제적인 학자로 만들어주고 있을 테니까 그쪽 팀들이나 알까 누구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박 목사에게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성수는 어쩌면 정박사의 국제적 지위나 학문의 깊이가 다혜의 나병으로 하여금 얻어지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불끈 치솟기 시작했다. 국제학회에서도 관심을 갖는 케이스라면 정박사가 다혜의, 나병을 실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학에 있어서 인체실험을 통한 연구만큼 어렵고 또 주목받는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막연하나마 정 박사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자 성수는 어떻게든 하루 빨리 다혜도 결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내고 싶어졌다. 닥치는 대로 나병에 관계된 책과 논문을 뒤져보고 학자들에게 질문을 해보았지만 다혜처럼 특수한 케이스는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답변을 하지 못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정박사의 대학연구실에 근무하는 병리검사원이나 나병원의 간호원에게도 물어보았지만 한결같이 정 박사와 의견이 일치할 뿐이었다.

연말의 막바지에 3일간의 순회진료를 떠나면서 성수는 정박사의 수제자인 김 강사에게 다혜의 얘기를 슬쩍 비추어보았다. 성수가 다혜 문제로 정 박사에게 심한 꾸지람을 들었던 걸 기억하고 있던 김 강사는 정색을 하고 정박사의 말이 틀림없다면서 큰일 날 짓을 했다고 정 박사의 견해를 옹호하고 나섰다. 김 강사에게 나병에 대한 불가사의한 얘기들을 들으며 성수는 자신이 품어왔던 한 가닥의 의심이 한낱 기우일지도 모른다는 서운함을 느꼈다. 성수는 의학에 대한 확실한 지식 없이 정 박사를 의심해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김 강사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정 박사를 의심했던 자신의 실수에 대해 화가 났다. 서너 달 후면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할 성수로선 이처럼 누군가를 의심해보았다는 것이 심히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다혜의 그 처절한 울음 삼키던 모습이 씻기지 않고 자꾸 꼬리가 달려 뭔가 감추어진 비밀이 있을 것만 같았다.

 

1월과 2월 중에는 내진 환자만 진료해주고 외래진료는 날씨가 풀리는 3월까지 미뤄지곤 했다. 2월 중순이면 다시 순회진료 준비로 나병원은 또 바빠지기 마련이었다. 병력지 정리와 순회지역 환자에게 날짜와 시간을 약속하는 편지 작성과 발송, 그리고 약품정리와 해당 보건소와의 협조사항 의뢰 등으로 나병원은 숨 돌릴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병명을 숨기고 숨어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지역으로 집결시키면 대번에 인근 주민들에게 나환자라는게 밝혀지기 때문에 진료 차가 닿을 만한 곳을 골라 시간을 정해 잠깐씩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진료를 해주어야 하는 어려운 순회진료 방법이었다. 특진환자나 신환자일 경우에는 해당지역 보건소의 외진 방에서 몰래 진료를 하기도 했다.

성수는 그들에게 성경책이나 통신 강의록 등을 주거나 간단한 신앙 상담을 하는 정도였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교회를 꺼리는 나환자들에게 복음을 심어 주는 게 성수의 임무였다.

순회 진료반에 편성되었던 김 강사가 갑자기 빠지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 강사 대신으로 조 강사가 보강되었다, 가끔 대학측의 사정이나 본인의 사정으로 편성되었다가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더구나 신학기에 새로 강의를 맡게 되었다는 조 강사가 순회 진료를 떠나게 되는 건 당연한 배려일 거라고 생각했다.

순회진료를 떠나면서 알게 된 것은 대학 사정으로 김 강사가 시간강사 자리를 내놓고 지방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소문대로라면 정 박사와의 사이에 피치 못할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았다.

봄철의 첫 순회 진료는 계획량의 70퍼센트쯤밖에 진료할 수 없었다. 3월이라곤 하지만 강원도 산골의 험한 길은 빙판이었고 날씨가 풀리는 낮이면 자동차 바퀴가 길목에 빠져 환자와의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 장에 갔다오거나 농기구를 손질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약속한 장소에 서 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 다. 진료를 하지 못한 환자에겐 약품을 우송하기로 작정하고 돌아왔다.

순회진료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성수는 뜻밖에 김 강사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병원 안의 소문으로는 김 강사와 정 박사 사이가 좋지 않아 신학기를 맞아 시간강사 자리를 쫓겨난 것이라고 했다. 성수의 의식 속에 잠겨 있던 다혜에 대한 생각과 정 박사에 대한 외심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어쩌면 성수가 궁금해하는 사실이라도 알게 될지 모른다는 흥분과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김 강사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정 박사 그치 아주 개새낍니다.

김 강사의 첫마디에서 성수는 다혜에 대한 알 수 없는 비밀이라도 풀려질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삼년 동안,,,,,, 아닌 말로 마누라의 잔시중까지도 들어가며 성의껏 조수노릇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나를 내쫓고 저희 조카뻘 되는 새파란 자식을 데려다놨어요. 쫓겨난 것까지는 좋아요. 그 방법 이 비열하고 졸렬해서 구역질이나요.

김 강사의 말대로라면 정박사가 김 강사를 지방대학으로 알선해준 것은 정 박사에 대한 비밀을 폭로할지 모른다는 예방책일 뿐이라고 했다.

내가 가만있을 줄 알겠지만 어림도 없어요. 다 폭로해버리고 말겠어요. 아무래도 비밀이 많은 사람은 친척 나부랭이를 데려다 쓸 수밖에 없겠죠. 나같이 바른말 잘하는 사람은 붙어 있질 못할 거예요.

김 강사는 은근히 자신이 바른말을 잘해서 쫓겨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어쨋든 잡다한 얘기들은 분풀이처럼 들렸다. 성수가 궁금해하는 건 다혜에 대한 것이었다.

전에 다혜란 여자에 대해 자꾸 물어봤죠? 그 여자 말입니다. 한마디로 실험 인간이랄까. 그녀에겐 결혼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거죠. 오직 그가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죠.

그만---

성수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지금까지 그 밑에서 빌붙어 있던 그 비열한 사내의 조잘대는 입을 한대 갈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수는 김 강사를 노려보았다. 김 강사는 어디가 가려운지 긁적이기만 했다. 성수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더 앓아 있으면 자신도 비열한 무리가 될 것 같은 불쾌감이 솟구쳐 올랐다.

성수는 오직 이 소식, 이 형편없는 조작과 위선과 가증할 사실을 빨리 다혜에게 알려주고만 싶었다. 그래서 성수의 말처럼 정 박사에게 더 이상 회생되거나 인생을 파 먹히지 않도록 가르쳐 주고만 싶었다. 그리고 정 박사를 어떻게 단죄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았다.

성수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간절하고도 길었다.

성수는 정 박사에 대한 단죄나 증오심 따위는 잊어버리고 싶었다. 다혜에게 결혼과 재생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어떤 확신과 기쁨과 희열에 가슴이 충만되어 있었다.

골목을 꺾어 돌자 다혜네 집이 저만치 올려다 보였다. 성수는 다혜의 표정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떨며 마구 울 것이다. 그리곤 성수의 목을 끌어안고 어린애처럼 깡충깡충 뛸지도 모른다. 열일곱 해 동안의 고통에서 해방된 기쁨에 소리 높여 울지도 모른다. 다혜는 경진이에게 달려가겠지.

그리고 둘은 얼싸안고 울 것이다. 기쁨과 행복의 눈물을 실컷 울도록 내버려둬야지. 금방 환하게 웃을 테니까. 성수는 뛰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올라가 다혜네 집 초인종을 힘껏 눌렀다.

누구세요?

나이 지긋한 부인네가 문을 열었다. 다혜와 닮은 모습으로 보아 어머니인 것 같았다.

급한 일인데요. 다혜씨 계시죠?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죽었어요.

성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번했다. 성수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서 어금니를 부서져라 맞물었다. 두 볼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금세 두 눈이 붉어 올랐다.

 

다혜는 석 달 전, 그러니까 지난 1224일날 밤 그렇게도 질긴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렸던 것이다. 단 한 장의 유서도 없이.

 

 

 

 

김홍신(金洪信: 1947- )

 

충남 논산 출생. 건국대 국문과 졸업. 1976<현대문학><물살>, <본전 댁>으로 추천 완료하고 등단. 그는 산업 사회의 모순과 비리를 깊이 있게 파헤치고자 하는 작가관을 지닌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해방 영장>, <무죄 증명>, <인간 시장>, <바람 바람 바람>, <가면의 숲>, <인간 수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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