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 단편 소설

무죄 증명

by 자한형 2021. 9. 30.
728x90

                                                                             김홍신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길고 느리게 암청도 앞 바다를 훑고 지나갔다. 철석거리는 바다가 잠시 목청을 낮추었다가 사이렌의 여음과 암청산의 메아리가 엷어져가자 다시 제 목청을 뽑으며 철썩거렸다. 바다는 밤새 울 것처럼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서의 불빛을 피해 어물창고 옆으로 모인 서너 명의 장정들은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보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파도소리 속에서 노 젓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배가 나루에 닿지 못하도록 뱃전을 밀어내며 장정들은 차례차례 배 위로 뒹굴 듯한 몸짓으로 올라갔다, 배는 서서히 장대 끝에 밀려났고, 어둠은 배를 삼킬 듯 짙어졌다.

돌섬을 돌아 양식장으로 꺽이는 물길에 장정들은 드럼통의 뚜껑을 열었다. 역한 기름 냄새가 밤바람에 날려 금세 장정들의 코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장정들은 바가지로 아교처럼 진득거리는 드럼통 속의 액체를 퍼서 파도 속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물길을 잡은 장정들을 배곤 모두 드럼통 속의 액체를 바다에 뿌리고 있었다.

물길을 바꾼 장정이 어둠 속으로 소주병을 하나씩 나눠주고 다녔다. 아직도 액체가 든 드럼통은 세 개가 남아 있었고 뱃전은 모래섬까지 잡아야 했다. 물길이 훤한 장정들이지만 해를 꼴깍 삼킨 듯한 밤바다의 어두움과 뱃전을 때리는 파도 때문에 제대로 물길이 잡히지 않아 키를 잡은 장정의 어깨와 허벅지는 칼끝만 대어도 툭 터질 듯이 팽팽해졌다.

장정들은 기름 바가지를 바꿔 잡고 소주를 병째 삼켰다. 더러는 포장 속으로 들어가 실낱같은 불빛을 내비치며 담배를 피우는 장정들도 있었다.

물길을 바꿔 모래섬으로 배가 꺾이자 어렴풋이 뱃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을 알리는 여명의 부연 빛깔이 바다 끝에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장정들은 마지막 남은 드럼통을 비우고 나서, 철석거리는 바닷물에 기름 바가지를 휘둘러 씻었다. 그래도 바가지에는 시커멓고 진득거리는 응고체가 영글어 붙어 있었다.

장정들이 밤새도록 파도와 칠흑의 어둠 속을 헤매고 나온 바다에는 시커먼 기름덩어리들이 떼지어 파도를 타고 있었다. 지평선에서부터 점차 밝아지며 더러워진 바다 때를 한층 흉칙해 보이게 만들었다. 기름덩어리 떠다니는 바다를 확인한 장정들은 무슨 큰일이나 해낸 것처럼 가슴을 펴고는 발동을 걸어 퉁퉁거리며 모래섬을 크게 한바퀴 돌아 민물과 맞물고선 계곡 쪽으로 배를 몰았다.

날이 밝은 암청도 앞 바다의 널따란 양식장은 고약한 냄새와 기름 때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새벽 바람인데도 감시원의 연락을 받은 정유공장에서는 세척의 배를 풀어 폐유 찌꺼기 수거 작업을 시작했다. 폐유 수거 반원들은 개펄을 먼저 훑어갔다. 몇 사람은 나루에 묶여 있는 배와 선착장 돌벽에 엉겨붙은 찌꺼기를 제거해 갔고 일부는 바다에 떠 있는 찌꺼기를 수거하기도 했다. 암청도 앞 바다는 마치 해태와 대합을 납품하는 날처럼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섬사람들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양식장, 거기에 목을 걸고 있는 암청도 주민들의 태도였다. 바다와 양식장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남의 일처럼 수거 반원들의 작업 광경을 쳐다볼 분이었다.

그런 분위기에도 만수와 종길이는 건강해 보이는 동네 청년들을 데리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폐유 찌꺼기가 떠 있는 바다와 여기저기 엉겨붙어 있는 찌꺼기와 개펄을 뒤덮은 응고체들을 필름에 한 장 한 장 담고 있었다.

수거 반원들의 작업 광경과 정유 공장의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작업선도 찍고 있었다.

썰물 때를 맞추어 작업을 서두른 수거 반원들은 밀물이 선착장까지 밀려들자, 도구를 챙겨 철수하기 시작했다. 암청도를 넘볼 것처럼 만조가 되자, 바다는 보통 때와 다름없이 풍성해 보였고, 위용 있게 출렁거렸다.

 

그날도 서울서 내려온다던 조사반과 변호사는 오지 않은 채 주민들의 애만 태우고 말았다.

 

암청도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질 좋은 대합과 해태, 그리고 굴 산지로 흥청거리던 섬이었다. 인근에서 흔히 돈섬이라고 부를 만큼 암청도의 해산물은 수출업체에서 선돈 주고 계약해가던 상품이었다. 그 질과 양에 있어서도 전국의 해산물 수출업체들이 군침을 삼킬 만한 양식장이었다. 개펄에 널려진 양식장말고 웬만한 바윗돌 서너 개만 가지고 있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나돌 만큼 암청도는 완만한 경사와 민물 닿지 않는 개펄과 일조시간이 긴, 양식장으로서는 가장 좋은 수심과 수온으로 천혜(天惠)의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청도 주민들은 부촌을 이루며 살 수가 있었다.

개펄을 제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오래 전에 잠시 면장 일을 보았던 최 영감이었다. 주민들은 여전히 면장 어르신네라고 불렀고, 그래서 사람들은 최 사장이나 혹은 최 부자라고 부르곤 했다. 최 부자는 양식장 말고도 동력선 아홉 척과 양조장 , 만물상 , 어물창고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런 부자이기 때문에 흔히 괄괄한 뱃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 쉬운 처지였지만, 최 부자의 후덕한 인심과 종가집 어른다운 행실로 주민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는 사람이었다. 개펄이나 바위가 없는 사람들은 거의 최 부자의 고깃배를 타거나, 그의 양식장의 드난살이를 하였다. 최 부자가 특별히 신임하는 사람은 대합 양식장의 작업반장 일을 보는 만수와 굴 양식장의 작업반장 종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최 부자의 외아들 충현이의 친구이기도 했다.

이 살기 좋은 암청도에도 운명의 신이 질투를 했던지 검은 그림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암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를 끼고 정유 공장이 세워지면서 시작된. 어쩌면 예견했어야 할 불행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유 공장이 들어설 때란 하더라도 암청도 주민들은 해수 오염 같은 건 염두에도 둔 적이 없었다. 오히려 주민들은 정유 공장이 지척에 세워지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나 교통망이 좋아져 지역이 발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걱정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관청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나라에서 먼저 걱정하고 조치할 일이라고 큰소리를 해서 주민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정유 공장이 완공되어가자 정말 땅값도 올라갔고, 교통망도 좋아져 전처럼 해산물이 썩거나 납품일을 어기는 일 따위는 없어져버렸다. 수출품은 물론 국내의 소비량도 늘어나 처음 한동안은 정유공장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것은 허울좋은 구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갉고 깨끗했던 바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가 어느 날부터 조금씩 기름때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기름때들은 나날이 늘어갔고, 기름때가 늘어가는 만큼 주민들의 걱정도 늘어가기만 했다. 어떤 때는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 온통 무지개 색깔을 수놓는 기름이 떠돌기도 했다. 동남풍이 부는 날이면 영락없이 정유 공장 쪽에서 시커먼 기름때가 고약한 냄새까지 풍기며 몰려와 선착장이나 해태 취재목에 엉겨붙어 양식장을 망쳐놓기도 했다.

이 사실은 금방 당국에 알려졌지만, 담당자가 한번 다녀가는 데 보통 이삼일이 걸렸다. 정유 공장측의 실무자도 관청사람처럼 뜸을 들이기 일쑤였다. 정밀 조사를 한다고 수선스럽게 사람들이 다녀가곤 했지만, 그 결과나 통보라는 게 주민들을 이해시키기엔 어딘가 부족한 것들뿐이었다.

우리가 정밀하게 조사한 바로는 정유공장의 오염 처리시설은 완벽했습니다. 또한 이곳을 출입하고 있는 유조선 역시 시설이 완비되어 있음을 확인했고, 전문가가 파견되어 직접 하역 작업을 감시하기 때문에 정유공장이 해수오염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도수 높은 안경잡이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미리 왼 듯 오염의 수치와 해상법 조문의 어려운 낱말을 열거하여 마치 자신의 말이 절대적이라는 걸 과시하려는 말투 같았다.

그렇다면 이 기름덩어리들이 도대체 하늘에서 쏟아졌단 말요, 땅에서 솟았단 말요?

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질문을 하자 안경잡이는 알맞게 질문했다는 듯, 그래서 또 한번 자신의 영어나 법조문 실력을 과시하게 되었다는 의기 양양한 표정으로 천천히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 그거 아주 좋은 질문 하셨습니다. 이 지역의 선박 통행은 아시다시피 작년 한해만도 거의 두 배가 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도 해수오염의 자연증가는 통계상으로 매년 니준치 이상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경잡이는 수첩을 꺼내들고 영어와 통계학 용어와 외국의 유명하다는 박사의 말을 인용하는, 저 혼자 지껄이고 저 혼자 알아듣는 말을 신이 나서 계속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술렁거리며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씨팔 자식! 되게 유식허게 구네. 돈 걷어줄께 중앙으로 나가라.

한 사람이 이렇게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러자 여태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여기저기서 삿대질을 하며, 안경잡이에게 대들었다.

피피엠이고 나발이고. 니 눈깔엔 저 시커먼 찌꺼기도 안 뵈냐?

개눈깔 박고 거기다 유리창까지 꼈으니 뵐 게 뭐여,

사람이 기름 덩어리 먹고사는 거 봤냐? 공장에 불싸 지르기 전에 후딱 해결하자구 해. 더 잔소리 살구.

모여 섰던 사람들은 그 안경잡이의 유식한 소리를 듣다 말고 이렇게 대들어서 강연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주민과 정유공장, 그리고 관계 당국 사이의 입씨름은 두 해를 계속했다. 그렇게 큰 피해가 없던 이태 동안은 그냥 입씨름이나 신경전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바로 지난해에는 암청도가 하루아침에 폐촌 지경이 되어버리는 사고가 생겨 주민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사태가 되었다.

기름덩어리들이 들락거리던 이태 동안 납품이 취소되거나 수출 계약이 파기되는 일이 잦아져 손해를 입어온 주민들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넓은 바다는 온통 기름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바위란 바위는 모두 까만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처럼 폐유 지꺼기가 엉겨붙어 있었고 개펄은 개펄대로 기름덩어리와 개흙이 엉겨붙어 있었다. 해태 취재목에는 해태와 폐유 찌꺼기가 한데 뒤엉켜 마치 콜타르 통을 휘저은 막대기를 꽂아 놓은 것 같았다, 양식장은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단숨에 폐허가 된 것처럼 아무짝에도 버려야 할 땅이 되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암청도 주민들은 최 부자와 만수, 종길이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란 걸 만들어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서둘렀다. 면사무소에서부터 군청과 도청으로 뛰어 가기도 했고, 일부는 신문사로 내달았고. 또는 변호사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떤 성질 급한 사람은 혼자라도 정유공장에 달려가 불을 지르겠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겨울 해는 짧았다, 다른 때 같으면 손이 모자랄 만큼 바쁠 암청도의 배턱에는 근심에 싸인 주민들만 여기저기 모여 두런거리고 있었다. 겨울 한철 주민들을 괴롭히기 마련인 물오리 떼마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가리를 딱 벌리고 죽어 나자빠진 조개와 석탄덩어리처럼 되어버린 취재석의 사진이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암청도 주민들은 그 신문의 사진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날벼락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해운항만청과 정유공장에서 높은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들은 한번쯤 그렇게 다녀가는 게 의무이기라도 한 듯 바닷가를 슬쩍슬쩍 훑어보고 훌쩍 떠나버렸다. 어디서든 높은 사람이 다녀가기만 하면 암청도의 엄청난 비극은 쉽게 해결될 거라고 주민들은 믿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이 막연한 믿음은 해수오염의 원인마저도 찾아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관계기관에서는 계속 조사가 진행 중이란 말만 되풀이했고. 신문의 추측기사는 종잡을 수 없이 여러 갈래의 신빙성 없는 얘기들만 늘어놓고 있었다.

암청도 앞 바다는 규모가 큰 항구처럼 여기저기 많은 배들이 떠 있었다. 정유 공장 소속의 크고 작은 배는 물론 인근에 있는 고깃배들까지 동원되어 폐유 수거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 한대밖에 없다는 청해선(淸海船)까지 동원된 이 대대적인 수거 작업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원된 인원이나 장비에 비해 폐유 수거 작업이란 형편없이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름덩어리를 일일이 주워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쪽에선 선착장과 개펄을 들쑤셔 가며 수거 작업을 하기도 했고, 또 다른 한 패는 취재목을 바꿔 꽂기도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암청도의 바다 오염은 육안으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해 보였다. 열흘을 넘기자. 고 끔찍했던 바다가 전처럼 깨끗해졌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바다 같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염의 물적 증거만 인멸시킨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양식장외 해태와 대합, 굴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었다.

바다는 기름 냄새 대신 그것들이 썩는 냄새가 고약하게 풍겨와 주민들의 마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양식장 오염사건이 일어난 지 보름째 되던 날, 서울에서 강동호 변호사가 내려와 현장 조사를 하고 올라갔다. 그리고 닷새 후에는 지방 법원에 단일 청구 소송으로는 최고 액수인 10억 원의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이 제출되었다.

이 거액의 청구 소송 사건은 해상 오염의 전문가가 직접 현장 조사를 하고 그 증거가 제출되어야 재판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해상 오염의 전문가가 내려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정유 공장측은 수거 반원을 곱절이나 늘려 연일 수거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만수와 종길이가 동네 청년들을 급히 불러모은 건 수거 반원이 곱절로 늘어난 날 밤이었다. 종길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모이자고 한 건 다른 게 아녀. 이렇게 코 쑥 빼고 앉았다간 영락없이 정유 공장 패들한테 당하게 생겼어.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지.

방법은 무슨 놈의 방법여. 그 새끼들 즉 불질러 버리든가 공장을 옮기든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해야지.

종길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청년이 흥분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걸 누가 몰라. 성질대로 하자면야 벌써 요절을 냈어야지. 문제는 그게 아니고 이렇게 멍청하게 있다간 되려 당하게 생겼으니 우리도 대책을 세우자는 거지.

만수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청년들도 이번 사건이 진행되어 가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돈이 많은 정유공장의 소행을 감당할 만한 대책을 어떻게 세워야 될지 난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말이나 법으로 될 놈들이라야 말이지. 우리같이 개펄에 목을 건 놈이 해야 할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나 말여.

매일 수십 척의 배와 인부들을 풀어 오염의 흔적을 없애고 다니는 정유 공장측 방법에 대항할 만한 힘이 이들에겐 없었다. 날짜가 지날수록 암청도는 속으로 곯고 겉으로 멀쩡한 쓸모 없는 땅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번 망해버린 개펄 양식장은 적어도 칠팔 년이 걸려야 정상적인 양식장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뭍에서 농사를 짓다 폐농하면 일 년만 굶을 작정을 하면 되지만 양식장이 일시에 오염되면 삼사 년 가지고도 수확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이러지들 말고 상의대로 해나가자. 이 판에 우리들끼리 티격태격해서야 쓰겠어. 만수형 생각은 어때요?

턱을 괴고 담배만 빨고 있던 만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입을 열었다.

우리들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가장 비참한 방법밖에 없어. 방법이라기보다는 발악이지. 잘못되면 우리들 스스로 우리들 목에 밧줄을 매는 꼴이 되는 거-

만수가 비장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자, 청년들은 잠시 만수의 눈치만 살폈다.

.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아뇨? 해보는 데까진 해보자구요.

좋아. 이건 내 혼자 생각이 아니고, 종길이와 상의를 했던 거여. 폐유 찌꺼기를 사다가 바다에 뿌리는 거여. 우리 땅에 기름 덩어리를 뿌리자는 얘기여.

청년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낼 눈치가 아니었다. 그 귀한 땅 위에 그들 스스로 폐유 찌꺼기를 뿌리지 않으면 아니될 이 엄청난 사실이 두려웠던 것이다.

청년들은 결사대를 조직했다.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집을 폭격해야 하는 전투기 조종사의 심정과도 같이 비통하고 가슴 저리는 결정이었다.

이 비밀은 죽어도 지켜야 돼. 우리의 땅을 지키겠다는 맹세인 거여.

종길이가 이렇게 말하고 먼저 약지를 깨물어 피를 뽑았다. 청년들도 차례로 무슨 비밀결사라도 하듯 피를 뽑았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이들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양식장에 자신들의 손으로 폐유 찌꺼기를 뿌려야 하는 가엾고도 어처구니없는 투사가 된 것이었다.

깊은 밤에 바다에 나가 폐유 찌꺼기를 뿌리기를 벌써 여러 날째 계속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오기로 되어 있는 전문가들이 여러 날째 미루고 있기 때문에 처음 생각보다 힘겹고 어렵기만 했다. 주민들의 조바심 따위는 아랑곳없이 변호사와 조사반 일행은 내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바다 위에는 정유 공장에서 보낸 일꾼들이 수거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서 주민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다와 양식장이 깨끗해진 후에 조사가 진행된다면 주민들만 피해자가 될 거라는 불안감이었다.

암청도의 겨울 바다는 폐허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죽어가고 있었다. 개펄 속 칠팔 센티미터 깊이에 숨어 있어야 겨울을 나는 조개들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개펄 위에 나자빠져 있었고, 바꿔 꽃은 해태 취재목은 아무 것도 달라붙지 않은 꼬챙이 그대로였다.

참다 못한 종길이와 만수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갔다. 변호사 사무실은 언젠가 한번 들렀었는데도 영 낯설어 보였다. 사무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 그러지 않아도 지금 연락하려고 타자를 티고 있던 중입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고생들이 많으시죠?

사무장이 반가와 하는 목소리에서 두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 번 일이 어긋나버릴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공장측에서 어찌나 열심히 수거 작업을 하는지 이러다가 증거조차 남지 않게 생겼습니다. 취재목도 바꿔 꽂죠. 취재석도 갈아넣죠, 선생님들한테선 연락조차 없죠, 그래서 이렇게 쫓아왔습니다.

사무장은 잠깐 어색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그 사정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래서 연락하려던 게 아닙니까. 아무리 헤매도 전문가를 찾을 수가 없어요. 하나같이 바쁘다고 우리의 청을 거절합니다. 외국에 나간 사람들은 돌아올 날이 멀었으니 어쩔 수 없구요. 우리 강 변호사님께서도 국제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엊그제 이번 일을 걱정하다 떠나셨어요. 떠나시며 이 사건을 어떻게든 도와줄 방도를 찾아보라고 하셨지만, 어디 용뺄 재주가 있습니까. 그래서 취소통보를 보내려던 참입니다. 이거 정말 면목없게 됐습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글쎄요. 우리도 며칠씩 잠도 못 싸가며 뛰어다녀 봤습니다. 우린 최선을 다했습니다. 더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했다. 훌렁 벗어진 머리통을 재떨이로 갈기고 싶은 능글맞은 모습이었다.

만수와 종길이가 난감한 표정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빠져 나오는 시간에 이번 암청도 오염 사건을 의뢰 받았던 강변호사는 국제 회의에 참석하러 외국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식집이 즐비한 어느 호젓한 요정에서 몇 사람의 신사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마주앉은 안경 쓴 신사가 무릎을 치며 신이 나서 웃었다.

그거 아주 잘하셨습니다, 외국에 가셨다는 데야 꼼짝 못하는 거죠. 우리 회장님이 따로 한잔 사실 모양이던데요.

저고리 섶이 짧은 여자의 허리를 감아쥐고 있던 강변호사가 안경 쓴 신사의 입을 막는 시능을 하며 말을 받았다.

이 사람아. 내가 이때나 한번 선배 노릇을 해보려는 거지 그까짓 술 한잔에 녹을 사람 같은가? 술이야 나섰다 하면 천지에 가득하다구.

그거야 우리 회장님이 저를 내보낼 때부터 다 계산된 거 아닙니까. 저도 선배님 덕분에 실력 발휘 한번 멋지게 해냈구요.

술은 몇 순배가 더 돌아 모여 앉은 사람들이 웬만큼 취해버렸다. 한복 입고 시중드는 앳된 여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반라가 되어갔고 그때마다 지폐가 그들의 속 옷 사이로 들어가곤 했다.

선배님, 이건 우리 회장님이 성의 표시로 드리는 겁니다. 적지만 받아두세요.

안경 쓴 사내가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왜 이래. 나를 이렇게 시시하게 만들 셈이야. 강동호를 뭘루 보는 거야!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호기에 찬 목소리였다.

이건 일단 받아두세요. 선배님은 뜻을 펴야만 하잖습니까? 돈이 있어야 그 뜻도 펼 수 있고,,,,-, 그러면 우리 같은 후배들도 빽이 생기고, ,,,,,

글쎄 이건 넣어 두라구. 때가 되면 내가 찾아가서라도 달랠 테니까. 이 강동호가 정치를 한다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을 걸. 세상은 길게 봐야 하는 거야. 알았어? 내 말!

안경 쓴 사내는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 강변호사를 부축하는 체하면서 호주머니 속에 봉투를 넣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까만 승용차 속엔 술시중 들던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승용차는 밤늦은 골목길을 비추며 사라져 갔다.

 

종길이와 만수는 이곳저곳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달린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생각한 것만큼 변호사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 신문보도를 보고 대충 알고 있습니다만 다른 사건을 맡아놔서 시간이 없습니다.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웬만하면 제가 맡아보면 좋겠는데 사건이 워낙 크고 시간이 마땅치 않습니다. 다른 데 좋은 분을 한번 찾아가 보시죠.

거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할 수없이 미국에 있는 충현이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사건의 내막을 알렸다. 충현이는 학위 논문 준비로 당장에 귀국할 수 없다며, 대학 동창생인 윤 변호사를 찾아가 보라고 챘다.

다음날 두 사람이 충현이가 일러준 대로 윤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 사건이 충현이네 일이라니 어떻게든 도와줘야겠습니다만...... 제가 그 사건을 맡을 처지가 못됩니다. 어디 마땅한 사람을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기대를 걸고 찾아온 두 사람에겐 또 한번 실망을 안겨주었다.

충현이가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윤 변호사님이라면 꼭 도와주실 거라고. 저희들 힘으론 어쩔 수가 없어요. 혼자 계시는 충현이 아버님을 생각하셔서라도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만수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바싹 당겨 앉으며 윤 변호사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다.

글쎄 더 말씀 마시고------그만한 사정이 있다잖습니까. 제가 이따 밤에 충현이에게 국제 전화를 넣겠어요. 절대 오해를 마시고, 여길 한번 찾아가 보세요. 저보다 더 열심히 도와줄 겁니다. 제라 그쪽에도 전화를 해놓겠습니다.

윤 변호사에게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 같아서 더 조르지를 못했다, 윤 변호사가 그려준 약도를 받아들고 변호사 사무실을 내려서는 두 사람은 몹시 피곤한 표정이었다.

복작거리는 골목길을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차라리 고냥 내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슨 사건이든지 돈만 주면 맡아줄 줄 알았던 변호사들의 고자세가 마음에 자꾸 걸려왔다. 사건의 내막을 번히 알고 있으면서 시간이 없다느니, 그런 사건은 취급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속는 셈치고 윤 변호사가 소개해준 신변호사를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또 허탕치는 거 아닐까? 괜히 품만 파는 거 아녀.

만수가 걷다 말고 종길이에게 말을 걸었다.

해보는 데까진 해봐야지.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어. 돈 없고 빽 없는 놈은 죽을 수밖에 없게. 죽어도 끝장을 내볼 거야. 씨팔, 이판 사판이니까.

종길이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종길이는 담배 가게 앞에 멈춰 서더니 주택 복권 두 장을 샀다. 그리고 한 장 을 뒤따라오던 만수에게 내밀었다.

누가 알어. 이거라두 쩍 들어 붙을지.

주택 복귄 한 장을 받아든 만수는 힘없이 웃었다. 큰길가에서 골목으로 꺾어들자, 윤 변호사가 그려준 이층집이 보였다. 부옇게 퇴색된 그 건물 아래층엔 조그만 문방구와 미장원이 들어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낡은 나무 계단은 모서리가 다 닳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밟을 때마다 삐거덕거렸다. 어쩐지 변호사 사무실이 거기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괜히 헛걸음을 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갓 삼십이 넘어 보이는 신변호사는 윤 변호사에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윤 변호사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이해를 하세요. 대신 제가 열심히 해볼 테니까요. 여기저기 다녀 보셨다니까 잘 아시겠습니다만 이번 일은 쉽지 않은 사건입니다. 아무튼 자세한 얘기나 들어보죠.

신변호사는 종길이와 만수가 설명하는 사건의 내막을 메모지에 적어나갔다

내일 모레 내려가겠습니다. 그 동안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왜들 이 사건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만수가 궁금했던 얘기를 꺼냈다. 신변호사는 난처한 듯 맘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동호 변호사가 사건을 포기할 정도라면 승산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했겠죠. 그뿐만 아니라 대재벌과의 민사 재판이란 그리 쉬운 게 아녜요. 아무튼 그런 일은 신경쓸 거 없어요.

두 사람은 그 말뜻을 알 듯도 했고, 모를 듯도 했다.

이틀 뒤 신변호사는 해상오염의 전문가라는 나이 지긋한 신사 두 명을 데리고 암청도에 도착했다.

변호사 일행은 해변과 선착장을 먼저 조사하기 시작했다. 썰물 때가 되자, 개펄과 취재목을 수거하여 준비해온 통에 담았고 조그만 실험관에 폐유 찌꺼기를 넣어 밀초로 봉하기도 했다. 눈에 핏발이 선 청년들이 조사반의 뒤를 따르며 I시중을 들고 있었다. 변호사 일행을 돕느라 나와 있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마 어젯밤에도 밤 바다를 헤맸던 것 같았다.

조사반이 굴 양식장으로 들어설 때쯤, 어떻게 알았는지 정유공장의 감시선 척이 물길을 잡으며 양식장으로 들어왔다. 정유공장의 비서실장 일행이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변호사님이 어느 분이시죠?

여깁니다. 왜 그러시죠?

신변호사가 취재석을 들고 있다가 괸 물에 손을 씻고 다가갔다. 비서실장은 자기소개를 하고, 명함을 내밀었다.

이거 수고가 많으십니다. 진작 찾아봤어야 되는 건데,,,,,, 마침 오셨다기에 우리 쪽 조사반도 같이 나와 찾아봤습니다. 대법원에 있다 이번에 고만두신 성 변호사님 잘 아시죠? 아까 연락을 드렸더니 신 변호사님이 아주 유능한 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시던데요.

원 별 말씀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내려왔는데 어떻게 아셨죠?

신변호사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다 아는 수가 있죠 뭐. K대학의 김 박사 팀이 조사를 맡으셨다구요.

제겐 은사가 되십니다. 그래서 청을 드렸죠.

세밀하게 조사를 해보셔야 할 겁니다.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소견이 어떠셨는지,,,,,,

신 변호사는 개펄에 뭉쳐 있는 기름 덩어리를 장화 끝으로 툭 쳐서 비서 실장 앞에 던지며 말했다.

유류에 의한 오염 지역이 너무 넓어요. 피해가 상당히 크구요. 현재까지의 증거로는 아직 이렇다고 말씀드리기는 이릅니다만,,,,,, 한번 공장의 폐유 처리시설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주 좋은 제안입니다. 안내해 드리죠.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이런 폐유 찌꺼기가 우리 공장에서는 도저히 나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튼 더 조사를 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찌꺼기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요.

양쪽의 조사반은 밀물 때까지 양식장 구석구석을 훑어가며 조사를 진행했다. 만조가 되어 감시선이 선착장에 닿을 수 있게 되자 비서실장은 신 변호사 일행을 태우고 떠났다.

 

이 거액의 청구 소송은 신문의 하단에 간략하게 사건의 내용만 보도되었다. 암청도 주민과 정유공장의 민사 재판은 참으로 느리고 지루하게 끌어나갔다. 암청도 주민들에겐 절실한 문제였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혀질 만큼 재판은 답답하게 끌어나갔다. 예년 같으면 한창 일손이 달려 외지에서 일꾼을 사들일 만큼 바빴어야 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당장 겨우살이 걱정을 하고 앓아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씨조개를 뿌릴 만큼 양식장이 깨끗해진 것도 아니었다. 취재목이나 취재석을 바꿔 꽃을 시기도 물론 아니었다. 하긴 봄을 기다려 새로 양식장을 다듬는다 해도 대합을 수출하려면 칠팔 년을 기다려야 했다. 국내에서 소비하려고 해도 삼사 년 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굴은 생산 속도가 다른 해산물에 비해 빠르다고는 하지만 한번 망해 버린 암청도의 해산물을 사가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당장 승산이 나는 재판 같으면 고리 빚이라도 얻어다 쓰겠지만. 재력 있는 정유 공장이 쉽게 포기하지 않고 대법원까지 물고 늘어질 게 뻔해 보여 그 짓도 못하고 있었다. 재판이 일 년만 끌어 나간다 해도 암청도 주민들은 지쳐 나자빠져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죽으나 사나 재판에서 이기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끼니가 간데 없고, 애들이 학교를 쉬는 한이 있더라도, 고리고 외지에 나가 막벌이를 해서라도 견디어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판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런 걱정은 일시에 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멀쩡한 양식장 같으면 내놓기 무섭게 제 값을 받을 수 있겠지만 몇 년 동안은 쓸모가 없어져버린 개흙덩어리를 어느 누가 값을 먹이겠는가. 암청도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변화에 대처해 나갈 만한 다른 묘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외지에서 흘러 들어온 몇몇 집은 이사짐을 꾸려 암청도를 떠나기도 했다.

이 해의 겨울은 전에 없이 모진 바닷바람을 타는 것 같았다. 걱정거리가 쌓여 가는 사람들에겐 유독 추워 보이는 겨울이었다, 최 부자네 쌀 가게나 만물상에서 외상으로 대어 먹는 생활비만도 더는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최 부자가 모아놓았다는 재산이 고작 그것뿐이냐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 한겨울에 어디 가서 땅땜하란 말여. 날이 풀려야 지게 품을 팔든 남의 집을 기웃거리든 할 거 아녀?

물들인 군용 잠바 깃을 귀 끝까지 세운 사내가 이렇게 투덜거렸다

면장 어르신네도 할만큼은 하는 거지 뭐. 더는 어떻게 하것어.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바다를 힘없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 그걸 누가 몰라. 하두 답답하니까 그러지. 엠병할 놈의 세상.

그나저나 재판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여?

돈 가진 놈이 이기는 거 아녀? 뭐 믿다가 쪽박 찬다구. 우리가 그짝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겄어.

손끝이 노랗게 물든 사내가 꽁초를 끝까지 피울 것처럼 빨아대며 이렇게 말했다.

만수하고 종길이가 여간 고생하는 거 아녀. 돈이래두 있다면 후딱후딱 해볼 지 모르지만---

만수는 지쳤나봐. 세간 살이를 내놓은 모양이지. 어디 가서 굶겠어. 그만한 사람이.

요즘 통 보이지가 않어. 만수도 수철네처럼 어떻게 되는 거 아닌지 몰라. 공장 사람들 하구 얼려 까니 나보던데.

아무려면 만수가 그럴려구. 어떻게 잘 해결해 보려구 그러겠지,

그 일 때문에 종길이하구 다투기까지 한 모양이던데. 하여간 씀씀이도 헤프고 어디 가서 장사라두 해야겠다고 하는 걸 보면 이상하긴 이상해. 돈줄 없이 그런 말 했겠어. 젠장할 놈의,,,,,,

선착장에 쪼그리고 앉아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들은 연신 지껄이고 있었다. 바람 잔 선착장의 양지 끝은 한결 따스해 보였다.

덕보네하구 판길네는 애새끼들까지 전부 공장에 취직이 됐다지? 우리 같은 놈은 눈꼽만한 땅 땜에 그 짓도 못하고.

한숨을 내쉰 사내가 침을 타 뱉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예 정유 공장에서 사자고 조를 때 팔걸 그랬어.

미친 소리 말어. 그래도 땅 파 먹고 사는 놈이 속 편한 저여.

이들은 햇살이 기을 때까지 선착장 양지 끝을 떠날 것 같지 않았다. 암청도 사람들은 어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연히 봄이 오면 재판도 끝날 것 같았고 기름내 가신, 모질게 살아남은 해태나 조개도 약간씩은 건져질 것 같기만 했다.

바닷바람은 우수가 지나면서 눈에 뜨이 게 따사로와 졌다. 양식 장을 거슬러 오는 남쪽의 갯바람이 봄기운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암청도 사람들을 더 달뜨게 한 것은 지방 법원에서 개정을 알리는 소식이 날아온 것이었다. 우선 지방 법원에서 승소만 하더라도 생활은 변통이 될 것 같았다. 신변호사 말처럼 승소가 확실하다면 인근에서 금전 변통은 물론 쌀변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청도가 하루 아침에 폐촌이 되어 버리자 인근의 인심도 메말라져 암청도 사람이라면 고리 쌀변도 놓지 않게 되었었다. 이렇게 암청도 사람들이 술렁이고 있을 무렵 만수는 이사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아, 여태 그 고생을 하구 떠나긴 어딜 떠난단 말인가.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걸.

누구는 여기가 천당 같아서 사나. 배운 게 도둑질이나구 뱃놈보다야 낫지 않아. 조금만 참세, 이 사람아.

동네사람이 이렇게 말리고 나서자 짐을 챙기다 만 만수가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

이젠 지긋지긋해요. 뻘흙에 코 박고 기를 써봐야 맨날 그놈이 그 타령이고. 이 판에 벗어붙이고 나서면 굶기야 할라구요.

종길이는 짐을 챙기는 만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만 뻑뻑 빨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붙어 다니다시피 한 친구였다. 군대 밥까지도 거의 비슷하게 먹고 삼십이 다 되도록 말다툼 한번 심하게 해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충현이와 셋이서 삼총사란 별명을 들어온 단짝이었다. 오리 길을 통학하며 쌓아온 우정을 생각하면 헤어진다는 게 보통 가슴 아픈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암청도에서 뭍의 고등학교라도 다닌 건 종길이와 만수뿐이었다.

정말 떠날 거여? 정말,,,,,,

종길이는 만수가 암청도를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이렇게 물었다.

뼈빠지게 매달려봤자, 남는 건 빌어먹는 팔자뿐 아녀. 아무 말 말어. 그냥 떠나게 내버려둬. 내 가서 연락할께. 꼭 만나게 될걸 뭐.

전에 없이 다부지고 분명한 말투였다. 더 날은 하지 않았지만 괴롭기는 마찬가지인 듯 세간살이를 부지런히 챙겼다.

너한테 심한 소리 한건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가 꼭 이기게 될 거여. 그때는 니가 다시 와야 된다. 알았어!

아녀. 그건 내가 오해받을 짓을 했어. 그런 걱정 말고 열심히 해야 돼, 나도 반드시 여길 오고 말 거여.

뭍의 배턱에 이사짐이 닿자, 대기하고 있던 화물차가 짐을 받아 실었다. 가족들을 앞자리에 태우고, 개줄을 붙잡고 화물차 뒤에 앉은 만수가 처량해 보였다. 만수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종길이는 담배를 앞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화물차 꽁무니에서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며 화물차는 어기적어기적 움직였다. 만수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꼭 다시 올께, ,,,,

종길이의 눈에는 금세 물기가 가득 서렸다. 종길이는 아무렇게나 코를 휑 풀고는 돌아섰다.

 

개정되던 날 새벽부터 암청도 주민들은 Y시로 떠나기 위해 서둘렀다. 암청도 주민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만 한 날이었다.

법원 마당에는 정유 공장 소속의 버스 두 대가 눈에 띄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 것 같았다. 신변호사는 큰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정유 공장 쪽의 변호사 역시 커다란 가방을 들고 들어와 신변호사와 대각선을 이룬 자리에 앓았다. 암청도 사람들은 긴 나무의자에 모여 앉아 개정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변호사는 암청도 주민들을 한번 쳐다보고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승소를 확신하는 여유만만한 몸짓 같았다.

이 한판 승부는 암청도 주민이나 정유 공장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고러나 암청도 주민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면 너무나 명백한 물적 증거를 암청도 쪽이 가지고 있었고 피해 현장이 육안으로 직접 확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그 해수 오염의 원인이 정유 공장 때문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동안 신변호사가 면밀하게 조사 분석해서 마련한 증거가 결정적 역할을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정유 공장측에서 방류된 폐유일 거라는 일반적 심증은 누구나 부인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암청도 주민들의 승리는 굳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재란 과정에서 뚜렷한 물적 증거와 확실한 증인만큼 유리한 것은 달리 없을 것이다. 암청도 주민들은 긴장해 있으면서도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승소할 거라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재판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신변호사가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암청도 주민들은 겉으론 무표정하게 앓아 있었지만 속으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유 공장측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증인의 출석을 요구했다.

법정의 쪽문이 열렸다, 모든 사람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고리고 암청도 주민들은 숨을 멈춘 듯 놀라고 말았다. 거기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들어서는 사람은 만수였기 때문이었다. 만수는 보따리를 옆에 끼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정유 공장측 변호사가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고 여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배석하신 여러분과 방청하시는 여러분. 이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증인의 입에서 놀랄 만한 얘기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암청도의 몇몇 젊은이들이 일확천금을 꿈꾸고 조작해낸 최대의 사기극임을 이 증인은 낱낱이 밝힐 것입니다,

만수는 침착하게 증인석에 서서 법정을 한바퀴 훑어보았다. 법정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종길이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온통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엔 암청도가 폭격으로 쑥밭이 되어 버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돈 뭉치와 기름 덩어리가 마구 날아와 암청도를 때려부수는 장면이었다. 만수는 재판장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방청석을 향해 또 한번 깊게 머리를 숙였다. 암청도 주민들은 고개를 돌렸다.

증언하기 전에 먼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거짓말로 증언하면 죄가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건 위증죄가 됩니다. 증인은 진실만을 말하시오.

그렇다면 선서한 대로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정유 공장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 거짓말이 죄가 된다면 달갑게 벌을 받겠습읍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매수를 당했읍니다. 아니 분명히 말씀드린다면 제가 자청해서 현금 2천만 원에 팔려갔습니다. 이 양복도 그 사람들이 해주었고, 여기 이 수표도 그 사람들에게서 받았습니다. 그리고 알아 냈습니 다. 오염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그들의 수단과 방법을 말입니다. 저는 우리들의 땅, 그 보잘것없는 개흙 땅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돈 있고 힘있는 그들과 싸우기 위해, 그래서 내 땅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 손으로 내 땅에 폐유 찌거기를 뿌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또 매수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들보다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것이 죄가 되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자리에 하느님이 계신다면,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 재판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변호사와 해상오염 전문가와 관계 공무원들을 매수한 증거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이 돈으로 떠는 편히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젊었습니다. 저는 그 보잘것없는 개흙 땅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고 싶습니다.

법정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재판장이 방청석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쉽게 소란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만수는 법정이 소란해져 더 말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옆에 두었던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 방청석에 있는 암청도 주민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입고 있던 양복을 벗었다.

만수는 때 절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현대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술의 견학  (0) 2021.09.30
대역인간  (0) 2021.09.30
어떤 시작  (0) 2021.09.30
칼과 뿌리  (0) 2021.09.30
만가  (0) 2021.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