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연의 생
25년간의 나의 삶을 조용히 정리하는 것도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그리고 조금은 그의 생각이 멋지게도 느껴졌다. 누가 이런 것을 써서 교환하겠는가? 먼 훗날에 생각하면 멋진 사랑의 한 장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기뿐마음으로 솔직하고 꾸밈없이 적도록 노력해 보겠다.
나는 1962년 11월 5일(음력)에 주대채와 장은자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자손이 귀한 집안이어서 언니는 딸이어도 매우 환영을 받았던 모양이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덕택에 태어나자마자 대문에 지성스럽게 쳐두었던 할머니 솜씨의 고추달린 금줄은 아버지의 서운함으로 인하여 걷치고 고추가 빠진 금줄이 다시 쳐지는 불상사도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모두 살아계셔서 그 분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던 모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 일곱 이레가 지날 때까지 금줄이 쳐져있었고 동네사람들의 출입을 금했으며 새벽 4시만 되면 할머니는 머리를 감으시고 해가 뜨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빌고 또 빌었다. 태어난 아기의 장래에 대해서 그것은 물론 나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태어난 막내까지 모두에게 똑 같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이름을 지으셨는데 연(蓮)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연자앞에 복자를 붙여 복연이라 부르면서 귀여워 하셨다. 언니는 어렸을 때 날림이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를 잘 속여 먹었고 과자를 사서 먹어도 항상 나는 나의 몫의 반도 못먹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자를 사면 양손에 나눠지고 한손은 내것 다른 한 손은 할아버지의 것하며 할아버지에게 드리면 할아버지의 것을 언니는 항상 빼앗아 먹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조금씩 걷기 시작했는데 늦되었는지 벽을 잡고 걸었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풍으로 누우셔서 약 일년정도를 대소변을 혼자 못보시고 받아낸 모양이다. 엄마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지 소변 심부름은 깡통을 ‘깡’이라 부르면서 다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없는데 단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다. 행동 발달은 둔했지만 두뇌 발달은 빠른 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침착해서 별로 힘들지 않게 키웠단다. 어렸을 때 또하나의 들은 이야기는 울음에 관한 이야기다. 어려서 잘 울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울기 시작해서 그치지를 않아 매를 때려도 달래도 무관심하게 놔둬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절 이상을 울어서 힘이 빠져 숨을 못 쉬도록 울자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혼이 난 적이 있었단다. 또 조금의 고집이 있어서 내가 하는 것은 항상 옆에서 간섭하지않고 가만히 두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대굴대굴 구르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 아버지께서 데리고 있던 일꾼과 함께 밥을 먹는데 3살 정도때 혼자서 먹자 옆에서 먹고 있던 일꾼이 밥을 장에 비벼준다고 빼앗아 갔던 모양이다. 할머니께서 말리셨는데도 굳이 빼앗아서 밥을 비비자 밥을 먹다가 데굴데굴 굴러서 옆에 있던 뜨거운 숭늉에 손목을 데었다. 덕택에 지금도 왼쪽 팔목에 흉이 남아 있음은 그때의 못된 성격을 증명해 주는 셈이다. 순진하게 심부름을 잘한 반면에 상당한 고집을 가지고 남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 후에 현수가 임신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현수가 태어난 후로는 대접을 받았단다. 터를 잘 팔았다는 명목하에 엄마와 아빠 둘이서 가는 여행에도 낄만큼 다른 기억은 없고 홍이 태어난 이후로 집에 전축이 들여졌다. 그때는 트위스트가 한창 유행이었고 레코드에 맞추어 4명이서 춤을 추었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우리에게 잠정적인 교육을 잘 시켰던 듯하다. 농속에는 항상 우리의 간식이 있었는데 주된 것은 숫자로된 건빵과 영어 알파벳 건빵이었다. 노래를 시켜서 잘하면 그만큼의 보상으로 건빵을 주었고 알파벳을 A부터 Z까지 맞추기 또는 아라비아 숫자를 0부처 9까지 맞추어야만 자기가 맞춘 건빵을 모두 먹게해서 자연스럽게 숫자를 익혔고 노래도 익혔다. 첫 아이였던 언니는 4월생이기 때문에 7살에 입학하여 그때부터 난 학교라는 곳에 가기 시작했다. 언니와 엄마 그리고 나까지 학교에 아침마다 출근을 한 것이다. 언니 덕택에 난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느정도의 국문을 익혔고 학교에 가고 싶어서 안달을 했으나 언니가 더딘 이유로 나는 8살이 되어서야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일학년을 조금 다니다가 봄 소풍때 홍역을 얻어서 아프기 시작하여 그때 유행하고 가장 무서운 병중에 하나였던 장티프스까지 옮아 학교를 잠시 쉬었었다. 내가 아파서 언니에게 옮겨주고 그것이 현수에게 옮아 셋이서 한꺼번에 아팠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 등에 업혀 주사맞으러 갔다가 마루에 내려두었는데 어디가 방인지 찾을 수 없었던 일과 요강에 소변을 보다 몸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일 또 안방에 누워 있을 때 할머니가 죽을까봐 우시던 일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에 알았던 것이지만 안방으로 알았던 곳이 골방이엇다고 한다. 병이 옮기지 않도록 격리시켰던 것을 대학에 간 후에야 알았다. 그때는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무척이나 부러웠으나 재발되기 쉬우니 완치될 때까지 쉬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계속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받아쓰기도 엉망이고 성적도 형편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반에서 11등을 하게 되었다. 그당시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검정 고무신을 많이 신고 다녔었는데 나는 항상 빨강색 운동화를 신었다. 때문에 신발을 잃어버려 선생님이 챙겨준 큰 검정색 남자 고무신을 신고 집에 오는데 도저히 챙피해서 올 수 없었다. 꾹 참고 집대문까지 오긴 했는데 그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가면 모두 웃으며 놀릴 것 같아 대문 앞에 벗어 놓고 맨발로 집에 들어갔다. 3학년에 올라와서부터 성적에 어떤 향상이 있었는지 반에서 우수학생 7명에게 시험지 대금을 부담시켰는데 그 그룹에 끼여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3번이나 바뀌는 통에 반이 좀 무질서 했었고 4학년이 되었다. 주위에서 공부가 늦터졌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월말 시험에서 학력장 및 노력장을 받기 시작했고 간부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금 내성적이었던 성격을 고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수업시간에 발표를 많이했고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또 교내 합창부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합창부 모집은 간부들 중에서 노래에 재질이 있는 사람을 선발해서 모집했기 때문에 교내의 학생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합창연습은 수업 후에 있어서 귀가시간은 늦었다. 4학년이 나에게는 어느정도 전환기가 되었고 유아기적인 시야가 조금식 깨어지고 트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막연하게 우리나라 실정과 미국을 비교하게 되었는데 그당시 나에게 있어서 미국은 천국과도 같은 것으로 느껴졌고 한국은 땅부터 좁고 가난하고 게다가 북한과 맞서고 있다는 것이 가장 아프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문제가 많은 곳에 태어나게 하신 것에 대해서였다. 왜냐하면 내가 할 일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부모님께 서서히 인정을 받아가기 시작했다. 성실하고 착하고 소풍갈 때 준 용돈까지도 아껴서 엄마에게 돌려주든지 아니면 저금통에 저금하는 엄마 마음에 꼭드는 딸로서 뿐만 아니라 언니가 만족시켜드리지 못한 공부까지도 만족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어느 곳에 가서든지 딸자랑을 아끼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나 엄마 친구분들은 가수라 부르며 귀여워 했었다. 나의 모습이 호전되어가는 반면에 집안은 엉망이 되고 있었다. 어느날 하교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머니께서 쓰러지셔서 돌아가셨고 그전에 아버지께서 모시던 국회의원 정의원이 낙선되었고 설상가상으로 김의원의 낙선은 우리집안의 기둥을 흔드는데 충분했다.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한해였다. 처음으로 엄마가 쌀이 떨어져 걱정하는 모습을 보았고 아버지를 통해 어렴풋이 느끼게된 부정선거에 굉장한 불이 가슴에서 일고 있음을 느끼면서 판사가 되고 싶었다. 그 당시에 판사는 모든 것의 참 거짓의 여부를 가려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5,6학년깨에도 합창부 활동은 계속했었고 5학년 때에는 전라남도 대표로 서울대회에 참가해서 2등을 하고 돌아왔다. 6학년때부터 아버지께서 시작하셨던 운수업이 실패로 돌아가 마침내는 조그마한 우리의 보금자리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 이곳저곳 돈을 모두 갚고나자 남은 돈은 불과 몇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둘러본 끝에 겨우 얻은 집이라곤 돼지나 살지 사람이 살지 못할 것 같은 집이었다. 방은 두 개였고 모두들 세들어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이었는데 이사한 뒤로 며칠동안은 화장실이 무서워서 가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생활비가 없게 되니까 하는 수없이 밥대신 싸라기를 사다가 밥을 지어 먹었다. 이곳저곳 이모들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겨우 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들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합창부활동을 하면서부터 줄곧 매우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도 포기하고 가장 극한 상황으로선 학교문제도 닥쳤다. 그 때 언니는 중3 나는 초등학교 6학년 현수는 6학년 홍이 초등학교 1학년 미가 4살 막내가 2살이었다. 나는 학교를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다. 엄마는 야간을 보내고 언니를 고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생각을 굳히기 시작했다. 헌대 중학교에서 납부금 독촉에 질려있었고 공부에 이미 흥미를 잃어버렸던 언니가 스스로 포기한 덕택에 나의 중학교 진학이 무사히 결정되었다. 겨울방학은 졸업반이기 때문에 무척 길었는데 집에서는 그동안 식구들의 입을 더는 것이 급선무였다. 언니는 서울에 계신 삼촌에게 가서 양장섬 일을 도와주게 되었고 나는 방림동에 사는 이모할머니댁에 애기를 본다는 명목하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식모를 구하던 중에 못구하고 내가 가게된 것이기 때문에 식모나 마찬가지였다. 간난아기부터 위로 두명의 여자아이까지 3명의 뒤치다꺼리, 빨래, 설거지, 음식은 어려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소부터 물대는 일은 도맡아서 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동상이 손에 걸렸고 속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데 집에 보내면 오지않을까 우려된 할머니는 나의 그러한 사정은 조금도 고려해 주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밥하는 것을 돕고 했지만 밤 11시 정도에 잠자기 전에 일기쓰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 속에 나의 가장 밑바닥의 모습 아니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도 적혀있었다. 아이들이 먹고 있는 것을 먹고 싶어서 할머니가 감춰둔 곳을 찾아 먹었던 일, 밥상에서 좋은 반찬을 못먹게 했을 때의 자존심 상함,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흘렸던 일, 할머니 보다 더 밉게 보였던 초등학교 교사였던 숙모의 이야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먹을 것에 대한 차별이었다. 아이들은 주면서 남아도는 간식이나 과일 등을 나는 대부분 제외시켰다. 그에 관한 나의 모든 마음, 감정들이 하루하루 기록되어졌는데 중학교때 언니가 읽어서 싸운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의 보여주고 싶지 않는 가장 밑바닥의 모습이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2때 옆집의 총각이 나의 일기장을 읽어보고 그 내용을 공개하고 말았다. 나는 울 수밖에 없었고 나의 머릿속에서 또한 모든 주변사람들에게 나의 그러한 모습을 감추고 싶어서 태워버렸다.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내가 그곳에서 해방된 것은 중학교 입학하기 3일전 쯤으로 기억된다. 노트 몇권과 내의 한 벌을 얻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와 함께 울었다. 그 때 나는 몸무게가 28Kg정도로 빠져 있었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짐작하셨던 모양이다. 엄마는 겨우 나의 납부금을 마렸했고 중학교에 입학하여 진단고사를 치렀을 때 결과는 뻔했다. 그당시 도대여중에는 8개반중에 2개반은 우수학생 35명 열등아 3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우수그룹에서 떨어져 있었다. 일학년때 일반학급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담임이 가정방문을 하고난 후로는 나에게 대한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일년을 그럭저럭 마쳤는데 2학년 때 우수그룹에 들어갈 등수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반 편성을 보니 내가 빠져있었다. 나대신 우리반 실장이었던 아이가 들어있었다. 덕택에 6개반 중에서는 일등이었다. 중1때부터 시작했던 가게일이 조금씩 풀려간 덕택에 학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공부할 시간은 12시가 넘은 시간 뿐이었다. 가게를 변변치 못한 곳으로 얻어 갔기 때문에 가게 내에 상하수도 시설이 안되어 있었다. 그 심부름 뿐만 아니라 동생들 빨래 그 외 엄마의 잔심부름을 가게에서 도와야만 했다. 오직 공부는 수업시간이 나의 공부의 전부가 되었다. 2학년 때에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선생님께 인정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공부에 크게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여유도 없었고 환경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 국어와 가정선생님이 나의 정신적 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었지만 그것이 항상 가슴 깊이 받아들여졌다. 중3이 되면서 가게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방은 역시 한 개 뿐이었고 고2때까지 그 불편함은 계속되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우리집 사정을 이해해 주셨고 나의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영어선생님었는데 자기가 하고있는 과외공부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집에는 또 큰 문제가 생겼다.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던 아버지께서 사고로 다치셔서 4개월동안 입을 하게 된 것이다. 가게 때문에 간호할 사람이 없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집안 살림이었다. 도매장사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7살이었던 미가 다행히 입학하지 않아 미와 내가 아버지의 간호를 돕게 되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와서 반찬을 가지고 병원으로 가서 아버지를 간호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하고선 학교에 가야만 했다. 허리까지 석고로 기브스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서 대소변까지 받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가 고생을 많이 했다. 4개월의 그런생활을 마치고 중3은 지나갔다. 추첨에 의해 광주여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때 가장 좋았던 것은 교생선생님께서 조사한 급우관계에서 나와 사귀고 싶어하는 학생이 우리반에서 3명을 빼고 모두였단다. 교생선생님이 놀랐었고 나를 불러 이야기를 많이하게 되었다. 교생실습이 끝난 후에도 나에게 편지를 했었고 나도 답장을 보냈는데 오래가지는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상과 상품이 한 보따리 였다. 중학교 졸업식에서는 오직 졸업장과 3년 개근상 뿐이었다. 우등상도 공로상도 효행상도 기능상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성적이 연합고사 성적만 하면 반3등 진단고사를 포함시키면 7등이었다. 중학교 때 태워버린 일기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보였었다. 중학교 2학년때 효에 대해서 생각하며 나름대로 나의 발전임을 깨닫긴 했지만 집안 일을 거드는 정도밖에 미치지 못했고 그 외에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다. 환경의 부족 탓도 있겠지만 나는 나의 의지가 약했다고 여겨진다. 친구 중에 하나가 절름발이였는데 역시 2학년 때 우리반이었다. 그 친구의 가방을 일년동안 같이 다니며 다른 친구와 함께 들어주었다. 다리를 저는 친구를 보면서 가방을 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의 행동인가를 많이 생각했다. 친구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들지 않아도 충분히 들고 다닐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미치자 그 가방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중3부터는 나의 시간이 좀 더 많아졌다. 언니가 서울에서 내려와 집안일을 거들 뿐만아니라 가장 큰 것은 가게 상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원 입원때에 형부가 언니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줄곧 찾아와 울며 호소를 한 끝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버지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고1이 되었을 때 여름에 언니는 이미 철원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창피하게 느끼신 부모님은 언니를 방을 따로 얻어서 내쫓아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옳을 것이다. 집에 와도 창피하다고 빨리 가라고 재촉했으며 밖에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언니는 내가 고2가 되던 해 4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도 부모님께서 가장 불쌍하게 생각하는 자식이 언니이고 가장 의지하고 있는 딸이 내가 되고 있다. 그러한 환경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줄곧 큰 딸아닌 큰 딸이 되었다.
고1때의 나는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모범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가정방문을 하신 담임선생님께서 항상 정신적으로 따뜻한 배려를 잊지 않으신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중학교 때 떳떳하기 위해 굳굳하기 위해 날마다 일기에 다짐을 하고 중1의 담임선생님을 미워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밤잠을 설치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수학여행을 못보내겠다는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긴 하면서도 (왜냐하면 언니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사흘을 굶어서 억지로 허락을 받아 수학여행에 참가했던 때와도 달랐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말고 실업계 3학년 장학생으로 진학하라는 것에 말도 하기 싫어서 대답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집에 돌아와 일기를 쓰면서 울 때와도 달랐고 기어코 인문계 원서를 써 달라고 버틸 때와도 달랐다. 그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집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들 생각도 해서 용꼬리 보다는 뱀머리가 더 낳다는 표현으로 설득을 했다. 그 당시에는 상업계 고등학교가 커트라인이 더 높았으나 190점을 넘는 최상위 그룹은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수석을 바라보고 더 적극적이로 권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문계 원서를 썼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이 된다. 고1 때에는 단짝 친구를 얻었는 그들은 다름아닌 정매와 순점, 은희였다. 그때 맺아진 우정은 지금도 우리를 연결시켜주고 있다. 고1 때 가장 큰 소득은 친구 정매를 얻은 것이다. 또 성격검사와 지능검사 그리고 적성검사를 했는데 성격은 우리 반에서 가장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명랑성 등 긍정적인 사고의 근간이 되는 것은 100점 만점에 80 ~ 90점을 얻었고 의협심 우울성 등의 비관적인 부분들은 겨우 10 ~ 50점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놀라게 된 또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능은 현아라는 연대의대에 간 친구가 전교에서 136으로 제일 높았고 내가 그친구 다음으로 우리반에서 높았다. 하지만 130을 넘지는 못했다. 적성은 문과계통으로 나왔는데 언론계 계통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적응도가 10점 만점에 8점이 나와 어느곳에서나 적응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무난하다고 했다. 고2에 오를 때 이과와 문과로 나뉘어졌는데 학교방침이 이과쪽을 집중적으로 권하고 있어서 우수그룹의 많은 학생들이 이과를 택했고 나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고 2가 되어서는 정매를 통해 정매 삼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삼촌은 당시 대동고 2학년으로 나와 같은 학년이었다. 서로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 친구들 모임에서 시발표같은 것을 하곤 했기 때문에 서로 편지로 시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한달도 못되어 시편지는 끊기고 말았다. 주위의 반대 때문에 많이 섭섭했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 때 계속했었다면 지금쯤 멋진 시를 적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해 나의 가장 귀중한 그 때까지의 일기를 태웠고 나의 가슴은 항상 정의감과 뜨거운 정열로 불타고 있으며 나의 모든 행동이나 앞길에 대해 너무도 자신만만했다. 그러한 정의감과 정열은 윤리를 담당하신 김철구 선생님 덕택에 더욱더 커지고 있었다. 나는 항상 그 수업에 빨려들고 있었으며 정치, 철학, 효 경, 그 모든 것에 매료되었다.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강의는 일품이었다. 정치가 아니라 정치라며 삼수변 대신 사람인변을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고3이 되어서 모두들 긴장한 상태에서 시간은 빨리 흘러갔다. 그러나 4월 중순부터 술렁이던 대학가와 광주의 바람은 수업분위기를 흐트려 놓기에 충분했다. 급기야 5월이 되어 우리는 선생님들께 항의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정의를 위해 자유를 위해 동참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찾아 앉아있어야 하느냐. 선생님은 말과 행동이 다른 비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도 동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장했고 밖에서 함성이 들리면 수업은 항상 엉망으로 깨어지곤 했다. 지금은 당신의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라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선생님들이 무척 비굴해 보였다. 5월 16일 밤 횃불 데모에 이어 5월 17일 시가데모로 확산되자 학교는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18일부터 전경아닌 사람들이 방어아닌 공격을 해왔고 그 무기도 몽둥이가 아닌 총과 칼이었다. 얼룩얼룩한 제복의 남자들은 시내에 젊은 층의 남녀에게 횡포를 부려 전 시민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시민들 앞에서 칼을 사용했고 여대생의 옷은 벗겨지고 머리채는 잡아 끌렸다. 급기야는 발포하자 시민군단이 결성되었고 예비군의 무기고를 털어 모두들 무장했다. 같이 있었던 친구가 가족이 총에 의해 쓰러지자 온 시민은 한마음으로 시민 군단에 협력했다. 20일이 되자 제복의 남자들은 후퇴했고 시민군단 즉 수습대책위원회는 도청을 점령하여 시민들의 협조하에 모든 것을 해결했다. 음식부터 옷, 그리고 장례에 필요한 관, 태극기, 휘장까지도 시민들은 오전 10기만 되면 도청 분수대를 초점으로 날마다 약 10만명 이상이 모였으며 그 때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한 뜻임을 확인 했다. 22일 밖의 데모에만 참석했던 나는 수습대책위원회에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가입했고 그 때부터 도청이 다시 점령되기까지 활동했다. 나의 활동은 오직 시민군단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3으로 혼자뿐이었고 나머지 6명은 고2 고1 중학생도 한명 있었다. 나는 식사 준비의 지휘를 맡아서 배급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매스컴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았고 내 힘이면 못할 것이 없다라는 자만심은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26일 새벽 최규하님의 성명 발표로 인해 아버지는 내가 도청에서 나올 것을 요구했고 우리를 관리했던 성균관대생이 우리의 입장을 말해 주었다. 그 사람은 비관하고 있었고 더 이상 가능성이 없으니 고등학생은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었다. 우리는 유서를 썼다. 모두를 우리의 뜻을 위해 함께 죽자고 그러나 2시경에 밖으로 쫓겨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없이 울었다. 진정한 의미의 애국이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이제 참석을 못하게 하는 아버지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효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의리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염없이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의 힘의 미비함을 실감했고 이제껏의 나의 자신만만함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가를 실감했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윤리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만나서 얘기를 한 결과 다시 도청으로 향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당시에는 밤 8시가 되면 칠흑같은 어둠에 통행금지가 되어 있었다. 도청에 들어가자 같이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다. 부지사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수시로 연락이 왔고 그 많은 보병과 탱크에 무참히 시민군단은 깨어지고 있었다. 새벽 4시가 되어 성대생의 지휘하에 동명교회에 딸린 유치원으로 몸을 피신했다. 6시가 되자 전화가 불통이 되었고 지하에 두었던 다이나마이트로 자폭하기로 했던 것은 실패한 것 같았다. 7시가 되자 가택 수색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는 수없이 두명씩 짝을 지어 걸어서 집으로 갈 때에는 여자라는 것과 어리다는 것이 큰 도움을 주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은 탱크를 중심으로 전봇대 하나를 간격으로 2인 1조가 되어 끝없이 서 있었고 그 사이를 빠져나와 집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거의 다 되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돌아오자 엄마는 나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광주의거는 힘없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끝이 나고 있었고 다음달 초부터 다시 학교에 등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광주의거의 실패는 나에게 커다란 실망과 나의 모습을 재확인 하게 했었고 긍정적으로만 보이던 세상사가 많이 부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데모의 실상이 무엇이고 데모 뒤에 남는 것이 무엇인가도 느끼게 했다. 나의 마음은 수습되지도 않고 있는데 10일 정도가 지나자 광주는 겉보기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단지 세무서 건물이 없어져 버렸고 문화방송국이 다시 건축을 시작한다는 것을 빼고는 그보다 나를 더욱 심하게 괴롭힌 것은 가장 믿었던 대학생이 최후까지 남아있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최후까지 남은 사람은 오직 못배운 젊은층의 청소년과 예비군, 그리고 공장 등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지식층은 수습대책위의 간부 몇 명 뿐이었다. 그것은 누구에데 말할 수 없는 광주인의 치부라고 생각이 되면서 나를 못살게 굴었다. 급기야 다시 윤리 선생님과 상담을 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까지도 털어 놓았다.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질문을 했고 데모의 필요성에 대해 목적에 대해 효과에 대해 질문을 했고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 답변을 주셨다. 겨우 안정을 찾은 나에게 또다시 실망을 준 것은 문교 정책이었다. 본고사 폐지가 7월에 발표됨에 따라 논술형 문제에 매력을 가졌던 나는 공부의 패턴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집에서는 수험생대접을 해 주지도 않았고 고3 9월이 되어서야 나의 공부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서야 겨우 단칸방에서 해제된 것이다. 나의 공간이 마냥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러저럭 세월은 흘러갔고 준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예시는 치루어졌다. 나와 비슷한 성적을 유지했었던 친구들에 비해 점수가 20점 정도가 낮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내신이 좋았던 덕택에 사태 수교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상위 20%에 지급되었던 장학금은 받지 못했다. 예시가 끝나고 9명이서 계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1등부터 9등까지였다. 지금은 두명이 탈퇴하고 7명이 남았다. 만족스럽게 운영이 되진 못하고 있다. 그 모임은 전대의대 1명 치대 2명 조선약대1명(그 당시에 전대에 약대가 없었음) 전대사대 2명(수학,영어) 이화여대 1명. 서울대 간호학과 1명 전대공대 1명이었으나 이대친구와 사대 영어과 친구는 다시 의대로 진학했다. 모두들 엘리트 의식이 강했고 자존심이 강했다. 입학식하기 바로 전에 선배의 권고 때문에 의대 써클 나이테에 가입했고 2월한달 동안 놀기에 정신없이 바빴다. 입학한 후에는 뜻하지 않게 과대표의 감투를 쓰게 되었고 이학교육계열 부학생장을 맡게되어 여학생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나이테에서 노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과활동과 여학생회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공부와는 멀어졌고 그 후로 4년동안 나의 대학생활은 1학년때와 비슷했다. 덕택에 운동권 써클에 가입은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3때의 데모에 관한 실상을 체험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매년 봄, 가을이면 심한 고민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항상 데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데모를 직접 뛰지 않았던 것은 정매의 만류가 워낙 강했었고 집안에서 형편이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3월 8일에 남동생 현수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뒤에 친구를 태우고 택시와 트럭 등과 사고를 내서 친구가 죽고 동생은 머리와 대퇴부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머리를 보고서 정상이 되는 것을 포기했었고 절름발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단은 4개월 반이 나왔고 사건처리는 우습게 되었다. 돈의 무서운 힘을 그대로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든 것이 동생의 잘못으로 조서가 꾸며졌고 그에 대한 보상도 우리가 해야만 했다.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동생의 모습을 옆에서 지며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제는 병원생활이 나와 외할머니가 함께 했다. 이번이 세 번째 병 간호 생활이었다. 첫 번째는 중3때 두 번째는 예시를 치른 바로 후에 빙판에 아버지께서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다 넘어져 약 한달간 입원한 때였다. 이때는 내가 예시가 끝나고 수업이 두시간이면 하교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도맡았다. 요구르트 구르마를 구입해 하얀 눈을 맞으며 노동판에 조그만 구멍가게에 그리고 아가씨를 두고 장사하는 집에 밑바닥 인생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직접 목격할 수 잇엇다. 노가다에서 일하는 40대 아저씨들의 모습에서 어쩐지 시커먼 작업복에 나의 모습이 훨씬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것을 선생님들이 아셨는지 뜻하지 않았던 효행상을 졸업생 대표로 받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식은 역시 가슴에 상과 상품으로 푸짐하게 안겼다. 효행상은 국교때 받은 것과 해서 학교대표로 받기는 두 번째였다. 중학교때 놓쳤던 우등상을 빼놓고는 졸업식은 항상 만족했었다. 그해는 성탄절도 배달을 하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현수가 고1이었기 때문에 집안 일을 도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세 번째 간호를 하게 되었는데 할머니 덕택에 아주 쉬웠다. 식사준비는 할머니께서 하셨고 난 대소변을 받아내고 온 몸을 씻겨주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되도록 옆에서 시간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고 이야기를 많이 한 덕택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4월쯤에는 나이테의 노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육봉사반이라는 써클에 가입하여 용봉중학교 1학년 수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완전한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그 써클을 탈퇴하고 말았다. 동기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참으로 즐거웠다. 여름방학이 되어 현수가 퇴원을 하게 되자 여름방학은 자유스럽게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수의 사고로 말미암아 청산되었던 빚이 다시 생기게 되었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 무척 쪼들리게 되었다. 여름방학 때에는 써클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라갔는데 해수욕장은 그때가 처름이었다. 이것을 허락받기 위해 3일밤을 통사정해서 아버지를 설득시켰다. 왜냐하면 해수욕장은 아버지께서 절대로 금지구역이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참으로 즐거웠다. 우리들 세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동기 한 남학생과 무척 가까워졌는데 친구이상의 관계는 아니었다. 10월쯤 되어 중간고사가 있었고 그 남학생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마음이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는데 그것은 그 친구가 먼저 원했었다. 하지만 우리집 형편을 알고 그만 만날 것을 요구해 왔고 나는 사랑을 구걸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만 만나자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2학년이 되어 4월쯤에 연락이 왔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우스웠다. 이미 나의 마음은 정리가 되어 있었고, 나의 자존심에 대한 보상을 받고싶은 생각 뿐이었다. 이유가 알고 싶어 만났었고 집요하게 물었다. 그 친구는 이유가 첫째는 명예욕 곧 병원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부모님의 반대 세 번째는 나의 활동(과 및 여학생부 활동)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하며 그 때는 몰랐는데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계속 뒤를 따라왔고 아무리 말을 걸어도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났다. 말없이 집까지 걸어 갔고 처음 헤어졌던 때부터 써클 모임내에서도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완전하게 단절된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은 나의 자존심에 대한 복수라고 표현했었고 다시 돌아왔으니 만나라는 충고가 있었으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후 과남학생의 사랑고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마음을 혼자서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1학년 때의 두가지 경험은 나의 마음을 철저하게 닫도록 만들었고 남자들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에 눈물로 호수한 사랑고백에도 나의 마음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에게 전혀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접근을 못하도록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나의 생활을 즐기는 것이 재미있었다. 여행이 즐거웠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3학년이 되어 일학기 때 수학여행을 준해해야만 했다. 예산 결산 안내문 등이 모두 나의 손을 통해서 나갔다. 여행사를 다니며 정보를 습득했다. 3박 4일간의 여행을 가장 적은 경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녀온 과원들도 만족해 했었고 프로그램이 짜임새가 있어서 즐거웠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파김치가 되었다. 준비 때문에 한달정도 고민과 육체적 피로가 쌓였고 물이 맞지 않아 여행이 힘들었다. 특히 돈관리 및 뒤치다꺼리 하느라 나의 즐거움을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에 후학기때에는 다른 사람을 뽑아달라고 부탁했었고 여름방학 때부터는 나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에 언니의 부탁으로 하고 싶지 않은 미팅을 심난한 모습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 날이 북한에서 비행기 한 대가 넘어와 경계경보가 울려 비상사태에 들어간 날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하그릴에서 미스 유니버셜 선발대회와 버닝을 보면서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나온 학사장교 5명과 내친구 4명은 파트너도 맞지 않았고 서로가 재미없는 미팅이었다고 느끼기에 충분할만큼 서로간에 적극적이지도 분위기가 무르익지도 못한 채 헤어졌다. 단지 그들의 주소만 받아서 헤어졌는데 다시 언니의 재촉이 시작되었다. 편지를 하라는 것이었다. 약 2주정도를 보챔을 당하고서야 펜을 들었다. 누구 한사람에게 쓸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순간 아이디어가 떠 올랐다. 레파토리 형식의 편지 !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었다. 5명을 가나다 ... 순으로 이름을 정리하고 5장의 원고지에 연이어서 글을 썼다. 그리고 봉투에 한 장의 원고지씩을 넣어 5개의 봉투를 만든 다음 맨 마지막 원고지에 간단한 추신과 안부를 전하고 봉투는 5인 모두의 이름을 적어 6개의 봉투를 만들어 보냈다. 그들도 재미있어 할 것이라 생각하자 기분이 좋았다. 주소는 적지않고 단지 학교와 이름만 적었다. 그 뒤 약 2주쯤 지나서 학교에 두툼한 편지가 내앞으로 왔었고 내용은 ‘사랑학 개론’ 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을만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받는다는 것에 기분은 무척 좋았지만 큰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실은 얼굴도 잘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금방 알고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나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펜팔친구가 하나더 늘게 되었다. 제주 아버지를 포함하면 나의 펜팔이 두명의 남자가 되었다. 3학년 후학기가 되어서야 딥에 돌아올 때마다 이야기 좀 하자는 남자가 있어서 치를 떨었다. 내 모습이 어디가 비어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한사람은 조대생으로 4학년깨까지 따라 다녔으나 응하지 않자 서울로 편입하면서 주소를 주고갔다. 한번도 편지를 한적은 없다. 왜냐하면 술주정뱅이 같은 느낌이었고, 진실성이 없어 보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광주 외지역에 사는 모든 친구들에게 안부편지를 쓸만큼의 여유는 있었어도 진실성이 결여된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지가 않았다. 3학년 때 가을은 견디기 힘들만큼 외로움을 느꼈다. 바쁜 생활에서 일을 놓고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 여름에 친구(명숙)와 함께 학교 앞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못생긴 남자 둘이서 대화를 요청해 왔다. 우리학교 학생인 듯 싶어서 간단히 이여기를 하다가 나왔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학교를 이잡듯이 뒤진 모양이었다. 과실, 보건진료소에서 나의 카드를 보기 위해서 강의실, 도서실 등을 뒤지다가 약 3개월이 지난 10월 중간고사 기간에 명숙이를 도서관에서 만났고 명숙이를 통해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해서 만나자고 했기에 기분도 좋지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아서 가볍게 바람을 맞쳤다. 그런데 또다시 연락이 왔다.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해 주겠다는 생각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다. 그는 공대 4학년생으로 카이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과에서 계속 톱을 해서 자신만만해 했지만 4학년 후학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자를 찾아 나선 통에 성적이 떨어졌다. 4학년 후학기 때 친구들은 공대생, 조대생, 그리고 학사장교까지 해서 세다리를 걸치고 있다며 비난했으나 사실상 나는 한다리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모두에게 불성실하게 대했었고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멀리있는 학사장교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정매도 그가 가장 마음이 넓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그사람이 영남대를 졸업했고 가난한 농부의 차남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벌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4학년때 나의 주변의 남자들에게 불성실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나에게는 학사장교라는 휴식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마음 한구석을 차지 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성실하게 대하지 못했다. 때문에 공대생도 졸업식 전날 만남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 했다. 대학 3학년때 학과에 대한 회의로 다시 시험을 치루고 싶은 생각도 있긴 했지만 시도하지 못하고 대학생활을 마쳤다. 사대를 졸업했으나 밀려있는 선배와 나의 성적 때문에 발령을 대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경제적으로 쪼들린 탓에 대학 4년때부터 불법으로 되어 있는 과외를 시작했다. 나의 학비는 물론이고 홍의 화실비까지 댈 수가 있었다. 졸업 후에도 계속 했으나 불안하고 만족할 수가 없어 직장을 구했다. 우연히 들어가게된 정매의 도움으로 모범 산수라는 곳에 4월 1일자로 입사했다. 그곳은 세일이나 마찬가지의 직장이었으나 고정급을 주겠고 월 20만원 이상의 수입을 보증했기 때문에 입사했다. 또 더 매력적이었던 것은 사장이 여자인데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열심히 일했다. 누구도 나의 실적을 따라올 수 없었다. 신입회원의 가장 많은 확보와 가장 많은 관리회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월급차이는 불과 몇천원 차이였다. 불만이었으나 다음달을 기대하면서 일을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몸을 혹사시켰다. 왜냐하면 동생들의 납부금을 마련해야 했고 가게일이 힘들기 때문에 집안에 경제적 보탬이 되고 싶어서였다. 목돈 마련을 위해 적금이 들어갔고 용돈을 최대한으로 줄였다. 항상 언젠가는 하는 기대감이 정신적 지주였는데 여름휴가의 줄임으로 말미암아 일의 의욕을 잃었다. 일주일로 알았던 휴가가 일주일을 포함시키고 또 하루 지역에 나가지 않는 날을 포함시켜 3일이면 휴가는 실질적으로 하루 뿐이었다. 그리고 신입회원 확보에 대한 사장의 독촉은 너무 힘들게 만들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9월부터 무릎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병워넹 가서 진단을 받은 결과 무릎 관절염 초기였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사장은 병원에 다니면서 활동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사장에 대한 실망이 11월 11일자로 사료를 쓰게 했다.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광주에 있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고 항상 정신적으로 도움을 주셨던 제주 의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일주일의 제주 여행은 모범 산수에서 가졌던 피해의식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2월부터 3월까지 괴외를 하면서 용돈을 충당했다. 적금을 넣고 있던 돈은 일년사이에 250만원이 되었다. 그런데 동생 홍과 현수의 납부금을 위해 해약을 했고 납부금과 세금 그리고 빚을 조금 갚고 나자 한푼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기뻤다. 나의 힘이 부모님께 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3월말부터 나의 건강이 거의 정상으로 회복되었음을 안 모범산수에서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내분과 사장은 임신을 해서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신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오전근무만하고 내근으로 교사들을 관리하고 교사들의 교육이 나의 임무였다. 그러나 내가 재입사한 다음날 교사들의 전원 사표제출이 있었고 그것을 수습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전 근무는 말 뿐이었고 9시가 넘어야 퇴근을 하게 되었으나 사장은 별로 고마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교사의 재모집부터 교육 그리고 현장에 내보내는 것은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게 문장을 쓰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덕택에 사태의 수습이 되어갔다. 내가 운영한 5월에는 그 혼란 속에서도 이제껏 달성하지 못했던 신입회원 100명 이상을 확보하므로써 적자를 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책정에 문제가 되었다. 임금을 20만원 이하로 줄일려고 하는 사장과의 대립은 참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6월달에 발생했다. 30살 먹은 노총각 송선생의 배신과 불성실이었다. 경영에 미숙하고 신출내기인 나를 속이는 것은 너무도 쉬웠을 것이다. 그나 나의 조직이어야 되는 교사들을 밖에서 따로 만나 이야기 하므로써 자기 조직원으로 만들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나의 힘은 무력해졌다. 더 큰 이유는 몸을 푼 사장의 직접적인 개입이었다. 완화할 수 있었던 문제가 사장과 송선생이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중간관리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위치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상하로 눌리기 시작했다. 사장은 사장대로 직원은 직원대로 나는 나대로 서로가 배신감을 느꼈고 7월 3일 사장이 직접적으로 사표를 요청 선별하겠다고 했으나 한사람만 남고 모두 사표를 제출했다. 나는 내 모습의 초라함과 무능력함 그리고 배신감과 자존심의 짓밟힘이 견딜 수 없었다. 표정부터 바뀌어 갔고 나의 가슴은 아프기 시작했으며 숨쉰느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사무실을 벗어나면 그러한 증상이 덜해졌다. 7월 1일자로 중간관리자 즉 나의 후임으로 박국철씨가 입사했고 나는 교육부에서 교재연구와 팜프렛 작업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처럼 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못차릴 때 신은 무심치 않았다. 학사장교가 뜻하지 않게 전화를 했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7월 3일에 다시 재회가 이루어졌고 그는 광주에 자주 왔었다. 나에겐 무척 힘이 되었고 고마웠지만 사랑을 생각하고 느낄만큼 가슴의 열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심한 자기학대라는 표현이 가장 옳을 것이다. 그의 도움으로 자기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결혼을 생각한 사랑을 느꼈고 사랑안에서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남대인 줄 알았던 것이 부산대였고 농부의 아들인 줄 알았던 것이 사업가의 아들이었고 차남인 줄 알았던 것이 장남이었다. 7월 말에 사표를 쓰고 8월 한달을 쉬었다. 정신적인 안정을 완전하게 찾지 못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발령이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9월 1일자 신규발령 명단에 끼어 있었고 먼 골짝진 고흥군 두원면 두원중학교에서 한 사람의 수학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내가 느꼈던 윤리선생님과 같은 멋있는 선생님이 되고자. 자라는 새싹에게 보다더 깊은 사고와 넓은 시야 불타는 정열과 패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이의 좋은 아내 착한 며느리가 되고자 사흘전부터 시아버지의 조끼를 뜨기 시작했다. 뒷판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신년 선물을 하기 위해 한코 한코에 나의 정성을 쏟으며 그를 생각한다. 지금은 무척 행복하다.
1986. 12. 9- 1986. 12.12 밤 11.15
'성찰의 향기 (5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와 벌 (1) | 2023.05.15 |
---|---|
주름 (1) | 2023.05.15 |
최후의 증인 (1) | 2023.05.15 |
친구네 문상다녀오기 (1) | 2023.05.05 |
한은교 (0) | 2023.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