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 에피소드
1. 한국인 원 달러
캄보디아를 가면 겪어야 하는 것이 비자를 발급받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미리 통보한 여행사 준비물에도 사진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있었다. 세 가지 서류를 작성 제출해야 한다. 첫째가 비자신청서였다. 두 번째가 입국, 출국 신고서, 셋째는 세관 신고서였다. 비자신청서에는 사진도 부착을 해야 했다. 비자발급비용은 1인당30불이었다. 문제는 원 달러라는 추가비용이었다. 다른 외국인에게는 요구하지 않는데 유독 한국인에게만 1달러를 요구한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한국인이 1달러를 주고 급행으로 비자를 발급받아 갔다는 것이다. 그 이후 이런 것이 관행화 되고 한국인에게만 유독 요구하는 일이 되었다는 얘기다.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어떤 이는 사진을 가져오지 않아 2달러를 추가로 내기도 했단다. 서류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고 또한 풀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서류를 구하고 찾아야 했다. 비자를 발급받고 통과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에 대세 외국인 관광객이 중국인인 것처럼 캄보디아의 대세 관광객은 한국인으로 보였다. 예전에는 한창 일본인들이 붐볐는데 지금은 한국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씨엠립의 한국인 교민은 7천 명 가량 된다고 했다. 북한과 캄보디아는 인연이 깊다고 했다. 60년대 70년대에 북한에서 200억 원을 들여 박물관을 지어 기부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수익원이 적절치 않자 앙코르와트의 이용권발급을 북한박물관 앞에서 하도록 조치되었다는 식이다. 박물관에는 정교하게 새겨진 미니어춰 등이 잘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었다. 캄보디아의 거물 정치인 시누아크, 폴포트 등이 어려움이 있을 때 북한으로 가서 망명하는 등 도움을 받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이들에 대해 궁전을 지어주기도 했고 깍듯이 모시기도 했다.
2. 평양랭면관
메인 도로를 다니다 보면 매일 보게 되는 곳이 평양랭면관이다. 본래는 두 군데가 있었다. 한군데는 평양친선관이었다. 북한의 고위직 자녀들이 이곳에 와서 근무를 한다고 했다. 오로지 그 식당 내에서만 살아야하는 조건이 붙었다. 노래 공연 가무를 보여주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는 등 공연도 상당히 볼만했다는 전언이다. 일반백반이 정식으로 제공되고 냉면은 후식으로 조금 주어진다. 공연을 한 출연자들이 공연을 마치면 홀로 내려와 서빙을 하고 지원하는 형태라 했다. 술은 검은 찹쌀, 상황술 등이 있었다. 메뉴로 보면 평양쟁반랭면 10달러, 평양랭면 8달러라고 부착되어져 있다. 사진촬영, 공연실황촬영 등은 엄격하게 통제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단한 점은 그런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동영상을 다 촬영해와 유출시킨다는 점이다. 사진도 다 돌아다니고 있다. 지금 북한의 상황으로 인해 한국인의 출입은 통제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예전에 유명한 공연자가 있었는데 정말 유명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오로지 그녀만이 6년을 근무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남편이 그렇게 평양랭면관을 좋아해서 가끔씩 간다는 호소였다. 15분만 돌아다니면 어디에 있는지 곧바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쁜 북한종업원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3. 스위스의사
그는 스위스 출신이라고 했다. 아이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 그는 결코 치료비를 받는 법이 없다고 한다. 어느 땐가 캄보디아 여행을 왔다가 아이들의 열악한 의료 환경에 충격을 받아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그는 진료시간이 아닌 때에는 거리에서 첼로를 연주한다고 했다. 그리고 연주를 듣고 기부하는 사람들의 기부를 받는다. 그런데 특이한 부분은 결코 1달러 이상의 기부는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그는 매일 첼로를 연주해서 받는 돈으로 아이들에게 조제하는 약값을 충당한다.
4. 길거리의 아이들[팔찌 파는 아이들]
관광을 하다보면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들이다. 부모님들이 밤새 만든 팔찌를 들고 관광객들에게 호객을 하는 형태다. 맨 처음 아이들이 만나면 하는 말이 “ 언니 예뻐” 라는 말이다. 아니면 “오빠 멋있어” 그런 다음 수작을 부린다. 5개에서 10개까지 대상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통상 5개다 그런데 아줌마는 7개 할머니는 9개 10개까지 판다. 읍소할 때는 그렇게 얘기한다. “ 오늘 하나도 못 팔았어요. 팔아줘요” 그러면 관광객이 얘기한다. “돈 없어” 그러면 아이들이 핀잔을 준다. “그럼 여기 어떻게 왔어” 그리고 또 덧붙인다. “ 친구에게 빌려” 그래도 관광객이 꿋꿋이 답변한다. “돈 없어” 그러면 아이들이 마지막 일침을 놓는다. “거짓말하면 나쁜 사람이야” 가이드 자신이 겪은 경험담 하나를 얘기한다. 어떤 관광객들이 버스를 타고 관광을 와서 그렇게 아이들과 만났다. 20여명의 일행이 있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지 않은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49세의 모태솔로인 이 관광객은 여자를 구하기에 앞서 캄보디아관광을 온 사람이었다. 50이 넘으면 결혼을 못하는 형국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6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 “못 팔았어. 여자 친구 갖다 줘.” 그렇게 얘기를 하니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마디가 더 나왔다. “ 며느리 갖다 줘.” 참으로 대략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곧잘 한국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첫 번째 노래는 곰 세마리, 두 번째는 노사연의 만남. 세 번째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라고 한다.
5. 앙코르와트
1431년에 37년에 걸쳐 건립된 앙코르와트는 400년간 잠든 도시가 되었다. 중국인이 처음 발견했었으나 제대로 부각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어가 1831년에 이곳을 탐험하던 중에 발견해서 그곳의 모양을 스케치했다. 그러자 그의 부인이 그 스케치 된 것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진입로의 복원은 프랑스와 일본이 각각 복원했다. 아직도 미완성인 채로 우뚝 솟아있다. 자야바라만 2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같은 왕이라 여겨진다. 나무들을 제거하면 사원이 훼손되니 다른 방법이 없다. 돌 틈의 접착제들이 부식되면서 성벽이 무너지는 현상이 되었고 태국인들 또는 프랑스 등에 의해 불상이나 보석 등은 도굴이 된 상황이다. 원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원형을 추측할 근거가 없어 복원에 애로를 겪고 있다. 일본이 복원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석조로 복원이 되어 색깔이 완전 복원한 티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너무하지 않느냐는 주최 측의 요구에 관해 일본인들은 그렇게 답변했다. “기다려 달라” 몇 년이 지난 현재 보면 석조물들이 변색되어 어느 만큼은 원형과 비슷한 색깔로 변색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앙코르와트의 저주는 그것을 발견하거나 발굴한 사람에 대해서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식이다. 중국인도 발견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죽음을 맞았고 앙리 무어도 캄보디아 국경근처에서 죽었다. 또한 그 부인도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고 말았다. 사방이 뜨인 문이 있었는데 적이 침입하면 그곳에 코끼리를 집어놓고 코끼리를 죽였다. 그러면 진입로가 막혀 적들이 침입할 수 없었다. 앙코르와트의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계 3층은 천상계였다. 천상계는 한 달에 두어 차례식 출입이 금지되기도 했다. 반드시 모자를 벗어야 하고 반바지나 정숙하지 못한 복장은 출입이 통제된다. 100여개의 사원이 널려 있는데 통곡의 방도 있고 보석의 방도 있다. 통상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는 형태인 것이 사원의 구조인데 앙코르와트는 서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는 구조라 한다. 꼬리부분에 보석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석상의 꼬리부분은 훼손이 된 상태로 남아있다.
6. 훈센 총리(1952~ )
현재 총리다. 그는 제일 존경하는 사람으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첫 번째 한국의 발전 산업화의 결정적인 동인으로 여긴 것은 두 번째는 해외 파병이었다. 이를 통해서 외화를 벌여 들였고 이렇게 모아진 외화로 자본을 형성시키고 국부를 늘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세 번째는 새마을 운동이다. 농촌의 개량화를 통해서 농업을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농업기술과 환경개선을 통해 발전을 이룬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에나 꼬레라는 기독학교가 있어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시키고 있다. 최고의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현지가이드이다. 공무원의 4배 급여를 받는다. 일어, 한국어, 불어, 중국어 등의 언어를 배운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이 한국어라고 한다.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시원타 라고 반응하는 것에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헤아리지 못한다. 그런 부분에 또한 팔도의 사투리가 있으니 더욱 알아듣고 말하기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수원시에서 MOU를 체결해서 지원과 원조를 하고 있기도 하다. 톤레삽호수 옆에는 수상가옥이 많이 있었는데 그 인근에 데일공동체 밥퍼 최도일 목사의 봉사활동이 전개되고 있기도 했다.
7. 두리안과 망고스텐
예전 필리핀 남쪽에 두링이라는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집 주위로 나무와 식물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울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두링 할머니가 잡아간다고 겁을 주었다. 가족을 잃고 난 할머니를 도우려고 할머니를 찾아간 마을사람들에게 할머니는 도움을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가보니 할머니는 없고 이상하게 생긴 과일이 있었고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그래서 이름 짓게 된 것이 두리얀이었다가 나중에 두리안으로 변했다고 한다. 양파 썩는 냄새가 나지만 맛좋은 과일로 정평이 났다. 고약한 냄새로 인해 호텔이나 버스 속에 반입하는 것은 불가했다. 그래서 결국 현지에서 비닐장갑을 끼고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고 작가가 한턱을 냈다. 가격은 23불이라 했다. 한 개로 25명이 다 맛볼 정도가 되었다.
두리안과 마찬가지로 호텔반입이 되지 않는 과일이 망고스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그 물로 인해 얼룩이 번지면 세탁에 애로를 겪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8. 농산물 판매장의 식겁사건
최 가이드의 경험담이다. 몇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우리로 치면 가락동 농산물도매시장 같은 농산물 판매장에 들렀던 때의 일이었다. 관광하고 시장을 둘러보던 터에 갑자기 관람객이 기겁을 하고 튀어나온 일이 있었다. 본래 관광일정에 잘 넣지 않는 코스인데 굳이 그곳을 보겠다고 해서 가게 된 사연이었다. 그렇게 안내를 하고 구경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관광객이 기겁을 한 내용은 이랬다. 우리 같으면 냉장고에 고기나 생선이 다 들어있는 상태일 텐데 이곳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문제가 된 고기는 통째로 놓여있었고 구워져있던 통돼지고기 바비큐였다. 그것이 생으로 생체로 나와 있으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나마 더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살갗부분에 새까맣게 파리가 들러붙어져 있었으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과 모습에 기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9. 길거리 노란병의 정체
버스로 이동을 하다보면 길거리에 병에 노랗게 담겨진 병을 수없이 보게 된다. 과연 저것이 무엇인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첫 번째 얘기는 그것은 망고 엑기스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뭔지 모르지만 무척 귀한 것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런데 그것의 정체는 놀랍게도 오토바이의 연료인 기름이라는 것이다. 통상 양주병에 담가져 있고 일반 주유소가 많지 않다보니 그렇게 길거리에서 기름을 판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랄만한 일이었다. 어떤 분들은 꼭 그것을 사오라고 신신당부를 하기도 했다는 웃지만은 못할 얘기도 있었다. 맛이 궁금한 사람은 그것을 한번 사서 맛보라는 얘기도 나왔다.
10. 눈꽃 등
가이드의 가정부에 관한 얘기다. 실제로 눈 위에 간장을 뿌려서 먹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긴가민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눈 위에 간장을 뿌린 형태로 되어져 있는 것이 팥빙수를 얘기하는 것으로 오도된 것이었다. 그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부분은 한국의 눈을 보고 싶어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다. 결혼을 하거나 임신을 하면 앙코르와트를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할 때에도 옷을 20벌 정도 입어본다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옷을 다 사는 것은 아니고 그런 옷을 빌려서 입어보고 결혼하기 전에 모든 것들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하고 간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앙코르와트를 빠져나올 때 결혼을 위해 웨딩촬영을 하러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비단이 유명한데 누에를 쳐서 아직도 양잠을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만큼 큰 누에는 아니고 훨씬 작은 모양의 누에이고 그 누에에서 실을 뽑아서 비단을 만드는 식이고 누에의 색깔도 푸른 형태가 아니라 노란색을 띄고 있다. 그래서 비단도 노란색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관광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양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관광코스도 있다. 현지인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스마트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소득수준이 높지 않아 휴대폰을 대부분 갖고는 있지만 폴더폰 형태로 값싼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다. 인근 국가인 베트남과 태국에 대해서는 대단한 반감을 갖고 있다. 언젠가 태국의 유명인사가 앙코르와트가 자기네 사원이라고 발언했다가 난리가 난적이 있었다. 베트남에 대해서도 자기네 나라를 침공한 점 때문에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관광코스로 베트남 2일 캄보디아 2일 그런 식인데 베트남에서 기념으로 가지고 오는 베트남 모자를 보면 무척 싫은 내색을 보인다. 이 사람들은 향신료 고수 등의 강한 향을 가진 음식들을 즐겨먹기 때문에 벌레들이 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순진하고 순수해서 서로 싸우고 윽박지르는 등 갈등이 일어나는 부분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예전 70년대에는 한국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부했기 때문에 쌀을 원조해주기도 했다. 지난해의 경제성장률이 12%를 넘어서고 있다. 계속적으로 고성장을 거듭한다면 2050년이 되면 한국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11. 폴 포트 [Pol Pot,1925.5.19~1998.4.15]
캄보디아의 정치가. 공산당창당대회에서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고 제2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1975년 중국을 방문한 뒤 제4차 당대회에서 서기로 재선되어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민주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었으나, 1979년 친(親)베트남군에 의한 프놈펜 함락 후 해임되고 게릴라군 최고위원회 의장 겸 총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콤퐁톰에서 태어났다. 프놈펜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시절에 재기발랄함이 인정되어 1949∼1953년 국비장학생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지방에서 반정부투쟁에 가담하였다. 1960년 공산당창당대회에서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고 1963년 제2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1970년 5월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 겸 작전부장이 되었으며 1975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뒤 1976년 1월 제4차 당대회에서 서기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민주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었으나, 1979년 친(親)베트남군에 의한 프놈펜 함락 후 해임되고 게릴라군 최고위원회 의장 겸 총사령관을 지내다가 1985년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그에게 프랑스 유학을 갈 때 해주었어야 할 말은 “친구를 잘 사귀어라” 그가 제대로 친구를 사귀었다면 오늘날의 캄보디아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으리라. 그가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봉사활동을 동유럽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가 만난 이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였다. 그는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돌아오자마자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유학비의 국고지원이 중단되자 캄보디아로 귀국한다. 그리고 크메르 루저라는 공산당조직을 만들고 공산조직의 체계화를 위해 노력한다. 처음에는 교사로 봉직하기도 했으나 어린아이들에게 공산주의 교육을 했다. 그리고 거의 4년 동안 공산화된 캄보디아의 최고통치자로서 공포정치를 감행했다. 1998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무런 정치적 책임에 관해 단죄되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다.
12. 킬링필드
그때 당시의 캄보디아인구는 7백5십만 수준이었다. 그런데 학살된 이가 2백5십만이라고 한다. 국민 4명중 한 명이 학살된 것이다. 지식인, 부자, 선생님 등 자본주의에 물든 모든 이들이 학살의 대상이었다. 첫 번째 안경을 쓰면 학살 대상이었다. 둘째 헬로 라고 부르고 뒤돌아보면 학살대상으로 체포되었다. 영어를 알아들었고 지식인이라는 식이다. 세 번째 파머를 한사람은 그래도 중산층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네 번째는 피부가 하얀 사람이었다. 다섯 번째 배가 나온 사람이다. 부의 상징이라는 의미였다. 여섯 번째는 악수를 해서 굳은살이 없는 이는 체포대상이다. 참으로 얼토당토않고 황당한 사유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다. 유학을 갔던 중고생, 대학생들을 불러 귀국을 시킨다. 그리고 그들에게 친구 세 명을 얘기하면 살려준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회유한다. 그러면 대부분 죽음의 공포에서 세 명의 이름을 적시한다. 그러면 사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친구들도 똑같은 경우를 당하니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죽이는 방법도 다양했다. 드릴로 머리에 구멍을 뚫어 죽이기도 했고 나무에 달린 가시로 찔러서 죽이기도 했다. 수많은 유골이 도처에서 발굴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우리의 광주민주화 운동과 유사성이 있는 부분도 있으리라. 영화가 소개되면서 캄보디아의 실상과 폴 포트의 악행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3. 안젤리나 졸리
안젤리나 졸리는 이곳에서 ‘톰레이더’ 라는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내내 레드 피아노를 방문하는 일정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에 관한 애정을 바탕으로 제일 큰아들을 입양한다. 연인과 결별에 원인이 될 정도였지만 그녀는 계속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재단을 만들었고 매년 한 번씩 캄보디아를 방문하는 행사를 가진다. 사원의 한켠에 서 있는 뿌리 깊은 나무는 안젤리나 졸리 나무 라고 명명될 정도다.
14. 기부
가이드들이 통상적으로 얘기를 한다. 가급적이면 의미 있는 기부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부물품을 가지고 온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먼저 1차로 여행을 다녀간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2차 방문단에 그런 것을 감안해서 기부물품을 가져왔다. 그 사람이 가져온 것은 라면박스 3박스정도였다. 기대를 엄청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입회하에 라면박스를 풀었다. 그렇게 개봉된 박스에서 나온 것은 우리나라의 찜질방 복장이었다. 아래위 한 벌이었다. 캄보디아사람들이 희망하고 원하는 바는 한 벌의 옷이었다. 비록 뒤편에는 찜질방의 로고가 찍혔고 어색했지만 상관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했다. 사이즈가 있었고 어린이용, 어른용 그리고 크기별로 별도의 사양이었으니 모두들 만족해했다. 다음에 어떤 관광객은 어린이를 위해 적절한 선물로 생각한 것이 노트와 연필이었다. 그렇게 구걸을 하거나 상행위를 하는 아이들을 위해 공책과 연필을 나눠주었다. 그랬더니 반응이 그랬다. 노트는 수령을 하는데 연필은 팽개쳐버렸다. 연필은 판매가 불가능한데 반하여 노트는 얼마든지 팔 수 있으니 마다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15. 국왕
캄보디아의 국왕은 노르돔 시하모니(1953~ )이다. 아버지는 노르돔 사하누크(1922-2012)와 그의 여섯 번째 부인 모니니엇(1953~ )와의 사이에 태어났다. 모니니엇 왕비의 본명은 모니크 이지이고 아버지는 프랑스계 이탈리아 인이었고 어머니는 캄보디아인이었다. 1951년 미인대회에 참가한 그녀를 본 시하누크가 첫눈에 반해 그녀를 부인으로 맞았다. 시하모니 국왕은 현재도 미혼인 상태로 있다. 호텔이나 집 등에 초상화가 세 개 부착되어져 있는데 그것이 세 사람의 사진이다.
16. 분실물
오랫동안 호텔에 투숙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기 마련이다. 제일 좋은 옷을 말리는 장소는 스탠드 불빛이 있는 탁자 밑이다. 제일 많이 놓고 가는 것은 휴대폰 충전기다. 그리고 속옷 등도 많이 내버려두고 간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거의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온 것이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구나 하고 지레짐작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통일이 아닌 듯했다. 그래서 그 속옷의 가격을 물었다. 알아보니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었다. 백 7십만 원이었다. 도저히 일반사람들에게는 믿기지 않을 가격이었다. 택시를 타고 급하게 호텔로 갔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없다는 반응이었다. 결국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1불로도 안되고 결국은 10불을 주었더니 반응이 달랐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곧이어 분실물을 찾아왔다. 그래서 그것을 포장해서 택배로 부쳤다. 얼마의 날짜가 지났다. 그랬더니 포장상자가 하나 배달되어져 왔다. 그에 들어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과자들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상자 바닥에 봉투가 들어있었는데 그곳에는 택배비가 들어있었다. 참으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분이 조금 체격이 퉁퉁한 편이었는데 맞춤 속옷이었던 것이었다. 아직도 카톡을 하고 있는데 한 번씩 하트를 보내준다는 얘기를 가이드가 했다.
18. 캄보디아 인사말 등
캄보디아 인사말은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말이 ‘섭섭하이’ 라한다. 인사를 할 때는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5가지의 단계가 있다. 첫째 자신과 동년배 친구 등을 만났을 때에는 합장한 손을 가슴높이에서 인사를 나눈다. 둘째 자신보다 선배 또는 사장 등에 대해서는 입술높이에 댄다. 셋째 코끝 높이에 댄다. 그것은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선생님, 교수님 등에게 인사할 때이다. 넷째 눈썹 높이다. 그것은 왕, 스님을 만났을 때 인사법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이다. 그것은 정수리높이다. 기원하거나 죽은 사람에 대한 인사를 할 때의 인사법이다. 다음은 감사인사이다. 감사인사를 할 때 말은 ‘어꾼’이다. ‘감사합니다.’ 라는 의미이다. ‘어꾼’에 더 감사를 표할 때에는 ‘쯔란’ 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어꾼 쯔란’ 이라한다. 더없이 감사할 때 최상의 감사를 표할 때 하는 인사는 ‘쯔란’을 두 번 붙인 ‘어꾼 쯔란 쯔란’ 이라고 하는 것이 최상의 감사표시이다.
19. 특산물 [ 보석, 상황버섯, 라텍스, 잡화]
보석은 매월별로 탄생석이 있다. 1월 가넷, 2월 자수정, 3월 아쿠아마린, 4월 다이아몬드, 5월 에메랄드, 6월 진주, 7월 루비, 8월 파리도, 9월 사파이어, 10월 로드마린, 11월 시트린, 12월 블루 토파즈였다. 가넷은 힐러리석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힐러리의 목에 걸어주기도 했다고 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의미가 여자의 성공을 뜻한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의 탄생석을 하나씩 사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은 상황버섯이다. 이는 뽕나무에서만 자라는 버섯이었다. 그 효능이 제대로 알려진 것이 요즘에 와서다. 항암효과를 아는 이도 없다. 일본에서 사원을 복원해주고 얻은 대가가 밀림의 뽕나무 벌목권과 상황버섯 채취권이었다. 아이들이 밀림으로 상황버섯의 채취를 위해 간다. 필수적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이 세 가지다. 첫째 마약이다. 몰핀인 것이다. 부상을 당했을 때 진통제로 필수품인 것이다. 둘째 지혈가루다. 피가 나거나 상처를 입었을 경우 지혈을 위한 것이다. 세 번째는 붕대다. 목숨을 걸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 위험을 감수하고 가는 것이다. 지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요즘에는 군부에서만 군인만이 채취를 할 수 있도록 허용이 되었다. 최소한 100일을 먹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결코 주전자에 끓여서는 효능을 볼 수 없다는 얘기였다. 물을 끓여서 먹거나 아니면 술을 담가서 먹는 복용법 밖에 없다. 주씨네 자매들이 연합해서 상황버섯을 사고 말았다.
세 번째는 라텍스였다. 고무나무에서 추출된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 베게가 있었고 또 다른 것은 매트리스 또는 침실용이었다. 모두들 베게, 침대 등에 누워보고 그 효험에 쏙 빠졌다. 결코 햇볕에 말려서는 안 되고 물에 세척도 안 되는 것이 라텍스였다.
마지막은 잡화점이었다. 계피와 꿀이 있었고 천리향으로 추출한 향수 등 여러 가지 제품 등이 진열된 잡화점이었다. 관광용 기념품 등도 즐비했다. 제대로 품질을 보증하기도 힘들 것으로 여겨졌지만 짝퉁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모두들 잔뜩 사들고 왔다. 그리고 그렇게 산 계산의 일정부분은 좋은 일에 기부가 된다고 하니 기쁜 마음으로 쇼핑을 했던 듯했다.
20. 봉사활동을 온 사람들의 눈물.
통상의 봉사활동을 온 사람이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왔다. 통상의 관광일정은 똑같이 진행이 되었고 하루만 봉사를 하는 날이었다. 아이들도 왔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것은 도넛을 만드는 것이 일이었다. 도넛을 튀기고 만들어서 그것을 시장에 가서 팔아서 식재료를 사온다. 그러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주는 배식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배식을 하다가 그 어린 아이들이 너도나도 한 끼의 배식을 받기위해 오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결국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식이 끝나고 나면 자기들이 식판에 밥을 받아먹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할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다. 한아이의 경우는 배식을 받으러 왔는데 그런다는 것이다. 비닐봉지를 하나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식판에 받은 음식을 모두 한꺼번에 비닐봉지에 받아서 그것을 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 동생에게 가져다 주기위해 그런다는 얘기다.
21. 호텔에서의 에피소드
첫 번째는 정전의 사태가 있었다.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한창 회합을 하던 중에 갑자기 정전이 되는 일이 있었다. 두 번째는 키를 놔 둔 채로 문이 잠겨 대략난감해진 일이 있었다. 로비에 가서 인터넷으로 찾은 영문을 보여주었다. ‘키를 놔두고 왔는데 문이 잠겼어요’ 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그것을 보여주자 룸 넘버를 물었다. 그래서 넘버를 가르쳐주었더니 룸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곧 직원이 와서 문을 열어 주었다. 또 다른 하나는 알람을 잘못 맞춰준 탓에 한국시간으로 착각을 해서 두 시간을 일찍 일어난 경우가 있었다. 한국시간과 캄보디아 시간을 착각한 탓에 잠을 깨버린 경우가 생긴 것이다. 잠이 달아났으니 다시 잠들기는 어려웠다. 세 번째는 매너팁을 깜빡한 경우였다. 체크아웃을 하는 날이었는데 로비에 앉아 대기 중에 곰곰이 생각을 했더니 매너팁을 놔두고 온 것이었다. 다시 방으로 갔을 때에는 문은 이미 잠긴 상황이었다. 결국 문틈으로 팁을 넣어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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