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중추절
정유년 중추절은 10월4일이다. 9월30일부터 10월9일까지 연휴이다 장장 10일간의 연휴다. 본래 10월2일이 근무하는 날이었는데 정부에서 임시공휴일로 지정을 했다. 100만 여명이 외국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가족의 중추절은 예년과는 달랐다.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달 전쯤에 결혼식을 올린 아들 내외가 있었다. 미리 예매를 해서 4장씩의 KTX표를 예매해 두었는데 아들내외는 차로 다녀오겠다고 해서 표가 소용이 없어졌다. 본래는 예약날짜에 표를 예매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는데 이후에 타이밍을 맞춰 예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궁화호였다가 다시 예매를 해서 ITX로 바꿨다가 최종적으로 KTX로 예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5시경이었는데 최종적으로는 10시30분으로 되었다. 모든 것이 연휴가 길어진 덕분이었다. 아들내외는 2일 날에 내려갔다. 이바지음식을 같이 보내야 했기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집사람은 거의 평이한 수준에서 하자는 얘기였고 남편은 가당치 않다고 해서 무리를 했던 부분이 있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들내외는 11시경 짐을 잔뜩 싣고 처갓집인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아직 본격적인 연휴를 시작하기 전이라 차량의 흐름도 원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평상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2시간 정도가 더 걸렸다. 아무튼 무사히 귀성이 이뤄진 셈이었다. 사돈네에게서 집사람에게 감사인사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부부는 다음날 옷가방만 들고 출발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평소대로 당연히 서울역이라고 알고 서부역으로 갔는데 도착하고 승차권을 살펴보니 발차역이 용산역이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갔다. 하마터면 열차를 놓칠 뻔했다. 유유자적하게 열차로의 귀향을 즐길 수 있었다. 부산에 1시10분쯤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다. 부모님 댁에 도착해서 휴식을 취했다. 아들내외도 전주에서 10시쯤 출발을 했는데 2시경에 도착을 한다고 했었는데 여의치 않았다. 항상 하던 식으로 남천동의 선미횟집에 회를 주문해 두었다. 그리고 오후 3시30분에 찾으러 가기로 했다.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으로 보여 결국 한 시간을 늦춰두었다. 아들은 호텔을 정하고 그곳에서 한복으로 갈아입고 오느라고 늦어진 셈이었다. 오후 4시쯤 도착이 되었다. 곧바로 차를 몰고 남천동으로 갔다. 대목은 대목이었다. 혼잡하고 복잡한 것이 여느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시장통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차들도 꼼짝 못하고 발이 묶였다. 거의 20분여를 정차한 후에 겨우 숨통이 트였다. 차를 주차해 두고 횟집으로 가니 횟집들도 다 만원사례였다. 전어도 다 동이 났다. 횟감을 받아들고 귀가했다. 35만원어치였다. 너무 과도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야채 등도 사가지고 귀가했다. 6시쯤에 회를 안주 삼아 약주를 한잔 했다. 아들내외와 우리부부 그리고 부모님이었다. 3대가 한자리에 마주앉은 것이었다. 술은 한산 소곡주였다. 기념촬영도 했다. 부모님도 처음 맞은 손주며느리에게서 잔을 받았다. 지난번에 있었던 산수연잔치와 결혼식이 단연 화두였다. 식사를 마치고 아들내외는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날 7시30분까지 오라고 해 두었다. 아들내외는 광안리를 돌아보고 난 뒤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명절음식 등은 여동생과 모친께서 오전 내내 준비를 다해 둔 터라 특별히 더 할 일은 없었다. 모친께 당부를 해서 이웃집에서 잘 키우고 있는 천리향 한그루를 좀 받을 수 있도록 해보라고 했다. 얼마전 오랫동안 키워왔던 천리향 세 그루가 다 죽어버리고 나서 천리향을 그리워하던 터였다. 그런데 집 입구에 잘 키워놓은 천리향이 우람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욕심이 난 것이었다. 매년 왔던 명절 손님은 이번에는 오지 않았다. 막내동생네 식구들만 왔다가 저녁을 먹고 갔다. 동생만 회에 식사를 했다. 동생에게 회값의 몫을 받았다. 조카는 고3이어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내년쯤이면 둘째딸까지 서울로 가면 부부만 남게 되는 셈이었다. 이제 동생도 50을 넘긴 장년이 되었다. 내년쯤이면 외과과장의 보직을 맡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외부에서 스카우트의 제의도 있어 고민에 빠졌다는 하소연도 있었다. 세상만사 어려움이 없어 보이는 가족이었다. 만사형통으로 풀려가는 형국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았다. 정유년 중추절이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답게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 쬐였고 하늘은 청명했으며 천고마비의 계절다운 날씨였다. 오곡백과가 무르익었고 조상들에게 올릴 제수도 아낌없이 준비가 되었다. 아들이 조카에게서 이쪽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해서 소동이 있었다. 막내동생에게 픽업을 부탁하려 했는데 직접 큰댁으로 바로 오라고 연락을 한다고 해서 일단락이 되었다. 우리는 부친과 함께 차를 타고 큰댁으로 갔다. 제사를 모셨다. 병풍을 치고 제물을 올린 후 지우를 부치고 절을 올렸다. 제주는 청와대에서 온 대통령 하사주였다. 소곡주라고 했는데 알콜도수가 보통 소곡주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아들내외는 따로 잔을 올렸고 둘이서 별도로 재배했다. 제사를 모신 후 아침식사를 했다. 사촌동생네는 벌써 손주가 돌을 지났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제사는 두 군데만 들르면 되었다. 다른 곳은 미리 아침 일찍 제사를 모시고 산소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오촌 동생네는 12월에 딸의 혼사를 앞두고 있어 청첩장을 주었다. 예식장은 대전이었다. 아들 결혼식이 있은 후 3개월의 차이가 있었다.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점심을 먹고 가족끼리 대화를 했다. 한참 추석장사 씨름대회가 구미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들내외가 조금이라도 일찍 집은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 하에 귀경길을 떠났다. 무척이나 걱정이나 되는 귀경길이었다. 우리는 좀 더 앉았다가 급한 마음에 일찍 부모님 집을 떠났다. 무거운 짐은 아들의 차에 다 실었기에 우리는 덕분에 홀가분한 기분으로 KTX에 오를 수 있었다. 유명하다고 소문난 어묵집에 들러 어묵을 좀 사가지고 탑승했다. 7시 30분경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김천쯤이라고 했다. 두 시간이면 도착했을 곳에 4시간이상이 걸렸으니 언제 도착이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라고 권고했지만 제대로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도착시간 12시30분이었다. 거의 9시간이상이 소요된 셈이었다. 초행길에 며느리가 고생한 듯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컸다. 정유년 명절이 더욱 넉넉했고 풍요로웠던 것은 긴 연휴덕이었다. 모두들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했던 조상님들의 은덕처럼 풍성하고 행복했던 중추절이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