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에 지다
지난달의 3주째 금요일이었다. 한 민영방송사에 근무하는 고교동창 P국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점심식사를 하러 오라는 초대였다. 나의 수필집 네 권을 들고 갔다. 상암동 DMC역 부근이었다. 꽤 먼 곳이었고 낯선 지역이었다. 버스를 타고 전철로 환승해서 갔다. 한참 여유 있게 출발을 했는데 이리저리 헤매다보니 늦어졌다. 그녀석이 방송사 앞 조형물에서 서있었다. 3년만의 해후였다. 원당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점심식사를 같이한 이후 만남이었다. 구내식당으로 들어갔다. 20여 년 전 여의도 방송사시절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했던 기억도 있었다. 여의도 쌍둥이빌딩의 구내식당은 좀 그랬지만 방송사의 구내식은 인기메뉴였었다. 양식과 한식이 있었다. 예전에는 세 종류로 중식까지 선택할 수 있었다. 식대가 5천원이면 밥은 그 값의 두 배인 만원 식사가 나왔다. 회사에서 직원복지차원에서 지원을 하는 식이었다. 식판을 받아 배식을 받았고 식사를 하며 환담했다. 다음은 2층에 위치한 카페로 갔다. 박이추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나라에 커피를 공부하고 제대로 보급시킨 1세대 3인방에서 유일하게 현역이며 생존해 있는 이로 명성이 높은 분으로 강릉에서 커피점을 운영하며 매주 월화수에 이곳에서 커피를 내린다는 것이다. 커피점은 혼잡했다. 용케도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얘기는 청산유수였다. 최근 다녀온 이스탄불에 관한 얘기 등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한 것이 아사다 지로가 쓴 ‘칼에 지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과 함께 그 무대가 된 곳을 방일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얘기로는 한창 이 책이 판매될 때에는 지하철이 울음바다가 됐다는 것에서 충격으로 다가왔다. 끊임없이 영화화되고 드라마화 된다는 것에서 일본국민들의 향수 같은 것이 아닐까 했다. 다음날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했다. 그리고 상권은 교보잠실점에서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이 소설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문예춘추'란 잡지에 연재됐던 작품으로 단행본 출간 후 13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그리고 제13회 시바타 렌자부로 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말 개봉됐던 영화 `바람의 검 신선조'의 원작소설이다. 소설은 지금부터 130여 년 전 1860년대 말 도쿠가와 막부가 흔들리던 시절에 막부에 충성했던 무사집단 신센구미(新選組)에서 활약했던 사무라이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활약상을 그렸다. 이야기는 그랬다. 모리오까란 곳에서 사무라이로 살아가던 요시무라 간이치로란 이가 있었다. 아내와 살고 있었고 아들이 9살 딸이 2살 그리고 뱃속에 한 명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가난과 가뭄을 이겨내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지기 위해 물속에 들어간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물속에 그의 아내를 구하러 들어간 그는 아내를 구하고 절규한다. 암담한 현실에서 대의를 쫓는다는 명분도 없이 오로지 처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탈번을 감행한다. 영주는 그의 죽마고우였다. 탈번 소식을 듣고 그를 추격하기도 하지만 내버려두고 그를 떠나보낸다. 그는 영주의 서자였으나 장자가 죽는 바람에 졸지에 가문을 상속하는 횡재를 한다. 떠나는 날에 그는 아들과 작별한다. 아들은 두 살배기 딸을 업고 나왔다. 한 번만 안아주고 가라고 종용한다. 아버지는 딸을 안고 눈물의 작별을 고한다. 탈번이란 것이 다이묘를 떠나 낭인이 되는 셈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교토의 미부에 있던 신센구미에 입대한다. 그는 면접에서 무술시합을 벌이고 탁월한 칼솜씨를 보인다. 곧바로 검술사범의 지위를 차지한다. 처음 입대한 날 밤에 그는 사이토 하지메와 함께 귀가한다. 비속에서 교토거리를 걷던 중에 사이토의 도전에 직면한다. 용호쌍박의 대결이 펼쳐지고 사이토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실력에 감탄한다. 그러면서 그가 내뱉은 말은 걸작이다. 당신의 검술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특이한 사무라이였다. 난부번의 하급무사였지만 열심히 학문을 닦았고 탁월한 검술솜씨를 지니게 되었다. 타의 추종을 불후할 만큼 출중한 검술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존왕양이의 드높은 기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로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치고자 했다. 신센구미의 대원이 규율을 어겨 할복을 하게 되면 그는 가이사쿠를 담당했다. 할복을 하는 자의 목을 단칼에 내리치는 역할이었다. 그는 국장으로부터 사례를 받았고 그것을 고향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자식에게 송금했다. 그는 항상 처자식을 걱정했고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처리하고 사례를 챙겨서 송금했다. 사이토 하지메가 다른 대원을 사사로이 살해한 것을 밝혀내고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돈을 뜯어낸다. 그는 탈번을 할 때도 영주의 은밀한 도움 하에 탈번을 감행했던 것이었다. 똑같은 나이의 아들을 두었고 아들 간에도 친구로서 우정을 간직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신선조는 막부를 지키기 위해 온갖 살인과 사건을 저지른다. 결정적으로 신센구미의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이 이케다야 사건이었다. 신센구미는 교토에 명성을 드높인다. 이케다야 사건은 존왕양이의 지사들이 교토에 불을 지르고 그 혼란을 틈타 천왕(덴노)를 초슈로 데려가겠다는 모의를 하던 과정에 신센구미에 발각되어 일망타진된 일이었다.
1867년 10월 14일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통치권을 조정에 반납한다. 바쿠후[幕府] 정치는 끝이 나고 삿쵸(사쓰마 쵸슈번) 주도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정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바쿠후 타도파의 주도로 요시노부의 관위사퇴와 영지몰수를 결정했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도꾸가와 요시노부는 교토[京都]에서 오사카성[大坂城]으로 철수하여 주도권 회복을 노렸다. 1868년 1월 2일 요시노부의 바쿠후 측은 15,000명의 군사를 도바[鳥羽]·후시미[伏見]로 북상시켰고 이에 맞서 바쿠후 타도파의 신정부군은 4,500명 정도로 진을 쳤다. 그 다음 날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바쿠후 군은 병력이 많고 사기도 높았지만 졸렬한 전술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한다. 1월 4일 도바[鳥羽] 방면의 바쿠후 군은 선전을 하지만 후시미[伏見] 방면은 신정부 군의 포격을 당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사기가 떨어져 결국 신정부군의 총공격에 후퇴하고 말았다. 신센구미는 도바 후시미전투에 참가하지만 최후를 맞게 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최후의 전투에서 도망치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정면 돌파를 위해 질주한다. 수발의 총탄을 맞은 후 그는 오사카의 난부번 영지로 찾아들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영주는 할복을 명하고 자신의 명검을 주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모아두었던 돈을 자신의 집에 부쳐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할복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도 16세의 나이에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그가 전선으로 떠나면서 친구인 영주의 아들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부탁한다. 둘은 후에 결혼을 하고 남편은 의사로서 살아간다. 마지막에 태어났던 아들은 성장을 거듭하면서 농학자로 쌀을 개발하는 위치로까지 발전한다. 그리고 그는 모리오카로 돌아가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밟았던 곳들을 밟아가며 아버지의 삶을 되새긴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전 6년간 260년을 지탱했던 막부가 소멸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삶이 조명된 것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살았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위해 한 몸을 다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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