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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8 : 엄마의 애인에 대하여/꼬마목수
동분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생일이었다. 동분의 예순 번째 생일. 아침 일찍부터 김순화의 큰딸에게 전화가 왔다. 화면에 뜬 번호 보는 순간, 동분은 직감했다. 갔구나, 기어이 갔어.
“전화 받자마자 광주로 달려갔지. 가는 내내 차에서도 얼마나 울었나 몰라.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첫날인 데다가 대낮이라서 아직 조문객이 없더라구. 입구에서 순화 사진 보는 순간부터 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는데, 아휴.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사위들이 물어보더랴. 도대체 저분은 누구시냐고. 순화 딸들은 날 아는데 사위들은 처음 봤으니까, 도대체 장모님이랑 어떤 사이길래 저렇게도 서럽게 우나 싶었겄지. 딸들이 그랬댜. 우리 엄마랑 제일 친한 친구분이시라고.”
자신의 생일날 떠난 친구. 무슨 의도를 갖고 그날 눈을 감았겠냐만, 동분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거다. 잊지 말아 달라는 김순화의 간절한 바람 아니었겠느냐고. 동분은 그날 장례식장에서 김순화 영정사진을 보며 이렇게 넋두리했다.
‘아휴, 네가 기일 까먹지 말고 챙겨달라고, 기어코 내 생일에 죽었냐? 응? 그래 이년아, 내가 평생 죽을 때까지 널 잊지 않고, 네 기일 챙길게.’
“근데, 진짜로 엄마가 그려. 바쁘게 지내다가도 생일 되면 순화 생각나. 그때마다 광주까지 갈 순 없어도, 하늘 한 번씩 보면서 ‘순화야~! 거기서는 좀 편하게 지내고 있냐? 나는 좀만 더 살다가 가야겄다. 좀만 더 있다가 하늘에서 보자.’ 얘기하는 겨. 올해는 광주에도 한 번 다녀올라구.”
지난 편에서 얘기했듯, 동분에겐 평생에 걸쳐 딱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고순화와 김순화. 고순화가 동분의 인생 전반을 함께했다면, 후반은 김순화였다. 그럼 한 번 가보자. 김순화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으로.
엄마의 동반자
“엄마가 딱 마흔 살이었으니까 2000년이었네. 엄마 고향 친구 중에 양순이라고 있어. 신양순. 연락 끊겼다가 그즈음 우연히 연락이 닿았어. 그래서 한 번씩 만날 때였거든. 그때 양순이가 검정고시 학원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또래 아줌마들하고 계모임을 한다는 거여. 나한테 모임 같이 해보겠냐고 하더라? 그때 엄마가 친구도 없고, 모임 같은 것도 없을 때였거든. 그래서 나갔지. 거기서 순화를 처음 만난 거여.”
당시 김순화는 계룡시에 살았다. 계모임은 주로 대전 시내에서 했다. 계룡시에서 대전 시내로 나가는 길목에 마침 동분이 살았다. 차를 끌고 다녔던 김순화가 계모임 하러 갈 때 동분을 한 번 태웠다. 그게 인연이 됐다.
“엄마는 차가 없었으니까, 어쩌다 한 번 얻어 탄 거지. 그날 순화 차에서 이런저런 얘길 하는데 잘 통하더라? 순화도 내가 마음에 들었겄지?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계모임 하러 갈 때마다 순화가 날 태워준 거여. 순화 차 타고 오가며 친해진 거지.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냐? 호호호. 그 계모임에 60년 쥐띠가 많았거든. 그래서 양순이가 쥐띠라고 속였던 거여. 근데 또 김순화는 59년 돼지띠였어. 김순화 입장에선 양순이가 1살만 어리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친구 하자고 했을 테고, 나도 양순이 친구라니까 자연스레 순화랑 친구를 먹은 거지. 나중에 순화랑 친해져서 얘기하다 보니까 나보다 2살이나 언니인 거 있지? 그럼 뭐하냐? 벌써 친구 먹었는데. 호호호. 그래서 그냥 쭉 친구로 지낸 겨. 2살 많은 언니랑.”
나이가 실제로 2살 많기도 했지만, 김순화는 여러 면에서 동분에게 언니 같은 친구였다. 여기서 잠시, 그 당시 동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문학소녀로 사춘기 보내고 공장 다니다 일찍 결혼해 시부모 모시다가 간간이 식당 알바한 게 전부였다. 사회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동분 본인 입으로 “원래가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단다. 그 단적인 일화 한번 들어보자.
“이불 장사 처음 시작했을 때가 엄마 서른일곱이었으니까, 딱 니 나이였네. 엄마가 그때까지 장사를 해봤겄냐, 어디서 제대로 손님을 상대해봤겄냐. 그러니 누가 이불만 사러 와도 얼굴 벌게져가지고 말도 제대로 못 했다니까. 엄마가 원래 그 정도로 소심한 사람이었어. 맨날 얘기 안 하디? 순박한 신탄진 촌년이었다고. 호호호. 그나마 이불 장사 계속하면서 좀 외향적으로 바뀐 거지.”
그에 반해 김순화는 요즘 표현 빌리자면 ‘걸크러시’였다. 또래 여성보다 덩치도 좋고 성격도 화끈했다. 그 당시 김순화 직업은 경락마사지사였다.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꾸며 동네 중년 여성을 상대로 마사지 숍을 운영했다.
“순화가 완전 통뼈였거든. 너도 몇 번 봐서 알겄지만 딱 봐도 힘 좋게 생겼잖어. 손아구 힘이 얼마나 좋았다구. 순화한테 한 번 마사지 받은 아줌마들은 다른 데 가서 마사지 못 받았어. 시원찮다고. 그리고 순화가 ‘이게’ 좋았잖어.(동분은 입 옆에 손을 가져다 대고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해 보였다. 한마디로 말솜씨가 좋았단 얘기) 얼굴 못생기면 옷 잘 입는다고 칭찬해 주고, 얼굴 피부 안 좋으면 속살 뽀얗다고 얘기해주고. 어떻게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솜씨가 있었지. 그래서 순화 집 가면 항상 손님이 바글바글했어.”
그런 까닭에 우울하고 힘든 일 있어도, 김순화만 만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너무 웃어서 광대뼈가 다 아플 정도였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2005년. 동분 45살 때 김순화(오른쪽)와 백아산 정상에서.
기꺼이 슈퍼맨 흉내라도 내줄 진짜 슈퍼맨
동분 인생 전체가 파란만장했지만, 그 가운데 40대도 만만찮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던 건 모두 김순화 덕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남편 송일영이었다.
“이불 장사하기 전까지 니네 아빠는 계속 택시 몰고, 엄마는 엄마대로 알바 다녔지. 그때도 니네 아빠랑 싸우긴 했지만, 그렇게 자주 부딪히진 않았다구. 근데 이불 장사를 같이하니까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잘 때까지 죙일 붙어 있잖어. 그러니까 맨~날 싸우는 겨. 왜 싸우긴? 니네 아빠 성질 모르냐? 너도 알잖어. 그 고집을 누가 당해? 아휴~! 그래서 엄마가 니네 아빠랑 이불 장사하는 10년 동안 마음고생을 무쟈게 했다는 거 아니냐.”
거기에 두 아들의 연이은 방황. 자세한 얘긴 다음에 하고, 요약하자면 큰아들 주성이 소나기처럼 짧게 집안을 뒤집었고, 곧이어 작은아들 주홍(바로 나다)이 장마처럼 길고 지루하게 집안을 흔들었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1997년 이불 가게를 연 동분과 송일영은 IMF와 홈쇼핑에 직격탄을 맞았다. 그래도 2년을 더 버텼다. 결과적으로 2000년, 그러니까 동분 마흔 살에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부부는 2.5톤 탑차에 이불 싣고 다니며 길바닥에서 팔았다. 그런 여러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동분을 위로해준 건 김순화였다.
“니네 아빠 때문에 속상한 일 있으면 순화한테 쪼르르 달려가는 겨. 호호호. 그러면 순화가 ‘아이고 우리 착한 동분이, 네가 참아야지. 니 신랑 원래 성격 그런 걸 이제 와서 어쩌겄냐.’ 하면서 토닥토닥 안아줬었지. 순화라고 무슨 특별한 해법이 있었겄어. 그냥 나는 나대로 순화한테 하소연하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고, 순화는 순화대로 그때마다 토닥토닥 해줬던 거지.”
그런 사람이 있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 나를 위해서라면 쫄쫄이에 ‘빤주’ 입고 망토를 둘러서라도 웃겨줄 사람, 그렇게, 기꺼이 슈퍼맨 흉내라도 내줄 진짜 슈퍼맨.
2017년, 큰아들 주성의 결혼식 때 57살의 동분.
가운데 줄무늬 원피스 입은 사람이 김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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