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생 정동분 8-2/ 꼬마목수
그렇다. 동분에게 김순화는 진짜 슈퍼맨 같은 사람이었다. 김순화는 흔쾌히 지갑을 열 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스대지 않았다.
“엄마는 뭐 늘 어려웠지만, 40대 때 특히 형편이 어려웠지. 순화 만나봐야 엄마가 사줄 수 있는 건 맛있는 칼국수 정도였어. 근데 순화는 일찌감치 이혼하고 쭉 혼자 살았잖어. 마사지 숍에 손님도 많았고. 아무래도 엄마보다는 여유가 있었지. 그러니까 내가 청국장 사면 순화가 다음에 소고기 사주고, 내가 백반집 데려가면 순화는 다음에 장어 사주고 그랬었지. 엄마가 미안한 기색이라도 보이면 순화가 뭐랬는줄 아냐?”
김순화는 그때마다 동분 등을 ‘찰싹’ 때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단다.
“동분아, 친구끼리 누가 사면 좀 어떠냐? 여유 있는 사람이 사는 거지. 허허허. 동분이 너 내 말 잘 들어. 돈은 내가 벌어놓을 테니까 너는 그냥 내 옆에만 딱 붙어있어. 나중에 더 늙거든 우리 둘이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면서 살자. 내가 다~ 사줄 테니까 너 노후 걱정은 하지를 말어. 허허허허.”
그래 놓고 먼저 가버렸다며, 동분은 갑자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내가 동분, 아니 우리 엄마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엄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감정을 추스른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요즘도 김순화 생각하면 이렇게 눈물이 난다? 그만큼 순화는 나한테 특별한 친구였어. 니네 아빠가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엄마한테 순화는 인생의 동반자였어. 죽을 때까지 함께할 유일한 사람……. 내 노후 책임진다더니 왜 먼저 갔느냐고. 그런 거 하나도 필요 없으니까 옆에만 있지. 아휴.”
그렇듯 언제나 품을 내어주는 건 김순화였고, 그 품에 기대는 건 동분이었다. 그랬던 김순화가 동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일도 있었다.
“순화가 죽기 3년 전이었나. 모아둔 돈이 많았으니까, 2층짜리 단독주택 하나 사서 리모델링 싹 해가지고 살림집 겸 마사지 숍으로 꾸미겠다는 거여. 거기서 마사지 좀 더 하다가 늙으면 유유자적하면서 살겄다고. 그전까지는 아파트에서 방 하나 꾸며놓고 했었잖어. 그래서 엄마가 두 팔 걷고 나선 거지. 엄마가 뭐 순화한테 이사비용을 보태줄 수 있겄냐, 비싼 소파를 사줄 수 있겄냐. 그냥 마음으로, 몸으로 도와준 거지.”
주택 보러 다닐 때부터 매매한 주택 리모델링할 때, 리모델링 끝내고 이사 준비할 때, 이사하고 마사지 숍 오픈 준비할 때, 동분은 시간 될 때마다 쫓아다니면서 의견 보태고, 짐 싸주고, 짐 풀어주고, 손걸레 들고 바닥이라도 한 번 더 닦아줬다. 리모델링할 때 인부들에게 틈틈이 커피를 대접한 것도 동분이었다. 무슨 대단한 걸 바라서 한 일도 아니었고, 그동안 받았던 마음에 보답하는 차원도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나마 내 친구 순화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분은 기뻤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웃기겄지만, 엄마가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해가지고 손이 야무지잖어. 순화가 크게 크게는 움직여도 자잘한 건 잘 못 챙기는 스타일이었거든. 그러니까 엄마가 순화 짐 싹 정리해서 박스에 하나씩 하나씩 다 담아주고, 이사 가서도 구석구석 청소 다 해줬지. 그때마다 순화가 ‘동분이 너는 어쩜 이렇게 손이 야무지냐. 이거 다 고마워서 내가 어떻게 보답허냐.’ 그랬다니까. 그 얘기를 순화가 죽을 때까지 했어. 내가 동분이한테 보답하고 죽어야 되는데 미안해서 어뜩하냐고…….”
그렇게 20년간 동분과 김순화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 지냈다. 때 되면 함께 제철 음식 먹으러 다녔다. 계절 바뀔 때마다 꽃구경하러, 단풍 구경하러 함께 산에 올랐다. 중국이며 일본이며 단둘이 해외여행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결과적으로 김순화와의 마지막 추억이 돼버린 일본 온천여행을, 동분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일본 온천여행이 뭐 별것 있냐? 아침저녁으로 뜨거운 물에서 몸 지지다가 오는 거지. 그러니 3박 4일 동안 둘 다 피부가 뽀~애 가지고 빤짝빤짝 윤이 나는 겨. 호호호. 아침마다 순화랑 서로 얼굴 만지면서 칭찬해 주느라 바뻐. 피부 좋아졌다고. 호호호.”
2016년. 김순화(왼)와의 일본 온천여행.
두 사람이 같이 떠난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그러던 셋째 날 밤이었던가. 호텔 옥상에 있는 노천탕으로 갔다. 여자만 출입하는 노천탕이었다. 몸을 지지던 김순화가 풍경 본다며 난간에 가더니, 깔깔깔 웃으며 동분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쫓아가서 내려다봤더니 1층이 남자 노천탕인 거 있지. 일본 아저씨 하나가 홀딱 벗고 덜렁~ 덜렁~ 하면서 돌아다니더라고. 호호호. 어두운 데다가 물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는데, 순화한다는 말이 ‘야~ 저놈 저거 다 보인다. 일본 머시매 거를 우리가 언제 또 보겄냐. 허허허. 실컷 구경하고 가자.’ 엄마가 그때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나 몰라. 호호호. 순화가 항상 그랬어. 별것 아닌 거로도 그렇게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줬어.”
그리고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죽어가는 친구가 건넨 한마디
김순화 죽기 2년 전이었다. 그때 동분은 손주들(큰아들 주성의 자식들) 돌보느라, 김순화를 자주 못 만났다. 한 달에 한 번 만날까. 동분은 그즈음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만날 때마다 김순화가 몰라볼 정도로 말라 있더라는 것.
“순화 덩치가 원래 좋잖어. 근데 몸매도 늘씬해지고, 얼굴도 요만해지는 거여. 그래서 내가 순화한테 ‘야, 다이어트허냐? 왜 이렇게 살을 뺐어?’ 그랬더니, 아니랴. 일부러 살을 뺀 게 아닌데, 요즘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살이 쭉쭉 빠진다는 거여. 근데 또 자기가 보기에도 훨씬 예뻐졌거든? 갸름하니. 그래서 좋아하더라고. 살 빠지면 좋은 거 아니냐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나이 먹으면 누구나 그러하듯, 자연스레 늙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옷이 커져 입을 게 마땅찮다는 김순화 말에, 심지어 쇼핑도 함께 다녀왔다.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을까.
“소화가 자꾸 안 된다는 겨. 그즈음 순화가 술을 많이 마시고 다녔거든. 그래서 내가 ‘순화야, 너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술 좀 줄여야겄다.’ 그랬지. 그러더니 또 좀 있다가 감기가 한 달째 안 떨어진다는 겨. 그 얘기까지 들으니까 가슴이 철렁하더라고.”
동분은 김순화에게 서둘러 건강검진을 받아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던 것. 그리고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엄마가 그때도 대학병원에서 청소할 때였잖어. 한창 청소하고 있는데, 순화한테 전화가 와. 그러더니 ‘동분아, 너 내일 오후 3시에 시간 낼 수 있어? 건강검진 받았는데, 큰 병원 가보래서 내일 동분이 너 일하는 대학병원으로 예약 잡아놨어. 동분이 니가 좀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순화랑 통화하고부터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겨. 건강검진 받았는데 큰 병원 가보라고 했으면 뭐가 문제가 있단 얘기잖어.”
다음날, 김순화는 담낭암 판정을 받았다. 병원 밖으로 나와, 동분과 김순화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순화가 그러는 겨. ‘동분아, 나 진짜루 죄지은 것도 하나도 없고,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이런 병에 걸리는 거냐.’ 그 말 하는데 진짜 나도 미치겄더라고.”
김순화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그럼에도 전이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몇 달 뒤 집에서 쓰러졌다. 곧바로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동분과 함께 이사하고, 함께 청소하고, 함께 노후 보내자며 농담 주고받던 그 2층집으로 말이다.
“서울 병원에 서너 달 입원했었지. 엄마도 몇 번 갔다 왔었고. 근데, 그때 엄마가 요섭이랑 민설이(큰아들 주성의 자식들) 때문에 정신없을 때였거든. 아침에 병원 출근해서 죙일 청소하고, 집에 오면 그때부터 니네 형수랑 교대해서 애들 봐주고. 그러는 동안 니네 형수는 저녁 준비하고 집 정리하고. 그럴 때였어. 그래서 엄마가 한 열흘 정도? 순화한테 전화를 못 했어. 오랜만에 전화했더니만, 순화가 펑펑 울면서 ‘동분아, 왜 이제 전화했어. 응?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전화했어. 나 이제 죽으려나 봐. 호스피스로 가야 한데.’ 그 얘길 듣는데 아휴…….”
동분과 전화 안 한 열흘 사이, 김순화 상태가 급속도로 안 좋아졌던 것.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으니 호스피스를 알아보라고 했고, 이에 큰딸이 사는 광주 호스피스로 가게 된 거다. 동분이 전화했을 때도 큰딸이 대신 받아, 핸드폰을 귀에 대주는 형편이었단다. 그 정도로 김순화는 이미 기력을 다한 상태였다.
“나랑 전화하고 이틀 뒤인가? 광주 호스피스로 들어간 겨. 그날 내가 순화한테 전화해서 그랬지. ‘순화야, 내가 여기 일을 쉴 수 없어서 3일 있다가 내려갈 건데, 너 내 얼굴은 한 번 보고 가야될 거 아녀. 나 내려갈 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그 3일 동안 엄마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는 줄 아냐? 혹시라도 그사이에 무슨 일 생길까 봐.”
3일 뒤 동분은 광주 호스피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김순화를 본 순간, 동분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한 달 전, 서울 병원에 병문안 갔을 때만 해도 김순화는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병실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그랬던 내 친구 순화는 없고, 웬 백발의 왜소한 할머니가 거기 누워있었다. 죽을 날이 가까웠던지, 입도 마르고 눈도 말라 있었다. 눈물도 안 나오는 눈을 끔벅끔벅하면서 반갑게 동분을 쳐다보더라는 것. 큰딸이 거즈에 물을 적셔 몇 번이나 김순화 입을 닦아줬다. 그제야 김순화는 힘겹게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 동분이……. 예뻐…….”
김순화는 언제나 그랬다. 동분만 만나면 습관처럼 예쁘다는 말을 해줬다. 그게 김순화식 인사였다.
“만나면, 쭉 훑어보고 칭찬해 줄 포인트를 찾어. 내가 머리 염색했으면 우리 동분이 머리 염색했네? 아휴 예뻐. 손톱 매니큐어 발랐네? 예뻐. 옷 새로 샀구나? 아휴 동분이 예쁘네. 항상 그랬어. 만나기만 하면 뭐라도 하나 예쁘다고 해주는 게 순화의 인사법이었어.”
동분이 다녀간 다음 날, 그러니까 동분의 예순 번째 생일날 김순화는 눈을 감았다. 사는 게 힘들고 지쳐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도, 남편마저 내 편이 돼주지 않을 때도, 언제나 자신에게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 그리하여 나를 다시 나로서 살게 해준 단 한 사람. 동분에게 김순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날개 하나가 떨어진 느낌이었지. 엄마의 40~50대를 빛나게 해준 건, 니네 아빠가 아니라 순화였어. 순화 죽고 나서 엄마가 한동안은 맨날 울고 다녔거든. 집에서 밥 먹다가도 훌쩍, 병원에서 청소하다가도 훌쩍, 차 타고 가다가도 눈물 나가지고 갓길에 차 세워놓고 울고 그랬지. 엄마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순화를 못 잊을 거여…….”
40대 중반의 동분과 순화(왼쪽).
두 사람은 한동안 주말마다 등산을 다녔다.
언제였던가. 문득 궁금해 김순화 씨 안부를 물었다.
“엄마 참, 순화 아줌마는 잘 지내시지?”
“아휴~! 넌 몰랐겠구나. 순화 죽었어, 야.”
“아 그랬어? 편찮으시다더니, 그렇게 됐구나. 몰랐네…….”
그때는 왜 헤아리지 못했을까. 순화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넌 몰랐겠구나. 순화 죽었어, 야.”라고 덤덤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흘린 눈물과 삭혀야 했을 그 슬픔에 관해서 말이다.
‘김순화’에 관해 인터뷰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갓길에 차 세워놓고 울었다는 엄마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아들인 나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떨어져 살아도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차 안에서 우는 엄마 옆으로 쌩쌩 지나갔을 자동차들과, 그 익명의 운전자들과, 나는 다르지 않았다. 그런 아들의 무심함을, 나는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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