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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연재물 ( 일본이 선진국이었던 이유9)

61년생 정동분 10

by 자한형 202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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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년생 정동분 10 : 어느 여린 노름꾼의 생애/꼬마목수

김치죽과 일곱 식구

동분의 아버지 정명식은 1924,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첩의 자식이었다. 정명식 부()는 첩이었던 정명식 모()에게 방 두 칸과 부엌 딸린 까만 기와집 한 채 줘서 내보냈다. 그런 시절이었다. 정명식 모와 정명식은 그 집에서 둘이 지냈다.

동분의 어머니 김춘자는 1932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났다. 김춘자 부()는 김춘자가 어릴 때 만주로 돈 벌러 갔다가 죽었다. 김춘자 모()는 남편이 죽자, 김춘자를 시댁에 맡기고 재혼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김춘자는 친척 집을 떠돌았다. 청주에 사는 고모 집으로 간 건 16살 때다. 고모는 밥 축내지 말고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라며 중매를 섰다. 17살에 정명식과 결혼했다. 1949년의 일이다.

첩의 자식으로 겪어야 했을 정명식 설움이나 친척 집 떠돌며 삭혔을 김춘자 울분이나 크게 다를 리 없건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지 못했다. 정명식은 술과 노름으로 인생을 허비했고, 김춘자는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과 밤새 싸우는 게 일이었다. 그게 동분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이다.

우리 아부지가 날이면 날마다 술 먹고 들어왔을 거 아녀. 그럼 우리 엄니 입장에서 속상해도 상대를 안 해주면 그만일 텐데, 우리 엄니도 물러서는 성격이 아니었어. 같이 앉아서 밤새 싸우는 겨. 내가 그걸 보고 자랐으니, 얼마나 집이 싫었겄냐. 요즘 애들 같으면 벌써 가출하고 방황했을 겨. 나도 하루빨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뤄졌다. 정명식과 김춘자는 1953년 첫째 딸 동순을 시작으로 슬하에 5남매를 뒀다. 5남매 가운데 넷째로 동분이 태어난 건 19613월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덕동 까만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동분 아버지 직장은 전매청이었다. 참고로 전매청은 담배홍삼 및 홍삼 제품의 전매와 인삼 행정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재무부의 외청이었다. 한국전매공사(1987)-한국담배인삼공사(1988)-KT&G(2002)의 전신이다. 동분 아버지는 말하자면 준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하여, 그럭저럭 먹고 살 만큼은 벌었다.

그럼 뭐하냐? 맨날 술 아니면 노름이었는데. 우리 엄니 하는 말이 죽는 그날까지 월급 한 번 제대로 갖다준 적이 없다는 겨. 그러니까 우리 엄니가 무쟈게 고생했지. 없는 살림에 뭔 놈의 애는 또 그렇게 줄줄이 낳아가지고, 우리 집에 식구가 많았잖어. 할머니, 아부지, 엄니, 언니, 큰오빠, 작은오빠, 나까지 일곱 식구였지. 내 동생 현희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태어났으니께.”

그런 아버지 대신해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를 다녔다. 집에서 만든 두부와 참기름 등을 팔았던 거 같다고, 동분은 기억한다. 그걸로 일곱 식구가 먹고살았다. 그러니, 형편이야 안 봐도 빤하다. 동분은 까만 기와집떠올리면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다.

우리 엄니가 해 질 무렵 장사 끝내고 집 올 때면 꼭 주전부리 같은 걸 사가지고 왔어. 우리 집이 언덕 위에 있었는데, 엄니 올 때 되면 저 언덕 밑에까지 내려가서 기다리는 겨. 호호호. 그럼 엄니가 뭐 하러 추운데 나와서 기다렸냐고 하면서도 내 손에 과자를 꼭 쥐여 줬어. 그래도 늘 배가 고팠지. 먹을 게 귀할 때였으니까.”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매일 저녁 김치죽을 쒔다. 큰 솥단지에 쌀 한 주먹과 국수 조금, 김치 넣고, 물 잔뜩 부어 팔팔 끓이는 거다. 그렇게 해야 일곱 식구가 겨우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어렸던 동분은 그 김치죽이 너무나 싫었다.

어린 마음에 배는 고파도 그건 그렇게 먹기가 싫었어. 그래봐야 예닐곱 살이었으니까. 저녁 먹을 때 되면 벌써부터 삐져가지고 윗목에 돌아앉아 있는 겨. 호호호. 그럼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착한 동분이 일루 와서 조금만 먹어봐라.’ 그럼 마지못해 한 숟갈 먹고 그랬지. 할머니가 우리 엄니한테는 못된 시어머니였어도 나한테는 엄청 잘해줬어. 현희 태어나기 전이니까 내가 막둥이라 더 예뻐했던 거 같어.”

그런 손녀가 안쓰러웠던지, 그때마다 할머니는 화롯불에 고구마나 밤 같은 걸 구워주곤 했다. 그래도 배가 고픈 날이면 동분은 할머니를 졸랐다. 까만 기와집 아래로 부잣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 마당에 과실수가 많았다. 철마다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그게 먹고 싶었던 거다.

아부지는 전매청 다니고, 엄니는 장사 가고, 언니랑 오빠들은 다 학교 다닐 때였으니까 낮에는 할머니랑 둘이 있었거든. 하루 죙일 할머니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채는 겨. 그럼 할머니가 아이고 우리 동분이 때문에 미치겄다하면서도 내 손 잡고 그 부잣집으로 갔어. 호호호. 그렇게 졸라서 기어코 열매 몇 개를 얻어먹는 겨. 겨울에는 고드름도 많이 따먹었지. 그때는 왜 그렇게 배가 고팠나 몰라.”

그렇게나 동분을 아꼈던 할머니가 죽은 건 동분 일곱 살 때다. 어렸지만, 그때의 상실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언덕 위에 서서 할머니 모신 상여가 멀어지는 걸 지켜봤던 기억, 서럽게 울며 할머니, 할머니~!!” 하고 외쳤던 기억 말이다.

어쨌거나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 모든 불행이 아부지 때문인 것 같았지.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우리 엄니가 고생하는 것도, 우리가 맨날 김치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다 아부지가 술 먹고 노름해서 생긴 불행처럼 느껴졌지.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호호호. 아무튼 그때는 아부지를 굉장히 원망했던 거 같어.”

1967년 동분 7살 때. 오른쪽 아래 꼬마가 동분.

오른쪽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동분의 언니 15살 동순.

동분의 어릴 때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불행은 불행도 아니었다. 진짜 불행은 동분 아홉 살, 대전시 대덕구 신탄진동(이하 신탄진)으로 이사 오면서 시작됐다.

노름꾼 아버지는 밥을 남겼다

동분이 아홉 살이던 1969년 초여름. 동분 아버지가 신탄진 전매청으로 발령이 났다. 하늘은 알았던 걸까. 동분 가족의 고달픈 앞날을. 이사 가던 날,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동분은 기억한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신탄진 집을 보고 동분은 깜짝 놀랐다. 나고 자란 까만 기와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누추했다.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까, 우리 집 유일한 재산이었던 그 까만 기와집에 빚이 잔뜩 깔려있었다더라고. 무슨 빚이긴? 아부지가 노름해서 진 빚이지. 그러니까 그 집 팔아서 빚 갚고, 마당도 없는 쬐만한 집으로 이사를 왔던 겨.”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던 노름빚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신탄진 전매청에 6개월이나 다녔을까. 어느 날부터 아버지가 출근을 안 하더라는 것. 사연인즉, 노름빚이 남아 있었고, 빚쟁이가 날이면 날마다 신탄진 전매청으로 찾아와 아버지를 못살게 굴었단다. 결국, 일을 저질러 버렸다. 회사에 덜컥 사표를 던진 거다. 그렇게 받은 퇴직금으로 남은 빚을 다 털고 백수가 돼버렸으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질 수밖에.

학교 갔다 왔더니, 우리 엄니가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겨. 엄니 한다는 말이, 나한테 미리 얘기라도 했으면 내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빚을 갚았을 텐데,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직장을 그만둬 버리면 어뜩하냐는 거여. 그때 내 동생 현희가 돌도 안 지났을 때니까, 엄니 입장에선 막막한 심정이었겄지.”

동분 어머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분 아버지는 그때부터 술을 더 찾았다. 단 하루도 맨정신인 걸 못 봤다. 심지어 동분의 국민학교 운동회 때도 술에 취해 돌아다녔다. 동분은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신탄진엔 신탄진국민학교 하나밖에 없었다. 신탄진의 모든 아이가 신탄진국민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에만 십여 학급이 있었고, 한 학급 당 50~60명이었으니, 전교생이 3,000~4,000명은 있었나 보다. 그러니 신탄진국민학교 운동회는 단순한 운동회가 아니라, 말하자면 마을 축제였던 셈.

신탄진 초등학교의 모습. 현존하는 대전지역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다.

학교 입구부터 운동장까지 사람이 바글바글했지. 그날은 신탄진 사람이 전부 모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께. 새벽부터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까는 겨. 그래 놓고 애들한테 엄마 여기에 있을 거니까, 이따 점심때 여기로 와하는 거여. 그렇게 알려주지 않으면 나중에 찾지도 못햐. 그래가지고 점심시간에 엄니 찾아가는데, 저쪽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겨. 뭔 일인가 하고 봤더니, 글쎄! 아부지여. 아침부터 얼마나 술을 드셨나, 그 사람 많은 길바닥 한가운데 대자로 뻗어서 주무시고 있는 겨. 아휴. 애들이 ~! 동분아, 니네 아부지 여기서 주무신다~~!!’ 하는데, 어린 마음에 내가 얼마나 창피하고 속상했겄냐. 그 정도로 우리 아부지가 술을 많이 드셨어.”

그때는 그런 아버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안 형편이 이렇게나 어렵고, 가족들이 이만큼이나 고생하는데 아버지는 왜 술만 드시는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동분은 가끔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조금,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부지가 술만 안 드시면 진짜 새색시 같은 사람이었거든. 엄니랑도 술 드셔야 싸우지, 술 안 드시면 세상 자상한 남편이고 아빠였어. 그렇게 가부장적인 시대였어도 우리 아부지는 자식들한테 그 흔한 욕 한 번 안 했고, 회초리 한 번 안 들었어. 나중에 늙어서도 자식들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을 안 하셨어. 우리 아부지가 평~생 밥 한 공기를 다 안 드신 양반이거든. 왜 그랬는 줄 아냐?”

미우나 고우나 가장이라고, 동분 어머니는 항상 남편 밥을 따로 했다. 자신과 새끼들은 꽁보리밥 먹을지언정, 남편에겐 늘 하얀 쌀밥을 대접했다. 동분 아버지는 그 하얀 쌀밥을 항상 절반씩 남겼다.

내가 막내였을 땐 나한테, 내 동생 현희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현희한테, 나중에 우리 큰오빠가 엄니랑 아부지 모시고 살 땐 손주들한테 그 흰쌀밥을 냄겨줬던 거여. 나도 어릴 때 약아가지고 꽁보리밥 안 먹고, 아부지 입만 쳐다보고 있는 거여. 그럼 아부지가 항상 절반쯤 냄기면서 이런다. ‘아부지는 배불러서 그만 먹을란다. 동분아, 이거 아부지 밥 갖다 먹어라.’ 그러면 쪼로로 가서 아부지가 냄긴 흰쌀밥을 먹는 거지.”

그런 아버지였다. 동분은 지금도 아버지가 따줬던 홍시 맛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가을만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동네 다니며 홍시를 몇 개씩 따왔다. 그걸 새하얀 접시에 하나씩 담아 자식들 머리맡에 놔주곤 했다. 동분이 부스스 일어나면 우리 동분이 배고프지? 이거 먹어봐라, 맞춤하게 익었다.”라며 밥숟갈로 홍시를 푸~욱 떠 동분 입에 넣어주곤 했다.

동분의 아버지 정명식(당시 50), 어머니 김춘자(당시 40).

대전 보문산 시민공원에서 찍은 사진.

내가 살아보니까, 우리 아부지처럼 말랑말랑하고 여리여리한 사람들 중에서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 사는 게 힘드니까 술을 찾고, 그러니까 더 사는 게 힘들어지고, 그러니까 더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는 거지. 전매청 그만둔 다음부터 술을 더 찾았던 것도 아마 그래서였던 거 같어. 가장으로서 무능한 당신 스스로를 맨 정신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겄지. 의지력 강하고 추진력 있는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훌훌 털어내지만,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영영 주저앉아버리기도 하거든. 내가 지금, 우리 아부지 잘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녀. 세상 사람들은 우리 아부지를 무능한 가장이었다고 욕할는지 모르겄지만, 나는 그냥……. 가끔 우리 아부지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들어. 끝끝내 펴보지 못하고 사그라진 꽃망울 같다고 할까. 그런 인생이었던 거 같어, 우리 아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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