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역사 (11) 한국바둑의 태동/이재형
바둑의 불모지에서 이어진 명맥
일본 바둑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제 우리나라 바둑을 되돌아보자. 우리나라도 바둑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많을 만한데, 체계적인 기록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소재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국 고문헌이나 삼국사기 등에서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는 바둑·투호(投壺)와 같은 유희를 좋아한다”라고 하였고, 또 『후한서(後漢書)』에는 “백제에는 여러 유희가 있는데 바둑 두는 것을 특히 숭상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 첩자인 승려 도림(道琳)의 꾐에 빠져 바둑을 너무 즐긴 나머지 백제의 내정이 어지러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도림과 개로왕
통일신라 제34대 효성왕 때 당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단장에게 “..... 신라 사람들은 바둑을 잘 둔다고 하니 바둑을 잘 두는 양계응(楊季膺)을 부사로 대동하라”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양계응이 신라에 와서는 신라의 고수들과 승부를 겨뤄 모두 이겼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 사람으로서 박구(朴球)라는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황제의 바둑담당 비서를 하였다고 한다. 바둑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특히 장자(長子)가 아닌 왕자들은 풍류를 즐겼다. 풍류는 물론 재미도 있지만, 세자가 아닌 왕자가 너무 똑똑할 경우 역모(逆謀)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으므로,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도 풍류를 즐기는 것이 좋았다. 바둑도 풍류 가운데 하나의 도락이었다.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장기·바둑 등의 도락을 즐겼다고 하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대원군은 전국에서 고수들을 초청하여 바둑을 두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바둑고수들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바둑은 순장(順丈) 바둑이다. 현대 바둑판은 빈 바둑판에 흑백의 순서로 처음부터 착수해 나간다. 이에 비해 순장바둑에서는 바둑판의 각 성점(星點)에 17개의 흑백 돌을 미리 놓아두고 바둑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순장바둑에서는 초반 포석(布石)이 필요 없으며, 곧바로 치열한 싸움에 돌입하는 경향이 강하다. 전체적인 운영을 어떻게 할까, 초반 설계를 어떻게 할까 등을 고려할 형편이 못된다.
사실 순장바둑은 우리나라 바둑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다.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 말엽에 현대바둑의 규칙이 정립되기 전까지는 중국이나 한국, 일본 모두 미리 일정수의 돌을 놓고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즉, 현대바둑 이전에는 동양 3국이 모두 순장바둑을 두었던 셈이다.
일본이 바둑실력을 세분하여 측정하는 단급 위 제도를 도입한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바둑실력을 세분화하지 않고 뭉뚱그려 구분하였다. 실력이 아주 강한 사람, 즉 전국적으로 통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을 국수(國手)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국수라면 지금으로 치면 아마추어 강자쯤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각 도에서 정상급에 이르는 사람들을 도기(道棋), 군에서 정상급 정도의 사람들을 군기(群棋), 면 수준에서 잘 두는 사람을 면기(面棋)라고 불렀다. 징비록으로 유명한 서애 유성룡이 바둑을 잘 두어 국수급에 해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국수나 도기, 군기 등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기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이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대체적으로 국수급의 실력이 현재의 아마추어 강자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옛날 국수급들이 현재의 아마추어 강자 수준에는 도저히 이르지 못하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안평대군과 대원군
19세기까지 국수는 기껏해야 현재의 3-4급 수준,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1-2급 정도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바둑을 체계적으로 배울 서적이나 또 바둑을 지도할 사람들이 제대로 없었으므로 혼자 독학을 하거나 어깨너머로 배워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절대로 현대의 아마추어 고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아마추어 강자들은 맨날 바둑만 두는 사람들이다. 옛날 실력을 제대로 갖춘 변변한 상대도 없는 환경에서 현대의 아마추어 강자 수준의 바둑실력을 키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바둑은 오락 내지는 소일거리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바둑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도, 기록에 관한 체계적인 관리도 없었다. 옛사람들이 어떤 바둑을 두었는지, 그 실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바둑인구는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여러 문헌에서 곁가지로 잠깐 언급되는 정도이다.
또 양반계층이나 부자들이 여흥으로 두는 바둑을 제외하고, 대개 돈 많은 한량들이 내기바둑을 두는 정도였다. 돈 많은 한량들이 내기바둑을 두니까 이것을 노리고 본격적으로 바둑을 본업으로 삼고 도박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 현대바둑을 개척한 조남철 선생의 회고록을 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전문기사인 자기를 노름꾼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1960년대 초반에서도 이러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잡기 아니면 도박, 이 정도가 일반 사람들이 바둑을 보는 인식이었을 것이다.